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33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33주일

1. 김정진 신부(가)2                               2. 정주성 신부(가)/3

3. 김몽은 신부(가)/6                             4. 조순창 신부(가)/7

5. 함세웅 신부(가)/8                             6. 서경윤 신부(가)/9

7. 최기산 신부(가)11                             8. 강길웅 신부(가)/13

9. 김성배 신부(가)/14                            10. 김현준 신부(가)/16

11. 이종환 신학생(가)/18                          12. 평신도 소명(가)/20

13. 달란트 비유(가)/22                           14.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24

15. 최인호 작가(가)/25                           16. 김형렬(가)/27



1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 우리를 교훈하십니다. 달란트라 함은 당시의 화폐의 한 단위이며 여기서는 인간의 재능이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자기 종들에게 각기의 능력에 따라 돈을 나누어주었다가 돌아와서는 그들에게 자본과 이자를 계산하는 통속적인 사실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재능이나 개성이 각각 다름을 말해 주는 것이고 따라서 최후의 심판 때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많이 돌려 드려야 하지만 적게 받은 사람은 적어도 그만큼은 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인이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인은 각자에게 똑같이 준 것이 아니라 주는데 차이를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의도하신 교훈은 최후의 심판 때 많은 상과 보수를 얻기 위해서는 재능이나 능력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받은 재능이나 은총을 얼마나 충실히, 그리고 부지런히 활용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봉사에 다려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재산이나 건강, 행복, 시간생활 그리고 생명마저 일시적으로 잠시 하느님으로부터 위탁받고 있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그리스도 신자로서는 한시나마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아닙니까. 이렇게 다 받은 것인데 왜 받은 것이 아니고 자기의 것인 양 자랑합니까>(I 고린 4,7)하며 신자들을 각성시켰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을 인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관리인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을 잠시 맡아보는 청지기입니다. 관리인이나 마름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게 대한 충성이라(I 고린 4,2)고 바오로 사도는 역설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관리자로서 충성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마태 25,23)과 같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준수하며 주일을 경건히 지내야 하겠습니다. 주일 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가장 큰 충성입니다. 양심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양심의 소리대로 생활하는 것은 얼마나 큰 충성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많이, 다른 이에게는 적게 주시지만 그러나 누구든지 일을 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풍족히 주십니다. 우리의 존재, 지력과 마음의 능력, 세상의 온갖 사물을 주시며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맺은 열매가 삼십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백 배가 될 것을 기대하십니다. 허나 이와는 반대로 이 선물을 이기적으로 자기편으로 빼앗아 돌려 즐기고 그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과 목적을 생각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보다 더 어리석고 마련한 일을 또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많이 받은 이를 부러워하고 자기에게 적게 주어진 능력을 질투로 말미암아 이용하지 않고 묵혀 두는 것은 큰 잘못이며 인간을 파멸에 떨어뜨리는 것이 됩니다.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오는데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 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힐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루가 1,7)라는 하느님의 책망의 소리를 들을 날도 머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에는 <이 게으르고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쫓아라>(마태 25,30)는 준엄한 벌을 받을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는 믿음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하느님의 은총을 그만큼 더 풍성히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죄를 피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에게는 훗날 큰  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명심합시다. 우리는 가끔 자신을 반성하고 진단해 보십시다. 나의 신앙생활은 과연 성실한 편인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는가. 규칙적으로 가톨릭 출판물을 읽고 있는가. 부도덕한 말이나 독서를 피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죽는 날까지 신앙의 세계에서 계속 걸어가고 발전하고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2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 정주성 신부




제 2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백성의 지체라고 당연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신비를 옳게 알아들어야 신비체의 몸 역할을 하는 교회의 지체노름을 해야 되는 우리들 평신도의 각오와 의무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입니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오 18,20).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40) “나는 포도나무이며 당신들은 가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떠나지 않으면 내게 붙어 있기 때문에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요한 15,5)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생명의 교류 및 잎치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지체라고할 때 평신도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로마 12,5). 사람의 육체는 각 지체가 여럿이지만 한 몸을 이루는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자들도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함에 있어 각 지체는 그 역할이 다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할 대에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I고린토 12,26).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천상 아버지한테로 순례길을 가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생활 즉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업을 곤궁과 박해 중에 이룩하셨듯이 교회도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데 있어 같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대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워진 신비로운 교회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이 신비로운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온 세계의 인류가 저마다의 특성을 지닌 채 머리이신 그리스도 밑에 모인 유일한 백성입니다. 교회의 이 보편성에서 각 지체(신도)는 서로 선을 나누며 일치의 유대를 강화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모였을 뿐 아니라 그 지체 사이의 서로 다른 임무를 가진 계급들이 있으니 형제들의 선익을 위해서 일하는 성직자들, 특수한 생활 양식으로 완덕을 지향하는 수도자들, 일반 평신자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여 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한 몸을 이루는 평신도들은 누구든지 산 지체로서 교회의 발전과 그 끊임없는 성화를 위하여 창조주의 선물이며 구세주의 은총으로 받은 스스로의 힘을 다해야 하도록 불린 것이다”(교회헌장 33). 따라서 평신도는 먼저 교회발전에 기여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종교단체가 아니요 하나의 백성이요 구체적 인간들이 실제로 일하는 모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 구성원 각자의 존엄성을 인정하며 각잦 자기의 몫을 공통된 사명과 책임 아래 기여해야만 교회발전은 이룩됩니다. 평신도들이 그 백성(민족) 안에서 맡은 바 사명과 직책을 다할 대 그 교회가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봉사의 정신으로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가 반죽(사회) 안에 들어있는 누룩이 된다면 교회는 발전됩니다. 모든 신자는 어느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는 누구나다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이라는 신분을 기초로 한 사도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은 굳은 신앙 속에 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 아닌 현세적 목적에서 일어난 평신도 운동이나 활동은 복음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성공적  발전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발전의 난점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1) 내 형제가 나의 도움 없이···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난점이 있습니다. 모든 이의 운명에 대한 최종 결정은 이 세상에서 보내는 구체적인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내 생활 테두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게 대한 생활의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 밖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면 뿌리없는 나무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사심없이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 남이 모르는 신자가 되는 현상이 현대 교회 발전의 난점입니다. 이는 자기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외적으로 증거하고 남도 나를 잘 아는 신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신자됨이 “포장된 물건”처럼  속에 감추어 있어 남이 모르게 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 다른 사람이 우리가 굳건한 신자임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3) 바로 우리 평신도 자신이 교회발전의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며 사도인 모든 신자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직장과 결혼, 가정과 사회 어디서나 실천에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지금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이 사도직을 성실히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유스런 선물입니다.



자신이 교우임을 증거할 수 없는 환경이란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즉시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은 사실을 깨닫고 실천에 옮긴다면 그리스도의 양우리에 많은 양을 모을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는 것,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 신자가 된 것은 보다 쉽게 구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명을 받아 일하는 것이며 세계구원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인간에게 오늘의 것으로 나타나야만 되도록 하느님이 이 시대에 평신도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신앙심을 발휘하신 초창기 한국 평신도처럼 현대 평신도의 굳은 신앙심이 평신도  사도직 성공을 가늠할 것입니다.

순교복자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3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 김몽은 신부





오늘은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의 날”로 정한 날이다. 특히 현대와 같이 다양하고 분업화되어 있는 사회에 있어서 평신도들은 각기 자기가 처해 있는 분야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 의식을 고취시키고, 계속 그러한 증거 생활을 해 나갈 것을 다짐하는 날이다.



다시 말하자면 평신도 사도직이란, 각자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고유한 은사를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현사회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평신도가 들어가, 거기에 주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것이 평신도의 사도직이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이란, 성직자의 성무를 돕는 일만이 아니라, 평신도 고유의 일이 중점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



오늘의 복음은 각자에게 맡겨진 은사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고도 준엄하게 들려준다. 복음에 나오는 “주인”이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낟. 즉 주님이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다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다음,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보내 주시어,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이 주시는 각자 고유한 은사로 인하여 주님을 위해서 사용할 것을 당부하셨다.



다시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각자에게 맡긴 달란트(은사)의 사용 여부를 물으신다. 여기에 나오는 종들이란  바로 우리 크리스천을 뜻한다. 달란트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 초자연적 은사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 은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I고린 12:4, 7-10) 여기에서 ”얼마나 벌었느냐“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은사를 사용하여 얼마만큼 주님을 증거하였느냐 하는 것을 뜻한다.



각자 자기가  받은 성령의 은사의 분량대로 번 사람은 상을 받을 것이나, 받은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는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죄이며, 나태한 죄, 자기의 의무를 소홀ㄹ히 한 죄를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의 가진 바 재능과 지혜와 힘을 다하여 주님을 증거하는데 게을러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평신도의 사도직이다. 그때 우리는 참된 삶의 보람과 행복을 맛보게 된다.









4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 조순창 신부





오늘은 연중 33주일이고, 다음주일이 연중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인생의 종말과 더불어, 하루하루 다가오는 세말을 앞에 두고, 한없는 태평성세로 현실만 아는 인생도 경고하면서, 아울러 두려움에 싸일 것도 아니라, 하느님 믿는 신자로서 주어진 은혜로 충실히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한 사람에게는 5탈렌트, 또 한 사람에게는 2탈렌트, 나머지 한 사람에게는 1탈렌트를 맡기고 떠났다가, 돌아와서 재산 관리에 관하여 계산할 때에, 5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2탈렌트를 받은 이는 각각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5탈렌트와 2탈렌트의 ‘이익을 남겼다’고 내놓았을 때에, 주인이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직한 종이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하였고, 1탈렌트를 받은 이는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묻어 두었다가, 캐내어 1탈렌트를 내놓았을 때에, 주인이 “너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두운 데에 내쫓아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하였습니다.



