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
1. 조순창 신부(가)/2 2. 김몽은 신부(가)/3
3. 강덕수 신부(가)/5 4. 최기산 신부(가)/6
5. 강길웅 신부(가)/8 6. 서경윤 신부(가)/10
7. 김현준 신부(가)/12 8. 서울주보(가)/없음
9. 10처녀의 비유(가)/14 10. 죽음을 준비하는 삶(가)/16
1 연중 제32주일 마태 25,1-13 (가) 지혜를 찾고, 등불을 밝히자
조순창 신부
11월은 ‘위령 성월’입니다. 우리와 가족으로, 또는 이웃으로, 그밖에 여러 가지 인연을 맺고 살다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연중 마지막 주일을 앞두고, 3주일 동안 ‘나의 죽음’과 ‘이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며, ‘행복한 미래’를 준비하도록 합시다. 준비 없이 성공할 수 없다면, 잘 준비하는 삶은 ‘지혜로운 삶’이요, 준비 없이 사는 것은 ‘미련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식사 준비, 출근․등교 준비 등 내일을 위한 준비와, 시험 준비, 출연 작품 준비, 결혼 준비 등, 평생에 많은 준비를 하며 살지만, 한 생애는 영생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준비 없이 큰 일을 당하거나, 준비가 있어도 부족하여 당황하고 실패하는 경우를 겪게 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대로 바르고 착하게 살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리며, 악하고 그릇되게 살면, 하느님을 떠나 멸망의 불행을 겪을 줄을 알면서도 준비는 부족합니다.
지혜서 6장에 “지혜를 찾아 깨어 있으면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지혜를 사랑하면 불멸의 보증과 하느님나라에 인도될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근심없이 지혜를 찾고 있습니까?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바울로 사도의 첫 번째 편지에 “하느님을 믿는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데살Ⅰ: 4/13) 고 하였고,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는다.”(데살Ⅰ: 4/14b) 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누릴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시며,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등불을 들고 항상 깨어 있으라.”고 했는데, 우리는 열성을 다해서 살고 있습니까? 등불을 밝히고 있습니까?
‘한번 닫혀진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차하는 순간에 기름 떨어지고, 회개의 기회를 잃으면 불행입니다. 지금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린 하느님 자비의 때입니다. 영생으로 가는 준비의 때입니다. 인생의 승부와 멸망이냐 구원이냐의 가름의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 믿음이 두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계시 진리가 영원 불멸의 진리요, ‘하느님의 뜻대로 살 때에 구원을 받는다’는 진실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 생의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간의 참 구원과 행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이 불변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랑을 나누며, 기도와 성사, 용서와 회개, 자선과 봉사로 살아갈 때에 영생을 잘 준비하는 것이 되며,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구원의 앞길을 밝힐 등장을 받았다며, 등불을 밝힐 등장이 마르지 않게 해야 합니다. 믿음․소망․사랑․십자가가 사라지고, 불신․절망․미움․이기․영화만이 살 때에, 등불도 꺼지고, 암흑의 불행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꺼지지 않는 등불을 밝히고 나아가 구원을 얻을 것이요, 오늘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영생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우리의 구원의 길에 밝은 빛 비추어 주시고, 주님 뜻만 따라 삶으로써 영생을 잘 준비하는 한 주일이 되게 하소서. 아멘” (1981. 11.8.)
2 연중 제 32주일 마태 25,1-13 (가) 신랑이 오니 마중 나가라
김몽은 신부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하고 경고하신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열 처녀는 각 신심 단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등은 각 단체가 내걸고 있는 믿음의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기름이란 곧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첫째, 우리 교회에는, 교회라는 큰 단체가 있으며, 이 단체 속에는 크고 작은 단체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이 단체로 하여금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단체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 같이 항상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 어느 날 어느 시간이라도 신랑을 맞을수 있지만, 한편 어느 단체는 미련한 다섯 처녀들 같이 준비를 못하고 있어 신랑을 맞을 수가 없게 되었다면, 지금이라도 준비를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 가운데 “신랑”이라 함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모든 사업이라 보아도 될 것이다. 과연 우리들이 주님의 사업을 이루는데 다함께 참여하고 있는지 모두가 반성하여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의 사명은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둘째, 등을 단체가 내걸고 있는 믿음의 행위라 할 때, 단체의 믿음이 각계 각층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다. 등은 기름(사랑)을 담아 불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기름을 담기 위해 부족함이 없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단체의 장상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큰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항상 명심하고, 사랑의 불을 밝히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입도록 성령께 매달려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다스리시는 근원이시므로, 인간의 지혜로써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셋째, “기름” 을 사랑으로 본다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여야 함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계명 중에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 곧 “사랑의 계명” 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12:28-34, 마태 22:37-39). 이 계명은 이 세상에 어느 것 보다도 가장 좋은 보물이 아니겠는가? 등에 기름이 없으면 불을 밝힐 수 없듯이 크리스천이 사랑이 없다면 무엇으로 크리스천임을 나타낼 수 있을까? 크리스천은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며, 천국도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부족한 기름(사랑)은 끊임없는 기도생활과 봉사로써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각 단체나 개인이 모든 것을 잘 하고 있을지라도 사랑을 빼놓고 있다면 기름이 담겨 있지않은 빈 둥과 같은 것이다.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Ⅰ고린토 13:1). 크리스천생활에 크게 장애가 되는 것은 자기기만(自己欺瞞)인 것이다. “저 사람 신자라고면서 거짓말쟁이야” 라는 말을 듣는다면, 무엇을, 어떻게, 누글 사랑한다 말인가? ……
복음 말씀은 끝으로 “항상 깨어 있어라.” 고 들려주신다. 미련한 다섯 처녀 같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육신에 매여 영적생활을 게을리 하기가 쉽다. 태만으로 인하여 뒤 늦게 “주님, 주님, 문 좀 열어 주세요” 하고 간청해 보아야 그때는 이미 문이 잠긴후이다. 우리는 슬기롭게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미련한 다섯 처녀의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도 같아 햇빛만 반짝이면 사라지고 만다. 육신과 세속에 너무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에 심판의 날이 도둑 같이 찾아 와 덮칠 때에, 비로소 주님, 주님하고 외쳐 본들 주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으실 것이다.
항상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로써 깨어 있을 때 이후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3 연중 제 32주일 마태 25,1-13 (가) 선견지명 (先見之明)
강덕수 신부
소극적인 신앙태도를 지양하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자.
이제 연중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왕 축일을 앞두고 교회는 충실하고 현명한 지상 생활을 해 나가도록 권면합니다. 오늘 복음은 혼인 잔치라는 가끔 볼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을 통해서 구원받을 만한 자세가 되어 있는가를 판가름하는 뜻깊은 비유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10동녀 모두 잠들었습니다.
