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

 

연중 제 3 주일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오늘의 제1독서와 복음에서는 동일한 주제가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의 예언(제1독서의 내용)이 그가 예언했던 바로 그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의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태 4,15-16; 이사8,23-9,1 참조)

두 독서간의 일치점은 비단 해방과 구원의 결정적 사실이 전개되고 있는 지형적 동일성에서뿐만 아니라 ‘빛’이라고 하는 그 상징적 개념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그 ‘빛’이라는 개념을 예수 공쳔 때까지 성탄시기 동안 내내 접했고, 또 지난 주일에도 그에 대해 깊이 다루었다.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말했다.(49,6) 오늘의 응송도 같은 주제를 되풀이하고 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시편26,1)

시편은 그 빛이라는 상징적 개념의 의미를 우리 각자가 무수히 접할 수 있는 생활한 체험에 비추어 생명, 복락, 행복, 구원, 기쁨 등등과 같은 뜻을 지닌 말로 제시하고 있다. 빛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안전도 또 어떤 움직임이나 성장의 가능성도 없다. 따라서 ‘어둠’은 죽음과 같은 말로 이해된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캄캄한 땅’이라는 대목을 “죽음의 그늘진 땅”(마태4,16)이라는 말로 어려움 없이 바꾸어놓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과 구원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어째서 그분이 ‘빛에 싸여 계신 분’ 또는 ‘빛 가운데 계신 분’(1디모 6,16참조)이시며 또한 ‘빛’ 자체이신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서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1요한 1,5) 그리스도 마찬가지이시다. 그래서 요한 복음사가는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들 비추는 참 빛”(요한1,9)이라고 한다.



“즈불룬과 납탈리는 큰 빛을 볼 것이다.”

마태오에 의한 복음 내용으로부터 살펴보자. 우리는 그것과 더불어 이사야서의 내용(8,23ㄴ-9,3)도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세 부분으로 쉽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으로 가심(4,12-17).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심(4,18-22). 예수의 활동에 대한 간략한 요약(4,23). 단 마지막 두 구절(4,24-25)은 빼고 있다.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러나 나자렛에 머물지 않으시고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 ‘즈불룬과 납탈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들의 갈릴래아 …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4,12-16)

여기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바다’)에 있는 가파르나움에 가신다는 사실을 다른 공관복음사가들(마르1,21; 루카4,13)이나 요한 복음사가(2,12)와는 달리 앞서 예견하고 있다. 어째서 그랬을까? 특별한 동기가 무엇일까?

그의 복음의 전체적 구조에 비추어 볼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본적 동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동기는 가파르나움이 옛적에 즈불룬과 납탈리 두 종족이 쫒겨나 있던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마태오는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빌레셀 3세의 군대에 의해 침략을 당해 박해를 받고 있던(기원전732년경) 그 민족들에게 곧 해방이 찾아오리라고 선포했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8,23-9,1)이 가파르나움에서 실현됨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이 모든 사실이 ‘빛’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볼 때 그 당시 그 지역에 찬연히 빛난던 그 ‘큰 빛’은 분명 이사야가 선포했던 그 정치적 해방보다도 더 의미깊은 해방을 모든 인간들에게 가져다주시는 그리스도이시다.

둘째 동기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 국경지방에 많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도 관심을 두고 있는 점에서 비롯한다. 사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방인들의 갈릴래아’ 또는 더 정확히 말해 ‘이방인들의 지역’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러한 특별한 상황을 감안하여 비록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위해 복음을 기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실제로 그의 복음은 이러한 보편적 관점에서 시작될 뿐만 아니라 또한 끝맺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르쳐라 …”(마태 28,19) 아마도 바울로 사도의 마음속에 그토록 열렬히 타올랐던 그러한 ‘선교’열의에 여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있던 그리스도교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회개’와 ‘하느님 나라’

그때 그 민족들을 위해 찬연히 빛났던 그 ‘큰 빛’은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앞서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하나의 ‘큰 빛’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한다. 그래서 그는 즉시 그리스도의 선교활동을 아주 간략히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하고 말씀하셨다”(17절)

이 마지막 표현 (‘다가왔다’)은 ‘하늘나라’(보다 일반적인 표현인 ‘하느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를 지닌 마태오 복음사가의 표현)가 이미 그리스도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고, 또 그분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하느님의 왕권을 뜻하기 때문에 현재혀으로 해석되든 또는 현재완료형으로 해석되든 그 근본적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역자주 : ‘다가왔다’는 희랍어 본문의 ήrrνkεν(engiken)의 번역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 의미를 현재의미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현재완료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오직 종말의 상황에서만 끝이 나게 될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에 놓여 있는 실체이다.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마태 6,10참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바로 이처럼 이 세상을 치달아 오고 있으며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완성되기를 필요로 하는 ‘하느님 나라’의 절박한 요구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의 마음과 정신과 생활습관의 깊은 변화를 촉구하신다. ‘회개하라’ 이 말의 의미는 함축적이며 대단히 깊다. ‘정신(nous)을 바꾸어라’라는 뜻의 희랍어 metanoeite로부터 시작해서 아마도 그 개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히브리어 즉 ‘뒤로 돌다, 길을 바꾸다. 생활을 바꾸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Shubh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의미를 총망라해서 볼 때 인간의 내면으로부터의 완전한 ‘전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메시지 중심은 ‘하느님나라’의 선포이며, ‘회개’는 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아니 ‘회개’ 자체가 이미 하느님 나라의 결실이며 그 나라의 현존의 표지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즉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아직 멀리 있게 될 것이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큰 빛이 번뜩이며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개’의 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구체적인 예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첫 번째 네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통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가시다가 베드로라는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거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이번에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셨는데 그들은 자기 아버지 제베대오화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4,18-22)

라삐들도 율법 해석을 습득하기 위해 그들을 ‘따르던’ 제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름’은 완전히 다른 일디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여 부르시는 것이지 제자들이 그분을 선택하여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특별한 사랑과 계획을 전제로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교설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분의 인격을 추종하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하시며 그들을 ‘벗’(요한15,15참조)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그들과 더불어 감정과 생각을 온전히 나누신다. 셋째로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여정을 다시 밟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 첫 번째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름의 역설적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선뜻 용기 있게 하는 대답 그 자체가 이미 그들의 마음 상태를 입증해 주고 있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들은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예수를 따라갔다.”(20절, 22절)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번씩이나 말하고 있다.

장차 사도들이 될 그들이 예수께 자신들을 온전히 의탁하기까지에는 점진적 과정 같은 것이 있다. 맨 먼저 그물을 버리고 그 다음에는 배를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버지까지도 떠난다. 즉 그리스도를 따름은 이세상 모든 것 – 가정까지도 – 으로부터의 결별이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결별이기도 하다. ‘자기를 버리고’이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가 ‘회개’를 통하여 완전히 바꾸어져 다른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저 과거의 역사일 뿐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복음을 읽는 모든 이에게 제시하는 삶에 대한 주장인가? 분명,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의 기술을 통해서 그분이 사람들에게 던지고 계시는 근본적인 신앙의 요청과 다른 무수한 요청에 대한 응답의 모델도 제시하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첫 번째 네 제자들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빛이 내맡겨 그분을 따르기로 방향전환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모범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오늘 제2독서도 ‘회개’를 중심 주제로 하여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오늘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를 통해 위신이나 공명심 또는 논쟁이나 격한 감정 같은 순전히 개인적인 일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려 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노한 어조로 비난한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 내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1고린1,10-13)

