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1.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공통) 세 박사들의 조배
함세웅 신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전통적인 축일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부활절뿐이었습니다. 다만 4세기에 와서 \’성탄\’과 \’공현 축일\’을 기념하게 되었으니, 그 이유는 당시 외교 사상의 중심이었던 태양신을 위하는 날이 로마에서는 12월 25일이었고, 이집트에서는 1월 6일이었기 때문에, 이 외교 사상의 축일을 그리스도 신자의 축일로 흡수하면서 그 모든 장엄성까지 그리스도교화 함에 따른, 이 축일의 기원이 있습니다.
성탄 축일 – 이 축일의 공식적인 기록은 354년에 비로소 처음 발견되었지만 당시의 기록 문헌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330년께로부터 이 축일을 지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티칸 대성전의 중앙에 자리 잡았던 초대 성당의 위치라든지, 또 태양신을 위하던 날짜를 택한 또 다른 신학적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는 \’정의의 태양\’ (말라키아 4,2)이라는 의미와 또 \’세상을 밝히는 이 빛\’ (요한 8,12)임을 교회가 자각하고 이 축일을 설정한 것이었습니다.
공현 축일 – 이 축일은 태양신을 위하던 이집트와 아랍 지방에서부터 연유되었습니다. 그 동기와 신학적 의미는 성탄과 같습니다. 공현(Epiphania)의 뜻은 \’나타나다\’, \’열어 보이다\’의 뜻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고, 또 탄생하신 그리스도께서 아기이지만, 이제 모든 사람에게 구세주로서 인정받고 공적으로 출현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로 오늘의 전례는 동방에서부터 삼왕이 아기 예수께 조배왔다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탄 축일보다 공현 축일은, 그 의미에 있어서 더욱 깊고 연대로 보아도 훨씬 먼저 시작된 축일입니다.
\’축일의 의미\’ – 바울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다음의 내용을 우리는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디도 2,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 줍니다\”(디도 2, 13)
이 공현 축일의 뜻은 바로 \’나타남\’에 있습니다. 이 축일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한 사건, 즉 \’나타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축일이기도하지만, 더욱더 미래에 일어날 일, 즉 \’나타나실 예수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해 주는 축일이기도 합니다. 기다리는 신앙인,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기본적 자세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축일의 신비는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축일은 지나가는 한 축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활 자체입니다. 우리 모두 저마다 그리스도를 실현하고 또 나타내
야 할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성소(聖召)입니 다.
우리는 잠시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며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분인지를. 그리스도께의 공생활 중 학자들이나 바리사이 파 사람들은 예수는 보았지만 \’구세주 예수\’는 보지 못했습니다. 삼왕들은 멀리서 별빛을 보고 찾아왔건만 주위의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를, 예수를 제일 많이 외치는 우리 신자들은 참다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멀리서 진리의 빛만을 바라보고 사는 착한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고는 또 몰래 자기의 갈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삼왕은 유태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고, 알았고. 경배한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축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1년 365일 매일이 \’나타나신 예수\’와 \’나타나실 예수\’의 재림을 기념하는 축일이 되어야 함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2.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무릉도원을 찾아서
(허성학 신부)
주님 공현으로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추우면 추울수록 우리 몸을 훈훈하게 녹여 줄 난로가 필요해지고 따뜻한 봄날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어둡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일수록 모든 사람이 서로 믿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밝은 세상을 찾게 되고 더욱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상적인 세상을 흔히 ‘무릉도원’이라고 합니다. 무릉도원이란 말은 옛날 중국의 도 연맹이라는 사람이 쓴 문학작품 속에 나오는 한 마을의 이름입니다. 중국 호남성의 도원이라는 곳에서 한 어부가 길을 잃고 산골짜기의 시냇물을 따라 걷고 있었는데, 시냇물에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부는 어디서 복숭아꽃이 피어서 이렇게 떠내려오는가 싶어 시냇물이 흘러오는 곳을 따라 어느 깊숙한 숲 속의 동굴 앞에까지 갔습니다. 그 동굴을 따라 들어가니까 그 안의 세계는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었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곳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따라 갈 수 없는 훌륭한 사회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진나라때 난리를 피해 그 곳에 왔다는 소박한 주민들의 따뜻한 접대를 받고 며칠을 묵은 후 그 어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어부의 고을 군수는 어부가 표시해 놓은 길을 따라 그 마을을 찾았으나 이미 그 마을은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무릉도원이란 물론 아주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참된 선과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둡고 인심이 각박해지는 사회가 될수록 이러한 평화로운 세상, 밝고 즐거운 세상의 이야기가 우리의 구미를 돋구어 줍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둔 밤이 더 깊어지면 밝은 새벽이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믿고 화목하며, 사랑으로 가득찬 사회, 즐겁고 의미있는 무릉도원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구세주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무릉도원은 이제 우리가 생각만으로 그리워하는 꿈같은 세계나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을 보고 구세주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박사들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등산가처럼 그들의 투지와 용맹을 떨치고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명예나 권력을 위해서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그들은 보물을 찾고 싶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곳을 탐색하는 탐험가가 되기 위해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이 세상에 평화를 주려 오신 구세주를 만나 뵙고, 그분께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자기 나라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먼 여행길의 고생도 무릅쓰며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한 고을의 보잘 것 없는 아기로 오신 구세주를 유대인들보다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베들레헴의 초라한 작은 집에서 어린 아기를 찾아보고는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한 다음 그들이 가져온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계 만방의 민족들을 대표하는 그들에게서 왕이요 사제이며 구원자로서의 예물을 받으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세계 만방에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또한 유대의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님이 유대 민족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세상 만민들을 위한 구세주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공현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의 탄생을 공적으로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바라는 하느님의 나라인 무릉도원은 우리 만민들에게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복숭아 꽃잎을 따라 올라간 어부처럼 그들은 별을 따라 머나먼 여행 길의 고생 끝에 드디어 무릉도원에 도착한 것입니다. 무릉도원에 갔다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고을 군수는 무릉도원을 찾지 못했지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무릉도원의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중국에 사는 사람만이 무릉도원을 찾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님이 만민의 구세주이듯이 무릉도원 역시 우리 만민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어느 곳에든지 무릉도원을 찾을 수 있고, 누구든지 무릉도원의 주인공을 찾아뵈올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남은 과제는 별빛을 보고 찾아간 동방 박사들처럼 그분이 계신 곳을 비춰주는 별을 찾는 것입니다. 그 별은 이미 하늘 높이 솟아 지금도 우리를 향해 어두운 이 세상을 환히 비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을 들어 이 별빛을 찾아봅시다. 그리고 별이 비춰주는 무릉도원을 향해 박사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멀고도 긴 인생길을 걸어갑시다.
