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모음

 

주님 수난 성지주일




        34. 전석대 몬시뇰(다)/59


        35. 박정우 신부(다)/61           36. 홍금표 신부(다)/63


        37. 조원길 신부(다)/65           38. 조순창 신부(다)/67


        39. 김정진 신부(다)/68           40. 함세웅 신부(다)/70


        41. 강영구 신부(다)/71           42. 강길웅 신부(다)/74


        43. 신은근 신부(다)/76           44. 예수 수난기/77


        45. 예수 수난기/78                 46. 예수 수난기/79


        47. 예수 수난기/80




35.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56 (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전석재 몬시뇰




교회는 오늘부터 부활 전일까지를 성주간이라 하여 인류구원의 대역사가 눈앞에 임박하였음을 신자들에게 알리고 특히 마지막 목, 금, 토 3일은 하느님의 이 위대하고 신비로운 사업이 완벽하게 성취되었음을 되새기면서 깊은 신앙심으로 한없는 감격과 감사를 드리게 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그 값진 수난의 길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여러 가지 장엄하고 의미심장한 예절을 거행하게 됩니다.




성주간의 첫날인 오늘, 우리는 수난사를 봉독하면서 그 서장격인 첫 부분,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광경과 그 뜻을 묵상하는 것은 성삼일에 연출될 하느님의 창작 대드라마를 우리로 하여금 실효 있게 느끼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데 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입성은 예수님께서 베타니아 마을을 나오시어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시고 군중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 시내를 향해 가시는 그리스도와, 손에 손에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환호성을 올리고 자기 옷을 길에 깔기까지 하면서 열광하는 군중, 이것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광경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군중이 한 집단을 이루어 행렬은 시작되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마음가는 곳은 양편이 전연 다른 상반된 방향이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자기네들의 임금으로 옹립하여 로마제국의 학정의 굴레를 벗고 독립과 주권을 되찾아 온 세상을 통치하는 환상과 희망에 마음이 부풀대로 부풀어 열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채워 드리려고, 죽기 전에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도성을 향해 나아가고 계셨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완전한 패배자가 되어야 했고, 모든 초월적 힘은 송두리째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가장 무능력한 자가 되어야 했고, 어처구니없는 모함과 고발에 대해서 한 마디 항변이나 변호도 하지 말아야 했고, 모든 사람의 증오와 저주를 받은 다음, 마침내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전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하소연을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의도와 그처럼 열광하던 유다인들의 의도는 양극으로 대립하였기에 수일 후에 나타난 결과는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왕중왕으로 환영하던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리라고 절규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의 판단은 하느님의 지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도저히 일치될 수 없음을 엿보게 됩니다.


유다인들이 라자로의 부활을 목격하고 경탄하고 흥분한 그 마음, 나라를 살리려는 애국하는 마음이나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려는 종교열에서 나온 심정, 그 어느 것도 비난받을 것이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계획과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언제나, 어떤 일에서나 나의 인간적 판단을 앞세워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이 내 안에서 이룩하시려는 깊은 의도는 무시해 버리고, 만사가 내 뜻대로 되면 하느님 덕분이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떠나버리는 심정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은 사람이면 거의 모두가 가지는 종교심의 작태는 될 망정 하느님과 교회가 요구하는 신앙심은 아닌 것입니다.




속담에서처럼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태도의 신앙은 신앙이라 부를 가치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 위안과 만족을 찾는 종교인은 될 수 있지만, 하느님 안에 투신하고 헌신하는 신앙인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성주간을 시작하는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멸시와 증오로 돌변해 버린 유다인들의 태도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마음이나 생활태도 속에 과연 겨자씨 만한 신앙이라도 있는가를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이 신앙 없이는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부활의 그 절대적인 힘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효력도 주지 못하고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36.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19,28-40 (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박정우 신부




“호산나 다윗의 후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이스라엘 왕, 높은 데에 호산나. “오늘 전례는 군중들이 올리브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사건을 기념하는 장엄한 행렬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곧 군중의 환호는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는 잔인한 외침으로 변하게 되고, 무력하게 죽어가는 저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해줍니다.


이제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의 장엄한 예절은, 그동안의 사순절 여정을 완성하면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을 드러내 줄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어느 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고백에는 메시아이신 예수에게서 성취되는 이스라엘의 희망과 약속의 모든 구원의 역사가 생생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나타나 이스라엘을 인도하리라고 예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인물은 ‘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 또 오늘 1독서에서처럼 ‘야훼의 종’ 등의 이름으로도 예언된 분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의 묘사처럼 천상적 인물로,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권능으로 심판할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야훼의 종’은 권능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에게 순종함으로써, 사람들의 환호에 찬 영접이 아니라, 오히려 천대와 박해를 받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고통과 죽음을 온순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이 오리라고 예언자는 예고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의 권한은 ‘야훼의 종’의 사명을 특징짓는 자기비허(自己脾虛)와 고통을 통해 행사됨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오해


그러나 베드로와 사도들은,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신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했을 때, 제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당황해합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메시아’는 영광스런 인물이어야지, 패배 당하여 죽을 사람이라는 것은 말도 안될 일이었습니다.