우리는 각기 나름으로 하느님께로부터 갖가지 재능을 받았습니다. 은총·지능·자유·감정·재능·생명·건강·용모 등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나는 왜 여자냐? 나는 왜 재주가 메주냐? 나는 왜 병주머니냐? 나는 왜 곰보냐? 나는 왜 불구냐? 나는 왜 공부를 못하냐? 나는 왜 가난하냐? 등 여러 가지로 비교하기보다도, 남보다 다른 능력이 있으니, 부지런히 개발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천재와 범인의 차이는 ‘자기 소질과 잠재 능력을 찾아서, 부지런히 남의 몇 배 노력으로 개발 활용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셈을 바칠 대에, 나는 불구이기 때문에, 나는 건강하지 못해서, 나는 공부한 것이 없어서, 나는 바보라서, 나는 재주가 없어서, 나는 예쁘지 못해서, 나는 남자라서, 나는 여자라서, 나는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나는 짧게 살아서, 나는 시간이 없어서 등으로, ‘하느님 뜻대로 좋은 일을 못 했노라’고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악하고 불충하고 게으르면 불행이요, 엄벙덤벙 쉽게 사는 것보다 작은 일도 정성스럽게 하여야 가치가 있는 인생입니다. 부지런하고 착하고 충성스러우면 행복을 얻게 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 “좋은 날은 도둑처럼 올 것이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라.”(I 데살 5,5)는 말씀이 나옵니다 .남과 비교하기보다는, 나는 나의 인생을 사는 것이니, 나의 인생에 충실합시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나 오늘의 사회는 팔자나 운명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죄악에 겨루어 이기는 것이 구원의 역사이니, 우리가 현세에 충실하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에서 제외될 것이며, 현세에 충실하여, 이 사회에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할 때에 이 사회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5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재능과 노력

                                                         함세웅 신부



얼마 전에 일본 야구계를 주름잡는 우리 교포 장훈, 백인천 등의 선수들이 모국을 방문하여 서울운동장에서 그들의 재주를 선보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 갈채를 보였었습니다. 또 세계 프로 권투 미들급 챔피언인 유제두 선수는 그의 선수권을 방어했습니다. 본인에게는 물론 민족적인 자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난 12일에는 전국에서 27만 명의 학생들이 대학 예비고사에 응시했습니다. 예비고사에 통과된 학생들은 큰 기쁨을 맛보겠지요. 그러나 유명한 운동 선수들이나 합격의 영광을 차지한 학생들의 이면에는,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음을 우리는 다 골고 있습니다. 그들은 타고난

그들의 재능을 최대한 개발하려고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여러 방면에 있어서 유명한 사람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들의 재능이 숨겨진 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최대한으로 발휘되지 않은 재능은, 인류 발전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고, 다만 아까울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 각자가 타고난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할 것들 말씀하십니다. 타고난 재능을 유익하게 활용하지 않은 경우, 최후의 날 하느님 앞에서 결산할 때 엄한 심판을 받게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한 사람에게 들려주시는 기쁜 소식이 우리를 격려합니다.

  우리는 크건 작건 각기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종에게는 5만 원을 주인이 주었고, 어떤 종에게는 3만 원 또 어떤 종에게는 만원을 주었듯이, 우리들 각자의 재능은 어떤 사람의 다섯 배가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에 비하면 3분의 1밖에 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력을, 어떤 사람은 지력을, 또는 건강을, 권력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우리는 각기 다른 재능을 다른 분량으로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원하시면서 여러 가지 재능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내 힘이 미약하여 별게 아니라고 포기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최선을 다하여 그 능력을 활용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

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충실히 할 때, 더 큰 능력을 주시고, 더 큰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을 것이며, 없는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능력이 적다고 최선을 다하는 데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마저 잃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노력하는 사람은 더욱 진급하여 큰 일을 맡게 되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통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하고자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받은 재능의 과소를 불문하고 모두 각자의 능력 안에서 충실한 신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6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전체의 행복

                                                        서경윤 신부





 「너희는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둠 속으로 쫓아내라」 (마태 25,30).

  주인이 종의 능력을 평가하고 그 능력에 따라 누구는 다섯, 누구는 셋, 그런데 나는 하나의 달란트 밖에 받지 못했다면, 나도 의기소침하여 의욕을 잃고, 혹시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다른 주인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달란트 하나밖에 받지 못한 종이 그래도 남아서 땅속에 숨겼던 달란트를 찾아 주인께 돌려 준 것만도 내 생각에는 기특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그를 꾸짖고 한 개의 달란트 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나 가진 사람에게 주어 버리다니, 그럼 그 무능한 종은 죽어라는 말입니까? 주인의 재물이 종보다 더 귀중하다는 말입니까? 처음부터 주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종의 심정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은 주인의 처사가 불만스럽습니다. 종을 사랑하는 주인이라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텐데, 주인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달란트를 땅 속에 숨겼던 것이 사단(事端)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다시 여행을 떠나면서 이번에는 모든 종들에게 똑같이 구슬 열 개씩을 주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받은 구슬의 색깔이 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색깔의 구슬이 여러 개였으며, 따라서 못 가진 색깔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슬의 색깔에 따라 용도가 다 달랐습니다. 주인이 떠난 다음, 종들은 서로 가진 구슬들을 비교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받은 구슬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받은 구슬에 원하는 색깔을 칠해 봤지만, 원색과 같은 구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도 색깔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 없었으므로 모두는 서로를 부러워하기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차츰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자신은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갖지 않은 색깔이 필요할 때에는 다른 사림에게 부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 주인의 외아들이 찾아와서 행복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가진 구슬을 몽땅 내어놓고 합동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요할 때에 누구나 그 구슬을 사용하면 됩니다. 종들은 모두가 좋다고 찬동을 하고 각자의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종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아까워하며 다 내어놓지 않고 모두들 한두 개씩 감추었습니다. 전체 숫자가 모자라므로 누군가 감춘 것은 확실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가 무슨 색깔을 감추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모두들 자기는 감추지 않은 양 다른 사람이 다 내어놓지 않았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사람마다 재능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연극을 잘합니다. 어떤 이는 수학을 잘하고, 어떤 이는 어학에 소질이 있습니다. 과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업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뭐든지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그렇지, 주인은 모두에게 똑같은 수의 구슬을 주었습니다. 무조건 자기는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고 남의 것만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색깔의 구슬을 가졌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구나 자기 구슬의 색깔을 따라 능력을 계발하고 길러서, 그 능력으로 돈도 벌고 삶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재능이 자기만을 위한 것을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을 공동의 것으로 사용할 때에, 비로소 전체가 행복해질 것입니다. 자기의 것이라고 감추어놓고 자기만을 위하여서만 사용하려고 한다면, 세상은 각박해지고 결국 자기도 남도 똑같이 행복해 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은 아직도 여행에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므로, 나만을 위해서 따로 감춰 둔 것이 있는지 살펴보고,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갑자기 돌아오신 주인이l 나를 향하여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둠 속으로 쫓아내라!」하시지나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7              연중 제 33주일   마태 25, 14―30 (가) \”평신도의 소명\”  

최기산 신부





사치스런 불만 지하도 계단에 앉아서 늘 구걸하던 젊은이가 있었다. 꾀죄죄한 그를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남들은 그를 미친놈이라고 조소하면서 지나쳤지만 어느 한 노부부는 그 계단을 지나 성당에 갈 때마다 그를 가엾게 여겨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돈을 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외면하고 지나갔다. 설령 자비심이 발동하여 동전 몇 푼을 줄 때에도 그들은 그를 외면한 채 동전만을 떨어뜨리고 갔다. 어느 날 노부부는 그 젊은이를 초대하였다. 그에게 목욕을 하게 하고 새옷을 입게 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를 병원에 입원까지 시켰다.



우리 주변엔 아직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린 희망의 세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육체적인 면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정신적인 면에서 부족한 사람도 있다. 우리가 건강하다면 우린 참으로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사치스런 불평불만 속에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 주위엔 장애인뿐만 아니라 불치의 병으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이 받은 자, 적게 받은 자 농아․맹아․정신지체장애인 등 장애를 입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적게 셈 바쳐도 되지만, 건강하고 많이 배우고 많은 재물을 받은 자, 권력을 쥔 자들은 그만큼 많이 셈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많이 받은 것에 대해서 너무 자만해서는 안된다. 잘생긴 사람은 못 생긴 사람보다 더 많이 바쳐야 한다. 기운이 센 사람도 약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쳐야 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부자가 종들에게 능력대로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맡기고 먼 길을 떠나면서 ꡒ내가 다시 돌아올 때 많은 이익을 남겨 놓으라ꡓ고 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 어떤 이들은 1만데나리온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어쨌든 1데나리온이 하루 날품팔이하는 사람의 품삯이니까, 일당을 3만원만 쳐도 어마어마한 돈이다. 5달란트는 9억원쯤되는 돈이니 대단한 돈이다. 5달란트받은 사람과 2달란트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원금을 배로 불려 놓았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시 갖다 바쳤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몸을 사리느라고 꽁꽁 묶어서 땅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그대로 내놓았다.



