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대림 제3주일

22. 홍금표 신부 (다) / 45

23. 김몽은 신부 (다) / 47       24. 김수창 신부 (다) / 48

25. 김수창 신부 (다) / 49       26. 김정진 신부 (다) / 50

27. 김영국 신부 (다) / 52       28. 강영구 신부 (다) / 54

29. 신은근 신부 (다) / 58       30. 교구주보 (다) / 59

31. 장영희 교수 (다) / 61       32. 강길웅 신부(다) / 62

33. 방윤석 신부 (다) / 64       34. 유영봉 신부 (다) / 66

35. 박기흠 신부 / 68              36. 이석재 신부 / 69

37. 허중식 신부 / 71              

22.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 (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홍금표 신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 박사는 인간은 누구나 다 세상을 보는 방식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데, 이 패러다임이 그 사람의 태도와 행동 양식을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만일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러 한다면, 먼저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변화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는데, 긍정적 변화를 위해서는 원칙중심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 원칙이란 물리학에서처럼 인간세계에 존재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법칙으로, 마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것은 무슨 특별한 비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회사상이나 윤리체계의 일부인 것이다. 예를

든다면「공정성」「성실과 정직」「인간의 존엄성」「봉사」와 같은 평범하고,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본적인 진리들이다.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패러다임이 이런 기본적 원칙에 가까워질수록 성공적인 개인 및 대인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무한한 성과를 가져 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세례자 요한의 설교를 듣게된다. 오늘 복음은 심판이 가까워 졌다는 설교를 듣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군중들에게 요한은, 여벌의 옷과 음식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고 요구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과 자선 이것이 회개의 열매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리에게는 「명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고 요구한다. 당시 세리는 관청으로부터 관세 징수권을 위임받아 관세를 거두는 민간인이었는데, 문제는 각 세관별로 임차료를 받고, 일정한 기간동안 관세 징수권을 임대차 한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세관원은 임대 기간동안 본전을 뽑아야 했고, 또 다음 임차를 위해서 임대권을 가진 관리에게 건든 돈을 상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해진 것 이상의 많은 관세를 매겨 부당하게 거두어 들였기에, 이들은 죄인의 대표적 집단으로 여겨져, 성전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유대교를 믿기 위해서는 그 직업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요한은「직업을 바꾸라」고 요구하지 앓는다. 다만 정한대로만 받을 것을 요구한다. 이는 바로 회개의 삶에는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정의와 공정의 실현 이것이 더 중요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군인에게는「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고 충고한다. 군인들은 이교인들과 자주 접촉함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고, 힘으로 약한 이들을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 타인의 권리와 재물을 부당하게

치부하는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요한의 대답은 지극히 평범함.「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즉,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만족하라고. 그런데 요한의 이러한 평범하고 상식적인 대답 안에는 참으로 음미해야 할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공통점은,「나의 변화」와「타자 중심의 회개」라는 점이다. 즉,「나」로부터 시작한 회개의 결과가 타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가난한 이와 나누는 삶」그리고 「부당한 방법(세리)과 힘(군인)의 사용 거부」는 기본적으로「나의 변화」라는 요소와, 그 결과가 가난한 이들과 백성들에게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것이 회개의 삶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기에, 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변화」에 강조점을 둘 뿐 아니라, 그 변화가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의 공통점은, 요한의 대답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이라는 것이다.「자선과 치사의 중요성」「세리가 정한대로만 받는 것」 그리고「군인이 자기 봉급으로 만족하는」것 등은 초등학생 정도의 지식 수준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는 상식적인 것이다. 이것을 통해 보면 회개의 삶이란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에 충실하는 삶」,「소위 상식을 살아가는 삶이 회개의 삶」이라는 소중한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두 번째 이 교훈은, 코비 박사의 이야기와 함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 찾고 있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데 대한 답은 무슨 특별한 비법이나 요술방망이와 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장 상식적인 진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식을 일상 생활 속에서 사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각자의 처지에서 내가 살아야 할 「가장 평범한 상식」을 이번 대림절 기간동안 주님의 성탄 선물로 준비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







23.      대림 제3주일 (다)해 루가 3, 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몽은 신부



 벌써 오늘이 대림 제 3주일이다. 이제 한 주일만 더 지나면 성탄절이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장차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우리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참다운 회개를 해야 한다. 참된 회개란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즉 이기심을 버리고 이웃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주기 위한 선행을 실천하기 시작해야 한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종교에 있어서의 중요한 것으로 ‘예절’이나 ‘규칙’보다도 정신적인 기풍(사랑과 동정, 상호부조, 봉사 등) 을 더 중요시했다. 그 열심한 경신행위(敬神行爲)도 내면적인 사랑이 없을 때,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역설해 왔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며,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교량 역할을 담당한 세례자 요한도 이기심이 없는 참된 신심을 요구하면서, 그릇된 바리사이적인 신심에서 참된 신심으로 되돌아올 것을 소리 높이 외쳤다.


<회개하시오!> 하고 외치는 동시에, <당신들이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이시오!> 하고 거듭 외쳤다. 사랑은 바로 회개했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의 열매이다. 그 열매는 행동으로써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으로써 일치를 수반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과의 일치와 사랑도 불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복음에서는 그 직업이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악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이지, 결코 그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루가는 그 대표로서 세리들과 군인들을 들고 있다. 세리나 군인은 항상 이교도들과 접촉해야 하며, 그들의 힘을 남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그 직업 자체가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직분을 사리 사욕을 위해 사용하는 데 타락이 있다. 그래서 세리들에게는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마시오> 하고, 군인들에게는 <협박을 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시오>라고 일러준다.


한편 요한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오인함을 보고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입니다. 그러나 멀지 않아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 오실터인데, 나는 그분의 들메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요한만큼 예수님(메시아)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도 겸손하고, 철저히 선구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불과 같이 내면의 온갖 죄악을 불태워 버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완전히 변화된 사람으로 만들어 하느님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해주신다.

 주님을 맞이할 우리도 진정 마음 속에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 채워 성탄을 맞이하기에 합당한 자 되도록 하자.












24.            대림 제3주일 (다)해 루가 3, 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수창 신부



        곳간의 알곡들

건강도 잃어봐야 고마움을 알게 되고 그 다행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물심양면으로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의 몫까지 더해야 하지 않을까? 없는 것은 대개 없는 사람 자신의 탓이 아니듯이, 있는 사람 역시 무슨 자격이나 권리나 공로가 있어서 그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가령 형제 사이에 신체장애나 정신박약아가 있다든가, 무슨 일이나 혼자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도 곧잘 남을 도와준다. 두 몫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도와가면서 살게 마련인 우리는 창세기 설화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되어 하나가 되었다면 우리 하나하나는 반쪽에 불과하다. 부부와 같은 일체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서로 합쳐야, 즉 마음과 마음이, 너와 내가 하나되어야 <우리>를 이룩한다.