참 ‘메시아’의 길을 믿으려 하지 않는 베드로를 예수께서는 호되게 꾸짖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의 제자들이, 하느님의 계획과 그분의 메시아 사명을 이해하려면 아직도 많은 것을 배우고 겪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루살렘과 죽음에 이르는 도정을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것과, 생명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버려야 하는 복음의 논리를 따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야훼의 종’으로서의 메시아


예수께서는 공생활 이후, 끊임없이 ‘야훼의 종’의 소명과는 반대되는 메시아 사상을 선택하라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사순 1주일 복음에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유혹당하시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사탄은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라든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든가 하는 유혹으로, 군중이 기대하던 거짓 메시아 사상을 제안함으로써, 또한 모든 백성의 지배자가 되는 세속적 성공의 메시아가 되라고 유혹함으로써, 예수를 참 사명으로부터 이탈시키고자 애썼습니다.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이 유혹을 배척하시면서, 야훼의 종으로서 자신을 송두리째 불사르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루가 복음에 따른 예수의 수난기를 들려줍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의회 앞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죄, 거짓 예언자로 고소당하셨고, 빌라도 앞에서는 선동가로서 고발당하셨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인가? 대사제와 율법학자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께 질문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인가?”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가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그것은 네 말이다.”




군중들도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정체를 시험하며 조롱합니다.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하며 소리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 대답은 부활 사건 안에서 힘있게 드러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인간의 삶에 철저히 동참하신 하느님, 사람을 위하여 사람이 되실 만큼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 우리가 죄를 극복하고 자신 안에서 새 힘을 되찾게 해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비허(自己脾虛)의 신비


제2독서인 필립비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자기비허의 신비를 참으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세상의 온갖 것보다 더 강하신 분이, 무한이 나약한 분으로 나타나셔서, 우리 인간의 약함을 짊어지시고 우리와 일치되기를 원하시고, 이리하여 그분의 무한한 힘에까지 우리를 들어올리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몸소 짊어지시고, 우리 탓을 대신 떠맡으신 하느님의 종이십니다. 당신은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당신 목숨을 대속물로 바치러 오신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우리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는 고백은, 곧 그분의 자기비허의 삶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의미합니다. 사랑 때문에 기꺼이 감수하는 고통, 사랑 때문에 기꺼이 바치는 생명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신뢰를 두었기에, 고통과 수모를 감수하는 야훼의 종과 같이, 자신을 낮추는 겸허와, 비움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죽어야만 사는 부활의 신비!


하느님께서는 그 신비에 우리도 동참하도록 초대하십니다.












37.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19,28-40 (다)  부하뇌동하는 군중


홍금표 신부




논어 ‘자로’ 편에,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앓고, 소인은 부하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란 말이 나온다. 부화뇌동이란, 사전적인 풀이로, 우뢰가 울리면 만물이 이에 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도 생각해 보지 않고서, 경솔하게 처신하는 것을 말하는 행동인데,「화합할 수 있느냐?」 하는 점과, 더불어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화합과 부화뇌동의 차이가 무엇이냐 라는 문제는 미묘한 문제이긴 하지만, 성질이 급한 한국인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가 아닌가 여겨진다.


 


우리는 오늘, 주님 수난성지주일을 지내게 된다. 이날 전례는 크게 두 가지 사건을 기념한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과, 두 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게 된다.


예루살렘 입성 사건: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 사건의 의미를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4가지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첫째 의미는/ 예수께서는 즈가리야 9,9. 창세기 49,11에 예언된바와 같이, 새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겸손한 임금님으로서, 그들의 희망을 채워줄 왕 메시아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둘째로/ 기원전 841년 예후가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할 때, 사람들이 자기네 겉옷을 깔았듯이, 이제 임금이신 예수께 대해서도 같은 사랑과 존경을 보이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은 시편 118,26에 예고된 대로, 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라는 점,


넷째는/ 예수는 다윗의 나라, 즉 메시아 왕정을 세우러 오시는 임금임을 드러내는 사건이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다.


 


그리고 수난기: 재판 중에 빌라도와 예수님이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는, 바로 유다인의 왕이라는 문제이다. 결국 이 두분의 대화에서는 아무런 해답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결국 예수님은「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되고, 이 수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때 되풀이해서 읽게 되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이 부분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는 예수님은 분명 유다인의 왕,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신 왕임이 분명하지만, 그분이 앉으실 왕좌는 화려한 옥좌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이요, 우리가 섬길 메시아 왕은 십자가의 예수님이고, 그분이 우리의 진정한 왕임을 보여 주고자 하는 의미가 아닐까 여겨진다. 어떻든 이 두 사건은 모두 예수님이 왕이심을 분명 하게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왕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음도 역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이 두가지 사 건을 놓고 벌어지는 군중들의 양극단의 모습이다.


예루살렘 입성 때는/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고 기쁨을 감추지 못해「주의 이름 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을 외치던 군중들이,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는/ 그들의 모습은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이들의 모습이 그 것이다. 이 모습은 몇 사람에 의해 조종되는 군중심리의 거짓성과 부화뇌동하는 그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예수님 시대 군중들만이 아니라,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흔히 이야기하기를 한국인들은 성질이 급하고 흥분을 잘한다고 한다.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언론과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흥분하여「이래서는안된다」「저렇게 해야한다」라고, 한바탕 호들갑을 떨다가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잊어버리고, 똑같은 사건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군중심리의 한 단면일 것이다. 아마도 이 같은 모습의 한 원인은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관이나, 자기 중심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보여준 우리 사회 지도자들의 모습 때문이라는데, 많은 이들이 찬성하고 있다.


