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부활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

 



부활 제4주일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제1독서: 사도 2,14a.36-41

제2독서: 1베드 2,20b-25

복 음: 요한 10,1-10

오늘 전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착한 목자의 형상이다. 그 형상은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유목생활을 체험한 민족에게는 여러 가지 사실을 뜻하는 상징적 개념이었다. 즉 안전과 번영, 갑작스러운 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생활의 친교, 친근한 애정 등의 의미를 동시에 나타낼 수 있었다: 목자는 자기 양들과 함께 지낼 뿐만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수많은 낮과 밤들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그들의 파수꾼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아버지처럼 느끼게 된다. 



성서 안에서 ‘목자’로 나타나시는 하느님의 모습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 야훼의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 목자라는 상징적 개념을 사용한다. 이같은 사실을 오늘 전례의 테두리 안에서 보자면 우선 응송을 통해 노래하게 될 시편 22의 내용을 보면 충분할 것이다 :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주께서 당신 이름 그 영광을 위하여 곧은 살 지름길로 날 인도하셨어라.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1-4절).

 보다시피, 사랑과 더불어 힘과 용기(막대)의 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 목자는 이리떼나 도둑들이 와도 겁내지 않는다 ! 오늘 본기도에서는 이러한 느낌이 기도의 형태를 빌어 총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여, 우리를 천상 기쁨의 나라로 인도하시어, 목자의 용기를 북돋워주시고 교우들의 겸덕을 자라나게 하소서.”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 의한 제 2독서에서도 목자의 모습이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 죽임을 당하고 또 바로 그렇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길을 잃은’ 양들까지도 구원할 보다 큰 능력을 갖게 되는 목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여러분이 전에는 길잃은 양처럼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왔습니다”(1베드 2,21.25).

 여기서 그리스도 자신의 본보기를 따라 ‘목자’라는 명칭을 하느님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그분께서 여러 번 당신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심으로써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목자’(시편 79,2 ; 에제 34,1-31 ;예레 23,1-3 등 참조)로 묘사되고 있는 하느님 자신과 같은 분이심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목자라는 명칭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메시아적 신분을 밝히 드러내시고 계신다.



“양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다”



 요한복은 10장은 이와 같은 예수의 메시아적 신분이 드러나는 내용을 담고 있음, 특히 이 장면이 수난에 대한 이야기(13장)가 시작되기 조금 전에 놓여 있다는 점은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최고 결정의 순간을 우리가 맞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10,11)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생애의 전체적 ‘의미’를 밝히 열어 보여주시며 또한 당신 자신을 인간들의 구원과 멸망의 가름점으로 제시하신다.

 바로 이런 까닭에 이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서로 갈라져서 논란을 벌인다 : “이 말씀을 들은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다시 논란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그는 마귀가 들렸소. 그런 미친 사람의 말을 무엇 때문에 듣는거요 ?’ 하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귀들린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소 ? 더구나 마귀가 어떻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단 말리오 ?’ 하고 말하였다”910,19-21).

 오늘 전례가 이렇듯 심각하고도 깊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 극적인 이야기를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10절) 잘라놓고 있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 앞에 나온 상징적 개념들의 의미를 발전시키고 또 끝을 맺어주고 있는 마지막 부분(11-20절)을 B해 부활 제 4주일로 넘기고 있는 것은 순전히 편의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는 대목 속에는 이미 중요한 모든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이 대목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사용하고 있는 문학 형태에 관한 문제를 다루어 보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 즉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우의(allegoria)적 형태냐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비유(parabola)적 형태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 견해로는 우의적 특징과 비유적 특징이 ㅡ‘문’의 경우에도 그렇고 ‘목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ㅡ 함께 섞여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 그러므로 여러 가지 상징적 개념들을 통해 암시하고자 하는 영신적  실체의 가치를 찾아내기 위해 굳이 개개의 서술적 특성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더 이상 길게 말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야기를 그 당시의 양치는 관습에 근거한 일반적인 내용으로부터 시작하시어 마침내는 ‘목자’로서의 당신 자신의 형상에 그 전체적인 초점을 맞추어 가신다. 요한복음의 전개방식이 늘 그렇듯이 처음에는 예수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6절).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 “정말 잘 들어두어라.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데로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양치는 목자는 문으로 버젓이 들어간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목자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양떼를 불러낸 다음에 목자는 앞장서 간다. 양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뒤따라간다.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10,1-5).

 이 장면을 팔레스티나 지방의 수많은 양 우리에서 매일 아침 벌어지는 장면이다 : 목자들은 한 양 우리에다 여럿이 한데 어울려 각자 자기 양들을 집어넣곤 한다 :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양들은 자기들의 목자를 ‘목소리’를 통해 알게 된다. 그래서 목자가 우리에 들어가 부르자마자 그들은 ‘하나하나’ 목자를 따라나선다. 반면에 다른 양들은 우리에 남아 지기들의 주인이 오기를 기다린다.

 한편 밤새 우리를 지키는 ‘문지기’역시 양들의 주인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출입‘문’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게 한다. 다만 ‘도둑들’은 보통 양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돌담을 넘어 ‘딴 데로’몰래 들어가 낚아챌 수 있는 양들을 억지로 끌고 간다 : 다른 양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을 피해 달아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이다”(5절).

 쉽게 볼 수 있듯이, 예수의 관심은 어떤 목가적인 광경을 감동적 시적 표현으로 묘사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목자와 ‘도둑’과 ‘강도’ 사이의 뚜렷한 차이점 그리고 그들간에 양을 다루는 방법ㅇ의 현격한 차이점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야기는 자신들을 스스로 목자라고 하지만 사실은 양의 도둑에 불과했던 어떤 사람들을 ‘겨냥한 논쟁의 성격을 띤’ 이야기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다”



 이러한 ‘논쟁적’ 특성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계속해서 설명해 주시는 그 다음 이야기에서 더 잘 나타나고 있다 :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을 수 있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7-10절).

