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부활 제 3주일 주일 강론 모음

 

부활 3주일



        23. 강주희 신부(다)/39           24. 김기홍 신부(다)/40

        25. 조순창 신부(다)/42           26. 함세웅 신부(다)/43

        27. 김신호 신부(다)/45           28. 유영봉 신부(다)/46

        29. 서웅범 신부(다)/48           30. 강길웅 신부(다)/50

        31. 강영구 신부(다)/51           32. 전영준 신부(다)/55


23.        부활 제3주일   요한 21, 1-19 (다)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자!,

강주희 신부



구세주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로부터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일곱 제자들에게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나타나시어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그물을 던지라 명하시어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기적과, 그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시며 함께 잡수심으로써 분명히 죽음으로부터 부활 하셨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 만방에 울려 퍼지고 있는 부활의 찬가 “알렐루야”를 힘차게 부르며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마음껏 즐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큰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며 또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한 11,25)라는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 기쁨과 희망을 틀림없다고 진심으로 굳게 믿고 바라고 있습니까! 인류의 역사가 헛되지 않고 영원히 보람됨을, 즉 인간이 한 번 세상에 태어나서 불과 육칠십 년을 살다 죽어 한줌의 흙이 되고 마는 허무한 존재가 아니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부활하는 보람됨을 확실히 믿고 굳이 바라고 있는가 말입니다.



2천년 전에 심자가 위에서 분명히 돌아가신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헤치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이 오늘의 우리들 눈앞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그래도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그리스도의 약속을 반신반의하여야만 하겠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도외시하고 냉소해야만 하겠습니까!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그리고 깊이 이 부활절의 의미를 묵상하며 생활해야만 하겠습니다.



우선 나 스스로가 그 기쁨을 느끼도록 힘을 기울입시다! 우리가 이 희망과 기쁨을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때 선보다 악이 사랑보다 불신이 정의보다는 불의가 득세하고 난무하는 이 현실에서 우리는 헤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시가와 질투, 중상 모략과 이기주의를 일과로 삼는 이 사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부활 도리를 믿고 바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가르침대로 살아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사도들과 같이, 수많은 순교자들과 같이, 또한 성인 성녀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닮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신자로서 만일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속공로는 인류의 객관적 구원의 원천이 될 뿐입니다. 사도 바울로께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세례를 받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마르코10,45)하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봉사하고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이웃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서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신”(루가 1,52) 하느님의 정의의 결과입니다.



노예의 지위에까지 겸손을 드러내시고 죽기까지 순명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높이 들어올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의 증인이 되어야만 하며, 생활한 하느님의 표시가 되어 우리의 잘못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 선량하고 순진하게 자기 성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믿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희망을 안고 생활하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가 되도록 하여야만 하겠습니다.











24.            부활 제3주일   요한 21, 1-19 (다)  신앙인의 자세

김기홍 신부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신자들이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사도들의 고기 잡는 모습과 주님이 베드로에게 당부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합니다.



부활 후의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몇몇 사도들이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재수가 없어서인지 밤새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다음 날이 밝아올 때까지 아무 것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면 고기가 많이 잡힐 것이다”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만큼 고기 잡는 명수였으며, 더구나 밤새 노력했기에 보통 사람이며 그 말씀을 비웃고 말았겠으나, 베드로는 주님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던 것입니다.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고기잡이 전문가가 봐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 같았지만 틀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고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 없을 것이다 는 진리를 계시하는 것 같습니다(마태 17,20).



우리는 일상생활 중에 성격 속에 나타난 주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뜻을 중심으로 살기보다 돈이나 권력, 기타 자기 이익만을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김대두는 마지막 형장에서 말하기를 “나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될 수 있는 줄 알고 사람의 목숨을 17명이나 죽였다”고 고백했으며, 어떤 여인은 서민들은 4,000만 원짜리 집을 한 채 장만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으면서 저축해야 하는데도 몰상식한 사람들은 5~6천만 원씩이나 하는 융단이나 응접세트를 구입하고자 하는 그들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밀수를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이러한 개인의 양심은 우리들을 비통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보다 돈이나 권력, 또는 자기 개인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베드로가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듯이 그들의 삶은 멸망의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생활하는 삶을 영위할 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모든 사람들을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갊의 뜻을 세우게 하는 평신도 사도직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도직에 대한 의무가 사제나 수녀등 수도자에게만 있는 것으로 아시고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실른지 모르겠습니다만 에페소서(4,16)는 주님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은혜를 따라서 서로 봉사하여, 사랑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성장을 도모하도록 하셨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낸 사도들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직장에 있든지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곳에 보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관청에 있든지, 내가 군대에 있든지, 회사나 가정에서나 주님이 나를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한 나라의 사신은 언제나 본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서 말과 행동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 된 우리는 어디서나 내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생활하도록 노력합시다.











