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강론모음

 

 13.         성가정 축일 (다) 루가 2,41-52 신앙·봉사·사랑·효도로써 가정을 천국삼자

                                                                 조순창 신부



오늘은 나자렛의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세분으로 이루어진 성가정을 우리 모두의 가정의 모범으로 삼자고 마련된 날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우리 가족 서로의 노력으로 더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갈 다짐을 새롭게 하며, 가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정 주인입니다.



가정이란 말은 언제라도 정다운 말입니다. 부모와 자녀 또는 부부와 형제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제도이며, 사회 구성의 가장 작은 기본 공동체이며, 이는 흩어져서는 아니 될 섭리적 관계입니다.



효도는 가정 윤리의 기본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하느님은 “효자가 기도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고, “부모가 섬긴 공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역경에 처했을 때에 구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부모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모든 자녀는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며, 예수님의 본을 받을 때에는 행복하고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2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뽑아 주신 사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 받는 백성들인 여러분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사랑을 실천하라”고 교훈 하십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가족 윤리의 중심입니다. 요셉 성인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하며 목수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가족 사랑으로 가정일을 부지런히 돌보았으며, 예수님은 부모 사랑으로 기쁨과 희망의 샘이 되어 주셨습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입니다. 일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수치입니다. 기쁨의 척도는 얼마나 부자이고 가난한가에 있다기보다는, ‘얼마나 열심히 일하며 정당한 대가로 떳떳이 사느냐’에 달려 있다면,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사랑으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여 삶의 참보람과 기쁨을 누려야 할 것이며, 거기에 하느님의 축복이 점칠 것입니다.



신앙으로 하느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구원의 열쇠입니다. 나자렛 가족이 걱정이나 고통이나 아쉬운 것이 없어서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고통은 더 컸었습니다. 약혼중의 잉태에서 구유 탄생과 피난, 목수로 가장이 꾸려 가는 가난한 살림들의 고민은 우리들보다 더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중에서도 효도와 사랑이 극진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최선을 다하여 맡은 직분을 서로서로 다하셨기에 하느님 은혜 속에 복되고, 그래서 고통 중에도 인류 구원의 원천으로서 가정의 표본으로 삼는 것입니다.

신앙이 부족하며 기도하지 않고, 서로 불신하며, 사랑이 부족하여 불행의 탓을 서로 돌리고, 그래서 미워하며, 구제 불능이라 판단하고, 핀잔을 주며, 절망하여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살 때에는 희망이 없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하느님이 맺어주신 좋은 가정입니다. 금년 한 해가 다 가는 오늘, 지난 한해를 돌이켜,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시고, 사랑하시고, 하느님께 기도하여 주십시오. 신앙과 봉사와 사랑과 효도로 가정을 천국으로 삼읍시다. 끝으로 우리 본당 가족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본당을 위해서 봉사해 주시는 봉사자 여러분! 성전건립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고, 정성어린 헌금을 하여 주신 여러분께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 본당 모든 교우 가족 여러분, 감사합니다. 행복하십시오.













14.         성가정 축일 (다) 루가 2,41-52         “희생 없이 성가정 안돼”

                                                                 서경윤 신부



본당신부도 아닌데 어쩌다 혼인미사 주례를 하게되었습니다. 강론 중에 새 가정을 이루는 신랑 신부에게 장차 요셉,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을 본받아 모범적인 성가정을 이루며 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에 어떤 분이 어떤 가정이 성가정인가를 물었습니다. 나는 「가족 모두가 성인이 되면 성가정이지」하고 얼버무려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강론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며 그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에 내가 아는 가정들을 꼽아가며 어느 가정이 성가정인지 가려내 보려니까 한 가정도 없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성가정에 대한 내 기준이 잘못되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요셉 같은 분, 아들은 예수 같은 분을 찾아보려니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가정이 성가정입니까? 가족 모두가 성인들로 구성되면 성가정입니까? 지금까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준은 너무 막연하고 비현실적입니다.

가정은 관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된 단위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가족이 모두 성인이라서 성가정이라기 보다 가족관계가 거룩해야 성가정이라 생각됩니다. 관계가 거북하다는 것은 그 관계 때문에 자기는 희생되는 것입니다. 성가정의 요셉은 그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닌 예수를 길렀습니다. 신앙 때문에 실제로는 장가도 못간 셈입니다. 마리아가 동정이었고 하니까 말입니다. 자기의 일생으로 치면 마리아와 예수를 위해서 인생을 망친 꼴입니다.



