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4주일



         1. 최기산 주교(가)/ 2                    2. 변희선 신부(가)/ 3

         3. 김몽은 신부(가)/ 5                    4. 유근복 부제(가)/ 6

         5. 변기영 신부(가)/ 9                    6. 강길웅 신부(가)/ 11

         7. 이용현 신부(가)/ 13                   8. 최인호 작가(가)/ 14



1                연중 제4주일   마태 5,1-12 (가) 뒤바뀐 행복

                                                        최기산 주교



어떤 집에 아들 셋이 있었다. 아버지는 큰아들과 작은 아들에게 옥답을 유산으로 주었다. 그러나 막내 아들에게는 돌투성이의 척박한 밭 한뙈기를 주었다. 따지고 보면 막내는 신세대이고 정의파여서 아버지의 잘못을 묵과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기에, 자주 대들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사실 막내는 심성이 따뜻하고 의리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반면 형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면서, 평소에는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었다. 그리고 막내를 은근히 미워하면서, 척박한 땅을 유산으로 받은 걸 고소해 하고 있었다.



착각은 금물



동생이 가난하게 사는데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형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그 마을에 대단위 주택단지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야나 밭을 가진 사람들은 수십배의 값으로 땅을 팔아 부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절대 농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논을 옥답이라 자랑하면서 돌투성이의 척박한 밭을 가졌던 막내를 불행하다고 여기던 형들의 생각은 일순간의 착각이었다. 막내는 가난으로 천대받다가 부자가 되었다. 그에게 주어졌던 쏠모 없던 땅이 보물처럼 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는 말이 있는데, 오만하게 자신에게만 행복이 언제나 졸졸 따라다니리라는 것은 착각이다.



족쇄였던 율법



예수님 시대에도 착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 돈 있고 빽 있던 사람들 즉,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은 참 행복이란 율법을 잘 배우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신들은 그렇게 하고 있기에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성스러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613개의 율법 조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복잡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자세히 숙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 많고 시간이 많아서 빈둥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율법을 자세히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당시의 민중들은 매일 노동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율법을 다 배워 그대로 산다는 것은 애초에 틀려먹은 일 이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세금도 조금밖에 낼 수 없고, 헌금도 조금밖에 낼 수 없기에 항상 미안해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슬퍼하였다. 자신들은 죄인이기에 감히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설령 받는다면 아주 조금 받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즉 높으신 분들이 다 복을 받으시고 나면, 찌꺼기 정도를 받는 것으로도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

  

누가 민중에게 이러한 생각을 불어넣었는가? 물론 그것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 혹은 파리사이들이었다. 그들의 머리 속은, 이러한 생각들로 가득하였고, 조금도 틀림이 없다고 하느님께서는 자신들의 의견에 100% 동의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복음의 메시지



예수님의 의견은 전혀 달랐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진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의 민중들은 마음이 언제나 가난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 높은 사람, 잘난 사람, 부유한 사람 앞에 서기만 하면 그냥 가슴이 떨리는 사람들이었다. 언제나 고개 숙인 사람들, 언제나 율법을 못 외우고, 못 지켜서 죄스러운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민중의 그러한 생각을,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을 뒤바꾸고 싶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민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스스로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그대들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니, 그 이유는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슬퍼하고 있는데, 그대들이야말로 진짜 행복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완전히 뒤바뀐 행복의 개념을 말씀하신다.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참 행복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부자, 식자, 시간이 많아서 성당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만을 열심한 신자, 참으로 복을 많이 받은 사람, 행복을 잡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난한 사람, 무식한 사람, 그래서 거친 일을 하느라고 시간이 없고, 그래서 성당도 잘 못나오는 사람을 죄인으로, 복 받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닌지, 우린 예수님처럼 외쳐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아니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슬퍼하는 자는 행복하다‥‥‥”











2             연중 제4주일   마태 5,1-12 (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변희선 신부



1999년 1필 20일자 중앙일보 국제면에 재미있는 기사가 나와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은 미국 시카고의 테이스 초등학교 3하년생인 월리엄 서머스다. 서머스군은 현재 미국 대통령 빌 를린턴의 탄핵재판에서 핵심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하이드 하원법사위원장에게 화제의 편지를 보냈다. 신문에 보도된 월리엄의 편지 내용을 이러하다.

◎는 미합중국 대통령인 를린턴이 100개의 단어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에세이를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벌입니다.

거짓말은 사람들을 언제나 곤경에 빠뜨립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하고 서 나중에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소년터럼 요. 즉 사람은 진실을 말할수록 어려움에 빠 지지 않는 법입니다. 저는 를린턴 대통령이 현재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보지 쓸아요. 그 가 에세이에서 진실을 말해야 그를 믿을 것 입니다」

위에서 말한 신문기사 아래 칸에는 「성공 한 은퇴자」 카터라는 제목의 또 다른 기사 가 있다. 기사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전 미 국의 대통령 카터가 은퇴할 때에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는 「미국의 역사상 가장 인 기 없는 대통령」이라는 소리를 듣고 백악관을 떠났다. 7i통령에서 물러난 카터는 그간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어렵게 시작하였다. 조용히 새들을 근찰하는 일, 등산과스키, 불우 이웃을 위하여 가구 만들기, 대학의 강단에서 강의하기, 소설 쓰기 등이다.

74세인 그가 요즈음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창작은 아주 고독한 작업이지만 새로운 도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설렌다B  현직 미국 대통령 를린턴과 전직 대통령카터의 인간으로서의 근본적인 차이점은무엇인가? 지금부터 1년 전 1798년 1월 21일 미국의 언론들이 플린턴과 르윈스키의성 근계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기 직전에 를린턴은 잠자던 그의 아내힐러리를 깨워서 아침 신문에 보도될 기」가 거짓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아침 그의 ?근들에게도 진실을 감추고 사실을 호도j기 시작하였다. 그의 거짓말은 결국 들통:고 스캔들은 하원의 탄핵에 이어 지금은 (원의 탄핵 재판이 진행중이다.

클린턴은 진실을 밝히면 국민이 자신?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하고 오리?작전을 감행했지만, 이 작전이 오히려 그(게 치명적인 약점이자 치욕이 되었다. 진!앞에서 두려움을 가졌던 를린턴은 한 마t로 마음이 가난하지도 못했고, 자신의 죄1슬퍼하지도 못했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ㄷ른 것도 아니었다. 반면에 카터 전 대통령:과거의 영광이나 권력은 뒤로 하고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였다. 카터는 마음을 비우고 자신이 가난하게 태어나서 혈심히 살았던 젊은 시절의 자세로서 새롭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였다. 그는 하느님을 의지하면서 진실과 사랑이 참된 행복를 가져다준다는 것 을\’확신하고 그 신앙을 그대로 실천하려고노력하였다.

