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
20. 김신호 신부(다)/35
21. 강영구 신부(다)/36 22. 김기홍 신부(다)/40
23. 이명찬 신부(다)/42 24. 강길웅 신부(다)/45
25. 변희선 신부(다)/46 26. 후세를 믿지 못하는 신자들(다)/48
21 연중 제32주일 루가 20,27-38 (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김신호 신부
사람은 창조된 피조물 중에서 가장 발달된 지능을 가진 존재이며 존재의 특징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물론 인간보다 발달하지 못한 동물 중에서도 언어와 비슷한 상호소통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동물학자들은 말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에 비할 것이 못된다. 인간은 상호소통체계로서 가장 복잡한 언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언어를 통하여 인간은 의사를 표시하고 자기 뜻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게 된다.
언어라는 의사소통체계를 기초로 하여 인간의 삶은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학문이라는 인간의 공통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체계도 정립하였고, 이에 따라 인간은 학문을 통하여 인간이 이루어 놓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배우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학문 중에서 인문과학이라는 영역이 있고, 인문과학 중에서 철학이라는 부분이 있다.
지금은 지나간 옛 얘기지만 6․25가 끝나고 배가 고팠던 시절에는 철학 하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여러 면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취급되어, 사람들에게 헛소리나 또는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만을 늘어놓고 다니는 그야말로 쓸모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철학 하는 사람은 머리도 길게 기르고, 옷이 더러워도 상관치 않는, 어떻게 보면 세상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으로 오인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사회가 혼란하고 어려운 속에서 허무주의와 비슷한 사상이 영향력을 발휘하여 나타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그 당시에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면서, 서로의 주장이나 생각을 말하기에 열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現世만 생각하는 삶
사람은 공상도 할 수 있고, 또한 사상을 설계할 수도 있는 존재다. 공상은 자기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자기만의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고, 사상은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적어도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사상체계의 발전을 가져오기 위하여 공상은 필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공상은 어떤 면에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를 넓혀주고 있는 역할을 하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복음에 등장하는 횟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비해서 매우 적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 정치적으로 로마의 권력과 헤로데 가문과 손을 잡고 권력을 누리던 자들로서 모세의 율법은 인정하였지만, 구전과 예언서는 거부했고, 오로지 현세만을 중요시하는 삶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부활도 없다고 부정함으로써, 오로지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풍요로움만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은 이러한 그들의 삶과 생각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질문이었다. 일곱 형제와 부인 하나의 이야기는 부활이 있다면, 적어도 현실적인 삶의 조건에서는 매우 곤란한 상태를 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매우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천국이라는 삶의 조건을 모르는 상태에서 나온 무지에 가까운 억지소리로밖에는 여겨질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천국의 실태를 설명하시면서 하느님은 죽은 자의 히느님이 아니고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신다.
인간의 머리는 有限
우리도 신앙문제에 있어 별로 득이 되지 못하는 어리석은 물음에 봉착할 때가 있고, 이로 인해 신앙을 버리는 자도 있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머리는 철학적인 공상도 할 수 있지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천국은 신앙의 대상이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22 연중 제32주일 루가 20,27-38 (다) 산 자여, 나를 따르라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32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 독서에서 마카베오 하권 7장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그 내용은 대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는 열렬한 그리스 문화 신봉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정복하자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와 아폴로 신상을 세우고,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앞에 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만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티오쿠스의 명령에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안티오쿠스의 명령에 항거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일곱 아들과 어머니가 함께 안티오쿠스 왕 앞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왕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일곱 아들을 차례로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먹기만 하면 살려 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첫번째 아들이 끌려 나왔습니다. 왕은 그 아들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먹을 것인지 죽음을 당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머리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잘린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거역하느니 죽는 것이 낫겠다.” 화가 난 왕은 그 아들을 벌겋게 달군 가마솥에 던져 넣었습니다. 솥에서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갈 때, 어머니와 나머지 여섯 아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고상하게 죽자고 다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면 틀림없이 측은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왕은 둘째 아들은 돼지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왕은 첫번째 아들 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둘째 아들을 죽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못된 악마, 너는 우리를 죽여서 이 세상에 살지 못하게 하지만, 이 우주의 왕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셋째 아들이 끌려 나왔습니다. 셋째 아들도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하는 사람들이 혀를 내밀라고 하자, 그는 혀뿐 아니라 손까지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이 손발을 하느님의 율법을 위해서 내던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손발을 하느님께로부터 다시 받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셋째 아들은 서서히 죽어 갔습니다.