복음의 메시지 평신도 주일이다. 우리나라 평신도들은 교회창립 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신앙을 받아들였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목숨 내놓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일까? 계단에서 구걸하던 청년을 사랑하고 자식처럼 돌보며 병원에 입원까지 시킨 노부부를 생각해보면서 우리들 모두 그렇게 사랑의 첨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에 배로 이익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그 노부부야말로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유효하게 사용했다. 그들은 건강을 맡겨주신 주인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ꡐ달레 교회사ꡑ에 황일광이라는 백정 출신의 천민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처음 신자들의 모임에 나갔을 때 당대의 석학인 양반들이 자신의 소매를 끌며 어서 올라오라고 환영하였다. 천민은 감히 양반의 대들보 위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기에 황일광은 너무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평신도들은 신분이 어떻든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그후 그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ꡒ천주교회에서는 천주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게는 천당이 두개 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고 죽어서 갈 곳도 천국이다.ꡓ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받은 학식, 건강, 재물에 따라서 많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보다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을 실천해도 셈 바칠 것이 별로 없다. 오늘 복음에서 배로 이익을 남긴 사람들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익을 남길 수 없다. 오늘 우리나라는 은행도 망하는 판이다. 하물며 파이낸스, 종금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익이 많이 나는 곳에 투자하지 않으면 큰 수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1달란트받은 사람은 주인의 뜻은 생각지 않았다. 자신의 안녕만 생각하였다. 모험 같은 것은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갖다 바쳤다. 그는 퇴출되었다. 자신의 안녕만을 도모하고 주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실 때 퇴출당한다. 주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수익을 올리고 싶어하신다.



200여년 전 우리의 평신도들은 믿음에서 오늘의 우리와는 좀 다른 면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많은 평신도들은 영세 후에 기본적인 신앙생활조차 거부하고 있다. 주님의 용사들이 필요한 시대다. 훌륭한 평신도들이 있을 때 훌륭한 성직자도 있게 마련이다.

8                연중 제 33 주일   마태 25, 14―30(가) ‘어진 아내\’가 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잠언 31,10~13.19~20.30~31 (어진 아내는 손을 놀리니 즐겁기만 하구나) 

제2독서 Ⅰ데살 5,1~6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 음 마태 25,14~30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바로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정하여 교회 안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면 평신도는 교회의 주인입니다. 성직자도 수도자도 다 평신도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평신도가 제 몫을 잘 할 때 좋은 교회가 됩니다.



어느 본당에서고 지나치게 적극적인 ‘열성파\’가 있는가 하면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주 소극적인 ‘무관심파\’도 있습니다. 이들은 양쪽이 다 바람직한 평신도 상은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뜻대로\’ 사는 삶에서 ‘주님 뜻대로\’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뜻을 꺾고 주님 뜻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최고의 믿음입니다.



모 신심 단체의 회원으로 교회에서 열심하게 봉사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레지오, 성가대는 물론 철야기도, 환자방문 등에서 그녀가 뛰지 않는 분야는 없었습니다. 그러자니 가정 일에 너무 등한히 하여 가정불화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이 가끔 가정 일에도 충실하라고 하면 그녀의 대답은 늘 단호했습니다. “주님 일은 하루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 뒤에 감춰진 자신의 이기심을 살펴봐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그렇게 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정에 충실하면서 하느님 사업에 봉사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자기가 좋다고 해서 자기 멋대로 열심하게 살겠다고 한다면 그는 주님 뜻보다는 자기 뜻대로 사는 어리석은 독선일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어진 아내\’는 바로 착한 평신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진 아내가 남편의 자랑이요 기쁨이라면 착한 평신도는 교회의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이보다 더 큰 재산도 없고 그보다 더 소중한 보배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신부 (각시)라는 사명을 가지고 맡은 바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도 마찬가집니다. 이 말씀은 평신도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직책과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업은 1차적으로 평신도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이에 능력껏 협조하여 교회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소망이요 기쁨입니다. 누구라도 이러한 하느님의 뜻에 거절한다면 그는 아마도 ‘가슴을 치는 날\’을 스스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위대한 평신도들이 많습니다. 과거 선조들의 순교 신앙뿐만 아니라 오늘의 시대에도 훌륭한 평신도들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랑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주교님은 당신의 교구 사제들에게 \’평신도를 본받고 존경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 자신이 교포사목을 임시로 하면서 느끼는 것이 그것입니다. 마이아미 공동체만 해도 본당 신부가 공석이었는데도 평신도들 스스로가 레지오 쁘레시디움을 만들어 꾸리아까지 조직했으며 또한 구역 모임을 만들어 기초 공동체를 착실하게 성장시켜 왔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 세계 각지에서 한인 교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곳에서는 틀림없이 자생적인 천주교회의 기초 공동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진 아내\’는 그냥 아무렇게나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좋은 표양과 또한 가르침에 따른 순종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문의 전통과 분위기라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듯이 어진 아내가 어진 아내를 만들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계속 좋은 전통을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실로 ‘현숙한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맡은 바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겸손한 것도 교만이요 지나치게 나서는 것도 역시 교만입니다. 직책을 가졌거나 안 가졌거나 우리의 본분을 다하고 또한 사명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 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 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우리는 모두 주님의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9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의무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랑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

                                                             김성배 신부



  사람은 세상에서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늘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한편 우리의 일상생활은 매일 단조롭게 반복된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의 의무들을 매일같이 되풀이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들은 나보다 남을 위한 일들이고,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러기에 지금 내 처지에서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가 된다. 우리가 의무에 충실하다는 것은 사랑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일상의 의무들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일들이고 따라서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일들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 동안은 평범한 일상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게 된다. 내 성실한 의무이행이 남에게 이익과 만족을 가져다 준다는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는 일의 크기가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랑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일도 사랑으로 행하면 비범하고 위대한 일이 되고, 비범하고 위대한 일도 사랑없이 행하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인생의 가치는 일마다 오래 살고 얼마나 큰일을 했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에 있다. 그러나 평범한 일들로 채워지는 일상이 매일 되풀이되다 보면 사랑이 식을 수 있다. 사랑이 식게 되면 의무를 이행하는 데 권태를 느끼게 되고 불성실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안에 이기주의가 눈을 뜨면서 새로운 눈으로 자기와 세상을 보게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 인생이 초라해 보이고,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

이 억울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되면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의 의무이행은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인생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와 수행해야 할 본연의 의무를 버리고 새로운 자리와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게 된다. 자기를 버리고 살아 왔던 길을 포기하고, 자기를 찾는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아를 버려야만 갈 수 있는 사랑의 길을 버리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길은 자기 스스로도 불행해지고 남도 불행하게 만드는 길이다.



  이기주의에 따를 때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를 버리고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찾고, 해야 할 일을 버리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찾으며, 가야할 길을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가게 된다. \’



  세상의 모든 불행의 근본 원인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랑을 버리고 이기적인 삶을 택하는 데 있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자신만을 배타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자기 명예만을 추구하고 자기이익만을 돌보며 자기만족만을 구한다. 사랑은 모든 선이 흘러나오는 원천이고, 이기주의는 모든 악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달란트의 비유는 사람이 인생을 통해 두 가지 인생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고 있으며, 현세에서 어느 길을 선택했느냐에 따라서 내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그 하나는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선택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버리고 이기주의를 선택하는 길이다.



사랑은 자기의 이해관계와 자기의 감정을 뛰어 넘어서 상대방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의 길은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에게 받았던 돈을 배로 불려서 되돌려 줄줄 알았던 종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일생을 산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이용해 이익을 만들어 내길 기대하신다.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이익은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증가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증가될 수록 우리는 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게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우 리의 인생은 더 크고 더 많은 선을 생산해 냄으로써 풍요로워진다.

이렇게 현세에서 자기의 시간과 소유일체를 사랑을 키우는 데 활용함으로써 선을 생산해낼 줄 아는 사람들이 내세에 하늘에서 하느님의 영원하고 무한한 기쁨을 하느님과 함께 누리게 된다.



  그러나 주인에게 받았던 돈으로 이익을 내지 못했던 종은, 하느님의 사랑을 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이기주의자를 가리킨다. 사랑으로 사는 인생은 선을 생산하고 이기주의로 사는 인생은 악을 생산한다. 사람의 행동은 완전한 사랑에서 나을수록 더 큰 선이 되고 냉혹한 이기주의에서 나올수록 더 큰 악이 된다. 이기주의자로서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된다.



  그의 모든 행동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이 된다. 이렇게 현세에서 하느님께 받은 시간과 소유일체를 이기적인 자기만족만을 위해 허비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하늘나라의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된다.”  하늘나라는 영원한 사랑의 나라이다. 자기를 버리고 사랑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얻는다.











10            연중 제 33주일   마태 25,14-30 (가)  투자하라고 주신 탈란트  

                                                김현준 신부



가을의 끝맛과 겨울의 첫맛을 느낄 수 있는 11묄 요즘의 날씨는, 우리 몸을 으스스하게도 하지만, 맑은 정신을 갖도록 해준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로 잘 알려진 마태오 복음 25장은 세상 종말에 관한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3개의 이야기가 올해를 마감하는 연중 마지막 3주간에 걸쳐 주일 복음으로 차례로 등장한다,

삶의 준비성과 슬기로움을 깨우쳐주는 ‘열 처녀의 비유\’가 지난 주에, 충실하고 성실한 삶의 자세를 일깨워주는 ’달란트의 비유\’가 이번 주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심판의 기준임을 알려주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다음 주일 복음 말씀이다.

