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체와 성혈 대축일
13. 서정화 신부(나)/24 14. 이제민 신부(나)/26
15. 김정진 신부(나)/29 16. 유재국 신부(나)/31
17. 함세웅 신부(나)/33 18. 강길웅 신부(나)/34
19. 김영진 신부(나)/36 20. 김영남 신부(나)/38
21. 교구 주보(나)/40 22. 김명순 박사(나)/42
13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마르코 14, 12-16 ; 22-26 (나)
제자들과 함께 해방절 음식을 나눔
<뭔가 달라져야 해요, 사랑과 일치의 성사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자!>
서정화 신부
예수께서 수난하시기 전날 밤, 유대아의 풍습에 따라 누룩없는 빵을 먹는 날이 되자 「빠스카」의 어린양을 잡아 사도들과 한자리에 앉아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 때 빵과 잔을 축복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몸이요, 이는 내 피니라. 너희를 위하여 바치는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라”(루가 22,19-20)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했습니다.
옛날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임당수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어둠과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임당수의 제물이 곡식이나 짐승으로 부족하고 사람 중에서도 처녀를 요구했듯이, 우리 인간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선 귀한 인간의 제헌만으로 부족했던지 예수께서는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들으신 것처럼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영원한 구원을 확보해 주셨습니다”(히브리 9,12)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분의 사랑은 얼마나 크십니까? 그러나 그분은 한 번의 제사만으로 만족치 않으시고 세상 마칠 때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수없이 또 끊임없이 제헌되길 원하십니다. 옛날에 어떤 효부가 있었는데 시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여 백약이 무효할 때 자기 허벅지의 살을 베어드림으로써 병을 치료했다는 고담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병도 너무 컸기 때문에 특별한 약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살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고 수천 번 수만 번 주시고자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요한 6,54)이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발로이며 사랑의 성사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랑은 조건이 없고 한계가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사랑과 불길은 우리의 온갖 허물과 티와 죄악을 말끔히 불살라버리고, 미지근하고 냉냉한 이 마음에 선과 덕행에 대한 불꽃을 일으켜 줍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요한 14,18)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제자들과 이별하기에 앞서 당신의 살과 피란 고귀하고 값진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시며 우리와 같이 언제나 계실 수 있는 놀랄만한 방법을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셨습니다. 즉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성당의 감실에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며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성체로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어찌 이해 못하겠습니까? 이 같은 사랑과 일치의 신비인 성체께 어찌 우리가 냉정하게 대하고 무관심 할 수 있겠습니까? 성체성사의 은혜는 무한합니다.
마치 바닷물처럼, 햇빛처럼 아무리 바닷물이 많다하더라도 조그만 그릇엔 조금밖에 담을 수 없고, 아무리 찬란한 햇빛도 죽은 가지엔 소용이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무한한 은혜도 우리의 받을 준비 없이는 얻지 못하니 깨끗한 마음 또 큰 그릇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성체는 거룩합니다.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Ⅰ고린 11,27)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받아 모시기만 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먹어도 먹지 않은, 소화되지 않은 빵과 포도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모시는 이 성체와 성혈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구성하는 활력소가 되도록,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실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이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천상보약을 먹고도 아무 진보가 없다면 우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요, 그러한 가지는 잘라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5,2)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이 커져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듯이 우리도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바울로 사도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갈라 2,20)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찔레나무에 장미꽃을 피우듯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꽃피울 때 우리는 죽어도 살며 또 부활의 기쁨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또 화합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성체성사는 일치의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서로 화합하고 보다 친밀해 진다면 하물며 천상의 성찬인 이 성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서로 화합하고 단결 못한다면 어찌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Ⅰ고린 10,17)
그러므로 화합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실존에 동참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서로 헐뜯고 싸우며 단결 못하는 우리 민족의 고질을 적어도 우리 가톨릭 신자만은 바로 잡아야겠고 나아가선 이러한 사랑과 단결심을 삼천리 강토에 심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내가 처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서로 화합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겠습니다.
14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마르코 14, 12-16 ; 22-26 (나)
제자들과 함께 해방절 음식을 나눔
이제민 신부
성체성혈 대축일이다. 성체신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빠스카 축제 거행은 하느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한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어린양으로서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빵과 포도주 안에 당신이 현존하고 계신다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삶과 죽음의 심오한 의미를 드러낸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것에 반대하면서 타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바치는 삶을 사셨다.