 과연 누가 ‘문’으로 양 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며 양들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도둑이요 강도’ 인가? 예수께서 계속해서 비유에 의한 암시적 표현법을 쓰시며 분명히 말씀을 하시지 않기 때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모질게까지 생각되는 8절의 그 말씀(‘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필사본들은 ‘모두’라는 말을 아예 삭제해버리고, 또 그리 중요치 않은 어떤 사본들은 ‘나보다 먼저’라는 말을 빼버림으로써 그런 통속적인 해석이 나오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

 사실, 만일 예수께서 그리고 뒤이어 사도들이 계속 주장했듯이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이라는 차원을 감안한다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요한 복음사가가 제시하는 구체적 상황 즉 그가 ‘유다인들’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거스려 비열하면서도 집요하게 벌이는 반대를 감안해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8-9절의 논쟁투의 거친 예수의 말씀은 바로 그들(바리사이파 사람들, 사제들 등등)을 겨냥한 말씀이다 : 그들은 ‘눈이 잘 보인다’고 하지만 ‘눈이 먼’ 사람들로서(9,40-41). 스스로도 보지 못하고 아는 체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보지 못한다 :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지식은 하느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전해지는 순간부터 완전히 의미를 상실한다. 그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폭력으로 없애려든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온다” (10절) : 구체적으로는 양떼뿐만 아니라 그보다 앞서 목자까지도 죽여 없애려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양떼를 흩어지게 하기가 더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6,31 참조). 그러므로 문맥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으며, 그로써 그의 모든 양떼가 “더 풍성한 생명을”(10절) 얻게 되리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거짓 목자들을 거스려 당신 자신의 참되고 ‘유일한’ 목자로서의 품위와 신자들의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합법적 권리를 주장하신다. 사실, 예수께서 두 번씩이나 당신 자신을 “양들이 드나드는 문”(7-9절)이라고 하시고 또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와야만 안전할 것이다”(9절)라고 엄숙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오직 그분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에 힘입어야 하고 또 그분이 모범으로 보여주신 진리와 사랑의 최상의 요구를 존중함으로써만이 진정으로 형제들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ㄷ.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당신 교회의 머리로 세우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내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5.16.17).

 그런데 이렇게 상징적 개념들을 자꾸 겹쳐놓기만 하면 혼돈만 생길 뿐이다 : 사실상,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 보면 우리는 거기서 조화와 일치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방의 양 우리에서부터 사고를 출발시켜 보면, ‘도둑’과는 달리 ‘목자’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의 기능과 또한 참된 목자가 베푸는 희생적 사랑의 봉사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목자이시며 동시에 당신의 교회의 선익을 위해 계속해서 세우실 무수한 ‘목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증명의 ‘문’이시다.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봉사



 이 모든 내용은 바로 오늘 교황 바오로 6세의 뜻에 따라 세워진(1963년) ‘세계 성소의 날’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의미이다 : 당신 교회에 항구한 사목적 봉사가 필요함을 예견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인간들의 마음을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도록 돌려놓으실 힘을 지니고 계신다.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서처럼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는 새로운 베드로, 안드레아, 요한 들이 그분의 초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 (마태 4,19 참조).

 하지만, 아마도 그분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까지 실천해야 할 그 사랑의 봉사는 나약한 인간에게 두려움을 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많은 젊은이들의 이상은 높지만 주저하는 마음에 용기를 불어 넣어주십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기도해야 한다.

 또 무엇보다도 특히, 참된 목자는 오직 항상 그분뿐이시며 그분은 당신이 부르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형제들 가운데서 떳떳하게 당신을 드러낼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 역시 이러한 사실을 그의 오순절 설교의 결론 부분을 전해주고 있는 오늘 제 1독서에서 입증해주고 있다 :"그들은 베드로의 말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그날에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은 삼천 명이나 되었다“(사도 2,41). 베드로의 설교 속에는 그리스도의 ‘음성’이 그대로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 그래서 그 양떼들은 그 음성을 알아들었던 것이다(요한 1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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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부활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부활 제 4 주일

    제 1 독서 : 사도 2, 14a. 36-41

    제 2 독서 : 1베드 2, 20b-25

    복     음 : 요한 10, 1-10


    제 1 독서 : 사도 베드로의 설교로 유다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근본적인 확신은 이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최대의 업적을 완성하셨고, 믿는 사람들은 이제 모두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확신이다.

    제1독서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께 대한 언급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영광 속에 들어가신 지금, 그리스도의 현존은 교회 안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계속된다.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가능하게 하셨다.


    제 2 독서 :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베드로 전서의 저자는 이사야의 텍스트를 인용한다. 이사 53장에서 미래에 올 메시아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비유되었다. 베드로 전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이사 53장의 텍스트로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부각시킨다. 즉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에 우리의 상처가 나았다는 것이다.


