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 주일
1. 최기산 신부(가)/ 2 2. 변희선 신부(가)/ 3
3. 김현준 신부(가)/ 5 4. 강길웅 신부(가)/ 7
5. 김창석 신부(가)/ 9 6. 이원규 신부(가)/ 11
7. 윤경철 신부(가)/ 13 8. 김정진 신부(가)/ 14
9. 김몽은 신부(가)/ 16 10. 유재국 신부(가)/ 18
11. 조순창 신부(가)/ 20 12. 고건선 신부(가)/ 22
13. 황영욱 신부(가)/ 23 14. 최인호 작가(가)/ 24
15. 세상의 죄를(가)/ 25
1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하느님의 어린 양
최기산 신부
우리에겐 양, 양고기 등이 익숙지 않다.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은 코를 막으며 누린내가 난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중동 사람들에게 있어 양은 없어서는 안될 단백질, 탄수화물, 기름기의 주요 보급원이다. 그들은 축제 때 양을 잡아 바치고, 먹을 뿐만 아니라 매일 젖을 짜서 마신다. 나머지로는 버터나 치츠를 만든다. 어디 그뿐인가! 가죽으로는 옷과 텐트를, 털로는 양탄자를 만든다. 그야말로 양은 생활과 직결된 동물이다. 한국인에게는 다양한 동물들이 친숙하다. 소나 돼지, 닭 등이 모두 익숙하고, 심지어 개고기가 입맛을 돋운다고 여름철만 되면 인기가 높다. 음식만 보더라도 우린 너무 욕심쟁인가 보다.
희생 양(羊)
양은 음식으로, 옷이나 텐트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제사 때 중요한 용도인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부족간, 어떤 계약을 체결할 때도 양이 요긴하게 쓰였다. 오늘날엔 양국의 국가원수 혹은 외무장관이 각서를 쓰고, 사인한 다음 서로 웃으면서 악수와 함께 각서를 교환하면 공적인 계약이 체결되지만, 옛날엔 그렇지 못했다. 부족간 언어가 다르고, 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 부족의 언어도 모르는데, 양쪽의 언어를 모두 알고 통역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옛날 부족간에는 공식 계약의 형식이 양을 잡아 반을 갈라놓고, 그 가운데를 양쪽 대표가 지나가거나, 양의 피를 뿌림으로써 계약의 표시를 했다. 무시무시한 계약의 표시다. 계약을 어기면 이렇게 피를 볼 수도 있고, 양이 갈라졌듯이 그렇게 갈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부족간의 계약 때에도, 양은 피를 흘려 봉사하였다. 참으로 귀하고 고마운 동물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에, 어린양 한 마리씩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바름으로써, 이집트의 맏자식들은 다 죽었으나, 죽음의 사신이 피묻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거르고 지나가서, 이스라엘 맏자식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의 집에서는 곡성이 터져 나왔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결국 파라오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켰다. 이는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설명이다. 여기서도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맏자식을 대신하여 죽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바로 이 어린양처럼 그렇게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죽어줄 어린양 같은 존재라고 증언하고 있다. 남은 .리고 자신은 죽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예수님이라고 증언하는데는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다. 즉 하느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 위에 성령이 내려와 머물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 즉 구세주이심을 알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나는 그분에게 성령이 내렸음을 보았기에, 나의 증언은 진실하다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오늘도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을 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기도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주님 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성령의 속삭임 을 들을 수 있을 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고 누구에게라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사에만 얽매여 영적인 귀가 막힌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 들려온들 쇠귀에 경읽기가 될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체험한 광야를, 우리도 가금 경험 해봐야 할 것 같다. 조용히 모든 소음을 끄고, 얼마 동안 눈을 감고 있어 보는 것도 귀한 체험이 될 것이다.
눈으로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귀로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해도 들을 수 없기에 답답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눈과 귀가 트이게 해주심으로써, 주님의 모습을 영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목소리를 영적인 귀로 듣게 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수님이시다\”라는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인들에겐 너무도 중요한 신앙고백이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짧은 단어 속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우린 그 의미를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면서, 주님 곁으로 나아가야 한다. 끝내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는 날, 우린 화두가 열리는 것 같은 기쁨을 맛볼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양, 저기 성체 안에 계시며, 미사 때마다 내 마음에 오신다. 하느님의 어린양, 여기 지금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신앙인으로 백미를 맛보는 사람일 것이다.
2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변희선 신부
사제관에 함께 사시는 선배 신부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흥미 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하와이 섬에는 거대한 동물원이 있는데,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다양한 우리 안에서 관람객들에게 재미있는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우리의 문은 열려 있고, 그 속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다. 거울에 작은 글씨로,「밑구멍을 닦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적혀있다. .
용변 후에-화장지를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는 인간(영장류)만이 과식을 하기 때문이란다. 과도한 식사는 단순히 음식물(식량)의 낭비이고, 건강을 해친다는 점에서, 그 해악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과식이 탐욕의 원인이며 결과라는 점이다. 인간의 끊임 없는 탐욕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일류의 조상들의 첫 범죄행위의 원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누리던 아담과 하와가, 단지 하나의 금기였던 지선악과를 탈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 탐욕인 뿌리를 엿볼 수 있다.