3.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2,1-12 소중한 것을 바치자
(배문한 신부)
산넘고 물건너 낯설은 이역만리를 오로지 아기 예수님을 만나려는 일편단심으로 동방박사들은 온갖 괴로움을 기쁘게 이겨나갔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 본 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마태 2,11). 그리고 그들의 가장 값진 보물을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똑같이 가난한 살림살이지만 어떤 분은 돈 10,000원을 바치고도 부족한 듯이 기뻐하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10,000원을 내면서도 못이긴 듯이 아까운 마음으로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동방박사들이 그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더러 이역만리를 동행하자고 했다면 거절당했을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 아닙니까? 설사 체면을 못 이겨 누가 따라나섰다 하더라도 그 여행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더구나 선물을 바치라고 했다면 노발대발했을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께 인색한 것은 첫째 그분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인색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어린 아들의 과자를 빼앗아 먹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꼬마 녀석이 푼돈을 아껴 아버지가 좋아하는 담배를 사드렸다고 합시다. 그 아버지는 기쁜 나머지 몇 배로 갚아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도 우리 것을 빼앗는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바친 것의 몇 백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바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를 바치지 않고 성인성녀가 된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 많이 바쳤기에 너무도 많은 것을 공짜로 얻은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느님께 인색한 이유는 사랑의 부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무거운 십자가와 온갖 모욕과 쓰라림을 불평 없이 감수하셨습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자녀를 사랑하는 어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제공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왕실을 버리고 자기 생명마저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인색한 것은 하느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돼지 앞에 진주는 짓밟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더 잘 알아 그분을 찾아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합시다. 비록 우리의 가는 길이 태산 준령일지라도…그리고 동방박사들처럼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물로 바칠 것을 잊지 맙시다. 그것이 나의 생명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이 나의 죄나 악습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이 나의 재산이나 지위라도 좋습니다. 하다못해 그것이 단돈 1,000원이라도 좋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바칩시다. 아까와하지 말고 바칩시다. 아까와하는 것은 신앙의 부족이요, 사랑의 부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적게 바치는 사람은 적게 받고 많이 바치는 사람은 많이 받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요, 죽는 것이 사는 것이란 이 역설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동방박사들처럼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갑시다.
4.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3,13-17 예수 아기의 공현이 뜻하는 것
(김정진 신부)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희망과 포부에 찬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과 평화가 풍성히 깃들기를 기원하여 마지않습니다. 올해에도 부디 건강하시고 또한 복 많이 받으시고 여러분이 뜻하는 바 소원이 모두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즐겁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기쁨과 희망이 넘친 기분으로 신앙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신 하느님께서 공식으로 인간 앞에 드러내 보이신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시어 사람의 아들로 탄생하시고 나서 스스로 당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면 누구 하나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공경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또한 지극한 사랑으로 오늘 또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별을 따라 만백성을 대표하여 아기 예수를 찾아뵙고 조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뜻 깊고 경사스러운 날에 우리는 모두 박사들을 본받아 예수께 나아와 경배하며 최고의 경의를 표시해야 되겠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공공연히 당신을 만민에게 알림으로써 당신이 세상에 내림을 결코 어떤 특수한 민족, 간택된 이스라엘인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외교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민족을 위하여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음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더구나 비천하고 가난하게 탄생하심으로써 저버림 받은 사람,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은 사람, 천대받는 사람,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위로해 주시고 같이 벗하며 지내시러 오신 것입니다.
박사들이 머나먼 곳에서 오면서 도중의 위험과 험난함도 상관치 않고 급기야 아기 예수님을 방문하고서는 하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것도 이 점이 아니겠습니까? 왕 중의 왕이신 천상 아기가 우리의 비천한 인간이 되셨다는 점이 그들의 마음을 크게 감격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두뇌로서는 언뜻 납득할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이며 사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천문학의 박사라고 알려진 그네들은 이상한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을 방문하고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메시아를 야곱 성조의 별이라 불렀습니다. 박사들이 메시아 구세주를 찾아뵙는데 별빛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별의 인도로 하느님을 찾게 된 것을 우리는 주시해야 합니다. 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바로 우리의 신앙의 별이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별노릇을 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인도해 준 모든 은인들에게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각자는 어느 신앙의 별을 따랐기에 신자가 되었습니다. 태중 교우라면 어버이의 신앙의 별을 따른 것이고 장성하여 입교한 분이라면 친척이나 친구나 어떤 고마운 분의 신앙의 별의 인도로 하느님의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는 동시에 또한 우리 친척과 이웃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신앙의 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말과 행동으로 찬란하게 광채나는 혜성이 되어 신앙의 별노릇을 반드시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은 2천년 전에 당신을 모든 이들에게 공현 즉 드러내보여 주셨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엄청난 숫자가 이 기쁜 소식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미로에 헤매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중대한 과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또한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어둡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신앙의 별이 초생달처럼 너무나 빛을 발하지 목하고 잃고 있는 실정입니다. 도처에 찬란한 별의 광채가 아쉽기만 합니다.
우리 사회는 황금 만능주의, 배금사상, 오락 숭배 그리고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윤리 도덕률의 쇠퇴, 신앙심의 후퇴 내지 무기력 등으로 사회는 점차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예수님의 공현은 다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공현이 재연되도록 우리는 땀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가까운 가족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고 공경하게 하고 미신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교회로 인도하는 일에 우리는 그다지도 냉정하고 미지근합니까? 오늘 예수님의 공현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이 점에 관하여 반성을 해야 되겠습니다.
끝으로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방문할 적에 빈 손으로 간 것이 아니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 세 가지 예물을 바쳤습니다. 그런 값진 예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 신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선물, 즉 새해에는 하느님의 계명을 더욱 성실히 준수하겠다는 약속과 미신자들에게 신앙의 별의 역할을 하겠다는 결심 같은 우리의 최고의 마음의 선물은 얼마든지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5. 주님 공현 대축일 / 마태 3,13-17 신앙의 여행
(황용식 신부)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려움이 많습니다.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신앙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때,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뵈옵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공현 대축일. ‘공현’이란 ‘εριπανια’라는 희랍말에서 번역한 것으로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즉 오늘은 아기 예수님이 공적으로 만방에 나타내신 날입니다. 옛날엔 상왕내조 축일이라 하여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유다 배들레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쪽 나라의 세 사람의 박사들이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 별을 따라 수륙 수 천리를 지나 아기 예수님을 찾아 뵙고 경배한 날입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성탄축일로 지내기도 합니다.