진정한 행복은 어디로부터 오는가?참 행복은 모든 것의 창초주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인간과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매일매일 개우치고 그 개우침에 따라서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세상의 권력이나물질이 그리고 인간의 잔괴나 모사가 결국은 참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두 전․현직 미국 대통령들의 삶의 태도를통하여 배운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 수훈을 조금이나마 알아 듣게되는 것이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세상의 권력이나 물질의 힘을 믿고 의지하지 마시고 오히려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이것이 참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3       연중 제4주일   마태 5,1-12 (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김몽은 신부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 “온 갈릴레아를 두루 다니시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그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마귀들린 사람들과 간질병자들과 중풍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 4:23-24)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그러한 외적인 치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개혁에 있다. 따라서 많은 군중이 모여들자, 예수께서는 이제까지 인간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던 새로운 생활법칙을 제시하신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산상설교(山上說敎)이다.



이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대헌장(大憲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율법상의 의(義)와 대치되는 완덕(完德)을 위한 새로운 대원리를 가르치신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전부는 아니다. 즉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속죄적인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 성령의 내림 등의 핵심적인 구원사업을 위한 전제적인 기본적 메시지이다.



예수님의 어조는 권위있고 특색있는 명령이다. 행복을 전하고자 하시는 간절한 열망이 이와같이 가슴아프게 인간의 폐부를 찌른다. 율법학자들처럼 배운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은 아버지의 말씀 자체로서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피상적으로는 이 세상의 상식과 어긋나는 것같이 보이며 어느 모로는 배리적(培理的)인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특색이다.



이 세상의 눈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고, 이 세상의 귀로서는 결코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완전히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바꾸지 않고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전도의 시작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준다. 이 세상의 가치관은 사람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이기적인면에 치우치고 있어 표면상으로는 이득이 있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사실은 이세상의 원리는 자신과 이웃을 괴롭히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참다운 부(富)는 물질적인 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든가 평화, 기쁨 등에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신다.



진정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가치관의 온전한 전향을 뜻한다. 즉 이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 시선을 돌림으로써, 세속과 물질에 얽매어 살지 않고, 참다운 자유를 찾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실 이 세상 것에서는 결코 인간은 만족함이 없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것으로써 만족하는 사람이 없고, 아무리 지위가 높아져도 그것으로써 만족함이 없다. 인간의 욕망은 한이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정신적인 것이어서 한계가 없고, 세속과 물질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것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자는 결코 얻지 못하겠지만, 마음으로부터 가난하여, 세상의 것에 마음을 쓰지 않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둘 때, 그런 사람은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세속의 것에 가난하기에, 하늘의 것으로써 얼마든지 부유할 수 있다. 하늘의 것은 제한 없이, 원하는 자에게 무한히 내려지기 때문이다. 이웃과 함께 울어주는 마음에는 항상 하늘의 위로가 있으며,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는 항상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옳은 일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제나 두려울 것 없이 만족할 수 있고, 가난한 이웃에게, 나에게 죄지은 자에게도 자비와 관용을 베푸는 자는 그 대가가 후하다. 마음에 잡스런 것을 품지 않으면, 시야가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된다.











4                연중 제4주일   마태 5,1-12 (가) 참된 행복

                                                 유근복 부제



오늘의 복음은 현세에만 급급한 이들에게 영원한 삶을 제시하여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복음에 대해서 너무 자주 듣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선언의 말씀인지를 잊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관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불행한 것이고 예수님이 불행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세상의 도덕율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이들이 모인 하느님 나라의 도덕이요 그 나라의 복음입니다. 그 말씀은 일반 대중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헌장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마음에 가난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자랑으로 내세울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얼마나 무기력하고 허물투성인가를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자신의 죄스러움을 깊이 통감하며 자신의 텅 빈 마음을 그대로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고 실제로는 부유하지만 마음이 겸손하여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모두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에 따라 최후의 심판 후에 선인(善人)들이 차지할 나라이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라 사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천상 높은 곳에 있어서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지상의 나라와 아주 다르기 때문에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를 차지할 사람들은 이 지사에서 땅 한 평없고 가진 것 없다 할지라도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이미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이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에 내세와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세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들어갈 나라이지만 하늘나라는 지금 벌써 우리에게 도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곳, 이웃 사랑과 친절로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는 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온유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고 사는 사람들, 이들은 분명히 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어리석고 바보스럽고 못난이로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참된 행복은 주님에 대한 관상이며 동시에 그 분과의 사랑의 친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진리의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행복은 진리이신 하느님과의 하나됨에 있습니다.



이 복음에 이어 계속되는 산상설교의 말씀에서 보다시피 참된 행복은 수난을 통해서 오는 부활의 영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기주의로 팽배하고 있는 이 사회에 복음의 증거자들입니다. 우리 역사 안에 수많은 성인 성녀들, 무명의 순교자들, 그리고 오늘날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과 같은 사람들이 복음의 증거자들입니다. 또한 우리 주위에서 보이지 않게 참된 행복의 삶을 갖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런 삶에는 박해와 시련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구약의 토비트를 보십시오. 그는 일생을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의 길을 걸은 사람입니다. 그는 그 길을 걷기 위해서 수많은 박해와 고난을 겪고 더 나가서 앞 못보는 맹인까지 되어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토비트의 기도에서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토비트서 3장 1절 이하의 그의 기도를 들어봅시다.

나는 마음이 몹시 괴로워 신음을 하며 크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흐느끼면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은 올바르십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은 올바르십니다.

              주님의 모든 일은 자비롭고 참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나를 기억하시고

              나를 돌보아주소서.



              나에게는 당치 않는 조롱이 들려오고

              많은 슬픔이 나를 짓누루고 있습니다.

               … … …

              주님 이 고뇌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주시고

              영원한 곳으로 나를 보내주소서.



이 기도의 응답으로 하느님께서는 천사 라파엘을 보내시어 그를 영광스럽게 하느님 앞에 도달하게 하여 영과의 광명을 보게 하였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우리 각자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행복의 삶으로 구약의 토비트처럼 하느님 나라의 증거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우리 증거자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5      연중 제4주일   마태오 5,1-12 (가)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도다.

                                                              변기영 신부



오늘 복음 성서에서 주께서는 가난에 대한 그리스도 신자로서의 생활철학을 가르쳐 주십니다. 가난이란 하나의 역사적 현실이요 유물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는 나라나 민족이나 사회나 시대를 불문하고 가난이란 것은 인류의 공동 적이었고, 특히 통치자들의 집권 구실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난은 하나의 상대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가난한 사람이 옛날의 부자 못지않게 편리한 생활을 하면서도 가난을 극심히 느끼고 쪼들리며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까지 앞으로도 인간들은 더 풍부하고 편리한 생활을 위해 욕심을 낼 수밖에 없도록 인간 삶의 의식구조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의 사회적 근본 원인을 살펴보면 물질의 부족과 결핍에 있다기보다도 이에 대한 분배,

