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9. 김정진 신부(나)/ 16 10. 한종훈 신부(나)/ 17
11. 송 진 신부(나)/ 19 12. 강길웅 신부(나)/ 22
13. 권완성 신부(나)/ 24 14. 악령을 몰아냅시다(나)/ 25
15.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나)/ 26 16. 교구 주보(나)/ 28
17. 김남조 시인(나)/ 29
9 연중 제4주일 마르 1,21-28 (나) 권위 있는 가르침.
김정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를 유감 없이 행사하신 것을 압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선택하시고 파견하실 적에 보여 주실 당신의 지상권(至上權)을 오늘 예수님은 가파르나움이라는 곳에서 드러내셨습니다.
그 날 예수님은 회당에서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고 또한 더러운 악령을 호령하시어 쫓아내시는 등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술같은 것은 조금도 빌리는 일 없이 그저 한 마디 말씀으로 악마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시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성은 삽시간에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지게 되었답니다. 진실로 이같은 권위를 행사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압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은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고 그 권위 앞에서 악령도 쫓겨났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예수님의 시대는 도래하였고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산 증거입니다. 지상과 지하의 온갖 권세를 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그 힘이 보통이 아니며 초인간적인 기적을 하시는 이상 권위 있게 말할 권리도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파르나움에서 말씀을 하셨을 때 백성들은 그 교리에 크게 경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궤변이나 어떤 문제를 장황하게 떠들어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권위를 갖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명확하며 모호한 데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동시에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강권이 아닌 요청이며 부드러웠고 독선적인 데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말하는 이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청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은 당시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는 전연 다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의미를 까다롭게 따지는 데 급급하였습니다. 때로는 율법에 관한 해석이 어렵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과 문맹자들은 전문적인 견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홀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권위 있게 말씀하실 수 있었고 율법의 참뜻을 설명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관련해서 율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은 남을 업신여기거나 억압하는 그런 세속적인 권세가 당당한 뜻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어느날 <당신들 중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 주러 온 것입니다>(마르코 10:43-45)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봉사자로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죽을 각오를 하셨습니다. 예수님 또한 당신을 합당하게 따르는 사람들 역시 봉사자가 되를 바라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권위는 국가나 군대에서 행사하는 그런 권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이 수행되기 위하여 벌로 다스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현재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잘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사랑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으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며 백성들의 사정을 들어 주며 동정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은 현재 교회 안에 계속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를 대신 행사하는 이외 사람을 보고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종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의 권위를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사랑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리를 성실히 믿으며 그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 나갑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권위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뜰히 따르는 것이 되겠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계명을 소홀히 하며 이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며 반대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점을 깊이 반성해 봅시다. 아멘.
10 연중 제4주일 마르 1,21-28 (나) 아버지이신 하느님.
한종훈 신부
가끔 혼자 외로이 생각에 잠길 때면 “도대체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이 세상에 사고 있는가?”하는 막연한 의문에 싸이곤 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이는 처자를 위해 자기 몸이 부스러지도록 일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가정주부들은 남편과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쫓기어 자신을 돌볼 틈도 없다시피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서로 연관성을 맺고 있으면서 누군가를 위해 살고 있거나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살고 있거나 활동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퇴색하고 멋없고 맛을 모르는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어느 외국 문학가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읽었습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가?”라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인류의 의지를 살리기 위해서”라고 답변할 것이다. “인류의 의지란 무엇인가?”라고 재차 묻는다면 “모든 인류가 완전한 것을 향해서 성장하는 의지”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이 사람 말대로 한다면 인간은 완전하고도 원만한 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의지의 실현이 될 것이고 숙명이 될 것이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다면 그 내용은 어딘가 막연한 것 같고 머리가 둔한 이에게는 그 뜻을 충분히 잡아낼 수 없는 그러한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구체적이고도 명료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시오”(마태오 5,48). 하느님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완전하시다고 말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 또한 때에 따라서 구구각각의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구약성서에는 분노하시는 하느님으로, 엄한 심판관이신 하느님으로 묘사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약성서에 묘사된 대로 그러한 분이시라면 우리같이 의지가 나약한 인간으로는, 선(善)임을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처지로서는 도저히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토속신앙에 의한 여러 가지 잡신들도 무서운 것들로 예전 사람들이 섬겨 내려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천재지변이라든가 풍수해 질병 흉년 등등의 여러 가지 재앙들은 마치 여러 가지 잡신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그들이 내리는 징벌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사회가 되어 지적 수준이 점차 발달됨에 따라 이러한 자연의 현상들은 하나의 자연현상이지 어떤 종교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발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점차로 어리석었던 과거의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한 반면에는 과학에 대한 과잉된 신앙심이 대두하면서부터는 과학이 종교를 정복하였다고 믿고 있으며 현대와 같은 과학 문명시대에는 종교란 무익한 것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차로 사로잡아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밝혀주시고 가르쳐 주신 하느님은 위에 말한 것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횡포한 자연의 힘을 빌어 상습적으로 사람을 벌하시는 그런 하느님은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자비와 사랑이 흘러넘치는 인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이신 주님」이라 부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일 엄격하시기만 하고 두려우신 분이시라면 우리는 도저히 하느님께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연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오, 인간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오, 오직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도 사람도 우리 앞에서 사라져 없어지듯 우리 자신도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앙심 깊은 외로운 할머니의 임종을 돌본 일이 있습니다. 핏줄을 이은 일가친척이라곤 아무도 없는 이 할머니는 움막같은 조그만 집에서 파란 많았을 자신의 생애를 하느님께 마지막으로 바치려는 순간에 “그동안 무척 외롭고 쓸쓸하셨겠지요?”라고 묻는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이 계시니까 외로운 것을 몰랐어요. 사람에게 의지할 때는 언제고 외롭다든가 쓸쓸함을 느껴왔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항상 예수님이 벗이 되어주시고 아버지가 돼주셨기 때문에 외로운 것을 몰랐어요. 이제는 하느님 곁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낙이랍니다.” 할머니의 이 마지막 말씀이야말로 진리가 담긴 말이 아니겠습니까?