    복     음 :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 중에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나쁜 목자들의 소행을 비판했다(에제 34장). 농경 국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런 비유를 상기하면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로 제시한다.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보고 내가 돌보리라. ……이렇게 나는 목자의 구실을 다하리라.”(에제 34, 11.16)는 예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다. 사실 참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또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문은 생명과 자유로 통하는 문이고, 원수의 모든 간계를 막는 보호를 뜻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하느님의 부르심, 소명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초대하고 소명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사도적 권고 [현대의 사제 양성] 35항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성소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성소는 교회를 제쳐두고 또는 교회와 상관없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성소가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그 본질상 부르심인 교회는 동시에 성소자들을 탄생시키고 교육하는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성소를 밝히 보여주고, 그 성소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성사이자 표지이며 도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각 가정들이 인간의 생명이라는 선물을 모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가정 자체가 이른바 ‘최초의 신학교’가 될 수 있도록 하여, 어린이들이 그 안에서 어려서부터 신앙과 기도가 무엇인지, 교회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교황의 이 가르침은 혼인성사로 이루어진 가정이 제1의 신학교이자 성소의 온상임으로 밝혀주신 것으로 가정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고 서로서로 사귐, 나눔, 섬김이 있을 때 그곳에서 하느님 백성을 위해 일할 지도자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그 지도자는 꼭 성직자, 수도자만을 뜻한다기보다는 폭넓은 의미에서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의 봉사자로서 평신도 지도자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우리 교회 안에서 봉사할 착한 목자가 많이 나오도록 기도하는 날이고 이미 특수 성소의 길에 들어선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신학생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착한 목자의 특징은 양들이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는 데 있다고 오늘 복음(요한 10, 1-10)은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하나하나 다 식별하며, 양들도 목자의 음성과 모습을 알아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관계, 이것이 착한 목자와 양들의 관계인 것입니다.

    아울러 양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양들을 위해서 몸을 던져 희생하는 목자야말로 참 목자인 것입니다. 이 목자는 또 모든 양들이 안심하고 드나들 수 있는 문이며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새로 시골 학교에 발령을 받은 어느 선생님이 부랴부랴 짐을 싸서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하숙집에 짐을 풀어놓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 밤, 선생님은 마음을 다잡아먹었습니다. ‘내 올곧은 행동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리라.’ 여러 날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날그날 혼신의 힘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선생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어머니가 내려왔습니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에 어머니를 마중하러 갔습니다. 어머니는 선생 티가 나는 아들을 무척 대견스러워했습니다. 어머니와 하룻밤을 지낸 다음날, 선생님은 아침 일찍 하숙집을 나섰습니다. 걸어서 학교에 가야했기에 매일 아침 그렇게 서둘렀습니다. 그런데 중간쯤 갔을 때 시내를 건너다 그만 잘못 놓인 징검다리를 디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른 일어섰으나 옷이 흠뻑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로는 학교에 가지 못할 것 같아 선생님은 발길을 하숙집으로 옮겼습니다. 온몸이 젖어 물을 뚝뚝 흘리고 들어오는 아들을 본 어머니가 놀라서 뛰어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어찌 된 것이냐?”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습니다.“가다가 잘못 놓인 징검다리를 디뎌 빠진 것뿐입니다.” 선생님이 젖은 옷을 털며 말하자, 어머니가 엄중한 목소리로 되물었습니다. “그래, 그 징검다리 돌은 제대로 놓아두고 왔느냐?” 어머니의 말에 선생님은 어쩔 줄 모른 채 얼굴만 붉어졌습니다. “너무나 당황하였기에…….” “시끄럽다. 이 녀석, 그래 가지고 네가 선생이더냐, 빨리 돌부터 바로 놓고 와서 옷을 갈아입거라.” 선생님은 할 수 없이 다시 뒤돌아서 시내로 걸어갔습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돌은 제대로 놓아두고 왔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스승의 길이 무엇인지 올바로 가르쳐준 어머니의 모습 속에서 착한 목자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먼저 자신이 모범을 보이고 올바른 길을 걸어감으로써 남을 인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착한 목자의 모범이신 예수께서는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강론한 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로 3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새로운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가르침으로 따르고 착한 목자께서 인도해 주시는 길을 가기 위해 자신의 그릇된 버릇을 뜯어고치고 죄를 뉘우치며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제2독서 베드로 전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처지로 불러주시든지 각자의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가며 늘 십자가상에 달린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결코 원망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성부께 모든 것을 내맡기신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참된 목자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도록 해야하겠습니다.

  2. user#0 님의 말:

     

    부활 제 4주일

            1. 정진석 추기경(가)/    2              2. 강길웅 신부(가)/3

            3. 이규철 신부(가)/5                     4. 김정진 신부(가)/6

            5. 최인호(가)/8                    6. 착한 목자이신(가)/9

            7. 나는 양의 문(가)/11           


    1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사제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정진석 대주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사제직과 봉헌생활은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사제직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부르심으로서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임무를 나누어 수행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늘 깨어 있으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하여 성소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들 가운데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시야를 넓혀서 믿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들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는 우선적인 선택을 하도록 불림받았습니다. 그들이 복음적 가치를 따라 인간적인 품위를 지니고 살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모습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인간성의 상실을 포함하여 그 외의 많은 가치를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자신들 스스로 하느님을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오늘날 전반적인 가치관의 부재(不在)와 정신적 방황 속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껏 전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 내적으로도 영적(靈的)인 빈곤을 느끼고 있습니다. 간혹 이 세상의 현세적인 목표만을 최우선시하는 경향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제들은 자주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제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생활 속에서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헌신하고 있으며, 얼마나 성실히 사제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에게서 사제직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사제상은 “먼저 기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하는 사제, 여러 성사의 집전을 통하여 사람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치유하는 사제, 다른 사람들의 성화(聖化)와 구원를 위해서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사제, 가난한 마음과 따뜻한 사랑을 간직한 사제”입니다.

