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5주일





         1. 유진선 신부(가)/ 2                    2. 함세웅 신부(가)/ 3

         3. 함세웅 신부(가)/ 5                    4. 최기산 주교(가)/ 7

         5. 변희선 신부(가)/ 9                    6. 강길웅 신부(가)/ 10

         7. 김현준 신부(가)/ 12                   8. 변준석 신부(가)/ 14

         9. 최인호 작가(가)/ 15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가) 선의의 생활.

                                              유진선 신부



고도로 발달된 현대 물질문명은 인간 소외라는 슬픔을 우리사회에 안겨 주었습니다. 인간이 지배하는 인간의 문화사회가 아니라 과학이 지배하는 물질문명의 왕국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사회에서 이성을 감성으로 도색하였으며 가치를 행복으로 대체시켜 놓았습니다.



현 우리사회에는 물질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가치관, 공동체를 떠난 개인 본위의, 사회관 국적을 잃어버린 세계 시민적 자기분열과 기만, 성적무질서, 인격과 육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갖가지 퇴폐행위에의 동경, 대마초 흡연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말세적 도피풍조와 기풍등이 뿌리깊이 스며들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 세계사람들은 옳게 살아보자, 값있게 살아보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편하게, 보다 행복하게 살아볼 수 있을까 하는 차원 낮은 스펜서의 쾌락설에 만족한 나머지 영적인 것보다 감각적인 것을, 영원한 기쁨보다는 순간적인 쾌감을, 긍정적-건설적인 것보다는 부정적 파괴적인 것을, 근면 성실하게 얻는 것보다는 일시적인 빠른 수법에 의한 성공을 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풍조 하에서는 옳은 것이 옳게 행세되기 어렵습니다.

중국고사에 두 눈 가진 원숭이가 외눈 가진 원숭이 동네에서 병신 취급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같이 부지런한 사람은 우직한 사람이요, 눈치만보는 사람은 영리한 사람, 조력자는 아부자요, 방관자는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는 기이한 현상을 나타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에는 남이 표창을 받았을 때 못마땅히 생각하며 남이 성공하였을 때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그릇된 풍조가 만연되어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남이 일을 잘한다고 칭찬받았을 때 같이 기뻐해 주고 사업에 성공하였다고 할 때 경의를 표시해 줄 수는 없을까요? 그럴 때 오히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그 사람이 어떤일을 어떻게 했기에 표창을 받았으며 또 성공을 했는가 하는 것을 배우고 연구하여 자기도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해 보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말한 원숭이의 고사같이 선인, 위인, 또는 일꾼이 남의 시기와 질투 미움을 사서 따돌림을 받아 외로워지는 우리 사회가 될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면 존경을 받고 나쁜일을 하면 용납되지 않는 평범한 사회로의 복귀, 그것은 참으로 부럽고 아쉽기 한이 없는 일입니다. 토스트예프스키는 「이 세상이 나쁜 것은 내 죄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착한 일을 향하여 자기자신을 높이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온전한) 선을 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증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더욱 좋게 이끌어가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십시오. 그들이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괴로움의 길이며 자기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에 눈물이 쏟아지지 않고서는 진리의 골짜기를 보지 못할 것이며 당신의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픔을 겪지 않고서는 내면생활을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과 괴로움속에서 기쁨을 모르고는 아직 인생의 지혜에 도달치 못한 것이며, 참된 인생을 생활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바쁩니다. 그러나 내일은 더 바쁠지 모릅니다. 거기에 대한 투쟁의 과정이 인생의 나그네 길입니다. 안락과 행복은 인생에서 모든 적극성을 빼앗아 갈 뿐입니다.

죄를 범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어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무런 자랑이 될 수 없겠습니다. 우리는 유감을 당했을 때, 이를 어떻게 물리치려고 애썼으며 결국엔 물리치고야 말았을 때 어떤 감회를 느꼈읍니까? 그릇된 유혹을 물리친다 함은 100마디의 말보다 한기지 실천을 위한 행동이 보다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나에게 물질의 유혹이 뻗쳤을 때, 정욕을 불사르기 위한 불의의 찬스가 주어졌을 때, 다스리는 사람인 양 착각하고 있었을 때, 쓰디쓴 충고를 해오는 귀찮은 존재가 나타났을 때, 선악의 편갈림을 해야 했을 때, 악에 가담함으로 생기데 되는 이득 때문에 미약한 선을 짓밟아 버리고 말았을 때 등등을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한번 불의와 타협하면 두 번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듭니다. 그때에는 큰일입니다. 그래서 불의를 끊는 일엔 작은 일에라도 단호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번이라도 타협하지 맙시다! 어떤 큰 이득이 온다해도 그 단 한번이 우리들의 참된 신앙생활을 좀먹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업신여기지 말고 영혼에 해를 가져오는 일엔 타협하지 맙시다. 아무도 세상에선 벗되어 주지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고 계속 십자가 아래 꿇어 엎드립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참다운 통회로 흐느끼며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은 겉치레로 바치는 오랜 기도보다 나은 것입니다.











2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가) 소금과 빛.

                                                           함세웅 신부



오늘의 제1독서(이사야 58,7-10)는 바빌론 유배 생활 이후 새로운 다짐과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하는 새 세대를 위한 제3 이사야의 권고 말씀입니다. 즉 참된 단식이란 이웃,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그리고 억울한 형제들과 아픔을 함께 할 뿐 아니라 모두를 짓누르고 있는 억압의 권세 그 멍에를 부수어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구원의 행위로서 인간화를 위한 해방이며, 굶주린 형제들을 위한 자선이며, 온갖 시비와 질투, 모함과 얕은 잔꾀를 떨쳐 버리고 진실을 기준으로 하는 성실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께 되돌아오는 작업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신앙인의 작업, 그것은 결국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회의에 젖어들 때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이사야 예언자는 똑똑히 일러줍니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58,8). 동이 트는 새벽, 그것은 분명 새 아침을 알려 줍니다. 새로운 미래를 펼쳐 줍니다. 어둠을 걷어가고 있습니다.