즉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살 때 삶의 참된 보람을 찾고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의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결코 자연발생이 아니고 인간 의지의 소산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분이시며 자애로움이 넘쳐 흐르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분이시기에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주님이시고 우리와 살기 위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11 연중 제4주일 마르 1,21-28 (나) 새로운 가르침.
송 진 신부
믿는 생활에서 구마나 치유는 신나는 일입니다. 은사를 받은 이나 은사를 통하여 체험한 이나 목격한 이나 모두 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에만 빠지기도하여 믿음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행실을 바꿀 때 보게 되는 빛
오늘 복음에서 구마행위를 본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마르 1,27)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1,28). 호기심 때문인지 가르치심을 들으려고 그랬는지(1,22) 병을 고치고 싶어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1,37). 예수께서는 늘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계셨지만(1,45) 예수님을 알아보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따라간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늘진 땅 사람들에게 빛이 보였도다”(알렐루야). 사람들이 빛을 알아 보려면 자기 행실을 바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한 3,19). 그래서 예수께서는 먼저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신자들은 오늘 응송을 되새겨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이 응송은 성무일도에 나오는 시편 가운데 자주 읊게 되는 94편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교회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라! 출애굽의 구원 체험이 하느님 편에서 내린 너무 일방적 은혜이기 때문입니까? 사람이란 기억이라는 병과 약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까? “므리바에서처럼, 맛사의 그날의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너희 조상이 거기서 나를 시험하고 내 일을 보고도 시험하려 들었나니.” 제1독서는 백성들의 의무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가 내 이름으로 하는 말을 전할 때 듣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친히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신명 18,15-19).
그래서 조상들처럼 한눈 팔아 하느님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십 년 동안 그 세대에 싫증이 나버려 나는 말하였었노라. 마음이 헷갈린 백성이로다. 내 도를 깨치지 못하였도다.‘ 이에 분이 치밀어 맹세코 말하였노라. ’이들은 내 안식에 들지 못하리라‘”(시편 94,10-11).
또한 예언자의 책임도 일깨우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주리니, 그는 나에게서 지시받은 것을 그대로 다 일러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라고 시키지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리라”(신명 18,18-20).
오늘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 선교사, 말씀의 봉사자는 이런 책임을 지고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는 신자들도 같은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인지 사람의 말인지를 어떻게 가릴 수 있는지가 어렵습니다.
말뿐이 아닌 행위의 가르침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면서 식별의 기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권위있는 새 교훈(가르침)이다”(마르1,27).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한 가르침(1,22)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구마행위도 가르침으로 알아듣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하느님께서 너희를 돌보신다)”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심으로써 실제로 하느님께서 사람을 돌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은 새롭고 힘찼습니다. 말만 있는 세상에서 말과 행위가 일치하는 가르침은 얼마나 권위가 있고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들은 가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말과 행위가 일치하여 전한다면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전한다면, 자신이 먼저 실천하고 전한다면 그야말로 새로운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교구장께서 올해 사목교서에서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각자가 스스로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와 깊이 있는 만남을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관념적인 가르침이나 추상적 언어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 자신이 그리스도가 지금, 내 안에, 사람들 안에 그리고 여러 가지 사건 속에 실제로 현존하고 계시다는 실감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실제로 그리스도와 만나야 합니다. 기도의 체험 속에서 또는 하느님 말씀을 깊이 음미하는 가운데 주님의 현존과 만나면 우리에게는 감동이 일어나고 그 감동은 자연히 다른이들에게 확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예수가 되기 위한 용기
“앞으로 무엇을 공부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 후배들에게 어느 사제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아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기 위하여 공부하면서 믿음과 사랑을 키우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성서의 지식은 많은 데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이 지극하신지, 자상하신지, 아름다우신지, 가난하신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프라도회의 창설자 슈브리에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 권한과 덕행이 그것이다.
권한으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는 가지 않는 길을 가리킬 뿐이며,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덕행을 연구하여, 거기에 우리의 생활과 가르침과 말과 행실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맺은 결합이 눈에 뛸 정도로 지극히 긴밀하고 완전하여,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가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외적으로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덕행과 가난, 고통과 기도, 사랑을 재현해내야만 한다. 우리는 구유의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 수난으로 고통을 껶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성체로 먹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현해내야만 하는 것이다”(참다운 제자).
수많은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교회 공동체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성인이 될 것입니다.
12 연중 제4주일 마르 1,21-28 (나) 삽시간에 퍼진 예수의 소문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신명 18,15~20 (나는 예언자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주리라)
제2독서 Ⅰ고린 7,32~35 (처녀는 어떻게 하면 거룩해질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복 음 마르 1,21~28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 전도활동의 무대를 갈릴래아지방으로 정하시는데 그 중심지가 바로 가파르나움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로 남부에서 그의 사명을 수행했다면 예수님은 북부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전도활동의 기간은 대략 3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보다 다르게 해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로 그 가파르나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대중들에게 설교하시고 가르침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대단히 권위가 있고 그리고 이해가 쉽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놀라고 감탄했으며 특히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 악령이 무서워 도망치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들이 탄복을 했고 그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있는 주님의 말씀\’을 묵상 해 봐야 합니다.