    지난날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서 헌신하다가 이제는 하느님의 품에 안긴 수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누릴 수 있기를 청하며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영육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들 가운데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응답하여 이 시대에 교회와 겨레를 위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성소는 빛나는 은총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2,14a.36~41 (예수를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2독서 Ⅰ베드 2,20b~25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자이신 그분에게 돌아 왔습니다) 

    복 음 요한 10,1~10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모든 부르심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비록 신부나 수녀가 되는 부르심이 아니라 해도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의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사람을 아무렇게나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을 적절하게 부르십니다. 예를 들어 누구는 바보로 태어나고 누구는 불구자로 태어납니다. 혹은 일찍 과부가 되기도 하고 또는 박해와 시련 속에 인생을 고달프게 걸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부르심도 하느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존재되지도 않고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는 바로 그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받는다 해도 참고 이겨나가는 데에 불리움을 받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이 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집안 일이 바쁠 때 부모는 자녀들을 부르십니다. 힘들고 어려우니까 함께 거들라고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면 밥도 제 때에 못 먹고 잠도 제 때에 못 자게 됩니다. 그러나 자녀의 바로 그 희생이 부모에게는 큰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부름은 부모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자녀 자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바로 그 점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는 자신의 세속적인 어떤 목적을 위해서 성소의 길을 걷지는 않습니다. 가난과 순명과 정결 속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길을 역행하는 고난의 길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길이 저주받은 불행한 길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착한 목자에 대한 말씀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고생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들에서 자주 밤을 새워야 하며 찬 비에 몸을 떨기도 하고 잃어버린 양이 있으면 며칠이고 밤낮으로 고생하며 찾아야 합니다. 늑대나 도적과도 싸워야 하며 병든 양을 찾아 치료도 해야 합니다. 목자는 실로 고생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생이 많을수록 착한 목자가 되며 나쁜 목자는 고생을 안 합니다. 자기만 편하게 지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진정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땀흘리는 참된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하여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성소는 특히 빛나는 은총이며 하느님이 믿고 기대하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떤 본당에서 레지오 단장까지 하는 열심한 자매가 있었는데 당신의 큰 딸이 수녀원에 간다고 하니까 딸을 집에 감금시켜 놓고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협박을 하며 말렸습니다. 본당 수녀님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하니까 나중엔 성당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딸이 가고자 하는 수녀원에 찾아가서 대판 싸우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주 착각을 합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세속적으로 잘먹고 잘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찾아서 행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못먹고 못살아도 아버지의 말씀과 그 뜻 안에서 살려고 할 때 거기에 참 보람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 지나갑니다. 부귀도 영화도 권력도 다 지나갑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만은 영원히 살아서 기쁨의 꽃을 피우고 보람의 열매를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신부나 수녀 되는 것이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보다야 세속적으로 덜 재미가 있겠지만 그러나 하느님만이 주시는 참 기쁨과 행복은 더 크게 누리게 됩니다.


    성소는 사실 별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별것도 아니면서 아주 위대하며, 아주 빛나는 은총이면서 또한 별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그랬습니다. 누구나 다 걸어갈 수 있는 길이면서 또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말이 이상하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가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학벌도 없고 인품이나 인격도 없었으며 오히려 성미가 급하고 충동적이라 진득하니 뭘 성사시킬 수 있는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무식하고 거칠었으며 겁쟁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모든 약점을 더 깊이 사랑하셔서 당신의 대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어마어마한 은총이 인간의 약함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일꾼들을 간절하게 부르십니다. 당신의 목장에서 잠도 설치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며 수고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부르십니다. 왜 부르십니까?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믿고 기대하시는 내용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의 협조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Ⅰ베드 2,20).






    3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나는 양의 문

    이규철 신부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끊일 줄 모르고 귓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파릇파릇 싱그럼을 되찾는 봄이 되면, 솔솔 불어예는 솔바람소리는 부푼 소녀의 꿈을 달래며,  산과 들의 아지랑이는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을 부르고 있으며,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에서는 산업전선의 역군이 될 젊은이들을 부릅니다. 농촌에서는 흑과 더불어 새 마음, 새 마을 정신의 소유자인 젊은 상록수의 역군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일치를 이루고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거룩한 성전인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광과 찬미로써 감사와 청원의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철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어버이의 부르심이 가장 믿음직하여 의지하고 싶었으나 나이가 들자 학창시절의 젊은이들에겐 학교 은사님들의 부르심이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험준한 세파에 첫 발을 내딛게 되는 젊은이들에게 순간적이요, 일시적인 쾌락과 행복만이, 젊은 연인들에겐 사랑의 속삭임만이 귓가에 울릴 뿐… 이 모두는 인생의 허무함만을 더욱 느끼게 할 것입니다.


     해산물이 풍부하여 평화스런 나날을 보내는 G섬 3, 000명 주민들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호화찬란한 서울의 문화혜택을 마다하고 한 젊은 의사는 자기 아내요 간호원인 부인과 함께 섬에 들어와 조그마한 병원을 차리고 주민들을 위해 희생과 봉사로써 지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아야 했으니 이는 30여 년 공부한 후, 그것도 서울에서 태어나 모진 고생 끝에 의사가 된 사람이 무엇하러 이 험악한 섬으로 왔느냐 하는 주민들의 비웃음은 나날이 더해 갔었습니다.

    솔솔 불던 봄바람이 변하여 칠월 한낮의 무더운 바람이 부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콜레라라는 전염병이 섬을 휩쓸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십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젊은 의사와 간호원인 아내는 온 정성을 다하여 약을 나누어주며 치료하는 데 별지장이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환자가 늘게 되어 텅텅 비던 병원이 모자라 천막을 친다 하며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의 나날이었습니다. 50명, 60명 늘어나기 시작한 환자수는 열흘도 못 되어 100명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이겠습니까? 밤을 세워가며 온 정성을 다하여 환자를 돌보던 그 젊은 의사는 사랑하는 아내와 죽어가는 환자를 외면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해산물로써 많은 이익을 남기고 경제적으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후손들의 건강관리를 위하여 여러분 중의 자녀를 공부시켜야 합니다.” 그 젊디젊은 의사의 유언 아닌 유언을 되씹어 보았지만 눈물과 통곡 속에서 좌충우돌(左衝右突)을 겪어야 하는 운명에 자신의 가슴을 치며 통곡할 뿐이었습니다.