단조로운 아파트 생활, 학교, 직장, 사업, 대인 관계, 때로는 복잡미묘한 관계여서 어둠과 빛, 밤과 낮도 선명치 못한 무료함 속에서 또는 시달림과 지쳐 버림, 따분함 가운데서 동이 트는 새벽녘은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해 줍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의 결단, 빛을 향하고 미래를 향한 나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결단이란 무척 어렵습니다. 음식이 굳다고 하여 누가 그냥 삼키겠습니까? 건강과 소화, 영양 섭취를 위하여 힘이 들어도 우리는 음식을 씹어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굳은 현실, 굳은 환경 이 모든 것을 씹어서 소화시킵니다. 이러한 신앙인이 곧 미래를 살고 있는 종말론적 사람입니다.



제2독서(Ⅰ고린2,1-5)는 사도 바울로께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 주신 편지의 말씀으로 내부의 분열, 교만, 자랑 등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판단 기준의 척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척도는 속담, 격언과 같은 것으로서 이론과 설명이 요구되지는 않는 그 자체로 명확하고 쉬운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Ⅰ고린 1,25)



사실 사도 바울로는 아테네에서 철학적 사변의 방법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시도했었으나 결국 실패했기에(사도행정 17장 참조)이제 코린토 교회에 대해서는 인간적 지혜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 곧 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선포하기로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것은 무슨 시귀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성실한 삶의 길, 불의에 대항하고, 독점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자아에서 탈피한 사랑과 봉사, 희생과 모험의 인물이 걸어간 발자취입니다. 그 예수는 추억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와 삶을 함께 하는 생동적 인물입니다. 그 예수의 모습, 고통과 번민, 죽음과 부활 그것은 나와 이 현실, 이웃과 이 현실 속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인은 언제 어디서나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고’(Ⅰ고린 2,5)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마태오 5,13-16)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보다 명확 간결하게 요약해 주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조미료이며 또 썩음을 방지하는 방부제 그리고 변치 않는 충성과 수절 즉 항구심과 인내를 일깨워 줍니다. 변치 않는 마음, 그것은 하느님을 닮는 일입니다. 사탄을 끊어 버리고 온갖 악과 불의를 끊어 버리겠다고 성세 땡 명백히 고백하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나 쉽게 변질되었습니다. 변질된 나, 변절한 신앙인, 그는 곧 짠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그 존재 가치가 없듯이 신앙인이 그 약속에 충실히 못한다면 결국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빛의 의미도 그 자체로 명백합니다. 촛불, 등잔불, 전등, 그 어떠한 것도 본래의 의미는 밝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가 자리잡은 그 현장에서 빛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기쁨의 빛, 구원의 빛, 웃음의 빛, 화해의 빛, 해방의 빛, 자유의 빛, 또 앞과 미래를 밝혀 주는 길잡이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빛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경우의 안타까움, 답답함, 그것을 알아듣는 우리는 그 누구를 원망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태우는 희생 제물이 되고 희망을 안겨 주는 새벽별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또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때가 되면 오는 계절의 변화라고만 생각지 말고 진정 이 사순절은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탄생의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바쁜 생활 중에 불현듯 밀어닥치는 허무감…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뛰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목적은? 결국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은? 이 끈질기고 깊은 질문들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무엇일까?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골고다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서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 봅니다.

“소금과 빛이 되어라”











3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가) 하루살이 같은 인생.

                                              함세웅 신부



요새 여름밤에 전등불 빛가로 조그만 하루살이 떼들이 몰려들어 귀찮게 굽니다. 하루는 반딧불이 어두운 밤길을 비추고 지나가는데 난데없이 하루살이 떼들한테 습격을 당해 한바탕 패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중과부적이라 너무나도 많은 하루살이들 등쌀에 반딧불은 살 수 없어서 ‘어디 두고 보자, 내일 다시 하자’ 작전상 후퇴를 하면서 휴전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자신들의 생명은 하루 이상 살 수 없는 하루살이 신세라 내일이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나게 공격하면서 ‘내일이란 뭐 말라죽은 것이냐, 우리에겐 내일이란 없다. 내일 다 무엇이냐?’ 일제히 추격전을 벌이던 중 그 내일의 먼동이 트자 추풍 낙엽처럼 하루살이 벌레들은 마지막 운명을 고하면서 ‘내일이 무엇이냐? 내일이 이것이냐?’하고 뇌까리면서 땅에 떨어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사람 앞에 그 빛을 비추라”하며 보내신 사도들이 주께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낱낱이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움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다는 듯이 하루살이 같은 인간 무리 등쌀에 날로 살아갈 수가 없게 만듭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대국의 왕이 어떤 사람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달음박질하여 달려간 만큼 자기 나라 땅을 베어 주겠노라고 명하였답니다. 남달리 욕심이 지나친 그 자는 남보다도 한 평 한 치의 땅을 더 얻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하루 종일 달렸습니다.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 그 자의 숨도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가 달려간 후에 왕으로부터 넒은 땅이 주어졌지만 죽은 그 자가 차지한 것이라곤 썩어 없어질 육신을 묻어 버릴 단 두어 발자국의 땅밖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큰 천하를 얻고도 자기 영혼이 해를 입으면, 또한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이 세상에서 무엇으로 자기 영혼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오”하고 일러주신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저녁에 고된 몸으로 쓰러질 때까지 삶의 경주장을 힘껏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고 있는 것이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우리 영혼과 육신, 생명은 어느새 죽을 때가 되어 버립니다. 그 잘 살자고 하는 것이 영원히 사는 신앙과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실로 잠시뿐인 하루살이 같은 인생살이에만 급급하다가 죽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도 하루해가 서산에 기울어지면 술집 한구석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그 하루살이 생명 같은 인생들이 독백합니다. ‘나에게도 내일이 있는가?’ 그 어느 길목이나 막다른 골목에서도 깊고 그윽한 독백만이 나로 죽어가는 운명에 소리없이 웁니다. 다만 우리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은 조그마한 소망, 의식주 걱정없이 살아가는 정도인데, 이 당연하고 절대적인 요청을 채울 길이 없는 우리 현실에서 다만 오늘뿐인데 내일의 신앙과 사랑은 또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일을 살 수 있는 생활력으로 오늘을 살 수 있는 생활 능력을 해결하자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과 사랑이 아닙니까?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은 전적으로 재력만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예컨대 한 가정에서 늙으신 부모님들이나 미성년 자녀들은 큰돈을 벌 수는 없어도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힘으로 서로의 생명력을 받아주고 재력도 이를 위하여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재력이라는 이 한 가지만으로 이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는 하루살이 같은 운명을 자초할 뿐입니다. 이 잠시 지나가는 생명이 영생으로 변해 가지 않는 다면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삶의 의미와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또 어는 가난한 신혼 부부들이 단돈 만 원밖에 안되는 결혼 반지를 축성해서 혼인 성사에 사랑의 기념으로 서로 주고 받았다고 합시다.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와 거룩히 축성된 새로운 생명과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벗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저 십자가의 사랑으로써 부정한 우리들의 제물이 사랑의 제물이 되고  영원히 사는 음식이 성체처럼 거룩히 변해 갈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에 머무는 자만이 천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4           연중 제5주일   마태 5, 13-10 (가) 빛과 소금이 되자!