 


한일 합방 때, 앞장서 한일 합방만이 우리들의 살길이라고 선전하고 앞장섰던 그 인물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독립된 나라의 지도자로 자리바꿈하고, 똑같은 그들이 박정희 시대에는 유신 헌법만이 살길이라고, 그리고 전두환 시대나 그 이후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변신과 타협만이 출세와 현실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경험한 사회이기에, 일생을 살면서 지켜야할 가치관이나,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원칙이란 교과서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 일상의 삶에서는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변화와 타협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과 정신 문화사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이들의 공통점은,「자기중심을 지키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의 가치실현을 한 이들이라는 점」을, 성주간을 맞으면서 한번 묵상해 볼만한 주제가 아닌가 여겨진다.












38.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56 (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조원길 신부




지난 해 11월 16일 부산엘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뜻밖에 대구에 사는 교우를 만나 잠깐 들렸다가 귀가하기로 하고 불과 2시간의 볼 일을 마치고 밤차를 타려 했을 때 생긴 일이었습니다.




열차 시간이 변경된 줄을 모르고 생각했던 대로 열차를 이용하지 못하고 마지막 고속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녁 7시 25분, 차표를 두 장 사 가지고 대구-대전간을 운행하는 한일고속버스(경기 바 2007)에 그 교우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안도의 숨을 쉬고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20분이 지나도 차에는 운전기사도 안내양도 눈에 띄지를 않아 점점 안타까워하는 승객들의 표정을 역력히 볼 수 있을 때였습니다.




안내양이 뒤늦게 올라오더니 “이 차는 고장이 나서 못 가니 다른 차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요금은 반환해 드리겠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어안이 벙벙해지더군요. “아니, 고장이 난 차에 타라고 표는 왜 팔았는가? 차 앞에 엄연히 몇 시에 출발한다고 게시판을 세워놓고 승객을 끌던 것이 장난이었단 말인가? 고장났다는 것은 또 언제 확인을 한 것인지…? 막차라서 다른 차도 없으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나 나름대로의 판단은, “불과 15명의 승객으로서는 기름 값도 못된다”는 결론밖에, 그 이유 때문에 한 다급한 변명이, 결국 고장이라고 선언하게 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승객들은 모두 화가 났습니다. “배차 책임자 불러와! 한일고속 대구영리자 오라고 해!”하며 성급한 승객 몇 명은 사무실로 뛰어가 야단이었습니다. 혼란이 빚자 25분이나 늦게 고장난 차라고 하던 차가 결국 출발했습니다.


중동의 석유파동의 여파가 이처럼 가파른 인심파동으로 변해가니, 말이 유류파동이라지만 인정과 인심의 파동에 이르기까지 크고 또 작게 별의 별 파동이 다 일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도 불과 몇 개월 동안에 물가파동이다, … 그야말로 파동의 물결 속에 사는 듯도 합니다. 교회전례 안에 있어 오늘은 우리 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기념식을 갖는 날입니다. 여기서도 오늘날의 현상을 볼 수 있는 듯도 합니다. 아마도 당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대한 민중의 파동, 믿음의 파동, 기적의 파동, 환영파동 등 여러 파동이 있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파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는 신앙의 파동에는 적응치 못하니, 어쩌면 둔감한 파동에 접해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순절의 절정을 향하는 오늘, 우리 신앙인들 각자가 처해 있는 파동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또 어떻게 극복할 것입니까? 재물과 명예와 권세와 권위와 또한 죄악에 둔감하여 있으면서 무사안일을 고수하는 자세가 혹시 우리의 생활이 아닌지 반성해야겠습니다.




안일을 취하여 썩고 죽어 가는 신앙의 생명에 파동을 감지할 줄 모르는 우리가 아닌지 반성하여 봅시다. 인생의 내적 입장에서 자기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사회생활에서 말입니다. 오늘의 이 시간이 예루살렘 입성의 기념식으로만 갖는 몇 분간의 시간이어야 하겠습니까? 신앙인 모두의 삶에 있어서 신앙생활의 파동을 느끼고 정리하는 각자로서 임하는 오늘이 됩시다. 혼란이 있은 후에 고요함이 생기고 홍수의 대심판이 있은 후에 새 삶이 시작된다면 이 신앙의 투쟁을, 고통을, 유혹을, 비참을 정면으로 당당히 대하여 승리함이 신앙인의 임무요 또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성지를 손에 들고 그리스도를 환호하는 우리의 외적인 행사가 직접적인 신앙의 생명이 용솟음치고, 또한 신앙이 발전되고 번영하는 신앙생활 파동의 과정이 되도록 힘써 노력합시다. 여기에 오늘의 이 전례의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












