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예수님 부활 대축일 강론 모음

 

28.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오늘은 온 세상에 위대한 기쁨을 가져다 준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온 세계의 사람들이 부활을 축하하며 새 옷을 갈아입습니다.

2000년 전 성 바오로 시대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중으로부터 부활하심을 축하하여 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웃음을 머금고 새 음식과 술로 잔치하였습니다.



성 바오로는 “좋다. 너희 구원의 날을 마음껏 축하하며 잔치하라. 그러나 올바르게, 그리스도교적인 방식으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려면 죄와 악의와 악행을 버려야 하며, 이 축하를 재미로만 여기며 명백한 죄악 상태에 있는 사람은 참가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성 바오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해 성실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실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묵은 죄의 빵껍질 즉, 죄를 던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새로운 빵 즉, 성실함과 진실함의 빵을 먹기 시작해야 한다고 바오로는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기원 1세기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진실과 성실에 관해 천주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1970년의 부활절에도 천주께서는 그와 같은 것을 요구하고 계실까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새 옷과 좋은 음식으로 부활을 축하하면서도 그 핵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성도들과 교유(交遊)하기는 쉽지만 아직도 자신의 죄에 공공연한 혹은 감추어진 죄의 생활에 젖어 있으면서 부활의 의의를 진실로 축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인사를 하고 입맞춤을 하고 나서 행동으로 배반하는 것이 그리스도 시대의 위선이었습니다. 한편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감사하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내에서의 부정(不正)과 불의(不義) 등 죄악을 못 본 체하는 것이 바오로 시대의 위선이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의 부활절인 오늘 그리스도께서 알렐루야를 노래부르면서도 악의와 악행에 머물러 있는 것도 위선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부활날 여러분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 볼 때 거기서 여러분의 그리스도교적 생활에 어떤 불성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리라고 믿습니다. 사제인 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대해 충분한 성실성과 진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천주께서 오늘 성 바오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잔치하되, 묵은 누룩과 악의와 악행의 누룩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성실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빵으로 할지니라”고. 오늘 미사 중에 천주께서 여러분에게 진실성과 싱실성을 고취시키실 때 천주께 대답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신경에서 신앙을 고백할 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나이다”라는 대목을 각별한 정성을 가지고 외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여러분에게도 참 부활이 되도록 하십시오. 부활은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없이하고 여러분에게 진리와 그리스도교적 생명의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중으로부터 부활하셨음을 믿는다고 여러분은 수천 번 신경을 외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많이 왼 신경에 대해 성실하고자 한다면 오늘 미사 때에는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신경을 외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제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 바오로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리스도 부활하시지 않으셨으면 너희 신앙은 헛된 것이니라”고.



여러분은 성실한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오늘 이 미사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죄와 나의 죄와 세상의 죄를 위해 지금 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 미사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빵을 먹음으로써, 묵은 빵껍질인 죄를 던져 버림으로써 여러분의 성실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던져 버려야 할 죄의 껍질은 “오류와 허위”에 대한 묵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양심이나 게으른 양심에 속으면서 부활을 잘못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내가 옳다고,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것은 옳고 진실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의 양심이 정당하고 진실하고 성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최고의 권위로부터 배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면서, 신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 항상 진리를 추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저 유행과 소문과 의견에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른이 된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오늘 부활절을 맞아 영세 서원을 새롭게 합니다. “성실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으로 잔치하라”는 성 바오로의 유명한 말씀 속에는 이러한 서원 재신(再新)과 부활의 기쁨이 반반씩 들어 있습니다.







