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34주일)
8. 강길웅 신부(나)/15 10. 김영남 신부(나)/17
11. 김영진 신부(나)/19 12. 신은근 신부(나)/20
13. 송영규 신부(나)/22 13. 내 왕국은…(나)/23
15. 내가 왕이라고 당신이 말합니다(나)/없음
16. 통치자들이 나라를 망쳤다(나)/25
9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 34 주일) 요한 18,33-37 (나) 이 세상 왕이 아니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다니 7,13~14 (그의 주권은 영원히 갈 것이다)
제2독서 묵시 1,5abd~8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다)
복 음 요한 18,33b~37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1년이라는 기간 안에 질서있게 배치하여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이것을 전례주년 이라고 하는데 대림절부터 시작하여 성탄절로 이어지고 그리고 연중 시기가 얼마쯤 계속되다가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을 맞이하게 되고 이어서 부활절로 연결이 됩니다.
부활절이 끝난 다음에는 다시 긴 연중 시기가 다음 대림 전까지 계속됩니다. 대림 첫 주일은 교회로 봐서는 새해 첫 날인 셈이며 연중 마지막 주일은 이를테면 섣달 그믐 주일인 셈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특히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여 마지막에 왕으로 오실 주님을 기립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지금도 왕이시며 그리고 끝날에 왕으로 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1독서에서 봉독되는 다니엘서는 기원 전 2세기 경에 시리아의 박해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내용은 박해자들의 권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언젠가는 다 망하게 되리라는 것과 오로지 하느님의 지배, 하느님의 왕국만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독서에서는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과 그가 마지막 심판자요 왕으로 오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분만이 영원한 왕이요 지배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존재했던 왕들은 다 지나갔습니다. 왕권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국만이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서에는 예수님을 자주 왕으로 묘사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예수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루가 1,33).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헤로데를 찾았을 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하고 물음으로써 헤로데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요한 1,49)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왕이시라는 사실에는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세속의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빵 다섯 개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을 때 사람들은 억지로라도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피하셨습니다(요한 6,15 참조). 그들이 현세적인 왕으로만 예수께 기대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문제가 됩니다. 갈등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심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그 왕국이 이 세상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도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은 왕관을 쓰신 적도 없으며 궁전도 군대나 영토도 없었습니다. 그분은 태어난 곳이 마구간이었고 평생을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셨으며 마지막 3년의 전도생활 중에는 병들고 죄많은 인생들과 어울려 지내시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신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예수와 같은 가난하고 슬픈 왕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저 고난받는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세상에서 그분의 삶의 모습을 바라봐야 합니다. 답답한 현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이 아픔 속에서 그분은 왕이시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빌고 또 빌어도 세상 일이 안 풀리고 눈물과 쓰라림으로 얼룩이 진다 해도 우리의 왕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것이라면 벌써 무너졌을 것이요 또 존재한다 해도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만이 떵떵거릴 것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저 속이고 등쳐먹는 인생들이 판을 칠 것입니다. 힘있고 잘난 사람만이 행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 것이라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그분을 다시 한번 죽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나라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슬프지만 그 슬픔 때문에 위로받는 나라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괴롭지만 그 고통 때문에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예수께서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닙니다. 특히 어려운 이들에게 큰 기쁨의 상이 주어지는 나랍니다. 따라서 그 나라가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다 해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법대로 용기있게 살도록 합시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거기에 우리의 참 희망이 있습니다.
10 그리스도왕 대축일 요한 18,33-37 (나) 내 왕국은 세상 것이 아니다
김영남 신부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의 출발점이자 목표인「그리스도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의 모습으로 그려준다. 고대로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에 관해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대영광송」에 나오는 이 고백은, 오늘 우리가 특별히 기념하는「그리스도 왕」대축일의 의미를 풀어놓은 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제는 오늘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의미를 새겨보도록 하자. 오늘 복음 말씀의 대목은 요한복음에 의한 「수난사」가운데, 예수님이 당시 유다 지방의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의 심문을 받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빌라도는 집요하게 법적으로 예수를 처형할 만한 「죄목」을 찾으려고 예수께 질문한다. “네가 유다인들의 왕인가?”(시작 구절), “아무튼 네가 왕이냐?”(끝 구절).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반문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응답 속에「내 왕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어떤 형태로든 당신이「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라고 블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의미의 「왕」이냐는 것이다. 예수님은 즉시 당신의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고 밝히신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신다(36절).