옛날 율법학자들은 성서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훌륭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율법학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학자들의 권위가 쇠퇴하게 됩니다. 도대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은혜와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과 두려움과 그리고 속박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목소리만 높였고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 축소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에서 외면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생전 느껴보 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이 넘쳐흘렀고 복잡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하느님의 율법 안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며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풍성한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진정 위대한 스승이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이론이나 전통에 묶여져 있지도 않았으며 왜곡된 내용을 쓸데없이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막연하고 애매한 것은 직접 예화를 들어 설명해 주셨으며 말씀의 참뜻이 무엇이며 거기에 어떤 힘과 사랑이 있는지 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스승의 모습이었으며 또 한 그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의 교수법이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행의 일치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악령 보고 \’나가라.\’ 하시자 악령 이 혼쭐이나서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성직자들에게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이 \’언행의 일치\’입니다. 아무 리 강론을 잘하고 아무리 사목을 잘해도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면 그는 권위를 잃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직자라는 자들이 거짓말이나 하고 돈이나 밝히며 선하게 살지 않는다면 성직자로서의 그의 생명은 끝장난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본당이 있는데 재정이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열심과 기도로써 받은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2백만 불짜리 집을 거저 얻었습니다. 그래서 본당 신부가 우리가 한 푼도 안 주고 거저 성전을 얻었으니 우리가 모은 돈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의대 교수였던 회장과 신문사 사장이었던 어떤 형제가 들고일어나서 신부를 비난하고 신자들을 선동해서 악착같이 반대해서 본당을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자들이 그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가진 것을 나눈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도 꼭 실천해야 할 인간의 과제입니다. 더구나 그가 신앙인이고 의술을 펴는 의사요 또한 언론인이라면 당연히 그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남들이 반대해도 그들은 사람들을 설득해서 불쌍한 이웃으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사랑을 펴야 할 사람들이 거꾸로 반대를 하게 되니 과연 하느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지 어리둥절 하게 만들었습니다. 의사가 아니고 언론인이 아니라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는 신앙을 떠나서도 한 인간으로서 끝장이 난 것입니다. 오늘은 특히 사회 복지 주일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불쌍한 이웃들이 많습니다. 아니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을 배척하 는 것이며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삽시간에 퍼진 예수님의 소문은 없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래서 예수님의 소식을 그렇게 전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말씀을 실천할 때, 우리 안에 그리고 이웃에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사회를 밝힐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눕시다. 거기에 사랑의 권위가 있습니다.
13 연중 제4주일 마르 1,21-28 (나) 사회복지 주일
권완성 신부
이번 주일은 세상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돕는 사회복지 주일입니다.
1999년 사회복지주일 담화문에서는 ꡒ아프리카전역,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남미 및 동구라파 일부지역에서는 빈곤, 천재지변, 내전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향 결핍상태이며 같은 민족인 북한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중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인구 50억 중에서 10억의 인구가 굶주리고 있으며 다른 20억의 인구가 최저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ꡓ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절대빈곤, 최저빈곤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런 질문 을 한 적이 있습니다. ꡒ신부님,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신부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ꡓ 응답이 없자 그 사람은 ꡒ신부님은 그 사람한테 하느님만 믿으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한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입니다.ꡓ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절대 빈곤앞에 서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먹을 것을 주는 것이고, 배고픔에 허덕이지 않는 우리는 그 책무를 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굶주린 자를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도와주는 1000원짜리 한 장은 우리에게는 식사 한끼값도 안됩니다. 그러나 굶주리는 나라에서는 1000원이면 그 나라의 양식으로 3일, 또는 1주일의 양식이 됩니다. 우 리가 도와주는 미소한 정성은 세계 많은 사람들을 굶주림과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는 엄청난 힘을 가진 것입니다. 이 힘을 알고 도와주도록 합시다.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합시다. 그냥 1000원짜리 한장을 던져 주는 것보다는 하느님 아버지께 ꡒ아버지,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ꡓ하고 기도하고 나서 봉헌합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자세일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의 죄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세상이 풍요로워 진다고 해도 굶주리는 사람들은 그대로 존재합니다. 이 현상은 먹을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고프지 않은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되이 책임을 느끼고 적어도 1년에 1번 사회복지 주일에는 이 분들을 돕도록 합시다.
나의 작은 정성이 큰 일을 합니다.
14 연중 제4주일 마르 1,21-28 (나) \’악령을 몰아 냅시다\’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몰아내신다. 사람들은 놀라며 그분의 귄위에 경탄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이다. 회당에서 설교를 하고 있던 예수님 앞에 악령 들린 사람이 나타나 시비를 걸었다. 그는 예수님의 신분을 폭로하며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ꡐ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ꡑ 예수의 말씀이 떨어지자 악령은 물러가고 그 사람은 멀쩡하게 된다. 예수님의 목소리 톤이 어떠했는지, 어떤 표정으로 그 사람을 지켜봤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권위에 압도당했고 소문은 금방 퍼져나갔다. 당시의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악령을 물리치는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물론 대답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셨으므로 악령이 저절로 물러간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그분의 아들답게 사셨다. 그러했기에 그분에게는 악령도 두려워하는 권위가 있었던 것이다.
악의 세력은 그분의 존재 자체를 겁내지 않는다. 그분의 존재가 능력을 발휘할 때 두려워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행을 베풀고 성사생활을 해야 악의 세력은 물러간다. 나와 내 운명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의 세력은 세례성사와 함께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비로소 힘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셨기에 힘이 있었다.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도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가면 힘을 지닐 수 있다. 악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예수님의 힘을 지닐 수 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다. 실제로 악의 세력은 예수님께 접근하지 못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을 못쓰고 물러갔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결과가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악의 세력은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며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산다면 말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그분의 자녀답게 사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의 자녀답게 사는 것인가. 정답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할까. 쉬운 것부터 실천하면 된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평생을 통해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긍정적인 분이었다. 제자가 자신을 팔아 넘길 것을 알면서도 비난하지 않았고 받아주셨던 분이었다. 언제나 기도하셨고 가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어린이를 사랑하셨고 항상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는지.
