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32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32주일



11. 김정진 신부(나)/19                           12. 백은기 신부(나)/21

13. 박병준 신부(나)/24                           14. 김영곤 신부(나)/26

15. 강길웅 신부(나)/27                           16. 김영남 신부(나)/29

17. 신은근 신부(나)/31                           18. 한정현 신부(나)/32

19. 서울주보(나)/33                               





10              연중 제32주일   마르 12,38-44 (나) 과부의 헌금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의 내용에 따라 엮어질 오늘 강론의 말씀은 좀 색다른 점이 있음을 이해하셔야 되겠습니다. 오늘도 신자들은 교무금이나 연보라는 이름 아래 많은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헌금제도는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던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이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남자도 여자도 어린이도 또한 부자도 빈자도 홀아비도 과부도 모두들 나와서 얼마씩이나마 헌금을 한 것으로 압니다. 예수님은 이 광경을 지그시 쳐다보고 계셨겠지요.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모든 이들의 헌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계시던 예수님은 많은 헌금을 한 부자들에 관해서는 예사롭게 생각하시고 오직 렙톤 두 개 곧 동전 한 닢, 오늘의 약 20원밖에 못 낸 과부를 높이 평가하시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헌금의 다과를 따지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그 정성을 꿰뚫어 보시며 그 갸륵한 성심을 읽어 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처지에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자기가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입니다> 하시며 예수님은 과부의 행동에 전적인 찬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생각하건데 과부라고 모두 구차한 중에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속담에 <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은이 서 말> 이라는 퍽 재미있는 풍자어가 있습니다. 과부라고 다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만 오늘날 과부라 하면 생활력이 부족한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의 대명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한 과부는 진짜로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전부, 그의 생활비를 몽땅 헌금한 것이 위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길줄(마르코 12:30)아는 과부의 신앙심을 높이 보시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과부는 물론 이웃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온정을 베풀 줄도 알았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 과부는 자기의 구차한 살림살이 중에서도 자기의 생활보다 남을 돕고 성전에의 헌금을 더 중요시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는 시돈의 한 과부 여인이 어려운 살림 중에서도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엘리아 예언자에게 착한 일을 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과부 여인은 착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자기네 밀가루 항아리는 언제나 비지 않았고 올리브 기름병은 언제나 가득 차 있는 하느님의 기적을 보며 흡족히 잘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도 자기가 가진 것을 전부 바쳤다 하더라도 그가 전보다 못 살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과부는, 내가 가진 것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필연코 나를 도울 것이고 나는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마음가짐이 있기에 우리 신자들도 기꺼이 헌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정신, 이러한 신앙심이 없다면 한 푼도 아까워서 헌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하느님은 헌금 그 자체를 보시는 것이 아니며 헌금의 다소에 관심을 가지시지 않습니다. 헌금자의 마음과 정성과 성의를 보십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쓰고 남은 것, 자기에게는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을 교회에 바치는 행위는 헌금이 될 수 없습니다(미사해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가 자기 수중에 있는 전부를 내놓음으로써 예수님의 눈에 들었다면 우리는 우리 재산을 전부 내놓을 처지는 못된다 하더라도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헌금할 의무는 있다고 봅니다. 부자가 많은 헌금을 하는 행위는 가상한 일이며 당연한 일입니다. 몇 년 전에 책정한 교무금의 액수를 현재까지 고수하는 행위가 진실한 헌금이 될 수 없을진대 아예 생각조차 아니한다면 말할 건더기가 없어집니다.



과거에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본당에 개신교에서 개종한 열심한 신자가 있었답니다. 개신교 신자 시절에 수입의 십분의 일을 내는 십일조를 지키던 습성이 몸에 배이어 개종 후 성당에 와서도 또박 또박 수입의 십분지 일을 내었답니다. 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사람도 십일조를 지키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사연을 묻는 어느 인사에게 대답하기를 나는 이제야 명실공히 진짜 천주교 신자가 되었노라고 하더랍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 본당에는 자기 수입의 10분의 1(3만원)을 헌금하는 두 가정이 있습니다. 김 골롬바 가정과 김 안나 가정인데 더구나 김 안나 가정의 경우, 개신교에서 오신 어머니는 아직 성세를 받지 않았지만 매번 부부 동반하여 가족이 나란히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모범적인 신앙 가족입니다. 그분들의 정성과 고운 마음씨는 하느님 대전에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끝으로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풍성하게 뿌리는 사람은 풍성하게 거둡니다. 각각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내되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 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Ⅱ고린 9,6). 아멘.