                                                   최기산 주교



근자엔 건강을 위해 간기(소금기)있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식물이나 동물 그 자체에 소금기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소금을 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금으로 인해서 많은 병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는 그것이 사실일지 몰라도, 간이 맞지 않는 음식을 먹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음식을 까탈스럽게 먹는 사람에게 간기 없는 음식을 먹으라고 주면,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오각질을 할 것이다. 특히 더운 지방에서 땀을 많이 흘리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소금이 절대로 필요하다.



소금의 역할 뭐니뭐니 해도 소금의 역할은 맛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를 잡아 즉시 처리하지 못할 것 같으면, 소금을 잔뜩 뿌려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엔 산에서 캐는 소금이 사용되었다. 이는 바위 소금이라고도 하는데, 오래 전 지각변동으로 바다가 솟아 생겨난 소금이다. 사람들은 바위처럼 딱딱한 소금을 캐다가 보자기에 싸서 국그릇에 넣고 흔들어서 염기를 빼내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몇 번 사용하고 나면 염기는 사라지고, 부석부석한 돌처럼 찌꺼기만 남았다. 그것은 소금으로서의 가치가 없기에 길에다 내다버렸다. 우리나라에서 구공탄을 다 쓰고 나면 길에 내다버려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는 것과 같이, 당시 사람들은 부숭부숭한 그것을 밟고 다녔다.



예수께서는 내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진짜 소금처럼 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맛을 내주고, 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해주는 진짜 소금으로 살라하신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간기 빠진 소금이나 다름없기에 길에다 내다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빛의 역할



예수께서는 내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빛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태양은 빛의 대명사다. 태양이 없다고 가정해 보라. 식물은 탄소동화작용을 멈출 것이다. 식물이 죽고 나면 동물도 죽고, 그야말로 산천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인간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태양이 사라지는 예가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알래스카의 경우, 겨울이 되어 밤이 계속 이어지는 때면,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와 같이 빛이란 삶과 직결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요한 8,12)이라 하셨다. 내가 빛인 것처럼, 너희도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신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밝음을 제공하라신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남을 비출 수 있을까? 우리가 남을 비추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빛이 돼야 한다. 우리가 빛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선 빛 자체이신 예수님과 하나가되는 것, 예수님께 충전되는 것이 요구된다. 배터리가 다 소진되면 충전을 해야 빛을 밝힐 수 있지 않은가? 미사 때마다 예수님을 정성 된 마음으로 모시고, 깊은 묵상 중에 그분을 만나 하나가 되는 체험을 통해서 우린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충전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도 충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분과 하나되면 우리는 착한 행실을 할 수 있으며, 그 착한 행위는 남들에게 빛을 내는 것이다. 모두가 좌절할 때 주님과 더불어 기쁘게 살아가면 빛을 내는 것이다. 많은 이가 욕심으로 살아갈 때, 너그러운 마음을 보인다면 이 또한 빛을 내는 것이다.

이 세상엔 어둠이 만연해 있다. 이 어둠을 없애시려고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으나, 아직도 어둠은 계속되고 있다. 그 어둠은 이기심으로, 욕심, 미움, 시기심, 교만, 거짓의 모순을 하고 우리에게 계속 달려들고 있다. 검은 구름을 일으켜서 빛을 방해하려 한다.



복음의 메시지

우린 가정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내가 없으면 사는 재미들이 없다고 나를 기다리고,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 집이 살맛나는 집이 될텐데! 라고 가족들이 나를 길가에 내다버리고 싶어하지는 않는가? 더 나아가 우리 교회는 이 사회에, 이 나라에, 이 지구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맛을 내주는, 부패를 방지해주는 그런 존재로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남들이 우리를 빨리 질척한 길에 내다버렸으면 좋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 아야 한다,

  

우린 빛인가? 어둠으로 있는가? 남들을 환하게 비추는 빛이 될 때, 우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빛이 될 때, 우린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싸움하고 사기치고, 못된 짓을 하여 신문기사에 난, 비난받는 사람이 천주교 신자라면, 그는 간기없는 소금이고, 고장난 전등일 것이다.