25.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다)  사랑.용서.일치.신앙 등이 평화 이룩하는 도구 

조순창 신부



예수 부활 대축일의 기쁨과 축복을 함께 나누는 부활 시기가 성령 강림까지 7주 동안 계속됩니다. 오늘은 그 중의 부활 둘째 주일이며, 주제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었습니다. 평화는 우리의 소원이며,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구약에서 평화란 뜻은 다음의 세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첫째로, 개인적으로는 건강과 안전을 말했습니다.

둘째로 공동체로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과 이웃 나라와의 불가침(평화) 조약으로 태평 성세를 말했습니다.

셋째로는 종교적인 평화인데, 이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이 평화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지켜야 했으며, 율법을 지키는 것은 정직하고 하느님께 충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약에 있어서는 구약의 평화란 뜻 위에, ‘하느님께 사죄 받아 진실한 믿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더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르코 복음 5장 34절에서 병을 고쳐 주시고, “평안히 가라” 하시고, 루가 복음 7장 50절에서 죄지은 여인의 죄를 사하시면서 “평안히 가라”하시고, 마태오 복음 10장 13절에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며, 집에 들어갈 때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라 하였으며, 오늘 복음인 요한 20장 19절에서도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평화란 전쟁이나 투쟁에 반대되는 뜻으로서 서로의 미움과 적대감을 없애고, 화합하여 평화를 이룩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를 회복함’이 평화이므로, 사도 토마처럼 부활 신앙을 고백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기쁨과 희망과 평안은 마음의 평화에서 나오는 만큼, 예수님의 부활로 두렵고 근심하는 마음을 떨쳐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은 평안하십니까? 그리고, 건강하시고 의식주의 걱정이 없으십니까? 또한 가정이 평안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진심으로 감사하십시오.

혹 삶이 고생이요, 걱정이며, 불화 하여 미움이 있고, 용서되지 않으며, 불안하십니까? 그러면, 제자에게 주신 예수님의 평화의 축복을 주시도록 잘 기도 하십시오. 무리하면 병이 나는 법이고, 분수 없게 욕심내면 실패하기 쉽고, 전쟁하면 처참한 폐허만 남듯이, 심하게 싸우면 상처만 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며, 그로써 평화의 축복을 믿음의 선물로 받는 신자답게, 무리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고, 싸우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합시다. 실패와 성공은 하느님이 이루어 주시되, 꼭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나 공부나, 일이나 활동이나, 성전 건립에 최선을 다하면, 꼭 뜻을 이루어 성공할 것입니다.



책임을 다합시다. 가정이나 본당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주어진 소임을 미루지 말고 완수하면, 충직하고 지혜로운 종과 같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잘못되었을 때 책임 전가를 하거나, 남의 탓이라고 원망하기보다는 내 탓을 먼저 찾아보며, 시험하며 나아가면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노력합시다. 평화는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룩하는 것이며, 우리의 노력으로 싸움과 전쟁을 막고, 번영을 향해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베풀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청하며,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고,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심는 평화의 도구가 될 때에, 평화의 날은 그만큼 앞당겨지고, 영원 구원 누릴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5장 9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아멘!











26.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다)  여러분 무얼 좀 잡았습니까

함세웅 신부



오늘의 복음 말씀은, 갈릴래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평범하여 무슨 별다른 주석을 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밤새 고기를 못 잡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 해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고, 이어서 같이 식사를 하시고(성체 성사) 생선을 같이 잡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선 사도들의 소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부들을 맨 처음에 부르신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지상 사명을 마치시고, 다시금 호숫가에서 고기 잡는 그 어부들에게 나타나셔서 맨 처음에 약속하셨던 \’천상 어부\’의 사명을 일깨워 주시고 재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 부름을 받았던 사도들이지만, 예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을 때,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없다면 그들의 작업은 모두 헛것이며, 헛수고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영세한 우리이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항상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을 때만, 영세의 효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호숫가에서 시작한 서론이 다시금 고기잡는 호숫가에서 종결되는 성경 말씀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람과 하느님의 힘이 합해져야만 결실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어부와 바다(그 안의 물고기)입니다. 잡은 물고기의 숫자 153은 여러 가지의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로니모는, 옛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153이란 숫자 모양이 물고기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1에서 17까지의 합계가 153이기 때문에, 153은 17과 관계되고, 17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17은 7과 10의 합인데 성서에서 7과 10이란, 숫자의 완전성과 모두 즉, 무한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도로부터 이어져 오는 공번된, 보편적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153의 상징적 해석은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단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두번째 장면은, 알몸으로 있다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인간성을 묘사한 장면 그대로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꾸밈없고 가식 없는 기술입니다.