사실, 예수님은 그를 빌라도에게 고발하였던 유다인들이나, 그를 심문했던 빌라도가 생각하는 식의 왕은 분명히 아니었다. 예수님은 군대도, 권력에의 야망도, 한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의지도 없으셨다.
예수님은 결코 왕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으셨다. 예컨대, 같은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드디어 자신들이 고대해 왔던 메시야가 온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붙잡아 강제로라도 「왕」으로 세우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산으로 피해 가셨다」(요한 6,15).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 왕들처럼, 남을 힘으로 내리 누르고, 남들로부터 섬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섬기는 삶을 사셨고, 또 그렇게 살라고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2-45).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의 스타일이 어떠하였고, 그분이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비슷한 내용이 요한 복음서에서는 최후만찬자리에서「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통해 제시되어 있다. 「스승이며 주(主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우리는, 이렇게 사셨고, 이렇게 살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며, 오늘은 그분을 「우리를 참으로 다스리시는 분」 곧 「왕」으로 기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는 반드시 위에 인용된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 왕」이라는 표현은 큰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고 두 번이나(36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말씀인지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그 말씀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빌라도 앞에서 초라한 한,「죄인」으로 서 계시며 심문받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왔다」라는 말씀도 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 전체로써「사랑이신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셨다. 비슷하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가 신앙 안에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할 사명이 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우리에게 예수님을「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그분을 진정 우리 인생의 「주님」으로 믿고 살고 있는가? 그분께서 참으로「나를 다스리고,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고 믿고 사는가?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 있는가? 나의 삶에는 어떤 태도가 지배적인가? 「힘으로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인가? 아니면「사랑으로 남을 섬기려는 태도」인가? 정직하게 살아, 결코 남을 억울하게 만들지 않으며, 겸손하면서도 요란하지 않고, 조용조용하지만 구체적으로 남을 도우면서 살려는 모습은, 작아 보이지만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한 양식일 것이다.
다른 한편, 신앙적으로「그리스도」를「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권력으로」또는「돈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마구 억압하는 사람들과 그 제도들을 비판하는 역할도 한다. 그리고 오늘은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금년도 성서주간 담화문에서 장익 주교님이 말씀하시듯이 성서는 「우리 신앙인의 영적 양식」으로서,「마치 광야에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만나게 된 오아시스와도 같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는 성서 말씀에 맛들이고,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겠다. 그럴 때 싸늘해져만 가는 이 세상이 우리의 작은 불꽃들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되지 않겠는가?
11 연중 제34주일 요한 18, 33-37 (나) 섬기고자 하는 왕은 가시관을 쓴다.
김영진 신부
30여년 전 소신학교에 입학한 후 어느 가을날 웅변대회가 있었다. 여러 명이 나온 가운데 선배 한분이 들고 나온 웅변제목은 특이한 것이었다. 그 제목의 이름은 ‘왕중의 왕은 가시관을\’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런 제목을 들고 나왔나 하여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경청하였다. 지금이야 그 선배의 웅변내용을 거의 다 잊었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줄거리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은 금관을 쓰는데, 왕들 중에서 최고
왕이신 예수님은 금관은 커녕 가시관을 쓰셨다. 지배하고자 하는 왕은 금관을 쓰지만, 섬기고자 하는 왕은 가시관을 쓴다.
거짓된 왕은 금관을 쓰지만, 진리의 왕은 가시관을 쓴다. 위선과 교만의 왕은 금관을 쓰지만, 정의와 겸손의 왕은 가시관을 쓴다. 힘으로 짓밟고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왕은 금관을 쓰지만,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왕은 가시관을 쓴다.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나선 우리 신학도들이여, 빛나는 금관이 아니라 피 흐르는 가시관을 받아쓰자\”는 것이 그 선배의 웅변 내용이었다.
교회는 매년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는 왕이시다\’고 고백하는 주일로 지낸다. 그리스도는 세속적으로 권력을 부리고 명령을 하고, 힘을 쓰는 왕이 아니라 사랑의 왕, 봉사의 왕, 진리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는 누구나 사랑하고 섬기는데 있어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요즘 ‘왕\’은 금관만 요구
최근 우리나라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하나같이 금관 쓰기를 요구할 뿐! 가시관 받기를 원하지 않는 듯하여, 마음 한구석이 시린 듯 저려온다. 남의 잘못이나 떠들어대고, 약속과 신의를 배반하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서, 왕이 되려고 할 뿐 정직하고, 진실되고, 사랑으로 섬김으로 왕이 되려고 흉내조차 내는 이 없어, 답답할 뿐이다.
