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기는 길 —- 한 상엽(신경정신과 전문의 의학박사)

 

죽음을 이기는 길  —- 한 상엽(신경정신과 전문의 의학박사)




근래에는 소련에서 죽음의 연구소를 차렸다고 한다.


그들의 유물사관론적인 견지로 볼 때 죽음도 하나의 질병의 개념으로 인식된다는 견해를 펴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서 갖가지 접근법을 사용하고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가장 쓰기 힘들어하는 말 가운데는, 영원, 사랑, 죽음, 행복 등의 단어가 있다. 그 중에서도 얼마 전까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었음은 사실이고, 이것은 죽음 문제만큼이나 심각하게 생각해 본 과제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나가 두려워하고 한 사람의 예외자도 없어, 이 세상의 생을 얻었던 사람은 필연적으로 죽어야 했고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생명의 신비나 죽음의 필연적인 결과는 인간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큰 과제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을 마지막 순간까지 치유 개념을 갖고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은 신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죽음은 절대자가 인간에게 알려주는 진리의 맨 마지막 열쇠가 될 것이다. 난 신이 이 문제를 그리 쉽게 인간의 지혜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시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유물사관론자들의 ‘죽음도 고칠 수 있다’는 신념은 저들의 무모한 도전으로서 가소롭게까지 느껴진다.




좁은 의미의 의학에서 죽음에 대한 신비를 깨려고 하는 노력은 물론 서방 세계에서도 있어 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어느 소녀의 부모가 과연 그가 식물인간 상태로 생명만 부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하고 사회에다 물은 적이 있다.


해를 거듭해 가면서 여기에 대한 토론이 분분하였고 각계각층에서 심각하게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 왔음은 사실이고 여기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아직도 없는 상태이다. 의사는 과연 안사술의 처방을 내릴 권리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좀더 오래된 이야기로는 이태리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있다.


지극히 화목하게 일생을 보낸 노부부. 말년의 아내에게 암 선고가 내려졌다.


아내의 암과의 투쟁, 투병이 몇 년이고 계속되어 오던 터에 끝내 남편에게 아내는 매우 어려운 요청을 해 왔다. “당신이 만약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나를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도록 저 총으로 나를 죽여주세요.” 이 말을 듣고 남편은 일생을 그처럼 사이좋게 살아온 부부였는데 결코 사랑하는 아내를 자기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며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고통에 시달리던 아내는 비명을 지르다 못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괴로운 갈등이 계속되던 그 어느 날 ‘정말 사랑한다면 제발 죽여 달라’는 아내의 요청을 눈물을 삼키며 들어주고야 말았다.




이 결과는 사회적 문제로 확대되어 법적으로 해결을 볼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결국 “그 할아버지는 살인자가 아니다. 고의적인 살인행위가 아니다.”라는 소견에 따라 종국에 가서는 무죄라는 해석으로 세상에 풀려 나오게 되었다.




아직도 의사들이 생각할 때 도저히 의학적으로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할 때 곧잘 그 가족이나 본인으로부터 안락사에 대한 요구를 받게 된다.


고칠 수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 생명의 연장만을 더하기 위해 사망을 연기시킬 뿐이라면 죽어야 할 장본인과 그 가족의 연연한 미련을 넘어서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어느 만큼 이 안락사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인지 인간으로서는 결정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죽음의 한계 역시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논의되어 죽음의 단정을 내리는 의학적인 한계선을 죽음의 선언이라고 정의를 새로이 내리게 된 바도 있다.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박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뇌파활동의 정지상태를 확인해야만 궁극적인 육신의 사망을 선언할 수 있다는 죽음에 대한 정의를 새로이 내리게 되었음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겁이 많은 나 역시 보편 타당성 있는 모습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3개월 동안 입원하여 죽음과 정면대결한 양 시시각각으로 가물가물 꺼져가는 육신의 저항을 경험한 바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께서는 내게 큰 가르침을 주셨고 거의 기적에 가까운 회생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은 주님께서 교만하지 말고 더 열심히 생활해 주길 그리고 어려운 지경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 봉사하라는 집행유예 상태와 버금가게 허락해 주신 줄로 알고 있으며, 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 생의 애착을 더욱 느껴왔으나, 나의 경우 신앙간증에 의하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죽음에 친숙한, 또 언제라도 부르시면 그 부름에 기꺼이 주님 대전에 나갈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간단히 나의 생활체험을 통해서 얻은 생각을 알리고 싶다.