셋째가 죽자 넷째 아들이 끌려 나왔습니다. 넷째 아들 역시 하느님의 율법을 어기고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넷째 아들은 죽는 순간에 안티오쿠스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사람의 손에 죽어서 하느님께 가서 다시 살아날 희망을 품고 있으니 기꺼이 죽는다. 그러나 너는 부활하여 다시 살 희망은 전혀 없다.”
이런 모습으로 여섯 아들이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고스란히 죽어 갔습니다. 이제 막내아들과 어머니만 남게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겁에 질린 막내와 어머니는 돼지고기를 먹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막내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뱃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을 주어 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며, 또 너희의 신체의 각 부분을 제 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너희는 지금 너희 자신보다도 하느님의 율법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사람이 출생할 때에 그 모양을 만들어 주시고 만물을 형성하신 창조주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내 아들아, 이 어미를 불쌍하게 생각하여라. 나는 너를 아홉 달 동안 뱃속에 품었고, 너에게 삼년 동안 젖을 먹였으며, 지금 내 나이에 이르기까지 너를 기르고 교육하며 보살펴 왔다. 얘야, 내 부탁을 들어 다오.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인류가 생겨
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도살자를 무서워하지 말고 네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죽음을 달게 받아라. 그러면 하느님의 자비로 내가 너를 형들과 함께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분이 치밀어서 막내아들을 잔인하게 죽였고, 그 어머니마저도 죽였습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라.” 하셨고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에 과연 누가 산 자이며, 누가 죽은 자라고 생각됩니까? 무자비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면서 일곱 아들과 어머니를 살해한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가 살아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께 목숨을 바쳐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한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가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과연 누가 승리자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폭력으로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안티오쿠스 왕이 승리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 때문에 왕의 폭력 앞에 힘 없이 죽어 간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가 승리자입니까?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는 안티오쿠스의 그 무자비한 권력과 폭력 앞에서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고, 폭력으로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안티오쿠스 왕을 꺾어 누른 승리자였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안티오쿠스 왕에게는 제우스나 아폴로와 같은 생명 없는 우상과 폭력이 있었지만, 일곱 아들과 어머니에게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과 부활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우스나 아폴로와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안티오쿠스 왕이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나 다가 올 내세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 있는 동안 부귀영화와 향락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 삶이 전부인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지, 흑은 이 세상이나 사회가 어떻게 되든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지금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권력과 부요를 누리면서 향락과 안일 속에 사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지르는 행위는 파렴치하며 무자비합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는 자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저지르는 일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한마디로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그들은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들의 손끝이 미치는 곳은 모두 죽음과 어둠의 세력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도,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는 사람들에게 지금 안일과 향락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기에, 그들은 이웃과 형제들의 기쁨과 행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저함이 없이 거짓과 부정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향락과 안일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웃과 형제들에게 고통을 강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어두울 수밖에 없고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지도 않고 부활에 대한 희망도 없는 자들이 이 땅에서 온갖 부귀 영화와 향락을 누린다고 해도,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의 자식으로서 그들이 누리는 것은 그야말로 향락일 뿐, 참 기쁨과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향락을 누리면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서서히 죽어 갈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은 희망 찬 세상, 밝은 세상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오늘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안일과 안락보다는 이웃과 형제들의 기쁨과 행복을 먼저 생각합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과 부활을 믿기에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도 감수하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장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다리일 뿐입니다. 여섯 아들을 고스란히 빼앗기고도 막내아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라고 권고할 수 있는 어머니의 용기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죽음마저도 큰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숨을 쉬면서 살아 있다고, 하루 세끼 밥을 먹는다고 다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이 아니면 정말 살아 있는 생명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생명의 근원이시요 우리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루가 복음 12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친구들아, 잘 들어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은 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겠다. 그분은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느님이다. 그렇다.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다.”