5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변희선 신부



내가 예수회의 수련 수사일 때 서울 삼선교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에서 한달 동안 실습을 한 적이 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정신에 따라서 살아가는 이 수도원은, 예수회와는 달리 단순히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공동체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미사를 드린 다음, 홍차 한 잔, 빵 한 두 조각, 삶은 계란 한 개로 아침을 때우고, 하루종일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일한다. 점심은 보통 라면 한 그릇에 김치, 저녁은 국 한 그릇에 반찬 두 가지와 바람에 날아갈 듯한 밥 한 사발이다.



예수회 수련원에선 생선과 고기도 가금 먹지만, 부실한 식생활을 하다보니, 그만 치아에 이상이 생기고 말았다. 치과에서 매일 치료를 받으면서 한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사랑의 선교회 수사님들은 같은 음식을 먹고도 잘 사는데, 왜 나는 영양 실조에 걸렸나?

어느 날 기도하다가 이 의문에 대하여 상당히 그럴듯한 답을 찾아냈다.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사랑의 선교회 수사님들은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봉사하면서 사신다. 그러나 나는 상당히 복잡하게 생각하고, 복잡하게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서, 나는 왜 가난한 이들이 이렇게 많은가? 이분은 왜 가난해졌을까? 사회나 국가는 왜 이분들에게 별 관심이 없을까? 등을 골몰히 생각하면서 봉사를 했다. 그러다 보니 두뇌를 더 많이 쓰는 나에게는 영양분이 다른 수사님들 보다 더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당시에 이 수도원에는 열댓분의 구걸 능력이 없는 아저씨들과 할아버지들께서 수사님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그 중에 두 다리가 완전히 없으신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이분은 예전에는 구두닦이셨단다. 어느 날 저녁식사 후 나와 장기를 두신 다음, 할아버지께서 내게 불쑥 한 마디률 던지셨다. “변 수사님, 저는 수사님이 좋습니다. 왜냐구요? 저는 평생 동안 병신으로 살아왔고, 그래서 성직자가 못되었지요. 변 수사님도 왼쪽 손가락 두 개가 한마디씩 없는 불구자시죠. 그런데 같은 불구자가 신부님이 되신다고 하니 저도 기뻐요. 좋은 신부님이 되세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불구자라는 점이 나의 삶에서 처음으로 축복으로 느껴졌다. 불구자라는 사실이 이웃에게 희망과 기쁨을 줄 수도 있다는 점도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사제 서품 준비 피정을 하는 동안에, 두 다리가 없으신 할아버지의 이 말씀이 내 가슴 깊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내가 한 불구자 할아버지께 희망의 빛과 소금이 되었듯이, 그 할아버지도 나에게 용기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주셨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서로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신학 방법론이라고 불리는 복잡하고 어려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님의 복음과 그분의 역사하심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한다. 그러나 사랑의 선교회 수사님들은 단순하고 소박하게 주님의 뜻을 실천한다. 그리고 내가 만난 블구자 할아버지는 아직도 나에게 깊은 가르침을 남겨주시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제각기 주님의 섭리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께서 매일매일 불러주시는 나를 통해서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나 자신(眞我)이 된다는 것은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든, 내가 불구자이든,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주님의 도구(세상의 빛과 소금)로 쓰여짐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의 모습과 처지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6             연중 제 5 주일   마태 5,13-16 (가) 빛과 소금이 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8,7~10 (너의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제2독서 Ⅰ고린 2,1~5 (나는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심오한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복 음 마태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우리 자신도 세상에서 빛을 밝 혀야 한다고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우리는 당연히 그 빛을 밝혀야 합니다. 우리는 어둠 속의 신앙인이 아닙니다.

빛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고달픈 인생에게 촛불을 밝혀 주어 그들에게 힘을 주고 또 어두운 사회에 하나의 등불이 되어 밝힐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값지고 숭고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멋진 일입니다.



어떤 잡지에 보니까 멕시코의 한 수녀님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결혼하여 아이를 일곱이나 낳았으나 결국 남편과는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한 뒤에 그녀는 두 번째 남편을 찾지 않았으며 오로지 주님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기로 약속합니다.



어느 날 그녀는 이상한 꿈을 통해서 수도 성소를 얻게 됩니다. 결혼하여 이혼까지 한 여자가 수녀가 된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 입니다. 그런데도 주교님의 특별한 허가로 수녀원에 입회하는 영광 을 갖게 됩니다.



수녀가 된 그녀는 감옥에 가서 수인들과 함께 삽니다. 새로 들어 온 죄수들을 따뜻하게 받아주고 격려해 주며 그들과 똑같은 방에서 잠자고 밥도 같이 먹습니다. 그리고 점호도 똑같이 받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 그들과 고통을 나누기 위해 죄 수들의 진정한 벗이 되어 줍니다.



이 수녀님이 복도를 지나가면 모든 죄수들이 “어머니!\” 하고 애정 섞인 목소리로 불러 줍니다. 그러면 수녀님이 살인범도 껴안아 주고, 사기꾼이나 강간범에게도 얼굴에 키스를 해 줍니다. 수녀님은, 이를테면 교도소의 꽃이요 빛이었습니다.



하나의 빛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초는 불에 녹아야 하고 심지는 새카맣게 타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죽 이지 않고 내가 나 자신 속으로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아픔이 아니라 면 빛이 되지 못합니다.