인간들의 탐욕은 급기야 지구촌 생명체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종(種)을 멸종시켰으며, 인류끼리의 불필요한 경쟁과 다툼으로 현재 인류의 30%는 굶주리고, 그 중의 30%는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강간, 낙태, 마약, 아동 학대, 살인과 각종 폭력으로 매년 1억 명 이상의 지구인들이 희생당하고 있으며, 가정은 파괴되고, 낙태는 당연시되고, 부정과 부패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린다.
이렇게 죄와 악으로 물든 이 세상에서「지구여 멈춰라. 차라리 이 더러운 지구를 떠나겠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더욱 한심스러운 현상은, 이토록 심각한 죄악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감각할뿐더러, 죄악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사실을 왜곡하거나 진실을 과장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훔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장시간 빌리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간음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시간을 낭비하거나 추월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태아를 살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임신을 끝내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잘못과 죄악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은, 인류를 더욱 더 비참하게 만 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죄가 없고, 그래서 그분의, 용서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슬픔과 후회 속에서 인정할 수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초점은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초점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인 예수님이시다.
최악의 악마는 단순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최악은 죄를 짓고, 그 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인들이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분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작은 죄까지도 더욱 민감하고 깊게 깨닫고, 통회하는 분들을 말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강하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1요한 1,10)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들은 전혀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오히려 겸손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죄를 자비로이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오십시오. 아버지는 사랑이십니다.”
3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예수를 증언하는 삶
김현준 신부
우리 가정에서 많이 기르고있는 개와 고양이는 언제 만나도 싸운다. 서로 싸우는 그 이유는 마음이 나빠서도 아니고, 서로 미워해서도 아니란다. 서로 신호(sign)가 달라서 싸운다는 것이다. 개는 꼬리로 표현한다. 꼬리로 웃고 꼬리로 화를 낸다.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들고 흔든다. 기분이 나쁘면 낮춘다. 겁이 나면 두 발 사이에 사려 넣는다. 그런데 고양이는 개와 정반대다,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낮추고, 기분이 나쁠 때 꼬리를 위로 올린다,
개와 고양이는, 신체의 일부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알리고 상대방과 의사소통을 한다. 사람은 말로써 이 모든 것을 표현한다. 말로써 감정을 표현하고 의사소통을 할 뿐 아니라, 누가 어떻다고 증언도 한다. 그러하기에 사람의 의사 표현 가운데 가장 창조적이고 명시적인 것이 말이라고 한다. 그 증언하는 사람의 말이 진실되고, 그 말에 인품이 더해지면 가장 힘있고 믿을 만한 증언이 된다.
예수님이 누구라고 증언하는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적절한 인품과 삶을 갖춘 인물이 또 있을까?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한테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증언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요한 1,29)
세례자 요한의 증언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이름으로 가리켜 부르면서, 예수님의 이미지와 사명을 알려주고 증언한다. ‘어린양‘하면 일반적으로 어리다, 순하다, 깨끗하다, 흠이 없다는 이미지를 갖는다. 오늘을 사는 한국 사람들은 ’비자금\’ 하면 아, 노태우 그리고 아무리 통치자금이라고 우겨도 돈의 질서를 벗어난 뇌물이라고 알아듣는다.
요한의 동시대 사람들은 ‘하느님의 어린양’ 하면, 이집트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게 한 과월절의 어린양,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 전승에 따른 고난받는 아훼의 종을 떠올리게 된다.
고난받는 야훼의 종은, 자기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온갖 굴욕을 받고 죽어가면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6-7)
요한 복음사가는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시고(요한 19,9),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요한 19,17)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과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이미지와 사명을 연결시켜 준다.
과월절의 어린양은, 하느님에서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을 때 잡도록 명하셨던 그 “역사적인 어린양”이다, 이스라엘은 “흠이 없는 일년 된”(출애 12,5)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그들의 집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천사들이 이집트인들의 모든 맏이들을 치러 올 때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이스라엘은 매년 이 구원의 사건을 기념하여 과월절 예식을 거행하며 희생제물로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곤 했다.
우리 그리스도교 전승은 예수 그리스도가 파스카(과월절)의 ‘참된 어린양’이시고(부활 미사 감사송), 그분이 흘린 희생의 피로 우리는 구원되었다고 믿는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매 미사 때 주님을 받아 모시며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백하며, 사제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는 이는 복되도다\”라고 선포한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그렇다, 누가 누구를 알아 증언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해보면 나는 얼마나 나를 잘 아는가? 언제나 나란 존재와 함께 있는 나 자산도 나를 잘 모르는데 하물며, 자라온 환경과 배워온 교육이 틀리는 다른 사람을 얼마나 잘 알아 증언할 수 있는가?