생명이 없는 제우스나 아폴로와 같은 우상을 섬기면서,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안티오쿠스 왕은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를 잔인하게 죽이고 기고 만장했을지 몰라도, 그는 살아 있는 자가 아니라, 죽음의 세력 밑에 있는 불쌍한자였습니다. 한편 일곱 아들과 그 어머니는 비록 폭력의 희생물이 되어서 비참한 죽음을 당했지만, 그들은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였고, 하느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당했으나 그 죽음을 죽음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죽었지만 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커다란 희망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기쁘게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앞에서 장엄하게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고. 우리는 바로 그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세력 밑에 있는 악마의 자식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나누고 베푸는 생활, 그리고 진실되고 성실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나누는 생활입니다. 여기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산 자여, 나를 따르라.”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생명의 은총과 축복을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3 연중 제 32주일 루가 20,27-38 (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김기홍 신부
인간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생(生)과 사(死)의 문제입니다. 생은 지금 당하는 일이고, 죽음은 우리가 장차 당할 일입니다.
또 누구나 다 당면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마지막 숨결을 거둘 때 머리숙여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 후에 장사를 지내고 사랑하는 이를 무덤에 묻고 무덤가에서 돌아서게 될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인생의 깊은 문제, 즉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겠는가, 정말 사랑하는 그이는 영영 없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어디엔가 있을까-하고 곰곰히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인간의 영생과 내세에 관한 관념은 비록 희미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어떤 종교 가운데서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죽으면 황천에 간다고 하고, 옛날 애급사람들은 죽으면 배를 타고 저 나라로 간다고 해서 유명한 왕능같은 데의 묘실 옆에 큰방을 만들어 놓고 배를 만들어 넣어 주었으며, 옛날 헬라사람들은 사람들을 묻기 전에 시체의 입에다가 돈을 한입 넣어 주었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강을 건너 딴 세계에 간다는 사상아래 뱃사공의 뱃삯을 주라는 의미의 풍습이었습니다. 또 철학자 플라톤과 치체로는 철학적 견지에서 영혼은 불멸하며, 반드시 살아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영생과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우선 이성적인 견지에서 보더라도 확실합니다. 이 우주에는 자연법칙이란 것이 있어 모든 것이 이 이치에 맞게 움직여집니다. 특히 과학에서 물질 불멸의 원리는 내세가 있음을 더욱 명백히 말해줍니다. 즉 물질이란 그 형태는 병하나 물질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법칙입니다. 가령 솥에 물을 넣고 끓이면 물이 없어진 것 같지만 실은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물이 수증기로 변화했을 뿐입니다.
초에 불을 켜면 초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초에 있는 탄소와 공기 중의 산소가 결합하여 탄산가스로 변했을 뿐입니다. 화학적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이와같이 육으로 된 이 몸이 죽으면 무덤에 묻혀서 썩을 것이나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화학적 변화만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죽은 다음에 육체도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 후 우리는 이 몸을 기초로 해서 변화되겠지만 이몸과 같은 몸은 아닙니다.
둘째로 하느님의 공의는 내세와 영생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하느님은 공의의 하느님으로서 선한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권선징악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죽이고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보다 더 잘 삽니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볼 때 하느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내세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만 살도록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생과 내세가 있음을 즉 부활이 있음을 확증해 줍니다.