소유 및 사용과 관리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의 근본 요인은 다수 인간들이 소유하고 사용해야 할 물질 자원의 부족량에 있다기보다 소수 인간들의 과다한 소유욕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창조주께서는 마치 잉태되고 태어나는 아기를 위해 어머니가 충분한 젖을 줄 수 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극빈자가 많은 사회에는 큰 부자가 적지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가난의 동기는 소수 인간들의 욕심에 있으며 세상에는 음식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 너무 잘 먹고 너무 많이 먹고 너무 자주 먹어 죽는 사람이 1:3이라 할 만큼 빈부의 문제는 물질의 부족으로만 탓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는 알아듣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돈 없는 자라는 것이 어는 시대나 어는 사회에나 공인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돈을 가져야만 권력도 명예도 또 자신의 욕망도 마음대로 충족시키는 듯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물은 사용할수록 결핍을 절감시킨다는 미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씀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라”는 조건입니다. 이 세상에 가난한 자가 너무나 많다고 어는 시대에나 사회에서나 입 있는 이마다 떠들지만 사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는 몸으로의 부자는 적어도 마음으로의 부자는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몸으로는 가진 것 없고 쓰는 것이 적어 가난하게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날마다 시시각각 얼마나 많은 돈을 벌며 소유하고 쓰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교의 생활철학은 물질에 대한 마음의 자세를 바로 잡아 주고 있습니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가난함 자체가 큰 덕인 줄로 알고 가난을 목적으로 구차하고 비참한 실로 처량하기까지한 생활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난은 특히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마음의 가난이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은 덕으로 나가는 방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또 물질 특히 현세적 재물에 대한 애착을 없이하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현세의 사물을 무시하고 헛되이 낭비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마음의 가난이란 모든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고 실천해야 하는 덕입니다. 큰 부자라도 마음은 가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루이 왕과 같은 신자는 옹으로서 궁궐에서 풍부하게 소요하고 생활하면서도 훌륭하고 거룩한 청빈덕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그는 성인으로 공포 추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성서에서 마음으로 가난한 이에게 천국이 주어진다는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말처럼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는 천국으로 들어갈 만큼 착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들이 남을 돕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사실은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생과 성요셉의 일생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거룩한 청빈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마음으로 가난함을 부르짖는 것은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지 희망을 버리고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희망에 넘쳐 기뻐하며 용기를 갖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면, 적잖은 신자들이 욕심에 이끌려 들볶이고 고민과 절망과 불안에 지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희망과 불순한 욕심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군인 나간 아들이 건강한 몸으로 군복무에 충실하다가 제대하여 돌아오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마음은 부모로서의 당연한 희망입니다. 그러나 군인 간 아들이 권력이 있고 유리한 직책을 받아 돈을 많이 벌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불순한 욕심인 것입니다.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되고 적이 되는 것은 우리 밖에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으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심을 버리고 비록 날마다 많은 돈을 만지고 이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 행복하게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난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깊이 간직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6             연중 제4주일   마태오 5,1-12 (가) 가난, 왜 복인가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스바 2,3;3,12~13 (내가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만을 네안에 남기리라) 

제2독서 Ⅰ고린 1,26~31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복 음 마태 5,1~12a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복이란 무엇입니까. 전직 두 대통령(전두환, 노태우)의 부정 축 재와 구속 사건을 보면서 부귀와 권세, 그리고 세상의 영화라는 것 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국민 모두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 복이라는 것이 세월만 지나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모릅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이란,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 그 자체는 분명히 악입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하느님이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성서는 그들이야말로 바로 하늘(마태6,19~21참조)이요, 또한 그리스도 자신(마태 25,31~46참조)임을 천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기댈 것이 많고 가진 힘이 커도 붙잡을 것이 많게 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또 많이 배운 대로 자기 지혜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있는 자들과 높은 자들, 그리고 지식이 많은 자들은 붙잡고 기댈 수 있는 세속 사정 때문에 하느님이 잘 안 보입니다. 잘 안 보이니까 매달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붙잡지도 않습니다. 거기서 불행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여덟가지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여덟 가지의 행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가난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그들 모두는 그 자체로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 \’가난\’이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Penes\'(페네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노동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극빈자는 아니며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끼니 걱정은 없습니다.



다음에는 \’Ptochos\'(프토코스)가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극빈 을 말합니다. 사흘에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자들입니다. 거지 라자로 (루가 16,19~31참조)처럼 누가 돌봐 줄 이도 없고 그렇다고 제 손으로 벌어먹지도 못하는 극심한 가난을 말합니다. 이런 가난이 바로 프토코스인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바로 이 프토코스를 말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 착취를 당했으며 마땅하게 일할 자리도 없었고 또 일을 해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에 대해 희망이 없었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하느님의 손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진실로 순수하게 찾았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스바니아는, 하느님은 진정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위로의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늘 가난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이야말로 하느님 백성의 맥을 잇는 주체들이었습니다.



어찌보면 부귀와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는 멋지게 보이고 훌륭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만 지나면 허무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세상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이 교만하지 않으며 하느님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됩니다. 많은 사람 들 중에는 실패한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깨닫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의 참된 의미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그래서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매달 리고 의지할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바로 행복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과음을 자주 하다가 위장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술 때문에 그 좋은 건강 다 버리고 이제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조금 만 지나쳐도 탈이 나고 고생을 합니다. 이 사람이 식사전의 기도를 할 때 보면 그렇게 경건하고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 식사인듯이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있으며 밥풀 하나라도 아주 소중하게 씹어서 삼키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사람은 자기 잘못으로 건강을 잃어 불행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건강,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오로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참 행복을 찾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건강하면서도 건강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 드릴 줄 안다면 그는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가난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형태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향하고 원하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가난한 마음, 마음을 비우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만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7           연중 제4주일   마태 5,1-12 (가) 함께 이루어야 할 과제들

                                                      이용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에 관한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이기적인 욕심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과는 달리 내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기쁨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요즘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면 속에서 많은 분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예전처럼 서로가 도와줄 수 있는 여력도 많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나도 살기 어려운데 내가 누굴 도울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가난한 과부의 헌금의 비유를 들어 가진 것은 없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수 있는 참된 사랑의 삶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지금 비록 바쁜 몸이지만 쓰러져 울고 있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고 함께 걸어갈 길을 바라보게 하는 참된 소망의 삶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전생애를 통해 지금의 고통의 시간을 넘어 아버지께서 마련해주시는 영원한 기쁨을 함께 나누리라는 참된 믿음의 삶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긴 방학 동안 정신없이 놀다가 개학할 때가 가까워지면 밀린 과제물을 하느라 친구들과 함께 고생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들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기 위해서 함께 이루어야 할 과제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이기적인 논리와 대항해서 박해를 이기고 비난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과제, 불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증언해야 하는 과제, 십자가를 지고 슬픔과 고통의 언덕을 넘어가야 하는 과제,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야 하는 과제…

여러분은 지금 그 과제들을 얼마나 해놓으셨습니까?