    갈매기 강 건너간 다음 목을 놓아 울어봐도, 땅을 치며 통곡해 보아도 시원치 않은 가슴 안고 뒤늦게야 서둘러 보았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적다”(루가 10, 2)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 듣고 실행에 옮겨야 하겠습니까? 오늘은 성소주일,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따르는 것보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것, 성업(聖業)을 잇는 성직자, 수도자가 되는 길을 일컬어 말하며 여러분에게 교회의 이름으로 호소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하는 날입니다.

    성소라 함은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의 길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할 때, 좀더 자신의 전생애를 바쳐 희생과 봉사의 길을 택한 성직자, 수도자의 길을 특수 성소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직자, 수도자의 숫자상의 부족함을 절감하면서도 애태우던 섬 사람들과 같이 불난 집 불구경하듯 무디어진 생각은 없으셨겠지요?

     강론이란 이 시간을 통하여 시간의 제약과 부족한 언변으로 어찌 드리고픈 말씀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제약이란 이름 아래 막연한 말씀입니다만 부연하여 말씀드립니다.

     첫째: 성소 계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합시다….

     둘째: 맡은 바 성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성직자, 수도자를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칩시다….






    4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0 (가) 나는 양의 문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는 착한 목자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을 오래 전부터 착한 목자의 주일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또한 이 날을 성소(聖召)주일로 지내기 시작한지 12돌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당신을 <목자(牧者)> 혹은 <문(門)>에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나 희랍어에서는 국민의 지배자인 국왕을 종종 목자라고 칭하여 왔고 국민을 양의 무리라고 비유되어 국민의 행복을 위협하는 원수를 사랑이나 도둑이나 강도라고 불렀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나는 착한 목자이다>(요한 10, 11) 또는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요한 10, 7) 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착한 목자이십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자기 본분에 충실한 참다운 자격을 지닌 전형적인 목자라면 필요하다면 자기 생명마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는 결심, 즉 헌신적인 애덕이란 것은 착한 목자의 특징입니다. 이상적인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헌신적인 사랑의 위력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에서 현저히 드러난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의 직제자인 사도들은 양들을 위하여 모두 목숨을 기꺼이 바쳤고 가까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경우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939년 을해년 박해시 범주교님과 나신부님 그리고 정신부님이 관헌에게 체포되어 끌려가실 적에 그들은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겨놓았습니다. 한편, 함경도 덕원에 계시던 신주교님은 공산당에게 끌려가실 적에 역시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겨 놓으고 떠났습니다. 6.25동란 때에도 많은 목자들이 생명을 바쳤고 현재에도 수 많은 목자들이 양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시오>(마태 4, 19)하시며 12사도를 하나 하나 모았듯이 오늘도 영일 없이 나를 따르라고 우리에게 절규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전지하시기 때문에 양들인 우리의 마음을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며 양들을 일일이 잘 보살펴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신자들은 사랑과 신앙의 정신으로 주님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양들은 착한 목자의 음성을 잘 알고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잘 알아듣고 순명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계명과 가르치심은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주일을 주님의 날답게 거룩히 지내며 주일 미사에 나와서 감사 드리고 기도하며 속죄하며 축복을 비는 행위는 바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따르는 것이 되겠습니다. 교회의 계명을 철저히 준수하며 독실한 신자생활을 영위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며 화해와 순진한 정신으로 일관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실한 양이 되는 것이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이 말씀한 <도둑>들이 많습니다. 그 <도둑>들은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가는 데 또한 신앙생활하는 데 방해를 놓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마음 속으로 침입하여 우리의 신앙을 뺴앗아 가려고 합니다. 원수들은 양들을 흩어지게 만들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신문이나 텔레비젼에서 그리고 잡지에서 무책임한 기사들을 많이 보고 읽게 됩니다. 오늘날은 홍보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보의 기관이 주는 나쁜 영향은 대단합니다. 텔레비젼의 프로가 어린 동심에 즉시 반영되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 좋은

    첫쨰 방법은, 한평생을 예수님께 봉헌하여 하느님의 사업에 종사하며 인류 구원이란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에 협력해 드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 대신 일해 줄 젊은이들을 간곡히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에 응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젊고 씩씩하고 관대하고 용감한 젊은이들이여! 예수님의 이 간절한 부르심에 선뜻 나와서 <예> 하고 따르지 않겠습니까.


    신학교에서나 수도원 수녀원에서는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좋은

    둘째 방법은, 부모님들이 자녀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신자 가정은 제1의 신학교라 합니다. 어린이게게 기도와 좋은 표양으로 신앙과 진리 속에서 싹트고 자라게하여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겠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여! 당신 교회 안에 있는 양들을 지켜 주시고 원수들의 공격을 막아 주소서. 모든 양들이 진리와 사랑으로 서로 일치하고 주님의 음성을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5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정말 잘 들어두어라

    최인호 베드로/작가


    부처의 말을 기록한 초기 경전은 대부분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뜻으로, 2대 제자인 아난(阿難)이 부처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기록할 때에 그 첫머리에 붙였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의 4복음도 아난이  보고 들은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처럼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다 기록하자면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요한 21,25)이라면서, “이 책을 쓴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라고 기록했습니다.

    다른 복음사가들도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를 믿음으로써 참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요한처럼 책을 썼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행동과 하신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면 주님의 말씀 중에서도 특별히 강조하신 부분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요한은 주님께서 강조하실 때면 “정말 잘 들어두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쓰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주님께서 그 말을 20번 이상 사용하셨음이 나옵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강조하실 때면 “나는 분명히 말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음을 기록하고, 자신이 쓴 복음 속에 이 말을 20번 이상 사용했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 주님께서 사용하시던 말버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님께서는 특별히 강조하실 때마다 독특한 어법을 사용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너희가 하늘이 열려있는 것 과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로 시작하여 “물 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 이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등으로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에 관해 말씀하실 때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고 특별히 강조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은 착한 목자이며 우리들을 양이라고 비유하시는 말씀에서 그 특유의 말투를 두 번이나 쓰신 것은 이례적입니다.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목자와 양’의 말씀이 또다른 가르침의 핵심임을 주님께서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하심으로써 여전히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의 비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진리의 문입니다. “이 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참조).