  

연중 제33주일, 오늘의 복음은 달란트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 즉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떻게 셈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달란트\’란 말은 원래 희랍에서, 중량의 단위나 화폐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1달란트는 은 25kg. 1만 데나리온에 해당) 그 후 돈이면 안 되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체험하면서부터인지 후대에 오면서 달란트는 재능, 재주, 능력을 뜻하는 말로, 혹은 재능 있는 사람이나 예능인을 뜻하는 말로 쓰이다가, 요즘은 곧바로 TV 탤런트를 연상하게 한다. 원래 이 달란트의 비유는 예수께서 닥쳐올 마지막 위기를 두고 당시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깨우치려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 후 교회는 이 비유 이야기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를 살아가는 생활들로 받아들였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겉으로 드러난 이 비유 이야기의 숨은 속뜻을 찾아 병립시켜 보면 이러하다. 주인공 역할을 하는 주인은, 그리스도 주인의 여행은 그리스도의 승천, 주인의 귀가는 그리스도의 재림, 달란트는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선물이나 능력,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사는 크리스천, 바깥 어둔 곳은 지옥이다,

  

이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충실한 두 종과 게으른 한 종의 행동이 대비되고 있으며, 강조점은 주인과 게으른 셋째 종과의 셈하는 데에 있다.

어느 날 주인은 먼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을 맡겼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잘 활용하여 더 벌어서 주인께 셈을 바쳤다. 주인은 그들의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큰일을 맡기며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반면, 세 번째 종은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안전하게 땅에 묻었고,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대로 다시 돌려주었다. 주인은 그의 게으름에 대한 질책과 함께 한 달란트마저 빼앗고 쓸모 없는 종으로 여겨 바깥 어둔 곳으로 내쫓아 통곡하게 하였다.



세상 증말에 대한 태도



주일이 이 세번째 종을 단죄하고 징벌한 더 큰 이유는,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의 뜻을 알면서 ‘주인이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투자에 밝고 단호한 결단을 내리는 성품인 줄을 알면서도, 안전만 생각하며, 누구나 할 수 있고 모두가 따라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인, ’땅에 묻어두는\’ 게으름과 어리석음으로 주인의 뜻을 배반 한 것이다. 어떤 창의성과 적극성도 발휘하지 않았기에 주인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은 셈이다.

   

이스라엘의 랍비 「부남」은 고령에 이르러 눈이 멀고 난 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우리 선조 아브라함과 자리를 바꿀 마음이 없다. 아브라함이 눈먼 「부남」이 되고, 눈먼 「부남」이 아브라함이 된다면 하느님께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그런 변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내가 좀더 나 자신이 되도록 힘써 보겠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랍비 「수샤」는 임종하기 직전에 더 함축성 있게 말한 바 있다.

“내세에서 나보고 ‘너는 왜 모세가 아니었느냐’고 묻지는 않고 ‘너는 왜 「수샤」가 아니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신발 가게에 똑같은 크기, 똑같은 색깔, 똑같은 모양의 신발만 갖추어 놓았다면 장사가 잘 되겠는가?

  

하느님은 똑같은 사람을 만드시지 않았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각자의 능력에 따라 귀중한 선물을 주심으로써 조화되게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다양한 선물을 주시며, 각 사람에게 바라는 바는 그 선물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관만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실패를 무릅쓰고 과감히 투자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 받은 능력이 무엇인지 식별하고 좀더 .나 자신아 되는 삶으로 하느님께 보탬이 되도록 함이 어떨까. 이것이 세상 종말에 대한 가장 올바른 태도와 맑은 크리스천정신이 아닐까,











11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탈란트의 비유

     G2 이종환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서의 말씀은 이미 많이 들어왔던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먼 길을 떠나는 주인이 자신의 종들에게 ‘장사를 해 보라고’ 하면서, 금화 한 개씩을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 왔을 때 종들과 함께 그것을 셈합니다. 셈하는 동안은, 세 사람의 종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종은, 한 개의 금화를 열 개로 늘려 주인에게 칭찬을 받고, 두 번째 종도 다섯 개로 늘려 칭찬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세 번째 종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의 종은, 수건에 싸 두었던 금화를 그냥 그대로 주인 앞에 내 놓습니다. 그리고는, “주인님은 지독한 분이라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기에 저는 무서워서 이렇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전쟁이 많던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돈이나 보물을 땅 속에 묻어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게 재산을 유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땅 속에 묻어두는 재산은 전쟁 중에도 안전하고, 시간이 지난 후 그대로 꺼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경에서 본다면, 세 번째 종이 택했던 수건에 싸 두는 방법은 땅 속에 묻어두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그런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면, 그 종은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복음 말씀 속에서 그 종의 편을 들고 있는 주위의 여러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의 말을 들은 주인의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종에게 ‘몹쓸 종’이라고 꾸중하는 것도 그렇고, 가지고 있던 한 개의 금화 마저 빼앗아 열 개를 가진 이에게 주는 것도 그렇고, 조금은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 종의 행동은 왜 그렇게 꾸중을 들어야 했겠습니까? 주인이 정말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는 없었겠습니까? 그 종은 주위의 ‘사람들이’ 이해해 줄만한, 나름대로의 안전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주인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고, 주인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그 종 자신의 기준대로 금화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분을 주님이라 부르며 기도를 드리면서도, 늘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을 두게 되는 유혹과 참으로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종이 그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게 된 ‘이유들을’ 엿볼 수 있겠습니다.



  다른 종들처럼 한 개의 금화를 가지고 여러 개로 만들기까지는 분명히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시련과 고통도 겪어내야 할 일입니다. 세 번째 종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이 수건에 싸서 금화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 두려워했던 것은 주인의 무서움이 아니라, 자신이 부딪쳐야 할 어려움이나 자신이 겪어내야 할 아픔은 아니었겠습니까? 그가 갖고 있던 환경과 여건들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고, 더 나빠지지만 않도록 원했던 것은 아니겠습니까?



    혹은, 그 한 개의 금화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만 쓰여진다는 생각에,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긴 것은 아니겠습니까?

주인이 그 종을 심하게 꾸짖었던 점은, 바로 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 늘 질책을 받았던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그들 주변에 안전한 울타리처럼 쌓여져 있던 율법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했고, 율법의 본래 의미가 어떻든, 자신들의 위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주인이신 하느님보다 그 자신들의 입장이 더 중요했던 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비유에서의 ‘주인’ 역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 번째 종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실패가 두렵고 아픔이 두려워서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족한 내 모습이 드러나고 싶지 않아서, 현재의 환경만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채, 우리 안에서 만들어진 방법들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나에게 직접적인 소득이 없어 보일 때, 우리에게 주어진 금화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거나 그저 감추려고 하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금화들은 참으로 값진 것이고, 틀림없이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금화는 눈앞에 보이는 소득을 위해서나, 지금 현재의 울타리 속에서 편안하게 지키고만 있을 금화가 아니라, 우리에게 편안한 방법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해야 할 금화입니다.



  아픔이나 시련 속에서라도 주인의 뜻에 맞게 우리의 금화를 사용할 때, 우리는 더욱더 많아진 금화를 가지고, 다시 오실 주님을 참으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12                   연중 제33주일   마태 25,14-30 (가)  평신도의 소명





  사치스런 불만



  지하도 계단에 앉아서 늘 구걸하던 젊은이가 있었다. 꾀죄죄한 그를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남들은 그를 미친놈이라고 조소하면서 지나쳤지만, 어느 한 노부부는 그 계단을 지나 성당에 갈 때마다 그를 가엾게 여겨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돈을 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외면하고 지나갔다, 설령 자비심이 발동하여 동전 몇 푼을 줄 때에도 그들은 그를 외면한 채 동전만을 떨어뜨리고 갔다, 어느 날 노부부는 그 젊은이를 초대하였다. 그에게 목욕을 하게 하고 새 옷을 입게 했다. 그는 새 사람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를 병원에 입원까지 시켰다. 우리 주변엔 아직도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린 희망의 세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엔 우리가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육체적인 면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정신적인 면에서 부족한 사람도 있다. 우리가 건강하다면 우린 참으로 많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때때로 사치스런 불평불만 속에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 주위엔 장애인뿐만 아니라 불치의 병으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이 받은 자, 적게 받은 자



  농아 ․맹아 ․정신지체장애인 등 장애를 입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적게 셈 바쳐도 되지만, 건강하고 많이 배우고 많은 재물을 받은 자, 권력을 쥔 자들은 그만큼 많이 셈 바쳐야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많이 받은 것에 대해서 너무 자만해서는 안 된다. 잘생긴 사람은 못 생긴 사람보다 더 많이 바쳐야 한다. 기운이 센 사람도 약한 사랑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쳐야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부자가 종들에게 능력대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먼 길을 떠나면서 “내가 다시 돌아올 때 많은 이익을 남겨 놓으라”고 했다. 1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 어떤 이들은 1만 데나리온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어쨋든 1데나리온이 하루 날품팔이하는 사람의 품삯이니까, 일당을 3만원만 쳐도 어마어마한 돈이다. 5달란트는 9억원쯤되는 돈이니 대단한 돈이다, 5달란트받은 사람과 2달란트 받은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원금을 배로 불려 놓았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다시 갖다 바쳤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사람은 몸을 사리느라고 꽁꽁 묶어서 땅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오자 그대로 내놓았다,



복음의 메시지



  평신도 주일이다. 우리나라 평신도들은 교회 창립 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신앙을 받아들였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목숨 내놓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 시대 평신도의 역할은 무엇일까? 계단에서 구걸하던 청년을 사랑하고 자식처험 돌보며 병원에 입원까지 시킨 노부부를 생각해보면서

우리들 모두 그렇게 사랑의 첨병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에 배로 이익을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그 노부부야말로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유효하게 사용했다. 그들은 건강을 맡겨주신 주인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달레 교회사\’에 황일광이라는 백정 출신의 천민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처음 신자들의 모임에 나갔을 때 당대의 석학인 양반들이 자신의 소매를 끌며 어서 올라오라고 환영하였다.