세상의 모든 과제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그 동안 미루어왔던, 쌓인 과제들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며 사랑하는 우리의 모든 이웃들이 하느님의 잔치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8             연중 제4주일   마태 5,1-12 (가)  하늘나라의 헌법

최인호 작가



BC 206년, 한나라의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진나라를 쳐부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습니다. 유방은 곧 진나라의 서울인 함양에 입성하였는데 그는 그곳에서 호사스런 궁전과 진귀한 재물, 그리고 수백 명의 미녀를 보았습니다. 유방은 언제까지나 그곳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신하 번쾌가 “이 재물, 보화와 미녀들이야말로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에 머무르시면 안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유방은 그 말에 곧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재물과 미녀에 손대지 않고 모든 물건에 봉인을 해둔 후 각 고을 대표들을 불러 선포했습니다. “당신들은 오랫동안 진의 가혹한 법률 아래서 괴로움을 당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다음의 삼장(三章)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조리 폐기할 것을 약속한다. 즉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에게 상해를 끼친 자는 그에 따라 처벌하며, 남의 재물을 훔친 자 역시 그에 따라 처벌한다는 세 가지 뿐이다.”



진나라는 법률지상주의 국가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악하게 태어났다는 성악설(性惡說)의 철학에 기반을 둔 진나라는 인간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법률로 규제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법률의 노예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단지 간단명료한 세 종목의 법률만 남긴 유방의 ‘법삼장’(法三章)이야말로 법률이란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 한다는 진리를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웠다”고 전도를 시작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나라의 주 인임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법률에 대해서 입을 열어 선포하신 것입 니다. 주님이 직접 입을 열어 가르치신 하늘나라의 헌법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율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무엇을 금지하고 어떤 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어떤 형벌이 주어진다는 법전과는 달리 주님의 헌법은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참된 행복’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방이 수많은 법률을 폐지하고 단지 ‘법삼장’만 남겨 백성들을 법의 노예에서 해방시켰듯 주님은 그 복잡한 율법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시켜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마태 5,17) ‘여덟 가지의 참된 행복’에 대해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참된 행복이 모두 행동이 아닌 마음에 기초한 심법(心法)이란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으로 슬퍼하는 사람, 마음이 온유한 사람, 마음으로 옳은 일에 주린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등. 무엇보다 마음을 우선하는 주님의 선언은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차 있고, 겉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차 있는 회칠한 무덤”(마태 23,25.27)과 같은 겉과 속, 행동과 마음이 다른 율법학자들을 질타하는 주님의 책망과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무엇보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차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마태 15,8) 저를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변화시켜주시어 제 마음이 주님의 성심(聖心)을 닮을 수 있도록 은총 내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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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4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4주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제1독서 : 스바 2,3;3,12-13

    제2독서 : 1고린 1,26-31

    복  음 : 마태 5,1-12a


    해설


      오늘 전례 중심 주제는 마태오 복음사가의 훌륭한 편집활동을 통하여 뛰어난 조화를 이루며 멋있게 표현되고 있는 ‘산상수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첫 번째 행복에다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사실, 제1독서도 제2독서도 다 같이 이 첫 번째 행복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응송도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감동적으로 찬미하고 있다 : “그분은 굶주린 이에게는 빵을 주시고 사로잡힌 이를 풀어 주시도다. 주님은 소경의 눈을 열어주시고, 주님은 억눌린 이를 일으켜주시며, 주님은 의로운 이를 사랑 하시도다 … 그러나 악한 자의 길만은 어지럽게 하시도다” (시편 145,7-9)

      오늘 복음의 전체적 분위기를 고려한다 할지라도 우리 역시 이 특별한 관점에 관심을 모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니고 있는 현실적 문제성과 또한 그리스도 신자들 – 그 어느 때 보다 오늘날의 – 은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원의 선포인 복음의 보다 생활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요구를 재발견해야 할 필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야훼를 찾아라. 고생하는 이 땅 모든 백성들아”


      자, 스바니야서에 의한 제1독서의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스바니야는 예레미야와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요시아왕(기원전 640-609)때에 예언자로 활약했다(스바 1,1 참조).

      그의 메시지는 ‘야훼께서 오실 날’에 벌어지게 될 대소동에 관한 것이다(1,14-18 참조) : 그날 야훼께서는 이교백성들이든지 유다와 예루살렘의 성민들이든지 모두 치실 것이다 : 오직 야훼를 믿었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이 전체적인 화에서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들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산들 위에서 그리고 온 세상에 걸쳐 다시 ‘양육하실’ 새 백성의 ‘씨’가 될 것이다.

      “너희는 야훼를 찾아라. 하느님의 법대로 살다가 고생하는 이 땅 모든 백성들아 바로 살도록 힘써라.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애써라. 그리하면 야훼께서 크게 노하시는 너희만은 화를 면하리라. 내가 기를 못 펴는 가난한 사람만을 네 안에 남기리니 이렇게 살아남은 이스라엘은 야훼의 이름만 믿고 안심하리라. 그들은 남을 억울하게 속일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며 간사한 혀로 사기 칠 줄도 모른다. 그러나 배불리 먹고 편히 쉬리니, 아무도 들볶지 못하리라”(스바 2,3;3,12-13).

      첫 구절(너희는 야훼를 찾아라…)은 회개하라는 권고이다 : 오직 회개만이 이제 곧 폭발하려 하는 야훼의 분노의 ‘날’에 구원을 보증해 줄 수 있다. 다른 두 구절(3,12-13)은 야훼께서 하시는 약속의 내용으로서 ‘거만을 떨며’ ‘흥청거리는 자들’을 정의로 다스리신 후(스바 3,11)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장차 메시아가 오로지 가난하고 순박한 정신으로 그에게 달아드는 모든 이에게 마지막 날에 베풀어줄 것에 대한 예고이다.

      모든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이 대목에서 구약성서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가난의 정신’ –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취하시어 산상수훈의 가르침에서 절정에 이르게 하시는 – 에 관한 가장 완벽한 표현들 가운데 하나를 접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성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세법 자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쉽사리 자행될 수 있는 악습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자 애쓴다.

      예를 들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자신이 맡긴 담보물을 제대로 필요로 할 경우에는 그 담보물을 돌려주라는 규정이 있다 : “너희는 동족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 담보물을 잡으려고 그의 집에 들어가지 마라… 그 사람이 지극히 가난한 자일 경우 너희는 그가 잡힌 담보물을 덮고 자면 안 된다. 해질 무렵이면 그 담보물을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그는 그 옷을 덮고 자리에 들며 너희에게 복을 빌어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너희 하느님 야훼 보시기에 잘하는 일이다”(신명 24,10-13).

      가난한 사람은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흔히 특별한 관심을 쏟아야 하는 ‘떠돌이’, ‘고아’, ‘과부’ 등과 같이 도움을 특별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부류와 동일하게 취급되곤 하였다 : “떠돌이와 고아의 인권을 짓밟지 마라. 과부의 옷을 저당잡지 말라.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해 보아라. 그런 너희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건져 내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니, 너희는 반드시 이를 지켜야한다”(신명 24,17-18).

      이러한 규정이 생기게 된 윤리적 동기가 흥미롭다 :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는 동안 겪었던 불행과 가난에 대한 체험이 그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에 가난해 질 수 있다. 또는 가난해졌을 수 있다 : 우리가 다른 이들(가난한 이들)과 연대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삶의 상황의 ‘동일성’을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인정할 수 있으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은 것은 가난과 억압에 대한 자신들의 체험 때문이었다.

