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33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33주일

17. 김정진 신부(나)/28                           18. 정주성 신부(나)/29

19. 김몽은 신부(나)/31                           20. 이찬우 신부(나)/35

21. 강길웅 신부(나)/36                           22. 김영남 신부(나)/38

23. 신은근 신부(나)/40                           24. 한국 초기 평신도(나)/41

25. 서울주보(나)/43                               






17                   연중 제 33주일   마르코 13,24-32 (나)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화과나무의 교훈, 그 날과 그 시간

                                                             – 김정진 신부



우리는 오늘 주일의 독서와 복음에서 세계의 종말과 최후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듣습니다. 전에는 연중 마지막 주일에 이런 말씀을 듣고 했으나 이제 새 교회력에서는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와 대축일로 되어 있으므로 오늘 우리는 우주의 종말과 예수 그리스도의재림에 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우주의 종말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며 예수님의 재림은 불과 공포의 심판의 날이 아니라 주님께서 의인들과 선인들을 한데 모으시고 하늘나라의 영광과 기쁨을 얻게 하시는 경사스러운 날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이 세상의 종말론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귀여겨  들읍시다 .최후의 심판날이 오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며(마르코 13,34) 지상에서는 으르렁대는 바다와 성난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세상에 닥쳐올 일을 예상하고 공포에 질려 사람들은 기절하고 말 것이라(루가 21.25)고 공심판 날의 징조와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공심판 날에는 하늘의 천사들도 떤다는 옛 이야기도 있거니와 천지 개벽 이후 최대의 천지이변과 북새통에서 누구 하나 떨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악신이나 익인들은 몸둘 데를 찾지 못하겠고 발붙일 자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과거에 우리나라 동해의 울릉도 근방 대어장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 325명의 생명을 앗아간 조난 상황이 어떠하였던가를 들어보십시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성필 선장의 말입니다. <폭풍이 여느 때처럼 서서히 강해질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우박이 쏟아지고 폭우까지 몰아쳤다. 파도는 파고가 10미터를 넘을 듯 산더미같이 밀려 왔다. 더욱이 폭풍의 방향도 자주 바뀌어 이 풍향에 따라 어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3각 파도로 변했다.




보통 파도처럼 역류해 가면서 피해갈 수도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선원 22명이 선실 속에서 서로 안고 있었다. 무전기에서는 사람 살려라, 배가 침몰한다, 악악 하는 비명 소리만이 들려왔다. 대낮인데도 20미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폭우에 우박과 소나기가 계속 몰아쳤고 안개가지 자욱하여 바다는 지옥과 같았다.> 이 얼마나 참혹한 지경이었겠습니까. 전라도 고향인 한 어부는 빌어먹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어부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의 최후의 순간은 이 세상의 어떠한 참사보다도 몇 백 배로 몇 천 배로 더 무섭고 두렵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즈음 예수님은 구름을 타시고 수많은 천사들을 거느리시고 큰 권능과 영광 속에 십자가를 드시고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천사들을 사방에 보내어 땅 끝에서부터 하늘 끝에 이르기까지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입니다. 이때에 악인들은 갖은 수치와 죄책감으로 극심한 공포로 떨며 찬란히 빛나는 십자가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을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기의 죄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는 심판의 소리와 함께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입니다.(마태 25,46)




신자 여러분! 이상과 같이 세상 종말이라 하면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불안과 공포에 싸이기 쉽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성 바오로 사도와 같이(II 디모테오 4,8)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기쁨과 안도감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세말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세말은 전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완성을 이룩하는 데 큰 뜻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39항)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온갖 죄악, 고통, 재난, 질병, 죽음은 패배하여 없어질 것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며 완전한 행복과 평화만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세상 사물의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며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것입니다. 세말에는 죄악으로 추하게 된 온갖 형태는 변화되고 사라지고 맙니다만 <사랑과 사랑의 업적은 남는다>(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39항 20절)는 교회의 정신대로 우리가 지상에서 닦은 사랑이나 봉사의 정신으로 쌓아 올린 갖가지 공적은 영원히 남으며 빛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심판관으로서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내게 해 준 것이다.




 자!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고 하시게 되는데, 이 고마운 말씀을 우리 모두 다 들을 수 있도록 열심히 살며 하느님의 공경과 우리 이웃 사랑을 항구히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아멘.
