얼마 후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모두 일어나 각자 자기의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동녀와 미련한 동녀들의 등불은 어떻게 달랐는가? 지혜로운 동녀들의 등은 준비했던 기름으로 밝게 타오르고 있었고, 미련한 동녀들의 등불은 힘없이 꺼져가고 있었다는 그 차이입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은 “깨어 조심하라” 보다는 천국에 대한 지혜로운 “선견지명” 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에 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전 준비가 꼭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준비 없이는 어떠한 일이라도 성공할 수 없고 아마도 성공리에 끝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안에 사는 우리들에겐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 번 잘못한 과오는 되찾을 수 없고, 죽음에 임박하여 지난 세월을 되돌아봐도 아무런 희망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미련한 5동녀들 역시 꺼져가는 자기들의 등불을 보며 잔치에서 제외되는 쓰라림을 겪지만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실수 두 번 잘못이 우리의 삶을 망치게도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삶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눈(目)일 것입니다. “예견” 이랄까, “선견” 이랄까, “선견” 이란 단지 미래를 내다보는 것 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미래를 보기 위해 과거와 현실에 처한 우리의 상황을 날카롭고 명석하게 판단하고 볼 줄 아는 힘이 필요합니다. 마치도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백성에게 처한 죄의 상태를 파악 경고하면서 앞으로 당할 커다란 벌까지도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야훼를 하느님으로 모시고 섬길 때 백성들이 받을 바 영원한 상급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견지명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즉 우리들 자신의 문제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장 지혜로운 삶이 있다면, 이는 우리 생활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분은 시작이요 마침이며 우리의 목표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을 우리 현실에 받아들이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혹은 반대로 우리 현실과 미래에 황금 만능이나 과학 만능이란 우상을 두고 살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그러한 헛된 우상을 두고 산다면 그 우상들과 더불어 죽고 말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반성해 봅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지. 맹목적인 신앙 생활을 버리고 현명한 삶, 즉 구원을 가져다 주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의 삶 안에서 현실을 올바로 쳐다 볼 때에 다가올 미래를 똑바로 내다 볼 수 있고, 미래를 올바르게 보고 희망을 품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참다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열 동녀가 모두 다 잠들었는데 왜 5동녀는 제외되고 지혜로운 5동녀만이 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지혜로운 동녀들은 현실을 직시하여 그 필요성을 파악했고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들도 다가올 하느님의 영광스런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미리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4 연중 제32주일 마태 25, 1―13 (가) “종말 준비\”
최기산 신부
뻑적지근한 결혼식 일류호텔 결혼식 비용이 5000만원을 호가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 개인이 먹는 음식비만 6만원이란다. 그런데도 예식장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초만원이라니 어찌된 셈인가? 과연 우리나라가 구제금융을 받는 나라인가 의심스럽다. 돈이 넘쳐나는데도, 가난하다니! 그래서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야 한다니 도무지 곧이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화려하고, 흐드러지게 먹고 마시는 예식을 치른 사람들이 이혼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마치 결혼식을 과시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결혼의 의미가 중요할리 없다. 분명히 그런 곳에서 결혼하는 사람들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혹은 전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할리 없다.
신혼생활의 재미는 돈을 아끼고 저축하여 살림살이를 하나씩 장만하는데 있다고들 한다. 하나를 성취하면 또 새로운 계획을 향해 서로 노력해가는 재미일 것이다. 그런 재미가 그들에게 있을리 없다. 그래서 따분하고 신통한 것도 없고, 계획할 것도 없기에 짜증만 난다. 결국 그들은 다투다 마음이 맞지 않는다,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등 사치스러운 불만을 서로 퍼붓다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이다.
나는 가끔 신문의 하단부를 유심히 본다. 분당․일산․수지 역세권 등등 아파트 선전이 가득하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 서민들이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라기보다는 돈 있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아파트들이다. 자기 집이 없는 사람이 많은데도 귀족이 되라는, 흥청대라는 속삭임이 넘쳐난다. 정부도 그들을 싸고도는 느낌이다. 50평 이상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리려던 세금을 취소했다. 과연 우리나라에 50평 이상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은 보호하면서 가난한 봉급자들의 세금만 더 올리면 이는 불공평한 처사다.
오늘날 우리의 결혼식 형태는 잔치가 아니고, 문화도 아니다. 과시하려는 장으로 변질되어 버린 듯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결혼식을 잔치로, 사랑의 행사로, 축하의 행사로 여겼었다. 어떤 집에 결혼식이 있으면 온 동네가 일주일쯤 법석대었다. 3일전부터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김치 담그고 나물도 다듬고 엿을 고았다. 하루 전에는 빈대떡도 부치고 메밀묵이나 도토리묵 혹은 청포묵을 쑤느라 더욱 바빴다. 남자들은 돼지를 잡고 닭을 잡았다.
그야말로 온 동네가 떠들썩하였다. 여자들이 모두 잔칫집에서 일하다보니 남편들도 식사 때만 되면 어슬렁어슬렁 와서 막걸리와 식사를 제공받았다. 물론 아이들은 하루종일 뛰놀며 먹고 놀았다. 이렇게 결혼식 전에 온동네가 잔치를 벌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치우는데 하루 걸렸고 수고한 사람들을 대접한다면서 또 하루 동안 잔치를 벌였다. 그러다 보면 신랑 신부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다시 잔치가 열렸다.
결혼식은 그야말로 온 동네 사람들에겐 행복한 일이었다. 별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가난한 시절이므로 잔칫집에 가면 먹을 것이 풍성하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 결혼식이 있나를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이것이 결혼식 잔치다.
유다 시골의 잔치 모습 오늘 성서가 전하는 잔치 모습은 우리의 옛 잔치 모습과 비슷하다. 그들도 일주일쯤 잔치를 했다. 신랑 신부는 그야말로 왕과 왕비 대접을 받았다. 그들도 가난했기에 잔칫집에 초대받아 간다는 것은 너무도 영광이었다.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고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그런 영광이란 인생에 있어 기념되는 행사였다. 여기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당시엔 신부 들러리(처녀)가 10명이었다는 것이다.
결혼식날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오는데 언제 신랑이 나타날지 몰랐다. 결혼 지참금 문제가 있어서 옥신각신할 수도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함 파는 사람들이 벌이는 실랑이질과 같았을 것이다. 또 결혼약정서에 서명도 해야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 밤에 신랑이 나타나기 일쑤였다. 들러리들은 신랑이 나타나면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해야하는데 신랑이 너무 늦게 오면 들러리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잠드는 때가 많았다.