      특히 예언자들은 단호히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가해지는 불의, 압제, 착취, 협잡 등을 고발하였다 : “이스라엘이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을 벌하고야 말리라. 죄 없는 사람을 빚돈에 종으로 팔아넘기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사람을 팔아넘긴 죄 때문이다. 너희는 힘없는 자의 머리를 땅에다 짓이기고 가뜩이나 기를 못 펴는 사람을 길에서 밀쳐낸다”(아모 2,6-7)


    ‘가난’의 ‘영신적 차원’


      그런데 스바니야서에서는 가난이라는 어휘가 아주 색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즉 단순한 사회학적 의미에서 ‘영신적’차원의 의미 –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그분의 ‘판단’에 신뢰심을 갖고 자신을 내맡기는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자기 포기’를 뜻하는 – 로 넘어간다.

     결코 가난의 일차적 어의를 망각하고 있지도 않고 또 어째서 ‘현실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보다 쉽게 주님을 저버리는지 하는 그 일반적 이유를 무시하지도 않는다 : 하지만 그 가난의 의미를 확대시켜 ‘영신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가난의 정복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실상 가난이라는 것은 회피해야 할 저주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드높은 ‘목표’이다.

    스바니야서는 이 모든 내용을 훌륭히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사실, 예언자 스바니야는 모든 사람에게 ‘정의’와 ‘겸손’을 구하라고 권고하고 있다(스바 2,3). 이것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 첫째로, 만일 우리가 노력과 용기로써 ‘가난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느 누구도(사회 현실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상태에서 출발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둘째로, ‘가난’은 항상 ‘정의’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의무와 결합되어야 한다.

      마치 이 정도로는 충분치 못한 듯이 스바니야 예언자는 다른 설명들을 덧붙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난’의 개념을 더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은 ‘살아남게 되고’, “야훼의 이름만 믿을 것이고”(스바 3,12) 또한 ‘불의한 짓’을 범하지 않고 ‘거짓과 사기’를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3,13). 우리는 또다시 몇 가지 특별한 정신적 자세를 접하고 있다. 그것들은 신앙의 관점에서 비롯하고 있다. 번역에서 볼 수 있듯이 ‘가난하다’라는 개념과 ‘겸손하다’라는 개념은 의미상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바니야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anawîm(겸손한 이들 또는 가난한 이들) – 또한 ’anijîm(억압당하는 이들)도 – 은 있는 것, 가진 것 모든 것을 끊고 겸손과 솔직함과 가난 속에서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그분의 사랑의 계획이 자신들에게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

      어떤 예언자들은 이러한 겸손과 가난의 태도 그리고 억압받는 모습(이사 53,4 참조)통해서 메시아를 예고한다 :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즈가 9,9;마태 21,5 참조). 그분은 모든 시대의 ‘anawîm의 모델이 되실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실 수 있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산상수훈의 ‘역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을 선포하시기 전에 그것을 몸소 가장 강렬하게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 사셨다. 사실, 만일 그리스도 자신이 모범을 보여주시지 않으셨다면, 지극히 정상적이며 올바른 사고와 행동양식을 뒤집어 혼란케 할 만큼 역설적인 그분의 메시지를 어떻게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 산상수훈 하나하나를 복음들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그분의 생활을 통해 입증하기는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 비단 마지막에 언급되고 있는 수훈에 대해 생각해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바로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산상수훈은 어떤 혁신적 윤리체계같은 것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모든 규범을 넘어서 있다. 거기서는 인간의 정상적 지혜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부서진 지혜는 제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처럼(1고린 1,27) 하느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날 때만이 즉 ‘우리 자신이 회개할’ 때만이 회복될 수 있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오직 예수께서 방금 던지신 그 ‘회개’에 대한 권고(“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 마태 4,17)를 받아들였거나 또는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오늘 복음은 문학 비판적 관점에서 보든지 또는 내용면에서 보든지 간에 논할 수 있는 주제가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그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중에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내용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해야 될 사실을 오늘 복음과 유사한 내용을 루가복음(6,20-26)만이 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수자상으로나 형태상으로 볼 때 아주 큰 차이점을 드러내면서 말이다. 사실 루가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고 있는 여덟 가지의 행복 대신에 그 중에서 네 가지만을 전하고 뒤이어 그와 정반대되는 네 가지의 ‘저주’에 관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마태오는 처해 있는 상황들을 ‘영신화’시키려고 하는 반면에 루가는 그 상황들의 ‘사회적’ 의미를 더 강조하고 있다 : 예를 들어, 마태오는 ‘마음으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반해 루가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마태 7,28 참조) 그 가장 원초적이고도 충격적인 메시지의 의미 파악은 가능하다. 즉 서로 다른 두 개의 복음 편집활동이 결코 그 메시지의 본래 의미를 왜곡시키지도 경감시키지도 않는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편집활동이 요구되기도 한다.

      두 복음사가 간에는 지형적 위치 문제에 있어서도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 루가복음에 있어서는 예수께서 평지에 내려오신 후 거기서 말씀하셨고(루가 6,17),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산 위에 올라가셔서(마태 5,1) 마치 산 위에서 자신의 법을 가르치는 ‘새’ 모세처럼 군중들에게 말씀하신다. 사실, 행복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는 소위 ‘산상수훈’은 바위 위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1고린 3,3 참조)에 새겨진 그리스도 신자의 새 ‘법’ – 인간의 마음을 형성시키고 변모시켜 새롭게 하는 – 과 같다.

     행복은 하느님께서 무엇보다도 특히 영신적 복락을 약속하시고 동시에 실현시켜주시는 축복 – 구약성서에서 자주 반복되고 있는 – 의한 형태이다 : “복되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여, 당신의 계명을 큰 낙으로 삼는 이여”(시편 112,1;1,1-2;33,12 참조).

      바로 이 점에 그리스도께서 이끌어 들이신 혼란의 근거가 있다 : 사람들이 비록 박해는 하지 않을지라도 보통으로 외면해버리거나 염두에 조차 두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행복’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슬픔 속에서는 기쁨이 있을 수 있고, 가난 속에서도 풍요가 있을 수 있으며 배고픔 속에서도 배부르리라는 희망이 있을 수 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저주스러운 삶의 상태나 또는 절망 속에 버려진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박해와 비난조차도 미래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이미 현재에 있어서도 큰 기쁨을 누릴 동기가 될 수 있다(마태 5,11-12).

      혼란의 근거는 이 뿐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산상수훈은 우리가 이미 처해 있는 개인적 또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재평가해야 할 적극적 관점들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도와줌으로써 그러한 상황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 오히려 단지 우리가 태어났거나 또는 처해 있는 어떤 상황 때문에 누리게 되는 행운을 별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고자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다 : 마음으로 가난해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단순한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 박해를 받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10절)!