교회 안에서 서로 갈라지거나 대립된다는 것은 교회의 개념 자체를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마치 초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단일한 ‘하느님의 집’(1디모3,15참조)을 이루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분의 권능하에 모여진 이들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실체이다. 바울로나 베드로와 같은 사도가 됐든, 또는 어떤 뛰어난 개혁가가 됐든 어떤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교회란 생길 수도 이루어질 수도 없다. ‘불러모으시는 분’이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교회의 유일한 기초는 그리스도이실 뿐이다.(1고린3,11)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단일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역사를 통해 수없이 갈라져 왔으며 오늘날에도 처참하게 분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갈라 놓았으며(1고린1,13참조) 또한 바울로나 아폴로나 또는 루터나 칼빈, 더나아가 칼 마르크스가 그들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만일 그리스도 신자들이 교회를 구원한다기보다(교회를 구원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자신들만이라도 구원하고자 한다면 분열과 자멸을 초래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으로부터 ‘돌아서야’한다.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참된 일치운동은 내적 회심 없이는 있을 수 없다”(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7)고 단언하는 것은 전혀 무근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간에 ‘서로 갈라지는’ 악한 표양을 거듭 체현하고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일치를 위한 기도가 전개되고 있는 이 시기에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서로 갈라져 있다는 것은 우리 서로가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성부와 ‘하나가’ 되신 것처럼 당신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한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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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3주일 주일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

    -가해 연중 제 3주일-

    1. 말씀읽기: 마태4,12-23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마르 1,14-15 ; 루카 4,14-15)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마르 1,16-20 ; 루카 5,1-11)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과 군중 (루카 6,17-19)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를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릴 것입니다. 나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꾸며야 하겠습니다.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직분을 준비하기 시작하신 곳이 갈릴래아였고,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활동도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려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성령의 인도를 받으십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루카 4,1-13)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과 함께 하십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뜻 안에서 살아가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카파르나움은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입구에서 서쪽으로 10리쯤떨어진 곳에 있는 어촌입니다. 거기에는 세관도 있었고(9,9-13 참조),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의 소부대도 주둔해 있었습니다(8,5-13 참조). 그리고 카라프나움 회당 아래에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으니,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사시는 동안 그 곳에 묵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들은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삶이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경계를 없애고 우리를 뒤섞어 놓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복음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유다인들의 사고를 넘어 온 인류에게로 확장됩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자는 그들에게 임마누엘이라는 메시아의 빛이 비칠 것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구원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 그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들에게 빛이 떠오른 것입니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그런데 갈릴래아는 유대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방인의 갈릴래아”로부터 솟아났습니다. 왜 유다인들이 갈릴래아를 무시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① 예수님시대의 갈릴래아는 유대인들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13-12세기경 열두 지파 중 아셀, 즈불룬, 아싸갈, 납달리 그리고 후에 단 지파가 이 지역에 들어 왔을 때, 그들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만났고 그들과 타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정착 과정 만이 아나라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600년 동안 갈릴래아는 외세의 강점과 지배 아래서, 순수한 인종을 보존할 수 없었습니다. 기원전 783년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 빌레셋이 갈릴래아 지역과 요르단 강 건너편 길르앗 지역 및 지중해안 지역을 병합한 이래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 열강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갈릴래아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민족들의 이동이 빈번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맨 처음 언급한 “이방인들의 갈릴래아”(이사8,13-9,1; 마태4,15)는 잡다한 인종들의 거주지인 것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민이 순수한 유대 민족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갈릴래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갈릴래아를 다스리지 못했기에 갈릴래아의 이방화는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서보다 심화되었습니다.


    ②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인의 강한 액센트를 조롱했습니다. 갈릴래아인은 “H”,가 없는 “아레프”와 “H”가 달려 있는 “하인”을 똑같게 발음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갈릴래아인이 어느 날 한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소?” 유다인은 대답하였다. “어리석은 갈릴래아 촌놈이군. 타는 하모르(당나귀)인가? 마시는 하마르(포도주)인가? 입는 아마르(모직)인가? 먹는 임마르(양)인가? 알 수가 없구나.”


    ③ 갈릴래아인들은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살고 이방인들의 영향에 대해서 조심성이 덜했기 때문에 유대 전통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고, 남부 유대 지방 및 예루살렘과 긴장 관계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환상적인 민족주의자들이었고 자유를 사랑하는 자들로서 더러는 혁명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그러한 갈릴래아에 대한 남부 유대적 시각은 부정적이고 때로는 경멸적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갈릴래아”라는 말은 그래서 때로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④ 갈릴래아 지역은 비옥한 땅이어서 농업 소출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갈릴래아 사람들은 로마 정부의 무자비한 세금 징수와 팔레스타인에서 부과된 종교세(11조)는 비옥한 지역 농민들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헤로데 왕은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기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농 지주들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 땅을 포기하게 되고, 소작인으로, 그 다음에는 날품팔이로 몰락했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등지에서는 그들의 땅을 가진 지주들이 늘어갔습니다.

       갈릴래아 주민 대부분의 생계비는 연 200데나리온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이니 얼마나 열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들을 시골뜨기들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멸시의 대명사였습니다. 또 바리사이들은 그들을 저주받은 자들로 보았는데, 그들이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지주들은 곡물을 매점한 후 곤궁기에 방출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권력자들은 갈릴래아의 주산물인 밀, 기름, 포도주 등을 엄격하게 독점 통제해서 무역업자들과 직거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습니다.


     ⑤ 갈릴래아는 유다의 편에서 보면 지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변방에 속하는 지방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갈릴래아”라고 불렸습니다. 갈릴래아에 사는 사람들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는 약속된 땅의 변두리로, 그 주민들은 하느님 백성에 속하기도 어려운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소외 계층과 외국인들은 유다인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유다인들로부터는 멸시를 받아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에 구원은 그들로부터 시작하여 세상 끝까지 흘러갈 것입니다.

     갈릴래아가 왜 이방인의 갈릴래아로 불렸으며,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족속으로 취급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경제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다면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한 자들의 기막힌 가난, 노예들이 겪는 부자유, 그리고 막노동을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궁핍한 생활을 아셨습니다. 차별받는 것을 아셨고, 무시당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메시지는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회개를 요청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힘과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하며, 그 사랑과 자비를 입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린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입은 사람처럼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습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십니다. 내가 내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충실하게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또 다른 소명을 부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가 보던, 보지 않던 간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성실함을 늘 보고 계십니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런데 사람을 어떻게 낚을까요? 낚아서 어디에 쓸까요?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사람은 고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고, 그 고기를 잡아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사람들이 쉽고, 편하게 먹게 하기 위해 말리기도 하고, 생으로 먹을 수 있도록 제공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낚아서 더 충실하게 하느님을 향하도록 만들어 주고, 하느님께는 기쁨을 드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낚아서 그들이 하느님을 믿게 하고, 자신들과 같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의 보수처럼 그런 보수는 받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것 때문에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고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신앙이라는 배를 타고, 믿음이라는 그물을 세상에 내려, 사람들에게 “신앙인의 멋진 삶”이라는 미끼를 보여주고,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끌어 올리는 사람들입니다. 나 또한 신앙의 배에 몸을 싣고, 믿음의 그물을 내려, “신앙인의 삶이라는 미끼”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즉시 응답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즉시 응답하는 것”이기에 다른 모든 것들은 생략하였을 것입니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철저히 믿어진 복음만이 생활을 변화시킵니다. 마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이들은 지금까지 충실하게 해 왔던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로 탈바꿈 합니다. 새로운 생활의 시작은 예수님과 역사가 매순간순간 보여줄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신하기 위해 과거와 단절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과거의 고기잡이 기술은 그것이 요구하는 신체적인 자질 외에 윤리․도덕적 자질 즉 인내, 강인성, 주위의 위험에 대처할 능력, 희생정신 등으로 변모되어 남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모범적 예” 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부르신 분이 정해놓은 길을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행한 첫 걸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그의 과거 생활과 갈라놓습니다. 이렇게 해서 따르라는 부르심은 즉시 새로운 상황을 만듭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전에 있던 삶의 방식은 버려야 합니다.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따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순명하는 정신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순명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결코 응답할 수가 없으며, 참된 신앙생활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그물(아집, 교만, 위선, 게으름, 욕심, 불신, 불순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봅시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봅시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로서 당신의 양떼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나 또한 형제 자매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만”이 아니라 “모두”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듭니다. 이들이 서로 다투듯 예수님께로 모여든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한 점도 있었으나, 한 편 이기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곧 예수님의 기적으로 육신의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셨습니다.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에게는 말씀을 들려 주셨고, 또 치유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병도 다 고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오던 간에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내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예수님께로 왔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하지만 예수님께로 나아온다면 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나는 내 일상의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습니까?