이 시대는, 짓밟고 올라서는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떠받들고 섬기는 왕이 필요하다. 이 시대는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쓰러져 가는 가정을, 황폐화되는 인성을 어루만져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왕이 필요하다,
얼마전 세상을 떠나 모두의 가슴 속을 울렸던 인도의 데레사 수녀가, 살아 생전 어떤 병든 어린이 하나를 안고, 그 아이에게서 흐르는 고름을 치료하고 있을 때, 기자 한사람이 곁에 가서 데레사 수녀에게 물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권력과 명예가 높은 사람, 평안하게 즐기며 사는 사람들을 볼 때 부럽거나, 시기심이나, 질투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때 데레사 수녀는 이런 말을 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처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사랑하고 섬기는데 있어 가히 왕의 자리를 터득한 한 여인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한가! 이 시대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모습이 허리를 굽혀 사랑하고 봉사하는 왕이 된다면, 얼마나 축복된 나라가 될수 있을까!
몇 사람을 밟고 살았는가\’가 아니라, ‘몇 사람이나 섬기며 살았는가\’가 우리 삶의 제목이 되어야겠다. 짓밟고 일어서서 얻은 금관이 아니라, 섬기며 얻은 가시관을 삶의 보물로 여기는 지혜를 터득해야겠다.
몇사람이나 섬기며 살았는가?
우리가 따르는 왕이신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온데 그분의 머리에 얹힌 관은, 백성을 힘으로 내리누르고 거짓과 음모, 위선과 가면으로 얹혀진 금관이 아니라, 위를 쳐다볼 시간조차 없도록 사랑으로 겸손으로 섬김으로써 얻은 가시관일 뿐이다. 남을 짓밟으로써 얻은 금관을 쓰고 있는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하여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얻은 가시관을 쓰고 서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나는 빌라도의 금관을 선택하는가?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선택하는가?
12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요한 18, 33ᄂ-37 (나)
내 왕국은 세상 것이 아니다
신 은근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 왕 축일이다. 그분이 어떤 의미의 왕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왕은 최고의 힘을 지닌 자였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누구도 거역해선 안되었기에 두려움의 존재였다. 예수님을 그런 왕으로 생각해야 되는가. 빌라도 앞에 서셨던 예수님은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당신 나라가 이 세상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 개념으로 그분을 생각해선 안된다.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은 주인이신 예수님으로 고쳐 생각해야 한다. 무엇의 주인이신가. 시간과 운명의 주인이시다. 시간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주인이신 예수님만이 아신다. 우리의 운명도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
주님만이 아실 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며 맡긴다. 교회 달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오늘, 우리는 공적으로 이 믿음을 드러낸다. 그분을 왕으로 고백하며 시간과 운명의 주인이심을 다시 한번 고백한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불안을 느낀다. 고통스런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오는 것들이다. 이 갑작스런 시련 앞에서 누군가 지켜주고 보호하여 준다면 아무라도 그를 의지할 것이다. 아니 왕으로 모실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부적을 지니고 굿을 하며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스도 왕 축일은 이러한 사람들의 방황에 대한 교회의 공적인 답변이다. 왕이신 예수님이 인간사 모든 희노애락의 주인이기에 그 분께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을 인정하고 고백한다면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행위가 된다.
오늘의 현실에서 그분이 우리의 앞날을 책임지고 있다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시련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좌우하고 계시는 주님을 느낀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의 앞날을 책임지고 계심을 믿지 않고 있었다면 오늘은 믿는다고 고백해야 한다. 주님께서 나의 운명을 지켜주고 계심을 느끼지 못했다면 오늘은 느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해야 한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지켜 주신다. 불안한 이 세상에서 두려움을 넘어 희망과 용기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이러한 예수님의 힘을 느끼고 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체험하기에 의심 없이 왕으로 섬기고 있다. 그분을 왕으로 섬기면 그분 또한 우리의 운명 속에 들어오시어 왕이 되어주신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일은 이러한 믿음에 어울리게 사는 일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기도와 선행이다.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기초적이며 힘있는 신앙행위인 것이다.
최근 사람들은 치매에 대한 관심이 높다. 평생을 살아왔던 말년이 치매 때문에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노년이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노년도 주님께서 주셔야 맞이할 수 있다. 그러니 맡겨야 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주인이신 예수님께 맡겨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생활이다. 그리스도 왕 축일을 맞으면서 다시 맡기는 기도를 시작하자. 그분은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며 왕이 되어주실 것이다.