서양에서도 선물교환 같은 것이 오늘 행해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오늘 버스비를, 특히 외국 사람에게는 받지 않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늘 제2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들도 유다인처럼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되어 한 몸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이며, 또 복음에 나오는 동쪽 나라에서 온 박사들도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동쪽 나라의 박사 세 사람이 별을 따라서 예루살렘에까지 산 넘고 물을 건너 길을 묻고 찾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헤로데에게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헤로데는 당황하여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조사를 시켰더니 유다 베들레헴이라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그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그 아기를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왕궁에서 나온 박사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그 때 그들의 나라에서 본 그 별이 길을 인도했습니다. 앞서 가면서 길을 인도하던 그 별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그 별이 멈춘 곳에 가보니 아기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있었습니다. 박사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그리고 그들이 자기 나라에서 갖고 온 선물들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아기 예수님을 뵙기 위하여 멀리 동쪽 나라에서 베들레헴까지의 박사들의 멀고 먼 여행은 신앙의 여행이었습니다. 가정과 모든 것을 버리고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다만 이상하게 빛나는 별빛만을 따라 아기 예수님을 찾아 떠난 것은 신앙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은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본보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뵙기 위한 긴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의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그 길의 종착역은 우리의 구원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에게 당신께 도달하는 길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찾아야하고 그 길을 따라 가야만 구원되는 것입니다.
동쪽 나라에서 온 박사들이 별빛 하나만을 보고 낯선 곳을 지나 아기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까지 오기까지에는 고생도 많았을 것이고, 실망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 왔기 때문에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님을 뵙는 영광과 기쁨을 얻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은 어떤 의미에서 별빛을 따라 하느님께로 가는 생활입니다. 구름에 가려 별빛이 희미할 때도 있고 그 별빛을 따라 살자면 어려움도 많고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실망할 때도 많겠지만, 실망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우리가 한번 얻은 신앙의 길을 꾸준히 따라갈 때 오늘 복음의 박사들처럼 살아 계신 우리의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뵈옵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새해 첫 주일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있는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박사들처럼, 우리에게 나타난 신앙의 별을 따라, 아무리 우리의 길이 험난하고 어둡고 괴롭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고 충실히 걸어갈 것을 하느님께 약속드립시다. 그리고 이 험난한 인생항로의 종착역에는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생항로의 ‘빛의 역할’, 즉 별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맙시다.
8. 주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공통) 주님과의 만남
고형석 신부
우리의 일상사 가운데서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첫 만남을 특별히 기억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동방박사에게 처음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뵙고 기뻐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찾아 그 먼길을 와서 예수님을 경배했지만 악한 마음을 먹은 헤로데는 예수님을 뵙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본다는 것은 희망의 징표이자 사랑의 시작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반면에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낀 헤로데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가서 그 아기를 잘 찾아보시오. 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 찾거든 알려주시오”(마태 2,8)라고 부탁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날 때에 자신이 위선과 허위로 가득차 있다면 타인의 진면목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진솔하게 마음을 열 때 상대방에 대한 사랑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상대방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잡고 계신 주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 마음속에 먼저 와 계신 주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실직당한 아버지를 걱정하며 자신이 다니던 학원을 포기한 어린이의 마음에서, 노숙자를 위해 따뜻한 밥을 건네는 이들의 손길에서, 자신의 신장을 남편에게 떼어주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내의 눈길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주님은 모습을 드러내시고, 빛이신 주님은 당신을 만난 이들을 통해 오늘도 어둠을 밝히고 계십니다. 정채봉 님이 지으신 책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에 ‘만남’이란 글이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 져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여기서 나는 주님과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9. 주님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공통)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김성배 신부
눈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마음의 상태는 눈빛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마음이 순결하면 눈빛도 순결하고 마음이 불결하면 눈빛도 불결하다. 마음이 가난하면 눈빛도 가난하고, 마음이 탐욕스러우면 눈빛도 탐욕스럽다. 마음이 겸손하면 눈빛도 겸손하고, 마음이 오만하면 눈빛도 오만하다. 마음이 온유하면 눈빛도 온유하고, 마음이 냉혹하면 눈빛도 냉혹하다.
그러기에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악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선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선한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악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악한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게된다. 솔직한 사람은 남도 솔직하다고 생각하고,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남도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남도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교만한 사람은 남도 교만하다고 생각한다. 사심이 없는 사람은 남도 사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은 남도 탐욕스럽다고 생각한다. 순결한 사람은 남도 순결하다고 생각하고, 불결한 사람은 남도 불결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 마음에 비추어서 남을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를 잘 알아본다.
겸손한 사람이 겸손하기 때문에 참으로 위대한 사람을 알아보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마음을 지녔기에 참으로 부유한 사람을 알아본다. 순결한 사람이 순결하기 때문에 참으로 고결한 사람을 알아 보고, 거룩한 사람이 거룩하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을 알아본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한없이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지극히 높으시고 무한히 부유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비우시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철저하고 완전하게 당신을 낮추고 비우기를 원하셨기에, 탄생의 장소도 마구간을 선택하셨다. 하느님에서 사람이 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가정도 가난한 가정이었고, 하느님에서 선택하신 신분도「목수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이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육체를 취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어머니는 지극히1 순결한 동정녀인 성모님이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극히 높은 영광을 지극히 비천하게 낮춘, 겸손 속에 담으셨고, 당신의 무한한 부유함을 완전한 가난 속에 담으셨으며, 당신의 완전한 거룩함을 완전한 순결 속에 담으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당신을 알아보고 맞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명과 사랑과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가난하고 비천하고 순결한 모습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어 알리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결한 사람들뿐이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고 경배를 드렸던 목동들이 그랬고 동방 박사들이 그랬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하고 탐욕스럽고 불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모습을 감추시고,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예수님을 찾아뵙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경배한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하늘에 나타난 신비스러운 별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셨음을 알리는 징표였다. 동방 박사들은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기에 은총의 도움으로 그 별이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징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게된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을 뵙겠다는 열망만으로 마음이 가득 찬다. 그래서 고국과 고향과 가족과 자기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려 두고,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향해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
길고 피로한 여행 끝에 이들이 만난 것은, 초라한 시골 베들레헴의 가난하고 비천한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참으로 겸손하고 순결하고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들이었기에, 그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어 알리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을 뵙는 기쁨과 감격에 떨며, 무한한 경의를 가지고 예수님께 합당한 예물을 드리며 경배한다.