ꡒ신랑이 온다ꡓ라는 말에 잠들었던 처녀들이 일어나서 등불을 챙기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 신부를 따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평소에 준비성이 부족했던 아가씨들이었나 보다. 다른 데 신경을 쓰다가 아무 준비 없이 온 들러리들이 나중에 안절부절 못하고 기름을 준비하려 했으나 늦었다. 이미 신랑과 신부는 잔치가 벌어진 곳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춤추고 놀았다. 미련한 처녀들이 늦게 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으나 문은 이미 잠겼다. 그 당시의 풍습으로는 일단 신랑과 신부가 들어가고 나면 문을 닫았다. 잔치 도중 문을 자꾸 열면 분위기를 깬다는 이유에서였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닥쳐오는 종말의 위기를 예견하면서 사람들을 각성시키고자 결혼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준비된 처녀들만 맛있는 음식이 즐비한 멋진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들은 깨어 준비했기 때문이다. 준비 없이 사각의 링에 오른 권투선수는 어떻게 될까? 물론 형편없이 되어 병원으로 실려갈 것이다. 준비 없는 시험, 낙방이 기다린다. 준비됐다는 사람도 죽을 쑤는데 하물며 준비 안된 사람은 어떻겠는가! 나는 과연 종말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에겐 천국의 잔치가 기다리고 있다. 준비는 우리의 몫이다. 남이 내 몫을 준비해줄 수는 없다.
5 연중 제 32 주일 마태 25, 1―13 (가) 지혜로운 처녀가 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6,12~16 (지혜를 찾는 사람들은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제2독서 Ⅰ데살 4,13~18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그분과 함께 살리실 것입니다)
복 음 마태 25,1~13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 나가라!)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는 다릅니다. 이를테면 세상의 지혜로 볼 때 하느님의 지혜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마치 쓸모없는 휴지 조각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십자가는 저주요 천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의 1독서는 지혜를 예찬하면서 지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데에 있으며 마음만 먹고 찾기만 하면 누구나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어떤 속성입니다. 하느님 자신일 수도 있고 또 하느님 자신의 일부 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데 없이 곳곳에 다 계십니다. 지혜가 바로 그렇습니다. 곳곳에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지 않고 영의 문을 열지 않으면 곳곳에 계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지혜가 아무리 문 앞에 기다리고 있다 해도 우리가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습니다.
특히, 세상의 지혜로는 하느님의 지혜를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혜 앞에 하느님의 지혜는 늘 깊숙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문 앞에 있으면서도 항상 감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선 세상의 어떤 지식이나 철학보다도 오히려 단순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도 지혜로운 자들과 미련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똑같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어떤 처녀들은 신랑을 만나는데 어떤 처녀들은 만나지 못합니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지혜의 차이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머리에 의지하는 약삭빠른 지혜와 그리고 자신의 지혜를 믿지 않고 늘 우직하게 깨어 준비하는 그런 지혜와의 차이입니다.
우리 속담에 “설마가 사람 잡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설마 설마 하고 미루고 게으름피다가 결국은 큰 재앙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옛날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썼던 ‘유비무환\’이라는 말과도 서로 다른 의미에서 상통하는 말입니다. 늘 준비하고 있으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대통령 자신은 아무 준비 없는 상태에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옛날 어떤 부자에게 바보친구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똑똑질 못하고 또 계산이 빠르지 못하기 때문에 부자는 늘 그 친구를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부자가 이상한 지팡이를 바보에게 주면서 “자네 보다 더 멍청한 바보가 있다면 이 지팡이를 전해 주게.\”하면서 놀렸습니다. 바보는 그래서 그 지팡이를 또 순수한 마음으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보 눈에 바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자기보다 다 똑똑하고 야물었습니다. 자기는 늘 손해보고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손해도 보지 않고 또 억울하게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보는 똑똑한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갑자기 부자가 병이 들어 누웠다기에 달려가 보니 이것은 아주 중병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병세로 치면 말기암으로서 다시 소생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 좋은 얼굴엔 수심이 가득 차 있었으며 한때의 영화도 다 물거품이었습니다.
이때 바보가 부자에게 병문안을 가서는 “그래, 천당 갈 준비는 잘 되어 있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면서 아무 준비가 없다면서 도대체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이때 바보가 참으로 한심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세상에 자네 같은 바보가 어디 또 있겠는가.\”하고 자기가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지팡이를 부자에게 도로 주었답니다.
한낱 우스개의 소리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깊이 새겨들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모양이 좋은 등잔, 그리고 값이 비싼 화려한 등잔을 원하면서도 정작 기름 걱정은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등잔이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 해도 그것이 밤에 불을 밝힐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잘 사는 것도 좋고 권력을 쥐는 것도 화려한 일입니다. 세상의 영화는 사실 우리의 등잔을 멋있게 장식시켜 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황금 등잔을 가지고 있다 해도 결정적인 시기에 불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 등잔은 참으로 슬픈 등잔입니다. 길을 밝힐 수 없다면 돈도 권력도 허무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마련한 등잔에 기름은 가득 채워져 있습니까. 교회는 지금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가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 시간은 오로지 그분만이 비밀스럽게 손수 계산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지성스럽게 깨어 준비하는 마음으로 등잔의 기름을 가득 채우도록 합시다.
6 연중 제32주일 마태 25,1-13 (가) 참으로 가치 있는 나눔
서경윤 신부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대답하여「안 된다.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한테 가서 너희 것을 사라」하고 말했습니다』 (마태 25,9)
나는 얼마전에 감동적인 짧은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러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짓고 고민하다가, 한 수도원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죄의 고해를 들은 고해신부는 그에게 감동적인 훈계를 했습니다. 이어서 사죄경을 외우며 죄를 사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평안히 물러가시라고 했습니다. 고해자는 자기가 무슨 보속을 해야할 지 물었습니다. 고해자는 신부가 보속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자 그 신부님의 대답은 「보속은 내가 합니다. 그러니 형제는 그냥 물러가서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짧은 글에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왜 충실히 수도생활을 해야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의 죄를 대신 지고 보속하며 살아가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도자는 자신이 죄짓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의 죄를 외면할 수 없으며, 하느님 앞에서 세상과 함께 책임을 나누어야 하므로, 기도하지 않는 세상을 대신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절제가 부족한 세상을 위하여 독신으로 살면서 , 열심히 재를 지키고 보속을 해야함을 깨달았습니다.