이것이 하느님이 우리를 따로따로 만드신 의도가 아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돕는 “서로 사랑”“이웃 사랑”이 우리 자신을 완성시키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를 진정한 천국으로 변형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사랑을 간곡히 부탁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때 불의와 부정이 생긴다. 이를 뉘우치고 회개한 표시로, 요한이 세리와 군인들에게 요구한 대로 갚을 것은 갚고, 줄 것은 빨리 되돌려 주며, 끼친 손해는 완전하게 기워 갚아야 한다. 그래야, 자타간의 질서회복과 관계개선이 따르고, 메시아도 기꺼이 맞아,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받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곳간에 모아들인 알곡인 것이다.      







25.          대림 제3주일 (다)해 루가 3, 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수창 신부



        富者의 쓰레기가 貧者의 음식



 옛날 ‘로마’ 사람들은 돈을 ‘뻬꾸니아’(본래는 <가축>이라는 뜻)라 했다. 이 말은 물물교환시에 가축을 화폐로 통용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조개껍질(貝)을 화폐로 통용했다. 우리는 화폐를 ‘돈’이라 한다. 돈이란 돌고 돌아서 돈이라 한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돈’이 ‘돈다’ 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돌멩이’란 말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물물교환시대에 ‘값나가는 돌’ (보석) 이 화폐로 통용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의 돈은 잘 돌아가지 않고 묻어두고 감춰두는 습성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돈 내라면 싫어하고 귀찮아하는가 보다. 묻어두고 감춰두었으니 꺼내기가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교회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돈이 필요하다. 돈, 돈 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모금을 할 때 보면 돈이 좀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적게 내고도 생색을 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남과 같이 할까하고 고심한다.


어떤 때는 돈 이야기가 가난한 사람에게 부담을 주어 반발을 일으키는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돈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기천만원의 빚이 있는데 갚아 달라는 사람, 수 백만원의 병원비를 당장 내놓으라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많이 모금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잘 쓰여지도록 해야할 것이다. 가진 자는 멋있게 복음적으로 돈을 쓰고 헌금해서 사랑으로 가진 바를 나누던지, 아니면 제도적으로 재분배되게 해야할 것이다.


서울의 쓰레기는 거의 난지도에 버려진다. 매일 8톤 트럭으로 3천대분량의 쓰레기가 버려진다니 너무나 엄청난 양이다. 현장에 가보면 어두운 느낌마저 든다. 쓰레기 산, 쓰레기 바다, 쓰레기 황야, 온통 쓰레기와 먼지, 파리, 냄새, 연기로 자욱하다. 그런데 그 쓰레기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다. 부자동네에서 나온 쓰레기는 서민이 보면 쓰레기가 아닌 것도 있다. 의류, 식품, 가구등 쓸만한 것이 있으며 때로는 실수로 내버린 금전이나 귀금속도 있다고 한다. 이 작은 나라에서 같은 동포끼리 누구는 내버리고 누구는 그것을 쓰레기에서 주워 써야하는 이 빈부의 격차를 보며 우리는 회개하고 속죄해야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믿음과 사랑의 나눔으로써 또는 정책적인 제도로써 이 격차를 줄여나가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 교회의 의미, 정부나 정책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난지도 주민 1천 세대 3천 만 명은 이 쓰레기를 골라서 수집하여 공장으로 보내는 작업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어린애들을 쓰레기 위에 놓아두고 부부가 함께 작업을 한다. 그러나 어린이에게는 여러 가지 문제 즉 건강과 위생, 급식 문제, 쓰레기 위에서 자라나는 어린이의 성격 문제, 종일 혼자 있으니 말을 못 배우는 문제 등이  생긴다.


이 어린이들을 돌보기 위해 우리 명동본당에서는 83년 초에 탁아소 ‘애기들의 집’을 차렸다. 처음에는 7명이었으나 지금은 70명이나 된다. 제때에 먹이고 재우고 목욕시키고 가르치고, 병들면 정운표 박사님이 치료해 주셨다. 애들이 예뻐지고, 말 잘하고 그 얼굴이 밝다.


그러나 84년 대홍수로 인해 난지도 주민들의 판자집이 모두 쓰러져 버렸다. 서울시에서는 임시건물을 지어주었는데 우리는 30평의 배당 받았다. 처음 시작할 때의 판자집 서너평에 비하면 지금은 궁궐같이 크고 깨끗하다.

 그런데 지저분한 판자집에서 탁아소를 할 때는 어린이를 위해서 쓰라고 희사금을 내는 방문객이 더러 있었는데, 이제는 집이 좀 깨끗해지니까 부자같이 보이는지 희사하는 사람이 적다.


도봉산 아래 개천가에도 (방학동 뚝방 마을) 판자촌이 있다. 우리 명동본당은 거기에도 탁아소 ‘뚝방 아이네’를 차려 20명 가까운 어린이를 돌보고 있다. 어린이가 늘어날수록 예산도 늘고, 일손이 더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서로 관심을 갖고 나눌 때 삶의 의미와 보람을 얻을 것이다. 나눔이 있는 곳에 사랑도 평화도 정의도 풍요도 있을 것이다. ‘노아의 방주’ 창가에 싱싱한 나무 잎을 물고 가서 희망의 징표를 보여 준 그 비둘기처럼, 가진 바를 나눌 때 서로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6.           대림 제 3주일 (다)해 루가 3, 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정진 신부



        회개의 생활과 구원의 길

우리는 벌써 대림 제 3주일을 지냅니다. 이제 기쁜 성탄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나 거리에서는 성탄 노래가 흘려 나오고 성탄 나무도 서서히 마련되어 눈의 띄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남일 가까웠으니 정녕 기쁨과 행복의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암흑과 절망과 죽음에서 해방되어 평화와 행복, 희망과 은총의 세계를 맞이하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대림 제 3주일을 장미의 주일이라고 하여 기쁜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대림절 절반을 지내면서 그 동안 자아 반성과 회개의 정신으로 열심히 지내온 신자들에게 잠시 휴식과 기쁨을 주는 것이 하나요, 둘째는 구세주를 만나 뵐 수 있는 날이다가 왔다는 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입당송에서도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고 기도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대림절의 중심 인물은 세례자 요한이므로 오늘 복음에는 전적으로 성 요한의 가르침과 그의 인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교훈과 정신을 대림절에 사는 우리의 정신이며 생활 양식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 요한은 구원의 길을 명백히 제시하였으며 구세주의 사랑의 길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질문해 온 군중에게 답한 성 요한의 말씀은 바로 우리의 구원의 길이요, 정녕 사랑과 봉사적 실천 사항이라 하겠습니다.


성 요한의 가르침은, 구원을 얻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란 어디까지나 정직하고 성실한 생활을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그 분은 회개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즉 성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 온 군중과 세관원들과 군인들에게 불우한 이웃을 돕고 불의한 수입을 노리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 분은 인간과 사회의 부조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 같은 훈계를 하십니다.