세번째 장면은, 예수님께서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를 가지고 오라 하시어서,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음식까지도 모두 다 준비하실 수 있는 기적의 예수님이었지만, 인간의 협조를 꼭 필요로 하시었기에, 물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사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필요 불가결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음식(영성체)을 받고는 모두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 의심하거나 묻거나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미사 중의 영성체로써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체험한다는 것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내용을 요약하면, 어부와 바다, 인간의 헛수고, 예수님의 부르심과 권고와 명령, 그에 따른 수많은 수확, 그리고 우리의 수확으로 기뻐하시며 그것을 축복하여 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부활한 예수님을 뵐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무얼 좀 잡았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연구실에서, 사무실에서, 무슨 활동에서 무얼 좀 얻었습니까? 하느님과 관계를 맺지 않을 때 ‘무엇\’은 무의미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노력, 수고로 얻은 이 결실을 다시 예수님은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필요하시기 때문만은 아니고, 우리의 결실을 축복하셔서 다시금 우리 각자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막 잡은 물고기 몇 마리 좀 가져오시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미사 봉헌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드립니다. “온 누리의 주 천주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땅을 가꾸어 얻은 이 빵과 포도주를 주께 드리오니,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음식과 음료수가 되게 하소서. 천주여, 세세에 찬미 받으소서\”라고 하면서, 자신을 봉헌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것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27.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다)  신앙의 눈을 뜨자

김신호 신부



삶의 변화 없는 베드로

오늘은 부활후 제3주일로서 오늘 복음의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우리에게 알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앙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에도 별다른 삶의 변화를 갖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본업이었던 고기를 잡고 있었고,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밤새도록 어두움 속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고, 날이 밝으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도움으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요한 사가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대비를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 재십니다.

‘날이 밝아온다’는 표현은 신앙의 눈이 트임으로써 신앙에 바탕을 둔 사물의 인식이 가능하게 됨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불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번째로 만난 사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세 번 배반한 어두운 사건을 부활의 빛을 통하여 밝은 만남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 중에서 또한 눈에 띄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숯불을 펴놓고 생선을 굽고, 빵도 준비하여 제자들을 식사에 초대하셨다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상징적으로 신앙적인 면에서 해석한다면, 이 내용은 제자들이 선교 활동을 통하여 모아들인 모든 백성을 당신의 몸을 음식으로 주는 성체성사에 초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 숫자가 정확하게 백쉰세 마리라고 표현되어 있는 사실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우선 갈릴리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이 모두 1백53 종류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서,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인류 건질 福音의 그물

그러므로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의 그물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걸려드는 것은, 세상의 모든 민족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실을 의미하게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읽거나 신앙생활을 할 때 여러가지 상징성에 접하게 되고, 또한 상징성을 통하여 신앙이 강화되거나 삶의 방향을 잡게 됩니다. 사실 언어도 가장 큰 상징으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하여 인간이 만든 상징적 체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이 만든 언어 체계를 통하여,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려운 일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복잡하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인간의 사고체계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실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28.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유영봉 신부



묵상 :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된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의 믿음을 확인하며 사랑의 다짐을 받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7\”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어떤가?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고기잡이로 되돌아간 제자들

  선거가 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세상이 오는 양, 들떠 바쁘게 쏘다니며, 목이 쉬도록 외치고 살맛이 나서 야단이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 여(與)와 야(野)가 바뀌고 나니, 마치 한때 꿈을 꾼 듯 풀이 죽어 옛날의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이들을 가끔 본다. 갈릴래아의 어부들이었던 예수의 제자들도 3년 동안 스승의 능력에 감탄하며, 그분의 말씀에 넋을 잃고 이스라엘의 영광과 출세를 꿈꾸며, 예수님을 따라 다녔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던\”(루가 24,21) 그 예수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숨졌고 무덤에 묻혔고, 큰돌을 굴려 무덤 문을 막아버렸다. 그러니 이제 갈릴래아를 비롯하여 온 이스라엘을 떠들석하게 했던 \’예수 사건\’은 아주 끝나버린 것으로 보였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서 보듯이 제자들은 각자 낙향을 했고,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대로 그들은 다시 옛날의 고기잡이 어부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부활한 예수의 발현은, 제자들을 다시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다