18                    연중 제 33주일   마르 13,24-32 (나)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화과나무의 교훈, 그 날과 그 시간

                                                         – 정주성 신부







소수의 성직자로서 포교를 하고 신자들을 지도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가톨릭 신자 전체가 포교를 하고 교회의 활동을 이끌어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현대교회는 평신도를 부르며 평신도의 활동이 없으면 교회는 존속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평신도는 성직자와 구별되는 신분으로 성직자는 서품 사제직을 통하여 백성을 위해 공동체인 교회의 질서와 생활에 관계지워져 있으며 평신도는 세상을 살면서 평신도 사제직을 통하여 자기의 생명과 자기 주위의 백성들을 하느님께 인도할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성직자의 고유한 임무가 있듯이 평신도들에게도 고유한 임무가 있으므로 서로 보완 협력하여 하느님 나라 완성에 박차를 가해 나가야 마땅합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직책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통하여 가르치고 다스리고 거룩하게 하는 세 가지 권리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권리를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주신 것이 사실입니다만 평신도 역시 성세성사로써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결합되고 견진성사로써 성령의 권능을 받음으로 위의 세 가지 직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참말로 평신도들은 세계복음화와 복음정신을 가지고 자기가 사는 현세질서에 침투함으로써 위의 세 가지 직분을 수행하게 됩니다. 평신도 사도직의 특징은 그들이 세상 깊숙이 살면서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도직의 목적을 그들의 일상생활과 의무를 평범하게 채우면서도 그들의 생활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여 복음의 정신으로 현세질서를 완성시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현세 질서를 비뚤어진 방향으로 이끄는 경향이 많습니다. 즉 하느님이 주신 현세사물을 죄악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과신한 나머지 현세사물을 절대화하여 우상숭배에 떨어져 가고 있으며 인간이 물건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물질을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평신도 사도직의 임무는 위의 비뚤어진 현세질서를 바로 잡고 이를 그리스도 안에 재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평신도들은 현대인 생활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지러운 이 지상의 사회질서를 바로 잡도록 다 같이 힘써야 되겠습니다. 평신도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해내겠습니까?

가정에서 평신도 사도직을 완수합시다! 하느님은 남녀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결혼을 인간사회의 근본으로 삼으시고 가정생활의 중대한 사명을 교회와 시민사회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가정의 사도직”을 실천하게 됩니다. 부부는 서롤 신앙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그들 자녀들에게 가장 힘있는 첫 설교자가 되고 신앙의 첫 선생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학교가 됩니다.

‘평신도 사도직의 학교’인 가정에서 처음부터 잘 배운 어린이들은 훌륭한 평신도가 되는 법입니다.




사회한경 사도직을 펴 나갑시다!

직장에서 자기와 매일 만나는 동료들에게 좋은 모범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두운 곳에서 헤매는 그네들을 비추어주는 사도직을 수행합시다. 평신도의 그리스도적 형제애는 사회환경 사도직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환경에서 동고 동락하며 진정으로 형제애를 실천할 때에 모든 이의 마음에 그리스도께 대한 매력을 느기게 할 것입니다. 각자가 살고 있는 사회환경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교화시키는 일은 평신도가 아니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사도직입니다.




평신도 사도직을 조직적으로 실천합시다!

단체조직을 갖고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현대사회 요청에 잘 부합하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그들의 사도직을 일치 단결하여 실천할 적에 그 힘과 영향력은 대단히 큽니다. 힘의 결속과 단체조직 없이는 우리에게 도전하는여러가지 반대와 압력을 막아낼 수 없을 뿐 아니라 교회전체와 사회에 대해서 사도직의 영향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꽤 많은 평신도 사도직 단체들이 있는데 그 단체들이 자주성을 살리면서 모든 단체의 힘을 결속시키는 종합 조직체로 움직여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평신도 사도를 길러냅시다!

훌륭한 평신도를 길러내야 합니다. 훌륭한 ‘가톨릭 운동’의 조직체를 구성하기 위하여는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평신도 사도직을 바로 알아듣고 성직계와 협력하여 스스로 복음을 전하고 남들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합니다. 어려운 평신도 사도의 제 일선에 나가기 전에 그들을 ‘하느님의 군사’로 중무장시키는 교육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자 없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듯이 평신도 사도직 없는 교회를 또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아 현대 교회가 자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평신도 사도로서 불림 받았음을 자각하여 적극적 능동적으로 평신도 사도직 수행에 최선을 다해 나갑시다.
