천민은 감히 양반의 대들보 위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기에 황일광은 너무 어리둥절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평신도들은 신분이 어쨌든 서로 형제라고 불렀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자신

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천주교회에서는 천주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한다. 그렇

다면 내게는 천당이 두개 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고 죽어서 갈 곳도 천국이다.\”



  자신들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쉽지 살다. 우리가 받은 학식, 건강, 재물에 따라서 많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보다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을 실천해도 셈 바칠 것이 별로 없다. 오늘 복음에서 배로 이익을 남긴 사람들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익을 남길 수 없다.



  오늘 우리나라는 은행도 망하는 판이다. 하물며 파이낸스, 종금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익이 많이 나는 곳에 투자하지 않으면 큰 수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의 뜻은 생각지 않았다. 자신의 안녕만 생각하였다. 모험 같은 것은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갖다 바쳤다.

  그는 퇴출되었다. 자신의 안녕만을 도모하고 주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실 때 ‘퇴출당한다. 주님은 우리들을 통해서 사랑의 수익을 올리고 싶어하신다.



  200여년 전 우리의 평신도들은 믿음에서 오늘의 우리와는 좀 다른 면이 있었던 것이 아

 닐까? 오늘날의 많은 평신도들은 영세 후에 기적적인 신앙생활조차 거부하고 있다. 주님의

 용사들이 필요한 시대다. 훌륭한 평신도들이 있을 때 훌륭한 성직자도 있게 마련이다.







13             연중 제 33주일   마태오 25,14-30 (가) 달란트의 비유

                                                – Pax Romana 제 7호



우리는 가톨릭 지성인이다. 지성인이 지성인의 구실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성의 사명은 현 한국 사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 지성의 기능은 생각하고 비판하고 보다 나은 세계를 창조하는 데 있으며 공평 무사하며 진실을 말하는데 있다.



지성의 특징은 <엘리트>(Elite)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엘리트>는 뽑힌 자라는 뜻이다. 엘리트는 비범한 능력자요 진 선 미의 인간이다. 엘리트는 사상에서 고매한 선비적 뜻이 꽃피고 올바른 행동에로 표현시키는 데 성공적 인간이다. 이것을 현대말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하고 또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될 능력을 가진 인간이다. 이것은 인간의 최후 가치다. 따라서 가톨릭 지성의 이상은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느님 은총의 부름에 대한 대답보다 더 높은 인간적 가치는 없다. 참된 영웅 중에 최대의 영웅은 하느님의 성인들이다. 인간이 제 자신을 엘리트라 자칭해서 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자찬과 교만의 감옥에서 무위(無爲)하게 스스로 감탄하고 쳐다보고만 있다면 그들은 기만자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트는 개방적 인간이어야 하며 실로 인류에 대한 봉사에 철저하여 하느님께 향한 수직적 상승의 완결로 이르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 ‘그리스도의 달란트 비유’(마태 25,14-3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성은 보다 많은 달란트를 받았음이 확실하다. 하느님이 주신 이 갸륵한 선물인 달란트를 썩혀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가톨릭 지성은 그리스도의 길에 만인을 인도해야 할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황 비오 12세께서 1950년 8월 Amsterdam에서 Pax Romana 세계회의에 모인 대학생과 가톨릭 지성인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상기할 수 있다. 교황께서는 현대에 있어서 가톨릭 신학자들이 평신도에 의지하고 그의 조력을 얻어야 된다고 하시고 평신도가 연구가나 교사나 철학자 혹은 법률가나 사회학자나 의사로서 그들이 확립한 세속학문과 지식으로써 신학자들의 연구와 활동을 지지하고 보충해 주어야 한다고 격려하셨다. 교황의 메시지는 현대 가톨릭 지성의 사명을 명문화한 것이다.



가톨릭 지성의 사명은 두 가지로 대분해서 제시되고 있다.

1) 현대사상에 대한 가톨릭 지성의 참여다. 즉 개방적 태도와 각성과 진리 옹호의 정신적 두쟁(斗爭)으로써 교회에 대한 봉사다. 교회에 대한 이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지성은 <영성의 사람>이라야 한다. 각기 전문지식과 신앙을 조화시키고 <영성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영원한 지혜의 빛으로써 전문지식의 방향을 보다 나은 세계로 질서 잡아 인류구원의 대열에 선봉이 되어야 한다.



2) 가톨릭 지성은 국가와 국민에 무관심하지 못하다. 이 무관심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나, 더욱 한국에서는 정치문제와 사회문제에 의식적 참여가 요구된다고 본다. 자기가 국민의 한 사람이라는 의식을 잊어서는 안되며 국민과의 밀접한 관련을 맺어야 한다. 국민이 분리되어서는 이 세계를 하느님 품에 다시 이끌어 가지는 못할 것이다. 직업윤리를 통해서 이론이나 학설로써가 아니라 생활과 실천으로 국민의 고생을 덜어주고 그리스도교의 <복된 기쁜 소식>을 그들의 눈에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가톨릭 지성이 평신도 사도직의 일익을 직장에서 복음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우리 한국 사회에 새로운 질서와 문화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자모이신 교회에 대한 충성심 또한 자극해야한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주역들이 모두 다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진리 탐구와 기도생활로써 교회를 건설하지 않았는가?



마침내 이 나라 백성들의 우둔함을 깨고 목숨을 걸고 치명까지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이 땅에 뿌리내리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 불타는 ‘사랑의 사람’으로서 신앙을 실천으로 옮겼으며 사랑과 겸손으로 국민에게 영생의 길을 가르쳤다. 복음의 씨를 뿌린 우리 조상들은 실학의 거성들이요 지성인들이었고 이조 500년의 때묻은 정치와 부패된 사회를 개혁코저 목표한 바 바로 현대의 가톨릭 지성의 과제다.



이 나라를 지상의 세력에 맡기느냐? 하느님 지배에로 이끄느냐? 하는 것은 가톨릭 지성의 책임이다. 이 땅에 평화의 사도로서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힘에 의해 유지되었던 음울한 일시적 평화, Pax Romana(로마 지배 하의 평화)가 아니고 비오 12세 교황이 외치셨던 참된 그리스도의 영원한 평화(Pax Romana)의 역군이 되자!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마태 5,9)













14                       연중 제33주일   마태 25, 14―30 (가)-평신도 주일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1. 대희년을 맞이하는 평신도의 자세



오늘은 제32회 평신도 주일입니다. 지난 1968년 평신도 주일이 제정된 이후 우리 평신도들은 이 날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로 지내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구세주 탄생 2000년의 대희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대희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저  놀라운 ‘은총의 해’(루가 4,19)를 상기시키면서 희년의 정신으로 거듭날 것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얼마 전 “대희년 맞이 평신도 대회”를 지낸 바 있습니다. 이것은 새롭게 태어나려는 평신도들의 결의를 다시 확인한 자리로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삶을 교회 공동체와 민족 사회 앞에서 겸허하게 고백하고, 사귐과 섬김과 나눔의 정신으로 거듭나 새 천년기에 새 복음화의 사도로 나설 것을 선언한 자리였습니다.



2. 사귐과 섬김과 나눔으로

우리는 사귐과 섬김과 나눔이 교회 안에서 먼저 실현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형제 자매로 지내 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마음에 들거나 뜻이 맞는 사람과만 친교를 나누고 다른 사람 은 외면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또한 봉사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대접을 받고자했고, 가진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나누기보다는 보답이나 대가를 목적으로 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교우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교회로부터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이런 행태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이것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새날 새삶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요한 15,15)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주님의 벗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는 것입니다. 사귐과 섬김과 나눔은 이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앞으로 41일 후면 우리는 그리스도 탄생 2000년의 대희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희년이 은총의 해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시 모아야 합니다. 부족한 우리 자신을 주님의 자비와 은총의 손길에 온전히 맡겨드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새날 새삶’을 열어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연중 제33주일   마태 25, 14―30 (가) 평신도 주일 신앙의 조건

최인호 작가



임상옥(林商沃, 1779-1855)은 4대째 평안북도 의주에서 장사를 하던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8세 때부터 중국에 사신길로 따라 다니다 마침내 인삼의 교역으로 조선 최대의 거상이 되었던 무역왕입니다. 그는 평생토록 상업의 정도를 지켜 나간 위대한 거인입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세 명의 장사꾼이 돈을 빌려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임상옥은 각자 한 냥씩 꿔주고 닷새 후 장사를 해서 이문(利文)을 남겨 돌아오라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은 짚신을 다섯 켤레씩 팔아 이익을 다섯 푼 남겨 왔고, 한 사람은 대나무와 창호지를 사다가 종이 연을 만들어 팔았는데 마침 섣달 열흘이라 대목을 봐서 한 냥을 남겨 왔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은 엉뚱하게도 그 종이에 의주 부윤(府尹)에게 절간에 들어가 글을 읽을 테니 비용을 대 달라는 소지(素志)를 써 올린 후 열 냥을 빌려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상옥은 짚신을 판 사람에게는 백 냥, 종이연을 판 사람에게는 이백 냥, 허황한 짓을 한 사람에게는 서슴없이 일천 냥을 빌려주고 일 년 후에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일 년 후 다른 사람들은 나타났지만 마지막 사람만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6년이 지난 후, 그는 그 돈으로 인삼 씨앗을 사서 태백산 속에 들어가 씨를 뿌린 후 6년의 기다림 끝에 인삼 열 바리, 십만 냥의 거금을 벌어 돌아온 것입니다.

임상옥은 이 세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짚신을 만들어 판 사람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살 장사꾼에 불과하다. 종이연을 만들어 판 사람은 때를 살필 줄 아는 작은 상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씨앗을 뿌린 상인이야말로 기다릴줄 아는 인내심과 상업의 근본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반드시 거상이 될 것이다.”