     ‘마음으로’ 가난함


      우리는 앞에서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 모두가 ‘회개하여’ 달성해야 할 최상의 목표들을 제시하고 계시다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첫 번째 행복에 관해 음미해 보자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이 구절을 ‘예루살렘 성서’는 좀 더 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훌륭히 번역하고 있다 : ‘가난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처럼 마태오는 루가보다 더 앞서 스바니야서(2,3;3,12-13)를 통해 들은 ‘가난’의 영신적 차원에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가난한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재물 – 비록 우연히 소유하게 될지라도 – 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또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시도록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 또 ‘가난한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 능력, 사고, 계획, 우리의 성성까지도 포함해서 우리가 선익을 위해 소유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조차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 자기 자신까지도 –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사도 바울로가 자신에 대해 표현한 것처럼(“우리는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 2고린 6,10) 그분을 통해 자신을 무한히 부요하게 하고 또한 그분께서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건 부유하건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산상수훈의 정신 특히 다른 모든 행복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첫 번째 행복의 정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단순히 위의 사실을 되새겨봄으로써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들어 높여 강조하며 심각한 문제로 제기하고 있는 복음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온 교회는 근본적인 ‘회개’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에 대해 자신의 담화 속에서 다음과 같이 강한 어조로 언급하고 있다 : “회개가 있는 곳에서는 현세생활의 물질적 선에 대한 가치평가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교 사상의 특성이다. 여기서 가난과 겸손은 인간생활의 통상적 개념에 의해서는 이해받지 못하겠지만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나라 즉 마음으로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새 생명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 (1978.1.11 수요일 담화문).


     “하느님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시는 것’ 이것이 인간의 오만심과 자만심의 틀을 뒤엎으시는 하느님의 변함없는 모습이다. 사도 바울로는 이에 관해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세속적인 견지에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들을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사실을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1고린 1,26-30). 이는 모든 선이 하늘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마치 자기 스스로 ‘부요한’ 듯이 여겨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 하십시오”(31절).


  2. user#0 님의 말:

     

    예수님의 산상설교

    -진복 선언, 참 행복-

    1. 말씀읽기: 마태오 5,1-12

    2. 말씀연구

    참된 행복. 참된 행복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기쁘게 해 드려야 할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것. 이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또한 참된 행복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멸망해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리를 잡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로 다가왔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시며, 모두를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치심을 펼치십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카복음에서는 평지에서 계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주는 복음기자는 예수님을 어떻게 봤느냐에 따라 전체 시각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배치합니다. 즉 틀에 담아서 전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교회를 크게 보기에 전 단계로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우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16장에 가서 대대적으로 복음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탄탄하게 교회를 세웁니다. 반면 루카 복음에서는 먼저 산 위에서 열두 사도를 뽑아 교회의 기반을 세우신 다음 내려와서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5,1절은 하나의 틀이며, 틀을 통해서 마태오 복음사가의 신학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고, 왜 이렇게 배치했느냐가 중요하며, 그것은 바로 마태오 복음사가의 사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 중의 하나입니다. 

     먼저 산의 의미를 보면, 상징적으로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는 자리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는 자리가 바로 산 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계시를 받은 것처럼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모세처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다인들이 최고로 존경하는 모세 이상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네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안내를 듣고 가다가도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면 지나치기도 합니다. 내가 듣지 않으면 아무리 정확한 방향을 가르쳐 준다 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무능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성전에 봉헌한 것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에 하느님께 무엇인가 하나를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루의 양식을 봉헌한 것입니다.

    또한 내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음도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 만을 생각하는 사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축복의 말씀들은 이미 구약성경, 특히 지혜서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지혜의 규범을 따라 그들의 삶을 영위해가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찬양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축복의 말씀이 이인칭으로 나타나는 곳은 극히 드물게 나타납니다. 반면 신약성경에서는 이인칭이 나타나는데 이 이인칭의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이라고 3인칭으로 쓰인 이유는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의 원래의 형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떠한 사람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조건이 더 이상 제시되지 않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느냐가 문제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 배고픈 자 및 우는 자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3인칭을 사용하는데 비해 루카복음사가는 2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예수님은 2인칭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프고 짓밟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종이 주인한테 대들면 맞아 죽던지 팔리던지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사가가 보기에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순박한 사람들이 아니라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태오 복음사가는 가난한 자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재산은 많아도 하느님을 공경하며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며 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축복하셨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사 61,1-2절이 실현되었구나.”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카복음사가의 가난 개념은 구약성경의 가난 개념입니다. 즉 하느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도 전해 주다보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예수님 시대와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루카 복음사가는 뜻이 안통해도 그대로 전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루카 복음사가도 “지금”이란 말을 집어넣어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장차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슬피운다는 것입니다. πενθεω 라는 단어의 뜻은 바로 자기 어머니가 죽어 통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육체나 영혼에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참아 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마치 어머니가 죽어서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슬픔, 가혹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슬픔, 그리고 잔인한 운명에 대한 슬픔, 그리고 이 눈물에는 유혹이나 죄를 용서받은 것 때문에 흐느끼는 슬픔의 눈물(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뒤 자기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신앙을 고백하는 형태가 바로 통곡)도 엉켜 있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예로니모와 레오는 “남의 죄를 슬퍼하는 사람, 자기 죄를 슬퍼하는 사람(암브로시오)”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메시아가 가져다주는 행복 때문만이 아니라, 그 슬픔의 교훈으로 현세를 떠나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하며, 그리스도교의 희망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 예수님의 제자들은 근심스러운 눈초리와 우울한 낯빛과 절망스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고통 속에서도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놓고 예수님께 위로를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과 역경이라는 인생의 학교에서, 생명의 가치를 배운 사람은 정녕 행복하리라(참조: 집회서 34,9, 마태11,29)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아람어에서는 이 두 단어가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은 모두 검소하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압박하거나 착취하지 않으며, 복수를 하거나 폭력으로 목적을 성취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회적 불의를 증오하시고 오만한 박해자를 단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사야서 61장에 보면 유배중이고 땅도 다 빼앗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고, 이제 하느님밖엔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상속받으리라는 것은 온유한 자가 언젠가 얻게 될 땅은 하늘나라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루카복음 6,21에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 상황이 다르기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지금을 빼고 “의로움”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즉 옳은 일을 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본다는 것입니다. 이 옳은 일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한 표현은 성경적 표현입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미 구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아모 8,11)과 은혜(이사55,1-2)및 하느님의 현재함(시편42,3)을 동경하는 것에 대해 자주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대상은 개종한 유다인들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했고 구원에 목말라했던 것을 예수님이 채워주셨구나.” 하고 보기에 자연스럽게 목마르다는 표현이 들어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가난을 감수하고, 고통을 참으며 역경 가운데에서도 인내하는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며 그분의 섭리와 정의의 질서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는 예수님 말씀과 삶의 핵심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자비를 베푸는 것은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자비는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선포의 중심이 되는데 이것은 율법의 성취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라고 하셨고, 율법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하느님께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자비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마태18,30)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유다인들은 정결을 강조했는데 깨끗하다는 것은 유다인에게는 중요한 삶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을 때도 손을 씻고 먹었습니다. 깨끗해지는 방법은 더럽혀진 몸을 예식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있고, 마음이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마음은 항상 그 존재의 기초를 말하는데 인간 존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마음이라고 했고, 이 마음에서부터 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 선과 악이 나옵니다. 따라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향한 순진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종말론적 개념으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재로선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하느님을 직관하는 것(“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야서 6,5)은 종말의 때를 위한 약속이며, 이 종말의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순수한 친교가 이루어지며, 이 친교는 지금은 다만 천사들에게만 허락되어있는 것입니다. 실제로의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신앙이 희망하는 것에 대한 더할 나위 없는 궁극적인 성취입니다. 결국 행복을 이루어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이런 모습으로 여기서 표현한 것입니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평화는 최고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즉 하느님의 모든 축복이 평화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 있기를” 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도 활동의 특별한 임무인 것이며, 그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화해시키는 임무이며, 화해의 이치를 전하는 임무(2코린토5,18-21)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은혜인데 최후 심판 때 영원한 생명으로 받게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종말론적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삼가 아뢰오니” 라는 말이 아니라 “감히 아버지라 아뢰오니”가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마태오 복음사가 시대에까지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구약성경의 전통 안에 여전히 서 있었는데 이 전통에서는 분에 넘치며 은혜로운 계약에 관한 지식이 아버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억제시켰고, 요한은 처음부터 용어를 다르게 썼습니다. 즉 예수님은  아들 υιοS로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  ΤεΚνα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다만 그 아들을 믿든 자로서 그의 영에 동참함으로써만 아들들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해줍니다(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보내신 영에 의해 우리가 영으로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얻어 맞아가면서도 싸움 말리고 화해시키는 사람이 아닐까요?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박해는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인 유다인들의 행복관이었고, 박해받는 자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사실이 예수님 당시 널리 유포되어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시편들을 알고 있었기에 (시편22;34,20등)신약에도 내려와 후기 베드로전서에도 義를 위한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모욕이라는 그리스말(오네이디소신-오노스-당나귀, 에이도스-꼴, 모습)은 글자 그대로 나귀의 모습, 나귀 머리라고 하는 뜻으로 심한 모욕입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박해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 대한 박해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인들이 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기에 오는 것들입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게 된다는 것” 그것은 중상 모략입니다. 영혼을 지닌 사람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중상 모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시며 그 명예가 더럽혀지는 일을 참아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러 모욕, 이런 고통도 참아야 합니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예전에 한 여인이 있었는데 남편한테 얻어맞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편이 성당에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이랑 사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는데 성당에 나가지 말라니 당신이랑 그만 살아야겠군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놀래서 마침내 그도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확실히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1. 참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 중에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3. user#0 님의 말:

     

    제1독서: 스바 2,3; 3,12-13 

    제2독서: 1코린 1,26-31 

    복음: 마태 5,1-12a


    제1독서 해설

     ① 주님을 찾아라(2,3): 예언자는 주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다. 세 번에 걸쳐 “찾아라”라는 말이 되풀이된다. ‘찾다’의 목적어는 ‘주님’, ‘정의, 겸손이다.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곧 ‘정의’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당신과 계약을 맺은 백성 가운데에 ‘공정’과 ‘정의’가 실천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으며, 따라서 ‘공정’과 ‘정의’가 실천될 때에 가련한 사람들이 주님의 축복과 구원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을 찾는다는 것은 ‘겸손’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어 말로 번역된 ‘겸손’은 ‘가난’이라고도 옮길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가난’과 ‘겸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힘없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자신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적 힘보다는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에 자신을 내맡기며 하느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는 겸손한 이들이다.

    ② 겸손한(가난한 이들의 구원(3,12-13): 2,3에서는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만 예고되었던 구원이 여기에서는 확실한 것으로 선언된다. 구원받은 겸손한 이들은 마치 맹수들의 위협이 없는 가운데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떼처럼 주님의 보호와 돌보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스바니야는 이로써 주님의 심판이 궁극적으로 당신께 신뢰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제2독서 해설

     바오로의 인간에 대한 논증은 하느님께서 지혜로운 자들 보다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선택했다는 말로 계속된다. 사람의 눈에는 멸시받고 약하게 보이지만(26-28절) 바로 그들을 세상에서 자기 현존의 표지로 삼으셨다고 한다. 고린토 신자들이 이에 해당하며 이들은 거짓된 철학 사상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소위 세상이 어리석다고 하는 하느님의 지혜를 따르고 있다 한다. 하느님의 이러한 선택의 이유는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람은 하느님 앞에 아무도 자랑할 수 없게 된다(29절).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그 안에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30-31절). 바오로는 다시 고린토 신자들을 주목한다. 이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30절).


    복음 해설

    ① 영으로 가난한 사람: 가난한 사람은 그의 희망 전부를 오로지 하느님께 두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다. 인간이 스스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가난한 존재,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다. 사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의 자신의 존재와 참 모습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그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정 겸손한 자, 작은 자,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런 사실을 두고 “가난한” 앞에다가 “영”이라는 말을 붙여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영”이라는 말은 인간의 내면 세계를 뜻하고 그의 이해력과 감성과 의지의 발생지를 상징하며(마태 26,41) 그의 내적 성향이 나오는 진원지를 가리킨다. 사람이 재물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자신을 낮추고 생존을 위해 하느님께만 신뢰할 때 영적으로 가난해질 수 있다.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이나 하고 쪼들려 신세타령이나 하는 속 좁고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빈손을 벌려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② 슬퍼하는 사람: 여기서 슬퍼하는 사람이란 의미는 이사 61,1-3에서 발견된다. 이사 61,1-3 안에서 슬픔의 원인은 원수들이 성도 예루살렘에 재앙을 몰고와(기원전 587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성도를 떠나 바빌론으로 유배간 데 있다(이사 61,3-5; 66,10-12; 집회 48,24). 이렇게 볼 때 슬퍼하는 사람들(우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이름이 모독되는 것 때문에 슬퍼하고, 또한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슬퍼하는 이들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구현되지 않고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이 그들로부터 멀어진 데 있다. 그들은 부모나 친구들이 인간적 안정을 잃어버렸기에, 혹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현존이 멀어졌기 때문이다.

     ③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본질이다. “주님은 의로우시며 의로운 일들을 사랑하시기에 올바른 이는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되리라”(시편 11,7). 의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본질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르다’라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즉 의로움이 파괴되었음을 전제하고 불의를 없애고 의로움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를 뜻한다. 이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행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불사를 만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이다. 바로 이들이 행복하다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의로움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당신의 의로움을 만족스럽게 체험하도록 하신다.