29.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거룩하다 부활이여 기쁘도다 알렐루야 예수 부활 아니시면 구속사업 헛되도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세계만방에 울려퍼지는 부활의 찬가를 들으며 마음으로부터 부활의 영광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영광과 기쁨은 어느 특정 인물이나 개인의 기쁨만이 아니요, 전 인류의 기쁨이요 만백성의 기쁨이며 인류역사가 시작한 이후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인생들이 마땅히 누리고 만끽해야 할 영광이요, 기쁨이기에 더 더욱 그 신비의 비중이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복과 영생에 관한 것이요 우리 인간의 최대 욕망인 영원 무궁한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그 신비를 잠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 인간이면 누구나 한 번은 꼭 맞이해야 하는 죽음, 그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세상과 인간의 역사를 깜짝 놀라게 한 기이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이 믿지 않으면 안될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과 규범과 인생의 최종 목적과 갈 길을 찾아 얻으며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와도 같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 함수를 속시원히 풀 수 있는 성서! 이를 일컬어 인류의 서적이라고도 하며 또한 그 역사성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멀지도 않은 2000여년전의 사실! 그 성서의 구구절절이 이어지는 부활의 역사성은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6장 1절부터 12절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이런 증언이 있습니다. “겁내지 마시오. 당신들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보시오,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입니다…” 성서의 역사성을 인정한다면 이 내용 역시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 그리스도의 부활은 멸망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구원에로의 참된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과 멸망의 이정표인 것입니다.



인류의 죄악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인간! 죽어 땅에 묻힘으로 썩어야 하는 인간의 육체, 그래서 인간은 멸망의 심연 속에서 울고 통곡해야 했으며, 슬픔과 괴로움의 역사를 엮어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정녀 몸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제2의 아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아닌 사랑 때문에, 인류에 대한 당신 사랑 때문에 돌아가셨다가 당신 예언대로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멸망과 구원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방향을 똑똑히 지시해 주셨고, 실망과 괴로움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다 주셨습니다. 빵의 기적(마태오 14.13 ; 마르코 6.30) ; 나병환자의 치유(마태오 8.1 ; 마르코 1.40) ; 소경의 완치(마르코 8.23 ; 루가 18.35) ; 반신불수의 완치(마태오 9.1)등 무수한 기적과 영적으로써 인간의 굳은 마음을 풀어주시고 차가와진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려 무진 애를 쓰셨지만 사리사욕과 세속에 굳어져 무거워진 인간의 마음은 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신과 의혹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랑에 굴복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들을 그대로 보실 수만 없으셨기에 사랑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적으로 우리 마음에 불을 놓으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기재했습니다. “당신들은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받을 것입니다”(16.15).



셋째 : 고도로 발달된 현대 인간의 문화 문명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구원에로의 참된 길을 가르쳐 주는 믿는 마음, 즉 신앙심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노예, 금전의 노예가 된 현대 인간의 오만 속에 신앙의 씨는 시들어가고 불신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요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의 신비야말로 신비답게 전개되어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지식과 지력을 정복하여 믿음을 뒷받침해 주고 부활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전능을 드러내 주고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눈물의 골짜기, 멸망의 깊은 구렁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영광에로의 희망과 기쁨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던들 구속사업도 헛되었을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의 이 즐거움과 기쁨을 세계 만방에 떨쳐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을 여기에서 찾았고, 우리의 행복과 영생을 부활에서 얻었으며 전인류의 구원을 이제는 발견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무한한 영광과 찬미를 드리며, 알렐루야 소리높여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30.     부활 대축일 루가 24,1-12 (다)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나

                                         – 김정진신부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입니다.”(요한 11:26).

알렐루야 알렐루야! 신자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이며 경사로운 날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속죄하시기 위하여 제물로 희생되시어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죄악과 죽음은 멀리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의 나라가 펼쳐지고 새로운 천지가 전개됩니다. 이 날은 정녕 하느님께서 주신 날이니 우리는 모두 기뻐하며 용약하며 경축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바탕이요 핵심이입니다. 예수님이 만일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신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헛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히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부활도 보장되는 것이며 부활과 결부되는 형극의 길, 고통과 십자가의 길에서 헤매이는 우리에게 필연코 커다란 희망과 행복 그리고 평화의 나라를 굳게 약속해 주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는 방방곡곡에서 부활의 종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치는 가운데 수많은 선남 선녀들이 경건히 합장하고 우리 주님의 부활을 마음껏 구가하며 경축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에 본당 신자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오늘의 부활절을 가장 기쁘고 성스럽게 지내기 위하여 마음의 준비와 정신적인 가다듬음을 게을리 하지 않은 점으로 오늘의 기쁨과 환희는 최절정에 달하리라 생각합니다.