13 그리스도왕 대축일 요한 18, 33-37 (나)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송영규 신부-
지구가 생긴 이래 수만 명의 임금이나 왕이 권력을 잡고 일했습니다.
수많은 임금님 중에는 백성들을 위해서 온 정력을 쏟은 어진 왕도 있었지만 백성의 입가에 오르내리고 악한 임금으로 막중한 세금이나 부역 등으로 나쁜 행위를 했던 임금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축일을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사랑과 자비로우신 어진 임금님 예수님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축일을 지내는 오늘만의 임금님이 아니시고 일년 열두 달 어제도 내일도 영구히 임금님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이 지상의 임금은 용상에 앉아서 국무를 맡아보고 신하나 대신들과 자리를 같이 할 때만 국사를 돌보는 분이었지만 용상을 벗어나 있을 때는 백성들이나 국가의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좌를 빼앗기고 역적으로 몰리거나 귀양살이로 일생을 처절하게 살아가야 했습니다.
새삼스럽게 그리스도 왕 축일을 지내는 것도 이상하지만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예나 지금이나 임금님이므로 항상 그리스도 왕 축일을 지내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아름답고 멋있고 우리 인간이 알맞게 살 수 있도록 우주를 만드신 분입니다.
인간이 노력만 하고 어느 정도의 힘만 들이면 그리스도 왕께서 우리 각자에게 하사하시는 녹을 잘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님이 하사하신 녹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또한 적당한 빛도 알맞은 기후도 비도 물도 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나약한 인간들의 잘못과 죄악을 짊어지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 중에는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진실한 마음에서 귀한 생명을 버린 분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국한된 나라에서나 어떤 지방의 백성들을 위해서 했지, 온 나라 온 백성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온 백성 온 나라뿐이 아니고 내일 생길 새로운 나라의 백성을 위해서도 임금님으로서의 생명을 버리신 분입니다.
그리스도 왕께서는 왕관 없는 임금님으로서 병들고 고통에 시달리고 약한 백성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바람과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시고 항상 끝없는 위안을 주셨습니다.
백성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봐주시는 임금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신비체를 통하여 당신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의 왕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참된 임금님으로서 교회를 살리고 자라게 하시고 진리에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교황 비오 12세가 말씀하시든지 바오로 6세가 말씀하시든지 신앙도덕에 관해서 판정할 때 그리스도 왕을 떠나서는 불변과 권위 있는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왕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요한 14, 5).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의미의 왕이십니다.
아니 최고 유일의 절대 임금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참된 임금이심을 알거든 그분의 백성이요 국민인 우리들의 충성심은 불타 올라야 합니다.
나라의 대신이나 신하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임금을 위해서 온갖 정력을 쏟는다면, 더구나 충실히 신하가 되겠다고 두 손을 들고 선서를 한 우리의 마음과 육신은 대단해야 됩니다.
세속 군주에게 충성하는 자는 벼슬이 오르고 수입이 늘고 권력도 커져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지만, 그리스도 왕께 충성하는 이는 의외로 이 지상에서의 대우가 너무도 박해서 원망과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리스도 왕께 충성하는 신하들은 흔히 학대와 박해를 받게 마련입니다. 청빈의 생활과 정결의 생활을 택하게 되면 역경과 불안과 단명의 운명이 닥칠 수도 있어서, 한 마디로 이 지상에서는 십자가가 정상적인 보수일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모르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 왕께 지상적인 행복을 찾으려다가는 실망하고 충성의 길에서 주저앉기 쉽고 후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을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요한 18, 36)
14 그리스도왕 대축일 요한 18,33-37 (나)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Ⅰ. 메시아-왕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기 오래 전에 예언자들은 예수께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 끝까지 통치하시리라. 또한 세상 모든 임금들이 그를 경배하고, 모든 백성들이 그를 섬기리라. 그의 주권은 영원한 주권, 빼앗김이 없을 것이요, 그의 왕국은 멸망이 없으리라”(층계송)
이 우주와 모든 인류의 왕으로서의 메시아의 개념은 유데아인의 역사와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입니다 메시아의 왕국은 구약 시대의 하느님의 백성의 완성이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등 그리스도의 모든 선구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메시아-왕이신 예수께서 결박을 당하고 피를 흘리면서 빌라도 앞에 서 계시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말소리에 들어있는 불신을 직접 듣는 듯합니다. “당신이 유데아인의 왕입니까?” 우리 주께서는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십니다. 주님의 나라는 인간의 육체와 재산을 똑똑히 밝히십니다. “당신 말대로 나는 왕입니다.” 내가 태어나 이세상에 온 것은 바로 진리를 증명하려 함이니, 진리에 속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내 말을 듣습니다.”