실망하여 옛 일터로 되돌아간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 분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 5,30)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예수의 부활을 외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의 발현은, 바오로 사도의 개종 때까지 2년여에 걸쳐 예루살렘, 갈릴리, 다마스커스 등지에서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은, 마침내 부활한 예수가 들어간 그 영원한 세상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길 수 있었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사도 5,41)

그래서 사도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였고,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생명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떼를 맡기시며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다. 마치\’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도 “진짜야? 정말이지?\”하면서, 사랑을 확인하는 연인들 사이의 대화를 방불케 한다. 항상 행동보다 말이 앞섰고, 또 세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거듭거듭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사랑은 믿음의 표현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은, 바로 ”너는 나를 믿느냐?\”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부 사이도 친구 사이도 서로를 믿고 신뢰하게 될 때, 그 신뢰는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오늘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와의 대화를 보면서 다시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막연히 “나는 주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죄를 얼마만큼 지으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리시고, 우리의 기도와 선행을 통한 공로가 얼마만큼 쌓이면 항상 축복과 상을 주시는 그런 하느님을 생각한다. 마치 자동판매기 같은 기계적인 원리인 양,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우주 만물을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에너지인 양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그런 하느님이 어딘가에 있다 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시며,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물음에 구체적으로 “예\”, “아니오\”라며 태도를 분명히 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을 친구나 부모나 애인을 사랑하듯이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하고 싶은 일을 참을 수 있고, 하기 싫은 일을 기꺼이 할 수도 있는\” 그런 자세로 매사에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깊이 반성해볼 일이다.











29.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다)  삶의 건전지를 바꾸라

서웅범 신부



 십여년 전 외지(外地)에서 공부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녹음기능이 있는 작은 카세트 라디오를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알아듣기 힘든 강의를 녹음해, 다시 듣고 또 고향생각이 날 때 마음을 달래주는「우리 노래」들을 듣는 데에, 매우 요긴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다른 부분은 다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녹음을 해보면 그 재생소리가 들리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전파상에 가져가 보았으나, 그곳에서도 그 이유를 발견해내지 못했고, 다만 「제조회사에 문의를 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말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말이 서툰 상태였기에, 우선 그 일을 추진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었고, 또 수리비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번 직접 고쳐보기로 했습니다. 어디 연결부분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라면 붙여만 주면 될 것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세트를 분해하여 이곳 저곳을 건드려본 결과는, 결국 조립도 제대로 다 못할 정도로 그것을 완전히 망가뜨려 버린 것,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한참 뒤에야 녹음재생이 안됐던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녹음을 위해서는 마이크에 따로 작은 건전지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다 떨어졌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애꿎게 다른 곳을 마구 만지다가 기계를 아주 망가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직접 뵈었으면서도, 그 부활을 실감 못하고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자신들의 옛 삶의 방식인 고기잡이로 소일을 하고 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 보라」고 하십니다. 그 일은 제자들 이 자신들의 어부경험에 비추어 볼 때, 별 승산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칩니다. 그리고 기대와 상상을 초월한 153마리라는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 153이라는 숫자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숫자가 「갈릴래아 호수에 서식하는 물고기의 종류가 모두 153가지인 사실에 기인한다」고 했고, 아오스딩 성인은 「153은, 1에서 17까지를 다 더한 숫자로서, 여기서 17은 10+7, 그리고 7이나 10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좋은 숫자이며 특히 10은 십계명 (율법)을  해석을 했습니다.



결국, 153마리의 고기로 그물이 가득 찼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 교회 안에 모이게 될 것이라는 「교회의 충만성」의 상징으로, 그리고 아울러 「그럼에도 그물이 터지지 않았다」함은 그 교회의「하나됨」,「견고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카세트의 마이크에 「따로 작은 건전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또 적어도 그것을 모르는 저에게 누군가가「건전지를 바꾸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더라면, 애꿎게 성한 카세트를 망가뜨려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앓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신앙을 고백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이 귀한 생(生)을 낭비하고, 그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일없이, 이 세상을 온전히 살아 갈 수 있도록 하시는「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는 것」은 오늘날까지 내게 익숙해 있던, 그래서 알게 모르게 부정적 타성에 젖어버린「나의 삶을 쇄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확실-불완전한 자기 경험이나 능력에 자만하고, 또 헛된 세속욕망으로 헛 그물질을 하며, 서서히 죽어 가는「나의 옛 모습」을 끊어버리고, 하느님/ 예수님께 겸손되이 순종하며 성실하고 맑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생(生)의 순간 순간마다 부하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온전히 살 수 있게 될 것이며, 아울러 자연스레 하느님 나라와 완성을 위해 기쁘게 그물을 치는「사람 낚는 어부」들이 될 것입니다.