첫째 성 요한은 군중을 향하여, 두 벌 옷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자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가난한 자와 나누오 먹으라는 것입니다. 성 요한은 당시 빈곤한 사회에서 목숨조차 부지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합니다. 현재 풍요한 사회에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사회복지 기관이나 구제 사업 단체도 필요하지만 개별적 온정으로 우리 각 개인이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회개의 징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점을 강력히 주장하셨고 (마태 25 : 35 ~ 43) 또한 초대 교회에서도 한결같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돌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가르치기를,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에 먹을 양식이 떨어졌을 적에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2 : 15 ~ 17) 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성 요한은 세례를 받으며 회두하는 세리들에게는, 부정 수입을 노리지 않고 각자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 당시에는 세리라 하면 부정 축재를 하는 비 애국자라는 정평이 있었습니다. 셋째로 군인들에게 요구하기를, 괴롭히거나 협박하지 말고 자기의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군인들은 곧잘 협박과 속임수를 써서 백성들의 물건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성 요한은 이 같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외에도 각층 각계의 사람들을 가르친 것으로 믿어집니다.


고관 대작으로 있는 이들에게는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라고 외쳤을 것이고 관리나 공무원들에게는 정직한 양심의 소리를 들으며 정의감에 입각하여 공복으로 희생과 봉사적 정신으로 백성들을 대하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교육자들이나 직장인들은 투철한 사명감으로 자기 본분에 충실하라고 하였을 것이고 학생들에게는 학업에 충실하여 지덕연마에 힘쓰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남편들에게는 가족들의 편안과 행복을 도모하며 외도나 낭비를 삼가라고 하였을 것이고 주부들에게는 가정 생활에 성실하여 자녀들의 교육에 만전을 기하여 살림살이에 알뜰하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는 성서의 말씀과 같이 회개하는 생활 안에 우리의 구원의 길은 열리는 것입니다. 구세주의 내림은 인류를 심판하고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용서하고 오로지 용서하고 구원하러 오신다는 생각만 해도 즐겁고 고맙게 여겨집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과 고생과 번민을 말끔히 씻고 하느님께 용서와 자비를 빌며 언제나 평온하고 명랑한 심정으로 성 바오로 사도와 같이 주님과 한께 기뻐하며 용기와 희망을 갖고 거센 세파를 무난히 헤쳐나가기로 굳게 다짐합시다. 아멘.  











27.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다)불우이웃의 대희년           김영국 신부

                   스바니아 3, 14-17; 필립 4, 4-7; 루가 3,10-18





오늘의 독서들은 전반적으로는 다가오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기쁨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에, 복음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잘 다듬어진 미사여구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요점만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청중에 대한 배려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청중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러 해 동안 사막에 살면서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았던 사람은 번지르르한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는 오랜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얻게된 확신으로 무장한 인물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어진 확신은 군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청중들 역시 그가 에둘러서 말하지 않고 핵심을 찌르는 말만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투박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청중들을 향하여 ‘독사의 족속들’이란 말을 서슴치 않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도끼’에 찍혀 넘어질 것이며 쭉정이 같은 인간들은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루가 3, 7-17참조).



군중이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군중에게 말합니다.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세리에게는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응답합니다.



요한의 이 말씀들은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마디 한마디가 현실적이고 실천가능한 말씀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엄격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영웅적인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여유있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과 나누고, 이웃을 부당하게 착취하거나 이용하지 말고, 부당이득을 취하지 말고 정한대로만 돈을 받고, 직권남용을 하지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월급으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지하도에는 노숙자들로 가득한데, 가진 사람들은 돈을 말 그대로 상자로 들고 다니며 쇼핑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주가조작을 해서 떼돈을 버는 사람들 얘기가 끊이질 않고, 그런 허황된 이야기에 현혹되어 머리를 굴리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닙니다. 쥐꼬리만한 권력만 있어도 그것을 이용하여 남을 등쳐먹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다릅니까? 우리에겐 세례자 요한의 설교가 필요없어졌습니까? 우리는 지난 한해동안 많은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는 시간과 돈, 그리고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며 지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모든 것들이 누구를 위해 쓰여졌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이 모든 것들을 나만을 위해 사용하였습니까, 아니면 어떤 형태로는 이웃과 나누기 위해 노력하였습니까?



우리는 오시는 손님의 품위와 분위기 그리고 취향에 맞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게 됩니다. 대림절을 통해서 기다리는 귀하신 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기 예수로 탄생하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나누는 일을 본질로 삼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친교요 나눔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것을 고집하고 이웃을 외면하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내적참회를 위해서는, 즉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기도와 단식뿐만 아니라 자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기도가 하느님께 대한 회심을 드러내고, 단식이 자신에 대한 회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자선은 다른 사람에 대한 회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대림절과 함께 세상 안에서의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 그것이 시간이던 돈이던 아니면 내게 주어진 지위던 간에 이 모든 것들을 어떤 형태로는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써 이웃들과 정의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을 배려하는 행위는 자신을 나누기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축제를 준비하는 가장 종은 방법인 것입니다.













28.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는 삶

                                                              강영구 신부



오늘은 대림 제3 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가난한 형제들이 많습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나름대로 우리 주위의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 주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도움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작은 도움의 손길이 세모(歲暮)에 가난한 형제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해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길거리에서 이런 모습의 트럭을 본 적이 있습니다. 트럭의 적재함에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그 천막에는 이런 글자들이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휴거! 1992년 10월.\”그리고 그 트럭은 커다란 확성기를 달고 거리를 다니면서 1992년 10월이면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휴거(携擧), 즉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시어 뽑힌 사람들을 하늘 나라로 들어 높이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고 방송을 하고 다녔습니다.

  

마르코 복음 13장32절에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 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성경에 분명히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 지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1992년 10월 종말설이 지금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하도 수상쩍어서 누군가가 지어낸 사실일 것입니다. \’인륜 도덕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이 세상이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인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이고, 곳곳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하여 언제 내가 저런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모든 일이 불확실하고, 자연은 공해로 찌들려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없고, 마실 수 있는 물도 없고, 숨마저 마음놓고 쉴 수 없을 정도로 공기는 오염되어 있고, 거기다가 하느님 대신에 돈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사는 꼴들이란 향락과 퇴폐, 사치와 과소비를 일삼고 있으니, 이 세상 되어 가는 꼴이 희망적이기보다는 절망적이고, 그러니 에라 모르겠다 세상 끝장나는 꼴이나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1992년 10월 종말설을 퍼뜨린 것이 아닌가‥‥‥ 제나름대로 이런 생각들을 해 보았습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의하면 1992년 10월 종말설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종말설이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날에 대한 희망보다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에 편승해서 일부 종교가들이 1992년 10월 종말설을 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더 큰 불안감과 위기 의식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 그리고 그 때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알 바도 아닙니다. 예수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는 일을 우리가 무슨 재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려 하지는 않고 엉뚱하게 언제 세상이 끝장 날 것인가, 그 때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합니다.

  

아니할 말로 지금 당장 이 세상의 종말이 온들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면, 지금 당장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또 세상의 종말이 온다 해도,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정한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 내지 말라.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데 그분은 마치 타작 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농부처럼, 알곡은 가려 곳간에 쌓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 속에 집어 던질 것이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생각했던 메시아는 가려서 뽑고 심판하는 메시아였습니다.