임상옥의 일화는 주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의 비유와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돈을 맡긴 후 그대로 땅에 묻어두었던 사람에게는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하시고, 한 달란트까지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각자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 즉 재능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라는 신학(神學)을 연구하는 것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풍성하게 이웃과 나누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임상옥이 인삼 씨앗을 사서 뿌린 후 6년 뒤에 거두어들인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상인이야말로 거부가 될 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씨앗을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정성된 마음으로 이웃에게 뿌리는 사람이야말로 주님과 더불어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6               연중 제33주일   마태 25, 14―30 (가) 대희년과 평신도의 자세

                                                 전주교구 평협회장/김형렬(바오로)



오늘은 제32회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로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다시한번 다짐하는 날입니다. 앞으로 40일 후면 대희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희년이 우리에게 참으로 가슴 벅찬 은총의 해가 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다바쳐 준비합시다.



대희년을 통과의례가 아니라 정말로 우리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는「은총의 해」이고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가져다주는 해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희년의 정신인「원상회복」을 위한 우리의 실생활과 연관지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심없고 순수한 마음으로「사귐과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여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로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첫째 : 희년의 정신을 올바로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 공부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우리 평신도들이 안고 있는 문제중 하나는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지식등에 대한 지적 빈곤입니다. 희년의 정신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소화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리하여 새천년기에 요청되는 새복음화의 사도로써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 : 참회의 예절에 적극 참여합시다. 희년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회개의 기쁨(제삼천년기 33항)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깊이 성찰하고 가정에서, 소공동체에서 나아가 본당공동체에서도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2천년 대희년을 뜻있게 맞이하기 위한 선결조건입니다.



셋째 : 대희년맞이 실천운동으로 제시된 「새날, 새삶운동」에 적극 동참합시다. 우리자신들이 복음정신으로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새날, 새삶운동」의 구체적인 실천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배우고 익힌 것을 가정과 사회에서 「빛과 소금」 이 되어 희생하고 봉사하는 평신도의 자세로 살아갈 때 우리사회는 새로운 기쁨과 희망이 있다는 것을 다가오는 이천년 은총의 대희년에 보여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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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33주일 주일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 33 주일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제 1 독서 : 잠언 31,10-13. 19-20. 30-31


    제 2 독서 : 1데살 5,1-6


    복 음 : 마태 25,14-30


      연중 끝에서 두 번째 주일인 오늘의 전례도 지난 주일에 이어 또 다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깨어 기다리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주일과는 달리 오늘은 그 강조점이 기다림의 상황에 내포되어 있는 ‘활동적 특성’에 있다 : ‘슬기로움’은 열 처녀의 비유에서처럼 깨어 있는 태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 종들에게 자비로이 베풀어주시고자 하신 선물들이 결실을 맺도록 하는 데서도 이루어진다.


    “그 손이 일한 보답을 안겨주고…”


      이러한 사실은 우선 유명한 잠언서의 한 대목에 의한 제 1 독서에서 강조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자기 가족들을 보살피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온전히 자신을 바친 ‘현숙한’ 여인을 찬미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 “남편은 넉넉히 벌어들이는 아내를 믿고 마음이 든든하다…양털과 모시를 구해다가 손을 놀리니 즐겁기만 하구나…불쌍한 사람에게 팔을 벌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친다…아름다운 용모는 잠깐 있다 스러지지만 야훼를 경외하는 여인은 칭찬을 듣는다”(잠언 31,11. 13. 20. 30).

      다소 이상화된 ‘현숙한’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실제에 있어서는 의인화된 ‘지혜’(8,22 참조)의 우의적 모사인 것 같다 : 이렇게 본다면 어째서 이렇듯 생동감 넘치는 회화적 성격의 대목이 마치 잠언서의 ‘지혜로운’ 메시지를 종합이라도 해주듯이 책 맨 끝자리에 놓여 있는지를 보다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희랍어로 된 70인 역본에서 첨가되고 있는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다음 구절도 이러한 우의적 형태의 해석을 암시하는 것 같다 : “지혜로운 여인은 칭찬을 들을 것이다 ; 그녀가 자랑해야 할 것은 오직 야훼께 대한 경외심뿐이로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별 문제로 하고 본다면, ‘현숙한’ 여인의 가장 빼어난 점은 하느님과 남편과 자식들 그리고 이웃에게 아주 성실히 자신을 헌신하는 그녀의 ‘활동’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 “그손이 일한 보답을 안겨주고 그 공을 성문에서 포상해주어라”(잠언 31,31).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


      제 2 독서도 열심히 깨어 있으라고 한다 :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의 그리스도 신자들이 곧 다가올 주님의 재림에 대해 갖고 있는 걱정을 없애주고자 하면서 “그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주님께서는 ”밤중의 도둑같이“(1 데살 5,1-2) 오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단 한 가지 일은 ‘빛’ 속에 살며 빛의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 이렇게 하면 어떤 도둑도 갑자기 덮칠 수 없을 것이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암흑 속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ㅇ게는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읍시다”(4-6절).

      정신을 똑바로 차리어 보다 자유롭고 보다 새롭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으라는 권고는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권고이다 : 그리스도 신자는 태만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온 세상을 개선시켜 나가는 데 열심히 정진하며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분이 원하시어 오시게 되는 그날, 그분을 영접하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다림은 무기력한 일도 아니며 두려워할 일도 아니다 : 그 기다림은 도리어 주변 상황과 현실을 변화시켜 나감으로써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선물들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한다. 사실, 그분이 오시는 날은 ‘심판’과 ‘수확’의 날이다 : 그러므로 그날 우리는 우리가 이룬 ‘결실’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다“


      이런 모든 내용이 마태오가 종말론적 담화의 문맥 가운데 전해주고 있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마르코는 그 비유를 어떤 특별한 의도에 따라 발전시킴이 없이 그저 시사하는 데 그치고 있다 :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마르 13,34). 반면에 마태오는 그것을 여러 가지 윤리도덕적, 행동적 의미가 가득 차 있는 특별한 내용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항상 종말론적 ‘깨어 있음’을 배경으로 삼는다.

      바로 이 점이 루가복음에 나오는 “금화”의 비유(19,11-27)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된다. 루가는 공통 사료를 매우 자유롭게 개작하면서 종말론적 긴장감을 적지않이 제거한다 : 사실, 루가는 그 이야기를 단순히 윤리적 가르침들의 문맥 가운데 놓고 있다.

      이제 오늘 복음에 나오는 그 비유의 첫 구절부터 고찰해 보자.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었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돈 다섯 달란트를 주고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마태 25,14-15).

      주인이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행위는 ‘신뢰’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들도 똑같이 마음을 넓게 열어 마치 그 ‘재산’이 그들 자신의 것인 양 잘 관리하여 그 신뢰심에 보답해야 한다. 이 때문에 게으른 종의 편협한 마음이 지탄을 받게 된다. 그는 두려워서 주인이 맡긴 돈을 땅에 ‘묻었다’ : 즉 그는 자기에게 베풀어진 신뢰의 선물에 대해 똑같이 신뢰와 적극적인 자세로 보답할 줄을 몰랐다.

      종들에게 맡겨진 돈도 그 막대한 액수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분명 주인의 자비로움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 사실, 한 달란트는 약 칠백만 원에 해당하는 액수이지만 가치로 보아서는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마태 18,24 참조).

      그 다음, 주인이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또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만을 준 것은 그의 변덕스러움에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자기 종들의 ‘능력’에 대한 그의 슬기로운 평가에서 나온 결과이다(15절). 이 비유를 통해 명백히 이해되어야 할 참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인색한 분이 아니시다 : 다만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선물에 비례해서 ‘요구하시는’ 의로운 분이시다.

      이 이야기의 결과는 이렇다 : 앞의 두 종들은 그 돈을 활용해서 두 배로 늘렸으나 반면에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가서 그 돈을 땅에 묻었다”(18절).

      “얼마 뒤에” 주인이 돌아와서 자기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19절). 그는 돈을 두 배로 늘린 앞의 두 종을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 “잘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1. 23절).

      비유에 근거해서 볼 때 그들에게 ‘더 큰일’이 맡겨지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루가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루가 19,17-19) 그들은 이미 시험을 잘 통과했기 때문에 보다 큰일에 대한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그 이상의 결과를 본다 :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23절). 주님의 “기쁨”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그분이 가지시는 통치권에 참여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기쁨이다 ; 다른 곳에서는 그것이 천상잔치라는 상징적 개념으로도 표현되고 있다(마태 8,11 등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또 다른 시험을 요구하지 않는 결정적인 운명을 대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이 지상생활에서 주님을 잘 섬기느냐 못 섬기느냐 하는 그 상황은 다시 뒤집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이같은 사실을 우리는 게으른 종의 경우에서도 본다. 그는 주인 앞에서 애써 자기를 변호하려고 한다 :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약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을 알고 있었다면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24-30절).

      바로 이 게으른 종의 태도에서 오늘 비유의 의미가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다른 두 사람이 이루어놓은 좋은 결과를 보고 자기의 염려가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두려워서”(25절) 그렇게 했노라고 한다 : 즉 두려웠기 때문에 그가 맡은 한 달란트마저 잃어버릴까 염려되어 보다 안전한 길을 택해서 “ 땅에 묻었다”(25절)고 한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받은 것을 되돌려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주인의 반박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바로 이러한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두려움’이란 ‘신뢰’의 관계에 있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주인이 자기 종들과 맺고자 했던 것은 바로 ‘신뢰’의 관계였다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 요한 4,18). 게으른 종은 그러한 신앙적 사실(신뢰의 관계)을 단순한 고용관계로 전락시킴으로써 이미 모든 의미의 상실을 초래하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단죄의 대상은 바로 이러한 ‘바리사이적’ 정신에로의 역행인 것 같다.