    2.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내가 갖추어야 할 자질은 무엇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3주일



             1. 서경윤 신부(가)/ 2                    2. 김현준 신부(가)/ 3

             3. 강길웅 신부(가)/ 5                    4. 최기산 신부(가)/ 7

             5.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가)/ 9    6. 조순창 신부(가)/ 10

             7.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가)/ 12   8. 김몽은 신부(가)/ 13

             9. 김몽은 신부(가)/ 16                   10. 오성백 신부(가)/ 18

             11. 이계중 신부(가)/ 20                  12. 하상진 신부(가)/ 22

             13. 최인호 작가(가)/ 23                

            

    1.           연중 제3주일  마태 22,34-40 (가) 무작위 사랑 

                                                                      서경윤 신부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이 이 두 (사랑의)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마태 22,40)

      신문에서 「무작위 살인」이란 제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라도 죽어라는 뜻으로 병원에서 요구르트 병에 독약을 섞어 넣어 둔다든지, 술 취한 상태에서 여의도 광장을 승용차로 질주한다든지 한 경우에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작위 사랑」이란 말도 있을 법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랑을 실천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관리하지 않은 낚시터는 어디나 지저분하고 더럽습니다. 선배 낚시꾼들이 버린 쓰레기가 널려 있고, 음식물 찌꺼기는 썩으면서 악취를 풍깁니다. 그래서 나는 후배로서 우선 낚시터 청소로부터 낚시를 시작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관리를 하는 낚시터도 상황은 비슷한 곳이 많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화장실은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래서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구역질과 욕지기가 동시에 나옵니다. 한번은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바로 이것이 「무작위 사랑이다」란 생각을 했습니다.


    내 뒤에 누가 일을 볼지 모르지만, 누구라도 그 사람은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니까 기쁘게 청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얘기로 구라파에 가면 공중 화장실의 상태가 대체로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도 공통점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화장실 낙서입니다. 이쯤에서 낙서 얘기는 각자 상상에 맡기고 그만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근년에는 소위 기초 질서위반이란 규칙이 생겼습니다. 이 규칙은 대체로 공중 질서를 잘 지키자는 뜻으로 벌금을 매기는 제도로 알고 있습니다. 공중도덕을 잘 지키자고 아무리해도 잘 안되니까, 이제는 벌금이 무서워서라도 강제로 지키게 하는 규정인가 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강제적인 것에 반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쩐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잘 지키게 하는 방법이 없어서 그랬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명칭만큼은 바꾸었으면 합니다. 기초질서 위반자를 적발하지 말고 「무작위 사랑 실천자」를 선택하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을 선택하여 누구에게 돌아갈 지도 모르는 사랑의 헌금액을 정해놓으면, 돈을 내더라도 기분이라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받은 돈으로 여러 가지 공중시설을 확충하고 관리하는데 사용한다면 어떨까 합니다.


    길에다 침이나 껌을 뱉으면 그것을 청소하기 위하여 사람이 필요할 것이며, 이를 청소하고 나면 그 길을 누구나 기분이 상하지 않고 즐겁게 다니게 될 것이기 때문에, 무작위 사랑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법의 명칭도「무작위 사랑 실천 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법이란 항상 누구를 구속하고 벌을 주는 부정적인 인상만을 심어 줄 것이 아니라, 선행을 부추긴다는 긍정적인 인상도 함께 심어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지금보다 기쁘게 법이나 규정을 따르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벌이 무서워서 강제로 법을 지킨다는 것은 어쩐지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것 같고, 따라서 인격적인 차원에서 자존심이 상합니다.

    무작위 사랑의 실천은 꼭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부분에까지 적용될 것입니다. 공중 목욕탕에서 서로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 서로 지켜야 할 도의가 있습니다. 무엇이나 공유하는 곳에서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일 것입니다.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대상을 찾아 도우는 것이 아니라,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헌금을 기탁하는 것도 무작위 사랑의 실천분야가 될 것입니다. 혜택을 받는 사람이 누구이든 불우한 사람이면 누구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방법으로 소년소녀 가장을 위하여,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하여, 수재민을 위하여 등등 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려고, 표나게 큰 사랑의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흔하고 작은 그래서 기초 질서를 지키고 누구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표나지 않은 사랑부터 실천하는 것이 필요한 오늘입니다.






    2.             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 (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김현준 신부 


    근 20년만이다. 신학교를 졸업한지 19년 만에 모교에서 한달을 살아볼 기회가 있어 살고 있다. 옛날 그대로 있는 성당, 새로 세워진 도서관 등을 둘러보며 회상에 잠기며 산책하다가 0신부님을 만났다. 일을 찾으시고, 일의 처음과 끝처리가 늘 같은 성실하신 분이시라, 요즈음도 새로이 심혈을 기울여 꾸미시는 박물관을 구경시켜 주셨다. 신학교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들, 옛날 제의와 제구 등‥‥ 한자리에 모으니, 귀하기 그지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 한쪽에는 사해와 시나이 산의 돌도 있었다. “제게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워온 돌이 있는데요” 말씀드리며, 내 책상 한쪽을 지키고 있는 검고 작은 돌멩이를 떠올렸다,

     지난 1989떤 11월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구약의 출애굽 여정을 따른 사막횡단과 시나이산을 등정하며, 이스라엘에 들어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성지순례였다. 그 성지순례 중 제일 좋아했고 또 오래 머물렀던 곳이 갈릴래아 호숫가였다.

    갈릴리 바다라고도 불리는 갈릴리 호수는, 예수님 공생활의 출발점이자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 선포를 시작으로 첫 제자들을 부르시고(마태 4,17-19), 많은 설교와 빵의 기적 등을 행하셨다. “나를 따르라”나는 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붉은 노을이 물드는 저녁, 새들이 찾아오는 아침마다 묵상시간을 가졌다. 불어오는 바람따라 갈릴리 호수는 물결을 쳤다.


    그 물결은 호숫가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돌들에 게 부딪혔다. 그러면서 작은 소리를 내곤 하였다. 죽음의 바다 사해가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깔’로 내게 다가 왔다면 갈릴리 호수는 ’소리’로 다가왔다. “나를 따르라” (마태 4,19).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그물을 치라”(루가 5,4).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그래, 무얼 좀 잡았느냐?”(요한 21,5).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7).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던 예수님은 그물을 손질하던 이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신다. 당신은 종교적, 역사적으로 소외 받던 삶의 자리, 이방인의 땅 갈릴래아에 둥지를 트시고, 첫 제자들에게는 자기 삶의 둥지를 떠나게 하신다. 따르기 위해 자기 삶의 전부인 고기를 잡는 그물과 배와 아버지마저 떠나라고  하신다. 그리고 새 삶의 자리, 사람 낚는 어부로 투신하게 하시는 그분 부르심의 신비를 나지막이 노래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 예수님 말씀 따라서 모든 것 버린 사람들, 그 말씀 따라 살아가는 주의 제자 되었네‥‥‥”(김정식 작사, 작곡)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던 예수님은 어부들을 불러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시켜, 세상의 바다에 배를 띄운다. 그것은 호수를 삶의 터전으로 해서 그물을 던지고 끌어들이는 그들의 삶이, 호수를 가장 닮아서일까? 당신의 제자 된 삶은 갈릴리 호수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일까?

      

    갈릴리 호수는 북쪽의 레바논 산맥의 헤르몬 산으로부터 물줄기를 받고 다시 물줄기를 흘려보내어 요르단 강을 이룬다, 이렇게 물을 받기도 하고 나눌 줄도 알기에, 갈릴리 호수는 많은 물고기들이 사는 생명의 바다가 된다. 요르단강의 종착지는 사해이다, 사해는 염도가 높아(보통 바다는 4%인데, 40%)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해 죽음의 바다라 불리지만, 받기만 하고 베풀 줄 모르기에, 그 스스로도 죽음의 바다가 되어간다.