마리아는 또 어떻습니까?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습니다. 일생동안 요셉에게 참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인생을 망친 꼴이 마리아도 요셉과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이 부부는 이 땅에 구원자를 위탁받아 낳고 기르느라고 자신들은 희생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는 소개할 필용도 없습니다. 희생의 깊이가 깊은 만큼 그 만큼 거룩함의 높이도 높습니다. 성가정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타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희생이란 말이 요즘처럼 빛을 발해야 할 시기도 없을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반지를 교환하는 행위도 공허해 보입니다. 본시 반지에는 인감도장이 함께 있어서 반지를 주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위임하는 뜻이라야 하는데 결혼을 하면서도 자기의 재산을 따로 관리하는 마음 한구석에는 일단 유사시를 대비하겠다는 생각이 남아있고 그런 맘이 있는 한 자기 배우자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느님 하는 말들이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같습니다. 둘만 낳아 잘 키워보겠다고는 했지만 적게 낳은 마음속에는, 자녀를 많이 낳아 그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며 희생되고 싶지도 않고 나도 내 삶을 내 나름대로 즐기고 편히 살고 싶어서 적게 낳은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한 어찌 자녀와의 관계가 성스러울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들이 말은 않지만 더 이상 동생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를 압니다. 즉 자식을 위해서 전부를 희생 할 수는 없다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는 자기 어머니가 왜 병원에 갔다 왔는지를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희 둘만 키우기도 힘들다는 말을 쉽게 들어 왔습니다. ·자녀 때문에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고 희생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잉태된 동생도 병원에다 버릴 만큼 강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포기한 부모를 만난 예수였기에 예수 자신도 이 세상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매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며 점점 이기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희생이란 단어의 가치를 새삼 아쉬워합니다.



성가정은 자기 가정만을 위한 성가정이 아님을 잘 보여줍니다. 성가정 또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희생된 가정입니다. 아들이고 하나밖에 없는 예수는 다 키워놓고 보니까 나이 들어도 장가들어 손주 안겨 줄 생각은 않고 며칠씩 들어오지도 않고 사람들 모아놓고 설교하는 걸 한다고 해서 한번은 찾아갔더니 홀대를 해 보냈습니다.



하긴 어린 때부터 끼가 있어서 오늘 복음 성서에서는 12살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잃어버리고 성전에서 다시 찾았을 때 부모는 놀랍고 반가와ꡔ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ꡕ고 말하자 예수는 ꡔ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ꡕ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 눈에는 천하 불효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정이 성가정이었습니다. 가정도 자기 가족들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잘 보이는 벽에 걸어둔 십자가는 장식품도 아니고 집 지켜주는 부적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새롭게 하고 이를 위해서는 내 자신이 가정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가족간의 관계·가정간의 관계 그리고 세상을 향한 관계가 헌신을 통해서 거룩해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관계는 곧 우리 가정을 하느님께로 향한 개방으로 안내하여 성가정을 이루어 줄 것입니다.












15.             성가정 축일 (다) 루가 2, 41-52 기도하는 가정을 이루자

                                                       김영식 신부



몇 년전 어느 주일 미사 중에 저는 너무도 흐뭇한 정경을 보았습니다. 바로 제 앞좌석에 행복하게 보이는 한 젊은 부부와 두 살 정도의 귀여운 아들이 재롱을 부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무척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저는 미사 중에 무심코 그 젊은 부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기 아빠는 미남에다 좋은 체격을 가진 신사였습니다. 그러나 어울리지 않게도 성당 안에서 더구나 미사 중에 시커멓고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유심히 보니까 그 사람은 분명히 장님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 옆의 아기 엄마를 보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모습, 잘 빗은 머리, 화려하지 않으나 깨끗하게 입은 옷을 보니 보기에는 틀림없이 정숙하고 얌전하며 매력 있는 부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보는 순간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하게 얼굴이 얽었고 화상을 입었는지 군데군데 붉은 반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행복스럽고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어둡고 걱정스러운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빠가 만약 눈을 뜬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지금보다 더 불행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육안으로 광명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히 마음의 광명이 있었습니다. 옆에는 사랑하는 최고의 부인과 그 재롱둥이 자식, 더구나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을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들의 삶은 공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또한 우리 부모님들이 창조한 사랑의 결실이며 열매입니다. 부모님들은 이 열매를 더욱 더 빛나게, 아름답게 나타내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고 계십니다. 아빠의 출근, 자식들의 등교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잠든 고요한 새벽에 곤히 잠자는 아빠와 자식들의 단잠을 깨울까봐 조심스럽게 아침 조반을 준비하는 어머니, 하루의 고된 일과 업무에 시달려 보기보다 더 늙은 아빠, 누구를 위한 고생입니까? 부모의 은공도 모르고 탈선하는 문제 학생들, 결혼하면 언제 보았다는 식의 자식들, 신문 사회면을 꽉 채우는 비행들, 누구의 잘못일까요?



우선 우리 가정을 한번쯤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너무 겉모양에만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식들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먹고사는 데 불편만 없으면 가정은 행복하고 원만한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장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그 아들은 무척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가 성장하여 학교에 다니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른 학생의 부모님과 자기 부모님의 다른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빠는 장님, 엄마는 곰보이니 열등의식을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연히 문제아동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질을 갖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부모에 비해 하잘 것 없고 병신이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이며 굳은 신앙으로 생활 속에 모범을 보여주는 기도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그를 보고 “병신 아들, 병신 아들” 하며 조소할지라도 그 아이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큰 소리로 “난 너희들보다 더 사랑 받고, 행복한 부모님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부모님의 따뜻한 애정, 기도하는 모습,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이에 가슴 깊이 박혀있어 생활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아버님이 안 계시고 엄마와 두 아들만 있는 집안입니다.