신자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는 정녕 죽으셨고 또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정녕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공적 장소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미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묻기 전에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할 책임을 진 한 병사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 때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만에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으며 또 오백명이 넘는 교우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Ⅰ고린 15:5-6). 그래서 그들은 자기네들이 본 것을 증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이러한 사살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확신을 지니고 설교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문명 세계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불과 삼세기 동안에 수 백만의 신자들이 부활에 대한 신앙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선포하여 눈부신 발전을 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단지 이쳔년전에 있었던 하나의 역사의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어 바로 현재 이 시간에 우리 가운데, 우리 교회 안에 또한 세계와 그 역사 속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 각 개인 안에, 각 가정에 살아계시며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우리 가정을 성화시키시며 우리의 구원을 가져오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참뜻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에로 소생하는 것이며 새 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생활양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미신자들의 생활양식이요, 둘째는 이름 뿐인 신자들의 생활양식이며, 셋째는 진실한 신자들의 생활양식입니다. 첫째 미신자들은 너무나 속이 텅 빈 생활을 하고 있으며 마치 허공에서 행복을 미친 듯이 찾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금전에서, 세도에서, 오락에서, 때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해를 끼치는 자극성에서, 하찮은 기계장치와 물건에서, 보잘것없는 경쟁에서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생활은 만족스럽지 않고 죽음은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무섭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 진정 부활하여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다음 이름뿐인 신자들은 하느님과 동시에 금전을 섬기려고 하고 이 세상 것도 갖고 또 하늘나라도 차지하려고 하며 십자가는 멀리하면서 영광의 관은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죄악 중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편한 대로 이따금 교회에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자기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이들은 오늘 영신의 부활을 이룩하며 새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실한 신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부활하려면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활한 백성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명에 부활한 백성임을 언제까지나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멘.















31.                 부활대축일 요한 20,1-9      부활하신 예수

                                         최재용 신부





무덤이 비었고 영웅은 살아났습니다.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마르코 16, 6) 오늘 이 중대한 소식은 전세계 방방 곡곡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소식은 인간의 중대사의 해결을 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인류 역사의 큰 신비를 깨닫고 인간 삶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성화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면 이는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드러낸 것이며 우리 또한 영원한 삶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존재가 증명되었고 우리의 인생가치가 영원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Ⅰ고린 15,14). 고린토 신자들에게 엄숙히 선언하신 사도 바울로의 이 말씀은 오늘에 와서도 중대하며 크나큰 위로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의 승리 생명과 죽음의 싸움 그리스도께서 고통과 죄악을 쳐이기신 후에도 또 쳐이기셔야 할 마지막 적인 이 죽음 그러나 모든 기적 중에 가장 크고 가장 결정적인 기적 즉 부활로서 그 죽음을 쳐이겨 내셨습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이 어디 있느냐? ”(Ⅰ고린 15,55). 이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기 위한 한 단계요 과정일 뿐입니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 산 이와 죽은 모든 이가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죽은 자들의 시체가 하나의 높은 피라밋을 이룬다 해도 그 봉우리는 부활한 자의 깃발이 힘차게 나부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잇고 예수님과 함께 나도 살아 있습니다.” 어둠을 이긴 빛의 승리가 찬연히 빛나고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이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 보시오. 사흘 안으로 내가 다시 세우겠소.”(요한 2,19) 그리스도는 이 믿음 속에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이제 모든 고통과 수난 속에 빛이 비쳤습니다. 그 고통은 고통으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영원한 삶의 필요한 단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세상사 모든 괴로움을 그리스도가 값있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삶의 가치와 고통과 미래의 의의가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이 삶의 고통의 의의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요한 12,25)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미움을 이긴 사랑의 승리, 오늘 승리의 날 예수 부활은 승리의 경축입니다.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4) 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이겠습니까? 이 큰사랑으로 예수님을 잡아죽인 유대인들의 그 증오는 그로써 끝을 맺고 이 증오는 사랑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제는 사랑의 개선가만이 울려질 뿐입니다. 이 사랑의 불은 벌써 힘차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무덤을 찾던 제자들은 그 무덤에서 시체가 아닌 위대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매를 맞고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음을 당하신 후 살아 나오신 예수님의 그 음침한 무덤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사랑의 우물이 되었습니다.