나눈다는 것은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과 가진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눈다는 것은 나에게 필요 없는 남는 것을 처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도 필요한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그만큼 나에게 불편함이 생기고, 따라서 희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눔이라야 참으로 가치있는 나눔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복음에서 슬기로운 처녀들의 처사가 불만스럽습니다. 내가 만일 오늘 복음을 다시 쓴다면 이렇게 쓰겠습니다.
『그때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불을 챙기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너희 기름을 우리에게 나누어 다오. 우리 등불이 꺼져 간다」. 그러자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래 절반씩 나누자.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기름이 모자랄지 모르니 우리가 얼른 가서 기름을 더 사올게. 그동안 너희는 우리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좀 지키고 있거라」 그들이 기름을 사러 나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신랑은 기다리던 처녀들에게 왜 등불을 둘씩 들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사정을 알게 된 신랑은 기름을 사러간 처녀들을 기다려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으시오. 여러분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깨어 있다고 안심하지 말고 형제와 함께 깨어 있도록 서로 격려하십시오. 미처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형제들을 소외시키지 말고, 여러분이 한 형제임을 생각하고, 그 형제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혼인잔치의 열 처녀들은 아마도 신부의 친구 들러리인 듯 합니다.
이들은 친구의 결혼식 때마다 들러리를 서면서 매번 기름을 빠트리고 와서, 친구들의 입장을 거북하게 해 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단합하여 어리석은 들러리들의 버릇을 고쳐주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본문에 「이날 이후 어리석은 처녀들도 한번도 기름을 빠트리는 일이 없었다」고 삽입하고 싶어집니다. 어리석은 친구를 충고하고,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형제를 위하여 해야 할 의무입니다.
형제의 계속되는 잘못을 보고도 평화를 위하여 계속 못 본체하고, 제할 일만 하는 사람 역시 「제 등잔에 기름을 채우지 못한 사람」입니다. 형제의 어리석음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만이, 형제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형제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만큼 기름을 넉넉히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전에 하던대로 기름은 넉넉히 준비해 온 듯 합니다. 그러나 마음 아프지만 형제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기 위하여 그렇게 했기 때문에, 신랑도 그들에게 동조했나 봅니다. 결국은 누구나 제 등불의 기름은 자기가 채워야 합니다.
7 연중 제32주일 마태 25,1-13 (가) 내일이 있다
김현준 신부
서양에는.‘네 바퀴 신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일생에 세번 성당에 가는 사람인데, 그것도 자기 발로 걸어서가 아니라 ‘네 바퀴 달린 차’를 타고 가는, 즉 우리말로는 ‘나일론\’신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네 바퀴 신자는 태어나서 유아 세례 받을 때 유모차 타고 한번, 혼인할 때 승용차 타고 한번, 죽어서 장례식 때 장의차 라고 한번, 그렇게 일생의 중요한 때, 세번만 성당의 신부한테 신세지는 사람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중에 맞이하는 때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태어날 때, 혼인할 때, 죽을 때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그 때가 우리 사람들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죽음의 순간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삶으로 옮겨가고, 혼인할 때에는 두 사람이 합하여 한 사람으로 태어나는 새 삶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혼인의 순간에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다면, 그 맞이함이 소홀하다면, 그 신부의 삶 전체가 실패로 연결되리 않겠느냐는 물음과 함께, 마지막 때도 그러하니 이 세상의 삶 전체가 실패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이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연중 제32주일, 오늘의 복음 말씀은 혼인 잔치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 이야기를 통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마지막 때를 준비하라는 깨우침을 준다.
“항상 깨어 있으라\”
팔레스티나 지방의 혼인 풍습은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그 절정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신랑의 도착이 알려지면 들러리 처녀들이 신랑에게 마중 나가 신부집으로 안내한다. 그 다음에 모든 이가 신랑의 집으로 가서 성대한 혼인 잔치를 벌인다,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이 ‘열 처녀의 비유\’ 이야기에서는, 다섯 명의 슬기로운 처녀들과 다섯 명의 미련한 처녀들의 행동이 대조적으로 비교되고 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어느 때 올는지 모르기에, 오랫동안 등불을 켤 수 있도록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다, 반면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갖고 있었으나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 막상 등불이 꺼져갈 때에도 남에게 빌릴 생각만 하였지, 가게에 가서 살 생각은 못하였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이 모두에게 부족할지 모른다는, 그래서 잔치 안내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기에 부족한 것은 가게에 가서 사 쓰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마귀 두목 루치펠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데려 올 확실하고 믿을만한 방법을 자나깨나 찾고 있었다. 이 방법을 찾는 회의에서 채택뢴 유혹 방법은 “내일이 있다\”는 의견이었다, “하느님은 없다\”는, “지옥이 없다\”는 방법은 정말 그럴까?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지만 “내일이 있다\”는 확실한 말은, 사람들을 지금부터라도 ‘착하제 살려고 서두르지 않게 할 것이고, 따라서 언젠가 찾아 올 마지막 때를 맞을 준비도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들 멋대로 살고, 자기들 멋대로 끝장을 내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점은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없었다, 모두 같이 곱게 단장하고 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기름의 준비였고, 부족한 것을 어떻게 챙기느냐는 것이었다.
슬기로운 사람은 내일을 준비한다. 어제와 오늘을 연결시키고 또 오늘을 내일과 연결시키며 준비한다. 그렇게 “내일이 있다\”고 내일을 위해서 준비한다. 미련한 사람은 오늘을 산다. “내일이 있다\”고 오늘만을 산다.
내일을 준비하는 삶
오늘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 있다, 직장인이면 직장인으로서, 주부면 주부로서 하루 24시간은 거의 같다, 그 중에서 1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내일의 나의 모습이 달라진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발 닦고, TV보고/ 잠을 잔 친구와 퇴근 후 1시간씩 공부를 한 두 친구의 10년 후 모습은 크게 달랐다, 사실 내일을 위한 준비는 오늘 하루 1시간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 인생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혼인에 비길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랑이 도착하리라는 사실만 알 뿐 그 정확한 시간은 모른다, ‘이미\’ 와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대에서 ‘신랑(주님 )\’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하기에 “내일이 있다\”는 유혹에 넘어 가지 말고, ’늘 깨어 있는\’ 자세로 자기 발로 걸어가든, 네 바퀴를 이용하든, 매일 열심히 왔다 갔다 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때가 오면 “빌리면 된다\”, “사면 된다\”, “내일이 있다\”는 식의 게으름과 미련은 통용될 수 없을 것이다.