  이런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세례자 요한은 은근한 협박조로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렇다고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실 것이니 두려워 떨어야 한다거나, 혹은 하던 일을 모두 팽개치고 광야로 나와서 단식하며 기도만 하라거나 하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백성들에게 결코 위기감과 불안감을 조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례자 요한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침으로써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각자의 직책과 신분에 맞게 구체적인 생활의 개선책을 알려 주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나누어 가지고 나누어먹는 사랑의 실천을 요구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대로만 세금을 받는 정직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탐욕을 채우려 하는 생활을 하지말고, 정의롭고 공정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로 이런 삶의 자세가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는 자세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무슨 대단한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쉽게 생활 가운데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는 생활, 정직한 생활, 정의롭고 자신이 맡은 일에 성실한 생활, 이런 구체적인 작은 것들의 실천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유난스럽고 대단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정의롭게 살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산다면 무엇이 두렵습니까?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재림하실 주님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도둑이 제 발이 저려서 그런 것입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니까,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사니까, 그리고 정직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하늘이 두렵고, 그래서 이 세상 종말이 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처럼, 불안한 중에 두려워하고 걱정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제2 독서를 통해서 들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다시 들어 보시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는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은 기쁜 소식이지 불안과 두려움의 소식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은 심판과 징벌의 시간, 또는 이 세상 파멸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이 세상 완성의 시간입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그분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분의 살과 피로 양육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것은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언제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재림의 시간은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과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서 기쁘게 재림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지켜 줄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지나가고야 말 이 세상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 없어져 버릴 재물과 돈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 한순간에 사라질 향락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고,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저지른 잘못들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대림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혼란스럽고 불확실하고, 위기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태에 편승하는 생활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기적인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있다고 해서 우리마저 그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이 매사가 불안하고 불확실하기에 돈이나 재물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으려 하고 찰나적인 향락을 누림으로써 그 불안함을 망각하려 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오로와 세례자 요한이 그 답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성탄이 온 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었던 것처럼, 주님의 재림도 기쁜 소식입니다. 다만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사랑을 나누는 생활, 감사하며 기도하는 생활을하는 가운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형제 여러분, 주님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29.              대림 제3주일  (루가 3, 10-18) (다) 자선

                                                              신 은근 신부





지난 주일의 가르침은 회개였고 이번 주일은 자선이다. 자선은 무엇인가. 나누는 생활이다. 남 모르게 나눌 때 자선이라 한다. 주님 표현처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자선이 된다. 온 동네 떠벌리며 나눴다면 그것은 자랑이지 자선은 아니다. 군중은 요한에게 질문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은 단순했다. 두벌 옷 가진 사람은 나누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고 속이거나 협박하지 말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기본적인 이야기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씀이다. 자선 역시 그렇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이다. 너무 어렵게 자선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반성해야 한다.



나눔의 대상은 물질만이 아니다. 많이 있다고 나누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마음이다. 두벌 옷이 무엇이겠는가. 글자 그대로 추위를 막는 옷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추위는 옷으로 막아지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보호하여 주겠는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누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신뢰와 희망으로 사는 모습이다. 이것이 두벌 옷의 정체다. 이 모습을 나눌 때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가족과 이웃 앞에 나서야 한다. 특별히 신뢰하며 희망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두벌 옷과 먹을 것을 나누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 모두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 자체가 이웃에게 베푸는 가장 힘있는 자선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희망하며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쁨에 넘쳐있고 즐겁게 사는 모습이다. 더구나 그 원인이 돈과 물질이 아니기를 그들은 바라고 있다. 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신앙인 밖에 없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자선을 물질과 결부시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돈과 물질이 자선의 전부인양 착각한다. 물론 재물을 나누는 것도 훌륭한 자선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자선행위를 진정한 자선으로 만드는 것은 겉에 드러나는 재물이 아니라 그 재물을 나누는 마음일 것이다. 재물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일 것이다. 믿음과 은총, 신뢰와 희망이 자선의 핵심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을 현대인들은 보고 싶어한다.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아무 걱정마시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독서에 나오는 말씀이다. 자선의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가르침이다.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느님 때문에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희망할 수 없는 상황, 인간적 계산으로는 방법이 없었는데도 주님은 길을 열어주셨다. 이것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제 대림절도 한 주간 남았다. 자선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며 성탄절을 준비하자.












30.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신분에 따른 회개 생활(10-14절)과 요한이 그리스도를 예고하는 내용(15-18절)으로 짜여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온 군중, 세관원들, 군인들에게 각자의 신분에 걸맞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군중에게는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시오”라고 요구합니다. 세관원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시오”라고 일러 줍니다.

세관원은 관청으로부터 관세 징수권을 위임받아 관세를 거두어들이는 민간인이었는데 그들은 수입을 늘리려고 정해진 액수보다 더 요구했던 것입니다. 군인들에게는 “아무도 괴롭히거나 등쳐먹지 말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시오”라고 했습니다. 여기 군인들은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의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기에게 몰려온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예고하십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던 백성들 가운데는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백성들에게 요한은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 주는 법인데 자신은 그런 일을 해 드릴 자격조차 없으며, 또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요한의 물세례를 거부하면 미구에 불세례, 곧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세례에는 성령이 작용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내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15-18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비록 세례자 요한보다 시기적으로 늦게 출현하셨지만 요한과는 비교가 안 될만큼 위대한 분이며 요한은 단지 이 예수님의 오심을 예고하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각자의 신분에 걸맞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요한은 군중들에게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조리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오”(루가 3,9)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경고를 들은 군중들이 요한에게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는 “어떻게 해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요한은 군중들에게 구체적으로 대답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속옷 두 벌 가진 사람과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자를 뜻합니다.



세관원들은 행정관리로서 지위를 가진 자를 뜻합니다. 군인들은 힘있는 자들의 대명사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지배계층의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들에게 가난한 자, 지위 없는 자, 힘없는 자들을 각별히 돌보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성직자는 성직자 신분에 걸맞게, 평신도는 평신도 신분에 걸맞게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활약할 당시에는 그를 메시아로 받드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고 “나보다 더 굳센 분이 오시는데, 나는 그분 신발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습니다”라222고 말하면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도 “제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 3,14) 하면서 극구 사양했습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유다인들에게 말하면서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하는 법이오”(요한 3,30) 하고 말했습니다. 이는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는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처신이라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처신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31.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다)  사랑의 물리학



영국의 한 광고회사에서 큰상을 내걸고 전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올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내었습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응모하였습니다. 비행기가 제일 빠르다. 아니 그보다 더 빠른 것은 기차를 타고 오다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방법이다. 아니 새벽에 승용차를 이런저런 지름길로 몰고 오면 더 빠르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실제로 시간을 재어보고, 서로 자기네 방법이 제일 빠른 방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상을 탄 사람의 답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길이라도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입니다.