왕을 상징하는 황금과 하느님을 상징하는 유향과, 구속을 위한 고통을 상징하는 몰약이 그 것이다.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지고의 기쁨이 된다. 동방 박사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기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인생의 여정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다. 하느님과 만나는 지고의 기쁨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를 버리고 떠날 줄 알아야 한다.
피조물에 대한 일체의 무질서한 집착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난다. 그리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랑이라는 황금과, 기도의 향과 희생이라는 몰약을 예물로 준비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 일체를 버리고 떠날 수 있다.
12. 주의 공현 대축일 새해를 축복으로 걸어가자
강길웅 신부
새해 첫 주일입니다. 올해도 여러분 모두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복 많이 받으시고 가정에는 건강과 평화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복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안 믿는 이들이야 잘먹고 잘사는 것이 복이요, 몸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이 복이지만, 믿는 이들에겐 복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편협된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그 안에 감추어 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복이요, 외롭고 눈물나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복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은총 자체이셨고 복 자체이셨습니다. 모든 행복이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가 받은 복이 무엇이냐. 그것은 겨우 마구 간에서 태어나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성장해서는 위험스럽고도 외로운 전도생활을 하다가 마침내는 십자가형에 처형된 고달픈 생애를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여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 아기를 낳으심으로써 은총과 축복을 낳아 주신 어머니였지만 그러나 그 어머니 역시 눈물과 쓰라림으로 얼룩졌던 한 많고 외로운 생애를 살 아야 했습니다. 그래 그런지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보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며 억울하게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복이라는 개념을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이해하여 올 한 해가 비록 힘들고 어렵다 해도 하느님 은총의 복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복은 세상 모든 것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탄생하신 예수님을 가슴 안에 모시고 있다면 바라보는 세상이 온통 축복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세상 자체가 그분의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주의 공현 대축일입니다. 전에는 \’삼왕내조\’축일이다 해서, 동방에서 세 왕이 찾아와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렸다는 사실을 기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박사들이 인사드렸다는 사실보다는 주님께서 이방인인 그들을 불러 당신 자신을 손수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묘한 것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은 유대인인데 그 메시아가 찾아 와서 실제로 만난 백성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은 오히려 메시아를 배척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판단 과 지혜를 초월합니다. 사실, 인간은 자기 재주로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주 숨겨진 상태에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몰라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상식과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며 그리고 세속 의 조건과 그 장애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 신 자들은 조그마한 인간적인 조건과 장애에도 믿음이 자주 넘어지는 경우를 봅니다. 조금만 시련이 와도 하느님을 멀리하며 무슨 핑계(?)만 생기면 신앙을 가차없이 내던집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붙들고 매달려야 합니다.
어떤 자매가 남편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비자교리에 나왔습니다. 특히 시어머니가 열렬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부딪치는 갈등과 쏟아지는 박해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도 이 자매는 기를 쓰며 나오는데 마침 시아버지가 암에 걸려 고생할 때 아주 헌신적으로 간호해 드립니다. 바로 이걸 보고 시어머니가 천주교로 개종을 했으며 남편도 입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박사들은 새 왕을 만나야겠다는 신념으로 멀고도 먼 위험 한 길을 걸어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무시했던 보잘것없는 한 아기를 만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그들이 평생 갈구했던 왕이요 주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는 나그네 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쉽게 일찍 주님을 만나 한 평생 축복의 길을 은혜롭게 걸어가지만 또 누구는 평생 걸어도 그분의 흔적조차 만나지 못하고 고달픈 길을 외롭게 걸어갑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지혜를 고집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새해를 맞는다고 누구나 다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새해가 백번 돌아온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새 해가 뜨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날이 자신을 반성하며 믿음을 순수하게 닦고 그리고 항상 노력한다면 그는 또 나날 이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별이요 또 우리가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 십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안에 환하게 떠 있는 그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은혜로써 새해를 걸어가도록 합시다.
13.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공통) 세 박사의 조배
주님 공현절은 성탄절 후 12일째인 1월 6일에 시작됩니다. 따라서 공현 대축일은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게 됩니다. 공현절은 아기 예수님이 전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점성가들로 불리는 이방인들이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예물을 바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1. 동방 점성가의 예방 이야기
동방 점성가들은 새로 탄생한 유다인 왕께 경배드리려고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옵니다. 이처럼 아기 예수께 경배하려는 이방인과 달리 유다인들은 자기네 왕을 맞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대제관들과 율사들을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탄생할 장소를 문의하는데, 그들은 성서의 예언을 근거로(미가 5,1) 베들레헴을 꼽았습니다.
동방 점성가들은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아기 예수께 “엎드려 절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이 세 예물은 근동의 값비싼 물건으로서 왕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여기서 점성가는 원문에 의하면 ‘마고스’입니다. 마고스는 점장이란 말인데 문맥으로 보아 별을 보고 점을 친 까닭에 점성가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동방에서 찾아온 점성가들의 신분이나 숫자나 이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기 500년경에 이르러 서구 그리스도인들은 점성가들을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오늘 복음의 세 가지 예물에 근거해서 임금 숫자를 셋으로 한정합니다. 그리고 세 임금의 이름을 지어 발타사르, 멜키오르, 가스파르라 했습니다. 이는 후대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일 뿐, 점성가들의 신원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힐 수 없습니다.