소금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또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소금이 자신의 모습을 없애야만이 제 맛을 낼 수가 있고 자신의 흔적을 지워야만이 짠맛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 사는 맛을 내기 위해선 자신을 희생해 야 하며 등불을 밝히기 위해선 자신을 재로 태워야 합니다. 타는 아픔과 녹는 슬픔이 있다 해도 이웃을 위해 자신을 온전하게 내줄 때,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빛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착한 행실에서 빛이 온다고 하셨는데, 1독서에서 이사야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를 입혀 주며, 집없이 떠도는 자를 반갑게 맞아 주며 곤란한 자를 도와 준다면 그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선행보다 더 아름다운 빛도 없습니다. 따스한 눈길과 친절한 말 한마디로 훌륭한 빛이 됩니다. 마음만 먹으면 몸에서 빛이 나옵니다.



탈무드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유대인 랍비가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언제 새벽이 돌아온 줄 을 아는가?\” 그러자 한 제자가, 사람의 눈에 하늘의 훤한 빛의 줄기가 보이기 시작하는 때라고 하자, 랍비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가 말합니다. “사람과 숲을 구별하여 볼 수 있을 때 새벽이 옵니다.\” 스승은 그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대답을 못했습니다. 이때 랍비가 스스로 대답합니다. “밖을 내다봤을 때 지나가는 사람이 자기 형제로 보일 때, 그때 새벽이 온다.\”고.

이웃을 형제로 알고 대접하면 그는 늘 환한 새벽을 맞이하고 있으며 또한 그 자신의 빛을 환하게 밝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내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 로 인간에게 내주셨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빛은 퍼져 나갑니다. 자기를 내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퍼 져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빛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다 사랑합니다. 나환자, 교도소의 수인, 살인범, 흉악범 등 온갖 어두운 사람들도 다 밝힐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웠으면서도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값지게 사는 사람입니다. 값진 삶은 지식이나 돈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빛으로 참되게 영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선행이 나오고 그러면 또 우리 모두 빛이 됩니다.











7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가) 그대는 소금인가 ?

                                                    김현준  신부



밥을 짓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시작에는 밥물을 잘 맞추는 것이고, 마지막은 뜸을 잘 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요즈음 밥상에 항상 올라오는 김장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데도 중요한 것은, 시작에는 소금물에 적당한 시간 동안 절이는 것이고, 마지막은 어느 정도의 소금을 뿌리느냐에 달렸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바닷가의 우리 동네에서는 김장을 할 때 김장배추를 바닷물에서 씻어와 하루 동안 잠재우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는 오늘 복음말씀은, 지난 주일 복음말씀인 진복팔단(마태 5,1-12)에 이어지는 말씀이며, 또 다른 해석이다. 즉 세상 안에서의 사람의 역할은 소금과 빛이어야 하며, 소금과 빛이 될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금과 빛은 다름 아닌 그 역할과 기능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빛과 소금은 그 자체를 위하여 생겨나지도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빛과 소금은 다른 무엇,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빛은 사람들과 동물들의 눈을 가득히 채우는 역할을 한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하고 사물과의 올바른 관계를 측정케 하고, 크기와 색깔 멀고 가까움 등을 구별하게 하여 생활을 제대로 펴나가게 한다. 빛은 제 역할을 하려면, 그 자체로 ‘드러나게\'(마태 5,14)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빛은 자신을 드러나게 ’내어주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것이 아니다.                          



없어져 쓸모 있는 존재          



소금의 기능도 소금 그 자체를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소금의 역할은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을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이다. 소금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무엇을 위해 ‘없어져 쓸모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짠맛을 잃은 소금은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지는 것이다.


 ‘소금인형의 순례\’라는 짧은 이야기가 있다. 메마른 땅에서 오랜 순례를 끝낸 소금인형이 바다에 이르렀다. 전에 한번도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움직이고 소리나고 이상하고 새로운 무엇이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나는 바다야.\” “바다가 무엇이냐?\” “그것은 나야.\” “나는 알 수가 없구나. 그러나 알고 싶은데‥‥‥\” “나를 만져봐,\”

소금인형은 수줍은 듯이 발을 앞으로 조금 내밀며 바다를 만졌다. 무엇인가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발을 조금 들어 밀었을 때 발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니, 내 발가락은 어디 있고 너는 무슨 짓을 했니?\”  “너는 알기 위해 무엇인가 내어 준거야.\”

“도대체 바다는 무엇이지?\” 소금인형은 그러면서 더 깊게 들어갔고,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더 없어졌다. 마침내 파도가 머리부분마저 녹여버렸을 매 소금인형은 말했다. “그것은 나야.\”



그렇다. 소금은 자기의 모습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없어질수록 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소금은 자기의 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내어주어 작아지고 없어져야 한다. 다른 무엇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없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자기의 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세상은 벽돌 한 장의 희생만큼으로 벽돌 한 장이 쌓여지는 것이다. 빛으로 드러나는 만큼 세상은 밝아지는 것이다. 없어지는 소금만큼 세상은 깨끗해지는 것이다.



없어지는 연습을 하자.



소금 같은 그대 한사람이 있어 세상은 살맛이 나는 것이다. 그대, 빛 같은 한사람이 있어 세상은 온기가 도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을 내어주며 없어지는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빛과 소금처럼 다른 무엇을 위해 자신을 드러나게 내어주며, 자신이 없어지며 쓸모있는 존재가 되는 사람이다. 자기의 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없어지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다.

  

진복팔단의 “하여라\”는 선언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되어라\”는 권고로 바뀌어지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드러나게 내어주는 빛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없어지는 쓸모있는 소금이 되어라. 가정과 일터에서‥‥‥ 그대는 소금인가? 아니면, 소금 흉내만 내는가?