성체와 관련해서 가톨릭 신자들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미사 때 받아 모시는 축성된 조그마한 빵이다.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그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과 일치하고 싶어한다. 성체를 모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생을 마음에 받아 모시는 것이다. 감실 앞에 꿇어 그 안에 모셔진 성체께 드리는 조배는 그분의 일생에 대한 조배다. 성체는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사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성체를 모시거나 성체께 조배를 할 때에 신자들은 감실 속의 빵만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생을 묵상한다. 남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묵상한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묵상하면서 그분처럼 살리라고 다짐한다. 그분 닮은 삶을 살 때 그분을 만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성체, 그리스도의 몸은 복음을 선포하고 가난한 이와 하나되고 남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몸이다. 그분은 세리, 창녀, 죄인들, 남으로부터 버림받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면서 이들과 ‘한 느낌’을 가지셨고, 고통을 덜어달라는 이들, 소경(마태 9,27),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마태 15,22), 간질병 걸린 소년의 아버지(마르 9,22), 나병환자(루가 17,13)에게 자비를 보이셨으며, 소경을 보게 하시고(마태 20,34), 나병환자를 낫게 하시고(마르 1,40 이하), 군중들을 먹이시고(마르 6,34),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고(루가 7,13),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다(마태 15,3; 마르 8,2). 그분의 몸은 자비의 몸이다.
성체를 대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거룩함만을 강조하다가 정작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성체를 죄인을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기보다는 죄인과 성인을 갈라놓는 기준으로 보면서, 세상과 죄인을 미워하게 하는 마음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성속 분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거룩함’만을 강조하다 보니 성체를 아예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는데 마치 의인만을 위해 오신 것처럼 잘못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몸이 거룩한 것은 당신이 당신의 몸을 죄인을 위하여 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러한 성속 일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의 몸을 속과 구분시킨 거룩한 존재로 강조할 때가 많다. 그리고 죄인들이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버린다. 그분의 거룩한 뜻을 희석시킨다.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위하여,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다. 그분의 십자가 고통은 죄스런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다. 그분의 고통에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성찬의 공동체는 교회의 몸의 결정적인 근원이다. 성찬례는 신앙의 신비에 대한 세례 받은 사람들의 고백이며,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눔으로써 그들의 특성을 살린 가운데 한 지역에 결합시키고, 이로써 공동체(코이노니아 : κοινωνια)를 형성케 한다. 실제로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가입시키는 세례를 성찬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그 목적이 달성된다. 이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말한다. “성세 지원자는 성체성사에 참여하도록 인도되는 것이며, 이미 성세와 견진으로 영적인 인호를 받은 교우는 영성체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온전히 결합되는 것이다.”(사제교령 5항)
또 “기도의 집은 성체성사가 거행되고, 성체가 안치되어 있으며, 신자들이 모이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의 제단에서 바쳐지신 우리의 구세주, 천주 성자의 현존이 신자들의 도움과 위로를 위하여 흠숭 받으시는 장소이다.”(사제교령 5항)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절정이며, 교회는 성체성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의 나눌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이게 한다. 이를 바울로는 “도대체 그리스도가 갈라졌습니까?”(1고린 1,13)하며 교회의 분열을 웅변조로 꾸짖는다. 신앙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 모실 때 그리스도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부를 받아 모신다. 쪼개진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인 것처럼, 여러 지역 교회는 교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부를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몸이 거룩하기에 아무나 모실 수 없고 고해성사를 보아야 영할 수 있다는 것은 교육상 충분히 이해가 간다. 거룩함을 체험하기 위해 인간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교회의 제도적 장치와 그 전통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을 쪼개어 내어놓은 몸(마태 26,28)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분의 몸은 성인이든 죄인이든, 고백자이든 배반자이든, 가톨릭인이든 개신교인이든 비신자이든 모든 이를 위해 있다. 미사 때마다 “이는 내 몸이다. 모든 이를 위해 내어줄 몸이다”라며 사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자신의 몸을 내어놓으시면서 당신의 몸이 일치의 근원이 되기를 바라셨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그분은 당신의 몸을 교육용으로 내어놓으신 것이 아니다. 가톨릭 신자는 그분이 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실제로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모든 이를 가톨릭 교회의 틀 안에 모으라는 지상의 명령이 아닐진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금지된 현행 영성체 방법이 한국상황에 적합한지 묻게 된다. 이 땅의 소수에 해당하는 가톨릭인만이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고 있는 것일까? 예비신자인 것이, 개신교신자인 것이, 스님인 것이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을 만큼 큰 장애일까? 혹시나 이런 방법이 교회일치운동과 종교간 대화에 더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신자와 비신자의 혼배 미사에서 신자만이 영성체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을까? 그 방법이 사목적인가? 예수님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불편을 느끼실까?