 미국의 오마하라는 도시에는 ‘보이스타운’이라는 유명한 고아원이 있습니다. 그 입구에는 커다란 동상이 있는데, 한 소년이 조금 작은 다른 소년을 업고 있는 모습의 동상입니다. 꽤 오래 전의 일화입니다. 한 소년이 자기 동생을 업고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신부님이 소년을 보고 “얘야, 무겁지 않니? 내려놓으려무나”라고 하자, 그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무겁지 않아요. 얘는 내 동생이니까요.” 물리적으로 계산한다면, 동생이라고 해서 무게가 달라질 리 없고 무겁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소년으로 하여금 동생이 무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 말에 크게 감동을 받은 신부가 이 말을 ‘보이스 타운’의 정신으로 삼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무거워도 메고 다녀도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무게 계산법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부피 계산법은 무엇일까요? 욕심이 너무 많은 우리들은 항상 크고 큰 사랑을 원합니다. 왜 나는 요렇게 작은 사랑 주시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큰 사랑 주시느냐고 하느님께 투정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차지하는 사랑을 크게 만들까 궁리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그 답을 말씀해 주십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랑은 행(行), 행(行)은 나눔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누면 나눌수록 오히려 더 커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부피 계산법입니다. 그것이 쭉정이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알곡이 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의 힘을 아드님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천리길을 눈깜짝할 새 오고 억만근을 깃털처럼 들고, 아무리 작은 것도 나누어서 크게 만들 수 있는 힘­ 사랑의 물리학이야말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장영희 마리아 /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32.                 대림 제3주일 (다해)    기쁨과 회개의 표시로 나누자   

                                                            강길웅 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며 구원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우리가 용기있게 짊어지는 것도 부활이라는 엄청난 기쁨을 미리 맛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통회와 보속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큰 기쁨의 시기입니다.



1독서에서는 구원의 은혜에 기뻐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리고 인간을 지켜보시는 하느님의 기쁨이 동시에 나왔습니다. 여기서 기뻐하는 것은 원수를 쫓아 주셨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며 또한 그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 안에 계시어 구원해 주시니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바로 우리 각 사람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굽니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원수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번번이 원수 앞에서 무릎 꿇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주님께서 꺾어 주십니다. 오실 그분께서 쫓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탄생하시고 우리 곁으로 찾아오신 그분께서 우리를 새롭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2독서에서도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바오로 사도가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쁘니까 너그러운 마음을 모두에게 보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기쁘다면 기쁘다는 표시가 우리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기쁘면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대림 3주일은 우리의 너그러움이 요청되는 주일입니다.



복음에서는 회개의 표시로서 가진 것을 서로 나누라고 요한이 외치고 있습니다. 기쁘면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나누는 것이 바로 회개의 표시이며 또한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최상의 준비입니다.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 누구도 나누기를 거부한다면 그는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자선주일입니다. 기쁜 날이기 때문에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라고 교회가 정한 날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우리가 자선을 받는 날입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푼다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가 그것을 모두 되돌려 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선은 여러 사람을 풍요롭게 합니다. 주는 사람도 풍요롭고 받는 사람도 풍요롭습니다. 주님이 풍요롭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외롭고 병들고 슬퍼하는 사람들 곁에 평생을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분의 이웃은 밑바닥 인생들이었으며 밑바닥 인생들의 이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잘나고 똑똑하고 가진 것이 많았던 자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업신여겼습니다. 예수님 이 밑바닥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잘나고 똑똑하고 있는 사람들하고만 사귀면 오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분은 그쪽으로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은 오십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도대체 누굽니까. 그것은 붙잡을 것이란 오직 주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천국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을 차지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불우한 이웃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주님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본당에서 불우 이웃을 위해서 2차 헌금을 할 때 한 사목회 임원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본당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막말로 기가 찼습니다.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본당은 없습니다. 한 군데도 없습니다. 만일에 그 교회가 나누기를 거부한다면 망치로 부숴야 합니다. 무너뜨려야 합니다. 도대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그들이 그 안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겠습니까. 최후심판에서 우리가 갈라지는 기준도 어떻게 나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마태 25,31~46참조).



예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마태 6,7~21참 조). 땅에 쌓으면 좀먹거나 녹슬어서 못쓰게 되며 또 도둑이 훔쳐간 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늘에 쌓는 것입니까. 그것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나누고 베푸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됩니다. 땅에 쌓은 것은 아무리 쌓아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쌓은 것만이 비로소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기쁘기 때문에 나누고 또한 지난 1년 동안 잘못 산 것이 많기 때문에 회개의 표시로 나누도록 합시다. 그리고 나눌 때 자기 것으로 채워지는 풍요로움을 얻게 되며 또한 바로 그 나눔 안에 주님께서 탄생하십니다.



 33.      대림 제3주일 <루가 3, 10-18>(다)  백만량짜리 고양이와 동전 한닢짜리 집

                                                        방윤석 신부



  옛날에 왕보다도 더욱 돈이 많은 부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왕국 바로 앞에서 왕보다 더 화려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어찌나 구두쇠였는지 거지에게 동전 하나 공짜로 던져주는 일이 없었다.



  어느날 그는 배에 금은 보석을 가득 싣고 장사를 하기 위해 이웃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렇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것처럼 출렁거렸다. 배가 물 속에 가라앉을 것 같자, 이 구두쇠는 갑자기 갑판 위에서 무릎을 끓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느님, 제발 풍랑을 거두어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집에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저의 집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겠습니다.」

구두쇠 영감의 기도가 통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바다는 풍랑이 멎고 잔잔해졌다. 그리하여 배는 순조로운 항해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구두쇠 영감은 속으로,「내가 미쳤냐? 집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잠시 후 또 풍랑이 심하게 일어났다. 구두쇠는 재빨리 하느님께 잘못을 용서빌고 조금 전의 약속을 지키겠노라 기도드렸다. 어쨌든 풍랑은 가라앉고, 그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는 하느님께 약속한 대로 집을 팔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가 왼손에 고양이 한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고양이를 백만냥에 파는 대신에, 그 좋은 집을 동전 한 닢만 받겠다고 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고양이를 사야지만 집을 팔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어찌 되었거나 고양이와 집이 팔렸다.

 그 후 그가 거지 앞을 지나가면서 동전 한 닢을 거지의 모자 속에 던지며 하늘을 쳐다보고 말했다.「하느님, 저는 약속을 지켰나이다」



  하느님과 사기꾼 이야기 하나 더 하자. 이 세상에서 가장 사기를 잘치는 사기꾼이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하느님. 인간에겐 10억년이 하느님에겐 1초라면서요?」

「그럼 그럼」 「그럼 인간의 10억원이 하느님에겐 1원이겠네요?」 「그럼 그럼」

「하느님, 그럼 저에게 1원만 적선해 주십시요」「오냐, 알았다. 1초만 기다려 다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불우이웃을 돕자는 구호가 나돌게 되고, 많은 단체들이 「자선」이란 이름으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정부에서도 불우이웃 위한 오금 창구를 관청에 개설하여 성금 기탁을 받고 있으며, 거리에는 구세군의 자선남비도 출현했다. 돈 낸 사람들의 의향대로 제대로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선행위를 강력히 권고하는 때이다.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는 1984년 이 나라의 가난한 자, 병든자, 소외된 자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대림 제3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했으며, 금년이 14회 자선주일이다.