자연은 간섭받는 것을 싫어한다. 있는 그대로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무는 옮겨 심으면 잘 죽는다. 또 살아있더라도 뿌리를 내리는 데 많은 고통을 겪고 몸살을 한다. 우리도 하느님의 나무들이다. 그분이 우리 안에 심어놓은 것들을 옮기려 들면 고통이 따라온다. 우리의 생활이 밝지 못하고 어두워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것들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입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복음말씀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분은 우리 안에 당신의 모습을 심어주셨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면 그 모습은 열매를 맺고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며 간섭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말씀으로 다시 힘을 주시는 것이다. 용기를 갖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자.
15 연중 제4주일 마르 1,21-28 (나)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된다. 사람은 말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따라서 사람의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의 말은 단순하고 솔직하다. 그러나 위선적인 사람의 말은 교활하고 가식적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깊이 헤아리고 멀리 내다 본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피상적이고 즉흥적이다. 이기주의자의 말은 거만하고 냉정하다. 그러나 자기를 비운 사람의 말은 겸허하고 너그럽다.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의 말은 고상하고 신중하다. 그러나 자제할 즐 모르는 사람의 말은 경박라고 수다스럽다. 이렇게 사람의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사람은 말을 통해서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다. 그 사람의 말을 아 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고, 그 사람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마음을 그 사람의 마음과 같이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다. 선한 사람의 말은 남을 선하게 하는 힘이 있고, 악한 사람의 말은 남을 악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선한 말을 받아 들이면 우리의 마음이 선하게 되고, 악한 말을 받아 들이면 우리의 마음이 악해진다.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받아 들이고, 악한말을 배척한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악한 말을 받아 들이고 선한 말을 배척한다.
사람의 말에 진정한 권위와 생명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의 성덕이다. 같은 내용의 말을 하더라도 누가 그 말을 하느냐에 따라 감명받는 정도가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은 같지만 그 말에 담겨 전달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거룩하면 거룩할 수록 그사람의 말은 남을 감화시키는 더 큰 권위와 힘을 갖게 된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감복시키는 절대적인 궈위와 사람을 성화시키는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성부께서는 영원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하나의 말씀으로 완전하게 표현하신다. 성부께서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하신 말씀이 하느님의 둘째 위격인 성자이시다. 그래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똑같이 완전한 하느님이시다. 성자께서는 성부와 똑같이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지극히 거룩한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께서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사람이 된 하느님이시고, 그러기에 또한 하느님이 된 사람이시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것은 모두 사람의 것이 되었다. 하느님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 되었고, 하느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의 사랑이 되었다. 하느님의 평화는 사람의 평화가 되었고, 하느님의 기쁨은 사람의 기쁨이 되었으며, 하느님의 영광은 사람의 영광이 되었다.
사람은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하느님을 버리고 떠나 죄인이 됨으로써 아득하게 비속한 처지로 전f락한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더 할 수 없이 높은 품위로 다시 올려졌다. 예수님은 사람이 된 하느님의 말씀이시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신 성자에서 또 한번 사람이 되신다.
그러면 사람은 성자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지위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되어,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과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경탄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사람들이 경탄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하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운이다. 예수님에게는 인간적인 권위를 인정받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예수님은 그저 부지런히 노동을 해야 겨우 생계를 유지했던 비천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일 뿐이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마음깊이 감복하게하는 권위를 느쪘던 것온, 그분의 말씀이 그분이 지닌 완전한 성덕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었기에 하느님의 완전한 거룩함이 담겨있었고, 그래서 듣는 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마음이 악한 사람은 한없이 선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없다. 죄를 버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맡씀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하느님의 알씀이신 성자께서 그 사람 안에 오셔서 당신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지혜로 그의 정신을 채우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그의 마음을 채우신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어, 하느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지복을 유산으로 상속받게 하신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만이 사람이 소유해야할 참된 재산이시다. 찰라의 만족만을 주는 명예와 재물과 쾌락이라는 보잘 것 없는 소유를 버리고 하느님을 맞아 들이는 사람들이 영원히 하느님을 누리는 지복을 얻게된다.
16 연중 제4주일 마르 1,21-18 (나) 하느님 다스림의 위력
1. 가파르나움 일지(21-39절)
마르코 복음 1장21-39절은 마르코가 예수께서 어느 안식일 하루 동안 가파르나움에서 하신 일을 일지 형식으로 엮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오전에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21-28절). 점심 때가 되어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29-31절). 안식일이 끝나자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데려온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32-34절). 어두운 새벽,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후, 제자들이 찾아오자 그들과 함께 갈릴래아의 회당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35-39절). 오늘 복음(마르 1,21-28)은 가파르나움 일지 중 회당에서 미친 사람을 고치신 구마이적 사화(驅魔異蹟 史話)입니다.
2. 구마이적 사화(21-28절)
복음서에 나오는 구마이적 사화는 5편인데 그 가운데 4편이 마르코 복음서에 실려 있습니다 (1,21-28 ; 5,1-20 ; 7,24-30 ; 9,14-29). 마르코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과 사탄이 싸움을 벌이는 양 구마이적을 서술합니다. 구마이적 사화 서술 양식은 구마자(驅魔者)와 부마자 (付魔者)의 상봉(23절), 부마자의 방어사(24절), 구마자의 추방령(25절), 귀신추방(26절) 그리 고 목격자들의 반응(27절)으로 짜여졌습니다.