세례자 요한도 그분이 누구신지 잘 몰랐으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느님의 어린양,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증언할 수 있었다. (요한1,33)\’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증언되어야 한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증언한 것처럼, 오늘의 시대에도 우리의 역사와 오늘의 시대에 맞는 이름으로 증언하여야 한다. 1989년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대회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증언한 것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참된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어린양이 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49,3.5~6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제2독서 Ⅰ고린 1,1~3 (은총과 평 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복 음 요한 1,29~34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을 죽 이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는 사람은 또 여러 사람을 살리게 됩니다. 실제로 부정과 부패가 만연된 세상이 용서받고 있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과 죽음 때문이며, 역사가 발전하며 전진할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죽음의 의미를 보다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둘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 보면 야훼의 종은 불만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야훼의 종은 정말 힘들여 고생했지만 그저 모든 일이 다 실패하였고 결국 헛수고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그 실패한 자를 만국의 빛으로 세우시며 그가 땅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 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 야훼의 종이 누구냐.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는 대단히 무능한 자였고 인간의 지혜로 봤을 때는 완전히 실패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을 가져오는 빛이 됩니다. 그러면 이처럼 백성에게 빛과 희망과 구원을 줄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이 수백 년 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그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베일에 가려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 대뜸 \”하느님의 어 린 양이 저기 오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어린양이야말 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있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어린양의 의미가 뭐냐.
첫째는 빠스카 양입니다. 이스라엘이 에집트를 탈출하기 전날밤에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써 자신들이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어린양은 사실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없는 양이 죽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이스라엘 이 구원받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그 속죄양이 되 는 어린양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사야서(53,7)에 나오는 어린양입니다. 그 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인데,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 지 않고 참았다고 했으며 결국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위 해 말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의 모습에서 요한은 예수님 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오래 전에 노래했던 그 억울하지만 당당하고, 그리고 만방의 빛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야훼의 종은 바로 예수님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예수님 오시기 이미 수백 년 전에 예언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성서 속에 깊이 감춰진 보물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실제로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셨고 진정으로 기쁜 소식을 소리 높이 들려주셨지만 결국 백성은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고 아우성을 칠 뿐이었습니다. 제자들마저도 그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분은 영락없는 야훼의 종 그분이었습니다. 영락없는 어린양이었습니다.
이처럼 빛나는 이름이었던 \’야훼의 종\’은 고난받는 종이었으며 요한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어린양도 역시 희생 제물로서의 처절한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몫이었으며 그리고 위대한 종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삶을 배워야 합니다. 내 이익만 찾고 내 편리만 주장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양보하고 희생해서 누군가의 빛이 되고 이익이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신문에 보니까 어떤 소녀 가장이 서울 모 대학의 야간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셨고 중학교도 선생님의 도움으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보니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아 바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을 살렸으며 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야간에 들어가 결국은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대신 죽으면 여러 사람이 살아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러나 처지야 어떻든 자기만 살려고 하면 그는 또 여러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우리는 정말 이웃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지 죽이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사람이 큰 손해인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이익도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새해가 활짝 열렸습니다. 이 새해를 우리가 복 되게 걸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야훼의 종이 되고 또 어린양이 되 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인간적으로는 굉장히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정 나를 살리는 길이요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심하게는 하느님까지도 살리는(?) 은혜로운 길입니다.
5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김창석 신부
지금으로부터 약 6백 60년 전에 세기의 명작「신곡」을 쓴 단테에 대하여 이런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른 아침에 어느 수도원의 문지기 수사가 수도원 문을 열었을 때, 그는 한 늙은이가 문안을 기웃거리는 것을 보았다. “누구를 찾고 계십니까?” 그 수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 늙은이가 대답했다. “나는 단테요. 평화를 찾고 있소.” “아! 선생님이 그 유명한 단테 선생님……” 수사가 말끝을 미처 맺기도 전에, 단테는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총총히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단테는 늘 평화를 찾아다녔던 것이다.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평화! 그러나 그 평화는 참으로 지키기 힘든 것이다. 1984년 유엔 보고에 의하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쟁에 대한 통계가 나와 있다.
1983년 한 해에만도 75개국에서 4백만 명이 전투를 벌였다. 40개국의 지역 분쟁이 있었고, 해외에 군대를 파견한 나라는 8개국이나 되었다. 1945년 이후 전사자의 수는 주로 비정규군에서 월 평균 4만 명이었고, 전사자 5명 중 3명 꼴이 민간인이었다.
1983년의 군사비는 8천억 불 이상이었는데, 이것은 지구 전체 인구 1인당 1백 30불 이상이 되는 것으로서, 1인당 수입보다 더 많고 1인당 위생비의 43배나 되는 액수이다.
신형 핵잠수함 1척을 건조하는 데 드는 비용은 23개 개발 도상국들의 학령 아동 1억 6천만 명을 위한 연간 교육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다. 이 모든 통계는 평화와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무력적 평화가 참된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흔히 말하기를 국제적으로 동맹을 맺고 무력의 균형을 이루어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불안한 평화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가 우리의 적이었고, 소련과 중공과 베트남은 전쟁까지 할 정도로 서로 적대관계에 있다. 국제적인 동맹 관계는 이해에 얽힌 것이기 때문에 신의에 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유럽 전토를 석권했던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한 후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었다. 그는 52세를 일기로 죽기 전에 “무력으로 세워진 나라는 정복자와 더불어 망하지만, 사랑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나라만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도대체 무력으로 평화를 달성하겠다는 생각 자체부터가 위험한 것이다.