8 연중 제32주일 마태 25,1-13 (가) 10처녀의 비유/ 종말을 준비
뻑적지근한 결혼식
일류호텔 결혼식 비용이 5000만원을 호가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 개인이 먹는 음식비만 6만원이란다. 그런데도 예식장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초만원이라니 어찌된 셈인가? 과연 우리나라가 구제금융을 받는 나라인가 의심스럽다. 돈이 넘쳐나는데도, 가난하다니! 그래서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야 한다니 도무지 곧이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화려하고, 흐드러지게 먹고 마시는 예식을 치른 사람들이 이혼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마치 결혼식을 자기 과시의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결혼의 의미가 중요할리 없다. 분명히 그런 곳에서 결혼하는 사람들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혹은 전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할리 없다. 신혼생활의 재미는 돈을 아끼고 저축하여 살림살이를 하나씩 장만하는데 있다고들 한다. 하나를 성취하면 또 새로운 계획을 향해 서로 노력해 가는 재미일 것이다. 그런 재미가 그들에게 있을리 없다.
그래서 따분하고 신통한 것도 없고, 계획할 것도 없기에 짜증만 난다. 결국 그들은 다투다 마음이 맞지 않는다,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등, 사치스러운 불만을 서로 퍼붓다가 이혼서류에 도장을 적는 것이다.
나는 가끔 신문의 하단부를 유심히 본다. 분당․일산․수지 역세권 등등 아파트 선전이 가득하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 서민들이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라기보다는 돈 있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아파트들이다. 자기 집이 없는 사람이 많은데도 귀족이 되라는, 흥청대라는 속삭임이 넘쳐난다. 정부도 그들을 싸고도는 느낌이다. 57평 이상 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리려던 세금을 취소했다. 과연 우리나라에 50평 이상 되는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득은 보호하면서 가난한 봉급자들의 세금만 더 올리면, 이는 불공평한 처사다,
오늘날 우리의 결혼식 형태는 잔치가 아니고, 문화도 아니다. 과시하려는 장으로 변질되어 버린 듯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결혼식을 잔치로, 사랑의 행사로, 축하의 행사로 여겼었다.
어떤 집에 결혼식이 있으면 온 동네가 일주일쯤 법석대었다. 3일전부터 동네 아낙들이 모여서 김치 담그고 나물도 다듬고 엿을 고았다. 하루 전에는 빈대떡도 부치고 메밀묵이나 도토리묵 혹은 청포묵을 쑤느라 더욱 바빴다. 남자들은 돼지를 잡고 닭을 잡았다. 그야말로 온 동네가 떠들썩하였다. 여자들이 모두 잔칫집에서 일하다보니 남편들도 식사 때만 되면 어슬렁어슬렁 와서 막걸리와 식사를 제공받았다. 물론 아이들은 하루종일 뛰놀며 먹고 놀았다. 이렇게 결혼식 전에 잔치를 벌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결혼식은 그야말로 온 동네 사람들에겐 행복한 일이었다. 별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던 가난한 시절이었으므로 잔칫집에 가면 먹을 것이 풍성하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언제 결혼식이 있나를 손꼽아 기다린 정도였다. 이것이 결혼식 잔치다.
유다 시골의 잔치 모습
오늘 성서가 전하는 잔치 모습은 우리의 옛 잔치 모습과 비슷하다, 그들도 일주일쯤 잔치를 했다. 신랑 신부는 그야말로 왕과 왕비 대접을 받았다. 그들도 가난했기에 잔칫집에 초대받아 간다는 것은 너무도 영광이었다.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고 맛있는 포도주를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그런 영광이란 인생에 있어 기념되는 행사였다.
여기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당시엔 신부 들러리(처녀)가 17명이었다는 것이다. 결혼식 날 신랑은 신부를 데리러 오는데, 언제 신랑이 나타날지 몰랐다. 결혼 지참금 문제가 있어서 옥신각신할 수도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함 파는 사람들이 벌이는 실랑이질과 같았을 것이다. 또 결혼약정서에 서명도 해야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 밤에 신랑이 나타나기 일쑤였다. 들러리들은 신랑이 나타나면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해야 하는데 신랑이 너무 늦게 오면 들러리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잠드는 때가 많았다,
“신랑이 온다\”라는 말에 잠들었던 처녀들이 일어나서 등불을 챙기었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들은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알아 신부를 따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평소에 준비성이 부족했던 아가씨들이었나 보다. 다른 데 신경을 쓰다가 아무 준비 없이 온 들러리들이 나중에 안절부절못하고 기름을 준비하려 했으나 늦었다.
이미 신랑과 신부는 잔치가 벌어진 곳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춤추고 놀았다. 미련한 처녀들이 늦게 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했으나 문은 이미 잠겼다. 그 당시의 풍습으로는 일단 신랑과 신부가 들어가고 나면 문을 닫았다. 잔치 도중 문을 자꾸 열면 분위기를 깬다는 이유에서였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닥쳐오는 종말의 위기를 예견하면서 사람들을 각성시키고자 결혼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준비된 처녀들만 맛있는 음식이 즐비한 멋진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들은 깨어 준비했기 때문이다. 준비 없이 ‘사각의 링’에 오른 권투선수는 어떻게 될까? 물론 형편없이 되어 병원으로 실려갈 것이다. 준비 없는 시험, 낙방이 기다린다. 준비했다는 사람도 죽을 쑤는데 하물며 준비 안된 사람은 어떻겠는가! 나는 과연 종말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에겐 천국의 잔치가 기다리고 있다. 준비는 우리의 몫이다. 남이 내 몫을 준비해줄 수는 없다.
9 연중 제32주일 마태모 25,1~23 (가) 죽음을 준비하는 삶
인생을 사는 지혜는,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데 있다. 우리는 오늘을 살고 있지만 오늘은 내일을 향해서 가는 날이다. 내일이 오면, 오늘은 자리를 내어 주고 과거로 물러간다. 오늘은 과거로 물러가지만, 오늘을 산 결과는 그대로 남아서 내일의 운명을 만들게된다. 사람의 앞에는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운명이 놓여 있다. 사람은 자기 미래의 운명을 자기가 원하는 데로 만들어 가질 수 있는 존재이다. 모든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축복과 저주」(신명기 30,15.19)가 놓여있다.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서 흘러가는 오늘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운명을 더 행복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써야 하는 시간이다. 세상에서는 언제나 날들이 오고 간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늘날을 맞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지금까지 보낸 날들을 산 결과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고, 오늘을 산 결과가 내일의 나를 만들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에 더 행복한 운명이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각자 미래에 자기가 꿈꾸는 행복에 맞추어 그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오늘을 산다. 특히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기의 장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게 된다.