30.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사도 5,27b-32.40b-41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성령도 그 증인이십니다) 

제2독서 묵시 5,11-14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능과 부귀를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복 음 요한 21,1-19 (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 주셨다) 



어부는 그물을 잘 던져야 합니다. 사실, 아무나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고기떼가 어디를 지나가고 있는지 또 어디에 잘 모이는지를 알아야 하며 그리고 그물 던지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의 그물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누구는 평생을 수고하지만 빈 그물을 끌어올릴 수도 있으며 또 누구는 단 하루를 수고해도 그물이 터질 듯이 많은 고기를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기 잡는 법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또 세상을 잘 사는 비결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이상하게도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분이 부활하신 지 벌써 여러 날이 되었건만 예수님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어리석은 신앙 때문에 3년 동안 자신들을 열광시켰던 예수님의 놀라우신 업적과 그 말씀들이 헛되게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의 놀라 우신 업적과 그 말씀을 팽개치고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로 되돌아가는지 모릅니다. 육적인 것에만 매달리고 끼니 걱정에만 묶여 삶의 보람과 의미는 내던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면 신앙도, 인생도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오늘 1독서에서 사도들은 놀라운 증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며 매를 때려도 악착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얻어맞고 박해받는 것을 오히려 특권으로 생각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변화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들은 모두 도망을 갔던 비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도들이 오늘 말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아무리 때리고 박해해도 자기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 놀라운 지혜와 용기가 나왔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달라져야 하고 정말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사도들처럼 그렇게 우리도 우리 삶 안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가 보다 쇄신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사실, 고기잡이에 있어서는 아주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밤새 고기를 잡지 못했다면 다른 어떤 사람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목수일밖에 모르시던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물질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도 뛰어난 전문가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비단 방향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우리 뜻대로가 아니라 바로 주님 뜻대로 그물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은혜를 얻는 비결이며 또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어떤 형제가 자기 개성이 너무도 뚜렷해서 가정에서 부인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천성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그리고 남편의 성질에 같이 대항하다 보니 서로 상처의 골만 깊어지고 있었고 치유의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본당 사순절 피정에 두 사람이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때 신부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성이 강한 것은 실제로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다. 병든 개가 쓸데없이 자주 짖어대듯 뭔가 치유 받아야할 상처를 크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고. 마치 그 남자를 두고 한 말 같았습니다.



비로소 눈을 뜬 부인은 진정 남편을 위해 기도를 했으며 남편도 역시 자신이 어딘가로부터 받은 아픔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모질게 키운 어머니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그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을 떠서 주님의 방법을 찾으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신앙은 내 고집과 내 성질대로 그물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말씀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물을 던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분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삶이요 부활의 삶입니다.











31.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다)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강영구 신부



오늘은 부활 제3 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 후에 일어났던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별로 신이 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늘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 나날들,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가끔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예수가 때로는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베드로 사도는 옛날에 하던 대로 고기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베드로의 제의에 모두 동의하고 그물을 가지고 배에 올랐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밤새도록 헛되이 그물질만 했을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고기잡이가 별 신나는 일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피로만 쌓여 갔습니다. 제자들의 가슴속에는 예수께 대찬 그리움만 밀려왔습니다. “그분이 계셨더라면 이렇게 허탈하지는 않을 텐데!\”



