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 주일 / 주님 세례 축일
15. 강영구 신부(다)/ 27 16. 김경진 신부(다)/ 30
17. 황경원 신부(다)/ 32 18. 이병문 신부(다)/ 34
19. 김현준 부제(다)/ 37 20. 신앙생활은(다)/ 39
15 주의 세례축일 루가 3,15-22 (다) 하늘을 여시는 분
강영구 신부
오늘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의 세례 축일입니다.
오늘 주의 세례 축일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가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실 분인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공현대축일은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이 드러난 날이고, 오늘 주의 세례축일은 구세주는 구세주로되 어떤 구세주이신가를 밝히는 축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청년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예수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에 대하여 잠시 언급하고 있을 뿐, 청년 시절에 대하여 전해 주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짐작하건대 예수는 고향 마을 나자렛에서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목수 일을 배우면서, 아주 평범한 청년 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죽은 후에는 가업인 목수 일을 물려받아서 생계를 꾸려 갔을 것입니다. 그 누가 보아도 아주 평범한 목수 청년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나이 30세쯤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세례자 요한이 주도하는 세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구세주 시대를 예고하면서, 오실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하며, 그 표시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르단 강가로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가슴을, 커다란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하고 기다리던 분, 예언자들이 거듭거듭 예고했던 분,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 오신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부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고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중에도 이스라엘을 지탱시켜 주었던 것은 구세주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었습니다. 구세주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그들을 잡초같이 억세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짓밟아도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때가 되어서 그 희망이 실현될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즈음에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던 예수께서도 당신의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모두 팽개치고 홀연히 집을 떠났던 것입니다. 예수의 출가(出家)입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 앞으로 나아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그 순간에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평범한 나자렛의 목수였던 청년 예수의 신분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늘이 열렸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징표입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사는 인간은 하늘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늘은 그 동안 인간들이 지은 죄로 인해 닫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닫힌 하늘을 누가 열 수 있습니까? 죄를 지음으로써 스스로 하늘을 닫은 인간은, 그 누구도 하늘의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나자렛에서 묵묵히 30년을 숨어서 사셨던 예수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셨고 하늘의 문을 여시는 분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의 공적인 등장은, 모든 인간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게됩니다. 하늘의 문을 여시는 예수는 온 인류의 희망이자 빛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그분을 주님으로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째로 성령, 곧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영으로 성별되십니다. 즉 예수는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신 분,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악의 영이 지배하던 어둠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축별되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악의 영이 지배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새로운 시대, 광명과 희망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 위에 성령을 비둘기의 형상으로 내려보내심으로써 이 사실을 장엄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성별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등장함으로써 예언자시대는 끝이 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 중의 예언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중의 예언자인 것은, 그분이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예언자의 시대도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끝이 나고 메시아 시대가 시작됩니다. 예언자의 시대는 기다림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시대는 그 기다림이 성취되는 시대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끝으로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나자렛 사람 목수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실 아들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 길을 펴 주리라.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 길만 펴리라.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
예언자 이사야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감싸주고, 소경의 눈을 열어 주며 묶인 이를 풀어 주어서 바른 인생 길을 걷게 하는 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원자이자 해방자로서 오신 분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세례를 통해서 나자렛 사람 예수의 삶의 모습과 방향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자렛의 평범한 목수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로, 가정을 지키고 생계를 꾸려 가시던 평범한 생활에서부터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생활로, 어머니 마리아의 사랑받는 아들로부터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로‥‥
그래서 세례를 받으신 이후 예수의 관심사는 하느님의 뜻 실천과 인간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분이 가정을 버리고, 고향을 등지게 된 것도, 어머니 마리아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시고 메시아 구세주로서의 삶을 시작하신 예수는 우리의 희망이자 빛입니다. 예수는 하늘을 여시어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시고 악의 영을 몰아내시어 어둠을 광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는 죄로 상처받아 상한 갈대처럼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꺾어 버리시지 않으시고, 치유하시고 감싸 주셨습니다. 그분은 삶에 지쳐 꺼져 가는 등불처럼 깜박이는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죄와 죽음에 사로잡힌 우리를 풀어 주셔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 삶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역시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삶의 방향을 바꾸셨듯이, 우리 역시 세례를 받음으로써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들입니다.