그러나 부활의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계시로써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 12장 2절에서는 “죽은 자들이 땅의 티끌 가운데서 깨어 영생을 얻을 자도 있겠고 수육을 받아 무궁히 두려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다.”고 했으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부활이 없다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공박에 대해 출애굽기 3장 1-6절을 인용하시여,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으로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이 가능함을 야이로 딸의 부활과 나임과부의 아들, 나자로의 부활 기적으로 군중들에게 보여주시고 또한 예수님 자신의 부활로써 자신의 말을 듣고, 자신을 믿는 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즉 오늘 복음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었다가 살아나서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사람으로서 장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필요 없는 천사처럼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계시하십니다.(루가 20,34-36)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중대사를 해결해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의 큰 신비를 깨닫게 하여 인간 삶의 가치를 최대로 성화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냅니다. 요한 복음 11장 25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는 부활이며, 생명으로서 그분을 믿는 사람은 죽드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인생가치가 영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천사처럼 영생을 얻을 것임을 확신하게 하는 그야말로 우리 육신의 부활의 보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할 때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처럼 우리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마르코 복음 8장 31절의 기록대로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고난을 받은 후에, 즉 십자가 죽음 후에 이루어졌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통과 바치신 희생이 바로 그의 부활로 향하는 통로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묻힌 무덤이 바로 그가 부활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지체인 우리의 부활도 우리 각자가 져야하는 십자가의 죽음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즉, 가난하고 불우하고 고통받는 형제들을 위해, 불의에 의해 억압과 고통을 당하고 감옥에서 신음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 각자가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신앙인으로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만날 것이며, 세상 마칠 때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십자가를 참으로 뜻깊게 우리의 생사와 직접 연결지어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유이고, 힘이며, 희생이기는 하지만 이 희생은 윤리적 위대함을 기르기 위한 것이고 패망을 안겨다 주는 이기주의를 백절불굴의 용기와 사랑으로 이기기 위한 것으로, 우리가 이웃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헌신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격려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과 희망을 그들에게 전하여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도와 건전하고 씩씩하고 믿음이 깃드는 사회풍조를 조성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함께 우리의 부활의 희망은 부풀게 될 것입니다.
24 연중 제 32주일 루가 20,27-38 (다)
이명찬 신부
안녕하십니까? 오늘이 연중 32주일이니까, 우리 전례력 상으로 이제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음주가 연중 33주 평신도 주일, 그리고 그 다음주가 전례력의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입니다. 이제 내일부터 전례말씀은 최후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모아질 것이고, 우리는 그 흐름에 따라 올 한해 마무리를 잘 해야겠습니다.
텔레비젼 프로 중에서, 우리 나라의 알려지지 않은 심산유곡(深山幽谷)등을 보여주는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내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 때문에 요즘 바쁘기만한 도시 현대인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아주 멀게만 느껴지던 미지의 세계, 가령 미국 같은 나라를 우린 얼마나 동경했었는지, 또 TV프로에서 새롭게 소개하는 알려지지 않은 깊숙한 곳의 비경(秘境)을 볼 때, 이 복잡한 일상을 떠나 훌쩍 가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굴뚝같이 드는지 여러분도 느끼실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죽은 다음의 사후세계나 우리의 최종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정말 궁금한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가 죽은 후 부활하여 영원의 세계에서 살게되기를 희망합니다.
언젠가 일본에선가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가?’하고….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다시 태어나도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새’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무언가 자유롭고, 보다 더 높은 세계로 향한 우리들의 꿈을 잘 표현해주는 예입니다.
그만큼 또 지금 우리의 현실이, 훨훨 날아다니고 싶을 만큼 답답하고 각박하다는 증거도 됩니다. 쉽게 얘기해서 우리는 문득 파란 하늘을 대했을 때, 혹은 끝없이 넓고 푸른 바다 앞에 섰을 때, 바로 눈앞의 것에만 집착해서 복닥거리며 살던 나의 삶의 모습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 다른 더 넓은 것, 영원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우리 몸은 현실세계에 있으면서 영원을 그리워하는 이런 것은 우리의 기본적 본능이 아닐까 합니다.