39.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56 (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조순창 신부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안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지난 2월 22일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 사순절이 막바지에 이르러, 금주로써 그 끝을 맺게 됩니다. 특별히 성 목요일의 주의 만찬식과, 성 금요일의 주의 수난 예식과, 성 토요일의 부활 전야 전례로써 그 절정을 이루며, 예수 부활 대축일을 기쁘게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은 먼저, 1부는 성지 축성 예식으로 예수님께 환호하며, 왕으로 받아들어 모시는 경사로움을 나타냄으로써, 수난 복음의 낭독으로 우리를 위한 수난의 길을 스스로 택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게 됩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아넣는 죄인들의 슬픈 모습을 보는 2부의 미사 예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며, 애써 찾으면, 그 기쁨을 이웃과 나누시는 분이시며, 죄인과 병자와 불구자와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시며, 그들을 위로하여 주시고, 용기를 주시며, 사죄와 건강과 자유를 주시어, ‘의사가 건강한 이들에게보다 병자에게 필요하다’는 말씀과 아울러, 그것을 실증하여 주시며, “길이요, 진리이요, 생명이다.”고 하셨으되, 예수님을 따르는 선의의 서민 대중이 없었고, 한편은 민심선동과 “하느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트집 잡아서, 사기 모함 끝에 예수님을 불신하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넣는 권력자들과 그들의 앞잡이들이 있었습니다. 유다인은 빨마 가지를 들었으나, 망치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며,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살아가는 교우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있으며,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제 욕심만 따라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유다인은 못 박히는 예수님을 보고, 박수를 치며 주먹질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시면 함께 괴롭고, 예수님이 기쁘시면 함께 기뻐하는 교우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참회와 용서와 나눔과 봉사의 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합시다.




절대로 철새처럼 편리한 대로 믿는 기회주의 신자, 마음 내키면 성당에 나오는 감상주의 신자, 겉으로는 신자인데, 생활이 맞갖지 못한 위선적 신자, 유혹에 약하고 제 뜻을 따르려 신앙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배신적 신자, 은혜를 받기만 원하는 장사 속 신자가 되지 말고, 누가 뭐래도 하느님 말씀만 듣고, 세월이 흘러 딴 세상이 되어도 예수님 가르침만 따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 먹은 마음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신앙의 길을 가도록 다같이 다짐합시다.




그 신앙의 길에 갖가지 시련이나 유혹이나 게으름의 십자가가 있어도 십자가의 의미와 신비를 깨닫고 꾸준히 살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거기서 참 기쁨과 참 행복과 참 구원과 참 부활을 누립시다.












40.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56 (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김정진 신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성지)주일입니다. 오늘부터 다음 부활주일까지를 성주간이라 하며 우리 신자들이 문자 그대로 성스럽게 지내야 될 한 주간이며 또한 성 목요일부터 시작되는 성 삼일의 장엄한 예식에 모두 참여하며 부활의 경축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지주일의 예식에는 환희와 비애가 섞여 있습니다. 즉 오늘 당나귀를 타시고 제자와 군중들의 호위와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개선을 기뻐하면서도 한편 곧 당하셔야 할 예수님의 수난에 슬픔을 미사 중에 우리는 수난 복음을 읽음으로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언급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메시아이시고 영광된 왕으로 오시며 또한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는 성부의 독생 성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광명과 암영, 환희와 비애, 영광과 수난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수난과 죽으심을 며칠 앞두고 구약시대의 왕들이 행하던 전통적 형식으로, 즉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심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이신 왕이심을 생생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백성들은 자기네들의 왕을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호산나!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이스라엘의 왕이여, 찬미 받으소서! 이처럼 대환영을 받으시며 개선 장군과 같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닷새 후에는 동일한 백성들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영광 속에 부활하십니다.




오늘 루가 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새끼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온 후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고 예수님을 그 위에 타시게 하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놓고 또 어떤 사람들은 들에서 생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아놓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신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온 예루살렘 도시가 끓었습니다. 빠스카 축제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운집한 유대인 대군중은 손에 손에 빨마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하며 환성을 올렸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개선장군이 입성하는 것과 같이 대대적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슬픈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영광과 환영받으심에 크게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민중을 선동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매혹된 군중은 호산나, 만세의 환호성 대신에 예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뿐 아니라 며칠 후에는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외치며 날뛰었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인심은 이렇게 간사하고 조석변인가 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드디어 갈바리아의 십자가 희생을 바치시게 됩니다.




오늘 둘째 부분인 미사성제의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 수난에 관한 정신입니다. 먼저 독서에서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나의 등을,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당하지 않으려고 나의 얼굴을 감추지 않는다”(이사 50,6)고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당신의 모든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 2,7-8)고 간파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시고 이 재판소에서 저 재판소로 질질 끌려 다니셨으며 가장 가까운 제자인 베드로로부터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루가 22,57)하는 배신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더구나 제자인 유다에게 극심한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또한 채찍으로 매를 맞으셨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십자가를 지시고 급기야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통해서 인류의 죄악을 속죄하시고 죄의 용서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군중의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성지 주일의 상징이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영원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통해서 빨마 가지만 손에 들고 환영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 안에서 생활하면서 그분을 찬양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며 그분의 충실한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아멘.












41.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19,28-40 (다)  사랑의 십자가


함세웅 신부




오늘부터 사순절의 정점인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많은 백성으로부터 찬미받고 왕으로 대접받는 승리의 날이며, 그 백성으로부터 배척받아 십자가에 못박힘을 기억하는 죽음의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구세주로 대접하는 군중의 무리가 ‘신앙의 나’라면, 순간적으로라도 예수를 배척하고, 본능 또는 불의와 타협하여 미지근한 생활을 하는 무리는 ‘배교의 나’가 됩니다. ‘신앙의 나’와 ‘배교의 나’는 이렇게 동시에 교차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손에 손에 쥔 그 찬미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가 땅에 떨어지고, 그 대신 그 손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못과 망치가 쥐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찬미하는 승리의 노래는 예수를 죽이라고 외치는 원성과 저주로 변했습니다. 참말로 이상하고 놀랄 일입니다. 더욱더 놀랄 일은 이 찬미와 저주의 시간 차이가 짧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미사에 이어 기도를 바친 내가 성당을 나서자마자 욕설과 모함을 일삼는다면, 분명 오늘의 축일은 ‘나’의 반영입니다.