2. 우리의 이해 :
동방 점성가들은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로서 하느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사람들입니다. 에페소서 2장12절에 의하면 이방인은 그리스도와 무관하고 이스라엘 시민권에서 제외되어 약속의 계약과는 상관도 없으며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이방인들이 메시아 탄생에 대한 징조를 알아보고 그분을 찾아 경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가지고 있는 유다인들도, 성서학자들도 그리고 시대의 징조를 식별하고 예언을 해석하는 대학자들도 메시아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직 나라 안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목동들과 나라 밖의 이방인 점성가들만이 메시아 출현의 징조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제2독서 에페 3장6절이 전하듯이 이방인들도 하느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방 점성가들의 예방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느님의 백성일 수 없고 오직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참 백성이 됨을 선언하는 사건입니다. 즉 바야흐로 구원의 보편성이 시작되었다는 장엄한 선언인 것입니다. 사무처 홍보실
14. 공현대축일 아기 예수에게 엎드려 경배한 동방 박사들
1. 복음 이야기(마태 2,1-12)
오늘 복음에 의하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잘것없는 고을입니다. 다만 역사적으로 유다 민족사에서 높이 추앙을 받는 이스라엘 2대 임금 다윗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ꡒ너,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결코 너는 유다의 요지 가운데서 가장 작은 고장이 아니다ꡓ(2,6a)는 미가 예언서 5,1a의 인용입니다 : ꡒ그러나 에브라다 지방 베들레헴아, 너는 비록 유다 부족들 가운데서 보잘 것 없으나 나 대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너에게서 난다.ꡓ 여기서 ꡐ보잘것없다ꡑ는 말은 ꡐ가장 작다ꡑ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 6a절의 뜻인즉, 베들레헴은 과거에는 가장 작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작은 고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민을 다스릴 메시아가 그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처음으로 찾아와 경배한 이들은 동방에서 온 이방인 점성가들입니다. ꡐ점성가ꡑ는 원문에 의하면 ꡐ마고스ꡑ입니다. ꡐ마고스ꡑ는 점장이인데 문맥으로 보아서 별을 보고 점을 친 까닭에 ꡐ점성가ꡑ라 하겠습니다. 이 점성가들의 신분이나 숫자나 이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들은 유다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로서 하느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에페 2,12에 의하면 이방인은 그리스도와 무관하고 이스라엘 시민권에서 제외되어 약속의 계약과는 상관도 없으며 세상에서 희망도 하느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들인 동방 점성가들이 메시아 탄생에 대한 징조를 알아보고 그분을 찾아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2. 우리의 이해
공현 대축일은 아기 예수님이 전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점성가들로 불리는 이방인들이 동방에서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것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공현절은 성탄절 후 12일째인 1월6일에 시작되는데 공현 대축일 주일은 1월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사람들의 사고방식, 기대, 예상, 판단기준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복음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을 낮은 곳의 대명사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정치가도, 학자도, 종교인도 아니고 이방인 동방 점성가들이었습니다.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가지고 있는 유다인들도, 경건한 종교인들도, 성서학자들도 그리고 시대의 징조를 식별하고 예언을 풀이하는 대학자들도 이 메시아의 출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나라 안에서는 죄인 취급을 받는 목자들과 나라 밖에서는 이방인 점성가들만이 메시아 출현의 징조를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이는 에페 3,6이 전하듯이 이방인들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구원의 보편성이 시작되었다는 장엄한 선언인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비록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이 소박하게 살아가지만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고 진실되게 살아가는 드러나지 않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2001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2001년에는 모든 교우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으며 예수님의 복음을 생활 속에서 바로 실천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15.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하느님은 약속을 지켰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출신의 프랑스 작가 S. 베켓의 희곡입니다.
1953년 파리의 소극장에서 초연된 이 연극은 이른바 ‘반연극’(反演劇)의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1969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해질 무렵에 어딘지도 모르는 시골길에서 두 떠돌이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동안 부질없는 대사와 동작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무대 위에서 벌어집니다. 마침내 심부름하는 양치기 소년이 “고도는 내일 온다”고 알려주는데도 이들은 계속 기다리는 것으로 1막이 끝납니다. 다음날인 2막도 거의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관객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결국 연극은 끝나게 됩니다.
작가는 ‘고도’를 밑도 끝도 없이 기다리고 있는 인물을 통해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독특한 수법으로 파헤칩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Godot)가 결국 ‘신’(God)에서 빌려온 이름이며, 따라서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절대자 즉 하느님의 상징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인생은 마치 베켓의 부조리한 연극무대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우스꽝스러운 떠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불확실한 인간에게 있어 ‘예수’는 오기로 약속된 단 한 사람의 인물입니다. 일찍이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그 수많은 인간들 중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예언된 사람은 오직 ‘예수’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의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8)라고 약속하신 이래 하느님은 기회있을 때마다 예언자를 보내시어 그리스도가 오심을 예고하십니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기까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태어나심으로써 구약은 그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입니다.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민족은 유다인뿐이 아닙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동방에서 세상의 지배자이자 주인인 그분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있다”고 타치투스는 기록했으며 중국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왔습니다. “주왕조 차오왕 24년 네 번째 달 제8일에 빛이 남서쪽에서 나타나 왕궁을 비추었다. 그 찬란한 광채에 놀란 왕이 물었다.
현인들은, 이 이상한 조짐은 서방에서 위대한 성인이 나타났음을 알리며 그 성인의 종교가 중국에 전래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스인 데스킬루스는 그리스도 탄생 6세기 전에 「프로메테우스」라는 작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신이 나타나서 그대가 지은 죄의 고통을 대신 받을 때까지 더이상 저주가 끝나기를 기대하지 마라.”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은 그분의 별을 보았습니다. 마치 중국의 왕이 찬란한 광채를 발견하고 놀란 것처럼. 그분의 별을 통해 유다인의 왕이 태어났음을 알고 그 먼길을 찾아와 경배한 동방박사를 통해 하느님은 예수께서 유다인뿐 아니라 전인류에게 예언된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보고 대단히 기뻐한 동방박사처럼 기뻐하고, 엎드려 경배한 동방박사처럼 경배하십시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그 메시아,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알렐루야. 최인호 베드로/작가

우리는 동방에서 임금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1. 말씀읽기: 마태 2,1-12
2. 말씀연구
주님 공현 대축일은 또 하나의 성탄 대축일입니다. 곧 성탄을 대외적으로 공적으로 알리는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이 축일을 지냅니다. 주님께서는 탄생하신 뒤 사람들에게 점차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목동들, 동방의 세 박사들로 시작하여 성전에 머무는 의인 시메온과 한나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시라는 사실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민족 전체에게 차츰차츰 전해지게 됩니다. 마침내 모든 사람이 그분을 경배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상반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동방박사들과,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헤로데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왜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찾고 있는지…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헤로데는 순수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아인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으나 매우 복잡하게 얽힌 상황으로 인해 왕이 되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상당한 업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공포와 독재 정치를 자행하던 이방인(이두메아인)이며 로마의 호의에 의존해 있는 무절제하고 음탕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성전을 웅장하게 재건하였으며 백성들에게 많은 은전을 베풀었습니다. 그렇지만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를 이방인 지배자로 간주하였습니다. 비록 그의 권력은 미약했지만 그는 로마인들이 허락해 준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칭호는 동방 박사들이 찾고 있는 왕과 대조를 이루며 여기서 여러 차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단지 두 부분에서만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십니다. 한 번은 독재자 헤로데와 대조되어 여기서 사용되고 있으며, 또 한 번은 후에 재판을 받으실 때 이교도인 빌라도와(27,11) 자기를 조롱하는 병사들로부터(27,29) 이러한 칭호를 들으신다. 또한 십자가 위에도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27,37)