3. 우리의 이해
예수님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위력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구마행위는 ‘하느님의 다스림’(하느님의 나라)이 사탄을 물리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드러낸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뿐 아니라 구마행위로써 하느님 다스림의 위력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는다고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주위에는 예외 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또 이를 악용하여 금품을 착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처신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더러운 귀신에 들린 사람들이 전보다 분명히 많이 줄었습니다만, 재물․권력․ 명예 라는 또 다른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하고 치유하는 것이 오늘의 구마행위입니다. 서울대교구 홍보실
17 연중 제4주일 마르 1,21-18 (나) 나눔의 은총
김남조 시인
의좋은 형제가 추수한 곡식을 절반씩 나누었으나 서로 더 주고 싶어서 밤마다 곡식 한 섬을 지고 가서 몰래 곳간에 부어 주다가 어느 날 밤엔 두 집 사이 중간쯤에서 형제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의 책에는 이에 부연하여 마을 사람들이 그 지점에 성전을 세웠는데 그 마을에는 그 곳보다 더 거룩한 장소가 없다는 합의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세태에선 나눔의 미덕을 사회복지의 주 항목으로 꼽으며 적극 권장하고 있으되 대체로 그 모양새는 시혜(施惠)와 자선이라는 수직 형태입니다. 그런데 위의 형제들은 사랑이 극진하여 동등하게 소유하는 균형을 깨면서 더 주고 싶은 열망에 내달린 경우이며, 저편 사람의 충족이 그 자신의 기쁨으로 체험되는 아름답고 안정된 수평적 나눔입니다.
오늘 이 시대라 하더라도 이런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어버이의 심정 그 대부분이 이에 이어지며 뛰어난 영성으로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산 이도 드물지 아니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모범을 지니는 크리스찬적 인격을 지향함으로써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가능해야 하겠습니다.
“세계 정세의 난감한 딜레마는 우리의 문명에서 종교교육을 탈락시킨 죄와 관련된 바가 많습니다. 윤리문화가 없이는 인류의 구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아인슈타인)라는 지적이나 “사람을 사랑하라, 그가 곧 그분이니”(니코스 카잔자키스)라는 말에서 일깨워지는 바가 많으나 급성장한 물질문화에 견주어 윤리문화의 미성숙이 두드러짐을 절감합니다. 그러나 20세기의 성인으로 불리우는 데레사 수녀 등 큰 선행자들이 있어 왔고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고독하지 않았으니 이웃에게 다 부어 준 빈 그릇을 즉시에 채워 주시는 신령한 은총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행자가 받는 보상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그 자신도 참 인격에 도달한 일, 더하여 비밀스런 기쁨과 위안이 산울림처럼 그의 가슴으로 되돌아왔을 그 일들입니다. 현대가 여러 잘못에도 불구하고 ‘다수인’(多數人)의 인식이 확산되어 전체의 복지를 염두에 두는 추세임은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아울러, 사람이란 아무리 가난하거나 무력하더라도 반드시 나누어 줄 그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최소한 함께 있으면서 어려움을 공감하는 사실만으로도 일종의 나눔이 될 것입니다.
새 천년 첫 해의 한 달이 지났습니다. 7년간을 유충으로 지낸 다음 7일 동안 염천에서 노래하고는 삶을 마치는 매미나 단 하루만 살 수 있는 하루살이에 비하면 사람의 시간은 매우 풍족합니다. 한 해를 한 생애처럼 날마다를 심히 공들이며 감동과 감사로 살아가는 자세가 바람직하며 허락 받은 적지 않은 시간을 더 나은 생을 위한 기회로 선용해야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1. 말씀읽기: 마르코 1,21-28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루카 4,31-37)
2. 말씀연구
개그 프로그램에서 “혹시 어떤 것을 아십니까?”라고 물으면 상대방은 그것은 안다고 대답하고 다시 질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는 나는 변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습니다. 나 또한 신앙인들의 기도 모임에서 상대방의 말에 몹시 놀라서 하느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유창하게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과 성경에 대해 달변가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합시다.
21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는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신앙고백, 기도, 모세 오경과 예언서 봉독, 설교 순으로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서나 예언서의 말씀을 봉독하시고, 그것을 참석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알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하는 소리가 뭔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이 가르치면 무척 쉽습니다. 아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는 매우 쉽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가르칠 때는 정말 어렵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것을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자신도 어렵도, 듣는 이도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본 것을 가르치는 것과, 보지 않고 전해들을 것을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초심자들 또는 비신자들에게 가톨릭 교리에 대해서 가르칠 때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정확하게, 시원하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런 말하기를 회피하거나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신앙에 있어서는 족집게 강사처럼 그렇게 시원하게 가르쳤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묵상해야 하겠지요.
어떤 공동체에 별명이 “메기”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비자였습니다. 그가 “메기”가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받으면서 이런 저런 것들이 궁금해서 신앙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신앙인들이 그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비자가 물어보는 것에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들이 메기를 피하는 것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처럼, 그 공동체에서 그 예비자(메기) 때문에 덩달아서 교리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예비자에게 무척 부끄러웠겠지요?^*^).