Ⅱ. “성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나라로 옮겨 주셨다.”
현대인인 우리로서는 왕국으로서의 교회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살고 있어 국회 의원이나 대통령을 우리가 선거로 뽑습니다. 하여간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말마디가 아니고 그 개념입니다. 거룩한 역사는 전반에 걸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과 역사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실을 똑똑히 보고 마음을 열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국민으로서의 영역 외에도 다른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거나 말거나 구약 시대의 하느님의 백성의 완성인 성교회의 회원입니다.
오늘 독서의 성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광명 속에서 성도들 반열에 들 을 우리에게 거져 주신 성부께 기쁜 마음으로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나라로 옮겨 주셨으니, 그 아드님에게 우리는 구원과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위에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를 다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주권은 주님 편에서는 사랑에 기초를 둔 것이고 우리 편에서는 자유를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께 순종하기를 거절하거나 마지못해 순종한다면, 우리와 이 세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만일 우리가 그 왕국의 국민으로서 충성스럽고 또 자유로이 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통치하는 것입니다.
Ⅲ. “하느님께서는 나무에서 통치하신다.”
그러면 지금 여기서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뜻, 인간의 뜻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제자의 의의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느냐 혹은 남을 위해서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느냐 혹은 그리스도와 그 나라의 전파를 위해서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 성경의 광경이 있은지 몇 시간 후에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다스릴 옥좌에 오르셨습니다. 그 옥좌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당신 왕국의 모든 것을 품에 안으려 두 팔을 활짝 벌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무에서 통치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왕은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분을 지배할 권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부활의 승리를 거두시어 이로써 당신 백성을 다스릴 통치권을 확보하시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계속 전파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니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닌 모든 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 중에 말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도 임하소서”하고 말하지만, 그저 입으로만 건성으로 말할 뿐입니다. 우리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충성을 바치노라고 자부하는 우리는 응당 이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나라의 전파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는 나의 영혼의 구원만을 뜻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만일 교회의 사도직과 전교 사업에 생생하고 힘찬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가정과 우리 마음의 왕으로 모셔야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 모든 분야를 주님의 감미로운 멍에 밑에 예속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전교 사업이나 사도직에 직접 참가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주님을 위하여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으며, 우리의 삶과 노동과 근심 걱정을 그 왕국과 전파를 위해 봉헌할 수는 있습니다.
Ⅳ. 주님의 옥좌
지금 주님의 옥좌는 제대입니다. 여기서 주께서 예언하신 대로 다스리십니다. “내가 높이 매어 달리면, 모든 이를 나에게 끌어당기리라”고 주께서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제대는 우리 임금님의 옥좌일 뿐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속으로 올라갈 수 있는 다리이기도 합니다. 제대는 우리 자신을 자유롭고도 사랑 넘친 선물로 주께 바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희생으로 죽은 어린 양은 권능과 풍요와, 지혜와 힘과, 영예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로다. 이 분에게 영광과 주권이 세세에 영원히 있으시라”(입당송)
16 연중 제34주일 요한18,33-37 (나) 통치자들이 나라를 망쳤다
조선 시대 가장 포악했던 폭군으로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들 수 있다. 그는 어려서 총명했지만 성장하면서 음흉하고 포악한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번은 성종이 어린 연산을 가까이 불렀는데 연산이 부왕 곁으로 가려 할 때,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성종 뒤에서 뛰어나와 연산에게 달려들어 옷과 손등을 핥았다.
성종이 사랑하던 동물이라 사람을 두려워 않고, 아무나 반갑게 핥았던 것이다. 그런데 연산은 오만상을 다 찌뿌리더니 「이놈의 사슴이‥?」하고는 발길로 냅다 걷어찼다. 사슴은 비명을 지르며 나둥그러지더니 한참이나 버둥거리다가 간신히 일어나 달아났다.
이 광경을 바라본 성종은 몹시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부왕의 사슴을 직접 화살로 쏘아 죽여버렸다. 연산이 왕위에 오르자 충성스런 신하들은 모두 그의 손에 죽음을 당하거나 화를 피하여 몸을 감추었고, 조정에는 소인잡배들만 가득 차게 되었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것은 술과 여자였다.
임금의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서 거창한 토목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사냥이 수시로 벌어져 거기에 충당되는 비용으로 국고는 바닥이 났다.