    사람 낚는 어부로 살자


    오늘도 갈릴리 호수의 ‘소리’를 듣는 제자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 세상의 바다에 띄워진 작은 고깃배로서, 그분의 탄생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에 투신한다. 이 삶의 모습을 노래한 시 한편을 읊조렸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위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 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어부, 김종상),

      

    그렇다. 예수의 부르심에 따라 어부로 산다는 것은, 달라기만 하기보다 베풀 줄도 아는 갈릴리 호수의 기적을 사노라면 이루는 기쁨의 날도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오늘도 그물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흘러보내고 또 받으면서, 호수는 밝고 푸르러지면서, 점점 생명의 바다가 되어가고, 어부는 정신차리는 것이 아닐까,






    3.              연중 제 3 주일   마태 4,12-23 (가) 참 빛이신 그리스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8,23b~9,3 (외국인 지역의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제2독서 Ⅰ고린 1,10~13.17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마십시오)

    복 음 마태 4,12~23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려고 예수께서는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세상은 그리스도라는 빛을 통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을 모른다면 그는 환한 대낮에도 칠흑같은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즈불룬과 납달리는 이스라엘 북부에 있는 갈릴래아 지방을 말합니다. 이 지방은 지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형상으로 볼 때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가 는 길목도 되었고 또 동과 서를 잇는 교량도 되었기 때문에 외세의 침공이 잦았고 그래서 주민들 대부분은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기원 전 733년 경에는 강국 앗시리아에 의해 즈불룬과 납 달리는 제일 먼저 침략을 당해 그들은 종으로 끌려갈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 어둡고 숨가쁜 때에 이사야는 즈불룬과 납달리 주민들에게 빛과 희망에 찬 미래를 선언한 것이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성탄 밤미사 때마다 울리는 독서가 바로 그 말씀입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 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이사야가 외친 그 빛이 바로 그 갈릴래아 지방에서 빛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암담한 지역에서부터 하늘의 빛이 비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지역에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특히 그분의 빛은 절망과 어둠 속에 있는 인생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특히 가치가 있는 것이지 밝은 대낮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끔 대낮에 거리의 가로등이 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는 그 등이 켜졌는지 조차도 대부분 모릅니다. 태양빛에 가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가 떨어지고 나면 그 가로등은 큰 가치가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밤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일천억개나 되는 별의 집단인 성군이 우주에는 약 일천억개 가 있다고 하니 실로 이 우주가 얼마나 큰지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밤이 없다면 우리는 그 사실조차도 모르게 됩니다. 태양이라는 빛에 가려 우주의 놀라운 신비를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두울 때 더 놀라운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결과가 됩니다. 지금 어두운 것은 참으로 답답하지만 더 위대한 것을 바라 볼 수 있으며, 지금 환한 것은 당장은 좋지만 더 위대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성서에도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는 위선 때문에 예수님을 몰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천한 사람들은 알아봅니다.


    마찬가지로 모자람이 없이 잘 살고 있는 사람들과 고통과 눈물이 없이 풍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참 행복의 의미가 뭔지를 잘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죄없이 선하게 사는 사람들과 법없이 잘 사 는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빛이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없어도 이미 착하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눈물을 흘려 봐야 참 기쁨을 알게 되고 내적인 투쟁과 몸부림치는 전투를 겪어 봐야 평화의 의미를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라는 참 빛이 정말로 필요한 분들입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어둡다는 진정한 회개와 뉘우침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가 아니고는 빛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속입니다. 세상도 사람을 속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많은 경우 아주 잘못 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에 그 인생이 불행한 것 같아도 그리스도의 빛으로 바라보면 절대로 불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축복이요 은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는 빛을 통해서 보면 사람의 실체와 그 진실된 모습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 인생에 해가 되는 자들도 있습니다. 나를 시기하고 모함하고 있으며 사사건건이 시비요 트집입니다. 이들이 대단히 밉고 심할 땐 저주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면 그 들도 내 사랑하는 형제요 경우에 따라서는 은인도 됩니다. 그리스도 의 빛 안에서 보면 세상에 은혜아닌 것이 없으며 복아닌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그 눈이 지혜의 눈이며 복된 눈입니다. 그런데 그 눈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진심으로 회개할 때 열려집니다. 하늘 나라라는 위대한 보물은 회개라는 눈을 통해서만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특히 어렵고 힘든 분들, 그리고 외롭고 슬픈 분들은 참 빛이 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바라봅시다.






    4.               연중 제3주일    마태 4, 12-23 (가) 회개하라!

                                                                최기산 신부


    입에 거품을 물고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외쳐대는 젊은이, 때론 중늙은이를 전철 안에서 가끔 보게 된다. 알고 보니 그들이 다니는 학교 교육과정의 한 부분이란다. 용기를 심어주고, 선천성 부끄럼증을 치유하려는 처사일 것이다.


    회개의 의미


    회개의 참뜻은 무엇일까?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펑펑 가슴을 치는 것일까? 아니다. 지금까지 자기 멋대로 자기 뜻대로 살던 사람이 회개했다면 자기 멋, 자기 뜻을 완전히 버리고 하느님 뜻대로 사는 것이 회개다. 가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말한다.


    어떤 남자가 매일 술주정이나 하고 아내와 자식을 못살게 굴었다면, 회개한 뒤엔 술을 끊고, 아내와 자식을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힘겨루기를 하며 지독히 서로 미워했다면, 회개한 뒤엔 서로가 순한 양처럼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용서와 사랑으로 거듭나야한다.

    세상일에만 급급하여 하느님 뜻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살았던 사람이 회개했다면, 하느님 뜻대로만 살아가는 새사람으로 다시 나야 한다. 회개하기 위해서는 인간의식의 완전 개조가 요구된다 하겠다. 그러면 누가 회개해야 하는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는 사람들만 회개해야 하는가? 아니다. 사도 요한은 스스로 죄 없다고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회개가 요구된다.


    무엇을 위해 회개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위해서 회개해야 하는지률 이렇게 설명하신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우리 눈 앞에 다가왔으니 그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준비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병자들이 치유되고, 마귀가 쫓겨나고 있기에 하느님나라, 즉 하느님의 다스림은 다가왔다는 것이다. 사탄이 오랫동안 다스렸으나, 이젠 하느님의 아들이 오시어 사탄의 지배를 물리치시고, 주님의 다스림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주님의 다스림 안에 즉, 그분의 나라안에 살기 위해서는 우선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젠 변화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가치의 최우선을 두어서는 안된다. 영원히 변치 않을 가치, 하늘나라의 가치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치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분에게서 영생의 가치가 나오고, 그분에게서 영생의 희망이 솟아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갈릴래아 근처에서 복음전파 사업을 시작하신다.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는 외침을 시작하셨다. 구시대는 가고 새시대가 왔다는 외침이었다. 절망은 가고 희망의 시대가 왔다는 외침이었다. 보이는 이 세상의 고통은 이제 우리인생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외침이었다. 우리에겐 영생이, 영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외침이었다.

      

    예수님의 복음전파 사업은 혼자서는 안되었다. 당시엔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었기에 각개전투식의 전도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교통수단도 나귀를 타고 가든치, 아니면 두 발로 걷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전도사업을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을 뽑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선 비린내에 늘 젖어 있던 어부들이 뽑혔다. 누추한 옷차림의 볼품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화려한 학력이나 경력도 없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오히려 전도사업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주장이나 자존심이 강했을 것이고, 은근히 교만이 끼어 들어, 주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그대들의 생각을 전하지 말고 오직 내 이야기만 대신 전달하라고 명하셨다. 오늘도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만 전하면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그들은 가족, 그물, 배를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뿐이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믿었으며, 그 나라에 살기 위해서 과거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새로운 삶, 즉 회개한 삶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 시대의 제자들이다. 과연 주님을 위해 이 세상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진정한 회개를 하였던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어부생활을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했던 제자들과 나를 비교하여 보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회개하라.”