우리 한반도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태인데, 무력으로 남침을 노리고 있는 북한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집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력으로 3천리 강산을 정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7천만 동포의 마음은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외지의 보도에 의하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북쪽의 월맹이 남 베트남 사람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정치적 평화는 어떤가? 국제적으로 볼 때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국제연맹이,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엔이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둘다 평화를 이룩하지는 못했다. 도대체 이러한 국제기구의 규약을 지키는 나라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한 번도 평화적 정권 교체를 해본 적이 없다. 민주적 합의보다는 물리적 힘이 난무하였다. 이런 상황은 아프리카의 신생국에나 있을 법한 일인데,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국민들은 이 나라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불안해하고 있다. 여당이 과연 민주적인 방법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킬지, 야당과 재야 세력과 학생들이 지금까지처럼 지나치게 성급하게 굴다가 또 불행한 수레바퀴를 굴리지나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무력에 의한 평화나 정치에 의한 평화는 잠정적으로는 몰라도 항구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적 평화만이 참된 평화라는 말이 되겠는데, 복음적 평화는 근본적으로 타애적 평화이다. 무력이나 정치에 의한 평화는 자애적 사랑에 입각한 것이다. 남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자기 생각만 하는 입장이다. 반면에 타애적 사랑에 입각한 복음적 평화는 자기보다는 남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는 입장이다.
국제적으로는 나라끼리 서로 상대방 나라의 입장을 생각해 줄 때,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여당은 자기네 정권 유지만 생각하지 말고 국민의 행복을 위주로 생각하는 정치를 하고, 야당은 자기네 인기나 정권 쟁취에만 급급하지 말고 피차 평화적 방법으로 성급하지 않게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갈 때 참된 복음적 평화가 이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북 대화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남북 적십자 회담 등 회의가 잦아지니까 남북의 기자들이 서로 내왕하게 되는데, 너무 상대방을 헐뜯고 약점을 노출시키려고 하는 경향이 심한 것 같다. 남북 관계도 타애적인 자세가 있어야 서로 이해와 교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중공에 다녀온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곳에 사는 동포들은 남한이 좀 나은 위치에 있으니까 북쪽에 대한 비방을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타애적 사랑의 원칙은 가정이나 이웃끼리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회에는 예수의 양부(養父) 성 요셉 같은 이들이 많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셉은 숨어서 드러나지 않게 성 가정을 돌보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 감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은데 각 분야에 숨어서 착실히 일할 사람들은 적다.
사회 구석구석에 숨어서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겨레를 위하여 이기심을 버리고 착실히 일할 사람들이 많아야 이 나라 이 사회가 보다 더 평화스럽고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겠는가. –
6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이원규 신부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내신 서간에서 말씀하시듯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고 여기에 인간이 응답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의 자세로서 내 영육간의 모든 것을 내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께 바칠 때 신앙인으로서의 참된 의미가 있고 값어치가 있는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값진 대가를 치루시고서 우리를 사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금, 은, 보화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 가정에서 귀중한 물건일수록 더욱 잘 보관하고 항상 관심을 갖고서 그 물건을 조심스럽게 다룰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물건이 아닌 하나의 인격을 갖고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할 때 이 존재를 인격이 없는 물건과 비교하여 본다면 월등한 가치가 있을 것이며, 감히 그러한 물건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차원이 다른 뛰어난 존재일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기의 자녀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과 제삼자인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볼 때, 그 대상인 자녀들은 같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볼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친밀한 관계가 있는가에 따라서 그들을 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성세성사를 통하여서 우리들을 당신의 가장 사랑받는 자녀로서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성체성사와 그 외의 다른 성사들과 기도와 전례 등을 통해서 계속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의 몸으로 되기를 원하시며 항상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더욱이 가장 귀중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셨으므로 하느님 앞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귀여운 자녀로 보일 것은 당연한 사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값진 대가를 치루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를 만드시고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하시기 위해 천사들에게도 주시지 않은 구속의 은혜와 당신의 자녀가 되는 특전을 주셨으며, 하느님이신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것은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들의 도리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하느님의 자녀다운 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성령의 궁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얼마나 잘 사용했으며 외교인들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자기 나름대로 각자가 걷고 있는 길 안에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면 숭고한 길이며 하느님께서도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걷고 있는 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채워드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한 생활이 되도록 노력할 때, 보람을 가질 수 있고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이며 자녀들이면서도 자녀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이 성당 안에서만 아니면 미사 중에만 그런 것이다고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 그것은 신앙을 우리의 생활과 분리시켜 놓는 결과가 되는 것이며,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도 전폭적인 혹은 전인격적인 것으로서가 아닌, 다만 사회 생활의 한 부분으로써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 거치장스럽고,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외교인들이 갖고 있지 않는 어떤 취미같은 것을 한가지 더 갖고 있다는 식으로서의 생각을 갖게까지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이며 사랑받는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부조리한 생각을 갖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성세성사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입니까? 교회를 인생의 도피처로 생각해서 입니까? 아니면 하나의 멋으로서 한번 영세를 받아본 것입니까?
결코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좀더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참다운 삶의 목적을 알아 후회없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앙 생활을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서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악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식으로서의 자세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본받아 적극적인 자세로서 주님과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하도록 노력하여 자기의 현 위치에서 가장 하기 쉬운 조그만 선행부터 실천할 때 이러한 일이 가능할 것이며 이것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알아들을 수 있고, 우리도 세례자 요한과 같이 “이 세상의 죄를 없애버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영성체 전에 뿐 아니라 항상 그런 말을 할 수 있고, 또한 그런 자세를 어디에서나 갖추고 있을 때에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되며, 이것은 하나의 이상만이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당신의 백성이며, 사랑받는 자녀로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크리스챤의 진정한 행복과 참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멘. –
7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윤경철 신부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선출되어 취임하게 되면 주어진 기간 동안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되고 주위 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이제껏 전 인류가 기다려온 구세주로서 취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내용은 대단히 감동적입니다. 예수께서 30세가 되었을 때 나자렛 생활을 청산하시고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르단 강으로 찾아 내려가셨습니다. 요한은 이미 구약의 최후 예언자로서 백성의 커다란 신망 속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혹시 요한이 자기네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줄 해방자, 메시아가 아닌가하고 몰려 왔습니다.