어렴풋이 날이 밝을 때까지 수고만 했을 뿐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그물을 거두어 돌아가려 할 참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걸려 들지 않은 텅 빈 그물처럼 제자들의 가슴도 텅 비어 있었습니다. 파도 소리만 출렁거리는 호수에서 말없이 그물질을 할 때는 그래도 무엇인가 걸려들겠거니 했던 기대가 무너지고, 공허한 가슴처럼 빈 그물을 끌어올려 돌아가려는 그들은 허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곳,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수고가 모두 그런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삭막한 곳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는 수고는 헛됨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도 없고, 주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일상에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공허함과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일하는 자리는 수고와 피로만 쌓이는 자리일 뿐, 은총과 축복의 자리가 아닙니다. 정말 신나는 일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수고는 기쁨과 보람을 열매 맺는 은총의 시간이 아니라 공허함만을 거두는 피곤한 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갑자기 사태가 바뀌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이 금방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고, 그들의 수고함을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좀 잡았소?\” “허탕만 쳤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 보시오.\” 참으로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거워서 도저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루가 복음5장 1-11절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경험했던 적이 있었던 터라, 제자들은 눈이 뜨여서 호숫가에 서 계시는 분이 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제자가 소리쳤습니다.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늘 덤벙대는 베드로 사도가 또 그 본모습을 드러내면서 성급하게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공허함과 허탈감이 풍요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조촐하지만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불을 피워 놓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빵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방 잡은 고기를 숯불에 구워 나누며 서로 기쁨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루를 밝히는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면서 어둠이 걷혀 갈 무렵,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함께 계셨고,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풍요로움과 기쁨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였으나 허탕만 쳤던 그 허탈함과 공허함도 사라지고, 피곤함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제자들은 또 다른 빠스카를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공허함과 허탈감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풍요와 기쁨으로, 주님이 계시지 않는 불안함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평화로움으로, 주님이 계시지 않는 헛된 수고로움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보람으로, 주님이 계시지 않는 무료함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축제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신 주님은 우리 삶에 참된 빠스카 곧 건너감을 선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 삶에서 어둠의 그림자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둠에서 광명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우리의 힘든 수고와 노력은 풍요로움과 보람을 열매 맺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나날의 수고로운 삶은 축제로 변하게 되고, 인생살이의 공허함과 허탈함은 기쁨으로 변하게 됩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마칠 때까지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나날의 삶 속에서 이 부활 곧 빠스카를 체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호숫가에서 제자들의 그 수고로움을 지켜보시듯,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의 삶을 지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듯, 오늘 우리에게도 잔잔한 타이름으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움으로 되살아나게 될 것이고, 축복과 은총으로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체험하는 부활이며 빠스카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또 다른 감동적인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사도 베드로의 사랑 고백입니다.

축제와 같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배신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태 25,33). 그의 호언 장담과는 달리, 총독 관저의 뜰에서 그는 예수를 모르노라고 세 번씩이나 딱 잡아뗀 적이 있었습니다(마태 26, 69-75).



그러나 예수의 부활 후에 베드로는 변해 있었습니다. 그전에 그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고 호언 장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권능과 은총에 의지하는 신앙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다짐하시자 그는 그만 슬퍼졌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다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조급하고 덤벙대는 사람이긴 하지만, 섣불리 자기 자신을 과신하거나 호언 장담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철저히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예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열두 사도의 으뜸 되는 권한을 주시고, 교회를 이끌 책임을 맡기신 것은, 그가 용의 주도한 사람이거나 혹은 능력과 재능이 뛰어나거나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읽는 복음서들은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만, 그의 모습은 언제나 한 귀퉁이가 빈 듯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는 “저분은 주님이십니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겉옷을 걸치고 호수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래도 물에 빠져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덤벙대는 베드로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인간적인 약점이 많은 베드로를 으뜸사도로 삼으신 것은, 그가 이미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예고하셨지만, 그는 장차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교하게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지닌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지만, 그전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함부로 호언 장담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권능에 믿음을 두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래서 베드로를 으뜸 사도로 뽑으셔서, 당신의 양떼를 돌볼 막중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도 베드로 사도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약점과 나약함으로 자주 유혹에 떨어지고, 하느님의 권능에 비하면 별것 아닌 우리의 재능과 재주를 과신함으로써 쓰러지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숩니다.

신앙인이란 철저히 하느님께 귀의함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교회로 불러 주신 것은 이렇게 은총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 되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저멀리 계시는 분, 흑은2천 년 전 그 옛날에 계셨던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의 능력에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나날의 삶은 은총과 축복으로 가득 찬 부활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제자들이 풍요로움을 얻었고 기쁨을 얻었듯이,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기쁨과 풍요로움을 얻는 삶, 곧 빠스카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같이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과 능력에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32.          부활 제3주일   요한 21,1-19 (다) 부활하신 예수님 체험

전영준 신부



어느덧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5월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지도 3주일이나 지났습니다만, 그동안 여러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기쁜 시간을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시오\”(21, 19).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불러모으실 때도, 바로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음이 생각납니다.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

베드로는 고기를 잡아서 생활을 유지하는 어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기 잡는 기술이 아주 능숙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쳤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날이 밝자 베드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뭍으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때 호숫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어떤 사람이 그 앞에서 말씀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더 많은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서,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셨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잠시 생각에 잠기었습니다. 보아하니 학식은 많은 사람같아 보이지만, 고기 잡는 데는 별로 아는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는건지 아닌지 문제였습니다.