영성체 하기 전에 사제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하고 나서 신자들이 하는 응답송(“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이 이방인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었다는 것을(마태 8,5-13)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 주일 미사 한번 참여하지 못하고, 금요일에 고기를 먹고, 1월 1일 미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고해성사를 보지 않은 것이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을 만큼 그런 큰 장애일까? 미사를 시작하면서 통회하고 죄를 고백하는 예식은 형식인가?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는 죄를 지은 것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그에게 당신의 몸을 주어 먹게 까지 하지 않으셨던가?(마태 26,17-28) 유다에게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5천명을 먹이신 예수님(마태 14,13-21)의 자유로운 용기가 부럽다.
주님은 그런 분이신데 인간은 법으로서 사람들을 갈라놓고 그분의 고결한 뜻을 거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그만 죄 때문에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신자들과 미사를 드린다는 이유로 미사 때마다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우리 사제들을 비교하면서 영성체는 사제의 특권인가도 묻게 된다. 모두는 사제처럼 영성체 할수 없을까?
독일의 어느 본당에서 체험한 일이다. 주일미사에 한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안고 나와서 영성체를 하였다. 사제로부터 성체를 받은 그는 이를 쪼개어 반은 자기가 영하고 나머지 반을 팔에 안은 어린아이에게 먹여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놀랐지만 그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이 첫영성체 하지 않은 이 어린아이에게 먹히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셨을까? 당신의 거룩한 몸이 돼지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셨을까?
죄인과 하나가 되고자 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몸을 마음에 모시기 위해 인간은 마음을 깨끗이 하며 마음을 준비하는 것은 좋은 전통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고백성사도 막을 수 없다. 그분 스스로 당신은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린아이도, 죄인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도 사랑하고 용서할 능력이 있다. 교회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도, 종교대화를 모색하는 불교인도 그리스도교인도 모두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감실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는 모두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놓았다고,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성체성사는 일치의 성사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15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마르코 14, 12-16 ; 22-26 (나)
제자들과 함께 해방절 음식을 나눔
<새로운 계약인 성체성사>
김정진 신부
신자 여러분!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영원한 새로운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천주 성부께 순종하시어 십자가상에서 죽으시며 피를 흘리는 희생 제사를 바침으로 이 새 계약은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최후 만찬 때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 새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실상은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와 죽음으로 이 새 계약은 체결된 것입니다.
이같이 체결된 새로운 계약으로 하느님은 우리 인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고, 형제 자매로 혹은 친밀한 벗으로 삼으셨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혹은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인류는 또한 하느님만을 믿고 공경하고 섬기기로 굳게 약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십자가상 성체를 새롭게 하며 기념을 되풀이하면서 하느님과 굳게 체결된 새로운 계약을 기억하며 새로이 굳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우리가 영성체를 정성껏 함으로써 천상 음식으로 우리를 먹여 살리시고 튼튼히 살찌게 하시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드리며 당신의 살과 피까지 아낌없이 주시는 그 지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보답해 드리는 신앙과 사랑의 생활을 성실히 해야 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 하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성체성사를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적에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그들에게 떼어 나눠 주시며 『받아 먹으시오. 이것은 내 몸입니다』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그 잔을 돌려 마시게 하시면서 『이것은 나의 피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4,22; 마태 26,26).
우리는 이상의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의 마음으로 굳건히 믿고 있기에 미사 중에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피>로 공경하고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 예수님과 일치된 마음, 일치된 생활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체 교리를 불신하는 사람들은 밀떡이 어떻게 예수님의 살이 될 수 있느냐고 항거합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볼 적에는 한갓 밀가루 구운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로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진실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므로 사람으로서 하시는 말씀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힘과 능력이 발생한 것을 잘 알게 됩니다.
가령 예수님의 나병 환자에게 <깨끗하게 되시오>하고 말씀하시자 즉각 병이 나았고(마태 8,3) 귀먹은 벙어리를 <열려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고쳐 주셨고(마르 7,34) 더구나 이미 죽은 야이로의 딸마저 <소녀야, 일어나거라>는 간단한 말씀으로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마르 5,41). 이처럼 전능의 말씀으로 행동하시는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날 밤 즉 역사적이고도 극적인 순간에 장엄하게도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명심하고 굳게 믿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술로 변화시키신 기적이나(요한 2,1-12)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마태 14,13-21)을 행하신 예수님이 빵으로 하여금 당신 살로 변화시키시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어찌 이상히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교형 자매 여러분! 이같이 전능의 힘을 지니신 예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주시며 새로운 계약을 맺게 하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가장 절실히 깨닫게 하시는 점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계약이라 함은 유대교의 중심 사상입니다. 그래서 구약(舊約), 신약(新約)이란 중요한 말마디가 나온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가지 계약에 관하여 서술되어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계약은 하느님이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한 계약입니다. 이 계약에 관하여 오늘 제1독서에서 잘 들을 수 있습니다만, 모세는 청년들에게 명하여 수송아지들을 잡아 야훼께 번제를 드리게 하고 그 피의 절반은 제대에 붓고 나머지 절반은 백성에게 뿌리면서 <보라, 이는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맺으시는 계약의 피니라>(출애굽기 24,6)하고 절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약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간택된 백성, 축복 받은 선민으로 영광과 긍지를 갖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심으로 인류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하느님의 선민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하고 우리 서로가 일치하는 영생의 백성으로 길러 주십니다. 이 새로운 계약으로 구약에 있어서의 수송아지나 그 피로써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상에 달리신 당신의 살과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명심하고 성체성사를 더욱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받아 모셔야 하겠습니다. 아멘.