인기와 명예로 말한다면 요한은 그 절정에 있었습니다. 영예와 영광이 절정에 있을 때 겸손하게 자기의 영광을 남에게 돌려주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신분을 망각하는 우리나라의 “나로다”하는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헛된 야망에 야합하여 진실을 왜곡하거나 교만을 부려 그때까지 이름없는 사람으로서 군중 가운데 감추어 계신 예수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줄 자격조차 없다.” 혹은 “내 뒤에 오실 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고백하며, 우리에게 예수의 참 모습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요한은 빛이 아니었고 빛이신 예수를 증거하러 온 하느님의 사자요, 주님의 종으로서 자기는 구세주가 아니요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렸다고 오늘 복음 전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취임할 때 한 연설은 그 사람의 인품이 나타나고 재임기간 동안 할 모든 일을 요약하여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이처럼 죄악이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구원의 시대가 예수로 말미암아 열렸음을 “하늘이 열렸다”는 말로 복음은 전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라는 말로써 예수님의 사명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인품은 어떠하였으며 그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일찍이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종들 안에서 활동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루게 하신 성령께서 예수 안에 온전히 일치하여 그분의 영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만방에 하느님의 사랑과 공의를 베푸시는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은 상한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이 넘치는 주님이십니다. 죄와 악으로 말미암아 비천해진 우리의 고통을 맡아지심으로써 우리를 이롭게 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천주성에 해당하는 권세와 권능을 포기하시고 당신의 인간성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제약을 통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성부께 순명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케 하신 수난의 왕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성삼위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부께서 예수에게 오시는 자랑과 사랑과 인준의 말씀을 성령을 통하여 예수께 전하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성자의 봉헌을 성부께 이르도록 하시며, 사랑하는 성자가 인류구원을 위한 희생의 첫 열매가 되시게 하십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충실하게 세례 때의 약속을 지키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죄인들과 뒤섞여 세례를 받으러온 군중 속에서 예수께서 “구세주”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 처럼, 겸손한 마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바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체험케 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 가운데서 혼자서 선한 체 한다는 욕과 비약거림을 당해도 우리가 밝히는 정의와 사랑의 작은 불은 결코 약하지 않고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용기를 가집시다. 이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도살당하는 양처럼 천대를 받고 죄악에 가담하지 않는다 하여 괴로움을 받습니다. 또한 내 안에 있는 악의 뿌리와 처절한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시련을 능히 이겨냅니다.
이제 우리도 사도들처럼 담대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와 사랑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힘으로는 소금이 될 수 없으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우리는 짠맛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8 연중 제2주일 요한 1,29-34 (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김정진 신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적엔 하느님은 천사로 하여금 목동들에게 알리셨고 이교 백성들인 세 박사들에게는 별의 인도로 경배케 하셨고 예수님의 세례식에는 성부의 말씀과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강림하심으로 예수님을 참된 하느님의 아들로 현양케 해 주셨습니다. 이에 이어서 오늘 복음에는 세자 성 요한의 여러 가지 점을 들어 예수님이 바로 성령으로 세계를 베푸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증언하기를 <성령이 하늘로부터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았습니다.>(요한 1,32)고 하였고, 이에 앞서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들메끈을 풀어 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습니다.>(요한 1,27)고 퍽 겸허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증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 요한 세자는 어떠한 분이기에 이분의 증언이 그처럼 중요하고 힘이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였으며 여러 해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고 궁핍생활을 하며 대과업을 준비하였습니다. 성 요한은 힘 있는 설교를 하였고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성 요한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의 비행이나 위선적 행동에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그들을 보고 「독사의 족속들」이라고 질타하였으며 이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그 사실을 행동으로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성 요한은 헤로데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헤로데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와 동거하는 부정행위에 대하여 대 놓고 솔직히 책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 요한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급기야 사형까지 받았습니다. 이같이 솔직 담백하고 강직한 성 요한이 메시아가 오심을 선포하고 준비시키고 메시아가 막상 오셨을 적에도 그분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구세주이시란 것을 백성들에게 똑똑히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연중 제 2 주일
제 1 독서 : 이사 49, 3. 5-6
제 2 독서 : 1고린 1, 1-3
복 음 : 요한 1, 29-34
제 1 독서 : 고통받는 두 번째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첫 번째 노래(이사 42,1-8)의 주제를 다시 다루지만 특별히 종의 사명에 역점을 둔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비추는 것이다. 그들에게 빛과 구원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비록 실패와 좌절이 있겠지만(이사 49,4.7) 오직 주님께 믿을 두면( 49,4-5) 결국 승리할 것이다( 49,7).