그의 아버지는 그 당시 유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인들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고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는 그런 상황에서 유다의 행정장관으로 헤로데의 아버지(안티파터)를 임명하였습니다. 또한 카이사르는 안티파터의 두 아들을 하나는(파사엘)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다른 하나(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총독으로 세웠습니다. 헤로데는 반대자들과 강도들을 제거하고 갈릴래아에서 모든 반란을 진압하였습니다. 빈틈없는 외교관이며, 용감한 군인이고 훌륭한 행정가였던 헤로데는 세속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반대자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는 권력 앞에서 자신의 가족들과도 끊임없이 투쟁하였습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도 죽였고, 자살하기 며칠 전에 그의 후계자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까지도 죽여 버린 사람입니다. 로마의 통치하에서 강한 절대 권력을 갈망하던 유대인들 중에는 이런 헤로데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추종한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헤로데를 이방인 지배자로 간주하였습니다. 로마 황제에 비해 헤로데의 권력은 미약했지만 그는 로마인들이 허락해 준 “왕”이란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를 부르는 왕이라는 칭호는 동방 박사들이 찾고 있는 왕과 대조를 이루며 여기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어린아이로 오시는 동안에 왕좌에 앉아 떨고 있는 표면상의 유대인의 왕 즉 헤로데. 참된 왕은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를 따르고 경배하고 있습니까?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동방 박사들은 발타사르, 멜키오르, 가스파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며 아마도 별의 운행과 출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바빌론 사제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별의 기이한 현상 때문에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새로 태어난 아기 왕의 별을 “그분의 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대 동양의 믿음에 따르면, 별들의 움직임과 인간의 운명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틈없는 조사와 연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동방박사들이 보았던 그 별이 어떤 성좌 혹은 어떤 혜성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은 전혀 기적적인 현상이었는지 등등 그 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천 년 전의 별의 위치를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떤 천문학자들은 이 천 년 전에 태양계의 행성들이 일직선으로 섰다는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들과 우주의 하느님께서 보내신 징표라고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현상의 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그러한 현상의 본질적인 목적과 대상입니다.
그분의 별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 유역을 점령할 무렵, 모압 왕 발락은 몹시 당황한 나머지 유프라테스 지장의 용한 점쟁이 발람을 초빙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를 퍼부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민수기22-24장 참조). 그러나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여러 가지 축복을 베풀었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야곱에게 별이 떠오르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나리라”(민수24,17)는 축복입니다.
또한 이방인들이 황금과 유향을 갖고서 예루살렘에 조공을 바치러 오리라는 예언이 있습니다(이사60,6). 그러므로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축복과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볼 때 유대인들의 땅은 아주 작고 정치적으로도 보잘 것 없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은 근동 지방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특사를 보내서 조사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먼 길을 달려왔을까? 이에 대해 복음서는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으며 일어난 사건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동방 박사들의 순례 여행이 예루살렘에서 끝나지 않고 이 도시를 지나 베들레헴에서 끝난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놀라운 계획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에게 정의와 구원을 가져다 줄 빛의 도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도시요(23,37-39), 불순종과 반역의 도시며, 하느님의 뜻을 경멸한 도시입니다.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오는 것은 그 곳에서 죽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그때 가서는 참으로 이 도시로부터 빛이 퍼져 나가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지금까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 될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마치 헤로데를 조롱이나 하듯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는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헤로데는 새로운 적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당황하며(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그 도시는 새로운 형태의 공포 정치에 떨어야 하기에 술렁이고 있습니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 았다.
당황한 헤로데. 당장 달려가서 없애 버리고 싶지만 이교방인이었던 헤로데는 성경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에 그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발톱을 감추고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것처럼 가면을 씁니다.
유다인의 최고의회는 종교적인 동시에 행정적인 의회이며, 7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나지>라고 불리 우는 회장은 현재 재임하고 있는 대사제이며 70인의 의원은 대체로 세 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대사제, 곧 전임 대사제, 및 사제 24반의 으뜸들, 학자, 곧 유다 지식 계급에 속하고, 토라를 연구하고 주해하고 베껴 쓰고 있던 학자들, 원로, 곧 대귀족 가운데서 뽑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카 5,1.3).
에프랏은 이스라엘의 작은 부족에 불과하였지만 이 부족에서 다윗이 나왔습니다(1사무엘 17,12).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약한 것을 선택하셨으며, 때가 찰 때에도 똑같이 약한 것들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뭔가를 알고 싶어 해서 이고, 자기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다른 이들은 모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헤로데는 동방의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냅니다.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위선의 극치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헤로데는 서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은 아닐까요? 헤로데는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이제 찾기만 하면 됩니다. 동방박사들을 이용하여 먼저 메시아를 찾아내고 경배 대신 칼을 들이 밀려고 합니다.
나 또한 마음에 없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의도는 숨기고, 아닌 것처럼 말합니다. 좀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헤로데가 자신들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습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별은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한 지표였습니다. 중요한 곳을 가리키는 별. 나 또한 별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별이 되어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동방의 박사들은 마구간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들은 복됩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구간의 주인은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나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 그 이면에 있는 깊이 있는 가치를 알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황금: 옛날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태양이 최고의 신이었습니다. 태양과 황금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찬연히 빛날 뿐만 아니라 희귀하고 녹슬지도 않고 썩지도 않아 어느 나라에서든지 금은 곧 신의 색으로 여겨졌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황금은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전례 안에서도 중요한 제구는 모두 금으로 도금이 되어 있습니다. 탈출기 25장에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장막 건립에 관한 하느님의 지시가 세세히 적혀 있는데, 결약의 궤와 그 위의 속죄판, 그리고 양편의 케루빔 등이 모두 순금으로 빛났다고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는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온통 맑은 수정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다”(21,18)고 하였습니다. 이 황금은 순수하고 그 자체로 빛을 발하기에 귀한 선물로 사용되고, 귀한 화폐로 사용이 되고, 귀한 보석이 되어 빛을 발합니다. 자고로 임금은 태양신의 후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렇다 보니 황금은 ‘임금의 상징’이 되어 동방박사들은 갓 태어나신 왕 예수 그리스도께 황금의 선물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 황금은 임금의 상징으로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을 선물로 드림으로써 예수님께서 세상의 임금이심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향: 어느 문화권에서나 종교행사에는 향을 쓰는 관행이 있습니다. 향은 여러 가지 나무의 수지로 만들어져 이를 태우면 좋은 향기가 나고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향을 피운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유향처럼 감미로운 향기를 뿜고 백합처럼 꽃피어 향내를 풍기어라. 찬미의 노래로 주님을 찬송하고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여라”(집회 39,14). 향의 연기가 위로 피어오르듯 우리들의 기도도 하느님 앞으로 올라갑니다. 동방박사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께 기도와 찬미를 바치는 마음으로 유향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몰약: 몰약은 향기와 쓴맛이 있어 옛날부터 향료 또는 의약으로도 쓰이고 아울러 시체의 방부제로도 쓰여 왔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몰약을 주로 의약으로 썼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왕에게 부어주는 기름에 몰약을 넣었습니다.” 너는 제일 좋은 향료를 이렇게 구해 들여라. 나무에서 나와 엉긴 몰약을 오백세겔,— 이런 것들을 향 제조공이 하듯이 잘 섞어서 성별하는 기름을 만들어라. 이것이 성별하는 기름이.”(30,23-25)하고 탈출기에 규정하였습니다.