나의 육신은 꼬집으면 아프고 칼로 찌르면 따끔하고 병의 염증이 고질화되면 화끈화끈하고 쑤시는 법임을 안다.




인간이 육에 대해서만 생각했을 때는 분명히 죽음이란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는 순간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삶의 영혼이 있음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우리가 말하는 죽음이란 육체적인 고통, 사망, 완전한 분리라는 개념을 갖고 인생을 보아왔을 때 고독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내게 있어 또, 모든 사람에게나 마찬가지로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육적인 모든 활동의 정지상태로 마지막을 불러들이는 것이 된다.


그 죽음은 육과 영의 완전한 분리를 가져오는 결과임을 알아차렸을 때 죽는 것은 결코 두렵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교리를, 가장 초보적인 지식으로 죽음이란 영혼과 육신이 분리된 상태를 말한다는 대목을 25년 전에 배웠지만 이제야 참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믿음의 미미한 체험에 의해서나마 누구에게나 죽음은 영혼의 영생과 구원받음으로 얻는 큰 기쁨임을 생각할 때 여기까지 날 깨우쳐주신 주님의 섭리를 한량없이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다.




나는 어느 아름다운 가정의 한 토막 이야기로써 죽음과 그 처리 과정에서 미흡당하는 일을 맡으신 분들에게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선대로부터 지극히 독실한 신앙가정이었던 그 집안의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커 온 악성종양의 선고를 받고 죽음이 임박하였다는 의사의 선언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현명치 못한 담당의사나 가족친지들 가운데는 쉬쉬하며 돌아가실 그날까지 암이라는 진단명이 본인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고 쉬쉬해 가며 숨겨 왔던 것이다.




얼마나 부자유스러운 눈치들이 오갔을까?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나 워낙 분별력이 명쾌했고 누구나 존경할 만한 분이었던 그 할머니는 진실 하나만의 신조를 갖고 살아왔듯이 죽음을 맞이하는 데서도 누구보다 현명하게 결론을 내려 자신의 직관력에 의한 예견으로 죽을 것을 결심한 나머지 별로 병원에서 하는 일도 없는데 집으로 가겠다고 주장하여 퇴원할 것을 희망했고, 종부성사 받기를 자청하였으며 오히려 당황해 하는 가족들을 위로해 가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삼일이 지난 어느 날 한밤중에, 마지막으로 신부인 아드님을 곁에 부르셨다. 마치 코끼리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힘이 있다고 함과 마찬가지로 그의 인생살이의 긴 여로를 거두어들이고자 하는 기쁜 마음으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아래 저 세상으로 승천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도 “엘리, 엘리!”라는 마지막 외침을 불렀으며 이 말은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 세상을, 죽음을 이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아니 계신 것이며 그의 외침소리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절규였음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본다.


그분이 부활하신 참 뜻을, 영원히 사는 삶을 일깨워 주는 너무나도 큰 목소리로 들을 수밖에 없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육에 관한 한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만은 당신께로 부름 받고 가는 영광의 구원을 바랄 따름입니다. 영혼은 드높은 영광의 역사하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일이며 낙엽은 가을이 되면 제자리 아래 쌓이고 썩어 자신의 새로운 봄을 맞아 기름진 밑거름이 된다는 자연의 한 섭리를 내 것으로 터득하게 도와주시고 구원받을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영원한 영혼의 삶을 위하여 사는 사람만이 죽음을 이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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