제 2 독서 : 바오로 사도는 50-52년 사이 약 1년 반 동안 고린토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 사도 18,1-8 참조). 사도가 활동할 당시 고린토는 새로이 건설된 신도시였고, 항구라는 지리적 위치 덕분에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모든 항구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고린토 역시 갖고 있었다.
바오로의 복음 전파로 형성된 고린토 교회는 열심하고 활동적인 공동체였지만, 주변 여건상 윤리적 생활이나 신앙 상의 문제에서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를 올바로 지도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고, 그 흔적을 고린토 전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린토 전서를 시작하며 바오로 사도는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한다. 사도의 자격으로 그는 고린토 교회의 문제에 개입한다. 교회의 모든 삶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중심을 두고 있고 그분이야말로 신자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별볼 일없던 고린토 신자들을(1고린 1,26 참조)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복 음 :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 어린양은 무죄함의 상징으로 이사 53,7을 암시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보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29.32.33.34절), 구슬이 꿰어지듯 요한의 증언이 이어진다. 직접 목격한 세례자 요한의 용기, 솔직히 털어놓는 그의 단순성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초탈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오려 하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어린양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제 성탄과 주의 공현 시기를 모두 보내고 연중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며, 그분의 지상 생애의 각부분을 묵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자기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어린양”이라고 말합니다. 천주의 어린양은 세례자 요한이 이 세상에 오기 훨씬 전에 계셨으며 이 세상에 오시기로 예언되신 분이셨습니다. 이 어린 양은 이 세상의 놀랍고도 엄청난 죄악을 대신해서 십자가상에 바쳐질 천주의 어린양, 속죄양이신 것입니다. 이 어린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옛 해방을 기념하고 또 매년 그것을 재현할 때 봉헌 제물로 삼았던 과월절 어린양이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행했던 어린양의 봉헌을 연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어린양은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야훼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야훼의 고난받는 종, 둘째 편을 노래하는 오늘의 독서는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고 하면서 “고난받는 종은 ‘만국의 빛’으로서 야훼 하느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어린양’과 ‘야훼의 고난받는 종’은 어떤 의미에서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는 것은 아무런 희생이나 대가 없이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생명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자기도 살리고 모든 이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없애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는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라는 뜻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책임 회피나 변명 내지 불가피성을 이유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비겁하고도 비열한 자세가 아니라, 기꺼이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바로 어린양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죄를 벗기 위해 수없는 희생과 제물을 바쳐 왔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몸을 받음으로써 그의 죽음을 통하여 온 세상이 구원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사야 53,12의 말씀처럼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굴욕적이기까지 한 자세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자기 봉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봉헌은 자신을 거저, 조건 없이 내어 주는 당신의 겸손과 순종과 무구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 즉 죄사함과 이에 따른 성령의 충만함이 이뤄지기 위해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단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말입니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정치적 야합에 의해서 5․18과 관련한 전직 대통령과 관계자들의 엄청난 죄를 사해 줄 수 있었는지 모르나 역사는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진정으로 회개하지 못한 권력자들의 잘못에 대해 그냥 눈감고 계시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누구든지 이 세상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하고 겸손되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할 때에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 주실 것이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인정하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각오와 마음가짐 즉 새로운 생활로 우리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가해 연중 제 2주일
안녕하세요? 시골 사람이 서울로 이사를 가서 처음으로 목욕탕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상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시골 같으면 통에 물 받아 놓고서 하면 되는데 그럴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당신도 이제 도시 사람이니 문화생활을 해야지요” 하면서 목욕탕에 가라고 3천원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목욕탕에 한번 가본 아들로부터 자세하게 설명을 들었습니다.
먼저 옷장에 옷을 걸고, 샤워를 한 다음에 탕에 들어간다.
그리고 때는 옆 사람에게 밀어달라고 하고 밀어주면 된다.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아버지는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일러준대로 그렇게 하고 마지막으로 때를 밀으려고 했습니다. 옆을 보니까 얼굴도 착하게 생기고 젊은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어이! 젊은이 나 때좀 밀어주쇼. 그러자 그 젊은이는 기꺼이 밀어주었습니다. 등을 다 밀자 젊은이는 돌아누우시죠! 라고 말을 했습니다.
아니 앞은 내가 했으니까 됐고. 이제 젊은이가 누우쇼. 내가 밀어줄텐께.
그러자 젊은 이는 아니라고 말을하면서 돌아누우라고 말했습니다.
이젠 내가 밀어줄 차례이니께 젊은이가 누워. 그러자 젊은이는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는 여기서 때를 밀어주는 사람입니다. 이제 다 됐으면 만원을 주시죠.
아니 뭔소리여! 내가 밀어준다니께!
아들로부터 때를 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못들은 그는 간신히 때를 밀어주는 것에 대해 이해를 하고 옷을 맡기고서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돈을 가지고 다시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때를 밀어주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아깐 미안했고, 여기 만원 있소. 그리고 아깐 반밖에 안밀었으니까. 우리 아들이 나의 반만하니까 밀어주시겄죠?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그는 아이의 때를 밀어주었습니다.
목욕탕을 나오면서 부끄러워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시서 생활할려면 이렇게 살아야 하느니라”.