    5   연중 제 3주일   마태 4,12-23 (가)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오늘 우리는 1978년도 대망의 새해를 맞이하면서 모든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염원하는 일치기도 주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로서 43년째가 되는 일치기도 주간은 1936년 불란서의 리옹교구에서 처음 실시되어 급속도로 가톨릭 안에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1961년부터는 전그리스도교계에 보급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매년 일치에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기를 꾸준히 노력해 왔습니다. 이는 최후만찬의 석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려하시고 탄원하신 대로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 라는 그리스도의 호소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매년 맞이하는 일치에의 기도 주간이 연례 행사처럼 흘려 버릴 수 없다는 소신 아래 보다 적극적인 일치에의 자세를 호소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보다 적극적인 일치에의 자세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스스로를 반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아담)에게서 온 인류를 창조하시어 온 세상에 살도록 하셨으므로 사람은 모두 다 단 하나의 같은 목적에로 불리었으며 그 목적은 하느님 자신이십니다(사목헌장 24). 그러므로 한 분 하느님 아버지 안에 하나로 뭉쳐 형제적 사랑을 나누어야 할 인간들에게 있어 개인 대 개인의 불일치 같은 크리스천들 간의 불일치, 비크리스천과의 불일치 등은 원하지 않는 결과들이라 하겠습니다.


    복음을 잘 증거하지 못하는 -형제적 사랑의 실천을 잘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그 책임을 불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의 반성을 느끼는 데서부터 우선 일치에의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여러분과 우리 유대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같은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니며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아페 2,18~19) 라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됨을 계속 고백하며 실천하는 크리스천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에의 내적인 적극적 자세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다른 크리스천들과의 만남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 첫째로 일치 운동의 표준은 복음이라는 점입니다.


    타 교회나 교단들의 적극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표준은 그 교회나 교단의 주장 및 실천이 얼마나 우리(가톨릭)의 가르침과 실천에 가까운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복음에 가까운가에 있느냐이겠습니다. 시대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도덕에 있어서나 교회 규율에 있어서나 교리의 표현 방법에 있어서 정확하지 못한 것이 보존되어 왔다면 혁신되어야 한다(일치 교령 6항)는 공의회 정신은 바로 복음에 의거한 교회의 쇄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일치운동은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인정함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나서,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통해 서로 상대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깊이하고 공동선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일치 교령 9항).


    그러나 대화를 하는 마당에서는 자기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도 주의 깊게 듣는 아량이 있어야 하고 몇 마디만 듣고 곧장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그 진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나서 대등하게 나누는 대화는 일방통행적인 아집과 편견에서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방인이 아닙니다. 아멘.






    6   연중 제 3주일   마태 4,12-23 (가)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조순창 신부


    ‘1984년’이라는 소설에서 “인간의 모든 자유가 박탈되고, 사생활이 없어진 고문과 감시의 무서운 통제 사회가 곧 1984년의 세상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신문을 비롯한 대량 정보 매체들은 매일매일의 인간의 진정한 삶과는 관계없는 허상(虛像)을 만들어내고, 거짓이 사람들이 이성을 잠재우며, 극히 예민한 온갖 사찰 정보 기구들이 사람들의 가장 사소한 사생활의 모습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사회가 이 지구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높이 외쳐대지만, 세상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인권 탄압과 집단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1984년’이란 소설에서 그린 세계는, 깨어나면 없어지고 마는 악몽이 아니라, 오늘의 인간 사회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실존적인 조건들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730년대의 이사야 예언자 시대를 말하는 오늘의 제 1독서에서는 암담한 가운데 빛을 예언합니다. “위를 쳐다보나 땅을 굽어보나, 보이는 것은 고통과 암흑, 답답한 어둠 뿐, 마침내 그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리라. 고통에 잠긴 곳이 어찌 캄캄하지 않으랴? 그러나,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입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그 빛이 오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맨 장대를 부러뜨리시고, 혹사하는 자의 채찍을 꺾으실 것입니다.”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한 14,6) 인생의 갈 길을 잃고 불행으로 가고 있는 오늘, 거짓이 진리를 가로막는 현실, 멸망과 죽음으로 가고 있는 이 세계에 빛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금년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이며, 바로 이 땅에 빛을 밝힐 때입니다.

    200년 전 외국의 산업 발달을 외면하고, 문호를 막은 채 주자학에 사로잡혀 당파 싸움으로만 날을 지새던 그 시절, 실학 운동과 복음으로 개화하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횃불을 든 선구자인 우리 선조들처럼, 이 땅에 오늘 복음의 빛을 밝혀야 합니다.


    고린토 교회에 좋은 신자는 많은데, 일부가 말썽을 부려서 아폴로, 바울로, 베드로, 그리스도 등으로 파당지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모두 하나가 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으니, “회개하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불러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그물, 배, 아버지)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러면, 빛을 밝힐 신자의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오늘의 현실이 어둡고 답답하고 괴롭고 부정적이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하나의 긍정을 토대로 일어서는 희망의 삶이요, 빛의 삶이요, 흔히 문제가 많을 때에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주님마저 안 계신 것으로 불안해하기 쉬우나,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부활 신앙이 빛의 삶입니다.


    둘째, 착하기만 해선 못 살고, 눈치 빠르고 쉽게 배신도 하고, 근성이 있어야 잘 사는 세상이라 해도, 생활에 방편이 필요한 것이지만, 욕심․미움․총칼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배와 그물과 부모를 떠나는 삶(이는 황금과 권력을 떠남임),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모험하여 들어가는 삶이 빛을 밝히는 삶입니다.


    셋째, 끼리끼리 만나고 편을 갈라, 우월한 쪽에 속하여 삶이 재미있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앙의 신비체에는 파벌보다 일치 화합하여 나아감이 빛의 모습입니다. 지금이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인데, 종파가 많은 것은 아무리 발전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 없이 일치는 없고, 일치가 구원을 위한 참종교의 표지라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일치를 생명처럼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일치가 가톨릭의 장점이며 생명이므로, 일치하여 빛을 밝히는 교회가 되어서, “나를 따라라”시는 예수님을 모두 열심히 따르고, 이 겨레의 구원을 위하여서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여, 어둠을 물리치고 빛을 밝히는 한 해, 믿음의 보람있는 한 해, 사랑의 실천있는 한 해, 희망 가득한 한 해 되게 합시다.






    7    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 (가)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예수님의 첫 강론이나 그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의 강론의 요지는 한 마디로 “회개”였다. 베드로의 강론을 듣고 감동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회개하시오”(사도 2,38)라고 했다. 이 회개란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묵시 22,11). 죄가 없으면 성(聖) 자체이신 하느님과 상통한다.

    원, 본죄와 그 벌을 없이 하는 성세성사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그 뚜렷한 증거다.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첫 강론에서 회개를 부르짖으신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가. 윗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항상 “돌아가셨다”라고 한다. 떠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가 떠나 왔던 곳인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주님께로만 되돌아가면 탕자가 집에 다시 돌아와서 산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게 된다.

    영원히 산다. 이렇게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히 죽게 된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회개하는 일, 회개하는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다.






    8   연중 제 3주일   마태 4,12-23 (가)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김몽은 신부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는 벅찬 감격의 2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기념제를 준비하면서,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점검하는 가운데 다가올 시대의 선교를 위해 쇄신작업을 폭넓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아니더라도 전교의 달을 맞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가다듬어 보는 것은 퍽 의의있는 일이겠습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교회의 역사는 고난의 순간들로 점철된 것이었으되 대단히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험난하고 절박한 역경 속에서도 신앙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운 섭리의 결과였으며 전적으로 죽음을 마다 않고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장하신 선열들의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취도 선명하게 선열들의 피빛 어린 발자국들이 남아 있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 깊으신 섭리에 감사드리고, 선열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본받아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와 선열들의 순교정신이 갖는 의미나 교훈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체험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자랑스러운 선열을 가졌으면서도 우리 자신은 부끄러운 후손으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순교정신의 의미를 찾아본다면, 참신앙 곧 인류 구원의 복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도 방해할 수도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앙인이라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그것을 증거하고 나아가 널리 전파해야 할 가치와 의무가 있다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열들의 순교정신을 본받는다는 것은 한편으로 투철한 선교의지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선교란 무엇이겠습니까? 선교는 왜 필요하고 선교의 의무는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선교의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나름대로 이런 물음들을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반성하며 연구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 중 하나인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은 이런 물음들에 대해서 원칙적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9)고 명하셨으며 또한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은 제 6항에서 선교란 “교회로부터 파견된 복음의 전파자들이 온세계에 가서 복음전파의 임무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백성들과 집단에 교회를 부식(扶植)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독특한 사업”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런 부식단계가 “완성된다고 하여 교회의 선교활동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벌써 설립된 부분 교회들에게는 그 선교활동을 계속해나가야 하며 아직 밖에 있는 각 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좋은 행동을 보고 성부께 영광을 드리고 인간생활의 참된 의의와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통(相通)의 보편적 유대를 더잘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자 개개인은 그리스도의 신앙과 구원을 전파할 의무를 지는 것이며, 생활의 모범과 선교로써 그리스도의 신앙과 자유와 평화에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선교의 의무와 필요성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가 하느님의 지상명령이며 신앙인인 우리 자신의 지상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사제의 권고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천주께 감사합니다”라고 너무 쉽게 별 생각없이 응답합니다.