  자선이란 무엇인가? 자선이란 궁핍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에 입각해서 베푸는 물질적, 경제적인 도움을 말한다. 왜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자선은 이웃에 대한 사랑 구체적 표현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2)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숨은 것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 1~4)라고 말씀하신다.

또 「첫째가는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계명은 사람 사랑이다(마태     22,37)라고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은 나의 계명이니라」(요한         15,12)고 강조하신다. 바오로 사도께서는「아무리 다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있는데, 그     것은 사랑의 의무」(로마 13,8)고 말씀하십니다.

집회서 17,22에 보면 「주님은 인간의 자선행위를 옥새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인간의 선행을    당신의 눈동자처럼 아끼신다.」고 나와있다.



이렇듯이 하느님께서는 애덕의 구체적인 실천행위인 자선에 대해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그 모두가 자선행위였다. 병자를 고쳐 주고,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귀들린 이를 구해 주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고, 문둥병을 고쳐 주고, 죽은 이를 살리고‥‥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구체적인 자선행위는 무엇인가? 자선에는 물적 자비의 실천 7가지와 정신적 자비의 실천 7가지가 있다.



물질적 자비 7가지는, 1.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2.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 3.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  4. 집 없는 이에게 잠자리를 주는 일/

5. 병든 이들을 방문하는 일/ 6.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보는 일/ 7. 죽은 이들을 묻어 주는 일 등이다.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마음, 「주는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부싯돌처럼 주는 마음이다. 부싯돌은 잘 후려쳐야 주는데, 그것도 겨우 불똥 몇 방을 뿐이다. 둘째로, 스폰지처럼 주는 마음이다. 스폰지는 쥐어짜야만 주는데 바짝 마를 때까지 짜야 비로소 준다. 셋째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마음이다.

 나무는 거저 주는데 가지도, 열매도, 뿌리도, 나뭇잎도 거저 준다.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하기 바 랍니다.

34.           대림 제3주일<루가 3, 10-18> (다)    자선으로 참된 회개를 입증하자

                                                                유영봉 신부



  묵상 : 경제파탄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서로의 책임공방이 한창이다. 우리들의 삶이 자제와 자기 분수를 모르고 흥청댄 결과가 아니겠는가?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좋은 은총의 계기라 할 수 있다. 참된 회개는 자선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1. 경보시스템이 고장난 사회



  환율폭등․증시폭락․금리폭등․물가앙등․기업도산․대량해고․실업률 급증․주식회사 한국 파산, 듣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말들이 온통 신문과 방송의 머리말을 장식하고 있는 요즘이다. 게다가 대선주자들은 국가부도사태를 두고 서로 네탓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책임 떠넘기기가 한창이다.



  이를 보는 국민들은 위기가 아닐까? 책임의 소재와 몰을 따져야겠지만, 우선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모두가 그동안의 삶의 자세를 되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 위기가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2. 정신의 황폐화가 화 불러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다. 요한은 세리와 군인, 그리고 모여든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각자의 처지에서 어떻게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설파하고 있다. 로마의 식민통치, 국론분열, 민생도탄 등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알리면서 회개를 설파한 세례자 요한의 외

침이 오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것은 아닌지‥‥ 오늘의 위기엔 정경유착, 기업의 고비용 구조, 노사갈등, 정책부재 등등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분수를 못 지킨 우리의 과소비가 주범이라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



  과소비는 단순히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기엔 비싼 외제만 찾는 졸부들의 못난 자기과

시, ‘내 것을 내가 쓰는데 왜?‘ 라는 식의 극단적 이기주의, ‘위화감 따윈 내가 알바 아니다\’는 삐뚤어진 특권의식이 도사려 마음이 착잡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어떤 큰 사건이 터질 때는 항상 전조(前兆)가 있게 마련인데,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아시아 금융위기의 파고가 높아가는데도 어떤 책임자나 지도자도 다가올이 위기를 큰 목소리로 예고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의 위기를 예고하는 몇 가지 미미한 경고가 있었다면, ‘경제는 휘청, 소비는 흥청\’, \’경제 수준은 1만불, 소비 수준은 2만불\’이라는 TV의 공익광고 정도였다, 심지어 물러난 경제팀은 물러나기 전날까지 큰 걱정 없다는 자세였다, 우리 사회의 경보시스템이 고장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고 있는 것이다.



 이런 홍청망청이 이 땅을 온통 쓰레기장으로, 청바지가 가장 비싼 나라로 만들고 성실한 소시민들에게서 살맛을 앗아가는 한탕주의가 판을 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정신적 파산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 위기는 바로 정신의 황패화에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3. 내 자신에게 돌을 던지자



  대림(待臨)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회개의 시기다. 자기 빛이 얼마인지를 모르면 갚을 수 없듯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면 회개도 불가능하다. 국가경제 파산이라는 위기를 통해 우리는 모처럼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좋은 기회를 맞았다. 나아가 나는 신앙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학생으로서, 좀더 새로워지기 위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를 반성해봐야 한다.



 가장 완전한 거울인 하느님 앞에 조용히 자신을 비추어보자. 대개의 경우 내가 새로워지기 위해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다만 그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할, 자신에게 돌을 던질 용기가 없을 뿐이다. 그래서 회개는 은총이다. 나의 문제와 맛설 수 있는 은총을 겸손되이, 그리고 간절히 청하자. 그리하여 알찬 판공성사가 되게 하자.



        4. 회개는 자선으로



오늘은 자선주일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와 단식(고행)과 자선을 회개의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왔다. 교회가 대림시기에 이 자선주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그동안 못 다한 이웃사랑을 메우어 마음 편하게 연말을 맞자는 의도만은 아닐 것이다. 회개와 보속은 사랑의 자세로 할 때, 그 참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와 보속은 자연스레 자선에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이 담긴 자선은 회개와 보속의 증거인 셈이다. 사랑이 없는 자선은 거짓 자선이다. 그래서 자기 과시로 하는 자선은 회개와 보속이 되기보다는, 받는 이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때가 되면 나도 큰 자선을 하겠다’는 생각은 금물이라는 점이다. ‘지금, 여가서’자선을 하지 못하면,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심은 항상 우리의 형편보다 앞서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푼다는 것은 평소의 연습 없이는 못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35.               대림 제3주일  루가 3,10-18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박기흠 신부