공자의 위패를 산중 이름 없는 정자로 옮기게 하고는, 성균관을 놀이터로 만들어서 거기서 글 읽던 유생들을 모두 쫓아내 버렸다. 그리고 오부학당을 모조리 폐하여 무당과 광대들이 지내게 하였고. 서울 근교의 백성들을 모두 내쫓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내수사나 노비들이 차지하게 주었다. 더구나 5개 강나루마다 건너는 사람들에게 비싼 세금을 부과하는 바람에, 마침내 길가는 나그네들이 끊어졌다. 또한 연산은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으므로, 충성스런 신하는 아예 얼씬도 못하였다.
그런데다 연산은 혹시 자기의 잘못을 떠벌이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여, 조정 백관들에게 “입은 재앙을 초래하는 문이요, 혀는 몸을 죽이는 도끼다”라고 적힌 패를 차게 하여, 충간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그러자 원성이 고을마다 자자하게 되었고, 노역과 세금에 부대껴 굶어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거리에 즐비하였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죽이고,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다. 무오사화 때는 죽은 자의 무덤을 파내어 시체의 목을 다시 자를 정도였으니, 그의 포악성을 짐작할 수 있다.
머나먼 옛날 얘기할 것 없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도 비슷하다. 꽥꽥거리는 사람은 괘씸죄로 감옥에 처넣었다. 양심수가 수백명이나 된다고 한다. 노태우씨와 전두환씨가 부정축재 비리혐의와 내란 음모 죄로 구속되었다. 노씨는 5천억원을 해먹었고, 전씨는 9천5백억을 해먹었다고 했다.
하도 억억해서 억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엄청난 돈이다. 내 수중엔 없는 돈이지만 계산이라도 해보자. 젠장, 돈 없다고 계산도 못하랴! 노씨 돈 5천억만 따져 보자. 재임 5년 동아 1년에 1천억원씩, 하루에 2억1천5백만원씩, 한시간에 1천1백40만원씩 벌어들였다.
공휴일도 없이 국내에 있건 국외에 있건, 하루도 빠짐없이 한잠도 안자고 벌어들였다. 좀더 실감이 나도록 이래저래 설명해 보자.
4천만국민에게 똑같이 분배하면 1인당 1만1천1백50원, 월 소득이 1백28만5천8백원인 도시 근로자의 3만2천4백년치월급, 대통령(기본급 3백65만2천원)의 1만4천4백9년치 월급, 50년 동안 적어도 매일 2천7백39만7천2백60원씩 쓸 수 있는 돈. 4만1천6백67명 학생이 대학을 4년간 다닐 수 있는 돈, 1만원권 지폐로 쌓으면 63빌딩(2백64미터)의 28배, 백두산(2천7백74미터)의 27배, 1만원권 지폐로 5톤 트럭 5대분. 티코승용차 16만7천7백85대 가격, 단군 할아버지가 매일 32만원씩 지금까지 저금해야 모을 수 있는 돈, 077가방 7천1백42개 분량, 1만원권 지폐 세는 기계로 매일 24시간 가동해서 꼬박 6개월동안 세어야 하는 금액이다.
그런 사람이 꽃동네 회비로 월 1천원씩 냈다 한다. 그 결과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도탄에 빠졌다. 지금도 별로 나을게 없다. 우리니라 역대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끝이 안 좋았다. 쫓겨나고, 총 맞아 죽고, 사형선고 받고, 구속되고 그랬다. 아무튼 개떡같은 왕, 통치자들이 나라 망쳤다.
예수님은 어떤 왕이신가? 예수님은 부귀, 권세, 영예를 누리던 연산군이나 전, 노대통령같은 세속의 왕이아니다. 그분은 사랑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셨다. 어린이에서부터 자기를 죽인 로마 병정, 자기를 모욕했던 강도까지도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자비의 왕이시다. 특히 힘없고 가난한 이와 멸시받는 이,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베푸셨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다.
예수님은 자유의 왕이시다. 여자와 어린이, 노예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알리셨다. 예수님은 정의의 왕이시다. “보라, 내가 택한 종, 내 사랑하는 사람, 내 마음에 드는 사람, 그에게 내 성령을 부어 주리니, 그는 이방인들에게 정의를 선포하리라!“ (마태오 12,18)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나라는 2000년 동안이나 세상을 정복해왔고 날로 융성하고 있다. 현재도 전세계 15억 인구가 그 나라의 백성이며 우리나라 인구의 1/4이 크리스천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세기를 통하여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시다. 백성인 우리는 왕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