    그러나 실천이 뒤따르지 않을 때, 이 준엄한 약속은 한낱 무책임한 말장난이 되고 맙니다. 몇 년 전부터 ‘2백만 신자화’니 ‘신자배가’니 하는 외침들이 자주 들려오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구호만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선교해야 할 과제가 특정한 몇몇 선교사들만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라 남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임무이며, 그러므로 이 임무를 열과 성을 다해 수행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면 창의적이고 구체적인 선교방안들이 하나 둘 떠오를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을 관심을 갖고 살펴 본다면 우리의 선교 의지를 펼쳐 보일 곳은 어디에서나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선교방법과 대상장소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4)라는 말씀 안에 모든 실마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만 그물을 칠 깊은 곳을 알아내고 그리로 배를 저어가는 일은 우리가 이 시대에 맞게 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선교의 황금어장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 그물을 쳐야 할 깊은 곳은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대중 속일 수도 있고 군인들의 집단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4천만 남한 인구의 96%가 바로 선교의 그물 속에 들어와야 할 고기들인 셈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물이 쳐지기를 기다리는 어장은 한반도 밖의 외국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보다 시급한 곳이었으면서도 여태까지 무관심 속에 버려졌던 어장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죽고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진작에 눈을 돌렸어야 했던 곳은 바로 지척에 두고 있는 북한의 교회와 그곳의 동포들입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최근에 와서야 북한의 교회와 그곳 형제들에게 관심을 갖고 2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북한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세성사와 성체성사로써 주님과 결합되고 우리끼리도 결합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라고 일찍이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지체들도 함께 괴로워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교회로서 우리는 공산 치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북한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 사회의 현실이 너무 반그리스도교적인 상황이라고 해서 북한에 선교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회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러한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우리가 당장 북한에 선교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혹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선교란 불가능을 초월한 믿음의 행위요, 그 증거로 맺어진 결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교회는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때에만 선교활동을 벌여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해와 탄압과 역경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와 은총의 전달자로서 끊임없이 활동해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한국교회의 200년 역사를 통해서도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많은 현실적 제약들 앞에서 주저하기에 앞서 주님의 섭리, 다시 말해서 역사를 통해서 드러내시는 계시 안에서 신앙으로 북한선교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들어서 국내외의 정치적, 사회적 정세와 교회의 상황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태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어떻게 보면 북한과의 교류에 한 가닥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의 교회가 여전히 압박과 침묵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북한에 선교해야 할 사명이 우선적으로 우리 남한교회에 있다는 사실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과제로서 북한선교의 사명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북한선교는 북한동포들의 구원을 위해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한교회 스스로의 성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까닭은 북한에 선교하다가 흘리는 피와 땀이 타성과 정체 속에 안주하려는 우리 교회에 경종을 울리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자극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대만의 교회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중국 본토에 성서와 전례서 등을 들여보내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리고 교황청이나 세계의 가톨릭 교회가 아시아 및 공산권 선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한국교회에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북한선교는 더욱 필요하고 의미있는 사명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교회에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라고 가르칩니다. 이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항상 마음으로 교회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북한선교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은다면 아무리 어려운 현실이요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당장 중요한 것은 남한신자 모두가 보여 주어야 할 북한교회에 대한 관심입니다. 고통 당하는 형제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며 늘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검소하게 살면서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그들과 동고동락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우리 곁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조그마한 관심 하나하나가, 이러한 우리의 사랑 하나하나가 결코 작거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끝나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느님 앞에서 목숨을 바치는 순교만큼이나 위대한 것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땅에 다시 복음과 구원의 씨앗이 뿌려지고 싹틀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다시 한 번 약속하실 것입니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너희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마르 14,9)입니다.


    거듭되는 이야기이지만 북한선교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 가운데 가장 중대한 사명입니다. 물론 북한선교는 죽음보다 더 어려운 사업이고 현실적으로 보아 수많은 난관이 예상되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 필요성과 소명의식을 절감하고 순교를 각오하며 주어진 조건 안에서 가능한 지혜와 열성을 모아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노력은 진정한 의미의 거룩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랑스러운 선열들의 자랑스러운 후손들이 될 것입니다.






    9   연중 제 3주일   마태 4,12-23 (가)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김몽은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최초로 갈릴래아에서 전교를 하시기 시작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특히 이 사실은 구약시대에 이사야가 예언한 바 “즈불룬과 납달리,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라고 한 말의 성취를 뜻하는 것이다. 한편 오늘은 예수님께서 최초로 하신 설교를 들려주시는 것으로, 가장 큰 뜻을 지니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써 복음적 생활이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완전한 회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회기라는 낱말을 우리는 정확하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하겠다. 보통 회개라는 말을,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만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회개의 참뜻을 반밖에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된다. 회개란 물론 첫째로 죄를 뉘우치는 것을 뜻하지만, 그 근본 뜻은 우리들의 생활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태도를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는, 첫째로 우리들이 가지는 일상생활의 모든 관습, 모든 사고방식, 그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를 예수님을 향하여 돌리고(回頭하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고, 예수님의 귀로 듣고, 예수님의 입으로 말하는 생활태도, 그리고 예수님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는 사탄이 지배하는 암흑의 세계에서, 그 암흑의 지배자들이 조정하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암흑의 세계에서 벗어나, 광명의 세계, 즉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지는 세계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로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 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그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골로 1,13-14) 그러므로 우리의 회개는, 아버지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광명의 나라로 옮겨 주신 그 크신 은혜에 대해 깊이 감사하면서, 광명의 자녀답게 용감히 암흑의 세계를 버리고, 예수님을 향한 빛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불평이나 불만을 표시하는 대신에 인내로써 감사와 기쁨을 표명하는 생활로 바꿔야 하며, 남을 비방하거나 욕하는 말을 하는 대신에 남을 칭찬하고 두둔하는 말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복음적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복음은 전해 준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세속적인 그릇된 생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기쁨의 생활태도로 바꾸어야 하겠다. 과연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다른 사람과 어느 점이 다른가? 다 함께 스스로에게 물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회개의 첫 걸음이다.


    그리하여 사도들이 이제까지 자기네들이 생활해오던 모든 것을 미련없이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데 불필요한 것,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설령 그것이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을 따르는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라면 얼른 버리고 따라야 한다.

    크리스천이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시키는 사람들을 뜻한다.



    10  연중 제 3주일   마태 4,12-23 (가)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오성백 신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세상살이가 삭막하고 각박하다고들 합니다. 자꾸만 인정이 메말라가고 서로의 대화가 단절되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활에 기쁨보다 괴로움이 더 많은 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문의 사회면에는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온갖 부정, 불의, 살인, 강도, 사기……의 내용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남들의 고통이나 불행, 불의의 사고를 보고도 “강건너 불보듯” 아예 익숙해지고 무관심해 졌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내 발 안에는 밝히 보이는 빛보다 어둠이 짙고, 우리 앞에 있는 미래가 훤히 내다보이기 보다는 깊은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인상입니다.