승리의 그리스도, 부활의 그리스도를 따르기란 기쁘고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 갈바리아의 길을 따르기란 괴롭고 어렵습니다. 착했던 군중은 협박 때문에, 공포 때문에, 호기심 때문에,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아첨을 하기 위해서 예수를 배반하였습니다. 한때 예수의 제자였던 유다스도 예수를 배반하고 떠나갔습니다.


성세 성사받은 나도,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나도, 예수를 버리고 희희낙락하면서 맥없이


끌려가는 인간 예수의 모습을 멀리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고 있습니다.


  


갈바리아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도도하고 오만불손한 자의 십자가, 통회하며 뉘우치는 자의 십자가, 그리고 가운데에 ‘사랑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조건 없는 이 사랑은 피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모두 다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매우 인색합니다.


인색이 아니라, 전혀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은 무슨 심심풀이의 놀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그것은 무슨 농담이 아닙니다. 사랑의 죽음! 그것은 진리의 가르침이며, 하느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신원 증명서와 같은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신원을 파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잊어버립니다. 아니!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치사하게 배반하고 있습니다. 타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를 배반하고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나는 배반하고 예수를 멀리 하였음에도 후회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배반하는 유다스와 베드로를 따르지만, 후회하고 뉘우치는 오른쪽 강도와 베드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른쪽 강도와 왼쪽 강도와의 차이이며 ‘신앙의 나’와 ‘배교의 나’와의 차이 일 것입니다.


 


성주간의 첫 날, 나는 마음껏 예수를 노래하렵니다. 그리고 기도드립니다. 고통과 죽음의 예수 앞에서 진정으로 뉘우치겠습니다. 그래서 찬미와 저주가 엇갈리는 이 날, 신앙과 불신앙, 사랑과 배반이 교차되는 ‘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겠습니다.




내 비록 주님을. 욕되게 하였고 주님을 못박았지만, 모든 오만불손, 죄악을 다 주님께 아뢰며 용서해 주시는 말씀을 기쁘게 들으렵니다. 같은 혀로 찬미하고 저주하며, 또 같은 혀로 뉘우치는 모습, 정녕 그것은 인간의 신비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나는 갈바리아의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뉘우칩니다. 그분의 죽음은 바로 ‘배교의 나’ 때문에 당한 것이었으므로….. 












42.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3,1-49 (다)  십자가 위에서 등극하시다


강영구 신부




오늘은 주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면서 성지를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수고 수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수난 복음을 들었습니다. 즉 오늘 전례를 통해서 서로 상반되는 두 모습의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과 매맞고 가시관 쓰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서 비참하게 죽으시는 예수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은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평소 백성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과 거짓을 꾸짖으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또 기적을 하실 때와 같은 당당하고 의젓한 모습은 간 데 없고, 참으로 힘없고 초라한 모습의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 역시 초라함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좌우에는 무장한 경비병과 호위 군사를 거느리고 장엄한 행렬과 함께 입성하셔야 마땅할 것이지만,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예수의 모습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은 초라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서는 예수를 향해서 제자들과 몇몇 아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소리 칩니다.


 


세상에 어떤 임금이 이렇게 초라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초라해도 예수는 임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왕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 곳이고, 왕으로 등극해야 할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서, 그리고 백성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기 위해서 입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듣게 된 긴 복음에는, 예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모습이 참으로 희한합니다. 도무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예수께서 왕위에 오르셨기에, 사람들은 그분이 왕인지 아닌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왕의 대관식이나 등극식이 이루어지면 온 나라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에는 축제분위기가 아니라 참으로 암울한 분위기, 살벌한 분위기만 감돌고 있었습니다. 왕의 대관식은 수많은 백성들의 환호와 축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건만, 예수께서 왕위에 오르실 때는 비웃음과 조롱만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유다인들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인 총독 빌라도는 예수께 이렇게 묻습니다. “그대가 유다인의 왕인가?” 빌라도의 이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질문입니까?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매맞고 피투성이가 된 모습의 예수에게, 왕인지 아닌지를 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무슨 왕의 꼴이 그렇습니까?


그러나 사실 예수는 왕입니다. 다만 이 세상의 왕과 다를 뿐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것은 너의 말이다.”