그전에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전에 우리는 세상의 원칙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리나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인 사랑의 원칙에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그전에 우리는 악마의 지배 밑에서 어둡게 살았지만,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지금의 우리는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광명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있어서 세례가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있어서도 세례는 우리의 삶의 모습과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의 근거와 의미를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생명으로 초대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 곧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통하여 이 땅에 빛과 희망을 심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생활을 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합시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16 주의 세례축일 루가 3,15-22 (다) 세례받은 이의 새 생활
김경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예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성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 범인들과 같이 잘못을 참회하고 회개와 죄사함이 필요한 이들이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오늘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으신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에게 모범과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30년간의 고요한 나자렛에서의 생활을 떠나서 이제 세례를 받음으로써 공적인 새 생활로 들어가시게 되어 이로써 그분의 생활에는 일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이 점에 유의하여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세례로 인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언제나 어둡고 방황하는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계, 새로운 창조를 이룩하여 영원한 평화와 행복의 안식처인 천국으로 인도하는 새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의 세례 기념 축일로서 성탄 시기가 끝나고 이제부터 연중 시기라고 부르는 전례상의 새로운 절기가 시작됩니다. 생각해 보건대 저 성탄날 밤에는 목자들에게 보이시고 공현의 날에는 이방인들에게 보이신 예수님은 오늘 또 많은 백성들 앞에 당신의 참 모습을 나타내십니다. 수많은 군중 앞에서 하늘의 천주 성부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아들로 정식으로 인정받으시며 당신의 사명과 권한을 장엄하게 받는 가장 엄숙한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는 거와 같이 사람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있는 동안 예수께서도 요한을 찾아 와서 세례를 받으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어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내려오시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천주 성부님의 말씀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세례 장소에서 예수님을 당신의 친아들로 소개하시고 이 순간부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그분이 당신의 아들이심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과 온갖 행동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 성령이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독생성자로, 또한 인간의 구원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된 구세주로 알아 받들어 모시고 또한 그분의 가르침과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는데 조금도 의심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한편 그 때까지 세례자 성 요한이 백성들에게 베풀던 세례는 회개자의 세례로서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였다는 표시로서 주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던 예수님이 죄인인 양 겸손되이 머리를 숙이고 세례를 받으심은 어디까지나 신약시대의 새로운 세례를 백성들에게 베풀며 새로운 생활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세계를 마련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세례란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새 생명을 부여하고 원죄와 본죄 등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는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받을 수 있게끔 배려하신 세례는 성령과 불로 우리를 다시 낳게 하며 영신적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케 합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루가 3,16)”라는 성 요한의 말씀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한 3,5)”하고 성령에 힘입는 새 생활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
신자 여러분!
우리는 이제 우리 각자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성세에서 오는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과 아울러 성령의 힘으로 새로운 삶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요르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가 받은 세례의 원형(原型)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결과가 우리 생애에도 있게 됩니다.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내려오시고 또 천주 성부께서 그분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참다운 크리스천 생활로 인도하시며 이끌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잘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 때 하느님께 약속 드린 바 있는 신앙생활에 충실한 것과 악마와 악신을 모두 끊어버리는 것에 용감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성체성사의 은혜를 잘 간직하고 또 성세 때 약속한 것을 성실히 지켜 나간다면 우리는 모두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되어 예수님이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기필코 들어갈 수 있게(요한 3,5) 됩니다. 아멘.
17 주의 세례축일 루가 3,15-22 (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자의 소명
황경원 신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은 주의 세례 축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다시금 새롭게 하여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의 세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세례성사를 통해 받은 은혜와 그 당시의 약속 등을 되새겨 보며, 지금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지, 다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공인
인류 구원을 목적으로 조용하고도 어두운 한밤중에 남몰래 탄생하신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당신의 사명을 시작하시려, 그 당시 요르단 강가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있는 동안,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려고 기도를 하고 계셨는데,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루가 3,21-7).