16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마르코 14, 12-16 ; 22-26 (나)
제자들과 함께 해방절 음식을 나눔 <성체축성>
유재국 신부
예수께서는 성목요일 저녁에 처음으로 성체를 축성하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시자 그들은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그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 두어라. 하느님에게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2-25 ; 마태 26,26-29; 루가 22,14-20).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 살을 먹고 당신 피를 마시라고 하셨을 때 유다인들은 오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약속에 대한 물질적 오해가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더욱 멀리 하게 하였던 것이다.
중세기에는 세심한 교우들이 제단에서 성체 축성의 말씀을 더듬거리며 발언하였고 따라서 요술쟁이가 외우는 주문이 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성체 축성을 물질적으로 오해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성체 축성에는 물질주의적 오해의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성체 축성을 결코 물질적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신앙으로 축성된 성체를 받아들여야 하며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에 성체 축성 후에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성체 축성은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화로써 이루어지기에 영적으로 초자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초자연적이고 영적으로 변화되는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감각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축성된 성체에는 그리스도가 참으로, 실질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현존하신다. 즉 부활하신 분, 영광을 받으신 분인 그리스도가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신비스럽게 감추어져 계신다.
축성된 성체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를 선물로 받으며, 변화된 성체는 우리의 음식이 된다. 주님이 만찬의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시는 일은 특별히 상징적이고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축성된 성체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며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며 성체를 영해야 한다. 우리는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동시에 주님의 몸의 지체들과도 하나가 된다. 먹는다는 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의 질에 따라서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우리를 부활한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영적으로 변화된 성체는 우리의 생명을 영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를 옳지 못한 이 세상에서 다른 인간으로 만든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식사는 또한 우리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일치를 이룬다.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서로가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립되어 있는 인간이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로 성체를 축성 하셨는가?
우리의 생활에 어떤 의미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만드셨는가?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주식이었기에 예수는 빵과 포도주로 당신의 살과 피로 축성하셨지만 거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빵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많은 밀알이 빻아져서 밀가루가 되고 반죽이 되어서 불에 구으면 빵이 된다. 포도주가 많은 포도알이 으스러져서 발효가 되면 포도주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빵과 포도주는 우리의 양식이 된다.
자신은 전혀 돌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오로지 안간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죽음과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성체이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도 성체가 의미하는 대로 우리의 생활을 희생으로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며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여야 하며 오직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즉 축성된 성체를 영하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17 성체성혈 대축일 <마르 14,12-26> (나) 미사 성의 의미
함세웅 신부
교회는 여러 가지 활동을 합니다. 신자들을 지도하고 교육하며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경신례(敬神禮), 즉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데 있습니다. 공적 기도로써 하느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경신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사 성제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교회의 모든 활동은 모든 이가 한마음 한뜻으로 하느님을 공경케 하는 데 있습니다.
좀더 효과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미사 성제를 봉헌하기 위해서 미사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제사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바치신 것과 똑같은 구원의 제사, 속죄의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제관으로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고, 미사에서도 제물은 그리스도이시며 제관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제는 다른 그리스도로서 제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 제사에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하느님께 속죄의 제물로서, 화해의 제물로서 봉헌합니다.
미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입니다. 말씀의 전례는 미사 시작에서부터 신자들의 기도까지이고 성찬의 전례는 봉헌에서부터 끝까지입니다. 어떤 신자들은 말씀의 전례를 중시하지 않는지 강론 후부터 참석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
다.
그러나 말씀의 전례도 성찬의 전례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낭독과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신앙고백과 신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가 신자로서 신자답게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는데 성찬의 전례는 봉헌과 성체 축성, 영성체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봉헌은 제사에서 제물을 준비하는 부분입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동안 신자들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자신의 희생의 표시로 하느님께 헌금을 바치는 것입니다.