시간에는 두 가지 차원의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몸담고 있는 지금 현재, 그리고 지난 과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라고 하는 평면적인, 과거-현재-미래하고 하는 인간의 시간이 있는가 하면, 이것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넘어서는 ‘영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은, 즉 하느님은 이 ‘영원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영원의 존재요, 우리 인간은 평면적 시간 안에 존재하는 제한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이런 한계 지어진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이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을 동경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한을 뛰어넘어 영원의 세계로, 하느님 차원으로 진입하는 것… 이것이 부활의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교리대로 설명을 하자면, 영원의 차원인 하느님이, 한계 지어진 인간의 조건으로 내려오는 것, 이것을 ‘강생’이라 한다면, 반대로 인간의 한계 지어진 장애를 초월하여 영원의 세계로 껑충 돌입하는 것, 이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부활 얘기가 나온 김에, 이런 얘기 많이 들으셨죠? 우리는 예수님 부활 얘기를 하면서 흔히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을 체험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즉 어찌저찌 하다가 무질서의 상태, 혼돈의 상태로 빠지게된 우리가 거기로부터 벗어나, 다시 옛날의 질서 지어진 상태, 보시니 좋더라 하신 그 상태로 회복되는, 옮아가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이것이 우리가 체험하는 부활이라는 설명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배워온 바에 의하면 죽은 다음 하느님 나라에서 모두가 부활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죽은 다음 썩고나면 그만일 이 몸… 부활이란 게 과연 있을까? 죽은 다음을 얘기한다는 게 허황된 것은 아닐까?…생각합니다. 어쨋든 이승의 삶 속에서 삶의 변화, 부활이 이루어지든, 죽은 뒤 실제로 부활이 이루어지든 그것은 모두 이 인간적 ‘한계’로부터 ‘영원’으로의 초월, 하느님 차원으로의 돌입을 얘기합니다.
부활한 다음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와 똑같은 궁금증을 오늘 복음의 사두가파 사람들이 대신 묻습니다. 그들은 원래 부활 자체도 부정하지만,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이러이러한데, 부활한 다음에는 어떻겠습니까?’라고, 한계 지어진 인간의 법으로 영원의 세계인 부활에 대해 묻는 그들이 답답했던 것입니다.
부활 후의 세계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한 모습입니다. 글자 그대로 영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적 갈등이나 인간의 감정 희노애락 모두를 뛰어넘은 모습이 있을 뿐입니다.
재미있는 예를 설명드릴까요? 불교에서 신의 얼굴을 조각해 놓은 부처님 불상 얼굴을 보면 남자의 얼굴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여자의 얼굴도 아닙니다. 또 그 얼굴은 기쁨의 얼굴도 아니고 화난 얼굴도 아닙니다. 신의 모습은 남녀의 성차별, 기쁘고 슬픈 인간적 감정 모두를 뛰어넘은 모습입니다. 다만 그것을 보는 나의 지금 감정상태에 따라 인자함의 얼굴로 보이기도 하고, 엄숙함의 얼굴로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영원의 모습, 하느님 차원의 모습은 기쁨, 슬픔, 남자, 여자… 모든 구분을 넘어선 영원의 모습입니다. 또한 애초에 하느님이 창조 때의 모습도, 유치원 아이들이 남녀 손잡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애초 창조 때의 모습은 남성, 여성 간의 부끄러움도 없는 상태, 기쁨, 슬픔이란 감정에 오염되기 전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후, 부끄러움을 알게되어 몸을 가리고, 희노애락의 감정을 알게 되 숨게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몸은 비록 한계 지어진 인간의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파란 하늘을 보면서 영원의 세계를 꿈꾸어 봅니다. 때묻지 않은 아이의 그림처럼 바다 위를 떠다니는 돗단배가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것처럼, 우리의 꿈이 높은 영원의 세계로 날아다니길 빌어봅니다.
25 연중 제 32 주일 루가 20,27-38(다) 신앙, 그 위대한 희망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Ⅱ마카 7,1~2.9~14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제2독서 Ⅱ데살 2,16~3,5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복 음 루가 20,27~38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
희망을 가진 사람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하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즉 희망을 가진 사람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고 또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 가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한마디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역사를 파괴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희망의 종교입니다. 세상에 갖가지 희망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보다 더 큰 희망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이 세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고 죽어도 죽지 않는 새 생명이 거기에 있으며 또한 땅에 묶여진 것을 초월하는 천상의 놀라운 세계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한 가정의 일곱 형제가 모두 장렬하게 순교하는 감동적인 내용이 나왔습니다. 인간에게는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 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더 위대한 가치는 무엇이냐. 그것은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의 왕국을 말합니다.