 


사람들은 이제 예수를 바라빠라는 폭도와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바라빠는 유다인들의 독립 운동가라고 여겨집니다. 복음에 의하면 그는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까지 하여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죄목은 틀림없이 십자가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는 폭도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어서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해골산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앞으로 당신 왕국의 영원한 상징이 될 십자가를 무겁게 지고 죽음의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해골산 곧 죽음의 산이 예수께서 왕으로 오르실 장소였던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의 왕위 즉위식이 거행될 준비가 끝났고, 그분의 왕위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의복이 아닌 벌거벗은 알몸으로, 머리에는 화려한 왕관 대신에 가시관이, 양손과 발은 큰못으로 꿰뚫린 채 십자가에 대롱대롱 매달려 왕위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화려한 왕좌가 아니라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가 그분의 왕좌였습니다. 왕위 즉위식이 화려하기는커녕 살벌하고 소름끼치는 죽음의 잔치여서인지 환호와 축하가 아닌 조롱과 빈정거림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예수께서 왕위에 오르는 즉위식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이렇게 왕위 즉위식을 마치고 숨을 거두신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왕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왕이 된 것입니다. 왕은 왕이로되 이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모습의 왕이 아닙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보다 낮은 자리에서 백성들을 섬기는 왕입니다. 당신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심으로써, 왕 자리에 오르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왕 자리에 오르시기까지 그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묵묵히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수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의 사람들을 봅니다.


  먼저 예수를 팔아 넘긴 유다를 볼 수 있습니다. 몇 푼의 돈에 눈이 멀어서 스승이신 예수를 팔아 넘긴 사람이 바로 유다입니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의 왕이 되는 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최고 의회로 끌고 가서 심문했던 대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을 들 수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나자렛의 목수가 사회 기강을 문란케 하고, 하느님의 아들인 양 행세하는 것을 내버려두면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릴 것이라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를 제거하기로 작정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은 예수가 잡히자 뿔뿔이 도망쳐 버린 열한 명의 제자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죽도록 충성하겠노라 맹세했던 베드로마저도 세 번씩이나 스승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맡았던 빌라도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하지 못했으면서도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던 사람들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고 제 목숨만은 구해 보겠다고 애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큰 어리석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묵묵히 죽음을 향해 가는 예수 안에서, 혹은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갔던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 가운데 우리의 모습도 끼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저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하여 스스로 잘되어 보리라고, 또 스스로 살아 보리라고 발버둥치며 죄를 짓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깜짝 놀랄 엄청난 힘과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의 그 구원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인간들의 목소리가 큰 곳에 하느님은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뽐내고 과시하는 곳에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감추십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처럼 침묵하는 곳에서 하느님의 소리는 들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처럼 무소유와 무력함이 드러나는 곳에 하느님의 권능이 나타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요, 왕이신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이 결코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백성인 우리도 가야 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우리에게 승리와 영생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용감히 주님의 뒤를 따를 것을 다짐합시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이 여러분에게 은총과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43.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19,28-40 (다)  하느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0,4~7 (나는 욕설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 않는다.) 


제2독서 필립 2,6~11 (당신 자신을 낮추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셨다) 


복 음 루가 22,14~23,56 




오늘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본래 그럴 분이 아니셨습니다. 당신의 좋으신 일은 늘 감추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겸손하기 그지없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분은 마치 왕이나 되는 듯이 그렇게 광내시며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입성은 그분의 반대자들에 대한 일종의 선전 포고였습니다. 3년 동안 전도생활을 하시면서 그분은 반대자와 적들을 많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실 악도 이미 찰 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기서 보통 사람이라면 몸을 숨기는 것이 상례이지만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포야, 나 들어간다. 창 받아라.”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일의 결과에서 보면 오늘 예수님의 요란한 입성은 우연한 충동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선 아들이 만백성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를 원하셨는데 그 시기가 바로 닥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정된 죽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하나의 각본 과 연출이 필요했는데 이를테면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예수님은 섶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합니다. 더구나 나귀를 타고 오시니 예수야말로 그들이 기다렸던 왕, 즉 메시아로 확신합니다. 이제 그들은 새 나라가 세워지리라 믿었으며 로마의 식민지라는 치욕에서 벗어나 자유의 나라, 그리고 경제적으로 부강된 나라가 건설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현세적인 삶을 구하는 메시아 를 예수님께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메시아의 역할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백성들의 꿈을 일순간에 깨뜨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으로 바보요 멍청이처럼 보였습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비굴하게 능력을 감추고 있었고 힘이 있으면서도 그 힘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분개를 하여 “십자가에 못박아라.”하며 일종의 보복을 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이었습니다. 어제의 환영자가 오늘은 배반자가 됩니다. 그들이 예수께 걸었던 화려한 기대만큼 그렇게 예수를 사정없이 짓밟게 됩니다. “너 같은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그들은 판단했으며 그러니까 감히 예수를 죽이라고 백성들의 의기가 투합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죽이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인간은 과연 하느님을 죽일 수 있는가. 그리고 죽을 수 있다면 그가 정말 하느님일 수 있는가.” 어쨌거나 우리의 주인공은 죽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기 때문에 역시 인간으로 죽으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하시며 그분은 장담하셨지만 세상이 오히려 그분을 이겼으며 그는 결국 죽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분도 역시 무력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신앙이 과연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왜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십자가에서 절규하셨던 아픔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라예보에서 내전으로 무구한 시민들이 희생되고 소말리아에서 천진한 어린이들이 굶어 죽는 일은 하느님이 정말 계신지 어떤지 우리로 하여금 의심을 자아내게 합니다.