헌금은 하느님께 받은 많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또 자기 죄의 보속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외적 표시입니다. 우리는 헌금의 의미를 잘 알고 자기 신분에 상응한 헌금을 하도록 노력 해 야겠습니다.
봉헌이 끝나면 성체 축성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인 성체를 이루는 부분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체는 교회의 가장 큰 신비입니다. 성체는 더 이상 빵과 술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입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상징이 아니며, 성자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오묘한 신비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진실하신 예수님의 말씀- “이는 내 몸이라, 이는 내 피니라\”를 따라 믿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깨닫지는 못할지라도 성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을 믿고 최고의 흠숭을 드려야겠습니다. 창조자이시며 구속자이시며 세상을 섭리하는 하느님이 우리의 면전에 실제로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가정과 조국을 의탁하며 조용히 기도합시다.
그 후 영성체가 시작되는데, 영성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몸을 우리의 양식으로 주시어 우리가 받아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성체를 통하여 진리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것을 환영하고 감사하며, 그분께 우리의 필
요한 것들을 기도합시다. 또 영성체를 통하여 같은 성체를 받아먹는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나로 일치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신앙 안에서 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낳는 피로 맺어진 형제가 아니고, 흘린 피로써 맺어진 형제들입니다 우리 마음에 임하신 그리스도께 흘린 피로 맺어진 형제들 간에 더욱 뜨거운 형제애를 갖도록 기도합시다.
이렇게 하여 미사의 중요한 부분이 모두 끝나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마치 옛날에 당신 사도들을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하신 것처럼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나서게 하십니다.
이 마지막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맡은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파견을 받은 주님의 종으로 충실하게 살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18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나해) 예수, 우리의 밥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24,3~8 (이것은 주께서 너희와 계약을 맺으시는 피다)
제2독서 히브 9,11~15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
복 음 마르 14,12~16.22~26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에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들의 미래는 불안했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약속의 땅에는 이미 다른 민족이 자리를 강하게 잡고 있었고 또한 그리로 가는 길목마저 사나운 적들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친 사막 위에서 먹을 것, 마실 것 등이 늘 걱정이었기 때문에 과연 에집트를 탈출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자신들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예생활에서 탈출하면 거기에 살 길이 보장된 미래가 환하게 열려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위험한 도전이었으며 그리고 그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준 사건이 시나이 산의 계약입니다. 하느님께선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바로 그들의 하느님이요 구원자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만 따르면 미래가 확실하게 보장될 것입니다.
계약 예식은 그랬습니다. 먼저 소를 잡아 그 피의 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항아리에 담아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계약서를 읽어 준 다음에 그들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따르겠다고 다짐하자 항아리에 담겨 있던 피를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계약(구약)이며 짐승의 피로 맺어진 계약입니다. 따라서 피로 맺은 계약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계약을 어기면 막말로 피를 봐야 합니다. 그러나 옛 계약은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불성실로 파기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계약이 필요했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확고하고도 분명한 계약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계약은 짐승의 피로는 안됩니다. 그건 제물이 너무 약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으려면 영원히 변치 않는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제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요 예수님은 당신의 몸과 피를 온전하게 바치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사제이며 동시에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예가 전에도 후에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을 음식으로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계약식에서 중요한 것은 식사입니다. 구약에서도 계약이 끝난 후에 그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먹고 마심으로써 계약의 당사자가 되고 계약에 약속된 축복자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봉헌하시기에 앞서서 그 계약 예식을 거행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후만찬입니다.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며 말씀 하셨습니다.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주님께서는 또 포도주 잔을 돌려 마시게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이제 계약 예식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이며 동시에 우리가 먹고 마셔야 할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옛날 백성(이스라엘)은 소를 잡아 그 예식을 기념했지만 오늘의 우리는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그 예식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인간에게 무상으로 내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밥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밥으로 내줄 수 있는 신앙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몸을 거저 먹게 되는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아무 조건 없이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계약을 실천하는 길이요 또한 완성하는 길입니다.