8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변준석 신부



언젠가 길을 건너다 본 흐뭇한 광경입니다. 한여름의 장마 끝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할머니가 중앙선에 서있는 교통경찰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할머니는 뙤약볕에서 고생하는 젊은 의경이 안돼 보였던지 피로회복제 한 병을 의경 손에 쥐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할머니의 선물에 의경도 놀라는 듯했고 그 사이 신호등은 빨간불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의경은 차량들의 양해를 얻어 할머니를 건너편 인도까지 모시고 가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며 매우 흐뭇해한 것은 물론입니다. 바로 그 모습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지친 영혼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미소가 찌푸린 얼굴에 생기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베푼 작은 친절이 형제의 지친 어깨에 보약보다 더 큰 힘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GNP가 얼마나 올랐나, 혹은 법이 어떻게 바뀌느냐 하는 일들로 세상이 밝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작 우리 사회를, 그리고 공동체를 아름답게 꾸미고 살맛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몸소 실행하는 사랑과 정의, 봉사와 정직 같은 소중한 가치들인 것입니다.

도시의 밤을 비추는 교회의 십자가가 그렇게 많아졌어도 세상의 그늘이 여전히 어둡고 암울하기만 하다면, 신앙을 가진 이들이 아무리 늘었어도 세상이 여전히 부패의 악취로 뒤덮여 있다면 그것은 빛이 밝음을 잃고 소금이 짠맛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성(眞性)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 방법을 오늘 제1독서에서 들려줍니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나오리라.”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붙인 이름이 아니라 초대교회 시절부터 이미 이방인들에 의해 불린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결국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고 이것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쟁이’라는 호칭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과 같이 오늘날에도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동시에 세상에선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통해 절박하게 요청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어 주기를, 빛이며 소금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세상에서 한 줄기 빛과 소금이 되어주기를, 제2의 그리스도, 제2의 빛과 소금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의 복음은 주님의 현존을 본받아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함을 촉구합니다.

빛과 소금,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입니다.











9             연중 제5주일   마태 5,13-16 (가) 쓰러진 소금단지

최인호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적인 미술가, 과학자이자 사상가였습니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따라서 전인(全人)이라고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비교적 말년에 그린 ‘모나리자’와 더불어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다빈치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최고의 명작입니다. 수도원의 식당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밤에 열두 사도와 함께 가진 만찬을 그린 벽화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시어 성체(聖體)와 성혈로 변화시킨 이날 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크게 놀라며 웅성이는데 다빈치는 그 한 장면을 극명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작품은 3, 4 년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이 벽화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의 정중앙에 앉아있는 주님의 얼굴과 배신자 유다의 얼굴을 표현하는 데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얼굴은 가장 거룩한 얼굴의 상징이며, 유다의 얼굴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배신자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다빈치는 밀라노에서 가장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의 얼굴을 모델로 주님의 얼굴을 완성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의 얼굴을 차례로 그려나갔습니다. 3, 4 년에 걸친 이 작업 끝에 단 한 사람 유다의 얼굴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밀라노에서 가장 잔인한 흉악범의 얼굴을 모델로 유다의 얼굴을 완성했습니다.

마침내 유다의 얼굴이 완성되던 날,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흉악범은 다빈치에게 이렇게 소리쳐 말했습니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네가 누구냐”고 다빈치가 묻자 그 사형수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몇 년 전 나으리께서 예수의 모델로 그리셨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최후의 만찬’에는 또 한 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주님을 비롯하여 열두 제자가 앉아있는 거대한 식탁 위에는 접시와 빵과 음식들이 널려 있는데 자세히 보면 소금단지 하나가 쓰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접시와 음식들은 제자들이 크게 놀라며 몸을 움직여도 모두 제자리에 있는데 오직 소금단지 하나만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엄격한 사실의 바탕 위에서 객관적인 묘사를 하던 다빈치가 그 소금단지를 그냥 우연히 쓰러뜨렸을 리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그렇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의 내부에는 누구에게나 주님의 신성과 가롯 유다의 악마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리고, 짠맛을 잃으면 영성을 잃은 유다처럼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짓밟힐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쓰러진 소금단지를 통하여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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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5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5주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제1독서 : 이사 58,7-10

    제2독서 : 1고린 2,1-5

    복  음 : 마태 5,13-16

    해설


     이 주일의 전례의 중심 주제는 연중 제3주일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빛’이다. 하지만 그 빛의 의미가 상당히 전도되고 있다. 즉 연중3주일의 전례에 있어서는 빛이 오류의 ‘어둠 속에 싸여 있던’ (마태 4,12-16 참조) 이방인의 지역에서 전도를 시작하셨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반면에 이 주일의 전례에서는 ‘세상의 빛’이 그분의 제자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오늘 전례는 ‘세상’에 대해 교회가 짊어져야 할 책임의 드높은 의미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교회론적 인식을 깊이 다루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느 정도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사람들 가운데 그분의 정체를 계속 이어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용기 있게 언행을 일치시켜 나갈 것을 강력히 요구 할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오늘 복음은 산상수훈에 뒤이어 나오면서 산상수훈과 더불어 산성설교의 내용을 보다 더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예수께서 산상설교를 하셨던 생생하고도 정확한 상황을 재현시키기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공관복음사가들이 그 가르침들을 여기저기 다른 문맥에다 흩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볼 때(마르 9,49-50;4,21;루가 14,34-35;8,16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가 그 가르침들을 산상수훈에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일이다. 마태오의 생각에 따르면 ‘마음으로 가난하고’,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그러한 그리스도 신자만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 ‘행복하다’고 하시는 그 모든 사람들의 생활은 ‘새로운 실체’ 즉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빛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으로 드러나야 한다!