19                        연중 제 33주일 마르 13,24-32 (나)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무화과나무의 교훈, 그 날과 그 시간

                                                             – 김몽은 신부







<그 재난이 다 지나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을 것이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사람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부터 하늘 끝에 이르기까지 뽑힌 사람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교훈을 배우시고.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압니다. 이와 같이 당신들도 이런 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것을 아시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십니다.>




오늘은 B해 연중 제 33주일로서 연중 주일의 마지막 주일이자, 우리 한국 교회가 ‘평신도의 날’로 정하고 평신도의 위치를 높이고자 하는 사랑의 배려를 한 날이다.

지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평신도의 위치를 원위치로까지 높이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지난 공의회를 평신도를 위한 공의회라고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평신도의 위치는 교회가 높인다고 해서 저절로 높여지는 것도 아니요, 성직자나 수도자가 평신도의 위치를 낮춘다고 해서 낮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이 스스로의 가치는 스스로가 지니는 법이다.




평신도가 오늘날과 같이 교회에서 가장 낮게 평가되는 이유는 평신도들 자신에게 있지 결코 성직자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를 상기해 보자. 그 당시에는 평신도와 성직자가 모두 다 함께 하느님 안에서 존엄한 존재로 있었다. 왜 그러했는가? 그것은 평신도가 성직자 못지 않게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헌신했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법이다.




예수께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하신 말씀은 성직자나 수도자에게만 해당시킨 말씀은 결코 아니다. 신자라면 모두가 이 명령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즉 신자된 자, 누구에게나 내리신 지상 명령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고, 어떻게 주님의 칭찬을 받고, 교회에서 대우를 받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성직자나 수도자 역시 주님의 이 지상 명령을 이행치 못했을 때, 결코 그 직위나 직책 때문에 존엄하다든가 존경을 받거나 주님의 상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가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겸허하게 말했던 것이다. <여러분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공포를 일으켜 주지만,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나를 위로해 줍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크리스천입니다. 전자는 직명이요, 후자는 은총의 이름이며, 전자는 위험한 이름이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이름이다>(성 아우구스티노 강론 430, 1).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스스로 높여지기 위해 평신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평신도들을 양성하고 교육시켜야 할 책임이 성직자에 있다는 사실도 상기할지 않을 수 없다. 평신도가 자기 사명을 성직자나 수도자에게만 미루거나 또 성직자가 평신도에게 그들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지 않고, 교육시키고 양성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대립(?)과 같은 현상도 일어날 수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제 교회력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다. 모두 스스로의 책임과 사명을 다할 것만을 생각하고, 권리와 권위는 다음으로 미루는 태도로 임하자. 오늘의 복음은 그에 대한 경고를 해주고 있다. 즉 종말에 대한 대비를 하라고 일러준다. 확실히 종말은 다가왔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느님 아버지 이외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20         연중 제33주일   마르 13,24-32 (나)   시작과 끝

                                                 함세웅 신부




 교회의 전통적 예전에 의하여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입니다. 따라서 늘 종말을 묵상하고 전 우주의 최후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통적 전례와 함께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본래의 깊은 내용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새로운 전례는 오늘을 ‘그리스도 왕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나, 우리, 국가, 교회, 전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분으로 다시 고백하는 것입니다

  

왕이란 단어가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좀 귀에 거슬리면서 거북하게 들리지만, 그리스도에게 부여한 칭호는 봉건제도 또는 군주제도에서의 일방적인 통치자로서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왕이란 의미는 우선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견된 분이며, 그 임무 수행을 위하여 인간에게, 특히 상처받고,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한 봉사자로 나타나며, 특히 가난한 자, 억눌린 자의 해방자로서 작은 무리의 벗이 되었고, 결국 하느님의 뜻과 인류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분이란 뜻으로,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쳤기에 모두를 하느님과 화해시켰고, 하느님께로 인도한 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무 또는 직무를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그 나라를 선포하고 알리는 예언자로 나타나며, 그분은 그가 가르친 그 내용을 실천했기 때문에 자신을 제물로 바친 대사제이며, 이 때문에 모두의 주(主)가 되시는 왕(王)으로서 군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세 직무가 서로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늘 고백하는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고,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하는 이 신앙을 새롭게 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의 특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있습니다. 신앙이란,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동하였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신뢰하는 마음과 행동에 있습니다. 그 신앙은 하나의 결정이며 인격적 행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미래와

관계 맺고 모험을 동반하면서 책임을 가져옵니다.