형제 여러분!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서 거리감을 두고 자신을 한번 돌아다본다는 뜻으로 흔히 \’마음을 비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세에만 집착하고 재물을 모든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동안 우리들은 자기중심적인 시야에서 풀려 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시야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자기집착에서 출발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불안하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만족의 삶이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주 욕심이 많은 티모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많은 돈과 재물을 손에 넣어도 한 번도 만족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이웃 사람들과 돈 문제로 싸움을 벌이곤 했습니다. 어느 날, 티모시의 이런 모습에 한 사람이 그를 파멸시키려는 흑심을 품고, 유리 항아리에 담긴 조그만 \’금붕어\’한 마리를 선물로 주며 말했습니다. \”티모시, 만일 이 금붕어가 자라다가 나이가 들어 늙어 죽으면, 저절로 순금 덩어리로 변하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 꿈도 꿔 보지 못했던 엄청난 부자가 될 겁니다.\” 돈에 대한 욕심만이 머리 속에 가득했던 티모시는 거의 이성을 잃고, 그 \’금붕어\’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티모시는 이 \’금붕어\’를 조그만 물통 속에 넣어 주고 정성을 다해 먹이를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물고기는 기쁘게도 아주 빠른 속도로 자랐기 때문에 티모시는 언젠가 자기 손으로 순금 덩어리를 만져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뻐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붕어\’는 조그만 물통에 담아 두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습니다. 그래서 티모시는 많은 돈을 들여서 연못을 만들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그것도 모자라서 조그만 호수를 파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티모시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자라나기만 하는 이 \’금붕어\’를 먹이고 보살피느라 전 재산을 다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티모시는 초조한 마음으로 어서 그 물고기가 자라기를 멈추고 죽어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물고기보다도 티모시가 먼저 늙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수중에는 이제 재산이라고는 단돈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티모시는 그 물고기가 \’금붕어\’가 아니라 새끼고래였다는 사실을 끝내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물질주의와 이기주의, 향락주의로 인해 우리들이 이 \’티모시\’와 같은 이런 위협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군중, 세관원들, 군인들에게 각자 신분에 걸맞은 회개의 삶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갖지 못한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시오. 세관원들에게 여러분에게 할당된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시오. 군인들에게 \”아무도 괴롭히거나 등쳐먹지 말고 여러분의 봉급으로 만족하시오.\”(루가 11,11-13)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재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회개의 삶을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는 동물적인 단계를 벗어나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나눔의 행위란 자신의 모든 부정을 끊어버리는 것이며, 사리 사욕에 물들지 않고 이웃을 생각하는 이타적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눔의 진실한 행위, 곧 자선이란 내가 쓰고 남은 것을 남에게 적선하듯 주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 갇혀 있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나의 삶을 전향시키는 전인적인 행위이지 않을까요? 결국 자선이란 근본적으로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대면하여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진실한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과 죽음을 보면서 우리들은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그분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내어줄 줄 알았으며,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권력이나 기득권에 매이지 않고 하느님만을 신뢰하면서 자유롭게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인간다운 사람만이 남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은 자선주일입니다. 우리 주변이 특히 어려울 때 자선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들의 행위가 단순히 하느님의 구원에만 도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들 나눔의 행위야말로 가장 살아있는 믿음이, 행복한 삶을 창조하는 비결입니다.










36.             대림 제3주일        마태 11,2- 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이석재 신부



“당신은 메시아이십니까?\”

메시아의 선구자로 파견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당신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십니까?\”하고 여쭙는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나는 메시아이다\’라는 직답을 피하신다. 대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일들(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을 전하게 하신다. 이로써 당신이 예언자 이사야가 예언한 \’해방과 기쁨\’을 선사하는 메시아임을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 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치유하시어 병마로부터 해방시키심으로써 기쁨을 선사하셨다. \’해방과 기쁨\’ 을 선사하는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이 시작하신 사업을 세상 끝날까지 이어가도록 명령하셨다.(마태 28,12-20).



세례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은 어떻게 \’해방과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기적(=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제대로 걷게 하며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는 일)\’을 일으켜 \’해방과 기쁨\’을 선사할 수는 없다. 그렇다 어떤 방법으로?



요즘 우리나라는 IMF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하루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빵 한 조각이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이웃에게 내가 가진 빵을 나누어줄 때 그들을 배고픔의 고통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방의 기쁨\’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어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1요한 3,17)\”』



 






37.              대림 제3주일    마태 11.2~11    오실 분이 당신이오니까?

                                                      허중식 신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제대 앞에 대림초 3개 빛을 밝히어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제 3주일이며, 아울러 자선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살펴 볼 때 감옥에 갇혀있는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게 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가 치유되고 죽은 사람은 되살리는 기적들과 나의 행적들을 보고들은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8-10장을 볼 때 예수께서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과 중풍환자, 벙어리, 소경, 나병환자, 귀머거리를 고쳐주시고,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등 여러 가지 기적들을 보여주심으로서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 11장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치유 기적을 베푸시는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행복하다.’는 경고와 동시에 축복이 담긴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의 제2독서인 야고보서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으니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다리라고 전하고 있으며,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배지 바빌론에서 당하는 억압과 고통 속에서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머지않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해내시어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실 것을 전하며 용기와 희망을 가지라고 선포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 제2독서, 복음은 모두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리라는 희망과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림시기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사흘만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축일을 준비하는 기간이며, 우리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희망에 찬 시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희망과 기다림 속에서 살고있으며,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지방에 심한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성당에 모여 하느님께 비를 청하는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성당에 모여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 신부님께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를 내려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비가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산을 들고 오시는 분이 하나도 없으니 말입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말뿐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라 간절한 기다림이며,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확신의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고 우리 안에 모셔들려는 마음은 아내와 자녀들이 늦게 들어오시는 가장을 기다리는 마음이며, 부모님들이 늦게 들어오는 자녀들을 기다리는 마음이며, 혼자 집을 지키는 자녀들이 부모님이 빨리 들어오시기를 기다리는 애절한 마음입니다.



또한 농부가 심한 가뭄으로 갈라져 가는 논바닥을 바라보면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며, 부모와 학생들이 합격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마음이며, 첫눈이 내리면 만나기로 약속하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을 생각하며 첫 눈을 기다리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찾아오시리라는 희망과 기다림은 우리 자신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생동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욕정 등 인간적인 욕망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하느님 없이 살수 있다는 삶 속에서는 주님을 기다릴 수 없으며,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우리를 차장오시는 주님은 오시면 좋고  오시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그런 분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신 분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던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나병환자를 고쳐주시어 그들을 사회로 돌려보내시고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순교성인들이 자신의 목숨가지 내어 바치면서까지 믿었던 분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불의에 의해 우리가 겪는 고통과 억압에서 해방시키시며, 인간의 온갖 욕망으로 인하여 상실해 가는 인간성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 인간성을 회복시켜주시는 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오시는 주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얼마남지 않은 성탄을 준비하며,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모셔들이기 위하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체 잎에서 내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범한 모든 잘못들에 대해 진심으로 통회하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마음으로 고백성서를 받아야 합니다. 나아가 때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로 인하여 고통 당하는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마음과 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느님과 이웃과 화해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며 희생과 자선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기다리고 맞이할 준비를 하는 대림 3주일을 자선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자선은 금전이나 물질을 희사하는 것만으로서는 부족합니다.



자선 속에서 회개와 속죄의 뜻이 담겨져 있어야 하며, 가난한 나그네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는 내적인 준비가 내포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주님을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예언자적인 사명을 성실히 수해하고 주님의 길을 미리 닦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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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다해 대림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1. user#0 님의 말:

     

    대림 제 3 주일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읍니다.