11            연중 제 32주일 마르 12,38-44 (나) 기쁜 마음으로 희사하라

                                                            백은기 신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물질을 소유함으로서 기쁨을 가지게 되며, 그 풍요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만과 빈곤에서 오는 서러움을 한 번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 세계에는 항시 이 같은 모순과 대립이 잔재하고 있습니다. 현세를 살아가면서 고민해야 하고 우리 세대에서 반드시 해결해 놓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빈곤의 추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민족은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과 외국의 침노에서 온갖 시련을 당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이제는 그 수렁을 겨우 벗어나려고 갖은 힘을 기울여 조금씩 조금씩 해결해 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어느 국민이든 게으르고 분란한 곳에는 분열과 패망이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부지런하고 단합이 잘 되면 그 나라와 국민은 흥하게 되며, 강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느니만큼, 오늘에 투신하여 새 나라와 새 민족의 장을 펼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에서 해방되고, 궁핍에서 구출되어야 하는 작업을 구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희사와 나눔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저 사상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져져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썩혀 새싹을 내게 하는 하느님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요한 12장 24절 참조)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남에게 베푼다는 사실과 받는다는 사실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값지고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에게 또는 절실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희사하거나 베푼다는 일은 신앙적인 차원으로 볼 때 동기가 순수할수록 봉사적인 희생과 사랑이 될 것입니다.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주느냐가 문제이지, 단순한 물량적인 수치에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겝니다. 그래서 희사는 주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즉 사랑과 믿음을 증거하는 위 방편에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제외시킨다면, 그런 희사는 두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희사에는 다소 무리하면서도 우직스러운 내용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한 편 우리 인간들은 현재 시간으로는 세속에 묻혀 있으면서도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의 말과 같이, 우리는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고 있지만, 육신으로서는 죄의 법을 따르고 사는 인간들(로마 7장 25절)이라는 점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낡은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새로워질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2고린 5,17)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같이,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주님의 대전에 봉헌함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루가 12,41-42)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자케오는 자기 집에 방문하신 주님 앞에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시사하고, 과거사를 통해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재산을 착취한 일이 있다면 네 몫을 물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의로운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루가 19,1-2)



과연 우리 모두는 성소로써 주님 앞에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여 새 인간으로 변모될 수가 있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반드시 물질적으로 부유하다 해서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 속담에서도 천석군은 천가지 걱정, 만석군은 만가지 걱정이 있지만, 거지는 얻어먹을 걱정 한가지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세속적인 지위가 올라갔다고 자만들 하지만, 반대로 하는 나라를 향해서는 더 높은 뫼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두셔야합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과의 관계 개선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 줄 압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사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야 하고, 밝은 장래 꿈을 키우도록 해야 합니다. 어느 신앙체험을 발표하던 자리에서 있었던 한 여인의 사연을 다 같이 반성해 보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에게 보여준 성령의 놀라운 체험들을 열띤 어조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구석에 앉은 이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굳은 얼굴을 했습니다. 이때 사회자는 그 여인을 향하여 당신은 주님께 감사할 아무런 체험담도 없으신가요? 라고 했답니다. 그때야 그 여인은 말문을 열기 시작하였는데 저 사람들은 모두가 위선자들입니다. 저 사람들이 나에게 꾸어간 쌀과 금전을 갚지 않아서, 자신과 자녀들은 굶고 있는 형편인데 어찌 이런 자리에서 주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고 하였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저나 우리 신자들이 자못 위선적 내지는 자기 음폐를 유발할 수 있는 점들이 있다는 본보기라고 봅니다. 우리 자신이 이와 같은 모순을 저지르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봅시다. 주님은 우리를 구해 내시기 위하여 몸값을 대신 치루시고 죄와 죽음을 이겨내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 앞에 무엇을 드려서 보답을 해드려야 하겠습니까? 재산 가운데 미소한 것을 또는 자신에게는 불필요한 것을 내놓았다고, 우리는 할 책임을 다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을 냉철하게 비판해 봅시다.