“내게는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내게는 이득이 됩니다. 나의 희망은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필립비 1,21-23). 이로써 인간의 최대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왔습니다. 당신은 개선하신 왕이시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활하신 예수여 당신은 생명과 죽음의 주권자 되시니 만물이 당신께 환호성을 올리나이다.















32.                   예수 부활 대축일 (나해)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10,34a.37~43 (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제2독서 골로 3,1~4 (그리스도께서 천상에 계시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 하십시오) 

복 음 요한 20,1~9 (예수께서는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역사를 두 쪽으로 가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 오시기 이전의 시대를 B.C.(BEFORE CHRIST)라 하고 이후의 시대를 A.D.(ANNO DOMINE : 주님의 해)라 합니다. 그것은 역사뿐만이 아닙니다. 인류의 삶 전체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위대한 힘이 바로 당신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새로운 탄생입니다.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인해 세상은 진정 다시 태어났으며 모순과 악의 세계에서 진리와 은총의 세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실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선 것이며 어둠과 모순 속에 묻혔던 세상의 수수께끼들은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세상은 사실 모순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 착한 이들이 자주 고통 을 받으며 왜 악한 이들이 자주 떵떵거리는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더구나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으며 \’죽음\’ 이라는 무서운 세력 앞에서 인류는 참으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무너졌으며 세상의 어떤 생명도 이 두려운 존재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죽음은 실로 세상의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은 세상의 모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친히 죽음 속으로 들어가시어 그 세력을 꺾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음은 이제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은총의 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부활로써 세상을 건지셨습니다. 죽음에서 건지셨고 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일행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을 때 예수의 시체는 없고 천사가 거기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는 질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천사가 말합니다. “겁내지 말라.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나 여자들은 무서워 벌벌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쳤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도대체 사흘 동안 완전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인류를 깜짝 놀라게 했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예수의 부활과 그의 놀라운 행적에 대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래 그는 무식하고 믿음이 약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사회 교육을 제대로 받은 자도 아니었고 예수님 밑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쌓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더더구나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었으며 자기 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시킬 수 있는 수준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무식한 베드로가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백성에게 전도하며 그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부활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제자들의 증언을 믿고 우리도 그 놀라운 사건을 바로 내 것으로 받아들여 삶에 실천함으로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부활의 삶이요 또한 의무요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미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믿어도 어정쩡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성당에 다녀도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갈등과 착각 속에서 고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자들은 오로지 현실만을 중요시합니다. 지금 당장 잘먹고 잘사는 것에 축복의 기준을 맞춥니다. 그러니까 믿음 속에서 회의만을 갖게 됩니다. 신앙이 그렇게 된다면 비극입니다.



어떤 형제가 세례받은지 5년이 되었으나 거의 냉담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는 물론 기도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앙을 성가시게만 생각했습니다. 이 친구가 한번은 자기 동료가 암으로 죽는 것을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아주 열심하게 되었는데 연도회에 들어가서 봉사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삶에 은혜가 충만하게 되어 새 인생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서 부활신앙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나날이 체험해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개선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미리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은혜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신앙을 세상에 증거 하도록 합시다.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신앙의 기쁨을 가지고 삽시다.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 안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33.          예수 부활 대축일 (다) 절대 희망인 부활

                                                     홍금표 신부



「예수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부활의 큰 기쁨과 축복이, 가톨릭신문 독자들과 독자들의 가정에 함에 하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한번씩은 뜻하지 않는 사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이라면, 우리는 그 앞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사람들, 특별히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랐을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과 같은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분의 죽음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당시 현장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았을 제자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아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 그분을 믿은 것은 우리의 실수요, 우리가 가졌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고.」 

  