아버님은 6.25때 육군 소령으로 전사하셨고 어머님은 조산원으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그 때 두 아들이 다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현재, 큰아들은 독일 유학 가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고 둘째는 신품을 받아 오늘도 본당 사목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전 그 가정에서 크나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또한 아들 모두를 하느님의 도구로 바친 어머님의 희생심이 어디에 있나를 알았습니다. 아침엔 일찍 일어나 아침 미사에 참석하고 취침 전에 함께 모여 저녁기도와 로사리오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저희 집하고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의 일을 잊어버릴 수 없었습니다. 역시 이런 가정에서 훌륭한 하느님의 도구가 탄생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설날 또는 추석이 다가오면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의 절도 받고 재롱도 보고 싶을 것입니다. 이 가정에는 이러한 사실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습니다. 이웃집의 소란함과 대조적으로 쓸쓸함, 적막감, 이러한 고통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이 신앙생활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된 기도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도 재물과 돈만으로 행복될 수 없고 또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도 없습니다. 오직 좋은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크리스쳔 가정답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렵고 짜증스럽고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기도로써 밝은 표정을 되찾읍시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합시다. 엄마는 가정에서, 아빠는 직장에서 수시로 기도하며 아침저녁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습관을 기릅시다. 기도하는 가정만이 성가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쳔의 생활이며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이 미사 중에 성가정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간구합시다.















16.        성가정축일 <마태 2,13-15;19-23>(가) 모닥불 사랑과 화로불 사랑  

                                                          김현준 신부


  ‘아내가 집이다\’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놀란적이 있었다. ’부부 사이에 제일 자존심을 세운다\’라는 말을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놀랐었다,

 ‘아내가 집이다\’라는 이 말은 48년간 결혼생활을 하신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내를 돌보면서 깨달았다는 고백의 말씀이다. 두 달 가까이 하루도 집에서 자지 않고 병실에 가서 아내를 돌보며 같이 있을 때, 아내는 무척 고마워했고 주변 사람들도 놀랐으나, 실은 아내를 돌보기 위해서라기보다 아내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집이 내 집이 아니라, 아내가 바로 내 집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는 것이었다.

 

성가정 축일인 오늘 마태오 복음에는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라는 구절이 네 번이나 반복하여 나온다.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집트로 피신하라고 알려줄 때,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고 일러줄 때이다. 요셉은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 두번의 일러줌을 그대로 실행한다. 요셉이 없는 ‘아기와 아기 어머니\’라는 그림이 가능할까? 아기가 없는 아기 아버지와 아기 어머니가 가능할까?



\”아내가 바로 집이다\”



  아기와 아기 어머니, 아기아버지는 가정의 기본 구성요소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이다. 그 운명이 같은 공동운명체이다. 한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봄이 오면 같이 싹을 틔우고, 바람이 불면 같이 흔들리고, 눈비가 오면 같이 맞는 운명 공동체이다.

나자렛 성가정은 마굿간의 출생, 헤로데의 박해, 이집트 피신, 나자렛 귀환 등 고통스럽고 힘든 사건을 함께 겪어내며 운명을 같이한다.



동해안 최북단 K본당에 있을 때였다, 신자 6백여명의 시골 성당이었는데, 남편이 신자가 아니기에 여러 제약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부인들이 있었다. 그 남편들이 참 고마웠다, 그래서 부부함께 모이는 모임을 만들고, 이름을 ‘미비회\’라고 했다.

어미, 아비(집회 3,3)들이 함께 모인다는 뜻에서 끝글자 한자씩을 따서 지은 이름이지만 ’도둑 제발 저린다\’고 그 비신자 남편들은 “저희들은 미비한 사람들입니다\”라고 모임에서 인사를 하기도 했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식사를 같이하는 단순한 모임이었지만 일년 후쯤 그 남편들은 모두 ‘미비한 사람들\’이란 딱지를 떼고 성가정을 이루었다. 그 모임에서 이런 말을 했다.