몰약은 ‘메시아와 왕의 특별한 향기’로 통했습니다. 몰약은 또한 시체에도 쓰였습니다.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 근 쯤 가지고 왔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요한19,39-40)고 하였습니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하느님께서는 헤로데의 교만한 생각을 꺾어 버리십니다. 가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데 상대방은 그런 나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으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른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순수한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을 복잡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3.나눔 및 묵상
1. 동방박사의 경배를 바라보면서 내가 느낀 것은 무엇이고, 나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2. 자신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을 보고 헤로데는 무척 당황을 했습니다. 내가 헤로데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경배를 드렸을까요? 아니면 헤로데처럼 예수님을 헤치우려고 했을까요? 또한 주변에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발견하면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하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주의 공현 대축일
제 1 독서 : 이사 60, 1-6
제 2 독서 : 에페 3, 2a. 5-6
복 음 : 마태 2, 1-12
제 1 독서 : 기원전 538년,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예루살렘은 페르시아 제국 내의 변방에 있는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야 60-62장의 저자는 희망을 선포한다. 언젠가 예루살렘은 온 세상의 수도가 될 것이고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그리로 밀려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사야 60-62장은 그 문체나 사상으로 볼 때 서로 일치되어 있으며 이사야 40-55장과도 통한다. 이사야 60-62장은 희망과 믿음이 필요한 때 귀양살이에서 돌아오는 백성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로서 그 초점이 예루살렘의 영광에 놓여 있다.
동방 민족의 보물과 전세계적인 관점의 보편성 때문에 이사야 60장이 공현 대축일의 텍스트로 선택되었다. 이사야 59, 9의 어둠에서 이제 우리는 이사야 60, 1의 빛으로 나오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이제 막 이방 민족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기를, 더 많은 백성이 돌아오기를, 그리고 더 평화로운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만 버려졌던 이스라엘은 이제 그 자녀들을 되찾을 것이며 이방 민족들이 몰려와 귀한 선물을 그 성전에 바칠 것이다. 이사야 60장의 이런 낙관론은 하깨 2, 7-9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 2 독서 :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즉 이방인의 구원이다. 다시 말해서 이방인들도 유다인들과 함께 같은 상속을 받으며, 같은 지체가 되며, 같은 약속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이다. 동사 앞에 붙어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같은’이라는 단어는 유다인들과 함께 누리는 이방인들의 구원의 충만성을 강조한다. 유다인과 이방인들의 현세적 갈등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화해시키는 이 신비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복 음 : 마태오 1장에서 다윗의 후손이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제시한 후, 마태오는 이제 이방인들에게까지 선사된 구원을 묘사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기다림을 채워 주었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마태오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마태오의 의도는 이방인들을 예수님의 생애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보편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새로운 백성이 옛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고 만방의 빛이 되리라는 것이 마태오의 전망이다.
마태오 2장에서 우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을 본다. 한편은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열려진 세상이다. 아기 곁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경배하러 온 목동들과 동방박사들이 있다. 이들은 움켜쥐어야 할 그 무엇도, 지켜야 할 그 무엇도 없는 사람들이기에 평온 속에 머무른다. 또 다른 편은 헤로데를 중심으로 한 닫혀진 세상이다. 왕권을 빼앗길까 봐 두려움에 사로잡힌 헤로데 곁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군인들이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단단히 무장하고 바싹 긴장해 있는 상태이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 전혀 무장하지 않은 작은 갓난아기, 평온히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결국 동방박사들은 헤로데를 떠나 아기 예수님께로 발길을 돌린다. 이런 방향 전환은 이제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의미 심장한 첫걸음이다.
일어나 비추어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주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그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의 공현 대축일은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억누를 수 없는 찬란한 빛과 그 빛이 주님의 몸인 교회에 반사되어 비추는 또 다른 빛에 의해 이중적으로 찬란히 빛나는 광채를 드높이 찬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방의 세 박사들이 하늘에 떠 있는 큰 별의 인도를 받아 구세주 아기 예수를 찾게 되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예물을 드렸다는 성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
우선 그들의 신분은 정확히 알려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방에서 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거나 박사들이었을 것입니다. 또는 동방의 임금들로서 별의 흐름을 유심히 관찰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의 이름은 멜키올, 발다살, 가스팔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헤로데 황을 찾아가서 “우리는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고 했던 것입니다. 신비와 베일에 싸여 있는 별의 놀라운 움직임, 그것은 분명 그들 마음에 놀라움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는 그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박사들은 다시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습니다.“그때 동방에서 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마침내 그 아기가 있는 곳 위에 멈추어 섰습니다. 이를 보고 그들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엎드려 경배하였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과정은 이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나긴 여로를 거쳐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게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이들에게 구원의 빛으로 드러나시기 위해 이들 동방의 세 박사가 선택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도권을 잡고 계시지만 동방의 세 박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이 메시아를 찾아 나서서 비록 그분이 초라하고 연약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봅니다. 반면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 즉 유다인들 – 여기에서는 포악한 헤로데 왕과 그 주변의 사람들 – 은 그를 무시하고 적대시하고 더 나아가서 그를 거슬러 음모를 획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스스로 선택을 받고 축복 받았다고 생각한 오만한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온 천하의 인류를 위해서 오셨음을 알게됩니다. 즉 인종, 국경, 언어, 피부색 모든 것을 초월하여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이상하고 놀라운 큰 별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상징, 징조를 알아본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 동방의 박사들로서 그들이야말로 그 징조를 알아듣고 구세주를 찾아와 경배하였고 기나긴 여로를 거쳐 힘들고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정성껏 마련한 가장 귀한 보물을 선물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놀랍고도 찬란한 빛을 받아 또 하나의 작은 빛이 됨으로써 이방인들에게 메시아를 알리는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나중에는 성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야훼의 영광이 우리를 비춘다는 것을 알고 또 하나의 빛이 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불러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바빌로니아의 종살이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날로 악해지고 더러워져 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옳은 일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착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작은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제2독서 에페소서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 즉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살게 될 것이라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이 복음을 따라 사는 빛에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온 천하에 알리는 공현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천하가 그를 주님으로 받들게 되고 찬양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1. 김광수 요셉
가. <주님 공현 대축일>
1. 제1독서 : 이사 60, 1-6