사실 제자들은 낙담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들이 아니라, 평소에는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동경하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그리고 정이 많은 몇 명의 여자들만이,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 지내게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가졌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났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이고 놀라운 일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겁 많고 우매하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비겁하게 도망쳤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그리고 그분을 살아 있는 분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고,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은 이 사실을 입으로만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포를 위해 가장 소중한 그들의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앓으면서, 그 진리를 증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그들의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가지도 아까워하지 않게 만들었을까? 과연 무엇이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와, 예수님의 죽음 이후, 그토록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 놓았을까 ?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을 목격하였기에, 이 놀라운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고, 부활이 있었기에, 절망의 제자들은, 희망과 용기의 사도들로 변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이란,「완전한 절망에서, 절대 희망을 안겨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즉, 사람들로부터는 버림받고 단죄 받아 완전한 실패로 보이는,「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 예수님의 삶」이, 하느님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랑의 삶이 인류의 영원한 이상인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절대 희망」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는, 절망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렵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희망할 수 있고,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과 고통, 아니 죽음까지도 이제 부활 때문에 그 의미를 가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이 부활의 희망을 선포하는 이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자리는 그렇게 희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인류가 개발한 가장 고상한 가치인 사랑과 박애, 자비가 더 이상 삶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경제의 논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특히 한국사회는 제2의 경제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의 고통과 세계화란 미명 속에서 더더욱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실패와 절망인 십자가의 죽음 속에서 인류의 절대 희망인 부활이 잉태되고 열매 맺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비록 현실이 부조리하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여전히 우리가 꽃피워야 될 희망의 씨를 보듬고, 그 희망을 꽃피우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 의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신 한번 부활의 큰 기쁨과 희망이 독자 분들과 가정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34.        예수 부활 대축일 (루가 22,14-23, 56)(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용서하자 

                                                         신은근 신부





오늘은 부활주일, 사순절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순절 없는 부활이 어디 있겠는가. 부활이 열매요 꽃이라면 사순절은 뿌리다. 보이지 않는 뿌리다. 건강한 뿌리에서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나타나듯 사순절의 삶이 부활의 은총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부활과 사순절은 하나의 흐름이다. 사순절의 연장선에서 부활절을 맞이해야 한다.



부활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죽음에서의 해방과 승리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이에게 죽음은 더 이상 속박이나 두려움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이 끝나는 것만이 죽음은 아니다. 살다 보면 죽음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인간적 상황이나 주어진 환경이 그렇게 만든다. 죽음보다 더 힘든 삶이다. 부활의 은총은 이런 사람에게 먼저 요구된다.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힘이 부활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정지다. 주어진 상황에서 포기와 체념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 역시 죽음과 같다. 예수님처럼 부활해야 한다.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렇게 하라는 것인가. 사랑과 용서다. 다시 사랑하고 새롭게 용서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렵다.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갈수록 사람들은 소유하려 든다. 모든 것을 소유의 관점에서 판단하려 든다. 불안해서 그럴 것이다. 떠나가면 어쩌나 배반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럴 것이다. 사순절 동안 우리는 절제를 연습했다. 먹고 싶은 것을 참았고 하고 싶은 것을 억제했다. 외적 행동을 통해 내적 변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시 사랑하려면 소유의 관점을 버려야 한다. 사순절 동안 체험한 극기와 희생은 소유의 관점으로 향하는 본능에 제동장치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에 대한 바른 인식은 필요하다. 그 사랑을 이웃 안에 실천한다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예수님은 사랑을 위해 부활하셨다.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작을 결심해야 부활의 은총은 살아 움직일 수 있다.



은총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은총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참된 변화는 언제나 가능하다. 부활의 다음 은총은 새로운 출발이라 했다. 용서의 출발이다. 용서를 체험하면 인간은 변화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다는 이 행위를 체험하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용서에는 하느님의 힘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순절 동안 절제를 연습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성주간 예절에서 핵심적으로 강조되었던 내용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죽어야 용서가 가능해진다.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기해야 용서는 가능해진다. 이것을 새롭게 출발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신비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 그리고 이 신비를 생활 속에 실천하며 은총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고 교회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제정했다. 복음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놀란다. 무덤에 갇히실 예수님이 아님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미사 때마다 모시는 성체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남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그러니 먼저 내 자신이 부활해야 한다. 사랑의 부활을 해야 한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내가 내 삶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남을 용서할 수 없다. 사랑과 용서의 부활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5.           부활 대축일 마태 28,1-10 (가)