BC 2세기경의 희랍은 세계의 정복자로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꽃피운 헬레니즘 문화는 전세계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국수주의적인 유다이즘과 충돌하면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됩니다. 즉 정복자는 문화적, 종교적으로도 보다 통일된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과 관습을 철저히 배척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인 일곱 형제는 돼지고기를 먹음으로써 율법을 모독하라는 희랍의 강요에 의해서 손목이 잘리고 혀가 끊기면서 죽어 가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조금도 죽음에 굴하지 않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망은 이처럼 죽음을 넘어갑니다.
사람의 가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통해서 내일을 창조하지만, 희망이 없는 사람은 오늘의 삶을 통해서 내일을 포기합니다. 그저 지금 당장 배부르고 편한 것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동물적인 삶만이 존재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으며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수의 나라인 로마에까지 아부하면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며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소로웠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큰 모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황당한 얘기를 만들어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차례로 살았다고 했을 때 그 여자는 그러면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으로 부활은 허무맹랑한 소리이니 웃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없다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설쳐대며 사는 사람들이 이를테면 장땡이요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더 이상 인간 세상이 아닙니다. 짐승처럼 힘센 사람만이 제일이요 간사하고 음흉한 사람들만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오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부활의 삶은 ‘지금 여기’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습니다. 천사들과 같이 영원히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과는 차원이 다르고 세계가 다릅니다. 따라서 세상은 우리를 속인다 해도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로 올라가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고 억울하게 손해보면서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가치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삶이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희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 여러분은 무슨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기’에만 묶여 있다면 그는 슬픈 사람입니다. 부활은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꼭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서 먼 미래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에 맞게 올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26 연중 제32주일 루가 20,27-38 (다)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
변희선 신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두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마도 자기 자신의 죽음에 관한 질문일 것이다. 부처님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분은 집을 나서서 세상의 거의 모든 이치들을 깨우쳤어도 마지막 득도의 순간까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없어서 번민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왜 죽어야만 하는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관하여 속이 시원하게 답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죽고 나서 되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잘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다.
나도 죽음이라는 현실을 직감했던 적이 몇 번 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급성장염에 걸려서 병원에 갔는데, 배를 째고 수술을 받으면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의사선생님께 수술을 받지 않고 고쳐달라고 애원했더니, 측은한 눈으로 나를 보시면서, 새로 나온 항생제로 치료를 해 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어쨌든 수술 없이도 나의 장염은 치유되었다.
또 한번은 서울 전농동 성당의 주일학교 선배 교사가 암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목격한 그 날 밤이었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죽음의 전율이 엄습하면서, 정신은 점점 더 말짱해지기만 하였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폭풍우 같은 공포가 닥치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아서, 무조건 묵주를 꼭 잡고 성모님께 매달렸다.
잊을 수 없는 이 날 밤, 나는 사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게된 이유는 단순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제의 길이 좋은 것이고, 막연하게나마 성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주 기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날 밤 나는 나 자신의 한계와 운명에 대하여, 보다 확실한 깨우침을 얻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죽으며, 죽음이 살의 마지막이라면 어차피 절망이다.
그런데 만일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죽음이 문제될 것이 없으며, 나의 구원을 위한 최선은 사제의 삶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제가 지옥을 간다고 할지라도 당신은 계셔야 할 분입니다. 당신이 안 계신다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희망도 없겠기 때문입니다. 주님 ! 저를 구원하시지 않아도 좋지만, 우리에게 당신이 계신다는 것 자체가 희망의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절망이다」 이 말은 수많은 불치병 환자들의 진솔한 고백이다. 정말로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의 아픔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이 삶의 의미와 희망을 잃고, 절망에서 헤맬 때가 더욱 고통스러운 법이다. 육체의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보다, 양심의 감각이 마비되고, 영혼이 그 분의 진리와 사랑에 목마를 때가 훨씬 더 힘든 것이다.