  

미래를 걸고 미래를 향하여 사는 신앙인, 그는 신앙으로 그 미래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현실화 또는 현존화시킵니다.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또 지금의 나, 즉 나의 행위, 노력, 관계 등 모든 것이 꼭 미래와 상관이 있고 미래를 결정지어 준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전례로 1년이 끝나는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마태오 복음25장의 후반부인 ‘최후의 심판\’ 장면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늘 귀가 닳도록 들어왔던 이 말씀, 이 말씀이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는 마지막 말씀이라는 심정으로 들어야 합니다.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좌에 앉아 있는 심판관으로, 전 인류는 오로지 두 부류로 나뉘게 될 것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축복받은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 이 판단 기준은 신앙에 입각한 사랑의 행위와 실천에 있다는 점입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하는, 이 깊은 의미를 되새기며, 내 행위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모름지기 이웃을 꼭 하느님처럼 대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한 사람, 봉사한 사람, 자비를 베푼 사람, 그 사람만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에게는 건강이 중요합니다. 재물도 중요합니다. 아내, 자녀, 부모, 형제, 친척 모두 귀중합니다. 재산, 지위, 명예, 체면, 실력, 이 모든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끝에 가서 남을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을 직면한 인간의 마지막 기도가 무엇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선 사람으로서 무엇을 가장 아쉬워하겠습니까?

  

우리 모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일진대, 우리는 그 정신으로 실제 행동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전 우주 만물의 시작이요, 마침이며,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 존재의 기원이며, 목적과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저버려야 한다는 뜻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가장 귀중한 최고의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나의 왕입니다. 그래서 나는 믿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축복을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21                 연중 제33주일   마르 13,24-32 (나) 자랑스러운 평신도의 후예

                                                         이찬우․요셉 신부




ꡐ어와 세상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ꡑ




위의 노래는 우리 나라 초대교회의 천주공경가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하기 위하여 평신도인 이벽(李檗, 요한)이 지은 노래입니다. 이 노래 가사를 통하여 누구나 쉽게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고 선교 열정입니까? 스스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신앙인이 된 우리의 선조 평신도들은 성직자의 도움도 못 받고 주님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기 위하여 뜨거운 가슴으로 살았다는 것을 위의 노래를 통하여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은 지식인들에게는 한역교리서를 필사해서 전해주며 교리 해설을 해주었습니다. 또한 쉬운 한문 교리서를 직접 저작하였고, 한글만 깨친 사람들을 위하여는 한글로 된 교리책을 만들어서 전하였습니다. 더욱이 아무런 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위의 천주공경가처럼 노래를 통해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해서 380만 한국교회의 신도들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감사하고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신도들로서의 사명을 자각하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고유한 직분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세속의 평신도들은 성직자와 수도자와는 구분되지만 성세로써 다같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이 되며, 그리스도의 예언직(말씀 선포), 왕직(사랑의 봉사), 사제직(성화의 삶)에 참여하는 교회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해야 함을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교회헌장 31). 성직자 없는 교회를 생각할 수 없듯이 평신도 없는 교회는 더욱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각자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로마 12,4-5; 교회 32).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하늘나라에 봉사하며 그 나라의 완성을 오늘 복음 말씀처럼 깨어서 기다려야 합니다(마르 13,24-32).




평신도들은 세속에 묻혀 살지만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굳은 믿음과 희망을 갖고 성직자들이 함께 할 수 없는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같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자신의 성화와 세상의 복음화에 이바지하도록 주님이 부르시고 있음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들이 복음화 되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빛을 발산하게 되는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22     연중 제 33 주일(평신도주일)   마르 13,24-32 (나) 끝날은 온다 분명히 온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다니 12,1~3 (그런 때라도 네 겨레는 난을 면할 것이다) 

제2독서 히브 10,11~14.18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복 음 마르 13,24~32 (사람의 아들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로서 전례력으로 봤을 때 이제 마지막 시기의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세상 끝날에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상기하면서 긴 연중 시기는 막을 내립니다. 오늘 성서의 내용은 그래서 마지막 시기, 즉 종말에 대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끝날은 옵니다. 분명히 옵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운명의 종말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의 보편적인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묵시문학적인 표현을 빌어 주님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올 것이며,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역사 안에서 건설될 하느님의 나라를 꿈꿔 왔습니다. 그것은 역사와 지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때가 되면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등장하여 이상적인 세상, 즉 지상 왕국이 바로 이 땅 위에서 영광스럽게 세워지리라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언적 종말론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와 같은 이상적인 지상 왕국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참담한 유배생활과 모진 식민생활을 거치면서 이제 그들의 미래가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적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다 틀렸습니다. 역사 안에서 기대했던 지상 왕국은 영원히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등장된 것이 묵시적 종말론입니다.