니체는 일찍이 “신은 죽었다.”하고 외쳤습니다. 아니, 자기가 직접 신을 죽였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니체의 살신행위는 아무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19세기 당시의 철학과 사상의 풍토는 또 그렇게 니체의 살신행위를 돕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끝장이요 신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 사흘째 날이 밝아올 때(?) 그분은 여전히 살아 계셨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예수는 죽고 또 죽어 왔으나 그러나 사흘이면 다시 살고 다시 부활해 왔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신을 수없이 죽이고 있지만 신은 죽지 않으며 오히려 신은 그 살신자들을 위해서 오늘도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는 일이란 그저 죽음을 부르는 일이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죽음의 신비를 배워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고 못난 죄인을 살리기 위해선 선하신 분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서 이웃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이웃을 위해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사순절은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삶을 묵상하고 또 내 죽음을 바라보면서 부활을 소망하는 그런 시기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죽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결국 죽음으로 끝장은 아닌 것입니다. 살기 위해 죽고 죽어야만이 산다는 신앙을 새롭게 간직하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오늘 죽음이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44.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 56 (다) 


                       고통도 은총이며 시련도 축복이다


신은근 신부




오늘 우리는 길고 장황한 수난복음을 읽는다. 예수께서 잡히고 심문받는 장면, 그리고 사형수였던 바라빠와 비교되는 장면을 읽는다. 마지막 부분에선 십자가에서도 멸시받으며 운명하시는 모습을 대하게 된다. 이런 내용을 성지주일에 읽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성지가지와 연관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임금이 나타났을 때 환영의 의미로 나뭇가지를 흔들며 기뻐하였다.




오늘 우리도 그런 의미에서 나뭇가지를 들고 환호한다. 새롭게 출현한 임금을 환영하듯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복음서는 말한다. 우리가 환영하는 예수님은 임금으로 오신 예수님이 아니고 수난 받고 죽으시는 예수님이라고. 장황한 수난복음의 핵심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예수님을 알리려는 데 있다.




교회는 오랫동안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주님이신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아무 저항없이 죽음의 길을 가셨다고 가르쳐 왔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신앙인의 자세를 찾아내라는 말


과 같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이 겪은 것과 같이 십자가의 고통과 억울함을 체험하고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고통과 억울함의 체험 –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족한테서 느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사업 안에서 직장에서 체험할 수 있다. 아니면 자신의 성격이나 습관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는 데 힘이 든다. 자신을 누르지 않고 욕심을 방치한다면 십자가의 체험은 점점 귀찮아진다. 자신을 죽이려 할 때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그 사람 안에서 힘을 발휘한다. 전혀 예기치 않던 곳에서 은총을 만나고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다.




실제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수님처럼 배신과 억울함을 경험한다. 모욕을 만나고 우리 계획과는 상반되는 결과에 넋을 잃는다. 십자가를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수난 복음의 주인공이 예수님이라면 우리도 당당한 조연자인 셈이다. 그러니 전능하신 분의 수난과 죽음을 거저 무감각한 시선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실패와 좌절도 의미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은 성지가지를 들고 행렬을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모방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집으로 가져가 십자가 뒤에 모셔둔다. 왜 그렇게 하는가. 우리가 환영하는 예수님은 고통받고 죽으시는 예수님임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부활은 반드시 고통 뒤에 온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강을 건너야 부활의 새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의 핵심이다. 십자가 뒤에 걸어두는 성지가지가 이 핵심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 성지가지를 받으면서 고통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우리의 운명을 묵상하자. 고통도 은총이며 시련도 축복인 것이다. 고통은 없애주고 축복만 달라는 기도는 철없는 기도다. 사람의 일생에서 사순절에 해당하는 시련의 기간이 있다면 부활의 기간도 있기 마련이다. 성지가지에 담긴 교훈을 깨닫는다면 부활축일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45.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56 (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주님의 수난주일입니다. 영광스런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고를 겪으시는 지 묵상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자,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이 소리 높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군중 속에 끼여있던 바리사이파 몇 사람이 이를 반대하여 “선생님, 왜 꾸짖지 않습니까?”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잘 들으시오.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오”(루가  19.37-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 복음(11.45-53)에서는 예수께서 태생 소경을 보게 하시고 죽은 라자로를 살렸을 때, 대제관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많은 기적을 나타내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대로 내버려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라는 이유로 그 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호사다마”란 말이 있듯이 좋은 일에는 방해도 많은 것 같습니다. 악마들은 분명한 이유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24)하고 기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공동의 적이 악마라는 것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혹시 집안 사람들끼리 서로 원수로 여기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 봅시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해주어야 할 사람끼리 미워하고 집안 싸움이나 하고 있지 않는지, 이 모든 일에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이 스며들어가야 하겠습니다.












46.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56 (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유다인들로부터 예수님께 대한 고소를 받은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알아본 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요한 18,38 ; 루가 3,22). 이렇게 선언하면서도 흑백을 가려 정의를 실천하고 국민의 안정과 국가의 번영을 도모해야 할 사람이 무죄한 사람을 왜 죽이고야 말았을까? 죽였다고 아주 죽고만 것인가?




뉴욕시 어느 지하철역 담에 하느님에 관한 글귀가 두 가지 씌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신은 죽었다”-니이체(서명날인)-였고, 또 하나는 그 옆자리에 덧붙인 “니이체는 죽였다”-하느님(서명날인)-였다. 우리에게는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분부가 있다. 이제 이분이 우리편이 되셨다. “주께서 내편을 들어 도와주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누가 감히 나에게 손을 대랴!”(히브리 13,6). 이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보장이 아닌가?