가정은 운명 공동체\”



부부간의 사랑이란, 연애할 때와 다른 사랑이 이어지는 것이지요. 연애할 때는 모닥불 사랑입니다. 그때는 불꽃이 센 모닥불 같은 감정이 오가기 때문에, 상대방이 다 보이지 않습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 앉으면 모닥불의 불길과 그림자 때문에, 마주앉은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결혼한 후의 사랑은 화롯불 사랑입니다. 모닥불의 불씨들을 모아 화로에 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화롯가에 앉으면 맞은 편의 사람이 잘, 그리고 가까이 보입니다. 재로 묻어둔 화롯불은 춥다고 들쑤시지만 않으면 밤새도록 불씨를 유지합니다. 가정에서 화롯불을 들쑤시는 행위, 이를테면 상대방을 누구와 비교하지 않으면 그 불씨는 오래 갑니다. 서로가 화롯불의 재를 덮어주듯 서로의 단점을 덮어주고 다독거려줄수록 사랑의 불씨는 오래가고 따뜻한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도 서로를 존경하라는, 비교하지 말라는 뜻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사람이 가정에 성공하면 다 성공한 것이다. 가정에 성공하지 않고는 그 어떤 성공도 공허한 것이다. 자녀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자기 부모일 때, 그 가정은 성공한 가정이다. 가정은 인간성을 길러내는 ‘기초학교\’이며, 신앙심이 싹트는 ’작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선택에는 변경할 수 있는 것도 있고 변경할 수 없는 것도 있다. 혼인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다시 변경할 수 없는 선택이다. 따라서 그 선택이 최고가 되도록, ‘거기에 머물러\’ 그 자리가 최고의 선택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거기에 머물러\’ 살았다, 이리하여 ’나자릿 사람\’, \’나지렛 성가정\’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17.    성가정 축일        예수님의 성가정을 닮자

                                                             김상호 요한 신부



성탄 후 첫 일요일을 우리 교회는 성 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이 이룬 가정은 평화와 기쁨 속에서 행복이 넘쳤습니다. 우리들도 이 가정을 닮아서 우리들 가정에도 평화와 행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축일을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 인생은 참 기쁨이 무엇인지,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가정의 평화를 바라지만 사실로는 우리들의 가정이 만족할 만큼 평화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 이루어 놓은 가정의 평화를 우리들도 배울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가정의 평화는 파랑새처럼 멀리서 운이 좋게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또 누가 나에게 선물로 주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의 평화는 내가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객관적인 여건이 가정의 평화를 크게 결정한다고 말씀하시고 싶어합니다. 객관적 여건이란 즉, 좋은 가정과 훌륭한 부모와 충분한 경제적인 힘 등을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부여받은 여건입니다. 이런 객관적인 여건을 자기 힘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단지 주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생겨나는 질문은 객관적인 여건이 한 가정의 행복을 결정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부자의 자식들은 다 행복하고 권력가의 자식들은 다 우리보다 행복하더냐 라는 질문입니다. 객관적인 여건을 잘 이용하면 가정의 행복에 큰 도움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그 좋다는 여건이 오히려 독이 되어서 그만큼 가정이 더 파탄이 나는 것을 우리들은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여건도 또 우리가 보기에 나쁜 여건도 그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가정과 우리들 가정의 객관적인 여건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가정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예수님의 가정보다는 부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나라는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식민지 수탈을 당하고 있었음에 비해서 우리들은 자유 대한민국에 살고 있습니다.



성가정은 나쁜 여건 속에서도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가 최선을 다하여 살아간 결과 성가정을 이루었고, 우리들은 그보다는 좋은 여건 속에서도 서로가 최선을 다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엉뚱한 방향으로 노력한 결과 지금 이 정도로 내가 누리는 가정의 평화일 뿐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는 올바른 방향으로의 노력은 하느님의 뜻이 너와 나 우리 가족들을 통하여 우리 가정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오늘 축일을 통하여 배우도록 합시다.




18.     성가정 축일 <루가 2,22-40>(나)     “참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기쁘게 고통을 겪고”                                                             김성배 신부





사람들 눈에는 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강해 보인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고, 잘 참고 견디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통이나 슬픔 또는 모욕을 평온한 마음으로 참아 견디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강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참고 견디는 것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런 것들을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다스릴 힘이 없기 때문에 감정이 이끄는 데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미워하고 원한을 품고 분노하게 된다.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힘이 있는 강한 사람이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힘이 없는 약한 사람이다.



참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고린토1서 13장의 사랑의 송가에서 사랑의 첫째 특성을 참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1고린 113,14)

사랑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조건 없이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버리는 희생 위에만 꽃필 수 있다. 사랑의 크기는 희생의 크기로 측정된다. 희생이 더 클수록 그 만큼 더 위대한 사랑이 되고, 희생이 완전할 때 완전한 사랑이 된다. 참는다는 것은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다. 많이 참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희생한다는 것이고 그 만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참을성이 적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희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혀 참지 않는 사람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참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참아야만 자기 기분에 상관없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 있다. 참아야만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다. 참아야만 무례한 사람에게도 예의바르게 대할 수 있고, 사욕을 품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참는 것을 괴롭지 않고 기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의 행복만을 원하고, 그의 행복만을 위해서 행동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기쁨을 주는 기쁨만으로 만족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기쁘게 고통을 겪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서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 사랑하는 상대에게 영광을 주기 위해서 기쁘게 모욕을 견딘다.