묵시적 종말론이란, 우리가 기대했던 이 세계가 우주적인 대 재난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고 붕괴된 후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세계 밖으로부터 권능을 떨치며 와서 초역사적이고 초지상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 표현을 쓰셨지만 그러나 이 종말론은 많은 오해를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인 표현에 대해 성서의 원문이 말하는 그 이상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에서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당시에 종말이 오리라고 믿었고 적어도 그들의 세대가 눈감기 전에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종말에 대한 혼란만이 있었습니다.




종말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날\’이 언제냐 라는 것입니다. “선생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르 13,4)라는 질문은 2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항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모릅니다. 다만 끝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소위 시한부 종말론이 19세기 중엽, 미국에서부터 등장하더니 급기야는 우리나라에까지 번져 벌써 십여 차례 사회를 떠들썩한 혼란 속에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특히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 종말이 온다고 외쳤던 다미 선교회는 그 대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천주 성부만이 ‘그날\’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짜 하느님들이 득실거렸던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는 이들의 속마음은 뻔합니다. 신도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어넣어 단시일 내에 교세를 확장시키고 또한 재산을 헌납 받음으로써 부를 축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 속내용을 모릅니다. 오히려 사이비 교주의 기만에 따라 순교라도 하겠다는 각오들을 드러내니 그 어리석음에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모든 상황을 보면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출현은 물론 심각한 환경 오염과 그리고 낙태로 인해 살해되는 수많은 무구한 생명들을 바라볼 때 이 세대가 이미 마지막 시대에 와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징조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회개해야 하며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1독서에서 다니엘은 착하게 산 사람들은 끝날에 영광을 받고 악하게 산 사람들은 단죄를 받는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따라서 인생이 죽음으로 아주 끝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엔가 모두 다시 살아나 영원한 행복과 불행을 각각 차지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먼지로 돌아갔던 인생은 다시 일어납니다.




구약에서 부활 신앙은 크게 진전된 것이 없지만 그래도 오늘 다니엘서를 보면 부활에 대한 최초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끝날은 있고 심판도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행한 대로  상이나 벌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감춰져 있지만 그날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계절적으로도 반성과 다짐의 시기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종말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갑시다.

끝날을 잘 맞이하는 것이 세상을 잘 산 사람이고 또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23                   연중 33주일. 마르 13,24-32. (나)

                                                      김영남 신부




전례력으로는 끝에서 두 번째 주일인 오늘, 교회는 성서말씀을 통해 우리의 시선을 주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세말(世末)을 향하도록 이끌어준다. 마침, 요즈음, 거리에 날리고 있는 낙엽들과, 며칠 사이에 앙상한 가지들만 내놓고 서있는 나무들은, 우리의 생명까지 포함하여 세상만사에는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 당시에 유다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던 묵시문학적 방법으로 ‘세말’이 묘사되어 있다. 묵시(黙示)문학이란 기원전 2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경 사이에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널리 퍼져있던 사고방식 또는 표현방식을 총괄하여 가리키는 개념이다(대표적 작품은 다니엘서와 요한 묵시록).




많은 사람들에게 묵시 또는 계시(apocalypsis)라는 단어는 즉시 무시무시한 세상 종말의 재앙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되어 버렸으나, 성서의 묵시문학의 원래의 목적은 독자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희망”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묵시문학은 위기의 시대에 생겨난 문학이었다. 악의 세력이 너무나 강대하여 희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상황에서, 비록 악의 세력이 세상과 역사를 지배하는 듯이 보이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결국 하느님이시며, 그 하느님께서 곧 악의 세력을 심판하여 없애시고 의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열어 보임으로써 위기에 처해있던 의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것”이 묵시문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그리고 미래의 일어날 일들의 정확한 순서를 알리고 전하는 것이 원래의 목표는 아니었다. 묵시문학적 작품들을 해석할 때에는 이러한 문학적 특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몇 해 전에 우리 나라 사회까지도 시끄럽게 했던 “휴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 묵시문학의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공포감만 자아내고, 그렇지 않아도 세상사에 지치고 지친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종교의 이름으로 새로운 멍에와 공포감만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는 큰 재난이 닥친다는 말과, 해, 달 별 등 천체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묵시문학의 대표적인 특성 중의 하나였다. 세말의 때에 “사람의 아들(人子)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다니엘서 7,13-14를 배경으로 하여 볼 때 더 잘 이해가 된다.