과거 우리 교회는 한 때 부유층 사람들의 유산을 물려받아 재산을 소유하고 부를 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대중과 서민층들이 정성을 다해 바치는 봉헌금으로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희사의 정신은, 하느님 구원에 감사하고, 찬미하며, 희생의 뜻을 포함시킨 것이라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할 때, 우리가 베푼 희사를 주님께서는 즐겨 받으시고, 우리가 지은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며, 은총과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는 의인이거나 죄인들이거나 모두 함께 사랑해 주시는 것과 같이, 부자나 빈자들도 모두가 구원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생명의 희망과 영복의 기대를 가질 수가 있게 되었으니, 하느님과 사람에게 희사함으로써 달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잘못한 인간을 바꾸어 주시려고 오셨으며, 삐뚤어진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비단 세상의 오류와 유혹 속에서 온갖 시련을 겪을지라도 결코 주님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도록 하셔야 합니다.

자비하신 주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며, 그분이 나를 찾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거나 형제들을 위해서 자신의 잉여분을 내놓지 말고, 쓸 것을 다 쓰지 못한 갸륵하고 애틋한 정성이 담겨 있는 것으로써, 기쁜 마음을 갖고 희사하시기 바랍니다.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최후의 심판 내용에서 밝히신 것처럼 주님 대하듯 진정한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희사는 얼마를 바쳤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내고 남은 것이 얼마가 되며 내가 가진 것을 희생적이고, 봉사적인 정신을 갖고 신앙적인 의미에서 봉헌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의미로 볼 때, 지금까지 우리가 희사한 것은 시작 단계이며, 겨우 참여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아직도 완전한 희사는 문턱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우리가 소유한 것이라고는 비록 자신의 몸이라 할지라도 창조적인 입장을 통해서 본다면, 그 어느 하나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것은 없습니다. 서로 공유하면서 나눔과 이음으로서 신탁된 본연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본래가 부요하신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때문에 가난하게 되었으니, 그분이 가난해 지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고린토 후서 8장 9절)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랑의 종신 부채를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미련한 인간으로서 물질적인 부와 현실적인 풍요와 육체적인 향락을 누리려고 하지만,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정신적인 풍요와 영적인 결실을 거두도록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초대 교회 신자들은 환난과 박해 중에서도 오히려 기쁨에 차고 넘쳐 있었으며,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많은 희사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감히 기대하지도 못할 정도로 믿음과 언변과 지식에서 열성과, 그리고 사랑에서 그들은 출중했던 것을”(고린토 후서 8장 1,2,7절 참조) 상기해 주십시오. 그러한 처지에 있었던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희사함으로 그들을 닮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타이르시고 계십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도 끝 날에는 남음이 없을 것이요, 적게 가진 사람들도 끝 날에는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2고린 8,15), 그러므로 현세에서 적게 뿌린 사람은 적게 거둘 것이며, 많이 뿌린 사람은 많이 거둘 것입니다” (2고린 9,7) 아멘, 감사합니다.











13                연중 제 32주일   마르 12,38-44 (나) 과부의 헌금

                                              박병준 신부





우리가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부드러운 한 마디의 말이나 따스한 미소가 참된 희사이다.



한 젊은이가 파리의 어느 공원을 산책하는 중에 한 거지노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초라한 옷차림이었지만 위험이 서려보이는 그 노파는 경건한 눈길로 그 젊은이를 보고 주저하는 듯 손을 내밀었습니다. 가난한 젊은이는 저도 모르게 호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노판 앞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장미꽃 한 송이를 정성이 담긴 몸짓으로 노파의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습니다. 노파는 감격한 나머지 떨리는 손으로 그 젊은이의 손을 붙들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장미꽃을 들고 일어서서 비틀거리며 공원을 떠났습니다. 그 노파는 이제 더 구걸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물을 희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희사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따른 참된 희사를 위해서 오늘 복음 말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같이 생각해봅시다.



참된 희사는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주느냐보다 주는 자의 정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과부처럼 기쁘게 정성을 대해 바치는 예물을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또 참된 희사에는 무모함이 요구됩니다. 과부는 가진 것을 다 바쳤습니다. 우리는 생의 일부, 내 활동의 일부, 내 자신의 극히 일부를 마지못해서 바칠 뿐입니다. 전부를 바치고 전부를 희생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동전 두 푼 낸 과부를 참된 희사의 표본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놀랄 일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희사를 비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순히 참된 희사는 그 양에 있지 않고 가진 것 중에 얼마였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부의 희사는 그녀의 마음에 가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바치는 것은 아무리 적어도 무시하지 않으시며, 아무리 가난해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봉사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난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양로원의 노인들, 고아들 등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굶주림이라구요? 천만에요. 오늘의 사회에서는 구제사업, 복지사업 등을 통하여 물질적인 배고품에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천시 당하며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하는 데 대한 갈증은 점점 더해만 갑니다. 그러기에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는 노인들도 생깁니다.