…………
오늘은 연중제 2주일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사명이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임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거룩한 백성이된 고린토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세례자 요한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연결시켜 본다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을 믿기에 거룩한 백성이 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모든이들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원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우리에게 원칙은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보잘 것 없는 나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우리도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원칙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행동해야 될 목표들이 생겨납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분석해보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보이고, 하느님께 나아간다면 나의 삶을 보고 다른이들도 하느님께로 나아올 것입니다.
먼저 나는 신앙인인가를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기본적으로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성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성서를 얼마나 가까이 하고 있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서를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다면 왜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분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서를 읽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본당신부님께서도 성서읽기를 강조하시면서 애써 시간을 내셔서 주보를 통하여 성서공부를 시켜주십니다. 우리가 매 주일/ 주보를 착실하게만 읽어도 우리는 성서읽는데 습관을 들일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기도를 못하고 있나? 기도시간에 왜 그렇게 분심이 드는가?
잘 생각해 보시면 해답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면 내가 왜 하느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지, 그것을 방해하고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제거할 것은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이 본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오신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알고있는 것, 본 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당을 목욕탕이라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때를 밀어주는 사람은 본당 신부님이십니다. 고해소에서 박박 밀어주십니다.
그것도 꽁짜로 밀어주십니다.
그런데 목욕탕에 처음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하든, 말든, 그냥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목욕탕이 어디인지 몰라서 못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지저분한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이 지저분하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고 나 몰라라 하시겠습니까?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 나만 성당 열심히 다니고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비신자들에 대한 전교와는 담을 쌓게 만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원칙과는 동떨어지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성당에 나오든 말든 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신앙인으로서의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보잘 것 없는 나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우리도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나 믿고 있었지만 냉담중인 이들을 목욕탕으로 데려와서 우리처럼 깨끗하게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인 우리는 우리자신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습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습관이란 인식과 기량과 욕구의 혼합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인식이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왜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량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방법을 말합니다. 욕구란 하고 싶어 하는 것, 즉 동기 유발을 말합니다. 습관을 익히기 위해서는 인식과 기량과 욕구. 이 3가지 요소를 개발해야 합니다.
전교하는 것을 습관들인다면 먼저 우리가 전교를 왜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교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란 무엇이며, 왜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명백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야만 기도하는 습관이 들여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을 믿기에 거룩한 백성이 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연중 제 2 주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로다.
우리가 얼마 전 거행한 주의 공현의 빛이 앞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될 ‘연중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전례에서도 찬란히 빛나고 있다. 요한에 의한 오늘의 짧은 복음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사명을 참으로 잘 드러내 보여주는 세례자 요한의 값진 증언을 전해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서에 의한 제1독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49,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빛나는 현현을 받아들일 수 있는 – 그분의 신비를 더 깊이 인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신비에 우리 자신을 참여시키고 일치시키기 위해서 – ‘열린’ 마음과 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말하자면 오늘의 응송에서 표현되고 있는 느낌들 –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교 전승에 의해 이해되었던(히브 10,5-7참조) – 을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희생과 제물은 아니 즐기시고 오히려 내 귀를 열어주시며, 번제나 속죄의 희생일랑 드리라 아니 하셨사오니 그때에 나는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 나를 들어 두루마리에 적혀 있기를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 39,7-9). 사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무엇보다도 특히 순명과 희생의 신비다. 그분은 마치 순한 ‘어린양’처럼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그 어린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
그 ‘어린양’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복음에서 뚜렷이 회상되고 있으며 세례자 요한의 모든 증언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요한1,29-31).
다음날에도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요르단 강가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하고 말하였다”(36절).
이 ‘그리스도론적’ 상징이 특히 요한 복음사가에 의해 즐겨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묵시록에서의 폭넓은 사용에 의해서도 뚜렷이 입증된다. “나는 또 그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 어린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묵시 5,6-14; 6,1-17등 참조).
요한 복음사가가 이 상징적 개념으로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전혀 분명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옛 해방을 기념하고 또한 매년 그것을 재현할 때 봉헌 제물로 삼았던 과월절 어린양(출애 12,1-28)과 관련시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전에서 행했던 어린양의 봉헌(출애29,38-46)과 연결시켜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으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양 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고 하는 고난 받는 야훼의 ‘종’과 관련시켜 생각하기도 한다. 이 마지막 야훼의 ‘종’의 개념과의 접근은 아라메아어의 talja의 의미가 어떤 학자의 주장대로 ‘어린양’과 ‘종’ 두 가지로 알아들을 수 있다는 가설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더욱 용이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들 중에서 이것 아니면 저것 하는 식으로 어떤 하나를 택하기보다는 요한 복음사가가 자기의 독자들에게 이 세 가지 의미 모두를 상기시키고자 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그리스도는 오직 한 번 희생됨으로써 결정적 ‘빠스카’를 성취하여 실현시키는 ‘고난 받는 종’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죄를 없애시려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어린양이라는 상징적 개념 외에 세례자 요한이 말하고 있는 예수의 ‘사명’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 예수의 사명에 대한 이 말은 위에서 ‘어린양’이라고 하는 상징적 개념의 의미를 총괄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라고 한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없애다’(희랍어로 άirein)라는 동사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기의 어깨로 나르다. 짊어지다’ ‘제거하다’ ‘없애다’