언젠가 레지오 단장을 새로 뽑는데 애로가 있었습니다. 사실, 단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녀님과 상의를 하고 꾸리아 단장과 협의를 했더니 아무개가 적임자라 해서 일단 마음에 작정은 했지만 그분이 워낙 바쁘신 분이라 망설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한번 찾아서 부탁을 드렸더니 그분 첫마디가 그랬습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밥입니다. 신부님께서 하라시는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그 대답을 듣고 감격했습니다. 대답이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에게도 속상한 일이 있고 힘든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땐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제 감정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땐 저도 주님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아룁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밥입니다. 주님 원하시는 대로 잡수십시오.\” 이렇게 한마디하고 나면 영혼이 개운합니다. 예수님께 내 인생을 밥으로 드리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분이 원하신다면 무엇을 피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음료수로 오셨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먹어도 죽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과 피만은 우리를 영원히 살릴 수 있는 최고의 음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음식을 무상으로 먹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을 위해 밥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고 있으며 교회는 또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밥이 됩시다. 이것이 그분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19 성체성혈 대축일 (마르 14,12-lS.22-28)(나) 꿀떡 신앙인
김영진 신부
신학교 생활을 마칠 때, 나를 오랫동안 지도해주신 영적지도 신부를 찾아뵙고, 그동안 감사했던 인사를 올리며 한 말씀 부탁드렸다. “신부님, 이 못난 놈이 이제 신부가 되어 세상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소중한 말씀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러자 빙그레 웃으시며, “김부제, 당신은 신부가 되면, 매일 같이 당신 손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될 것인데, 그 때마다 당신의 손에서 빵과․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기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세요. 그러면 당신은 일생을 훌륭한 신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을 들은 나는 사실 조금은 실망하였다. 기왕이면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든가 하는 등의, 간단하고 유식한 문자를 말씀해주시면 액자에 넣어 벽에 걸고, 두고두고 생각하려 하였는데, 신학교에서 지겹도록 듣고 배워온 성체신비에 대한 말씀을 하실 게 뭐람 하는 생각에서였고, 두 번째로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기적은 당연히 믿는 것인데, 안믿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당연하고 쉬운 걸 말씀해주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신부가 되어 미사를 드리다 보니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기 위하여 손에 쥘 때마다 신부님의 말씀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너, 정말 네 손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을 믿느냐? 그 기적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것인지를 깨닫고 있느냐? 나는 정말 네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듯했다.
또한 축성의 마지막 부분인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하는 기도문을 바칠 때에는, 죄스럽고 부끄러웠다.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당신의 피를 우리를 위하여 흘리셨던 예수님처럼, 나도 그렇게 행하여라하는 명령인데, 그렇게 실천하지 못하고 살면서, 입으로는 그 기도문을 바치기 때문이었다.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사실 나는 신부가 된 지 어언 18년이 되어가지만, 미사를 드릴 때마다 18년전 지도신부의 그 말씀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지도신부께서는, 가슴에 품고 살아갈 소중한 한 말씀을 청한 나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값진 말씀을 해주셨다. 예수회 소속으로 계시는 그분을 가끔씩 지면에서 뵈올 때마다, 나는 18년 전 그 말씀을 주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요즈음 어떤 개신교 신자가 이곳에서 몇달을 지내고 있다. 그 사람은 전도사가 되기 위하여 개신교 신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은 천주교로 개종을 원하고 있다. 나에게 세례를 청하면서 영세 후 자신의 몸과 피를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하여 바칠 수 있도록,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한번도 천주교로의 개종을 입밖에 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너무나 소중한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몸과 피를 내놓듯이, 나도 내 몸과 피를 내놓아야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성체성사가 얼마나 거룩하고 소중한 신앙의 핵심인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10여년 전 풍수원 성체거동 행사 때의 김종인 신부의 강론 말씀이 떠오른다. “여러분, 신부가 성체를 주면서 \’그리스도의 몸\’하면 무어라고 답하지요?\” 그러자 “\’아멘.\’이라고 답합니다\”하고 신자들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이 있지요?\”라는 물음에 교우들은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사실 그 다음에는 영성체를 하였으니 자리에 가서 앉아 기도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신부께서는 “그 다음에는 꿀떡이지요. 꿀떡 삼켜버리고 마니까\”라고 말씀을 하였다. 신자들은 \’와\’하고 웃었지만, 그 순간 나는 마음에 무엇인가 때리는 것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아멘-꿀떡\’이 바로 나에게 하는 말씀이었다.
얼마나 많은 성체성사를 정성도 없이 형식적으로 거행하며, 참여하여 왔던가! 부끄럽게도 술이 덜 깨어 미사를 드린 적도 있고, 늦잠을 자다가 허겁지겁 미사를 드린 적도 있으며, 몸이 좀 아프다고 미사를 드리지 말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나를 위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놓으신 예수님께 얼마나 불충한 짓이었던가! 성체는 \’그리스도의 몸-아멘-꿀떡\’하듯이, 그냥 삼켜버리고 말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리스도처럼 내 살과 피를 이웃을 위하여 내어 주어야만 된다는 간청이요, 명령이다.
그리스도의 몸-아멘-꿀떡
불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 한마리가 새끼를 낳고 피를 흘린 채 굶어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중 한사람이 호랑이가 불쌍하여 친구를 먼저 보내고,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호랑이 입에 피를 넣어 주었다. 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린 호랑이가 앞에 보이는 그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나를 살리기 위하여 몸과 피를 내어 주신 예수님을 정성도 없이 형식적으로 꿀떡 삼키고 마는 꿀떡 신앙인, 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린 후 자기를 살린 이를, 오히려 잡아먹는 호랑이 신앙인은 아니었던가를 묵상해 본다.