갑자기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경배를 드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지켜야 할 계명들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입으로만 신앙생활 하고, 내 깊은 내면은 순수하지 못함이나, 죄로 물들어 있을 수 있고, 어떤 조건이 성립되면 그것이 튀어나와 반응하며, 하느님께로 가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좀더 의로운 사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가짐 잘못하여 다른 이들을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항하기 위해서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름을 불러 주문을 거는 행위”로 마귀를 쫓아내었는데, 마귀가 오히려 예수님을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께 대항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드러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모르기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이렇게 꾸짖으십니다.“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자들처럼 “이름을 불러 주문을 거는 행위”를 하지 않으십니다. 즉 주술적인 말마디라든가, 주술적 수단을 가하지 않고 행동하십니다. 그저 나가라고 명령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악령들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효력 있는 말씀”은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고 계시다는 표지가 됩니다.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더러운 영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악령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창세기에서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저 뿐인 듯 합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데 저만 오로지 그분의 말씀을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주술적인 주문을 외우시지도 않고 그저 명령만 하셨는데 악령들이 복종하니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구세주이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욱 놀라겠지요.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나도 신앙인들도 예수님의 놀라운 소식들을 온 동네에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좋은 소식들을 전해야 합니다. 신앙의 기쁨을 전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② 나를 하느님께로 멀어지게 유혹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나는 그 유혹을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③ 마귀 들린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 마귀를 쫓아내어 보았습니까?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
허영엽 신부
지난해 해외 언론에 로마 교황청이 악마를 내쫓는 사제 수백 명을 구마사(驅魔師)로 양성한다는 계획이 보도됐습니다. 외신은 교황청이 전 세계적으로 악마주의와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현상을 경계하며 이같은 계획을 세웠다고 덧붙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악마의 존재를 미신이나 과거의 유물정도로 생각합니다. “악마의 가장 은밀한 간계는 우리로 하여금 악마의 존재가 없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는“악마란 살아있는 영적 존재로서 나쁜 길에 빠졌거나 빠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 죄와 불행의 씨를 뿌리는 두려운 유혹자이며 원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도 정신적, 육체적인 질병과 악마가 들린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악마를 몰아내는 전통적인 예식은 구마자가 십자가를 높이 들고 강복을 하면서 기도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이때 악마 들린 사람이 고함을 지르거나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교회역사에서 보면 성인성녀들도 악마의 공격과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요한 비안네 신부님은 악마의 시달림을 많이 받은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이 악마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사목적으로 잘 돌보아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카파르나움 회당으로 들어가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란을 피웁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놀랄 일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악마에게 명령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악마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악마는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고 타락으로 이끌어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기적은 악으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마를 쫓아내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가장 중요한 표징이 됩니다.
우리도 악마를 내쫓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세례성사는 우리를 악마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악마를 내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악마를 내쫓지 못한다면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음이 약한 탓이다. 믿음이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또한 기도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없다.”그렇습니다. 굳은 믿음(마태 17,20)과 기도(마르 9,29)로써 악마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영성가는 성모님을 통해 드리는 묵주기도는 악마를 내쫓는 특효약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무조건 악마의 영향으로 보는 것은 금물입니다. 우리도 오늘부터 열심히 기도합시다.
“예수님! 저희를 악에서 구해주세요. 그리고 악마가 저희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내쫓아주세요.”
이제는 저 대신 주님이 저를 살으소서.
이동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이것을 지켜 본 사람들은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하며 모두 놀라워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워하지만, 더러운 영도 복종하는 권위를 가진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거리에 나가보니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병약한 소녀들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었고, 갓난아기는 젖을 먹지 못해 울부짖을 힘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자니 여간 화가 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원망을 터뜨렸습니다.
“하느님, 어째서 당신은 이런 세상을 두고만 보십니까?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라. 난 분명히 대책을 세웠으니까.” “대책이라뇨?” “이 답답한 녀석아, 내가 심심풀이 땅콩으로 널 만든 줄 아느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심풀이 땅콩(?)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범을 따라 한 생을 살았던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성 프란치스코의 바람이었고, 바로 우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각각 다른 처지와 수준에 있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놀라워하지만 믿고 따르지 않는 구경꾼(심심풀이 땅콩)으로 부르시지 않고, 당신의 협력자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홀로 완전한 세상과 교회를 만들지 않으시고 우리의 재능과 영적 선물을 계발해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 살아가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권위를 가진 가르침(말씀)에 복종하고 따르려는 참 좋은 몫을 택하신 분들입니다. 좋은 몫을 택하신 여러분, 이제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이렇게 살아갑시다. “이제는 저 대신 주님이 저를 살으소서.” “이제는 제 안에 주님이 살아 제가 주님의 도구가 되고, 구원의 협력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제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살게 하소서.”
진심으로 믿는 사람에게만 열려있는 놀라움
이현우 신부
비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으실 겁니다.