      둘째로, 그는 주인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 물론 그 주인 앞에서 어떤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주인은 자기의 선물들을 나누어주고 되돌려받는 일에 있어서 ‘엄하기’ 때문이다 :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을 알고 있었다면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26-27절). 그러나 바로 이러한 당연한 ‘불안감’은 사랑에서 비롯하며 또한 주인이 베풀어주고 요청하는 바에 합당하게 응답할 수 없다는 염려를 하게 하여 오히려 받은 선물을 과감히 투자하도록 부추겨줄 것이 틀림없다 : 만일 돈을 보다 잘 활욜할 줄 모른다 하더라도 땅속에 묻어두기보다는 은행에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비유는 돈 거래는 ‘대담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하게 되는 어려운 상황을 잘 간파하고서 과감히 적극적으로 두려움을 극복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용기는 개방이지 미숙하고 무책임한 모함이 아니다; 그것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어머니의 행위와 같은 사랑과 봉헌의 행위이지 자기 자신의 안위 때문에 위험을 두려워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러면, 이 모든 내용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여기에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특색있게 베풀어주시는 ‘선물들’ 즉 자연적 선물과 초자연적 선물 모두가 마땅한 결실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강력한 권고가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우리가 지력, 언변, 미적 감각 또는 활동하고 조직하는 능력 등의 선물을 받고 있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우리의 기쁨과 이웃들의 선익을 위해 발전시키고 증대시켜야 한다 : 이렇게 할 때 하느님은 더욱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만일 우리가 보다 더 큰 선물들 즉 우리 각자 안에, 또 새로운 계약의 백성인 우리 가운데 사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선물을 받고 있다면 이 모든 선물을 완성시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또 한 가지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그 결실은 우리의 개인적 성장에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특히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성장에서도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하지 못하면 교회가 성숙하지 못한다 : “땅에 묻어놓은” 우리의 달란트는 곧 모든 이를 위한 기회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게으른 종의 책임과 주인의 준엄한 태도의 당위성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 : 그 종의 적극적 태도의 결핍은 모드를 빈곤하게 했다. “자신을 들어높이는 영혼은 세상을 들어높인다”(E.Leseur); 마찬가지로 자신을 빈곤 속에 머물게 하는 영혼은 세상을 빈곤하게 만든다.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자신의 달란트를 결실맺도록 하라는 바로 이러한 ‘종말론적’ 긴박성 때문에 과감히 용기를 발휘해야 하며 또한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이것은 개개 신자들에 있어서나 공동체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다.

      사실, ‘신앙’이란 신경을 암송함으로써 족히 입증할 수 있는 그런 비속세적인 진리의 총체가 아니다 : 신앙은 오히려 생활을 포용하고 역사에 혼합되어 있으며 또한 새로이 생겨나며 문제를 야기시키는 모든 구체적인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다. 범죄, 마약, 인구, 청소년, 사회정의, 민족들 상호간의 평화와 협력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생각해 보라. 나의 신앙은 비록 내가 잘못할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용기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나를 밀어주는 그런 신앙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행동의 타당성을 크리스찬적 겸손과 지혜, 신앙의 빛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의 일치를 통해 신중히 가늠하는 것이다.

      게으른 종은 무엇인가 잃을까 ‘두려워서’ 무기력하게 있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끝으로 주인이 게으른 종에게 하는 마지막 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여봐라, 저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다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8-29절).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는 일반 격언(마태 13,12 참조)을 다루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비극적이지만 오늘날에도 현실적으로 입증되고 있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그 격언으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가? 방금 말했듯이 그 격언에 내포되어 있는 것같이 여겨지는 극단적 절망주의를 미화하고자 하시는 것은 분명 아니다 : 다만, 자기의 달란트를 결실맺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받을 상급보다도 더 큰 상급을 받게 되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실 뿐이다. 그러므로 강조점은 명제의 앞부분에 있다 :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만일 우리가 충실하고 열심한 종이 된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베풀어주실 더 큰 선물을 기다리면서, 그분이 지금 이 지상생활에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에 대해 감사드려야 한다.

      “감사합니다. 내 감미, 내 보람, 내 미쁨이신 하느님이여, 당신의 선물에 대해 감사드리오니, 나로 하여금 당신이 주신 것들을 지니게 하소서. 이로써 당신은 나를 지니시고 주신 바 모든 것은 더욱 불고 오롯하게 되오리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과 함께 있으오리니 내가 있는 것조차 당신이 주셨음이니이다”(성아우구스티노,「고백록」, 제 1권 20장).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33주일


    제 1 독서 : 잠언 31, 10-1. 19-20. 30-31

    제 2 독서 : 1데살 5, 1-6

    복     음 : 마태 25, 14-30


    제 1 독서 : 잠언의 저자는 마지막을 알파벳 시로 장식한다. 알렙에서부터 타브까지 총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첫 단어가 시작한다. 내용은 용감하고 현숙한 부인에 대한 찬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집안의 여주인으로서 생각했던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 여기에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 시대 여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 변함없는 것은 자기 소명에 대한 충실성과 하느님을 두려워함(30절)이다.


    제 2 독서 : 4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해서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답변을 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찬동하지 않는 다. 그날은 도둑같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면전에서 사는 것이고, 언제든지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로 사는 것이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낮과 밤, 빛과 어둠이라는 대비를 차용하고 있다. 이런 대비는 이미 쿰란 공동체에서 널리 알려진 이분법이었다. 이 대비에 의하면 사람은 크게 선인과 악인이라는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선인과 악인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영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악한 길을 가는 사람들은 멸망에 이르고 선한 길을 가는 사람은 구원에 이른다. 이런 이분법은 좁은 문에 대한 말씀(마태 7, 13-14)에서도 나타난다.


    복     음 :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막바지에 이르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거기에 가시자마자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투쟁,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이 시작되었고, 대사제들의 음모를 받기 시작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의 내용인 달란트의 비유이다. 이 달란트의 비유가 끝나자마자 예수를 죽일 음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26, 1-5).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예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하셨다. 그만큼 달란트의 비유가 중요하다는 것이 부각된다.

    종들에게 자기가 가진 재산을 맡긴다는 것은 주인이 종들을 그만큼 깊이 신뢰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셋째 종은 왜 실패했을까 그는 주인의 것을 보관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비록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지만 따라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충실한 종 혹은 불충실한 종이 되는 차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소유의 차원에만 머물러버렸다. 주인은 자기 재산을 맡기며 셋째 종의 능력을 신뢰했으나 셋째 종은 주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고 자기의 능력도 파악하지 못했다. 셋째 종이 실패한 이유는 한마디로 주인에게 충실성과 신뢰심을 가지는 인격적 차원에까지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앞 뒤 문맥으로 볼 때, 오시는 사람의 아들을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예수께서 부재 시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주님께서 우리를 믿고 맡기신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가 드러난다.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꽁꽁 싸두는 소유의 차원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뜻을 파악하고 잘 활용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마태 25, 14-30)의 말씀은 달란트의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세상 종말에 관한 비유 중에 두 번째인 것으로 “열 처녀의 비유”가 종의 슬기로움, 현명함에 관한 것이라면 “달란트의 비유”는 종의 충실함, 성실성에 관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심판하는 척도가 슬기로움(등잔에 기름을 넣어 준비하는 마음), 성실성(주어진 모든 여건을 최대한 이용하는 충직성) 그리고 형제애(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베푸는 마음)라고 보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대전제 하에 오늘의 복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는 각각 달랐는데 이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과 재주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으로 한 데나리온이 일꾼의 하루 품삯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 자체도 결코 적은 돈은 아닙니다. 그런데 첫째 종에게 다섯 달란트, 둘째 종에게 두 달란트가 주어졌기에 셋째 종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는 매우 적어 보였고 시시해 보였던 것입니다. 혼자에게만 이런 돈이 주어졌다면 다른 이들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세 종들에게 맡겨진 돈은 세상을 살아나가는 인간의 모든 조건,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다르게 전개되는 인생살이를 뜻하는 것입니다.

    첫째 종은 주인이 맡겨주신 다섯 달란트를 갖고 부지런히 이를 잘 이용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 둘째 종도 두 달란트를 이용,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종은 자기 주인이 첫째, 둘째 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돈인 한 달란트를 주었기에 그것을 그냥 땅에 묻어둔 채 그대로 돌려주어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되었고 쫓겨나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첫째, 둘째 종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더 큰 일을 맡기리라.”라는 주인의 칭찬을 듣고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었지만 셋째 종은 있는 것마저 빼앗겨 완전 거지가 되어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내포하고 있는 깊은 진리는 우리가 어떤 능력, 재능, 소질을 지녔다 할지라도 이것을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기쁘고 감사하게 살 때 거기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고 은총이 풍요롭게 넘쳐흐른다는 사실입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머리도 나쁘고 좋지 않은 환경과 가문에서 태어났는가 또는 왜 나는 하는 일마다 꼬이고 불행만 연속되는가 하고 운명론에 떨어지게 될 때 그 사람의 삶은 한 달란트를 받아 빵에 묻어두는 어리석고 게으른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남을 괴롭히고 악행을 일삼는 것만이 악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여건을 살리지 못하고 신세 타령만 하고 스스로 자포자기하는 삶을 살 때 그 삶 자체가 악으로 얼룩진 삶이요 그것이야말로 게으름으로 하느님의 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주어진 모든 것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살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갈 때 그 삶이야말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씀이 적용되어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불러일으키는 복된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LA 마라톤 대회(1984년)에서 다리 대신 두 손만으로 42.195km 마라톤 전코스를 달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보브 위랜트로 베트남 전쟁 때 두 다리를 잃은 참전 용사였습니다. 마라톤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 아침, 그는 심판도 없이 혼자 출발선으로 나갔습니다. 위랜트는 7년 전의 일을 생각하며 묵묵히 마라톤 코스를 달렸습니다.