  

사랑은 강하다. 사랑보다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해진다. 사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주게 한다. 한 마디로 사랑의 능력은 무한하다.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시다.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무한히 사랑하시는 능력이다.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참된 힘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만이 사람을 착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냉혹한 이기주의로 차디차게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사람에게 내어 주시기 위해 당신자신을 버리고 비우시는 사랑의 극치이다. 이렇게 당신자신을 온전히 사람에게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자기를 바치는 사랑으로 응답한 분들이 계셨다.



이 분들이 바로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대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부모로 선택하신 성모님과 성요셉이시다. 예수님은 지상생애의 대부분을 예수님, 성모님, 성요셉으로 이루어진 성가정에서 보내셨다. 성가정은 완전한 가정생활의 모범이다.

성가정에는 완전한 행복이 있었다. 가난한 살림이었고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더 할 수 없이 완전한 행복이 성가정을 채우고 흘러 넘쳤다. 그 것은 성가정에는 하느님께서 계셨고, 따라서 완전한 사랑이있었기 때문이다. 성가정에는 오직 사랑만이 있었다.



서로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를 아낌없이 희생하고 바치고 내어주는 사랑만이 있었다.

예수님, 성모님, 성요셉 세 분 서로간에 오고가는 모든 눈길은 사랑의 눈길이었고, 주고받는 모든 말은 사랑의 말이었고, 모든 행동은 서로에게 기쁨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성가정에는 완전한 부부사랑과 완전한 부모사랑과 완전한 자녀사랑이 있었다.



가정의 모든 불행은 사랑의 결핍에서 온다. 사랑은 성실하게 사랑하는 남편, 충실하게 사랑하는 아내를 만든다. 사랑은 애정 깊게 보살피는 부모, 효성 지극한 자녀를 만든다. 사랑은 결점을 참아 주고 잘못을 용서하고 요구하지 않고 준다.







19.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행복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봐요!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가정은 기본적인 사회요, 작은 교회」입니다.

신학적인 강론 말씀을 드리는 것보다, 가족 구성원들의 진솔한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어느 시골 본당신부로 있을 때 교우들에게 편지를 써 오라 하여, 성가정 축일에 강론 대신 읽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가족간의 사랑의 편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드리는 편지입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는데 오늘 아침 당신이 불쑥 던진 말에 나의 마음은 왠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양 멍하니 창 밖만 바라다봅니다. 당신과 만나 결혼한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지났군요.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이 결혼해 한집에서 살다 보니, 힘든 때도 많았다고 봐요. 타의든 자의든 아무렇게나 던지는 당신의 말이 저의 가슴에는 앙금으로 쌓이네요. 이렇게 펜을 들고 보니, 지금껏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오네요. 당신은 언제나 돈, 돈 하는데 전 그게 못마땅해요. 물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많이 쌓이겠지요. 그렇기에 돈이면 최고다, 안되는 일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물론 돈도 있어야지요. 하지만 돈의 노예가 되다 보면 자기의 삶을 찾지 못하잖아요.

  

행복은 자기 마음속에 있다고 봐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자기 자신의 생활에서 만족을 찾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행복해지고, 억만장자도 자기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 불행하다고 느끼면 불행한 거랍니다. 행복의 기준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보, 당신과 나는 같은 배를 타고 먼 미지의 나라로 항해하는 것과 같아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배 안안서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아옹다옹하면 결국 그 배는 파산에 이르고 말 것이예요.



가다 보면 험한 풍랑과 비바람 속과 같은 때도 없다고는 볼 수 없잖아요. 당신과 제가 배를 잘 운전해 가야만 우리 두 아이도 평화로운 가운데 정서적으로 잘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우리 두 아이 착하고, 바르고, 예쁘게 자라 학교에서 우등생인 것을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자식농사는 백년농사」라는데,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당신은 욕심이 많고, 무슨 일이든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시는 데, 이것 좀 고쳐주세요. 여보 저의 소원은 당신 몸과 마음 건강하고, 자기 맡은 임무에 충실하며 모든 것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 자녀 지금과 같이 잘 자라 주며,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생활하고, 성가정을 이루어, 모든 가정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 소망이라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나, 이 세상에서 당신을 제일 생각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당신의 아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당신의 아내가!”



다음은 고등학교 1학년 딸이 엄마께 드리는 글입니다.

  “텅 빈들의 앙상한 가지들만이 12월의 싸늘함을 더해줄 때 나의 어머니는 무슨 걱정으로 하루를 여실까요? 하늘에서 눈꽃이 내릴 때면 마냥 좋아만 하는 딸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희들을 위해 애쓰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글로써 잠시나마 위로해 드릴까 합니다.