20 ‘성체 성혈 대축일’과 ‘6.25 전쟁 발발 50주년’< 마르 14,12-16.22-26> (나)
김영남 신부
금년 성체성혈 대축일은 우리 한국 신자들에게는 특별히 뜻 깊은 날이다. 바로 이 날이 동시에 골육상쟁의 비극이었던 6.25전쟁 발발 50주년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죄악의 극대화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면,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체성사’는 바로 전쟁과 정 반대의 것을 표현한다. 성체성사는 바로 ‘사랑 때문에 당신 생명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사랑의 성사’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현재 가진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고 싶어하며, 그것도 부족하여 나중에는 아예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계속 더 가지고 싶어한다. 이러한 욕심은 개인에게만 있지 않고 가족, 사회, 국가에도 있다.
탐욕이 국가적 차원에서 빚어내는 결과가 바로 전쟁이라고 생각된다.
수많은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고, 이웃과 이웃을 원수로 만들었으며, 수백만에게 반세기가 넘도록 생이별을 강요하는 체제를 낳은 그 참혹한 6,25 전쟁을 기념하는 오늘, 한국의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며, 다시 한번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당신 자신까지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몸으로 되새기고,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로 다짐한다.
그러면 오늘 복음 말씀을 좀 더 가까이 살펴 묵상하자. 오늘 복음에는 초대교회의 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던 ‘성체성사’(만찬례)에 관한 전승이 실려있다. 신약성서에는 신약성서가 문헌으로 쓰여지기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성체성사가 거행되었음을 증언해주는 구절들이 있다(예컨대, 1고린 11,23-25). 그런데 오늘 주일복음으로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최후만찬 전승’에서 의미 심장한 것은 빵을 떼시며 하시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다: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 몸”은 예수님의 “육신”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분의 인격 전체를 뜻한다. 예수께서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시는, 이 특별한 “빵과 포도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조금 뒤에 나오는 다음 말씀에 나온다: “이것은 나의 피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그분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가리켜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많은 이들을 위하여”라는 말은 히브리어나 아람어의 한 표현 방법으로, 실질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를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표현은 “계약의 피”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애급기 24,4-8에 나오는 “시나이 계약 체결”의 장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출애급기의 이 대목에 의하면 모세가 제물로 바쳐진 수송아지의 피의 절반은 하느님을 상징하는 제단에 뿌리고, 절반은 백성들에게 뿌리면서 “이는 야훼께서 너희와 맺으시는 계약의 피다”라고 말한다. 희생제물의 피를 통해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계약이 맺어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복음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 피흘리시며 돌아가심으로써 새롭고도 결정적인 방법으로 계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주시는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심”으로써 이 새로운 계약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끝 구절에서 예수님은 최후만찬, 곧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로 시선을 돌리시며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이 말씀에는 수난을 앞두고 헤어짐의 고통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완성이라는 희망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아시다시피,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설교 말씀의 핵심 내용이었고, 가끔 종말론적인 잔치의 형태로 묘사되곤 하였는데, 예수님은 이제 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 포도주 잔을 마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과 그 수난과 죽음으로 당신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반영해 준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이 명심하여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 자신까지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거기에 감사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의 삶을 본받아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 줄 각오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당신 자신까지 온통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의 성사”를 거행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조금도 열지 않으려 하고, 증오와 불신 또는 이기주의로 가득 차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참조: 1고린 11, 21-22).
마침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모처럼 우리 한민족 전체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대희년을 맞이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새로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고 생각된다.
이 은혜를 결코 헛되이 하지 말아야겠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분께서 우리 민족을 평화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계속 드리며,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민족 화해의 길’에 앞장서 나아가야겠다.
21 성체성혈 대축일 (마르 14,12-16. 22-26)(나) 내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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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 이야기
마르코 복음서 14장52절과 요한 복음서 19장3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목요일 저녁 때 최후만찬을 드시고 금요일 오후에 처형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에 성체와 성혈 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최후만찬을 제정하시면서 하신 행동과 그 행동의 뜻을 밝히신 빵에 관한 설명과 포도주 잔에 관한 설명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시면서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14,22).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빵을 나눈 후에 잔을 돌리면서 ‘이는 내 피입니다. 계약의 피로서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14,23. 24). 예수께서는 한평생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사신 삶답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시면서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해서 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시겠다는 생각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빵을 쪼개는 행위와 많은 이들을 위해서 피를 쏟는 행위는 곧 닥칠 예수님의 비극적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이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 교회를 창립하고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본떠서 성만찬례를 거행했습니다. 이 성만찬례에는 그리스도론적 의미와 교회론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즉, 성만찬례는 과거에 우리 모두의 죄를 속죄코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부활하여 빵과 포도주 안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장차 재림하실 미래의 주님을 기다리는 예수님 잔치라 하겠습니다.