비는 인간의 마음을 풍요롭게 할 때도 있지만 무섭게 할 때도 있고 우울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많은 비 피해를 입을 때도 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데 무작정 비를 맞고 있으면 아마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비는 처음 맞기가 힘들지 일단 옷이 젖고 나면 아무 두려움 없이 맞을 수 있습니다. 이런 평범한 진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잊고서 생활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비는 계속 내리는데 우리는 선뜻 몸을 내놓지 못합니다. 옷이 젖을까 두려워서, 감기 들까 겁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우리는 망설입니다. 하지만 일단 은총에 젖기만 하면 쉽게 은총에로 마음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시작한 사람은 자기를 온전히 맡깁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무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부턴지 놀라움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뎌진 우리 마음에서 놀라움과 감탄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권위에 탄복한 군중들의 놀라움과 감탄을 전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군중들 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매 주일 새로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놀라지도 감탄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진한 마음을 통해서 닫혀진 영혼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영혼의 문을 열 때 비로소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게 다가오고 그 가르침에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진심으로 믿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놀라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실하지 못한 더러운 영의 고백을 물리치시고 오히려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신앙이 없는 바리사이의 요구는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진실한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예수님의 권위에 맡길 때 은총의 빗물은 우리를 적실 것입니다. 그리고 은총에 젖은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에 찬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분을 전파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감탄한 군중들이 그것을 전할 수밖에 없었듯이 하느님의 은총에 온 몸이 젖은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28절)
이렇게 이웃과 함께 주님께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이 더러운 영의 고백이 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주님께 바칩시다. 진실한 삶을 통해서 나 자신과 이웃에게 말씀을 전할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
김병운 신부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오늘 주일 복음의 첫 이야기입니다. 왜 놀랐을까요?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그 내용에 대한 설명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말씀하셨는지, 고매한 지식에 대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다음에 들려주는 복음은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라는 것뿐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나름대로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본받을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로부터 어떤 것도 본받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존경심을 가질 수도 없는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중요시한다면서 그로 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어기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무력하게 만드는 과오를 크게 범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부수적인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기본적인 것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법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법의 완성, 법의 질서 곧 가치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고, 스스로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는 가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여러 번 말한 것 가운데 하나는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권위란 개인적 재능, 덕망이나 문벌 따위에서 생기는 사회적 세력이라고 말합니다. 권위자란 어떤 학문이나 기술에 있어서 가장 높은 지경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국어사전 참조) 이처럼 권위가 있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회적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제도적 장치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크게 다릅니다.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주인이나 선생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그분은 께저분한 어린 아이 하나를 안으시고 이 어린이라고 말했습니다. 빌라도가 물었지요. “그대는 왕인가?” 그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권위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현세의 것이 아니라고,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너와는 같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어떤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쳤습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 저희도 저 너머의 힘을 갖고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있는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나자렛 예수님, 당신은 저와 상관이 있습니다.
김용환 신부
정채봉 선생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의 글입니다.
까치네는 오늘 아침에도 부부 싸움을 벌였다.
“까치까치까치” 사흘이 멀다 하고 일어나는 말다툼이었다. 저녁이 되어 남편까치가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둥지에 불평 귀신이 붙은 것 같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주 싸울리가 없어”
아내 까치 또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걱정 귀신, 불평 귀신 다 붙어 있는 것 같아요. 둥지에 오면 걱정 불평이 그냥 쏟아지니…”
부부 까치는 이튿날 산 까치 도사를 찾아갔다.
“처음엔 저희 집이 안락 둥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 불평 둥지입니다. 귀신이 붙은 것 같사오니 그것들 쫓아내는 비방 좀 가르쳐 주십시오.”
산 까치 도사가 말했다.
“우리들은 기쁨을 ‘까치까치까치’하지요. 마찬가지로 불평도 ‘까치까치까치’하지요. 이 기쁨과 불평도 한 입에서 나오는 것이지 다른 귀신이 시켜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것이죠. 다만 기쁨은 첫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반해 불평은 묵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둥지를 틀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불평이 걷히고 기쁨이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1,24) 이 말은 왠지 오늘날 무신론이 팽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외침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하느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하느님 없이도 나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야.” 사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접하는 온갖 정보와 지식, 삶의 수단들은 온통 하느님 없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선전하는 광고내용에도 결코 하느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 나가려는데 부하가 “각하, 신부님을 모셔다가 기도를 부탁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런 건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야. 전쟁과 하느님은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전쟁에서 패했고 수많은 부하가 죽음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의 패배로 결국 그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영국의 해군 넬슨 제독은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시 127,1)라는 성경 말씀을 외우며 믿었고 전투에 나가기 전에 군종 신부님과 함께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기게 하셨고, 그 결과 영국도 살고 자신도 살고 부하들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사의 주관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계획과 뜻을 품고 새해를 시작한지 한 달입니다. 이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의 마음은 넬슨 제독처럼 매사에 주님께 기도를 드리며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희와 상관이 있습니다. 부디 저희를 떠나지 말아 주소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유경재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게 됩니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마침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오늘 복음은 두 번이나 걸쳐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가르침’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더러운 영의 외침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시자 그분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차리고서는 이렇게 소리를 지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입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힌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거룩함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속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은 무엇이시다’ 라고 표현할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사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와는 달리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이시기에 하느님만이 거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사랑은 하나의 다른 두 이름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이 말한대로 ‘예수님께서 거룩한 분’이라는 것은 예수님 정체성 또한 사랑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의문의 실마리가 풀린 셈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참된 권위는 사랑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세상은 안타깝게도 물질과 자본이라는 힘의 권위를 추구하는 듯합니다. 힘은 억압하는 틀 일 뿐이지 그 안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힘에 의한 권위는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도 변하게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힘이 아니라 사랑의 권위입니다. 이는 희생하는 권위이며 남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는 권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한마디에 더러운 영이 물러가고 그 사람이 구원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물러났다는 것은 더러운 영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다시금 하느님의 자리가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자리는 누가 차지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권위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더러운 영이 물러가듯이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자리가 새롭게 마련될 것입니다. 사랑만이 우리를 완전하게 합니다.
유혹 물리치기
박흥준 신부
현대인은 고도로 발달된 자연과학의 영향 속에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령, 마귀,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조차도 동화 속에 등장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2,000년 동안 한결같이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경계할 것을 줄곤 촉구해 왔습니다.
악령은 분명 존재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영적인 존재일 뿐이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 일을 자기도 모르고 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악령은 타락한 천사, 영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래를 볼 수도 있고, 사람을 조정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권위가 있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그 상황에서 아무리 정신병자라지만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울 수 있었을까요. 소란을 피운 것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 그자체가 아니라 그를 조정한 악령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죄는 미워하데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령이 그를 조정했기 때문이죠.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미리 알았나 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알았기에 정신병에 들린 사람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조정하는 악령에게 나가기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람을 쫒아내신 것이 아니라 악령을 쫒아 내신 것이죠.