  벌써 14년이란 세월이 흘렀군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론 여자의 힘만으로 수많은 날들을 오직 자식들만을 위해 희생하시는 어머니!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지요. 그 날도 어김없이 어머니는 서둘러 일터로 향하시다가, 꽁꽁 얼어붙은 내리막 길에서 넘어져 어머니의 몸은 그만 피멍으로 얼룩져 버렸고, 주위분들의 부축하에 간신히 일어서게 되셨을 때, 집에서 쉬어야 한다는 말에도 개의치 않으시고 아픈 몸을 이끌고 일터로 가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 늦는 날이면 주인의 따가운 눈총을 잘 참아 내셨던 나의 어머니!

  하루는 멀리 떨어진 외딴 곳으로 나물 캐러 가셨을 때, 한 뿌리라도 더 캐시려다 그만 막차를 놓치고는 무섭고 험한 길을 한밤중에 몇 시간이나 걸어오신 적이 있지요. 그때 나는 평소에도 몸이 약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갖가지 나쁜 상상만을 하게되었고,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지요. 밤 늦게서야 다리가 아파 절룩거리며 걸어오시는 어머니가 너무도 초라해 보여, 나도 모르게 화를 내며, 왜 이렇게 늦었냐는 나의 철부지 같은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 날밤 저는 눈물이 뒤범벅된 채로 잠드신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진정으로 어머니의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은 나물 한 뿌리의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대한 강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시의 여유 없이 지난날을 홀로 두 사람 몫을 일해 온 대가로, 지금은 지칠대로 지친 어머니는, 밤이면 더욱 괴로워하셨고, 가끔 앓는 신음소리에 저는 잠 못 이루고 어머니께 괜찮으시냐는 물음으로 아픔을 대신할 수밖에 없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성모상 앞에 촛불을 켜고 함께 기도드릴 때, 그 동안의 삶의 고통들을 잊으시고 행복해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제는 저도 행복을 조금은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저도 조금은 생각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고, 이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사는 사람들, 참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어 사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언제까지나 잊지 않고 살아야 할 어머니의 고마움과 희생을 생각하며 성서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귀절을 가슴깊이 묵상하면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딸, 어머니께 착한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딸 올림!”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의 글을 통해 여러분들이 어떻게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지 일깨워 드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디 주님을 가장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을 가족 안에서 이루도록 노력하며, 주님께서 우리 모두 의 가정에 축복과 은총을 주시도록 기도드립시다. 새해에 주님의 축복 많이 받으십시오.



20.                성가정 대축일 <루가 2,41-52>         소년 예수

                                                          함세웅 신부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교회는 이 축일을 예수 성탄 다음 주일에 지내도록 새 축일표에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가정이 얼마나 행복스러웠느냐, 또는 돈이 많았느냐 하는 등의 우리의 관심사를 하나도 말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탄생되었고, 어떻게 공생활을 시작하여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무엇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기술해야 하는 경우에만 마리아와 요셉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복음사가의 진의나 성경의 참뜻을 곡해하는 갈라진 형제(많은 프로테스탄트 신도들)들은 마리아와 요셉의 위치를 필요 이상으로 낮추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예수님이 공생활 중 제자들을 가르치셨을 때에 “당신의 어머니는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하는 탄복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루가 11,27-28 참조)

  

또 다른 경우, 예수님께서 전교하시던 어느 날, 성모님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뵈려고 왔을 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시며 내 형제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이며 자매이며 어머니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오 12,45-50 : 마르코 3,31-35 : 루가 8,19-21)

  

더더욱 오늘의 복음 말씀(루가 2,41-51)은 예수의 소년 시절의 행위를 말해 주고 있는데, 예수를 잃고서 걱정하던 중 3일만에 다시 찾아 반가와 하고, 또 꾸중하는 부모님께 \’어찌해서 나를 찾았습니까?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겠습니까?\”하며 대답하는, 어찌 보면 무례한 자녀의 태도에 우리는 약간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에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성모님이나 요셉 성인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논증을 삼는다면, 그것은 상식을 벗어난 사람의 억지이며, 복음기자들의 뜻과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유치한 생각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위의 모든 성경 말씀은 인간적, 혈연적, 가정적인 관계보다 영신적 신앙의 관계가 더 고귀하고 차원이 높다는 것을 일러 주기 위할 따름입니다. 부모님에 매여 있고, 친척에 매여 있고, 가정에 매여 있는 그 예수였다면 그는 마리아의 예수, 나자렛 한 가정의 예수일 뿐이지, \’나\’의 예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예수,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예수\’는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탄생한 예수라고 해서, 그를 꼭 이스라엘인이라고만 주장하려는 그런 식의 곁과도 나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오늘 축일의 참뜻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정의 행복을, 축복을 우리에게 말해 주기 위함입니다. 가정도 신앙도 모두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 둘은 항상 상반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상반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어느 것을 택하느냐하는 문제에 \’하느님의 뜻\’을 우위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 도망나간 예수를 생각할 때 요셉과 마리아는 안타까왔고, 또는 때려 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예수님편으로 볼 때 부모님들이 걱정하시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떠나 속을 썩여야 했던 그 예수님이, 오늘 축일의 주인공입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가치관이 있었고 더 높은 세계가 있었기에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가치관을 인정하고 그래서 성당에 모여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더 큰 뜻을 품고 자질구레한 것을 잠깐 뒤에 두고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번 해의 끝 주일입니다. 그리고 곧 새해가 옵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차이, 그것은 6월 30일과 7월 1일의 시간 차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12월 31일은 나를 엄습합니다.