사람들은 이 갈증, 사랑의 굶주림을 채워 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던 젊은이가 장미꽃 한 송이를 준 것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그 손에 입을 맞추고 감격하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일요일 오후만 되면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어느 여고생도 있습니다.

또 신체의 자유를 속박당한 채 감옥에서 쓸쓸히 지내는 죄수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그리스도를 믿게 한 어느 신심단체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 부드러운 한마디의 말이나 따스한 미소가 진정한 희사가 아니겠습니까?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것은 십계명을 잘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주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을 대환영하면서 기쁘게 도와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무슨 걱정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뵈올 그 날을 기대하며 주님의 이 분명한 말씀을 상기합시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우리는 내 주위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위한 자선에 최선을 다합시다. 아멘.









14                     연중 제32주일  마르 12,38-44 (나) 과부의 헌금

                                                  김영곤․시몬 신부



부자들은 풍부한 가운데서 많은 돈을 넣었으나, 가난한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습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오늘의 복음은 겉보기에는 헌금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복음은 교회에 보다 많은 기부를 하게 하는 이상적인 모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기부나 자선의 중요성 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대조와 역설의 드라마입니다. 부자들의 거들먹거림은 가난한 과부의 눈에 띄지 않는 풍부함과 대조가 됩니다. 역설은 그녀가 그렇게 적게 낸 것이 그렇게 많이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화려함과 이기주의와 대조되는 그녀의 겸손한 자선을 두드러지게 칭찬하였습니다. 과부의 행동은 감명을 주기 위해 의도되지 않았으니 최상의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그녀의 가난함 가운데서 하는 순수한 자선은 우리를 비추어 보는데 이상적인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충동합니까? 그녀의 작은 동전 두 닢의 소리에서 우리는 어떤 도전을 듣습니까?



그녀의 마지막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은 제 1 독서의 과부의 행동의 메아리입니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식량을 예언자 엘리야를 위한 작은 빵을 만드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두 과부의 태도는 하느님께 오로지 의탁하는 믿음의 응답으로서 전체적이고 무조건적인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응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부들처럼 다른 이들의 필요에 개방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과부들이 했던 것처럼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이 우리를 격려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돌볼 용기를 줍니다. 희생과 자신의 상처입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과부의 행동은 우리가 붙잡고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어떻게 포기해야 하는지,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포기를 하게 하고, 포기로부터 오는 행복을 경험하라고 용기를 줍니다.



어렵긴하지만, 과부의 행동은 우리를 삶의 충만함에로 이끌어줍니다. 이 작은 드라마의 가장 깊은 의미는 성찬식과 관련이 됩니다. 성찬식에서 우리는 자신을 주는 법을 배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가장 진정한 의미, 즉 자신의 선물을 보여 주십니다. 성찬식으로부터 우리는 진정한 인간 존재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과부처럼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주는 것임을 배웁니다.



사는 것이 주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삶을 선택하는 것은 주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15            연중 제 32 주일   마르 12,38-44(나) 외상 신자와 맞돈   

강길웅 신부



제1독서 Ⅰ열왕 17,10~16 (과부는 제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 주었다) 

제2독서 히브 9,24~28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복 음 마르 12,38~44 (저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넣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때에는 남기지 않고 있는 것을 다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어떤 의미에서 지독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그러한 철저한 요구가 우리에게는 큰 축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요구에는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주시는 사랑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산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백 살에 아들을 하나 얻어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울 때 하느님께서는 그 하나뿐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도록 아브라함에게 명하셨습니다. 아들을 죽여서 불에 태워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잔인하고도 끔찍스런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요구에 순명합니다.