그 일의 결과가 장래의 운명에 더 큰 영향을 미칠수록 그것은 더 중요한 일이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일에 대비해서 더 큰 노력을 기울여 더 많은 준비를 하게된다. 앞으로 치뤄야 할 어떤 시험의 결과에,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어떤 사람과의 만남의 결과에, 자기가 관련되어 있는 어떤 재판의 결과에, 자기 미래의 행복과 불행이 걸려 있다면 누구든지 거기에 대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앉고 준비할 것이다.
현세의 일시적인 운명에 대해서는 이렇게 지혜롭게 대처할 줄 알면서도 내세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줄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지나가는 세상이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운명도 다 지나가는 운명이다. 세상의 어떤 행복도, 세상의 어떤 불행도 지나가서 끝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는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인생을 살지만 미래를 더 멀리 볼 줄 알아야한다. 우리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이 내일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을 살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미래로 미래로 끊임없이 흘러가서 마침내 끝에 가서는 끝이 없는 미래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된다. 이렇게 해서 더 이상 날들이 오고 가지 않는 날, 결코 저무는 법이 없는 영원한 날을 맞으며 우리의 일생이 끝나게 된다.
시간 속에서 사는 우리의 일생이라는 하루가 끝이 없는 내일에 자리를 내어주고, 돌아오지 않는 과거도 물러가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은 과거로 물러가 사라지지만, 일생을 산 결과는 끝이 없는 내일에 영원히 남아있게 된다.
사람이 이 세상의 시간에서 내세의 영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죽음이다. 죽음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죽음은 우리가 산 일생 전체가 사실 그대로 낱낱이 드러나고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한 정의가 일생을 산 결과에 따라 각자에게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불행 가운데 하나의 운명을 결정해 주시는 순간이다. 이 때 각자에게 돌아온 영원한 운명은 자기가 일생을 산 결과이기 때문에, 자기가 선택한 운명이고 자기가 만든 운명이기도 하다.
죽음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두려운 현실이다. 준비된 채로 맞은 죽음은 일시적인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문이 되고,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은 죽음은 일시적인 죽음에서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는 저주의 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다른 어떤 일 보다도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우리는 모른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 가운데 단 하루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있는 날은 없다.
오늘도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죽음을 맞고 있다. 그들 모두가 오늘 그 시간에 그런 죽음을 맞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는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층의
사람이 다 있다. 죽음이 찾아오는 데는 순서가 없다. 젊음도 건강도 재산도,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에서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다. 매일을 그 날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인생을 사는 최선의 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늘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신다. 늘 깨어 있는 사람은 항상 영원을 바라보는 사람이고, 언제나 죽음에 대비한 준비를 하면서 세상을 사는 사람이다.

연중 제 32 주일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
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제 1 독서 : 지혜6、12ー16
제 2 독서 : 1데살 4,13-18
복음 : 마태 25,1-13
어느덧 전례주년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이 세상 사물의 덧없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특히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서서히 가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에 대해서 보다 깊이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사실, 우리의 죽음이라는 것음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빛’의 나라의 문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혀 들고 혼인예복을 갖춰 입어야 한다(마태 22,11-14 참조). 그렇지 않으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겨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마태 22,13).
이 때문에 전례주년 마지막 세 주간의 전례는 계속해서 신자들에게 ‘깨어’ 항구하게 기다리라고 한다.
교회의 이러한 권고는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이미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준비하라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복음적 메시지의 본질을 다시 취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마태 3,1-12)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마태 4,17)도 이런 사실에 비추어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사실, 그분과 더불어 ‘마지막’ 때가 왔다: 비록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종말론’은 시작되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 신자는 필연적으로 ‘종말론적’ 기다림의 분위기 속에 잠겨 있다: 첫째로 ‘하늘 나라’가 끊임없이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모르는 시각에 우주의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신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왔다”
마태오복음에서만 전해지고 있는 열 처녀의 비유(25,1-13)는 이러한 기다림의 배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서두로 해서 세상만물의 종말과 인간 행위에 대한 최후심판도 예고하고 있는 그 장대한 ‘종말론적 담화’(마태 24-25장)에 아주 적절히 삽입되어 있다.
이 열 처녀의 비유는 다른 두 개의 비유 즉 깨어 있는 집주인의 비유(24,43-44)와 주인의 도착을 기다리는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24,45-51)에 뒤이어 나오면서 이제 우리가 고찰하게 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에 깊이 퍼져 있어야 하는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덧붙이고 있다.
“하늘 나라는 열 처녀가 저마다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것에 비길 수 있다. 그 가운데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왔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이것은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여기서는 연회실―으로 신랑을 수행함으로써 신랑을 예우하는 역할을 했던 열 명의 소녀들에 관한 얘기임이 틀림없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신랑을 기다리다 그들은 모두 잠이 들어 버렸다.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 소리에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제각기 등불을 챙기었다. 미련한 처녀들은 그제야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기름을 좀 나누어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것을 나누어주면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 그 뒤에 미련한 처녀들이 와서 ‘주님, 주님, 문 좀 열어주세요’하고 간청였으나 신랑은 ‘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하며 외면하였다”(6-12절).
보다시피, 비유는 줄곧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대조적인 비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오랫동안 등불을 켤 수 있도록 필요한 기름을 준비하고 있음에서, 그리고 또한 모두에게 기름이 부족하게 될지 모른다는 타당한 이유를 들어 동료들에게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함에서 드러난다: “우리에게 도 너희에게도 다 모자랄 터이니 너희 쓸 것은 차라리 가게에 가서 사다 쓰는 것이 좋겠다”(9절). 실제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가져다주는 행위를 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지 않는가!
“한밤중에 ‘저기 신랑이 온다.
어서들 마중나가라!‘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 비유 전체에 긴장감을 주고 있는 또 다른 요소는 처녀들 모두가 얼마나 늦을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신랑의 ‘늦음’에서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 가운데 몇몇 처녀들이 결정적인 방심을 하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기다려야 하는 줄 알면서도 신랑이 늦는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고 하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슬기로운’ 처녀들조차도 깨어 기다리는 정신이 부족한 듯이 보인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문학적이 세련미의 부족 내지는 부조화라고 말한다. 물론 비유라는 것은 세밀한 부분들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더라도 전체적인 어떤 유사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순은 분명한 것이며 오히려 의도적인 것이라고 여겨진다. 십중팔구 이것은 갑자기 돌아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애타는 기다림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이미 느슨해진 기다림에로의 전이를 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의 공동체가 믿었던 것처럼―이에 대해서는 제 2 독서를 주석할 때 다시 다룰 것이다―즉시 돌아오신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처녀들 ‘모두’가 ‘잔다는 것’은 ‘슬기로운’ 처녀들이든 ‘미련한’ 처녀들이든 모두가 ‘방심’하고 있는 어떤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불확실해서 등잔불 기름을 준비해야 하기는 하지만 곧 당도할 것 같지는 않은 신랑을 평온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에 열화와 같이 타오르던 기다림의 열망이 금방 누그러진 뒤 이천여 년 간 교회가 처해오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이 앞을 내다보며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정신 자세의 와해를 정당화시켜준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평온하게’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이 언제 오시든지 더 기다릴 수 있는 기름이 잘 준비된 ‘등불’을 밝혀 들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열 처녀의 비유는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현실에 열심히 참여하여야 하며, 현실도피나 미래지향적 이상향이나 터무니없는 천년왕국설 같은 몽상에 빠지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다. 현재를 충실히 삶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라고 한다.