      복음 내용을 보자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동경 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보다시피, 그리스도 신자의 본성이 두 가지 상징적 개념 즉 ‘소금’과 ‘빛’ – 비록 이 두 번째 개념이 내용의 주축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 – 으로 정의되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사가들이 따로 떼어서 전하고 있는 두 개념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소금’이란 보다 일반적으로 보면 ‘지혜’를 뜻하기 때문에 흔히 그리스도 신자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자신의 전교 사명을 알아듣고 실행하기에 요구되는 비판적 지적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행위는 분명히 ‘어리석은’ 행위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두 개념 사이에는 이미 어떤 관계가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아마도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어떤 외적 유사성에서보다는 소금이든 빛이든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기능적 ‘상대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소금의 기능은 소금 그 자체를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소금의 기능은 오히려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물을 썩지 않도록 보존하고,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맹을 맺는 데도 소금이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분명 이 모든 내용을 아시고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땅(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세상’이라고 번역되고 있음)의 소금이다”(13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땅’이라는 개념은 그 다음에 나오는 ‘세상’(14절)과 일치하는 말로서 온 세상 즉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을 위한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점에 있다. 하지만, 만일 우리 크리스찬들이 어떤 놀라운 행동들이나 이상한 태도들을 취하려 하기보다는 일상적인 태도와 항상 반복되는 평범한 무수한 행동들을 통해 각자 각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사랑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것이 곧 모든 것에 새 ‘맛’을 주는 것이 아닐까? 고통 중에서도 기쁨과 평온과 만족의 씨를 뿌리고 선함과 이해의 향기를 뿜어내는 그리스도 신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치 우리 모두가 매일 매일 준비하는 여러 가지 음식물에 미묘한 맛을 내듯이 모든 일에 있어서 순수하고도 담백한 ‘맛’과 ‘의욕’이 되살아나게 할 것이다.

      소금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맛을 내기 위해서 사용되기 때문에 짠맛을 잃게 되면 쓸모가 없게 된다 :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13절). 그런데 천연 소금이 맛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 일이 바로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비극적으로 일어 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을 복음에 뿌리박게 하는 구원의 맛과 그 구원을 전파할 능력을 온전히 간직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빛’의 상징적 개념은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쉽고 또한 구체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것은 보조적인 짧은 두 개의 비유에 의해 보다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 “산 위에” 놓여 있어 드러나게 마련인 마음의 비유(아마도 이사야서 2,2-3의 내용을 따르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와 됫박으로 덮어두지 않고 동경 위에 얹어 집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비추게 하는(15절) ‘등불’의 비유가 그것이다.

      여기서도 강조점은 빛의 ‘상대적’ 기능에 있다 : 빛은 오직 그 자체를 위해서 생겨나지도 또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빛은 사람들과 동물들의 눈을 가득 채우는 역할을 한다. 만약 그들이 서로 간에 보지 못하고, 사물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측정하지 못하고 또 멀고 가까움, 주위 환경, 크기, 색깔, 길 등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제대로 펴나갈 수가 없다.

      빛도 제 기능을 하려면 빛 그 자체로 드러나 있어야 한다. 가두어 두거나 됫박으로 덮어두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어 생명과 기쁨 그리고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물리법칙에 의해 빛이 가공할 속도(광년을 생각해 보라!)로 빛을 발하며 퍼져나가듯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온 세상에 빛을 비추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산 위에 있는 마을’(14절)에 다 시선을 모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하느님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포기해서는 안 될 자리를 마련해주신 것이다.

      오늘 복음은 결론으로 우리가 온 세상에 어떠한 빛의 증거를 보여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있다 :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 그 자체보다는 ‘행실’을 통한 증거를 보여주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이란 문맥 전체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우리가 언급한 바 있는 산상수훈의 정신에 따라 하는 행실을 말한다. 즉 가난,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 중에도 평온을 잃지 않는 마음 등으로 사는 태도를 말한다. 세상은 이러한 ‘행실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사실,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적 지혜와는 아주 거리가 먼 그러한 행실들을 행할 빛과 힘을 주실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영광’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16절)께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전교사명이 드높이 강조되고 있다 : ‘소금’과 ‘빛’이라는 존재 자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에 봉사하고 또한 그 자체의 강한 생명력과 사랑의 증거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빛’자체를 자신의 모습을 통해 세상에 비추어줄 수 있고 또한 ‘구원의 보편적 성사’(「교회에 관한 교회의 헌장」, 1. 48 참조)로서 인식 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어라”


     이사야서에 의한 제1독서도 ‘행실’에 의한 증거를 보여줄 것을 아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 행위를 온통 단식, 예식, 고행 등으로만 일관했던 의식주의를 반대하며 사랑의 수위성을 강조한다.

      “이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너희 상처는 금시 아물어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하는데 야훼의 영광이 너희 뒤를 받쳐 주리라…너희 가운데서 멍에를 치운다면, 삿대질을 그만두고 못된 말을 거둔다면,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 주고 쪼들린 자의 배를 채워준다면,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이사 58,7-10)

     우리는 지금 몇 가지 대표적인 ‘자비의 행위’ –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이 자비의 행위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 를 접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도 우리는 두 번이나 ‘빛’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대하고 있다 :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8절, 10절). 뿐만 아니라 그 개념의 농도가 짙어지고 있다 : 처음에는 그 빛이 터져 나오고 있고, 그 다음에는 대낮같이 밝게 빛난다.