그렇게 이해해 보면, 人子가 구름에 싸여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거역하는 모든 권세들에 대한 최종 심판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통치권이 세워짐을 의미한다.

악한 권세들에게는 멸망을 의미하고, 그분을 기다리는 의인들(오늘복음에는 ‘선민들’)에게는 구원을 의미한다.




많은 위경들의 묵시문학 작품들과 비교하여, 신약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묵시문학적 문헌들은 세말의 시점과 장소 및 정확한 순서들과 같이 호기심 차원에서 제기되는 질문제기에 대하여는 답을 잘 주지 않으면서 그러한 태도 자체에 거리를 두려고 하는 면을 보여 준다.

그래서 세말에 대하여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메시야라고 자처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세말이 언제 올지 그 날과 그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깨어 기다리라”는 분부가 예수님의 세말에 관한 가르침의 핵심 중의 하나였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도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통치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날과 그 시간은 하느님 외에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표징이 주어질 터이니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처럼 공포에 질려 허둥대지 말고, 표징을 읽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사실, 복음서의 다음 단락에서는 “깨어 기다리라”는 취지의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깨어 기다리는 삶”인가? 세말을 올바로 준비하는 삶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최고계명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하느님께 대한 한결같이 충직한 사랑의 마음에서,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베풀며 사는 삶이야말로 세말(종말)을 올바로 준비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갑작스럽게 어떤 특정 기도를 바쳐야한다거나 또는 새롭게 어떤 특정 단체에 반드시 소속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심을 굳게 간직하고 꾸준히 사랑을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는 두려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공놀이를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는 어느 성인의 정신대로 말이다.




오늘의 복음 말씀은 분명히 ‘세말’이 예기치 못한 때에 전 세계적으로 갑자기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 과학적 세계상에 젖어 사는 우리 현대인들은 ‘세말’이 갑작스럽게 올 수 있다는 복음서의 이 메시지에 매우 둔감하게 마련이다.



모든 것이 “자연과학적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 자연과학적 법칙성을 벗어나는 어떤 우주적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오만하고 헛된 안전감을 떨쳐내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라고 요청한다.
















24                연중 제33주일   마르 13,24-32 (나)   종말의 대비  

                                              신은근 신부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이다.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가. 우주에 일어날 이 엄청난 변화는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진실로 그런 일이 미래에 일어날 것인가.




호기심으로 성서를 대하면 끝이 없다. 말씀의 근본적인 의도는 미구에 닥칠 엄청난 변화를 이야기하려는 데 있다. 해와 달에 해당될 만큼 근본적이고 요지부동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바뀐다는 암시다. 그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삶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달은 변하고 태양은 바뀐다.

자신이 변화되면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은 다르게 보인다. 더구나 밤하늘의 달은 마음의 거울이다. 선한 쪽으로 변화되면 달의 아름다움이 보이지만 어둠 속에 있다면 달의 아름다움은 고통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종말은 이러한 삶의 결과다. 오늘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결론이 종말에 내려진다. 그러므로 종말은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 할 것도 아니다. 삶의 결과가 종말일진데 종말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작품인 것이다. 그러니 종말을 삶의 중간에서 판단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감정적인 무엇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종말은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누가 인간의 삶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살았으니까 종말에 구원될 것이다 하는 생각은 우리 생각일 뿐이다. 더구나 그 생각 안으로 하느님의 뜻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삶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언제나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하며 거듭 태어날 것을 이야기한다. 언젠가 우리는 죽는다.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미리부터 겁을 먹고 그 날을 두려움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일이다. 오히려 그 날을 기억하며 현실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이 종말에 담긴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보험이 아니다. 교통사고가 걱정이 되어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듯 종말에 대한 대비로서 믿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이제 수정해야 한다. 종말에 대한 지식이 막연한 두려움과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불안감이었다면 이제 바꾸어야 한다. 종말도 결국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안에는 인간을 위한 배려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신앙은 재난의 때를 피하기 위한 보험이 아니라 주님께서 왜 생명을 주셨으며 왜 이러한 삶을 허락하셨는가. 어찌하여 이러한 운명과 만남 속에 살도록 배려하셨는지 그분의 뜻을 찾아내는 행위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종말은 허무한 끝이 아니라 반가움과 확실함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편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평신도 주일날 이렇듯 종말에 대한 복음을 읽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란한 이 세상에서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종말관을 지니며 살라는 것이 아닐는지. 그러한 삶을 세상 한가운데서 실천하며 보여주는 것이 평신도의 역할임을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러니 오늘을 단순히 평신도와 성직자의 역할을 논하는 그런 자리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복음적 삶을 사는데 성직자와 평신도의 역할이 다를 수는 없다. 신앙생활을 경시하고 있는 요즘 믿음을 가졌기에 용감하게 겁없이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역할일 것이다.