이러한 행동적 삶의 의무에 대해 이 비유는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나오는 내용의 되새김을 통해서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거기서도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 그 슬기로움과 미련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행하려고 하는 자세’다 :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태 7,24-27).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이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전망되고 있지 않은 듯한 종말론적 언급과 또한 배경의 차이점을 배제하고 보면 실체는 같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갖고 있는 선한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통해 드러나는 실질적인 ‘슬기’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 그 ‘슬기’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원하신 목적이 달성되도록 행동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늦게 도착한 미련한 처녀들이 문을 두들기며 외쳐대는 소리(“주님, 주님, 문 좀 열어주세요”: 11절)와 그에 대한 신랑의 대답(“분명히 들으시오. 나는 당신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12절)도 방금 인용한 대목 직전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장면―심판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을 연상케 한다 : “그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 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7,22-23).
신앙고백(“주님, 주님”)만으로는 우리는 구원될 수 없다. 즉 여기서 켜진 등불과 오랜 여정을 위해 충분히 마련된 기름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랑의 행위도 필요하다.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고 깨어 기다림의 자세로 표명되고 있는 사랑에 관한 주제가 이 비유 전체에 ‘혼인’의 성서적 개념을 주축으로 하여 흐르고 있다 : 여기서는 ‘신부’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것은 주님을 마중하러 가는 교회의 실체를 어느 정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처녀들이라는 개념 자체에 병합되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예수께서 당신의 돌아오심을 기다리는 것에 대해 설명하시기 위해 혼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유를 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갑자기 다가올 우주의 놀라운 재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나 복음을 읽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싸여 당황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예방하시기 위해 당신과의 결정적 만남은 기쁨과 사랑의 표지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참으로 ‘혼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기다려야 한다 : 만일 당황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어야지 두려움 때문이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는 두려움을 영원히 몰아내셨기 때문이다(1 요한 4,18 참조).
그러므로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13절)라는 마지막 말씀은 위협적인 말씀이라기보다는 사랑속에 삶으로써 언젠가 당신이 원하실 때 우리를 데리러 오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한 자들이 되라는 권고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주님이 “한밤중에” 오시더라도 대낮같이 그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둥불이 환히 켜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도 오늘 제 2 독서에서 우리를 이러한 평온한 기다림의 자세로 이끌어주고 있다.
데살로니카의 그리스도 신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모두가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그분을 학수고대하며 살고 있었다(1 데살 1,10). 그러나 그러는 중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주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그들 모두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사도 바울로는 그들의 혼란스런 태도를 보고 현재 우리의 신조의 일부가 되고 있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그들에게 상기시킨다 :
ㄱ) 그리스도 신자는 이방인들과는 달리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1 데살 4,13) ; 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담보이다(14절 : 1 고린 15,20-27 참조) ; ㄷ) 그러므로 이미 죽은 사람들과 주님이 오실 때 살아 있게 될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더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15-17절).
“교우 여러분,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 여러분이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살아 남아 있다 해도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결코 먼저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명령이 떨어지고,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나팔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이 먼저 살아날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1 데살 4,13-17).
여기서 특별히 어려운 문제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자들’과 ‘살아 남은 자들’(17절 ; 15절도 참조)에 관한 문제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문제를 다룰 수는 없다 : 단 거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그들 모두는 주님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그때 살아 있게 되는 자들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우리말 공동 번역 성서에서는 두 단어를 합쳐 “살아 남아 있는 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 역자주). 주님께서 “영광”중에 오신다고 하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묵시문학적 표현(그러므로 자의적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 즉 “대천사의 부르는 소리”, “나팔소리” 등의 표현을 통해 언급되고 있다.
이 대목의 메시지는 ‘위로’(18절)의 메시지요 ‘희망’(13절)의 메시지다 ;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첫째 이유는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정적인 영광스러운 만남이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죽음 뒤에 다시 모여 부활의 기쁨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대목의 원문에 따르면 “주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17절) “함께 모인다”라는 말이 두 번씩이나 나온다(14-17절). ‘교회’는 고달픈 이 지상생활을 넘어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18절) : 사도 바울로도 분명히 이루어지겠지만 항상 신비에 싸여 있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두고 가질 수 있는 쓸데없는 불안과 지나친 두려움을 제지시키고 있다. 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지는 못하더라도 복음에 나오는 다섯 처녀들처럼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슬기로움’이다.
이러한 ‘슬기로움’〔지혜〕은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 오늘 제 1 독서가 가르쳐 주고 있듯이(지혜 6,12-16 참조) 그분은 그것을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주 기꺼이 나누어주실 것이다.
연중 제32주일
제 1 독서 : 지혜 6, 12-16
제 2 독서 : 1데살 4, 13-18
복 음 : 마태 25, 1-13
제 1 독서 : 지혜서는 기원전 1세기 중엽 헬레니즘의 용어로 유대교의 신앙을 고백한 책이다. 6장 1절에서 11장 3절은 지혜에 대한 찬미이다. 오늘 제1독서는 찾는 사람에게 지혜가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는 내용이다. 인간의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지혜는 열심히 찾고 갈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7장과 8장에서 의인화된다. 그리스인들에게 지혜는 신적인 것에 대한 지식과 묵상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지혜서의 저자에게 지혜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지혜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9, 13.17).
제 2 독서 : 데살로니카 신자들 생각에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리라고 믿었다. 이는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만 국한된 생각이 아니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주님께서 곧 돌아오시리라는 기대 속에 살았다.