묵은 때를 벗으라는 속으로부터의 외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하라는 1월 1일의 명령이 있습니다. 그래서 달력을 바꾸면서 희망을 갖고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줄달음치며 또 주일이면 꼭꼭 우리의 발걸음이 성당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계의 반복과는 다른 의식적인 나의 행위이기에 값어치 있고, 그것이 곧 신앙입니다.

  반복하고 늘 새로 시작하는 자세가, 기도하는 사람의 몸가짐이기 때문입니다.















21.                성가정 축일 (가해)   가정을 존경하자  

                                                           강길웅 신부




벌써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의미깊은 이 날에 교회 전례는 가정에 대해서 묵상하도록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 탄 다음 주일이 항상 성가정 축일입니다.



모든 크리스천 가정은 성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요셉의 가정처럼 예수님이 그 중심이 되고, 요셉과 같은 아버지, 마리아와 같은 어머니의 성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이야말로 하느님의 모습과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오는 축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과 은혜가 되며, 반대로 부모를 무시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행과 저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모는 하느님의 분신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예절 중의 예절이며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르치고 또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니 부끄럽고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이 인간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일입니다.



어떤 자매는 배움이 많아서 똑똑하고 또 신앙 안에서도 열심한 데, 그런데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있습니다. 시내 변두리에 방을 하나 얻어서 거기서 지내게 합니다. 남편이 당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도 부인이 반대하니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매가 남보다 더 배우고 더 열심히 봉사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위선에 불과합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 주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붙이고 싶습니다. 즉 모든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받는 남편이 되며 또 그 자녀들이 존경받는 사람이 됩니다. 아내를 무시하면 남편이 무시받고 또 무시받는 아버지가 됩니다.



특히 부모는 자기의 어린 자녀들까지도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존경받는 가정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 교육도 책임감 있게 지도해야 합니다. 어떤 부모는 무슨 학원 보내기 위해서 자녀를 교리나 미사에 빠지게 하는데, 참으로 큰일낼 부모들입니다. 하느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가 하느님을 모독해서는 안됩니다.



부모가 하느님을 참되게 공경하면 자녀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다 그렇게 보고 들으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하느님을 무시하면 그 자녀들도 자기 부모를 무시합니다. 역시 그렇게 보고 들으면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자녀들 앞에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를 잘 분별해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믿는 것만큼 믿음의 은혜를 받고 존경하는 것만큼 존경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도 받습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로써 요셉과 마리아를 들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과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존경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찮은 인간을 존경하신다는 말이 어폐가 있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하느님의 법대로 살려고 노력하면, 하느님이 친히 그 인생을 존경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말을 잘 들으며 예절이 바르면 선생이나 부모도 그를 존경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믿는 가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둘이 나 셋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당신 친히 그곳에 머무시겠다고 하셨는데 함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엔 주님이 머무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거기 안 계신다면 그 가정은 이를테면 지옥입니다.



지옥 같은 세상을 사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남편이 원수고 아내 가 원수며 자식이 원수고 부모가 원수입니다. 이런 가정은 남편이 있어도 아내가 외롭고 아내가 있어도 남편이 외롭습니다. 자녀가 있어도 부모가 외로우며 부모가 계셔도 자녀들이 외롭습니다. 우리가 바보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정말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특히 우리들 가정 안에 머무시려고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이 영광을 받고 싶어하시며 또 그 자리를 빌어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신 성 가정을 이루도록 합시다. \’가화만사성\’이라 했습니다. 성가정을 이룰 때 내년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뜻대로 은혜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22.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 소년기로써 신약성서 가운데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예수 시대에 열세 살 이상되는 남자들은 과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렇게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했습니다.

 예수는 열두 살 난 소년이었으므로 순례할 의무가 없었지만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 소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았으나 예수님의 부모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하룻길을 갔다가 뒤늦게야 알고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서 사흘만에 성전에서 잃었던 아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소년 예수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율법 교사들과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보고  \”얘야, 우리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 보아라,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소년 예수는 \”왜 찾으셨어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어요?\” 하면서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에 수록된 예수님의 맨 첫 번 말씀이요 소년 예수께서 발설하신 단 한가지 말씀입니다. 소년 예수께서는 세상의 아버지(48절의 \’네 아버지\’)보다 하느님 아버지(49절의 \’내 아버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머니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습니다.