    그는 미국 대륙 4,454km를 두 팔로 걸어 3년 8개월 6일만에 횡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모험적인 도전이라며 함께 동참했던 친구들은 기온이 60도를 오르는 뉴멕시코 사막 지대에 들어서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상체만 이동하는 위랜트를 모습을 보고 “개가 티셔츠를 입고 고속도로를 기어가고 있다.”고 NBC 방송국에 전화를 거는 해프닝을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주리를 지날 땐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고 두 다리를 잃어버린 위랜트를 업고 헬리콥터까지 갔던 전우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때의 감격스러운 장면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모습이 실의에 빠진 청소년들과 장애인들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그는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3일 뒤 위랜트는 74시간 8분 26초라는 기록으로 결승선에 도착했습니다. 심판도 없고 경쟁자도 없는 고독한 경주를 3일만에 모두 마친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기록이 18시간이나 단축되었다고 크게 만족해했습니다. 아직도 달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위랜트는 늘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에게는 권태로운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목표를 세워 그것을 해내는 것이 진짜 사는 재미입니다. 안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다리가 열 개라도 그 사람의 인생은 끝장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역경을 극복하며 스스로 사는 재미를 만들어가는 위랜트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불평불만과 비관에 젖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참으로 멋지게, 아름답게 사는 사람입니다. 주어진 달란트를 열 배, 백 배 늘려서 생명의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며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1독서 잠언에서 칭찬받는 어진 아내, 그녀는 손수 물레질을 해서 손가락으로 실을 타며 가정에 기쁨을 주는 성실하고 근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이끌어내는 소재로 삼고 있는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정신과 마음 자세로 사는 이는 제2독서 데살로니카 전서의 말씀처럼 빛의 자녀, 대낮의 자녀로서 주님의 날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들이닥치더라도 떳떳하게 당당하게 그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늘 최선을 다하는 가난하고 겸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user#0 님의 말:

     

    탈렌트의 비유

    1. 말씀읽기:마태25,14-30 탈렌트의 비유 (루카 19,11-27)

    2. 말씀연구

    내가 받은 탈렌트는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탈렌트가 무엇이며, 나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많이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까? 적게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까?


    루카복음 19,12-27에는 금화의 비유가 나옵니다. 장소와 시간도 다르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려고 하신 핵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보다 나은 상을 받고자 한다면 받은 은혜, 곧 은총을 충실하게, 부지런히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 “하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종들에게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바로 우리들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재산을 맡기셨습니다. 다른 이들과 똑같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 있고, 어느 날엔가는 그것을 셈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 재산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알맞은 재능을 주셨습니다.


    15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주인은 장사 때문인지 관광 때문인지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겼습니다.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옛 문헌을 보면 자유민이 종이나 해방 노예에게 재산을 맡기는 예가 많았는데, 그것은 주인의 재산을 활용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맡은 사람은 주인에게 맡은 액수와 일정한 이자를 돌려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16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는 곧 가서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다.

    17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그렇게 하여 두 탈렌트를 더 벌었다.

     주인은 각자에게 능력에 따라 돈을 맡겼습니다. 주인은 각자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그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맡겼습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맡기는 것입니다. 은총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주시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은총은 베풀지 않으십니다. 다다익선이 아니라 과한 것은 나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받은 사람들의 태도는 각각 다릅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두 탈렌트를 받은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이들은 부지런히 노력하여 두 배로 늘린 것입니다.


    18 그러나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그 돈을 숨겼다.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는 게으른 종인 것 같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돈을 감출 때, 흔히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은행이라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신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당을 파 보면 묻혀 있는 돈이나 금덩이가 나오지 않을까요? (마당을 한번 파봐야지^**^)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도 한 탈렌트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에게 맡기신 한 탈렌트는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 주신 탈렌트들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교합니다. 질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존감의 결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면서 살아갈 때, 더 나아가서 감사하면서 살아갈 때 나는 질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19 오랜 뒤에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어느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종들과 셈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사람은 한 탈렌트를 받아서 땅에 묻어둔 사람입니다. 주인은 그를 어떻게 대할까요? 만일 내가 주인이었다면 그 종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셈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그날에 나는 예수님과 셈을 해야만 합니다. 그날을 기억하면서 살아갑시다.


    20 다섯 탈렌트를 받은 이가 나아가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다섯 탈렌트를 받아서 다섯 탈렌트를 더 바치는 종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얼마나 기뻤을까요? 주인은 자신을 믿었고, 자신은 주인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제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차례만 남은 것입니다.


    21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주인은 성실한 종을 칭찬하였습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이것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으며,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작은 일에 충실하면 나 또한 하느님께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옆에 있는 한 달렌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사람은 어떨까요? 분명 시기질투를 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시기질투를 오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주어질 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2 두 탈렌트를 받은 이도 나아가서, ‘주인님, 저에게 두 탈렌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번에는 두 탈렌트를 받은 종이 행복한 고백을 합니다. “보십시오.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종입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 그가 바로 축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온갖 모함과 질투와 시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기보다는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23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주인은 성실하게 탈렌트를 관리한 종에게 칭찬을 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신앙인은 의로운 사람이고, 의로운 이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 그가 바로 신앙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만 하는 사람은 결코 칭찬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라는 말씀을 결코 들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24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이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 탈란트를 받은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였고, 게을렀으며, 늘 핑계와 불평만 했던 사람인 듯 합니다. 그는 먼저 주인께 대한 두려움을 고백합니다. “주인님, 저는 주님께서 모진 분이시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이 종은 주인을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결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 종이 타인에게 모진 사람이었기에 주인도 그렇다고 생각하였을 것이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려 하고, 뿌리지도 않은 데에서 모으려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주인을 무자비한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일을 하다보면 하기 싫어하고, 또 아무 계획도 없었던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누가 잘하는데 내가 할 필요가 있는가?” “뭐 알아서 다 하실 것인데 내가 뭐 하러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런 변명이 통할지 모르나 하느님께는 결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과 그리고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25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

    종은 또 말합니다.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아무것도 안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못된 종입니다. 그리고 주인께 모욕을 줍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주인은 종을 통하여 당연히 이익을 볼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권리이고, 종에게는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사목위원 중의 하나가 말없이 성당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유를 듣게 되었는데 “본당사제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가 제시한 의견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분과의 일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그가 한 적이 없었습니다. 본당신부는 사목위원들을 통하여 본당 일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사목위원들은 당연히 그것을 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남의 탓만을 한다면 공동체에 힘든 일들이 발생합니다. 또 그가 맡은 분과는 침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2코린4,17)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살아갑시다.


    26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이제 주인은 그 종의 입에서 나온 말로 그 종을 대합니다. 주인이 종에게 한 말은 칭찬이 아니라 단죄입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얼마나 두려운 말입니다. 이 말씀을 하느님께로부터 듣게 된다면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인은 종의 입에서 나온 말로 계산을 합니다.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그렇다면 종은 주인으로부터 한 탈렌트를 받았으니까 주인은 종에게 심고 뿌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거두고 모을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종이 그렇게 알고 있었다면 받았으니까 행동으로 옮겨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종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런 사람이 꼭 있습니다. 말이 앞서고, 공동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악하고 게으른 신자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그가 상처받고 냉담을 할 것이기에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27 그렇다면 내 돈을 대금업자들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

    주인은 종에게 최소한의 행동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내 돈을 대금업자에게 맡겼어야지.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에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돌려받았을 것이다.”이 말씀을 통해서 이 종의 잘못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이 안 하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도 안하고 남도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28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9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인은 말합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 탈렌트를 빼앗아 열 탈렌트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가진 것 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주인은 또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여기서 가진 자는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탈렌트를 성실하게 관리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맡겨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이는 더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열정을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형식적으로 하는 사람과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 그 열매는 분명 다릅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면 쉽게 신앙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시련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 시련을 기회삼아 더욱 큰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누구든지”마찬가지입니다.


    30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이제 주인은 종을 심판합니다. 쓸모없는 종은 버려질 뿐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모르고, 주인에게 모욕을 주는 종이 주인께 칭찬받을리는 없습니다. “바깥 어둠 속에서 울며 이를 갈며” 그는 후회할 것입니다. 다른 종들이 탈렌트를 불리느라고 고생할 때, 그가 했던 말들, 그가 했던 행동들을…, “이 어리석은 친구들아! 왜들 그렇게 사냐? 쉬엄쉬엄 해. 내가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다 해결해 줄께. 그렇게 열심히 살면 누가 알아 주냐? 또 급한 것이 뭐가 있냐? 내일 해도 돼. 오늘은 좀 즐기자!”그런 생각과 행동이 결국 그를 멸망으로 이끈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하루를 정리하면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노력하는 이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한순간의 노력을 통해서는 얻기 어렵습니다. 그 노력하는 자세가 나의 삶이 되어야 하고,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탈렌트를 잘 관리하는 성실한 자녀가 됩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탈렌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가 받은 탈렌트를 다른 사람의 탈렌트와 비교하면서 실망에 빠진 적은 없었습니까?


    ② 내일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면, 내가 예수님의 심판 앞에서 하고 싶은 변명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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