주님께서 돌아오심을 표현하는 단어로 데살로니카 전서 4장 15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Parousia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Parousia는 원래 그리스 문화권에서 군주의 공식 방문(개선의 의미를 포함)을 뜻했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모두 16번이나 사용되었고 그중 데살로니카 전서에만 4번 나온다(2, 19; 3, 13; 4, 15; 5, 23). 후에 사목서간의 저자들은 예수의 재림을 표현하기 위하여 Epiphaneia라는 용어를 썼다. Epiphaneia는 그리스 문화권에서 군주가 공식 방문할 때 군중 앞에서의 공식 출현을 뜻했다. Parousia에서 Epiphaneia로 용어가 교체된 것은 주님의 임박한 도래에 관한 열망이 식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데살로니카 신자들의 주님의 도래에 대한 기대는 함께 주님을 믿다가 먼저 죽은 신자들 때문에 흔들렸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주님의 개선(Parousia)을 못 본다는 말인가?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미 죽은 자들이 주님의 개선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한다.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이미 죽은 사람들이 오히려 먼저 부활하여, 살아 남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마중 나갈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항상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는 신앙 고백이다(4, 18).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주님께서 몰래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광 속에 공적으로 돌아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도래는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사건이라는 뜻이고 인류 연대성이 있는 사건이라는 뜻이다. 둘째는 살리는 하느님, 모으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키는 분이라는 고백,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함께 모으는 분이라는 고백이 초대 교회의 종말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복 음 : 앞의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 45-51)와 마찬가지로 이 비유는 주님의 오심이 늦어지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24, 48; 25, 5 참조). 비유의 요점은 항상 준비해야 하는 태도임이 분명하다.
이 비유에서 열 처녀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를 뜻하고 신랑은 그리스도를 뜻한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등잔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절(9절)한 것은 빈정댐이나 이기주의 때문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직시의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비록 신랑이 늦게 오더라도 등잔에 기름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등잔은 신앙을 뜻하고 기름은 애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 구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야 비로소 구원은 완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안주하는 태도의 허구성을 열 처녀의 비유가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때를 말씀하실 때 예수께서 항상 제자들에게 깨어 준비하라고 지적(마르 13, 32-37; 루가 12, 36-40)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32주일로서 전례력의 마지막 시기에 와있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을 보내는 이때에 주어지는 오늘의 말씀은 “깨어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죽음에 대비한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뒹구는 낙엽과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상념에 젖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의 마지막 작품인 지혜서는 그리스 등, 이방 문화권에서 강조된 지혜와 하느님을 최고의 가치로 고백했던 히브리인들의 지혜를 비교하면서 하느님께 기초하고 하느님께 목적을 둔 지혜만이 참되고 영원한 것임을 재삼 확인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혜의 내용은 선언이며, 외침이요, 신앙 고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상 참된 지혜는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처럼 그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터득되는 법입니다. 지혜를 얻으려고 깨어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근심이 떠날 것이며, 지혜에 상응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지혜가 그 사람에게서 본 모습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지혜는 결코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재물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는 지혜롭고 깨끗한 삶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지혜로운 삶을 마태오복음 25장 1-13절의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쉽게 풀어서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란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혼인으로서 신부인 교회나 우리 각자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할 채비를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단지 어느 시간에 올 지를 알지 못할 뿐입니다. 신랑이 밤중에 올 것에 대비하여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잔에다 기름까지 마련했으나 나머지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잔만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등잔이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등잔에다 기름을 부어 어둠을 밝혔을 때 그 본래의 기능을 다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우리로서 채워 넣어야 할 기름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는 복음적인 삶과 선행 그리고 주님이신 신랑을 깨어 기다리는 끊임없는 기도생활인 것입니다.
밤일을 마치고 공장을 나서는 한 청년에게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은 청년에게 게임을 하자고 청했습니다. 사탄은 열 개의 병을 내보이며 말했습니다. “이 열 개의 병 가운데 하나에는 독약이 들어있네. 하지만 아홉 개의 병에는 아주 달콤한 꿀물이 들어있지. 자네가 꿀물이 들어있는 병을 고른다면 엄청난 돈을 줄 테니 한번 골라 보게나.” 청년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목숨을 담보로 게임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탄은 계속 유혹을 했습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네.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나.” 청년은 마침내 한 병을 골라 마셨습니다. 죽음의 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곧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야호! 살았다. 살았어. 자, 어서 내게 약속한 돈을 주고 사라져!” 사탄은 약속대로 청년에게 엄청난 돈을 주며 말했습니다. “언제라도 돈이 필요하면 찾아오게. 다음엔 돈을 곱으로 주겠네.” 청년은 쉽게 많은 돈을 가지게 되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집으로 가는 대신 곧장 술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후로 매일 술에 취했고 노름에도 손을 댔습니다. 흥청망청 돈을 쓰고 술을 마시며 불규칙한 생활을 하니 건강이 나빠졌고 한 살, 두 살 나이도 먹었습니다. 청년은 이제 돈이 필요할 때면 스스로 사탄을 찾아가서 게임을 하였습니다. 이제 청년은 노인이 되었고 병은 딱 두 개 남아있었습니다. 노인이 된 청년은 흔들리는 손으로 하나를 골라 마셨습니다. “와! 내가 이겼어. 나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내놔라, 돈. 하하하——” 기뻐하는 그를 지켜보던 사탄은 마지막 남은 병을 들이마셨습니다. “자, 이래도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처음부터 독약이란 없었다. 그러나 너는 내가 만든 독약을 먹고 이미 죽어가고 있어. 네 자신을 돌아봐라. 그 돈으로 인해 네 인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난 돈으로 네 인생을 샀다. 하하하!”
자기도 모르게 몰락되어 가는 이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린 채 순간의 쾌락에 젖어 사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열 처녀의 비유는 현대인의 자화상과 관련하여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게 해줍니다. 이 비유는 두 개의 다른 비유 즉 깨어있는 집주인의 비유(마태 24, 43-44)와 주인의 도착을 기다리는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의 비유(마태 24, 45-51)에 뒤이어 나오면서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 바로 곧 다가올 종말에 대비한 신앙인의 자세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신랑이 온다는 사실만 알 뿐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진정한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오랫동안 등불을 켤 수 있도록 필요한 기름을 준비하고 있음에서 그리고 또한 모든 이에게 부족하게 될 지 모른다는 타당한 이유를 들어 동료들에게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함에서 드러납니다. 실제로 이익을 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는 행위가 사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나 모두 잠들어있다는 것은 방심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불확실해서 등잔불 기름을 준비해야 하지만 곧 당도할 것 같지 않은 신랑을 평온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일매일의 생활 속에서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신랑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사랑과 선행으로 평소에 기름을 잘 준비한 사람은 신랑을 기꺼이 맞이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허둥지둥대며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2독서인 바오로의 데살로니카 전서는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구원과 부활이라 언급,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하면서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슬기로운 처녀처럼 깨어 주님을 기다리다가 그분과 함께 영원한 혼인잔치인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