    6     부활 제4주일   요한 10,1-10 (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음성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는 2차대전 중인 1941년 2월, 나치 독일군에 의해 체포됐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다. 어느 날 꼴베 신부가 있던 감방에서 탈출자가 생겼다. 독일군을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열명을 뽑아 굶어죽이는 형벌을 당하게 했다. 그 때 뽑힌 유대인 한 명이 자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죽을 수 없다고 울부짖었다.


    그때 꼴베 신부는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자원했다. 그 행동은 독일군에게까지 큰 감동을 주었다. 결국 꼴베 신부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고 죽었다. 꼴베 신부는 사제로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기꺼이 따랐던 것이다.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쳐 희생과 사랑의 재물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착한 목자의 이야기이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다. 주님은 자신을 목자에 비유하신다. 또한 도둑과 강도를 예로 들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신다.


    착한 목자는 어떠한 분이신가? 목자는 문으로 정당하게 들어가지만 도둑이나 강도는 담을 넘어 몰래 들어간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정당하고 순리적이며,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도둑과 강도는 그와는 정반대이다. 속임수와 거짓, 그리고 불신의 관계인 것이다.

    양과 목자가 만나는 방법에서도 관계의 정당성이 드러난다. 또한 목자와 양은 서로 말소리를 알아듣는다. 음성을 안다는 것은 지난 체험과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만을 듣고 편안해 하는 것과 같다.


    음성을 안다는 것은 믿음과 존경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도 주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우리와 만남을 이루어주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할 수 있을까?

    문자로 기록된 성경 말씀에서 어떻게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 사실 부족한 인간의 지혜로 주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그분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경건하고 믿음의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마을의 귀를 열어야한다. 그래서 성서를 읽을 때 기도와 묵상을 필요로 한다.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들으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믿음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게 되고, 그 음성에 우리의 삶을 맡기고 따라간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이 이끄는대로 따라간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자세이다.

    목자는 언제나 양들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한다. 위험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한다. 즉 목자의 희생과 순교자적 삶이 오늘 복음에서 강조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더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신다.


    일반적으로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면서 양을 쳤다.

    일정한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풀을 따라 이동하다간 밤이 되면 들판에 모아놓고 밤을 지낸다.

    따라서 목자는 밤중에는 맹수들이 양을 덮치지 않을까 밤을 새며 지킨다. 그러므로 양의 우리가 없기 때문에 목자 자신이 우리의 문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므로, 그분을 통해 들어가고 나올 수 있고, 생명을 보호받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시다. 그분은 양을 사랑하고 보호해주시며 생명을 지켜주신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만이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 생명이 보장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 때로는 이웃과 일상의 사건을 통해, 때로는 자연과 우리의 양심을 통해 당신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7              부활 제4주일   요한 10. 1-10 (가)  나는 양의 문


    우리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상 속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집을 나설 때나 들어갈 때 하루에도 수없이 문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은 대문, 창문, 성문, 자동차문, 버스문 등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이러한 문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그 문은 악의 위협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처럼 제약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개선문처럼 환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서는 문을 통해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문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선민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통로가 됩니다. 이 성문 덕분에 이스라엘 시민의 안전이 보장되고 또 그 문을 통해서 모든 시민이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구해주신 그 일을 한껏 기뻐하며 아끼시는 이 수도 성문에서 끝없이 당신을 찬미하리이다”(시편 9, 14) 하고 노래하는 시편 저자처럼 한마디로 성문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의 성문을 튼튼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47, 13)


    아담과 하와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배반하고 하느님의 집으로부터 쫓겨난 이래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느님과 직접적인 친밀한 교제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래로 이제는 하느님을 직접 뵘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경신례를 통해 하느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하느님의 영역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그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 조건은 바로 의인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시편 118, 19-20) 즉 “이것이 야훼의 문, 의인들이 이리로 들어가리다” 하신 시편 118장의 말씀과 같이 의인들만이 하느님과 친교를 할 수 있고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의인들만이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는 성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인들만이 튼튼한 성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죄많은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죄의 속죄를 위해 당신자신을 속죄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 역할을 하신 분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ㄷ그분은 우리 사람들을 하느님의 문으로 들어가게 하실 수 있는 하늘의 문이 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요한 10, 9)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은 하늘로 인간을 인도하시는 문이시고 하느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바로 그분을 통해서만 하느님의 성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딴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며 강도”라고 하신 요한 복음 10, 1 의 말씀처럼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 즉 생명과 구원에로의 문을 통과하는 조건은 회개와 신앙입니다. 그 문은 좁은 것입니다. 이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바로 극기와 희생과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희망,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루가 13,24)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좁은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마태오 복음의 혼인 잔치에서 준비하고 기다리지 않은 처녀들처럼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그 닫혀진 문은 다시 열리지 않게 됩니다.(마태오 25,10; 루가 13,25)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하늘나라에 이르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좁은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같이 일상에서 회개하는 삶, 바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을 희망하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문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목고리를 진정으로 듣고 문을 여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그 사람과 함께 먹고 그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요한 묵시록 3,20) 감사합니다.