                                   갈릴래아로 먼저 가시리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



만물을 소생시키는 화창한 봄철과 함께, 죽음에서 생명으로 약동하는 이 대자연과 함께 우리 교회에도 쓸쓸하던 40일 봉재성시(封齋聖時=사순시기)는 지나갔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수난의 산정(山頂)을 오르던 그 어둡고 비극적인 사순절이 지나가고 더 없이 즐거운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오늘부터 “하느님의 백성” 교회가 있는 곳 어디든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알렐루야 기쁨의 노랫소리가 하늘에 메아리 칠 것입니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으니 즐거워하고 용약합시다.



예루살렘을 위시하여 방방곡곡에서는 예수님을 박사로, 예언자로, 기적자로 환호하였습니다. 그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턱없는 광란과 포악성으로써 예수를 추적하여 그 언행을 비꼬고 트집잡고, 심지어는 신전에서까지 돌로 쳐 죽이려하더니 기어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당신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이 사형을 당한 것은 저들의 재판으로 인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늘에 계신 당신 아버지의 의향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 입증되었고, 예수는 패자로서가 아니오 승리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가 아니오 생명과 죽음의 권을 가진 하느님으로서 죽음을 당하셨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는 아직도 모든 것은 불행하고 비탄에 잠겨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왜? 이스라엘과 세계를 구할 모든 이의 희망이었던 메시아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의인이시라는 사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까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빌라도’는 그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발견치 못하였습니다.



바리사이와 백성들의 지도자들의 질투와 미움이 이 의인의 죽음을 강요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 시행의 공정을 자랑삼던 로마제국의 고관도 자기의 정치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불의와 타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도 인간사회에서 흔히 경험하는 비극은 되풀이되었습니다. 정의와 진리, 선의와 사랑이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오히려 불의와 허위가, 간계와 증오가 다시금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정녕 죄없이 죽었고 동시에 진실 된 삶의 보람이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과연 육중한 반석으로 굳게 닫혀진 그 무덤, 그 암흑의 심연에서 어떤 빛이 생명이 소생하리라고는 기대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와 불가지가 지배하는 곳이요 죽음이 일체를 삼키는 최후의 승리자로 남을 것 같이만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워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처형을 당하셨고, 더구나 그 일이 있은 지도 벌써 사흘째나 됩니다”(루가 24,21)라고 엠마오로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들이 토로한 그 실망에서 그들의 허무감이 단적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10,34)라고 한 스승의 예언을 전혀 잊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부활을 확신하기에는 그들의 신앙은 너무나 약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믿기에 얼마나 느린 자들이었는지 그 후의 복음의 이야기들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도마의 이야기입니다.(요한 20,24-29)



하지만 인간의 지혜가 무엇이냐? 땅에 떨어져 썩은 한 알의 밀씨에서 어떻게 백배의 결실이 낳게 되는 지도 모르는 인간의 지혜가 무엇이냐? 왜 사람이 살고 왜 사람이 죽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궁지가 무엇이냐 말입니다.

삶을 다스림과 같이 죽음을 다스리는 이는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그리스도는 죽었고 또한 영영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다스리는 하느님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살아 계심을 인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잊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모든 것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신비를 몰랐습니다.