25         연중 제33주일   마르 13,24~52 (나) 영생의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렸네!

한국 교회의 초창기 평신도의 역할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 성조께서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받고 귀국하신 후부터 시작된다.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한 분이 계셨으니, 바로 이벽 성조(聖祖)였다.




  이벽은 이승훈을 찾아가서 간곡한 부탁을 한다. “이번에 자네가 북경에 들어가게 된 것은, 하늘이 성교의 참된 뜻을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좋은 기회이다. 이 교리만이 성현의 도이며, 만물을 만들어낸 주인인 천주, 오직 하나뿐이고 모든 일을 다할 수 있는 천주께 봉사하는 참된 교이므로 구라파 사람들은 이것을 가장 높이 받든다.




이것을 빼놓으면 우리들은 아무 힘도 없어지고, 아무 일도 할 수 없게되어, 마음을 가다듬을 수도 없고, 만물을 연구하고 알아낼 수도 없다‥‥(중략)‥‥이번 자네가 북경으로 가게된 것은 참으로 천주께서 우리의 이 작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구하고자 하시는 섭리이다.




북경에 들어가거든 곧 천주당에 가서 구라파의 선교사를 만나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물어서, 교의의 깊고 참된 뜻을 밝히며. 천주교리의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또 필요하고 중요한 교리에 관한 책을 모두 가지고 돌아오게. 인간이 죽느냐 사느냐, 그리고 영원토록 행복하느냐 불행하느냐가 달린 큰 문제가 자네 손에 달려 있으니, 경솔히 행동하지 말고 몸가짐을 특히 주의하라!”




  이벽의 부탁을 받은 이승훈은 세례를 받은 후, 수십종의 교리서와 고상, 성화, 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에게 주었다. 이벽은 조용한 곳에 묻혀 열심히 교리서를 숙독하고 묵상하고 나서, 이승훈에게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종교이며 참된 도이다. 천주께서 우

리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들로 하여금 세계를 구하고, 죄를 보속하는 은혜에 참여하게 하고자 하심이다. 이것은 천주의 명령이니, 우리들은 그 부르심에 귀를 막을 순 없다. 모름지기 천주교를 널리 펴서 복음을 온 세상에 선전해야한다”고 말했다.




  과연 이들이 주축이 되어 천주교회를 창설하고 열심히 전교하였다.

박해 때 옥중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타이르는 말씀을 들어보자. 강완숙(姜完淑) 골룸바는 처녀로서 덕산 사람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가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전처 소생의 아들 홍필주를 영세시키고, 나중에 아들과 함께 잡혔다. 고문을 받아 아들의 마음이 약해지려 하자, 아들이 어머니가 갇힌 감옥 앞을 지날 때 창살 앞으로 손을 내밀어 멈추게 한다음, “애야 우리 필주야, 오준 예수께서 너의 머리 위에 계시면서 너를 내려다 보신다. 네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바라 소경과 같이 어리석게 네 영혼을 마귀에게 주려고 하느냐? 너와 내가 주를 위하여 이렇게 벌써 여러 달째 고생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올 영원한 천복(天福)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나와 함께 영원한 천국으로 먼저 가서, 할머님과 네 누이와 처를 기다리자. 사내가 용맹하고 굳세어야 하지 않겠느나? 보아라, 여기 많은 여자들이 다 우리 주를 위하여 감심으로 죽기로 굳게 결심하고있다. 너도 잠깐 지나가는 세상을 생각치 말고 영원한 천복을 생각하라.