  3. user#0 님의 말: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1.말씀읽기: 요한10,1-10 목자의 비유

    2. 말씀연구

    이 말씀은 실제적인 시골 생활에 대한 묘사입니다. 밤이 되면 그 때까지 풀을 뜯어 먹기 위하여 산에 흩어져 있던 양들이 맹수와 도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돌담으로 쌓은 양 우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양 우리를 지키는 목자들은 모두 그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막이나 혹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다시 양 우리로 돌아옵니다. 산으로 가기 전에 양을 우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소리를 지릅니다. 때로는 목자가 뒤에서 양을 몰기도 하고, 때로는 양떼 앞에 서서 풀밭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양을 지키는 사람과 양을 훔치려는 사람은 각기 다른 행동을 합니다. 나를 신앙에로 불러주는 사람과 나를 신앙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끌어 들이는 사람의 행동 또한 각각 다릅니다. 따스한 말 한마디로 나를 더 열심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앙생활 못하게 살며시 유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내 형제 자매들에게 있어서 목자입니까? 아니면 도둑이며 강도입니까?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을 만들어 놓는 이유는 다른 이들이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인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당당하게 문으로 들어갑니다. 도둑은 그 문을 부수고 들어오거나, 담을 넘어 들어옵니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어느  신부님이 그들과 함께 목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동지방의 “와디”는 평상시에는 메말라 있다가 비가 오면 커다란 강을 이룹니다. 그래서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동굴 속으로 피신을 합니다. 그런데 동굴 속으로 피신을 하면 여러 목자의 양들이 섞이게 되는데 그 신부님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의 양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목자들은 웃었습니다.

    “비가 그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있다가 보십시오.”

    비가 그치자 목자들이 하나 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목자가 노래를 부르며 나가자 그 목자의 양들만 따라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신부님이 하도 신기해서 그 노래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한 마리도 안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팔레스티나의 목자들은 무리들 속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양에게 이름을 붙이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양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애정이 있다는 말인지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하나하나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불러 주시는데 나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착한양이나 예수님의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양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들은 목자를 따라갈 것입니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들은 낯선 사람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그가 낯선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낯설다는 것은 복음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기에 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결국 신앙을 잃거나,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데…,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하긴 못 알아들을 만도 합니다. 양이랑 자신이랑, 목자랑 예수님이랑 연관시킬 수 없는 이들은 결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문을 통해서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은 참된 목자입니다. 그리고 양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신자들을 이끄는 사람들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가르치고 인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근거를 두고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 나아가는 사람은 참다운 목자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아무리 말을 잘하고 수려하다 할지라도 양을 헤치는 사람들입니다. 사이비 종교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어 놓는지…,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도둑이며 강도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혁명가처럼 거칠은 행동을 한 가짜 메시아, 갈릴레아의 유다, 투다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투다라는 카리스마적 인물은 수많은 맹신적 추종자들을 이끌고 요르단 강을 향해 가면서, 하느님이 여호수아를 위해 요르단 강을 갈라 놓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다를 위해서도 요르단 강을 갈라지게 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들의 희망은 로마 군인들이 투다를 체포하여 사형시키자 비로소 깨졌다.


    또한 양들을 위하지 않는 목자(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광야가 대부분인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양들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것은 목자들이 땀 흘린 결과입니다. 목자들이 돌을 골라내고, 덤불과 나무뿌리들을 제거하고, 땅을 갈아 양들이 먹을 식물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들을 제거해 주어야 비로소 풀밭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엄청난 수고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넉넉한 삶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으시면서…,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참된 목자는 약탈자가 아닙니다.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착한 목자이십니다.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을 현혹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둑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존재. 신앙인은 도둑이 되어서도 안 되고, 도둑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도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지, 관계 안에서 자신의 지위나 사업등의 번창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들을 자신의 사업에 끌어들여 고객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다단계 판매 등으로 레지오 전체를 망쳐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장인들의 경우 상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사람들도 있고, 본인의 의지로 나왔지만 그곳에서 신앙을 잃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신자들이 더욱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는지 나를 통해서 신앙을 잃어 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도둑은 양들에게 죽음을 줍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어두운 곳을 지날 때라도 양들은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사나운 짐승들을 쫓아 줄 뿐 아니라 밤에는 그 지팡이의 탁탁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밤길을 갈 수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를 믿기에 밤에도 목자를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믿기에 따라 나서는 양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2.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목자는 자기 양들을 압니다. 나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을 삶 안에서 만나 뵙고 있습니까?

  4. user#0 님의 말:

     

    1. 변창수 시메온

    가. 부활 제4주일


    제1독서 : 사도 2, 14ㄱ. 36-41

      부활 제3주일의 제1독서와 마찬가지로 본문도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사도 2,14-30)의 일부분이다. 14절의 머리말에 이어 15-21절은 요엘 예언서의 말씀(요엘 3,1-5)을 인용하면서 성령 강림을 구원 예고의 종말론적 성취로 해석한다. 그리스도론적 케리그마를 담고 있는 22-25절은 부활을 포함하여 예수님께 일어난 모든 사건이 하느님의 일임을 증언한다.

      25-28절은 시편 16장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구약성서에서 예언되었고 하느님의 뜻대로 실현되었음을 보여 준다. 29-36절은 구약성서의 예언을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 36절은 구약성서의 예언에서 비롯된 결론이자 종합이라 할 수 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및 현양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케뤼그마를 요약하고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죄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37-39절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의 회개와 세례를 요구하고 있다. 베드로의 권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믿음과 세례로 나타난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은총이신 성령께서 내려 오시는 장소이다.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성령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구원을 위한 은총의 제안으로 다가오신다.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며 종말론적 선물, 곧 성령을 받게 된다.

      하느님의 성령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가득 차,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시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는 눈을 뜨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분이시다 (루가 4,16-22). 바로 이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성령이 주어지는 장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활동을 선포함으로써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내려 오시는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제2독서 : 1베드 2, 20ㄴ-25

      오늘 독서는 서간의 교훈적 부분에 속한다. 저자는 여기서 서로 다른 사회적 그룹에 속하는 신자가 그들의 특수한 생활 여건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지 그 방법과 태도를 제시한다. 특히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유인이 되었지만 고약한 주인의 횡포에 내맡겨져 있는 종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18절). 각자의 신분과 여러 사회 계층에 맞는 윤리적 생활 규범들을 요청했던 당시 희랍 문화권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이 교훈 격려 부분에는 사도 연설의 일반적인 예들이 다시 새롭게 나온다: 종들에 대한 문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확인, 고통받는 종에 대한 성서적 증거 제시, 주님으로서 그리스도 왕께 대한 표현, 예수님을 본받기 위한 회개에로의 초대 등이다.