    -강 론-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오소서 성령님! 오늘 제1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지혜롭고 강한 자들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어리석고 약한 것을 선택하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았을 때, 오늘 말씀을 ‘참된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스바 2,3) 스바니야 예언자는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만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는 방법으로서, ‘의로움’과 ‘겸손함’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서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내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이사 45,23) 방금 읽은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의로우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의 의로움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로마 4,22) 하느님을 찾는 방법으로서, 또 하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겸손의 태도에 대하여 루카복음 안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주십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 하겠는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9-10) 방금 읽은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겸손이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것을 만족하며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철저하게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 제1독서가 전하고자 하는 참된 행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된 행복이란 바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상황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않고 만족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오늘 제2독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방금 읽은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지혜롭고 유능하고 강한 것이 하느님의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 안에 하느님의 구원의 힘이 약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것에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약점들, 나를 자꾸만 죄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 내가 너무나 하찮게 생각하여 하느님을 찾지 않았던 것들에서부터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 안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제2독서가 전하고자 하는 참된 행복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행복이란 가장 작은 것,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내가 남들에게 자랑할 수 없는 나의 약점들 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방금 읽은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행복 선언의 대상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물질이 기준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너무나 나에게 소중하여, 하느님 이외의 것들이 덜 중요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과 하느님이 충돌하게 될 때, 하느님을 기쁘게 선택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하느님을 나의 보물로 모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상황들을 만족하는 것이며,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느님이 너무나 소중하여 다른 모든 것들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 지는 삶, 곧 마음이 가난한 참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에는 오늘 말씀이 알려주는 것처럼 참 행복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4. user#0 님의 말:

     

    연중 제 4 주일

    제 1 독서 : 스바 2,1-3; 3,12-13

    제 2 독서 : 1고린 1, 26-31

    복     음 : 마태 5, 1-12a


    제 1 독서 : 기원전 640년경, 앗시리아의 압제하에 남왕국 유다는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를 통과한다. 종교적 혼합주의와 이방 종교가 극성을 부려(스바 1,4-6 참조) 참된 이스라엘 종교의 숨통을 점점 조여 왔고, 더 이상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스바 1,6.12 참조). 스바니아 예언자의 소명은 이 모든 죄악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앗시리아의 압제는 더욱 무서운 또 다른 위협의 전조일 뿐이다. 그 무서운 위협은 바로 ‘주님의 날’이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는 무서운 분노를 거역하는 백성 위에 쏟아 부으실 것이다(스바 1,14-18). 이러한 주님의 날은 아모스가 암흑과 음울의 날로 제시한 주님의 날(아모 5,16-20)과 동일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바니아 예언자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하느님의 법대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재난을 면하리라는 것이다(스바 2,1-3; 3,12-13).


    제 2 독서 : 분열된 고린토 공동체의 문제에 직면하여 바오로 사도는 없는 자들에게 특별히 권고한다. 이 대목에서는 지혜와 어리석음, 강자와 약자의 대조가 뛰어나게 훌륭하다. 하느님께서 어리석은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바오로는 그들의 사명을 주지시킨다. 스스로 똑똑하고 유력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지혜를 가르쳐 주기 위해, 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복     음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잘것없는 군중에게 말씀하신다. 이들은 삶의 고초, 억압과 불의를 맛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연유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가치를 더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진복팔단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태오 5,3-9은 가난함과 인간의 행동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반면에 마태오 5,10-12는 박해에 관계된 것인데, 두 부분 모두 실상은 예수님의 생애를 암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여덟 개의 덕행 중 어느 것이 꼭 필요한지를 예수님께서는 명시하지 않는다. 다만 그분은 가난한 자들에게 보내진 메시아로 자신을 소개한다. 마태오는 내적 가난함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임을 부각시킨다.

    가난함, 배고픔, 비통, 박해는 인간이 겪는 불행임에 틀림없다. 예수님께서 그런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분이 그들을 그 불행에서 건져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없다면 진복팔단은 어리석은 공상이거나 부질없는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진복팔단은 완성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복팔단을 직접 사셨고 우리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 놓으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도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4주일이자 사회복지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만이라도 우리 사회의 그늘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도록 이 주일을 제정, 형제애를 드높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뜻은 산상 설교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참된 행복의 길을 제시했던 예수님의 뜻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마음의 가난에 있습니다. 마음의 가난이란 자신을 온전히 비워 오직 하느님만이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겸손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겸손은 곧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바보처럼 어리석어 보이고 힘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하느님의 눈에는 축복의 징표요 표지로 나타납니다. 겸손이란 먼저 머리를 숙이는 일이요 남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예모를 갖추어 대하는 것이며 먼저 인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가 설날에 웃어른이나 친지들을 찾아 세배를 드리는 것처럼 낮추어 인사드리는 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모든 덕의 기본이라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참된 행복은 겸손한 자에게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느 겸손한 임금이 이집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인사하곤 하였습니다. 대신 중 한 사람이 그것을 못마땅히 여겨 임금에게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몸 중에서 머리가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임금님은 왜 머리를 함부로 숙여 체통을 지키지 못합니까? 낮은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시니 우리 대신들이 민망합니다.”

    그 임금은 아무런 대답이 없이 미소만 머금었습니다. 3일 후에 임금은 그 대신을 불러 세 가지 물건을 주며 다음과 같이 분부하였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세 가지를 줄 터이니 장날 시장에 나가 팔고 오시오.” 임금이 신하에게 준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양이 머리뼈, 말의 머리뼈, 사람의 머리뼈(해골)였습니다. 그 신하는 의아하게 여겼지만 임금의 명령이라 그대로 시장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고양이 머리뼈는 집안에 걸어 두면 쥐가 들끓지 않는다면서 어떤 사람이 금방 사 갔습니다. 말의 머리뼈는 정월 초하룻날 집 대문에 걸어 두면 1년 내내 집안에 우환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또 한 사람이 사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뼈는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가던 사람들은 역정을 내며 재수 없다고 욕을 하였고,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날이 저물어 돌아온 신하는 그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고하였습니다. 임금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사람의 머리가 가장 귀중하다더니 다른 것들은 다 팔았으면서 어찌하여 제일 귀중한 물건은 못 팔고 왔소?” 신하는 부끄러웠습니다. 자신의 교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임금은 사람의 머리 그 자체가 귀중한 것이라기보다는 남을 자신보다 더 훌륭히 여기고, 자신을 남보다 못하게 여길 때 그의 머리가 가치있는 것임을 일러주었습니다. 그 후로 그 나라에서는 모든 국민이 임금의 모범을 본받아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제1독서 스바니야서와 일맥 상통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애써야 합니다. 겸손한 이들은 남을 억울하게 속일 줄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며 간사한 혀로 사기칠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고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도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자를 택하셨다고 하면서 주님 앞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의 요지도 바로 진정한 행복이란 세속적인 기준이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슬퍼하고 박해받는 사람들 속에 있다고 함으로써 속세에 젖어 있는 우리의 생각을 뒤엎으셨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란 편안히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 빈민들, 가난한 농민들, 소년 소녀 가장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아무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피난처이기에 진정 가난한 자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옳은 일을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을 사는 사람들 즉 하느님밖에 그들 마음속에 자리할 수 없는 진정으로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사회 복지 주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진정 주님 앞에 가난한 자, 겸손한 자가 되기 위해 우리보다 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면서 그들에게 작은 사랑과 관심을 쏟아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깊이 깨닫는 삶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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