사탄이 존재하는 최종목적은 하느님을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느님께로부터 멀리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의 영혼을 멸망시키려합니다. 또한 사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신통력을 지니고 있기에 얼마든지 변신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보지 못했지만 옛날 신부님들이 쓰신 글에 보면 사탄은 뿔이 달리고, 흉직하며, 음흉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탄은 세련됐다고 할까요. 그런 흉직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잠입하여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곤합니다.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죠.
또한 사탄은 여러 가지 전술을 사용해서 하느님을 거부토록 합니다. 광야에서의 3가지 유혹이 그러하고, 오늘 복음에서의 협박이 그러합니다. 때로는 꼬시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며, 병을 만들어 그 사람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먼저 사탄의 유혹에 반응하지 맙시다. 예를 들면 사탄은 여호와의 증인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상대를 해주면 계속해서 이야기하자고 대듭니다. 하지만 일언지하 거절하면 발길을 끈습니다.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한 절대로 활동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전장치로 양심을 주셨습니다. 양심에 거스르는 일, 아니다 생각되면 즉시 생각을 바꿉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통해 우리를 계속해서 꼬십니다.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처럼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엄격한 말마디로 이를 배척해야 합니다. 물러가라, 썩 거져, 썩 나가거라. 그리고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하느님 사랑합니다. 등등
사탄에 끌려 다녀 영혼을 멸망시키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여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기쁘고 보람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제복
이정훈 신부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르 1,22)
당시에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아도 복장에서부터 풍기는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특별한 옷차림을 하거나 제복을 입게 되면 상황에 맞는 ‘권위’를 풍깁니다. 병원에서 보이는 흰 가운이나, 경찰의 제복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복장을 하지도 않으셨는데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학자들보다 더 놀라운 권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시다.
제가 교우들을 만나고, 봉성체나 집 축복을 나가면 많은 이들이 제가 사제임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사제복을 갖추지 않고 교우들이 모인 곳이 아닌 곳을 간다면 제가 사제임을 알아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교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조배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 간다면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적어도 내가 드러내기 전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율법학자들과 달리 행동에서 드러나는 권위로 더러운 영까지 복종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늘에서 온 것이며, 그 권위는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기에 더욱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특별히 다른 제복을 입을 필요는 없습니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리고 성당에서 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기에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권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실천하는 한 주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겸손한 자의 권위
서경돈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율법 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권위를 느꼈다. 더러운 영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눌려 곧바로 물러갔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러한 권위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부께 대한 절대적 순종에서 나온 것이다. 그 순종은 예수님을 성부와 일치시키고, 예수님은 그로 말미암아 악령도 두려워하는 최고의 권위를 지니게 된다.
성부께 대한 절대적 순종의 바탕에는 예수님의 겸손함이 깔려 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손해야 한다. 교만한 마음에서는 순종의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회당의 사람들이 느낀 예수님의 권위는 성부께 대한 절대적 순종의 바탕에 깔린 그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겸손은 바로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전제 조건이다. 겸손과 사랑은 서로 뗄 수 없는 일체를 이룬다. 그래서 참된 사랑은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겸손하지 않고 교만했기 때문이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로부터 힐난을 받았던 것도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다. 교만한 자는 자기만을 생각하다 자기에게 도취되어 남을 보지 못한다.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 고개 숙이고 그 분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그 분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극도로 겸손하게 순명하셨다. 그리고 지고의 겸손과 순명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상의 권위를 갖게 하였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모세 역시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다(민수 12, 3). 하느님께서는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환시나 꿈을 통해 말씀하셨으나, 모세에게는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다(민수 12, 6-8). 성모님께서도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셨고, 겸손을 강조하셨다. “주님께서는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루카 1, 51).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겸손을 가르치신다.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 25-30).
지고의 겸손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한다는 이 역설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인의 삶이어야 한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정성종 신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마르 1,27) 오늘 복음에서는 백성의 고백을 통해 율법학자들보다 더 권위 있게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권위는 어떤 것인가? 오늘 1독서의 모세는 나와 같은 참 예언자가 나타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일러 줄 것이다.”(신명 18,18) 하느님의 말을 입에 담아 전하는 것, 이것이 참 예언자로서 예수님의 권위이며, 그 권위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입에 담는 행위를 우리는 말씀 묵상과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도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나의 의견만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들어줄 수 있을 때 대화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경청하는 것이 기도하는 이의 자세입니다. 그러기에 들을 수 있는 귀가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들을 수 있는 데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끊임없이 들으려고 하는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권위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소통의 문제입니다.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졌을 때 그의 말에서 우리는 권위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권위는 나 스스로 얻어 누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부여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신이 인간이 되신 신비, 즉 ‘낮아짐’에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권위, 사회에서의 권위 또한 타자로부터 부여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부여된 권위를 사용하는 데에서 권력이 형성됩니다.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평화와 폭력의 갈림길이 형성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성은 율법학자들에게서 율법이라는 법에 백성을 가두려는 권력의 한 형태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권력을 넘어선 권위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권위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합니다. 이에 비해 권력은 지위나 힘을 이용해서 강제로 행동하게 합니다. 권위로 이끄는 지도자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따르는 추종자도 역시 행복합니다. 그러나 권위를 잃어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지도자는 불행합니다. 따르는 추종자도 역시 불행합니다.
또 권력은 민중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민중을 힘으로 누르려고만 합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세상의 실현이 어렵다면 최소한 모두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사회,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은 그것이라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