베드로가 밤새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잡히지 않은 고기가 쉽게 잡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만약 이 사람의 말을 듣고 그물을 쳤다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들었던 베드로는 어쩌면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즉, 그분의 말을 속는 셈치고 한번 들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쳤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분들도 다 잘 알다시피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저분은 보통 분이 아니야.\’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한가지 제안을 하십니다. “너는 이제부터 사람을 낚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들은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서, 예수님의 지도를 받아가며, 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훌륭한 어부가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베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이제는 베드로 옆에서 그를 지도해주실 분이 계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혼자서라도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대부분 따라 나섭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그 어느 때 있었던 경우처럼, 역시 고기가 잡히질 않았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 많은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날이 새자 지쳐 있는 그들에게 호숫가에서 어떤 분이 서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 보아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시 지도해주셔서,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먹여 기르시오\”라고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목숨을 다해 열심히 수행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한 예수님 체험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의 능력과 힘과 지혜를 믿고, 거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에 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무언가 도와주실 때에야, 비로소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상황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떤 일을 마주 대할 때, 얼마나 예수님의 지도를 받아가며 일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 왔습니까? 혹시 예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믿고 의지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또 한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기 때문에, 지금 이 지상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서 지도를 받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고 계십니까?

예수님이 처음 호숫가에 서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얼른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침을 준비해 놓으시고, 빵과 고기를 나누어주실 때, 모두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길에서 몇 시간씩 이야기하며 함께 걸어갈 때는 예수님을 물라보다가, 저녁식사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매일매일 미사라는 성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몸은 쪼개어져 우리들에게 먹히어, 우리들의 생명의 양식이 되고 계십니다. 이 사건이 거행되고 있을 때, 바로 우리들은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 뵈올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우리들은 그분을 더욱 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체험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체험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일 뿐입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잘 돌보고, 나를 따르시오.\”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의 복음 말씀을 되새기면서, 우리 모두 머리 숙여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그분을 더 잘 따르겠다는 우리의 마음을 모아, 시편저자의 감미로운 기도로 주님께 올려 드립시다.



오늘 너희는 그의 말씀을 듣게되리니 “므리바에서, 그 날 마싸 광야에서의 너희 선조들처럼,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굳히지 말아라\”(시편 95,7b-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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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다해 부활 제 3주일 주일 강론 모음

  1. user#0 님의 말: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1. 말씀읽기: 요한 21,1-14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2. 말씀연구

     부활을 체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증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들의 의지가 굳건하지 못해서입니다. 믿고는 있지만 두려움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몰라보게 달라질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까지 제자들은 그렇게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내가 가진 신앙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만 증거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스승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은 갈릴래아로 돌아갔습니다. 부활을 체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자들에게는 굳건한 믿음이 없습니다.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였기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렸다가 다시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제자들 중에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이지,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함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이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물을 다시 잡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물을 버렸지만 이제 예수님을 따를 용기가 없기에 다시 그물을 잡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다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한다면 다시 죽음의 올가미를 제자들에게 씌울 것을 제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순간 방심하면 다시 그물(불신)을 잡게 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당당하게 신앙생활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날이 밝아올 무렵,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배에서 예수님을 보았으나 누구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얘들아(아들들이여)”라는 말은 손아랫사람에게 친밀하게 이야기를 걸 때에 쓰는 상용어였습니다. 그리고 사냥꾼이나 어부에게 있어서 잡았느냐고 묻는 것은 하나의 인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잡은 것이 없을 때에는 대답을 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여기서도 간단히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웃음이 납니다. 한 마리도 못 잡은 이유는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얘들아,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랐는데, 다시 그물을 잡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래서 그런지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요.^*^”


     저는 낚시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낚시를 가면 낚싯대를 드리우고, 이것저것 차린 것 실컷 먹고 오는 낚시를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제가 큰 거 하나 잡았는데 자라였습니다. 잡으려고 잡은 것이 아니라 딴 짓 하는데 자꾸 움직여서 들어봤더니 자라였습니다. 큰 녀석을 잡고서 놔주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끈으로 자라 허리를 묶어서 좌대 기둥에다 묶어 놨는데 어찌나 시끄러운지. 혹시 자라 엄마가 와서 화낼까봐 놔 주었습니다. 낚시에 관심 없는 사람도 이렇게 한 마리는 잡는데, 한 마리도 못 잡는 것은 실력이나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보통은 고기들이 지능이 낮다고 합니다. 그래서 입이 찢어져도 다시 낚시에 걸려옵니다. 그런데 그전에는 고기들의 지능이 그렇게 낮지 않았다고 합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사랑하는 물고기 커플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이 물고기 커플이 드디어 분위기를 잡고 어느 밤, 사랑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바다가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놀란 물고기 커플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다 가운데에서 둘이 건널 수 없는 마른 땅의 벽이 생겨 버리고, 그 땅으로 사람들이 건너가는 것을 바라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건너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다가갈 수 없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너간 뒤, 그 뒤를 따르던 기마와 기병이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물이 덮쳐서 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물고기들은 놀랐습니다. 그 후로 물고기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잊어 먹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랑의 감정을 잊고 살던 물고기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피하는 그런 관계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사랑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날 밤도 어부들의 그물을 피해서 이리저리 피하느라고 힘든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배 위에서 군중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물고기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물고기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성하고 서로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물이 날라 와서 그들을 잡아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오른쪽에 던져 보라고 하자 시몬 베드로 일행이 그물을 던졌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많은 물고기들이 그물에 걸려들었습니다. 물고기들은 그물에 걸려들어 예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 그러실 수 있습니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왜 저희들은 잡나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끌고 길을 떠나셨고,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물고기들의 성토대회가 열렸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배반하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인간만을 위하십니까?”그러자 나이 많은 물고기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심오하신 계획을 어찌 우리 같은 물고기가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 되는 것일세…,”