      하지만 그 빛은 사랑의 행위로부터 생겨난다 : “너희 가운데서 멍에를 치운다면…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사랑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 : 사랑이 폭발하고 입증되고 받아들여지고 확신을 주게 될 때 그 사랑은 모든 사람을 뜨겁게 하고 비추어주는 불꽃이 되며 또한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된다. 그래서 “야훼의 영광이 너희 뒤를 받쳐 주리라”(8절)고 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의 교회는 너무 지나치게 의식과 전례와 성사 위주의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가장 아름다운 역사를 펼쳤을 때의 교회의 모습 즉 다른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는 ‘사랑의 교회’로서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사랑의 교회의 모습을 되찾는 것, 이것이 특히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향해 요구한다기보다는 간청하고 있는 수많은 봉사의 기회를 통해 재발견해야 할 교회의 소명이다. 그렇게 하면 교회에도 ‘그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그의 어둠이 대낮같이 밝아지게 될 것이다’(10절).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소명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항상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그 메시지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면 된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로는 자기들에게 일종의 영신적 도취 내지는 열광을 불러 일으켜주었던 ‘은총의 선물’, 또는 ‘카리스마’를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했던 고린토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1고린 2,1-2).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바로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진 사랑의 선포요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선포이며, 그 ‘나약하고’ ‘무기력한’ 행위로부터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1고린 2,4 참조) 온 인류에게 증거해야 할 가장 큰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 5 주일

    제 1 독서 : 이사 58, 7-10

    제 2 독서 : 1고린 2, 1-5

    복     음 : 마태 5, 13-16


    제 1 독서 :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직후에 제3이사야(제2이사야의 제자로 추정됨)는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한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을 일깨우며 참된 단식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유배에서 돌아온 직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교적인 실천을 완수하려 애썼다. 특히 단식에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반대 급부를 바라고 단식했으며 그런 반대 급부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서 불평을 했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참된 단식이란 외적 태도에 있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묶인 사람을 풀어 주고, 굶주린 이웃과 양식을 나누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피하지 않으며, 악담과 시비를 그만두는 것이 참된 단식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문제 제기와 대답이 즈가리야 7장에서도 등장한다. 결국 종교적 실천의 내면화, 영성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제 2 독서 :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에서 그 당시 최고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수사학을 총동원하여 복음을 설교(소위 ‘아레오파고 연설’)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사도 17, 16-34 참조). 아마도 이때부터 바오로는 인간적인 기교의 헛됨을 깨달았을 것이다.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존해야 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을 것이다.

    바오로는 아테네에서 실패한 후, 고린토에 와서는 아주 단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고, 가난함과 겸손을 증거하며 ‘어리석은 복음’을 설파했다. 지혜로운 슬픈 소식이 아니라 어리석은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 주는 절정성, 사랑의 어리석음을 말해 준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어리석은 사랑의 표현이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는 것이며,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바오로는 바로 이 어리석은 십자가를 고린토 교회에 선포했던 것이다.


    복    음 : 진복팔단을 설파한 직후, 마태오는 곧이어 하느님 나라의 참된 증인에 대해서 언급한다. 참된 증인이란 자기의 삶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이 소금인 것은 짠맛 때문이듯이,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전해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여기서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한다(마태 4, 16; 루가 1, 79; 2, 32 참조).


    빛이 되라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 마태오 복음 5, 13-16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빛은 어둠을 밝히고 소금은 음식의 맛을 짜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입니다. 여기서 어둠이란 단순한 물리적 어둠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하고 사람들에게 고통과 혼란을 가져오는 온갖 악과 악의 세력들을 말합니다. 소금은 우리 사회에 꼭 있어야 할 필요한 존재나 일들을 가리킵니다. 즉 사랑․기쁨․평화․행복․나눔․우정 등 사회를 흐뭇하게 하고 밝게 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없다면 음식의 간을 맞출 수 없는 것처럼, 소금과 같은 소중한 것들이 우리에게 없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는 삭막하고 황폐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빛과 소금의 의미는 우리 생활의 일대 변혁을 촉구하는 것으로 많은 묵상 소재를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태초에 혼돈과 어둠의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시어(창세 1, 3) 빛이 온 세상을 비추도록 하셨습니다. 주의 봉헌 축일의 말씀에서도 시메온 예언자는 예수를 가리켜 이방인들을 밝히는 ‘구원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엄청납니다. 이제 빛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 빛이란 무엇인가는 태우는 데서 나옵니다. 태양의 빛은 태양 안에서 타고 있는 물질에서 나오고 촛불은 초를 태움으로써 나옵니다. 그 밖의 종이나 나무나 탄이나 그 어떠한 물건을 태울 때도 당연히 불빛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서 없애버려야할 것을 모두 태워야 합니다. 우리를 어둠 속에 묻히게 하는 것들, 이기심과 독선․편견․아집․미적지근한 마음․불친절․시기․질투 등을 태워 없애야 합니다.

    둘째, 빛은 어둠을 갈라놓습니다. 그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더 뚜렷이 어둠이 갈라집니다. 어둠이 더 뚜렷이 드러나게 되면 진실과 정의가 밝혀집니다. 여기에서 이중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양다리 걸치기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셋째, 빛은 뜨겁게 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빛은 열을 내기에 주변을 따뜻하고 훈훈하게 만들어 줍니다. 헐벗은 형제들에게 옷을 입혀 주고, 먹을 것이 없는 이에게 먹을 것을 주며, 집 없는 이들에게 잠자리와 숙소를 제공하는 일들은 우리 모두를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빛은 잘 볼 수 있게 합니다. 어둠 속에서는 적당히 넘어갈 수 있고 술에 취해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밝은 대낮 같은 환함 속에서는 세세한 것까지 잘 볼 수 있어 시시비비를 명백하게 가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금같이 부패하고 썩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섯째, 빛은 생명력을 주는 동시에 성장케 합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요한 12, 46)라는 주님의 말씀은 빛이 바로 생명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도 캄캄한 영창, 깊은 구렁 속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구하여 주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빛은 온 누리에 퍼집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곳까지 퍼져 나갑니다. 즉 그리스도의 빛이 온 누리에 퍼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는 이 빛은 한군데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온 누리에 퍼져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빛 속에서 살거나 빛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선함, 그 자체로써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말로만의 신자가 아닌,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맞부딪치면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보다 냉정하고 날카롭게 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참빛이 되고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신앙적으로보다 성숙해지고, 열정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도 진실과 정의에 입각한 고통받는 예언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빛이 되는 길입니다. 스스로 진취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참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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