수사 기관에 붙들린 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가리우고 죄상이 드러나게 되면 자기를 본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이 싫어서 취한 행동이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다. 그러나 무능해서, 병들어 죽은 죽음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은 썩는 만큼 거름이 되어 생기를 주고, 죽는 만큼 산다는 철칙에 따라 죽었던 우리를 온전히 살리기 위한 스스로가 택하신 죽음이었다.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작동한 것이다. 영원히 찬양하고 감사할 죽음이여, 참 사랑이여!












47.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56 (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오늘은 예수 수난을 기억하는 수난주일이다. 한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군중이 빨마 가지를 흔들며 열광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성지주일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오늘 미사에 성지를 받아들고, 주님의 입성을 환호하는 마음을 되새긴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인들은, 예수님이 암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진정 그들은 자기들의 구세주가 오셨음을 알고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오산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지상적인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 즉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전 세계를 지배하고, 모든 나라의 왕들 위에 군림하는 왕, 즉 왕 중의 왕으로서 임하시어, 모든 이스라엘인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지상적인 왕국을 건설하시지 않으시고 천상적 왕국을 건설하심으로써 전 세계의 인류를 하나로 모으시고자 하셨다. 그 왕국은 영원하며,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영원히 계속되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신다. 그것은 현세의 것에 눈이 어둔 당시의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그 당시의 지식인, 부유층, 정치가, 제관들은 더욱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으며 심지어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로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지식인, 재벌가, 지도자층에 속한 사람들 중의 대부분이, 이 지상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정신적, 천상적,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려고도 들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또 그들 자신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불행 속에 자신들을 내맡기는 결과가 된다.




한편,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왕으로 모시던 군중들은,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갑자기 분노로 돌변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들의 그 얄팍한 이기심과 현세적, 쾌락적인 변덕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역시 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활태도를 바꾸지 않고 여전히 이 세속적인 것을 주님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그러한 신자들 때문에 더욱 상처를 입으신다. 예수님은 그 당시 타민족에 의해 살해당하시지 않고, 완강한 현실주의자인 바리사아파 율법학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당신의 협력자인 제자의 한 사람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십자가에 팔아 넘기는 유다는 아닌지 살펴보자. 믿음의 자세가 확립되지 못했을 때, 아직도 세속적인 것에 가치관을 두고 있을 때, 우리는 신자이면서도 유다이다. 오히려 믿지 않는 자보다도 못하다는 결론이 된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우리의 믿음의 자세를 바로잡자.




자기 중심적인 믿음, 이기적인 믿음, 즉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 구복이나, 자신만이 천국에 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의 부정과 부패 등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태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도 무관심했던 사람들과 같다.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이유도, 신자들의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신앙 태도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자.












48.      사순 제 6주일(성지주일)   루가 22,14-23,56 (다)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기




“눈물 없이 저녁 식탁의 빵을 구어보지 못하고 엄동한천에 돌을 베개삼아 잠을 청하지 못한 사람과는 아예 같이 앉아 인생을 논하지 말라.”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가 생활하는데 차이는 있을망정 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이 고생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남달리 참혹한 고통을 겪는 수가 있다. 극도로 가난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해진다. 그 때문에 못 견디게 괴로워하고 그는 완전히 헤어날 수 없어 보이는 고독의 늪으로 빠져들고 만다. 가혹한 비참이 온 몸에, 뼈 마디마디에 사무쳐 마치 송장같이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극도의 고독에 시달렸다. 성부에게서까지 버림받은 그 고통과 외로움은 차마 필설로 다 하기 어려운 그것이었다. 그야말로 치명적 고통이 예수님을 엄습하였다. 그와 같은 고통은 마침내 당신의 목숨까지 빼앗아 갔다. 창조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이렇게 고통 중에 죽으셨고, 그것도 인간 중에 가장 비참하게 되어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두루 동정도, 위안도, 이해도 해주실 수가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구원하시고자 제일 밑에까지 내려가신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그 굴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을 다 겪으셨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다 되실 수 있는 것이다. 피눈물이 흐르도록 울어보지 못한 사람, 목이 쉬도록 부르짖어 보지 못한 사람, 극빈에 허덕여 보지 못한 사람, 뼈가 으스러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해보지 못한 사람, 거듭되는 액운에 부서져 보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벗이 될 수도 없고 그런 불행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던질 자격도 없다.




그러나 불행에 우는 이여, 슬퍼하지 말아라. 말째가 되신 예수님이 언젠가는 그 눈에서 눈물을 모두 거두어 주실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믿음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표면적이며 형식적이고 기회적이었다. 지나친 안일함에 머물러 자그마한 고통에도 즉시 불평을 하고 금방 죽기나 하듯 몸부림쳤다.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한다 해서 이를 곧이 들을 주님이겠는가? 입으로만 소리내는 얌체가 아닌가? 뭔가 절실히 느껴야 그 부르짖음도 기도도 진실한 것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진짜 아파서 소리지를 때라야 엄마의 도움을 받듯이 구원도 이렇게 해서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말째가 되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위해 무엇이 되었나? 땀을 흘려 보았나, 아니면 피를 흘려 보았나? 그 이름을 부르느라고 목이 쉬어 보았나? 그분을 섬기고 사랑하느라고 아파 보기라도 하였나?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었나? 우리는 이제 그분을 지치도록 섬기고 죽도록 사랑하기로 다시 굳게 다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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