    친애하는 신자 여러분! 어둠이 갈린 이 세상에 예수님의 기쁜 소식이 선포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첫 전도를 시작하심으로써,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하신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시킬 것입니다. 아울러 어부들을 당신 제자로 선택하심으로써 우리 인간들을 당신의 사업에 참여시키셨습니다. 이제 비로소 어둠에 가득 찼던 세상이 큰 빛을 보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의 골자를 가지고 다같이 한번 묵상해 보기로 합시다. 1) 세례성사로써 신자가 된 우리들은 이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끈질긴 마귀의 유혹도 예수를 광명(빛)을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역경에 처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빛으로써 세상의 암흑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비록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지만,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생활한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촛불은 어둠이 깔린 골방을 환하게 비출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각자의 맡은 일에 충실할 때 우리는 사회의 조그만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어지럽고 혼탁하면 할수록 그와 비례해서 봉사와 희생을 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들과 똑같이 부정과 불의를 저지를 때 이 사회와 교회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으며 점점 암흑과 멸망에 빠져드는 결과 박에 낳지 않을 것입니다. 이럴 대 일수록 우리의 조그만 수고와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인 우리 신자들이라도 정의, 평화, 진리를 이룩하기 위해 힘 쓸 때 사회는 정화되고 교회도 발전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기대 이상의 효과와 결실을 하느님께서 거두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승리할 것이며 승리한다는 희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2) 하느님께서 당신 제자로 어부들을 부르셨다는 것은 자기가 타고난 기질이나 능력 여하에 따라 하느님께 불림을 받는 것이 아니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면 어부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하느님은 당신 제자로 부르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부들을 기꺼이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떠하기 때문에 불리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부름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부르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가면 됩니다.


    3) 예수님은 인간을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무식하고 천한 자를 지혜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약한 자도 강하게, 무식한 자도 지혜 있게, 천한 자도 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우리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업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변화시켰고 우리 안에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불려진 자는 부른 자의 뜻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사업에,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불림을 받은 어부들은 일체의 핑계나 변명도 없이 그물과 생활 도구 일체를 버리고 스승 예수의 일에 동참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어떤 일로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적극적으로 발벗고 나서야 합니다. 지식의 결핍이나 생활 걱정이 어부들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이 어부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셨습니다. 이제 어부들은 예수의 매력적인 가르침에 빠져서 사람 낚는 어부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예화로써 오늘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나라 이조 말엽에 개화당의 거두 김옥균 선생이 개화운동에 실패하고 역적으로 몰렸을 때, 그의 친누이 한 분이 관헌에 붙잡히지 아니하려고 10년 세월을 땅굴 속에서 지낸 일이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져서 그가 그 흑암의 동굴 속에서 나와도 좋게 되었을 때 그는 앞이 먼 장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빛 아래 있지 못한 인간의 시력은 자연적으로 쇠퇴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이 보배라 하지만, 빛과 접촉되어 있는 눈이 아니면 눈은 그 보는 능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거나, 마땅히 걸어가야 할 곳을 가지 못하거나, 들어야 할 일을 듣지 못할 때, 우리도 암흑에 빠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큰 빛을 받아 이 땅에 하늘 나라를 전파하고, 하느님의 사업에,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범적인 신자가 되도록 하느님 앞에 굳게 약속합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두움 속을 걷지 않으리라” 아멘.





    11  연중 제 3주일   마태 4,12-23 (가)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李啓重 신부


    낚시라고 하면 낚는 쪽과 낚이는 쪽과의 치열한 경쟁이라는 묘미에서 인기가 높은 것 같습니다. 낚는 사람이 ‘삥’하는 낚시줄 소리를 들으면서 월척의 고기를 잡아 올렸을 때는 천하가 모두 자기 수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낚시는 반드시 낚는 쪽에만 기쁨과 만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낚이는 쪽에도 패배자만은 아닌 큰 기쁨과 승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날 서울 근방에 한 농사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토색질에만 열을 올리는 지방 관리를 위시하여 국민들이 도탄에 빠져 헤매는 것도 외면한 채 호의호식하는 고관대작들에 대해 늘 분개하고 있던 중, 어느 여름날 논바닥에서 김매기를 하다 말고 불현 듯 호미자루를 쥔 채 배잠방이 바람으로 황황히 상경을 하였든 것입니다. 더운 날씨에 어떻게 급히 달려 땀이 온 몸을 젖어내리고 목이 말라 막걸리를 몇 잔 먹은 것이 빨리 회전하여 어디인가 길가 가로수 아래에서 호미를 베고 피곤한 한잠을 자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에 상감님이 마침 민정을 시찰하려 옷을 아무렇게나 입으시고 혼자 거니시다가 문제의 사나이를 발견하였습니다. 하도 볼품이 기이하고 행동이 별달라서 상감은 그를 흔들어 깨우고 말을 붙였습니다. 웬 사람인데 이런 복색으로 이런 데서 낮잠을 자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나이는 어떤 놈이 단잠을 깨우냐는 듯이 짜증겸 본심겸 한 마디 던졌습니다. “땀 안 흘려본 원님을 보내어 고생만 하게 하는 높은 분네들 하고 담판 좀 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상감은 그 언동이 하도 당돌해서 넌지시 꼬드겨 물었습니다. “아예 당신이 원님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사내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못할 건 뭐 있오”하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상감은 한 마디 더 얹어서 “아주 판서나 정승을 하시면 더 좋지 않겠오?”하고 물었습니다. 사내는 씩 웃으면서 “그야……시키면야 하지” 말했습니다. 그러자 상감은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네었습니다. “아예 임금 노릇이 더 좋지 않겠오?”하고 묻자 사내는 “뭣?”하는 소리와 함께 싱긋이 웃던 상감님의 얼굴에는 졸지간에 번개불이 일었습니다.


    솥뚜껑같은 사내의 손이 사정없이 갈기고 간 것입니다. 동시에 사내의 큰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 새끼 보자 하니 사람을 가지고 노네! 뭐야/ 상감을 나보고 하라고? 이 새기 아예 쳐죽이고 말테다! 내가 아무리 일자무식이기로서니 그런 역적질까지 하란 말귀를 모를 줄 알았더냐?”하며 호미자루를 치켜올렸습니다. 상감은 황급히 깊이 사과하였습니다. 그리고 동행을 요구했습니다. 비록 무식하고 우직하나마 인간 본성은 상감의 마음에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문제의 사내를 대동하고 앞장 선 상감의 가슴속에는 어떤 굳은 결심과 함께 희열이 물결치고 있었습니다. 사내는 낚인 것입니다. 멋지게 낙인 것입니다. 그 후 말단 관직이 주어졌고 결국에는 정승까지 올랐다는 소위 ‘호미정승’의 이야기입니다.


    마태오 복음 4장(4,18-20)을 보면 예수께서 한번은 갈릴레아 호수가를 걸어 가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에게 “나를 따르시오. 내가 당신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소”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낚시하는 예수님께 멋있게 낚인 것입니다. 성 바울로가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할 때의 일화가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치면서 말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방문하여 “사울 형,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당신이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이 나를 보내시며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하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로는 멋지게 예수님의 낚시에 낚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낚시는 은총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하였을 때는 닭 우는 소리를 미끼로 그를 낚아 통회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스는 예수님을 30은전으로 팔아 죽음에 붙이는 죄를 범하였을 때 “무죄한 자를 죽음에 붙였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통회할 수 있는 낚시를 던졌지만 그는 그만 낚이지 않고 실망하여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사랑을 베푸시고 계시지만 큰 은총을 주시는 낚시는 가끔 던지십니다. 가령 몇 주 혹은 몇 달, 몇 해 동안 성당을 등지고 하느님을 멀리한 이에게 어떤 기회나 사건을 통하여 낚시를 던지십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꼭 낚여야만 하겠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던진 이런 낚시에 걸리지 않았으면 다음에는 좀 더 어려운 환경으로 몰아넣고 낚시를 던지실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아직 끊기지 않았다면 고통이 닥쳐올 것이고 이 고통 중에서 하느님께서는 낚시를 다시 던지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가 듣는 바를 깨닫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재앙뿐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낚시에 물리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광야에로 몰고 가실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앙 중에 하느님을 찾았는 지 모릅니다. 6․25 때 하느님을 아는 사람치고 기도를 안 바친 사람이 없고 또 그 어려운 동란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아 영세하였는 지 모릅니다.