그 당시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베풀던 세례는 죄의 사함을 줄 수 있는 세례가 아니었고, 다만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다는 표지에 지나지 않는 세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기를 원하셨는데, 이는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면서 베푸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참된 사명임을 즉,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임을 증거하시려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같은 태도와 처신은, 당신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에 대한 공적인 승인이었고,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오셨음을 군중들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시기 전에, 먼저 세례자 요한에게 고개 숙여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아 파견된 사람이고,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임을, 예수님께서는 공적으로 승인할 필요성을 느끼셨기 때문인 것이며, 또한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세례를 베풀어주시기 위한 배려에서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씻는 성령의 세례
이 새로운 세례란? 성령의 힘으로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세례, 즉, 우리가 받은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루가 3,16).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예고로 말미암아, 이제 세례의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성령으로 인하여 자신의 잘못을 회개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씻는 물로 변화된 것이고, 육체의 갈증만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을 없애주는 물로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례는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합일시키는 성사로, 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묻히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될 것(로마 6, 3-11)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기의 운명을, 그분의 운명과 결속시키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례받은 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 특히 죽음과 부활이 새롭게 재현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러한 그리스도의 세례로 다시 태어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받은 세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우리의 생활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인식하고,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우리의 임무를 다시 한번 새롭게 다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42장 1-4, 6-7을 통하여 야훼의 종으로 선택되어, 세례받은 우리들에게 종으로서의 소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갈증을 풀어줄 생명수
오늘 제1독서를 잠시 살펴보면, \’야훼의 종 노래\’4개 중(이사 42,1-7;49,1-6; 50,4-9;52, 13-53,12) 첫 번째인 이 노래는 ‘야훼의 종\’이 지닌 영적인 모습을 그려주며, 동시에 그 종의 임무와 소명을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며,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충직한 이 종은, 이웃에 대한 자비와 연민의 정을 지닌 사람으로서, 정의를 세우고, 신의를 지키며, 모두에게 빛이 되는 일을 할 사람으로 제시됩니다.
즉, 세례받은 사람은 모두 이러한 소명을 지닌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모두는, 이 세상 어느 곳에 살든지 ‘야훼의 종\’으로서 주님의 빛을 이 세상에 전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기(水分)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하라 사막 밑에는 거대한 지하수가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하수가 어딘가를 뚫고 나오면, 바로 그곳이 오아시스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휘몰아치는 바람과 작열하는 태양의 복판을 횡단하는 사막의 나그네들은, 그들이 기진맥진하여 목마름에 허덕일 때, 그 오아시스는 그야말로 사막의 나그네들에게는 환희요, 축복이요,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필요하듯이 인정이 메말라버린 사막과 같은 이 황략한 우리의 도시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물로 새롭게 태어난 신앙인들은 도시의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수의 역할을 해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지하수는 땅 속에 묻혀 있어 사람들의 눈에 잘 뜨이지는 않지만, 오아시스에로 신선한 물을 공급하여 사막에 생명을 유지시켜 나가듯이, 신앙인들도 세상에 드러남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를 끊임없이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을 우리가 계속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떼르뚤리아노 교부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지금\’ ‘여기\’에서 충성스러운 종으로서의 나의 삶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18 주의 세례축일 루가 3,15-22 (다) 세례성사
이병문 신부
1. 세례성사에 대한 일반적 오해
우리는 미신자에게 신앙입교를 권할 때 이런 대답을 듣는 경우가 흔히 있다. -“좀 더 늙으면 교회에 나가겠습니다.\”-이 말은 어느 의미에서 교회에 가는 것은 오로지 죽음 후에 관한 내세적인 것이요,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개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에 대한, 일반적 오해의 한 표현이다. 이러한 생각은 세례성사에도 영향을 주어, 많은 사람들이 세례성사를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방법으로서의 개인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다.
또한 신자 자녀들의 세례 문제에도 많은 사람의 입에서 서슴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오고 있다- “우리 아이가 좀 더 커서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이 말은 얼른 생각하면 아주 교양있고 훌륭한 결단으로써 자유를 존중하는 부모의 자세와 같이 돋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세례성사에 대한 근본적인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말이다.
더구나 “물로 세례를 받지 않아도 천당에 갈 수 있다는데\”하는 말도 교리를 나름대로 이해했다고 자부하는 미신자 지식인에게서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구태여 세례를 받아 교회라는 집단에 붙들려 고생을 하느냐? 이다. 자유분망하게 살면서 지킬 것은 지키고, 하느님이 주셨다고 스스로 확신( ? )하는 양심에 따라 살며는 될 것이라는 자유분망한 생각이다.
여기서는 세례성사에 대한 신학적 배경이나 일반적 교리를 말하기보다는 세례에 대한 오해를 지적함으로써 신앙인으로서의 참 모습을, 세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대하는 것 띠 다.
2. 세례성사의 필요성과 효과
성 마태오 사가는 \”당신들은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 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시오\”하는 예수님 의 말씀 (28,19)을 인용하면서 자기 복음을 괄맺는다.