귀여운 아들을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산으로 끌고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을 것입니다. 아마 눈에서 피눈물 을 쏟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따랐을 때 그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들을 잃지 않고도 하늘의 별보다도 더 많은 후손을 약속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과는 다릅니다. 인간의 계산으론 하나 있는 아들에서 하나 있는 아들을 봉헌하면 무자식이 되고 후손이 끊기지만 하느님의 계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 있는 아들에서 하나 있는 아들을 봉헌해도 그 후손이 십만도 되고 백만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봉헌을 인간의 계산으로만 따져서는 안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렙다의 과부도 자기가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아깝고 귀한 음식을 먼저 예언자 엘리야에게 바쳤기 때문에 그 과부 집에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아 그 대흉년에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에 자기가 먼저 먹고 하느님의 사람을 생각했다면 그녀는 굶어죽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실 때는 있는 것 전부를 원하시는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개 마귀란 놈이 그 백 배, 천 배를 뺏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한다 해서 뺏기는 손해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 봉헌을 통해서 내 인생과 재산이 지켜진다는 축복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서에 보면 하느님의 몫이 꼭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십일조라고 합니다. 레위기(27,30)에 보면 “수확과 수입의 십분의 일은 내 것이니 나에게 바쳐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라기(3,10)에 보면 “십일조를 바쳐 나를 시험해 봐라.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하게 주겠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일조의 은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쓰고 남는 것에서 얼마를 바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칠 것도 없고 또 그나마도 바치는 것을 굉장히 아까워합니다. 바칠 때는 심장이나 허파를 떼서 바쳐야 신이 나고 간이나 콩팥을 봉헌해야 재미도 있습니다. 신앙의 기운이 거기서 생기고 은혜의 맛도 거기서 생깁니다. 찌꺼기를 바치려니까 신앙이 부담만 됩니다.



시골 본당에서의 일입니다.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농촌 사람들의 얼굴이 늘 죽어 있었습니다. 강론 때 아무리 웃겨도 웃지 않습니다. 웃으려다가는 쑥 감춥니다. 뭘 시켜도 눈치만 보고 표정들이 항상 어두웠습니다. 처음에는 그 내용을 몰랐습니다. 가난과 일에 찌들어 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일 년 내내 교무금을 안 냅니다. 성탄 면접에 가서 야 그때 추곡수매한 돈에서 누구는 삼만 원, 또 누구는 오만 원씩을 일 년치라고 냅니다. 그래서 제가 신자들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일 년 내내 죽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것은 성당을 줄곧 외상으로 다니기 때문에 표정이 떳떳지 못하고 죽어 있다고. 그러니 매월 하루 품삯씩 첫 주일에 맞돈처럼 내놓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맞돈 내놓고 성당에 다니라고 하니까 신자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그런데 일 월부터 교무금이 수백 퍼센트 인상이 되더니 첫 주일에 그것도 구십 퍼센트 이상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신자들의 죽은 얼굴에 비로소 생기가 돌고 빛이 생겼습니다. 강론 때 웃기지 않아도 신나게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이젠 신앙이 즐거우니까 성당만 쳐다봐도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입니다.



외상 신자니 맞돈이니 하는 표현이 아름답지 않은 것만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을 제대로 바치지 않게 되면 그 신앙은 위선이요 떳떳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기도에도 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맛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봉헌이 떳떳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복은 봉헌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십일조가 어려우면 적어도 십일조의 반은 바쳐야 됩니다. 그래야 정성이니 성의니 말할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느님을 속이고 자신도 역시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 과부의 헌금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름다운 봉헌을 하도록 합시다.



16         연중 제32주일   마르 12,38-44 (나)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난한 과부의 정성

                                                           김영남 신부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가난한 과부의 정성」을 칭찬하는 말씀인데, 전체적으로 보아 율법학자의 태도와 가난한 과부의 태도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조심하여야 할 내용은 크게 보아 명예욕과 재물욕이다. 예수님은 먼저, 장터와 회당과 잔치 자리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그들의 명예욕을 비판하신다.



둘째로는, 두 가지 예를 통해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들추어내신다.「과부들」은 구약성서에서「고아」와「떠돌이」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필요한「가난한 사람들」의 대표격으로 자주 언급되는데,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날카로운 비판의 말씀을 하신다.

율법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는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하여는 복음말씀을 통해 알 수는 없지만,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의 역할을 하면서, 과부들을 속여먹는 경우들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는 있겠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남들에게는 거룩한 듯이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며,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신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이제는「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대목을 살펴보자. 이 대목은 예수께서「헌금함」이 놓여 있던 성전 앞마당에서 앉아서 가르치고 계셨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앞의 대목에서는 율법학자들의 태도가 본받지 말아야 할 예로서 제시되었다면,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의 대목에서는 과부의 태도가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어 있다.



매우 대조적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대목에 나오는 과부에 관하여는 그가 나이가 많은지, 병중에 있는지, 가족들은 있는지 등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바라보고」계시다가 어느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화폐단위였던 렙톤 두 닢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히 여러분에게 말합니다」하며 매우 장중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치평가가 잘못 되어 있음을 가르치신다. 헌금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헌금으로 표현되는 자세의 질이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외양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가르치신다(참조: 야고 2,1-13) .