    제 1 독서 : 스바 3,14-18

    제 2 독서 : 필립 4,4-7

    복 음 : 루가 3,10-18


    해설

    대림 제 3 주일인 오늘의 전례는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는 기원과 기도의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라”는 입당송의 어조가 제 2 독서에서 더 폭넓게 강조되고 있고, 본기도에서는 주님께서 다가오는 성탄절에 당신 백성들이 “구원의 신비를 즐거운 마음으로 거행하게”해달라고 기도함으로써 같은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쁨의 파동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읍니까?”(루가 3,10)하고 요르단 강변에서 물어오는 사람들에 답변하는 세례자 요한의 엄한 권고에 의해서조차도 그치지를 않는다. 사실 요한도 메시아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17절)에 태우러 오실 것이라고 하면서도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든지간에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기만 하면 누구나 다 구원해주신다고 선포함으로써 오늘 복음 내용에서 말해주고 있듯이 “복음을 선포하였다”(18절).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특히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인물인 스바니야의 조그만 예언집 끝 부분에서 취한 오늘의 제 1 독서는 이와 같은 기쁨의 분위기로 들떠있다. 여기서 유다의 온 나라들을 대표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찬미하고 있는 그 짤막한 노래는 귀향살이가 끝남과 포로가 되엇던 자들이 돌아외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기쁨의 동기는 구체적으로 볼 때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 첫째는,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시고’ ‘원수들을 쫓아 내시어’ 그들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점이고, 둘째는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더 이상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원한 구원을 보장해 주실 것을 약속하는 점이다 :“너를 구해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17-18절).

    ‘명절’이라는 말을 유의해 보자.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항상 새로운 만남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만남에는 히브리 사람들의 모든 종교적 축제가 갖는 기쁨과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은 축제적 차원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괴로움과 슬픔으로 죽어가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다시 찾아내야 할 차원이다.

    그런데 그 기쁨의 두번째 동기는 바로 그 ‘영속적’특성 때문에 스바니야 예언자의 기쁨에 찬 찬미가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던 역사적 상황을 초월한다 : 자기 백성들 가운데 용맹한 구원자(15.17절)로서 서 있는 신은 그리스찬 문학에 있어서 확실히 메시아로 이해된다. 마태오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고 한다(마태1,21 참조).

    이사야 예언서(12,2-6)에서 취한 층계송도 야훼에 의해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야훼님 날 구하시니 신뢰하며 겁내지 않으리라. 야훼님 나의 힘, 내 굳셈, 내 구원이시로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 12,2-3).

    그 결론은 이 세상 모든 백성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기쁨의 축제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야훼님 찬미하며 그의 이름 외쳐 부르고 그의 큰일들을 백성에게 알리며 높으신 그 이름 마음에 새겨두어라. 야훼님  찬미하며 야훼님 위업을 온 세상에 알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위대하시니 시온에 사는 이 모두 기뻐하며 찬미하여라”(이사 12,4-6).

    이 내용은 분명히 앞서 본 스바니야 예언서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바니야 예언서의 내용이 이사야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여기서도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해 이미 행하신 것 외에 특히 중요한 것은 장차 하실 일이다:“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위대하시니 시온에 사는 이 모두 기뻐하며 찬미하여라…”(6절)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하느님이 항구히 당신 백성들 가운데서 그들을 도와주시고 또한 매순간 그들을 구원해주시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그 육화의 신비에 서 명백히 입증된다. 보다시피 여기서도 깊이 숙독해 보면 ‘그리스도론적’인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대림시기에 전례는 상징적 의미가 풍부히 들어 있는 이사야서의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3절). 성예로니모는 이미 이러한 일반적 구원 외에 더 나아가 구원자 즉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 자체가 성서 속에 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찬미가는 더욱 큰 기쁨에 잠겨 있는 것이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임 말했듯이 기쁨이라는 주제는 제 2 독서에서도 장엄하게 계속 되고 있다. 우리는 제 2 독서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를 이미 입당송을 통해 들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읍니다!”(필립 4,4-5)

    우리는 지금 인간적 성실성과 책임에 대한 내용으로 충만해 있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결론 부분을 대하고 있다. 그 편지에서는 처음부터 (필립 1,4.18.25 ; 2,2.17.18.28.29 ; 3,1 ; 4,1.4.10참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전파에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특히 믿음의 기쁨 등 ‘기쁨’에 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대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기쁨의 동기에 또 다른 동기가 하나 첨가되고 있다. 즉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우리는 생활의 모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자에ㅣ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도래’는 고통 ‘뒤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 ‘안에’ 들어와 있다. 문제는 우리가 윤리적이든 육체적이든 영신적이든 고통중에 있는 바로 그때 ‘가까이 와’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울로 사도는 즉시 이어서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평화롭게 지내라고 한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6-7절).

    그러므로 바올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때문에 우리의 모든 요구와 청원을 들어 도와주러 오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6절). 이렇게 해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7절)-정상적인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속에 스며들어 때때로 격해지는 우리의 정신적 긴장과 고통과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육체의 본능적 거부반응을 진정시켜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은 극적 사건과 고통을 통해 또한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을 통해 생겨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입니다. 기쁨으로 당신들은 생기를 얻을 수 있읍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잡지 못하게 하십시오“(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시오”


    오늘 복음인 루가복음에서는 다른 독서들과는 달리 기쁨의 주제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역시 같은 주제가 담겨 있다. 사실 주인공은 여전히 같은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도래에 대비하여 준비시키는 세례자 요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세례자 요한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한 깁므의 동기가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으므로 요한을 보고 모두들 속으로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루가 3,15-17).

    요한이 자기 자신과 메시아를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이와 같은 성실하고도 솔직한 비교를 통해 메시아의 우위성이 드러나고 있다:그분은 ‘더 훌륭한 분’(16절)이시다 ;그분은 성신강림절에 보게 될 것처럼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 그분은 ‘키’라는 상징을 통해 나타나고 있듯이(17절) 인간들의 마음을 가려내는 ‘심판자“의 권능을 갖고 계시다. 그런데, 메시아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자비롭게 베푸시는 그 풍요한 선물들을 왜 즐기지 않는가?

    심판에 대한 이야기조차도 두려움을 야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오늘 복음 첫부분에 나오는 요한의 설교도 구원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고 물으며 그에게 몰려드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주는 엄한 윤리적 경고를 포함시키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평온과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다. 사실 그는 구원이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한다 : 즉 구원은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일들 속에 그리고 가진 것이 많든 적든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하고 대답하였다. 세리들이 와서 세례를 받고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읍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은 ‘정한대로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말라’하였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하고 일러 주었다”(루가3,12-14).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든-칼을 드는 군인이든, 세금을 거두는 세금징수원이든-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속옷 두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12절)

    보다시피 요한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이미 복음이다. 요구하는 것이 많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가르쳐줌으로써 우리 마음을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매순간순간에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즉 군인이 되었든 세금징수원이 되었든, 법률가가 되었든 교황이 되었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머물며 활동하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분의 ‘대림’은 바로 그곳에 있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 본질적이고도 깊이있는 기쁨을 주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이며, 오늘 전례는 바로 그러한 기쁨에 들떠 있으며 또한 확신에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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