성령강림 이후 사도 베드로가 유데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절하자, 유데아인들은 “마음이 걸려\” 다른 사도들과 베드로에게 물었다.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 말씀하시고(사도 2,37-38) 세례성사를 집행하였다.
예수께서는 세례성사에 대한 명확한 말씀을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셨다. 즉 유데아인의 고관이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구세주와 그 나라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알고자 하여 여러 까지로 질문했다.
그때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이미 노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느냐 반문하자, 예수님은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라고 대답하셨다(요한 3 참조 ).
사도 바오로도 예수님이 죽으신 후 몇 년 안되어 개종할 때 다마스커스에서 세례를 받았음이 저명한 사실이며(사도 9,19), 또한 그의 여러 서간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은 모두 세례륵 받았음이 전제되고 있다(로마 6,3. 1고린 1,13-15).
사도 바오로는 더욱 세례의 은혜를 명백히 설명하고 있다. 세례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죽음을 건너. 마치 구약 이스라엘 사람이 흥해를 건너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가듯, 그리스도의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죽어 그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하여, 그리스도 안에 일치하며, 하느님의 가족이 되며,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3. 세례성사 예식과 그 의미
우리는 구원을 개인적인 사건으로 흔히 생각해왔듯이 세례성사를 죄 사함이라는 개인적 사건으로서의 소극적인 면만을 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세례예식을 부활축일 밤-오늘날 성토요일 전례에도 그대로 살아있음-모든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거행하고 있다. 이 것은 부활축일 밤이, 우리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축하하는 때이므로, 세례의 의미를 완전히 살리기 위한 가장 적절한 시기이며, 그 밤은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흥해를 건넘으로, 자유를 얻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 그 홍해의 물은, 파라오의 군대를 멸망시켰듯이, 성세수도 사탄의 세력을 멸망시켜, 세례자가 하느님의 가족이 되어 자유를 얻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게 됨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부활절이나 적어도 공동체가 함께 모여 부활을 축하하는 주일에 세례성사를 거행하므로, 공동체와의 관계를 깨닫게 하고 있다. 초대교회의 신앙의식과 여기에 호응한 세례의식에는 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백성이 출석하고 있었으며, 세례자는 먼저 성당밖에 모이고,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례 받는 사람을 하느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임을 나타내는 입장예식이 있어 – 오늘날에는 “세례자 성당 입장\”이라는 상징적 예식만으로 남아있다- 세례자에게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더욱 박해시대에는, 그리스도 신자의 모임이 일치와 공동체적 모습을 보일 때, 이교의 박해와 반대에 저항할 수 있으므로, 세례성사에 있어서 예식의 언어로부터 예식을 행하는 공동체까지, 세례받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으며, 세례받는 사람자신도 자기가 공동체의 산 활동적 멤버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이 지워져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사도들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구원을 위해 일치하고 있다는 것(1고린 12. 참조), 그들은 사제직인 하느님 백성의 나라이며, 심원한 돌로 구축된 신령한 성전( 1베드 2,5, 참조)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세례성사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정신의 초석이 되었다.