  

그리고 바로 앞 대목에서「과부들의 가산을 들쳐먹는 율법학자들」에 관한 말이 있었는데, 다시 이 대목에서 과부가 언급되면서 그의「가난한」처지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가난한」과부들을 도와주어야 할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그들을「등쳐먹어」그들의 가난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판단은 준엄하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종교지도자들의 그릇된 태도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말해준다.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토록 날카로운 비판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유다인 사회에서 영향력이 매우 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과부는 일반적으로 성서의 유다인들의 사회에서 너무 가난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무시받기 쉬운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가난한 과부를 본받아야 할 예로 제시하신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은, 당시의 사회에서 볼 때 종교지도자들이었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말하기 전에, 우선 종교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피해를 주는 경우들도 더러 있음을 생각할 때, -그것이 어찌 사이비 종교들에게서만 보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찌르듯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은, 복음 말씀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율법학자들의 명예욕과 재물욕이 뒤섞인 위선을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하지만 온 정성을 다해 헌금하는 과부의 정성어린「하느님 공경」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초대를 받는다.

또한 복음 말씀은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특히 교회 안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자신들이 혹시라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심하게 비판받는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교회 공동체 전체는 교회 안에서 가난한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무시당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고, 그들이 교회를 따뜻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한다고 깨우쳐 준다.

날은 이제 점점 추워지는데,「경제한파」속에 수많은 실직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교회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신앙공동체」안에서만은「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형제자매들의 사랑」을 따뜻하게 느낄 수 있도록 급히 구체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17         연중 제32주일   마르 12,38-44 또는 마르 12,41-44 (나) 과부와 헌금  

                                                        신은근 신부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사람들의 어디를 보고 계셨을까. 얼굴 표정, 아니면 손이었을까. 아마 몸 전체를 보고 계셨을 것이다. 헌금은 정성이다. 정성은 몸가짐에서 드러난다. 물건을 사고 돈을 내듯 그런 태도는 아니었는지, 의무감 때문에 느낌없이 헌금대 앞으로 나갔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헌금은 당당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성이 된다. 액수가 많고 적음은 별 문제가 아니다. 정성이 들어있어야 참된 헌금이 된다.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정성으로 헌금하는 여인을 보신다. 액수는 적었지만 내용이 그분을 감동시킨다. 여인은 자신의 생활비에 해당되는 돈을 바쳤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행위다. 자신의 생활비를 바치다니, 그럼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러나 여인은 바쳤던 것이다. 물론 가난한 여인이었기에 생활비는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바치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생활비를 바친다는 것은 전부를 바친 것이 된다. 먹지않아도 좋다는 희생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 여인은 자신의 정성을 그렇게 희생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더 이상 가난한 여인이 아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셨기 때문이다. 외적모습은 여전할 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부유함이 그녀를 감쌌을 것이다. 생활비를 바쳤기에 생활을 보장받는 기적을 그녀는 체험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가난한가 부유한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부유한 사람이고 만족할 수 없다면 가난한 사람이다. 객관적 판단으로 소유가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불만 속에 있다면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만족해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이라야 당당하게 헌금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헌금의 많고 적음을 떠나 애정이 담긴 봉헌을 할 수 있다.

생활비를 바쳤던 과부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억지로 바쳤다면 어찌 주님께서 감동하셨겠는가.



여인의 모습 안에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일상사에 쫓겨 돈과 시간이 부족한 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기도하는 시간도 선행을 베풀 여유도 없이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돈보다 시간이 가난한 우리들이다. 그런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시간은 주일 하루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시간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한주간 살아온 삶을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성서의 여인이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듯이 그렇게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봉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실 것이다. 얼마나 많은 헌금이 아니라 어떤 헌금을 바치고 있는지 보고 계실 것이다. 돈을 바치는 것만이 헌금은 아니다. 시간을 바치는 것도 헌금이다. 희생을 바치는 것도 헌금이다.



한주간을 살면서 겪었던 아픔과 억울함과 오해와 실망스러움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도 헌금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치는 헌금 속에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어야 한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다. 그렇게 우리도 일주일의 삶을 함께 바치는 헌금이 되도록 하자.