     그렇게 3년이 흐른 어느 날, 그날도 밤새 어부들의 그물을 피해서 이리 저리 움직이느라고 고단했던 아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에 예수님께서 보이시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고기들에게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물고기들은 기뻐서 예수님께 부활 인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부활을 축하해요. 저희는 그러실 줄 알았어요…,”그렇게 모여서 예수님께 부활인사를 드리는데, 다시 그물이 날라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져 보아라.”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젊은 물고기들이 잡혀가면서 말했습니다. “원로님!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이렇게 하셔도 되는 거예요?”


     원로들은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제일 많은 원로 물고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서운함을 느껴서야 되겠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우리의 기억력이 문제가 되는군. 오늘 잡혀간 153마리의 물고기들은 먼 훗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숫자가 될걸세. 그걸 우리가 막으면 안 되지. 우리 모두 하느님께 기도하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기억력을 최소화 시켜 달라고…,”

     그 후로 물고기들은 지능이 낮아졌다고 합니다. ^^ 믿거나 말거나…,<홍어록 12장>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기적적인 고기잡이를 한 적이 있었던(루카5,1-11)것을 기억한 요한 사도는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라뿌니”라고 응답했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빵을 떼어 주실 때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기적적인 물고기 잡이를 통해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체험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은 다시 그 상황이 되면 뚜렷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억”하여 “행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억할 때, 과거의 체험은 현재화되는 것입니다. 미사 안에서 최후의 만찬은 다시 현재화되고, 예수님께서는 미사 안에 함께 머무시고, 성체로 우리에게 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빨리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물에 뛰어든 것 같습니다. 나 또한 주님을 향해서라면 베드로 사도처럼 그렇게 즉시 움직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끌어 올리면서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설렜을까요?  또 얼마나 죄송스러웠을까요? 버린 그물을 다시 잡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는 그들의 처지가…, 제자들은 고기가 가득 든 그물을 끌고 뭍으로 왔습니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숯불을 피워 놓으셨고, 생선과 빵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밤새도록 헛고생한 제자들을 위한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고기는 예수님에 의해서 잡힌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 않을까요? “네가 잡은 고기(네가 인도한 형제자매)를 내 앞에 데려 오너라.”그런데 한 사람도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시몬 베드로는 배에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물 속에는 백 쉰 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습니다.


     “153”은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그것은 1에서 17까지를 더한 숫자입니다. 17은 또 10과 7을 더한 숫자입니다. 그리고 10과 7은 모두 완전한 숫자입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말씀 안에서 우리는 주님의 놀라우신 기적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제자들은 선교사명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니까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지만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할 때 큰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사람 낚는 어부들이 주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많은 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됩니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아침은 예수님께서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고기잡이로 지친 제자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 안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예수님께 깊은 믿음을 드리며,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연습을 더더욱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잡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또 아침을 준비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눈앞에 계시고, 또 자신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쏟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주님의 따뜻하고 크신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변화될 것 입니다. 부활을 믿게 될 것이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루아침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천천히 변화됩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마침내 주님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생활 속에서 내 삶을 변화시켜 주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어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 와 닿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②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저분은 주님이십니다.”하고 소리칩니다. 각자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으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의 모습으로,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전에 하셨던 기적의 기억으로…, 나는 어떻게 “당신은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지, 나는 어떻게 “당신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지 기억해 봅시다.


    ③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 보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고민했을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그리고 고기잡이는 내가 전문가인데…, 누가 나에게 조언을 할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혹시 누구처럼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앞서서 판단하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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