4. 세례성사에 대한 재음미
교부들은 모든 성사에서 나오는 열매로써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공동체적 정신과 구
원의 연대책임을 끊임없이 밝히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대적인 배경은 이것을 많이 상실하게 만들었다. 세례자가 많아 신자 공동체가 늘어 날 수록 더욱 강조되어야 할 공동체 정신과 구원의 연대책임은 점점 그 빛을 바래가고 있었다. 더욱이 개인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공동체적인 것을 경시하는 11세기의 유명론과 봉건시대사적 배경은 이것을 더욱 부채질하여 신앙 전반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세례성사를, 원죄와 본죄를 용서받는다는 신비적 사건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주로 생각하게 되어, 심지어는 적당한 시간에 한 두사람만 참석한 가운데, 공동체 참여 없는 세례가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나무는 보지만, 산을 보지 못하는\”격이다. 모든 성사, 더욱 세례성사는 그 본질로 보아도 여전히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구원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도 성사의 본질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따라서 원죄와 본죄를 개인적인 것으로서의 일면성 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고, 공동체의 파괴라는 점으로 이해되도록 해야할 것이며, 세례로써 원죄와 본죄의 사함은 진정한 공동체로의 복귀인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다는 점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세례시 대부모를 정하는 것도 신앙의 인도자로서만이 아니라, 동반자요 신앙의 연대성을 살리기 위한 것 즉 공동체성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세례의 통상적 집권자는 사제나 부제이지만, 위기 중엔 누구든지 심지어 비가톨릭 그리스도인이라도 교회의 정신에 따라, 신중한 의도를 갖고 유효하게 거행할 수 있다. 그러나 대세 때라도 몇 사람이 참석함으로서 공동체 정신을 살려, 세례의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혼자 침묵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한층 높은 신앙의 경지로 생각하는 개인신심 제일주의(Devotio Moderna)의 신앙자세를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세례식에서 “촛불 켜주는 예식\”의 의미도 살아날 수 있고, 선교의 의무감도,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위성도 깨달을 것이다. 믿음은 단지 내세적인 것도, 현세 기피적인 것만도 아니요, 인간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며, 또한 그 삶은 하느님 안에 놀라운 은혜로 성성되어져야 할 필연성을 깨달을 전, 이 글의 처음에서와 같은 우답을 없앨 수 있다
19 주의 세례축일 루가 3,15-22 (다) 마음에 드는 아들
김현준 부제
오늘은 주의 세례축일
주님이 세례 받으심을 기념하는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자신이 걸어가신 길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스스로 세례의 표본을 보여주신 주님께 무한히 감사드리고,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며 살아가고자 함에 있겠다.
주님이 받으시고, 또 우리가 받은 세례가 우리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갖을까. 또 사람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세례가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6,3-4에서 밝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라듯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그리스도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어떤 것이었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33년간 극진히 하느님 아버지를 섬기고, 철저히 이웃을 아끼신 삶이다. 그분은 “온 마음과 온 목숨과 온 생각과 온 힘을 다해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섬기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르 18,30-31)고 하셨다. 세례받은 사람은 아버지 하느님과 이웃을 죽도록 섬기고 사랑하다 어이없게 십자가에 죽어간 예수의 삶을 나도 그처럼 살아보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이다.
사람이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한 부류의 사람들을 저승은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공허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죽어서 간다는 영계를 공허로 보는 허무주의자들이다. 공허와 허무이기에 누가 뭐래도 이 세상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도 없고,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도 실패와 별다를 바가 없으며, 내세를 기다리며 희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저승을 하느님의 세계와 연결된 신비의 세계라고 확신하는 신앙인들이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삶을,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삶을,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은, 사랑과 성실이 정말 뜻이 있는 것일까 회의하지 않는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허위, 자유와 압제간에 차이가 과연 있을까 회의하지 않는다.
병자를 돌보는데 헌신하고,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바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하지 않는다. 거짓과 불의를 거스려 진리와 정의의 길을 사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정말 뜻이 있을까 회의하지 않는다.
비록 주의 사람들의 죽음과 슬픔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살이가 덧없는 것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주여, 내 끝장을 알려 주소서/ 내 (사는) 세월이 얼마나 가오리까./ 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알고 싶사옵니다 — 라고 하소연도 하고
인생은 그림자처럼 지나가고,/ 부질없이 소란만 피우는 것,/ 모으고 쌓아도, 그 차지할 자/ 누구인지 모르나이다/ 라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한에 잠기기도 하지만
당신이 내 세월을 손 한뼘 만큼으로 줄이셨으니/ 내 목숨은 당신 앞에 있는 것,/ 사람이란 당신 앞에 숨 한번 내 쉬는 날숨과 같으오이다(시편 39,5-7)라고 하느님께-하느님의 세계와 연결된 죽음에 기대를 걸고 희망을 가지며 살아간다.