 오늘 형리 앞에 가서 지금까지 약하게 먹었던 마음을 굳세게 증명하여라.” 이 말을 들은 아들 필주는 “어머니, 걱정마세요. 잠시 제가 마귀 유혹에 빠졌었나봐요. 관장 앞에 가서 그 전과같이 견디겠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41세에, 필주는 어머니 뒤를 이어 28세에 순교하였습니다)




  박해때 어느 시골 교우 어린이들의 대화를 들어 보자. 리델 신부가 쓴 편지의 내용이다. 「‥‥안드레아라는 교우 집에 들어가려 할 때, 안에서 어린이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

습니다. 12세 된 장녀 안나가, 어린 남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신부님하고 아버지, 엄마를 잡으러 올거야.

그리고 우리들도 데리고 가서 “천주교를 버려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거다! 하고, 말할거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니?

그러자 장남이 말했습니다. 「난 이렇게 말할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처럼 할 거예요. 저는 천주를 배반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제 목을 베면 천주께 갈 거예요!”

작은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관장에게 이렇게 말할거야. “난 천당에 가고파요. 나으리도 교우면 천당에 갈텐데, 교우들을 죽이니까 지옥에 갈 거예요.”

그러니까 안나는 두 동생을 꼬옥 껴안으면서 말했습니다. “좋다. 우린 모두 죽어서 아빠, 엄마 그리고 신부님과 함께 천당에 갈거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려면 천주께 기도해야 된다. 매를 많이 맞을테니까 말야. 우리 머리칼과 이와 손을 뽑고 굵은 몽둥이로 때릴거야. 신부님이 그러시는데 기도를 잘하지 않으면 그걸 견디지 못할거래”—

얼마 후에 두 동생 중의 나이 어린 동생이 엄마에게 가서 “엄마, 애기도 죽일거야?”(그의 어린 동생은 생후14개월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참으로 기특한

아이들이다.




  평신도가 적극적으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한다. 평신도

교령 2항에 “교회의 창립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 왕국을 전 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케 하며, 또한 그들을 통해 전 세계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한 신비체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 부른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이다. 평신도 사도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신 선조 평신도들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은 더 이상 「병신도」로 남아 있어선 안되겠다. 순교자들의 희생을 욕되게 해선 안된다. 분발하자.













26    연중 제33주일   마르 13,24-32 (나) 내 말을 결코 사라지지않습니다

교구주보

1.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종말설교이며,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종말의 날은 두 단계에 걸쳐 옵니다. 종말의 첫 단계는 우선 “황폐의 흉물이 있어서는 안될 곳에 서 있는”(14a절)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 황폐의 흉물은 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성전에 나타나면 목숨을 부지할 생각을 버리고 빨리 도망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 때 벌어질 재난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또 없을” 엄청난 재난이라는 것입니다(19절). 그러나 이것은 종말의 첫 단계일 뿐 곧이어 종말의 두 번째 단계가 닥치게 되는데 오늘 복음이 그 내용입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제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에 있는 권세들은 흔들릴 것입니다”(24. 25절).

그리고 드디어 인자가 구름에 싸여 큰 권능과 영광을 갖추고 세상에 내려와 선민들을 불러모을 것입니다(26. 27절). 이처럼 종말 사건은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을 거둔다고 합니다. 이제 복음서 작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의 징조를 일깨워주면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권합니다(32-37절).




2. 우리의 이해

  서기 전 200년경부터 서기 100년경 사이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행한 종교문학은 묵시문학입니다. 이 묵시문학은 수난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역사에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알리는 방편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현재의 역사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의인이 박해를 받지만 앞으로 올 시대는 하느님께서 통치하는 빛의 시대로서 의인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되며, 그 시기는 이미 임박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오기 전에는 여러 가지 전조가 생긴다는 내용이 묵시문학에 담겨 있습니다. 수난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들의 신앙체험으로서 하느님의 침묵이 계속되는 듯한 ‘중간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한 유형을 제시한 점에서는 묵시문학의 순기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로부터 역사의 퇴화과정, 종말전조, 인자가 오시는 시기와 장소, 부활과 심판의 양상, 구원받을 사람의 수효 등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런 것에 집착한다면 묵시문학도는 될 지언정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묵시문학에 담겨 있는 표현들이 지닌 그 의미에 관심을 기울여 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께 어떤 사람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겠습니까?” 하고 묻습니 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시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사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 13,22-24). 이는 묵시문학적 상상에 사로잡혀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종말이 올 지 따지지 말고 언제라도 하느님의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라는 말인 것입니다.                                                                                      서울대교구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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