문제는 육체적 감각만을 맹신하는 문화적 풍토에서 매일 매임을 살아가는 우리는, 죽음이라는 육체(감각)의 한계조차 인정하지 않고, 그저 잊어버리고 외면하려 한다는 점이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풍조는, 죽음 후의 삶을 믿지 않는 데서(불신앙) 시작한다. 그래서 젊음만을 찬미하고, 무조건 좋은 것인 양 선전한다. 그러나 미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보다 먼저 가신 영혼을 기억하고, 기도하고, 만날 수도 없을뿐더러 부할(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라고 (20,38) 선포한다. 여기서 죽은 자는 이미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감각만을 현실의 전부하고 맹신하고, 육체의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결국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죽음(죽은 자)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한 고통이나 육체적인 죽음까지도 견디고 이겨서 희망으로 구원된 자를 의미한다
27 연중 제32주일 루가 20, 27-38 (다) 후세를 믿지 못하는 신자들
묵상 :우리는 미사 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하며 신앙을 고백한다. 현대의 많은 이들은 영혼의 불사불멸과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도 영세한 미신자가 많다, 나는 어떤가?
여보! 저 세상이 정말 있을까요?
하루는 잘 아는 신자 아주머니가 맥없는 모습으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반쯤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한다. ‘학창시절’부터 너무나 친하게 지내던 친구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은 사람과 제 남편은 절친한 친구였고, 남편을 잃은 그 부인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기에 결혼 후에도 자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런데 그 친구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어서 어제 장례식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이렇게 인생이 허무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 부인은 이렇게 살다 그냥 죽으면 그만인가 생각하니 너무나 허무하여 좀처럼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가 죽으면 정말 저 세상이 있을까요?” 남편은 한참 말이 없더니 “말이 그렇지, 천당 지옥이 뭐 있을라고!”하였다, 그 부인은 자기는 후세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하지만,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남펀은 굳은 믿음이 있을 것으로 믿고, 그 믿음에 기대고 싶었는데 남편의 대답이 그렇게 나오자 너무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하며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나 통계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 중 ‘천당이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에 ’절대로 믿는다’는 대답은 55.5%(남자 46,8%, 여자 67.7%)이고, ‘어느 정도 믿는다’는 대답은 27.1%(남자 35.8%, 여자 25,1%)로 나타난다. 이 둘을 합쳐 천국의 존재를 믿는 신자는 84,6%라고 하겠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신자가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현대의 사상적 페러다임(모델?)
오늘 복음에서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형이 자녀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의 대를 이어줘야 한다는 구약의 율법을 예로 들면서 죽은 자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예수님은 단호히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 하느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이는 그 조상들이 이미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은 하느님 앞에 살아 있으며 하느님은 그들과의 계약을 항상 기억하시며 지키시는 분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근대 세계를 특징짓는 패러다임(특징적 모델?)은 ‘신앙에 대한 이성(과학)의 우위, 신학에 대한 철학의 우위, 은총에 대한 자연의 우위, 교회에 대한 세상의 우위’로 요약된다고 하겠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神), 부활, 은총, 천국(후세) 등에 대해서는 신뢰나 관심이 없고, 오직 현세적 발전, 인간의 이성과 과학, 자유, 쾌락 등에 관심과 신뢰를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 중에도 부활이나 은총, 후세 등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투쟁’에만 관심이 있든지 아니면 ‘내면의 평정’을 찾기 위한 수양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신앙인이라기보다 ‘무신론적 휴머니스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이들이 의외로 교회 안에 많다.
이성과 신앙은 진리에 다가가는 두 날개
교황님은 지난 10월15일 교황 즉위 20주년을 앞두고 당신의 13번째 회칙인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을 반포하셨다. 이 회칙은 사상가들과 철학자, 신학자들을 위한 회칙이라고 할 수 있다. 복제 인간의 출현을 우려하는 현 시점에서 교황님은 윤리적인 불확실성과 반 신앙적인 이 시대의 흐름을 우려하셨다. 이 회칙은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며 날아오르는 두 날개’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을 부정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존재도, 후세도 믿을 수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 믿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기에 진정한 신앙적인 용기나 결단, 투신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봉착하는 갖가지 한계상황에서 자칫하면 자살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세례받은 미신자’, ’무신론적 휴머니스트’는 아닌가? 이 미사 중에 겸손되히이 참된 믿음의 은사를 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