세례가 갖는 의미는 선택이다. 믿는 이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 말씀 한 마디만 믿고, 사람이 살아가는 조건(끈)들인 고향, 친척, 부모를 떠나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떠났고(창세 12), 자신의 인간적인 희망(이사악)을 거스려 하느님을 희망한 아브라함. 그래서 믿는 이의 으뜸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의 후예가 되길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받은 사람들은 희망의 하느님에게 희망을 걸기에 우리 인생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이 선택한 삶이 과일 광주리에서 두눈을 감고 과일을 집어내듯이 그렇게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죽도록 하느님을 섬기고, 철저히 이웃을 아끼고, 십자가에 비명황사한 그 아들의 삶이, 그 아들이 걸은 길이 허무요 공허가 아니라는 것을, 하느님은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부활시킴으로 증명해주었다. 또한 인간적인 희망을 거스려 하느님을 희망한 아브라함의 삶이, 그가 걸은 길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그 자손을 번성시켜 믿는 이의 아버지가 되게 함으로써 증명해주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아브라함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아브라함에게 베푼 갚음을 약속하신다. 우리가 그와 같은 삶과 길을 걸을 때 그와 똑같은 갚음과 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러기에 너무 쉽게 인간의 조건, 환경, 시간, 인물에 따라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삶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저 사람은 나와 맞지 않으니까, 어떤 회에서 하는 일이 내 뜻에 맞지 않아서,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생활이 좀 안락해지면, 지금의 형편으로는 힘들어서, 좀 나이를 먹어서 등등의 이런 인간의 조건, 시간, 환경, 인물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삶을 사는 선택을 늦출 수 없고, 더욱이 선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중단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에게 있어서 “사랑받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17 주의 세례축일 루가 3,15-22 (다) 신앙생활은 세례를 완성하는 생활
묵상 길잡이 :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당신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셨다. 우리에게도 세례는 새 생명의 시작이며, 새 삶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세례가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듯이 우리의 세례도 일생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1. 주님의 세례는 공생활의 출정식
세례 축일은 가나 혼인잔치의 첫 기적과 함께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를 온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는 또 하나의 공현이라 할 수 있다.
70~80년대를 지나면서 한두번쯤 민주화 투쟁이나 임금 투쟁을 하면서, 운동장에 모여 선언문이나 성명서를 낭독하고 구호를 외치며 전의를 불태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출정식은 우리의 사명 이 무엇인지, 왜 이런 일을 하는지를 확인하는 자리인 것이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님의 세례는 30년간의 사생활을 마감하고 당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공생활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예수님은 세례를 통하여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이제 그 출발을 하시는 것이다.
2. 세례 때 확인한 주님의 사명
오늘 제1독서에는 \”여기에 나의 종이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이사 42,1)하는 \’야훼 종(Ebed Yayweh)의 노래\’가 나온다. 이사야서엔 이 ‘야훼 종의 노래\’가 네번이나 나온다.(42,1-9. 49,1-6. 50,1-11. 52,13-53, 12)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종(ebed)\’이란 단어는 노예라는 뜻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을 \’아훼의종\’이라고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다. 이\’종\’이란 단어는 아래로는 노예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다음으로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리고 위로는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다 지칭하는 단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들려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신 장면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은 \’내 사랑하는 종\’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단어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사야가 말한 \’야훼 종\’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불림을 받았다고 확신하신 것이다. 그러면 이사야가 말한 ‘야훼의 종\’은 어떤 사명을 지닌 분인가? 오늘 제1독서는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철 있는 이들을 놓아주어라\”(이사 42, 67-7)며 야훼 종의 사명을 밝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례 때 확인한 당신의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예수님이 자기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확인한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것\’과 같은 사명인 것이다.
3.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주님의 사명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루가 12,50)고 하신적이 있다, 이는 분명 당신의 십자가상의 죽음의 세례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세례 때 받은 당신의 사명을 위해 온 이스라엘을 동분서주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야훼의 종\’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묵묵히 끌려가‥‥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할\”(이사 53,7-10 참조)것임을 아셨고, 끝내 그 길을 가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로 하셨다.
4. 우리의 세례도 매일 완성돼야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도 바로 예수님의 세례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세례로 그분의 자제가 되었다. 모든 성사가 그렇듯이 세례도 종말론적인 것이다. 이제 막 결혼한 부부는 분명히 혼인성사로 부부가 되었지만, 혼(魂)과 혼(魂)이 하나되는 結婚(결혼)의 경지에 이르기에는 너무나 불완전한 부부인 것이다. 이미 부부지만 아직 완전한 부부가 못된 것이다. 모든 성사가 다 그렇다. 세례도 마찬가지다.
세례를 받으면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이지만 너무나 부족한 제자인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안에서 세례 때 받은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면서 묵은 껍질을 벗으며 나날이 새 생명으로 새로 나야 할 것이다.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광경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우리도 매일의 삶 안에서 세례로 받은 천상 생명의 씨앗을 싹 틔우고 가꾸어서, 마지막 죽음의 세례 때 모든 죄의 허물을 벗고,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생명의 나라로 갈 것을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