또한 성만찬례에는 친교(코이노이아)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즉, 성만찬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나누는 친교요 그리스도인들 서로 간의 친교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그리스도인간에 하나되는 잔치가 곧 성만찬례입니다. 그런데 친교는 가진 것들을 나눌 때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을 ‘빵을 나눔’이라 했던 것입니다(루가 24,35;사도 2,42). 따라서 성만찬례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나눔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님께 일치하는 것이며, 또한 형제들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례에 참석할 때마다 예수님의 죽음을 되새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마음껏 찬양하고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서로 친교와 나눔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만찬례에 참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자신들을 살피고 주님의 몸과 피를 합당하게 모셔야 할 것입니다(고린 11,27 -30).
22 성체성혈 대축일 (마르 14,12-16. 22-26)(나) 보내지 못한 편지
김명순 루피나/영문학 박사
6. 25당시 우리 집과 담을 같이 하고 살던 이웃은 이근영 선생님 댁이었습니다. 20여 년 넘게 한 집안처럼 그 분은 우리식구 모두의 건강을 돌보아주시던 내과 의사이셨습니다.
그 분은 가정적으로도 유복하시어 슬하에 4남 2녀를 두셨으며, 큰 아드님은 서울 의대 대학원생, 둘째 아드님은 치과 대학생이라 우리 골목에서는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그때 단발머리 여중생이던 제게도 검은 망또를 입은 그들이 참으로 멋져 보였습니다.
그러나 강압에 못 이겨 인민군의 군의관 임명장에 서명을 해야만 했던 큰 아드님은 영영 소식이 끊겼고, 둘째 아드님은 수복 이후 국군에 입대하여 전사하는 비극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들 한 사람은 인민군으로, 또 한 사람은 국군으로 잃었으니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 할 수 있으며, 단일 민족으로서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이후, 그 분은 새벽이면 슬프디 슬픈 어조로 시조를 읊었고 그 소리를 들으시던 저의 어머님께서는 그 분께서 가슴에 맺힌 한을 토해내는 것이라며 매번 눈시울을 적시셨습니다.
금년은 이 선생님의 탄신 100주년입니다. 서울 의대 이순형 교수인 셋째 아드님께서는 부친의「탄신 100주년 기념 사진첩」을 만드셨습니다. 사진첩에는 그분의 어린시절, 학창시절, 의료인, 자상한 가장으로서의 모습, 큰 아드님의 대학 입시 때의 수험표, 둘째 아드님이 군대에서 보낸 마지막 엽서 등 어찌도 그렇게 꼼꼼히 모으셨는지! 한 장 한 장 사진첩을 넘기면서 저는 50여 년 전의 기억의 편린을 더듬으며 깊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시선을 사로잡는 편지 한 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사를 알 수 없는 큰 아드님에게 쓴 보내지 못한 편지였습니다.
“기형에게.
6. 25 난리 때 네가 홀홀히 작별하고 나간 후로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너의 생각이 간절하다. 간사한 마음일까. 혹시 너는 죽었느냐 살았느냐 이것조차 알지 못해서 호랑이한테 물려간 것 같아 구곡간장이 다 스러지는 것 같다. 살았다고 믿다가도 죽었을까 의심나고, 죽었을까 하다가도 살았을 줄 믿어진다. 슬프고도 아프도다. 너도 분명코 이 아비가 죽지 않고 살아있을 것을 믿을 줄 아노라.
오늘 계사년 추석날을 당하여 너 나간 지 벌써 만 3년이 지난 8월15일 차례도 지내기 전 첫 새벽에 네 생각이 먼저 나서 너의 건강을 축복하면서 이 글을 적노라.”
가족이란 혈육과 사랑으로 뭉쳐져 서로가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50여 년의 세월동안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그리움에 몸부림치시던 그분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고희가 넘은 연세에 남쪽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계시리라 생각되는 큰 아드님, 남쪽의 어느 곳에서 한 줌의 흙이 되어 조국의 밑거름이 되었을 둘째 아드님, 이들은 아버님께서 쓰시고도 보내지 못한 편지를 읽고 목메어 우셨으리라 생각됩니다.
6월15일 남북 양측 대표단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고 노래 부르던 모습을 보며 오늘따라 북녘 산하가 더욱 가깝게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