18                연중 제32주일  마르 12,38-44 (나)  등불과 기름

                                               한정현 신부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혼인 당일 풍속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혼인예식이 신랑 집에서 거행되기에 앞서 먼저 신부 집에서 한차례 축하잔치가 벌어진다. 그런다음 신부를 데리러 저녁 늦게 신랑이 신부 집에 나타난다. 하지만 신부의 친척들에게 줄 선물에 대한 흥정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신랑이 신부를 데려갈 수 있었기 때문에 신랑의 도착이 지연되는 일이 예사였다. 드디어ꡒ신랑ꡓ이 밤늦게서야 일행과 함께 마을어귀에 도착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 알린다. 이와 함께 신부를 데리고 화려한 행렬에 싸여 다시금 자기 집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신랑 집에서 혼인예식이 거행되고 성대한 혼인잔치가 벌어진다.



이 혼인풍속도에 따라 오늘 복음을 해석해 보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ꡒ신랑ꡓ은 종말에 갑작스레 오실 주 그리스도를 가리키고,ꡒ열 처녀들ꡓ 곧 – 여종들 – 은 그처럼 갑작스레 오실 주님을 지금이라도 당장 맞이해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며, 혼인잔치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잔치를 가리킨다. 결국 주님의 갑작스런 오심과 그분의 결정적인 심판이, 오늘 복음에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과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각각 자신들이 준비해놓은 기름에 따라 환히 밝혀든 등불과 꺼져가는 등불로써 신랑을 맞이하려 했던 일들 및 그로 인해 혼인잔치에 참석하거나 끝내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던 사건들에 비유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삶 안에서 꺼뜨리지 말고 타오르게 해야하는 등불 및 미리 준비해야 하는 그 기름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이 믿음의 결단을 통해 끊임없이 각자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키고 쇄신해야 하는 일을 상징한다.











20          연중 제32주일   마르 12,38-44 (나)  작은 사람의 큰 신앙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의 내용은 율사들을 조심하라는 훈시(38-40절)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41-44절)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이 두가지 이야기는 거짓 신앙인의 표본인 율사들과 참 신앙인의 귀감인 과부의 두 인간상을 보여 줍니다.



 ㄱ. 거짓 신앙인의 표본인 율사들(38-40절)

  예수께서는 율사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율사들은 기다란 예복을 입고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회당에서는 높은 좌석을,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빼앗으며 겉꾸며 길게 기도합니다. 율사들은 율법에 정통하여 하느님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저 율사들의 말 다르고 행동 다른 비리를 단죄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재물을 늘리고, 신심을 과시하면서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는 저 율사들의 비행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저들의 비리를 나무라면서 저들을 일컬어 ‘위선자들’, ‘눈먼 자들’, ‘눈먼 인도자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ㄴ. 참 신앙인의 귀감인 과부(41-44절)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모이는 ‘여자구역’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에 헌금함 열세 개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예수께서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동전을 던져 넣는 모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여러 부자가 많은 돈을 넣고 있었는데 가난한 한 과부가 와서는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적은 액수였습니다.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 가난한 과부야말로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모두들 넉넉한 가운데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그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모두, 곧 생활비를 몽땅 던져 넣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헌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그 과부의 거짓없는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율사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먼저 소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과부의 참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두 부류의 인간상을 보여 줍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만 실상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부와 명예를 쫓는 율사와 같은 인간상과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여 자기자신의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는 과부와 같은 인간상입니다. 오늘 교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과부와 같은 인간상일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말은 그럴 듯하게 하면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이 저 과부를 본받아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고 하느님만을 소중하게 생각할 때 비로소 종교인의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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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나해 연중 제 32주일 주일강론 모음

  1. user#0 님의 말:

     

    가난한 과부의 헌금

    1. 말씀읽기: 마르코 12,38-44

    38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말씀연구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하여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축복해 주십니다. 어떤 모습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아보고, 내가 봉헌하는 봉헌금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봅시다.


    38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입법자였습니다. 모세 이후로는 조상들의 전승만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의 관심사는 모세 율법과 아울러 거기서 발전된 전승을 보존하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을 뜻을 알려 주었습니다.