    주일학교는 어린이나 학생들 그리고 그 보호자들에게 하느님께서 낚시를 던지시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이 낚시에 걸리지 않으면 다음에는 더 어려운 환경에서 또는 재앙 중에 낚시를 던지실 것이 틀림 업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큰 은총을 주시는 때가 그렇게 많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낚시를 던져 낙을 때에는 놓치지 말고 꼭 물어야 하겠습니다. 낚일 때에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큰 즐거움과 평화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다.

    낚이는 즐거움, 이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12             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 (가) 빛은 그 어디에

                                                   하상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자렛에서 갈릴래아의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십니다. 즉 예수님의 활동 장소가 이제는 이스라엘의 변두리 지역 이방인들의 갈릴래아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복음은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 모두에게 예수께서 빛으로 오셨음을 뜻합니다. 또한 요한 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빛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빛이신 예수께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또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이러한 일들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빛으로 비춰지는 것일까요? 빛은 환희와 기쁨으로 생명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이 환희와 기쁨으로서 생명력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께서 사셨던 그 당시는 너무나도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백성들에겐 아무 희망조차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어왔던 백성이지만 아무런 기쁨이나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 백성에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전하면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하십니다.


    어둠에 싸였던 그들에게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만이 바로 빛을 보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또한 그 빛을 보면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리 있는 저 세상의 일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불러모으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그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심으로써 환희와 기쁨의 생명력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즉 이 세상에 빛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서 남을 짓눌러야 하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어둠만 있고 살아있는 빛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들에게조차 빛은 그 어디에도 없는 듯합니다. 바로 주님이 그 빛이신데 말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란 그 동안 우리의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 있었다면 이제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주님을 빛으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13        연중 제3주일   마태 4,12-23 (가) 주님과의 날카로운 첫 키스

    최인호 작가


    한용운(1879-1944)은 승려이자 시인이었고 또한 독립운동가로 우리 나라가 낳은 근세기의 뛰어난 사상가입니다. 자유와 평등, 민족과 민중사상으로 요약되는 그의 불교적 세계관과 독립사상은 그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그러한 미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가버렸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질쳐서 사라졌습니다.”

    의미를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용운이 노래한 ‘님’이 조국의 해방이라고 확대해석하지만 나는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님’이라고만 하고 싶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의 영향을 분명히 받은 ‘님의 침묵’은 연가입니다. 황금의 꽃과 같이 굳은 옛맹세를 남기고 떠난 님을 그리워하는 이 시의 한 구절에 나는 가슴이 뜁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그렇습니다. 첫날밤, 첫걸음, 첫눈, 첫사랑 등 한처음의 추억들은 무엇이든 신새벽의 처녀성을 갖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기고 떠나버린 님을 어찌 떠나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때문에 한용운은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주님은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가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 후 공생활을 시작합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온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해서 생겨났으며(요한 1,10)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첫말씀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와 만물이 숨죽여 기다린 제일성이 누군가에 의해 되풀이되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한발 앞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두 분의 말씀은 같지만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지만 주님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선포’와 ‘전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있었지만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옷을 입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지만 주님은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셨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으며 우리의 병을 고치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으며,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셨습니다.

    요한이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이 세상을 향해 선포하였다면 ‘하늘나라’이신 주님께서 직접 우리 곁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요한이 새벽을 알리는 닭이었다면 주님은 새벽 그 자체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비로소 하늘이 열렸다면(마태 3,16) 주님이 전도를 시작하심으로 비로소 하늘이 우리에게 움직여 다가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심으로써 한용운의 시처럼 하늘과 땅의 입맞춤, ‘주님과의 날카로운 첫 키스’는 시작된 것입니다.         


  3. user#0 님의 말:

     

    연중 제 3 주일


    제 1 독서 : 이사 8, 23b-9, 3

    제 2 독서 : 1고린 1, 10-13.17

    복     음 : 마태 4, 12-23


    제 1 독서 : 기원전 732년, 즈불룬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속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주민들은 앗시리아로 유배를 당했다(2열왕 15, 29 참조).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이사야 예언자가 그들의 해방을 선포한다. 포로 생활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올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빛을 당신 백성에게 비추시며 개입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제1독서에서는 어둠과 빛의 대조가 특이할 만하다. 어둠은 불행과 억압받음과 포로 생활의 상징이다. 반면에 빛은 구원의 상징이다. 오랜 불행 후에 드디어 구원과 해방, 기쁨과 평화가 도래하는데, 이것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아기 덕분이다(이사 8,5-6).


    제 2 독서 : 이제 드디어 우리는 고린토 교회의 문제점 중 하나를 대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공동체의 분열이다.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근본은 일치와 친교(koinonia)이기에 바오로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일치에 민감했고, 그래서 고린토 교회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모든 인간적 생각에서 건져내신 분은 유일하신 그리스도뿐이시기에 공동체가 제 나름대로 어떤 사도에게 속한다고 내세우며 갈라지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복     음 :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타인 남부는 정치와 종교를 장악한 독재 군주의 손아귀에 있었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북쪽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셨다. 마태오는 이 여행에서 하나의  표징을 보고 있다.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주민들은 앗시리아 사람들과 피가 섞여 버렸기에 유다민족의 순수 혈통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천대받던 지방에 이사야 예언자가 예시한 빛(이사 8, 23b-9,1)이 비치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의 단순한 어부들이 먼저 이 빛을 알아보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삶의 터전을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실 것이다. 그들은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어부가 될 것이다.



    어둠에 빛을!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의 말씀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이며 이들은 모두 기쁨에 넘쳐 뛸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빛’과 ‘기쁨’의 주제가 함께 드러나는 이 말씀은 당시 어둠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야말로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실상 이런 상황과 처지에서 우리는 주님만이 우리의 기쁨, 우리의 희망 그리고 우리의 빛, 우리의 구원이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빛이란 기원전 734-732년에 북쪽의 앗시리아 왕국이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을 점령하여 이방인의 치하에 들어간 지역, 즉 가파르나움이 주님 복음 선포의 거점이 됨으로써 큰 빛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이 빛은 정치적 해방을 뜻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오심과 복음 선포로 인한 인간의 전인적 해방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빛은 제2독서에서 언급된 고린토 교회의 분열된 모습 안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서로 서로 갈라져서 분쟁을 일삼는 모습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들의 삶을 뉘우치고 겸허하게 반성하는 모습 안에서 그 구원의 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구체적으로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 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예수님은 그들을 통하여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걸어갈 수 있도록 사명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처럼 외적인 권위나 제도, 형식에서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참 삶의 길, 즉 복음을 따라 사는 진솔한 삶 안에서 드러났고 이것이 바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어둠에 짙게 둘러싸여 자신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지 못했고 가면과 허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실체를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테두리 안에서 늘 보는 얼굴들과 가까운 사람들만의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다른 이들에게 비추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벽을 깨고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아버지의 나라가 알려지고 많은 이들이 구원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신의 가슴을 치고 자신의 죄악을 아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정 죽음과 죄악에서 구해 주실 주님 앞에 우리 죄를 고백하며 간절하고도 뜨거운 회개의 기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형식적인 미사 참석과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내는 시간과 헌금, 이런 것은 차라리 주님 앞에서는 알량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구원을 받기에 마땅하고도 충분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가족의 삶에, 세속적인 재물의 모음과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사귐을 갖는 일에만 빠져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고 있지는 않는가?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 나의 마음속에 물신과 세속의 가치를 더 받들어 이런 일들에 보다 많은 애착을 갖고 이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진정 하느님을 믿는 것이 내 마음에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갖는 것은 아닌가?

    주님을 믿는 것이 기쁨을 주는 대신 부담스럽다면, 그 신앙생활은 빛 속에서 거니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막연함 속에서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과 시련을 당할 때마다 실망하지 말고 세속이 끌어당기는 모든 것들을 성령의 칼로 단호하고도 냉정하게 잘라 버려 주님께로 돌아서는 용기를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을 것”(요한 8, 12)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힘을 내야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악령의 꾐에 빠져 혼란과 분열과 더러움에 우리를 물들이지 말고 성령의 손길에 우리를 내맡겨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하고 회개하여 늘 기쁨 속에 충만한 복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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