여기서도 요한이 여러 가지 의미를 하나의 개념 안에 압축시켜 표현하고 있다는 학자들의 연구를 참작해 볼 때 전자와 후자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보다는 예수께서 두 가지 사실을 다 이루셨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죄를 ‘당신 어깨 위에 짊어지시어’ 그 죄를 ‘없애주심으로써’ 참으로 ‘거룩한’ 때를 시작케 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주셨다. 요한의 첫째 편지의 한 구정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주는 것 같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언제나 죄를 짓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3,5-6)
또 이러한 내용은 ‘야훼의 종’에 관한 내용과도 완전히 일치한다. 왜냐하면 이사야 예언자가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죄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였다.”(이사53,12)고 하는 말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으신’ 바로 그분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 ‘종’의 사명인 보편적 구원의 사명(‘세상의 죄’)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거저 자신을 내어주시며 당신 자신의 겸손과 순종과 무구함을 통해 완수하신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번만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당신의 구원을 역사의 매순간 모든 사람을 위해 실현시키고자 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선물로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 안에 ‘잠기게 하신다’(즉 우리에게 세례를 베풀어주신다.) 이에 관해 세례자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일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요한1,32-34)
여기서는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능가하는 성령의 세례를 세우시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특히 성령의 넘쳐흐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베풀어주시는 항구한 선물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에 대해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그때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와 계시지 않으셨던 것이다.”(요한 7,37-39)
그러므로 요한 복음사가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희생되시어 모든 사람을 항구한 당신 성령 – 본질적으로 “거룩한 신성을 부여하시는 성령”(로마 1,4참조) – 의 선물로써 죄의 종살이에서 끊임없이 해방을 시켜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것은 분명 세례자 요한이 우리에게 제시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그리스도론’이다. 따라서 요한 복음사가 자신이 자기의 그리스도론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신비에 보다 근본적으로 참여케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어쨌든, 세례자 요한은 우리가 언급한 그 유명한 ‘야훼의 종’의 네 개의 노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이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다. 오늘 전례는 그 노래 중에서 둘째 노래의 일부를 들려주고 있다.
여기서 ‘야훼의 종’은 야훼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구원의 사명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야곱을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당신께로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태중에 지어 당신의 종으로 삼으신 야훼께서 이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으로서 할 일은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살아 남은 이스라엘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이사49,5-6)
그러므로 야훼의 종의 활동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땅 극변’ 모든 민족들에게 이르게 된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관해서 ‘살아남은’(6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 종살이에서 되돌아올 것과 그들이 성도 예루살렘과 온 국가를 재건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반면에 다른 모든 나라들에 관해서는 그 구원이 특히 영신적 특성을 지니게 되리라고 한다. 즉 그 구원은 하나의 커다란 빛과 같이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의 커다란 빛과 같이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과 그분이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늙은 시므온은 예수의 부모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아기를 성전에 바치러 왔을 때 그 아기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한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루카 2,32)
그 어는 때보다도 특히 오늘날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믿는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과 구원이 필요하다. 인류의 생존 자체에 관한 문제들이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를 모르고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순식간에 모든 나라를 폐허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가공할 치명적 무기들의 사용, 모든 실질적 경제적 자원을 압박하고 있지만 결코 인간의 품위와 자유를 침해하는 방법으로 억제되어서는 안 될 인구 증가, 예측할 수 없는 살인으로 우리의 도시를 피로 물들이며 죄악의 소굴과 온상으로 몰고 가고 있지만 공공치안력으로는 예방할 수도 제압할 수도 없이 난무하는 폭력, 사회의 구조적 악과 또한 우리 스스로 만든 생산의 기계화 체제조차 적절히 조절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으로 인하여 야기되고 있는 세계 도처의 실직현상, 특히 젊은이들의 세계를 파괴시키고 있는 마약의 확산, 자신과 타인의 생명에 대한 존경심, 희생정신, 나약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감, 가정의 의미 등등 기본적 가치의 위기.
이런 문제들은 오늘날 인간들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들은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문제들이 단지 우리의 지력과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이 우리의 밝은 이성과 진실한 마음을 흐리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죄악’으로부터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모든 악의 뿌리 즉 ‘죄’를 ‘없애실’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죄’라는 말이 희랍어로 관사를 동반한 단수(e amartia: 요한 1,29)로 씌어지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되심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없애러’오신 것은 어떤 구체적인 죄가 아니라 바로 ‘죄성’ 그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구원자! …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 만드신 세계, 죄가 들어오자 ‘제 구실을 못하게 된’(로마8,20) 가견적 세계는 본래 지녔던 지혜와 사랑이신 신적 원천과의 유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회복하였다. 참으로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다.’(요한3,16) 이 유대가 인간 아담에 의해서 끊어졌듯이 이 유대가 다시 이어진 것도 인간 그리스도에 의해서였다. …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신비속으로 관통해 들어가셨고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신 분이시다”(교황 요한 바오로2세 ‘인간의 구원자’)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분은 또한 우리 모두가 그분의 도움으로 영신적 물질적 구원을 실현시켜 나가기 위해 추구해야 할 길 즉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길, 순진 무구함, 지극한 겸손을 가르쳐주셨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세례자 요한이 그 면 옛날 요르단 강가에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증언하기 위해 사용했던 ‘어린양’이라는 연약하면서도 감동적인 상징적 개념을 상기시켜준다. 과연 그의 증언은 그 언제보다도 바로 오늘날 절실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요청되는 증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