      1베드 배후에 있는 사목자는 고통 중에도 기가 꺾이지 않도록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하여 특히 신약의 그리스도 모습을 보여 주는 구약성서의 구절을 연상시킨다(22절):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이사 53,9). 이 연상은 신자 하인들을 위하여 심리적으로 알맞은 위로의 동기를 주고 있다.

      회개 후에도 종들의 외적 여러 여건과 하인으로서의 운명은 물론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영혼의 목자이고 보호자이신 분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외적 속박으로도 파괴될 수 없는 내부로부터의 만족과 고요함, 그리고 평화이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역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데서 그리스도 신자의 자유를 말한다. 이것은 온갖 육적인 삶을 벗어버리고 율법의 굴레를 벗어버림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말은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의 성숙과 구원의 의미와도 통한다 할 수 있다.


     복 음 : 요한 10, 1-10

        요한 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드시면서 당신을 “착한 목자”로 나타내신다. 지금까지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해 중점을 두고 있었다 : “새 성전”(2,21-22), “생명수”(4장), “생명의 빵”(6장), “세상의 빛”(8,12)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양이 드나드는 문”(10,7)과 “착한 목자”(10,11)로 당신을 드러내신다. 10장의 이 “자기 계시”(문과 착한 목자)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13장)가 시작되는 직전에 놓여 있느니 만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최고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10,11)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드러내신다. 하지만 10장에서 ‘문과 목자’로서 당신을 계시하신 본래 부분은 10-18절까지이다. 26-30절에도 양에 관한 말씀이 있긴 하지만 이 단락은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다. 문제는 10,1-5의 문학 유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 단락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우화(Allegoria: 각 소재마다 상징적인 뜻을 전달하는 이야기)와 비유(Parabolē: 하나의 뜻만을 전달하는 이야기)가 혼합된 “수수께끼 같은 비유”(6절 : 그리스어로 Paroimia)이다. 공동번역에는 단순히 “비유”로 번역했지만 새 번역에는 “수수께끼(같은 비유)”라고 했다. 7-18절은 1-5절의 “수수께끼 같은 비유”에 대한 우의적 해설이다. 10장 1절부터 18절까지 구성은 이와 같은데 부활 제4주일 복음은 가, 나, 다 해에 따라 편의 위주로 갈라놓았기에(가해 10,1-10; 나해 10,11-18; 다해 10,27-30) 본래의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가해의 복음은 중간에서 잘려져서 이 복음만으로는 본래의 뜻을 잘 파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의 복음에서 몇 가지 중요한 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자기 계시 중에서 “착한 목자” 만큼 다정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없다. 다른 어느 계시보다도 우리에게 친근감을 준다. 자기 양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목자는 우리들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내놓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양들도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아무리 다정하게 불러도 자기 주인이 아니면 양들은 따라 나서지 않는다. 우리도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구별하도록 하자. 교황 요한 바오로 6세께서는 이날을 ‘세계 성소의 날’(성소 주일)로 정해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주님의 교회 안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기도를 당부하셨다.


    강론

     오늘은 부활 4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느님께 특별한 성소를 받은 성직자와 수도자 뿐만 아니라 평신도로서 이 세상에 사제직, 예언직, 왕직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해야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어떻게 하느님께 마땅한 제사를 드리며, 말씀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있는지 되돌아봅시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사도직에도 불림을 받은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들이 성소를 받고 하느님의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분 한분이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꼭 염두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섬기며 자신을 봉헌하여야 합니다. 부르심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였고, 부르심에 맞갖게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 날에 군중을 향해 회개를 촉구하면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사명을 그대로 실천하십니다. 우리도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성당에 나와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단순한 친교단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께서 주시는 참 자유를 깨달아 세상에 전파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직분이 주어진 것입니다.


     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길 잃은 양처럼 헤매던 우리를 이끄시어 우리들의 목자이시며 보호자가 되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신 것을 본받아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교회의 가르침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공동체에 속하게 되며 어느 때는 대표성을 띠게 됩니다. 자신은 평생 누구 앞에서 공적인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해도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교회를 대신하여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말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 모두가 ‘선교’의 대상이며 우리에게 맡겨진 직무대로 참 목자로서 ‘양’들을 이끌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며 목숨을 바쳐 양들을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명을 받아 세상에 파견되셨고, 당신의 양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고 내가 보호해야 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가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시대에 ‘나를 따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저런 가르침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진리를 선포한다고 하는 사람들, 시대가 어려울수록 더 많은 ‘지도자’들이 득세하게 됩니다. 나라를 이끌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흐르는 기름기가 왠지 거부감을 줍니다. 그들이 떳떳하게 말하는 변혁과 봉사, 우리들에게 어떤 것을 베풀어줄 것인가는 그들의 삶을 통해 그가 목자인지 삯꾼인지 드러납니다.


     문지기가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말을 오늘 복음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름을 알고 부른다는 것은 인격적인 만남이 전제되어 있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아픔을 알고,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바로 착한 목자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혹은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사람들을 대하며 공동체를 이루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피하지 않고 양들 앞에서 막아주는 사람이 목자이며, 죽을 위험에도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입니다. 착한 목자에 대한 설명을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얼마만큼 사랑하며 당신께서 그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짐작해보고, 사랑을 전한다고 하는 내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적당히 스스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봅시다. 서로를 위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면서,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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