소년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실려 있는 예수 소년기는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소년 시절부터 놀랄만큼 지혜로우시고 탁월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지혜를 소유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소년 예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율법 교사들과 담론을 벌이면서 그 총명함과 탁월함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46.47절).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소년 예수는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기 27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가려고 사람을 들여보내 아들에게 면회왔다고 전했습니다. 예수는 오랜만에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이런 이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33-35). 이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삶으로써 맺어지는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의 섭리에 의탁하는 삶을 통해서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신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본받아 우리 그리스도인 가정 모두가 성가정이 되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든 어머니들은 뜻밖의 일을 만날 때마다 놀라면서도 동시에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간 사려 깊은 성모님의 처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부모의 소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그들을 이해하고 끝까지 신뢰하는 모습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영신적 가정 관계를 가꾸어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들의 몸과 마음이 소년 예수처럼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시오. …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기죽지 않도록 들볶지 마시오\”(골로 3,20.21).












23.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아버지의 집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은 예수 소년기로써 신약성서 가운데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예수 시대에 열세 살 이상되는 남자들은 과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렇게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했습니다. 예수는 열두 살 난 소년이었으므로 순례할 의무가 없었지만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 소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남았으나 예수님의 부모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하룻길을 갔다가 뒤늦게야 알고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서 사흘만에 성전에서 잃었던 아들을 찾았던 것입니다.



소년 예수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면서 율법 교사들과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성전에서 소년 예수를 보고 “얘야, 우리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 보아라,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소년 예수는 “왜 찾으셨어요? 제가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어요?” 하면서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에 수록된 예수님의 맨 첫 번 말씀이요 소년 예수께서 발설하신 단 한가지 말씀입니다. 소년 예수께서는 세상의 아버지(48절의 ‘네 아버지’)보다 하느님 아버지(49절의 ‘내 아버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어머니만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새겨 두었습니다. 소년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2. 우리의 이해



  오직 루가 복음서에만 실려 있는 예수 소년기는 예수님에 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소년 시절부터 놀랄만큼 지혜로우시고 탁월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지혜를 소유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소년 예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율법 교사들과 담론을 벌이면서 그 총명함과 탁월함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46.47절).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네 아버지와 내가 애타게 너를 찾았단다” 하자 소년 예수는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서기 27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가려고 사람을 들여보내 아들에게 면회왔다고 전했습니다. 예수는 오랜만에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뜻밖의 반응을 보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까?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이런 이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33-35). 이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삶으로써 맺어지는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의 섭리에 의탁하는 삶을 통해서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주신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본받아 우리 그리스도인 가정 모두가 성가정이 되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 가정의 모든 어머니들은 뜻밖의 일을 만날 때마다 놀라면서도 동시에 그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간 사려 깊은 성모님의 처신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부모의 소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성모님처럼 그들을 이해하고 끝까지 신뢰하는 모습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영신적 가정 관계를 가꾸어 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들의 몸과 마음이 소년 예수처럼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녀 여러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시오. … 아버지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기죽지 않도록 들볶지 마시오”(골로 3,20.21).     ———서울대교구 홍보실

 24.                  성가정 축일 (루가 2,41-52) (다)  마음 항아리



미국의 유명한 경영대학원에서 어떤 신부님이 시간 쓰는 법에 대해 특별 강연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항아리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주먹만한 돌들을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 위까지 돌이 차자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네”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이 이번엔 자갈을 항아리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를 흔들어가며 채우니 자갈이 계속 들어갔습니다. 항아리 위까지 차자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이제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다시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신부님이 이번에는 모래를 붓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 위까지 차자 다시 물었습니다. “이제는 가득 찼지요?” “네” 학생들이 답했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물을 항아리에 가득 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부님은 물었습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학생 중 하나가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스케줄이 꽉 찼다 해도, 언제든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닙니다.” 신부님이 대답했습니다. “자갈이나 모래를 먼저 집어 넣으면 큰돌은 결코 집어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삶 속의 큰돌, 즉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여러분의 마음의 항아리에 집어 넣으십시오.”

  

우리들 삶의 큰돌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가족이 우리의 큰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항아리에 그 큰돌을 먼저 넣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위해 시간을 쓰고, 남에게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오히려 가족에게는 시간을 아끼고 함부로 무시하기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리라고 강요합니다. 자갈, 모래들을 먼저 집어 넣다가 항아리가 가득 차버려 큰돌은 넣지 못할 텐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가장 큰돌, 우리 마음의 항아리에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해야 할 큰돌은 주님임을 우리는 내심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을 마음 속에 먼저 담는 일을 잊기 일쑤입니다. 



  요새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는 삼행시 짓는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세 자로 된 말의 머릿자를 따서 그 글자로 시작하는 문장을 짓는 거지요.  그런데 지난번 우리 학생 하나가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FAMILY로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라는 문장을 지었습니다. 참으로 멋지지요?



  가족에게 ‘사랑합니다’ 라고 말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납니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 주님도 걸핏하면 마음 항아리에서 꺼내 놓았었지요.  소중한 것을 먼저 기억하는 지혜로 사랑 고백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합니다.        

                                             장영희 마리아 /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

이 글은 카테고리: logos, 다해 성탄시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