     율법학자 제도는 에스델 시절(기원 전 5세기)의 것인데,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소임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유다 사회는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이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마태23,2-3)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유다 국민의 지도자로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모세를 이은자들 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모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이는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을 스스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르치는 이는 입으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을 통하여 배우는 사람이 신앙을 잃을 수도 있고, 신앙을 얻을 수도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메시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남에게 인사를 받는 사람은 존경을 받는 것이니 그도 존경받을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일차적인 존경의 행위는 바로 인사하는 이에게 함께 인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며, 배려하고,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 내가 친한 사람에게만 인사할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존경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자리는 어른을 기준으로 앉게 되어 있고, 그날 행사의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앉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리 자체가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가 중요한 것입니다. 권위 있는 사람이 앉은 자리는 모두 권위 있는 자리가 됩니다. 또한 남을 존중해준다 해서 내가 결코 낮아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남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 안에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고, 그 만큼 볼 눈이 있는 사람임이 증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과부들은 힘없음을 상징합니다. 재산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재산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부들이 재산관리를 제대로 못하니까 율법학자들이 그것을 해 주겠다고 하면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었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누가 “재산분배”에 관한 자문을 해 오는 것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이 재물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자신이 재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올바로 나를 보지 못하면 그 보다 더 추잡한 삶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아닌 척 하게 됨을 명심합시다. 위선. 그것은 나에게 멀리 있는 단어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 내 안에 있는 단어임을 꼭 명심합시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헌금함이 있는 곳에는 나팔 모양으로 된 열세 개의 헌금궤가 있었습니다. 이 궤들은 율법 규정에 따른 봉헌물과 자발적으로 하는 봉헌물을 넣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이 얼마나 되며  또 무엇을 위한 헌금인지를 조사하는 당번사제에게 먼저 그 돈을 주었습니다.

    사제: 어느 곳에 쓰일 헌금을 얼마나 내시겠습니까?

    봉헌자: 사제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100만원!” “100만원”을 냅니다(거들먹.. 거들먹^*^)

    그러면  사제는 액수를 검사한 다음 각각 정해진 목적에 따라 놓여져 있는 합당한 궤를 지적해 주었습니다.

    사제: 저 두 번째 헌금궤에 넣어 주시지요.

    봉헌자: 에헴. 그러시지요.

    (성당에서 이렇게 하면 봉헌금은 엄청 올라갈 것입니다. 하지만 신부님들께서 무척 힘드시겠지요.^*^)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그런데 한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과부의 헌금. 언제 들어도 부끄러운 이야기 입니다. 많이 번 사람들이 많이 낼 것 같지만, 많이 번 사람일수록 많이 낸 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이 번 사람들이 더 많은 것에 관심을 갖는 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은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똑같습니다. 오늘 과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것을 나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온전히 버리지는 못하지만 조금 덜 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왜 자신의 생활비를 모두 바쳤을까요? 그녀가 삶을 포기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그녀는 특별한 지향은 없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지극히 겸손하게 준비한 봉헌물(렙톤 2개)을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로 봉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예수님께서는 금액을 보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셨습니다. 정성을 보셨습니다.

     성당에서 봉헌을 하시는 분이나, 교무금 등을 내시는 모습을 보면 “안 내도 되는 사람”은 참 많은 것을 봉헌하고, “좀 더 내도 될 것 같은 사람”은 움켜쥐고 생색만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렙톤 두개를 넣는 과부의 마음 어떠했을까요? 그것을 받아든 사제가 이 여인은 렙톤 두개를 넣는다고 소리쳤을 텐데...,  하지만 그 여인은 가진 것을 전부 내 놓았습니다. 그녀는 오늘 하루를 굶는다 할지라도 행복할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그래서 남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했을지라도

    그녀가 하느님 앞에서 떳떳했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기에 그녀는 복된 여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과부의 마음을 몰라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알아주시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 앞에서 떳떳한 것보다는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떳떳한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내일 먹을 것도 생각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들일 굶던 말든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모두 바쳐야 한다는 것이냐? 집 팔고 땅 팔아서 다 바쳐야 하느냐? 그것이 사이비 종교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

     바치기 싫은 사람이 꼭 그런 핑계를 댑니다.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들이 꼭 딴 소리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가진 것을 다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비록 렙톤 두개라 할지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그녀의 사랑을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영적으로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큰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봉헌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오늘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바라보면서 내 신앙생활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내 삶에서 위선적인 부분을 어떻게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내 삶이 내가 전하는 메시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② 과부의 헌금을 바라보면서 내가 가진 것 중에 봉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봉헌할 때 아까워한 적은 없는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봉헌을 하지는 않았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③ 내가 가진 것들 중에 남에게 빌려 주기 싫은 것의 목록을 작성해 봅시다. 빌려 줘도 되는데 안 빌려 주고 있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 보고, 그것이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도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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