이사 60,1-6은 소위 제3이사야서의(이사 56-66) 중심 부분인 60-62장 가운데에 들어 있다. 이사 60-62장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예배 중에(기원전 530년 경) 유배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선포된 구원 예고이다. 기원전 538년 페르샤 왕 고레스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한 후(에즈 6,3-5 참조), 성전 건축이 시작되지만(에즈 5, 14-16) 작업은 곧 중단되고 만다. 외적인 어려움뿐만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갈등도 성전 재건에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파괴된 성벽, 원수들의 억압과 멸시,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도성, 난무하는 폭력, 엉망이 된 경제력, 유배 갔던 사람들과 본국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간의 갈등 등으로 인하여 성전 건축이 진척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3이사야는 예루살렘이 영광을 되찾고 주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에 가득찬 예고를 들려준다. 주님께서 빛으로 예루살렘에 오심으로써 예루살렘은 생명과 구원의 장소가 된다. 구약의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하느님의 영광 속에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장소가 새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이다. 모든 민족이 교회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2. 제2독서 : 에페 3, 2-3ㄱ. 5-6
교회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교회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준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특별히 감사하게 생각하는 하느님의 은총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의 구속 사업의 보편성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바오로는 자기 성소를 사도직으로 이해하고 이를 이방인을 위한 선교로서 구체화한다. 사도직은 교회 안의 봉사직으로서 이 직책을 통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선교가 세상과의 대화를 의미하며 그 안의 문화까지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형제들에게 끊임없이 알려야 한다고 한다. 바오로는 이 선교를 ‘심오한 계획’이라 한다. 그 이유는 교회로 하여금 그러한 과업을 수행케 하기 위한 하느님 자신의 계획이 우선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택은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어느 한 백성의 발전에 제한되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후기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몇몇 보편주의 성향을 띤 예언자들의 역할도 이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혈육을 강조하던 분리주의자들이 청중으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숨겨진 채 계속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르러 이 의도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방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벌써 그분의 지상에서의 여러 활동에 잘 나타난다. 특히 우리는 부활하신 후 예수님의 태도에서 우리는 이를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바오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한다. 율법의 굴레를 씌우지 않는 이방인을 위한 바오로의 선교 원칙은 초대 사도 공의회에서도 인정되었다. 이로써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은 더 이상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자신과 사랑 안에 묶어 두는 데 주저할 수 없게 되었다.
3. 복 음 : 마태 2, 1-12
주님의 공현 대축일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구세주로서 모든 백성들 앞에 당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사실(公現, Epiphania)과 또한 그 백성들을 ‘불멸의 신적 영광’에 참여시키시어 ‘새롭게 하심’으로써 구원의 놀라운 신비를 드러내신 사실을 경축하는 날이다. 이런 사실들은 마태오 복음의 ‘동방 박사의 방문’(2,1-12)을 통해서 더욱 깊이 있게 드러나고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만 전해지고 있는 이 단락을 너무 전설적으로 보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복음사가의 의도가 동방 박사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유다인의 왕으로 나신 분’의 행방에 우리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주님의 공현 대축일을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이 주님을 알아뵈었다는 하나의 지나간 사건으로 경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사건을 오늘날 이 세상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구원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공현의 주된 관점은 ‘이방인들이 유다인들과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었고 구원 약속의 유산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선 예수가 이스라엘 가문에 속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후 동박박사들을 인류의 상징적 대표자들로 등장시킴으로써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의 두 가지 특징적 주제가 나타나고 있다. 즉, 첫째는 구약의 예언들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이방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는 대신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를 배척한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대립적 사실은 복음 전체를 통해 점점 더 첨예하게 드러나게 된다.
강론의 주제들
1. 주께서 현존하시는 교회 공동체는 어둠속에서 빛나는 산위의 도시와도 같다.
2. 기쁜 소식은 그리스도께 관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어 준다.
3. 주의 공현은 구원의 보편적 확장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교회 일치의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세상의 별이 되자
찬미예수님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 들며 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오는구나.(이사 60,1-3)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이방인들이 금과 향료를 싣고 예루살렘에 조공을 바치러 오리라는 예언(이사 60,6)이 이루어진 날, 즉 동방의 이방인들(동방박사)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구세주이심이 온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나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을 썼습니다. 그는 당시의 신앙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신앙 교육을 위해 복음서를 서술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복음서는 모든 신자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특히 유다인 출신 신자들이 유다교 신앙의 맥락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즉, 당시의 독자들이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이며 다윗의 후손인 왕으로서 인정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유다인의 민족 역사인 구약성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는 유다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인식한 전 세계 이방인의 첫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공현 대축일은 모든 인류가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으로 하나가 된 기념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은 어떻게 베들레헴에까지 갈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려주는 그 별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베들레헴에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베들레헴까지의 여행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밤에는 별이 잘 보였지만 낮에는 그들을 인도해주는 별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만 걸어갈 수 있었고 낮에는 쉬어야만 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오로지 별 하나만을 바라보면서 먼 길을 걸어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별 하나만 바라보면서 걸어간다고 생각해보시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별이 바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을 알려주는 유일한 이정표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동방박사들의 착오로 엉뚱한 별을 자신들이 찾던 별이라고 믿고 따라 갔다면 어떠했을까요? 동방의 세 박사는 별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항상 별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별이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때론 부모님일 수도 있고, 때론 어떤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별이 되어야합니다. 아니,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 라는 별을 보고 예수님 계신 곳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나’라는 별을 보고 갔다가 ‘그곳에는 예수님이 안계시더라’ 라는 말을 듣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을 제대로 알려주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항상 강한 빛을 내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기분에 따라 강한 빛을 내거나 아니면 빛을 전혀 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우리’라는 별을 믿고 의지하면서 여행하기를 포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별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별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려 주기 위해서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인 것입니다. 그 별이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오로지 봉헌해야 합니다. 이 봉헌을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던 것처럼 나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버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아 그 사랑을 빛의 동력으로 삼아 빛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더욱 더 굳게 믿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 예수님께로 더욱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밝은 별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