그리스도 못박힐 때와 같이 현세 인간 사회는 너무나 자주 선보다도 악이, 정의보다도 불의가, 진리보다도 허위가 지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같은 사회에 있어서는 현대 실존주의가 주장하듯이 인생은 부조리로 밖에 판단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항구적인 것, 불멸의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삶 전체가 덧없고 허무하다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부정의 철학, 이것이 현대인의 허무주의적 인생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는 부활하였습니다. 바로 그 같은 선의와 진리와 사랑이 부정되고 유린된 자리에서, 오직 허무와 절망만이 지배하는 암흑에서 그는 어두움과 죽음을 쳐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의 인간사회는 악과 불의가 득세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은 실로 인생과 그 역사에 의미를 다시 부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의 의미 자체이라고 누가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선의, 무엇보다도 진실된 사랑이 부정적으로 끝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날 뿐 아니라 가혹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철학자도, 어느 사상가도, 그리스도 아닌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여기에 대한 절대적인 해답을 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의 가르침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에 대한 완전하고 긍정적인 답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그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알려주었고 또한 길이요 진리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같이 모든 것 위에 승리하고 죽은 모든 것도 불멸의 생명으로 소생시키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임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우리의 완전한 희망입니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이를 빼앗아 갈 수 없고, 누구도 지울 수 없는 불멸의 희망입니다. 교회에서는 지난 사순절 시기에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육신의 쾌락, 안목의 쾌락, 사치하고 부도덕한 생활 주변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단식하며 절제하고 희생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고복(苦服)을 입고 보속의 생활을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유는 부활이 우리의 완전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36.        부활 대축일 마르코 16,1-8 (나)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김정신신부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참으로 기쁘고도 환희에 가득 찬 승리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인간의 구원이란 대사업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골고타 산상에서 무참하게도 십자가상에 돌아가신지 3일만에 정녕 부활하신 날입니다. 동이 트고 날이 밝아 오는 여명기에 예수님은 암흑과 죄악과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또한 악마에 대한 승리의 깃발을 드시고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은 당시의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베드로, 요한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로 인하여 증명되었고 그 후 많은 학자들도 이를 신앙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 아침에는 세계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지는 가운데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경건히 머리 숙여 우리 주님의 부활을 마음껏 구가하며 경축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현의는 우리 신앙의 기본이며 핵심이며 따라서 부활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나 구원을 생각할 수 없고 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본질적인 의미는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가는 승리이며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승리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은 죽음의 암흑에서 생명의 광명으로 옮아 갔고 죄악과 악마의 지배 하에서 자유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가져오는 파스카의 신비이며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사랑으로 현세에서 천국으로 향하게 되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이라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처럼 불행한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현세에만 국한 된다면 우리는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저 현세에서 갖은 쾌락과 모략 중상으로 실컷 먹고 마시자 하며 그야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리하여 인생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것이니 얼마나 암담하고 방황하는 방랑객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정녕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이 미리 말씀하신 대로 죽은지 제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는데 먼저 베드로에게, 그 후에 열 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Ⅰ고린토 15,5)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확언하는 것도 제자들에게는 생명을 건 일이지만 더구나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증언은 더한층 제자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중대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적에는 제자들은 산산히 모두 도망쳐 버렸습니다. 어떤 제자는 옷자락을 잡히고 나서 발가벗고 도망할 만큼 제자들은 모두 비굴하고 겁쟁이였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나서 백팔십도로 전환되어 아주 강한 사람이 외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매를 맞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순교를 하면서까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란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처럼 증언하고 부활을 신앙의 중심 교리로 설파하며 모든 이에게 목숨을 바쳐 가며 가르친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구원의 길로 용약 매진하라는데 그 뜻이 있겠습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옮겨가는 과정이 부활의 신비라면 우리는 모름지기 죄악과 유혹을 극복하여 이에서 온전히 떠나 즉 죄악에 죽음으로써 광명과 평화와 사랑의 부활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Ⅰ고린 15,17)라고 하신 성 바오로 사도는 말하였다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우리 자신이 영신상의 부활 즉 생활의 재생이나 혁신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방에서 기쁨의 부활의 종소리가 울려오며 알렐루야의 승리의 고동소리가 들려와도 우리 마음의 기쁨과 승리의 노래를 읊으지 못한다면 하등 우리에게 뜻 있고 반가운 부활절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충실하지 못하다가 회개를 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새 생활을 영위하게 된 이는 정녕 기쁨과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자기 결점과 허물을 없애며 더욱 예수님을 닮고 따르며 티 없는 길을 걷게 될 때에  기쁨과 승리의 승전가를 부를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영신으로 부활하여 신앙생활에 일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우리 다같이 노력합시다. 그리하여 마음으로부터 알렐루야의 환호의 노래를 소리도 드높이 우렁차게 부르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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