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9주일
6. 최익철 신부(나)/ 14
7. 안충석 신부(나)/ 15 8. 김철재 신부(나)/ 18
9. 교구 주보(나)/ 20 10. 유안진 시인(나)/ 21
11. 기도는 영혼의 휴식(나)/ 22 12. 안식일의 주인(나)/ 24
6 연중 제9주일 마르 2,23-3,6 (나) 일단 정지
최익철 신부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창세기 2:2)
대부분의 교통사고, 병의 발생, 무슨 일의 실패 등, 모든 면에서 이 일단 정지가 적용되는 것 같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속도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럴수록 일단정지 즉 적당한 휴식, 이것도 어려우면 적어도 잠간의 쉼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기계나 인간의 신체나 정신도 일정한 이 정지가 없으면 견디어내기도 어렵거니와 계속만 하면 파열되고 만다. 이 정지 또는 휴식으로서 있을 수 있는 사고만 방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일에 활력마저 마련해 준다. 밤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밤을 새면 다음날 일에 지장이 많다. 계속할 수가 없다.
구라파에 있을 때의 일이다. 자취를 하고 있을 무렵인데 하필 주일날 오후에 세분의 손님이 들이닥쳤다. 이들을 대접할 생각으로 자전거를 타고 고기간에 갔는데 문이 닫혔다. 정육점마다 문이 굳게 닫혔다. 정육점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두드려도 아무도 나오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손님들을 모시고 레스토랑에 가고야 말았다.
이처럼 서구에서는 주일날 대개의 가게는 문을 닫고 오전에만 식료품, 빵 가게가 열릴 뿐, 오후에는 모든 가게의 문이 닫힌다.
불란서에서 배를 타고 일본가지 한 달을 오는데 동쪽으로 올수록 쉬는 주일을 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는 주일날도 일을 아니하면 생활 유지가 곤란한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주일 판공 관면을 전국적으로 준 것이다. 하지만 주일날만은 일을 아니하거나 가게를 닫는 프로테스탄트 교도가 많다. 그렇다 해서 주어진 관면을 취소하자는 것은 아니다.
주일날은 거룩하게 보낸다는 즉 하느님을 더 공경한다는 종교적 이유는 고사하고라도 이 날만은 몸과 마음에 휴식을, 즉 일단정지를 시키는 것이 온당하지 않는가 말이다. 주일날 하루 더 번다 해서 갑자기 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루 덜 벌었다 해서 당장 집안이 망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경우마다 시비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고 다만 누구에게나 무슨 일에나 신앙 생활에도 때로 정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쉬지 않고 일한다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연 1회 또는 월 1회 피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좌우, 전후를 살피고 모든 것을 다시 가다듬어 더 잘 가게하고 있다. 이 까닭에 정지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은 시간이나 체력이나 정력의 허비나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더 위험하고 나중에 기울 수 없는 손해를 보게 하는 수가 많다.
주께서 우리에게 쉼의 필요성까지 일러주시며, 또 그 날의 거룩함을 주시고 복을 주시니(창세기 2,3) 우리는 주께서 행하신 길로 함께 나아가자.
7 연중 제9주일 마르 2,23-3,6 (나) 남의 말을 하지 않는 망부석의 교훈
안충석 신부
태초에 주께서는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대등한 돕는 이를 만들어 그에게 주겠노라.”하시고 사람이 자기 아닌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살 수 있도록 마련하신 것입니다. 서로 다른 인간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만 함께 서로 모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무엇으로 어떻게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겠습니까? 그것은 나 자신이 생각한 것을 남에게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열 길 물 속은 알 수 있어도 한 치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 정말로 사람의 내면적인 것은 천주님께서만 아실 일이지 우리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고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본다면 우리들의 말과 행동이야말로 우리들 자신의 사랑 정도를 알아볼 수 있는 단 하나 밖에 없는 가장 확실한 외적 표시며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에 있어서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셨습니다. 복음 성경에서도 “너희들이 내가 한 말과 행동 중에 그 어느 잘못으로 나를 십자가에 못박느냐”고 힘있게 반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는 말처럼 이 세상에 흔해 빠진 말도 없습니다. 그 말의 책임이 중요합니다. 주께서는 그 말씀을 증명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저 십자가상에 못박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들 교우들도 누구나 다 하나같이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이런 사랑을 주고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생황신조를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남들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습니까? 혹은 목마를 때 먹을 물을 주고 기뻐하는 자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같이 슬퍼하였습니까? 그저 생각뿐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 할 지라도 우리는 남을 도우며 사랑해야 합니다. 아마도 부부의 사랑이 그렇게 생각뿐이라면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말과 행각으로 남을 사랑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늘 과연 우리들이 하는 말로 남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솔직히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말은 사랑하는 말과 사랑을 배반하는 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저 생각 없이, 할 일 없이 지껄이는 말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복장을 짓찧고 있는 것입니까? 말하기야 쉽습니다.
입만 놀려서 그렇다, 안 그렇다, 말했다, 말 안 했다, 긍정 부정을 자기 편한 대로 무책임하게 한 대서야 그게 어디 소리 즉 공기의 진동이지 말이라고나 할 수 있습니까? 말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무책임하게 한 말로써 결과적으로 저지른 죄악의 벌이 얼마나 지겨운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덕을 닦는 수도원 중에는 일생 동안 말 한마디 안 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 같은 것도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저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망령된 판단과 비방만을 일삼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저 바리사이처럼 자기만이 꼭 필연적으로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인양 떠벌리는 것이올시다.
심지어는 남의 결점을 발견하는데 야릇한 쾌감마저 느껴 가며 나만은 그렇지 않고 덕이 있는 양 남의 명예 손상만이 자기 명예를 올리는 원인처럼 온갖 교만과 허영과 변태를 일삼습니다. 또 어떤 이는 자기를 변호하기 위하여 남도 자기 같거니 하고 혹은 자기 양심의 가책을 면하고자 망령된 판단을 하여 사실같이 즐겨 말합니다. 더군다나 남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줏대도 없이 흘리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하고 가증스러운 것은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의 혀가 뱀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서 말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 말하는 대상을 죽입니다. 또한 그 말을 듣고서 부화뇌동하는 사람을 죽입니다. 삼중으로 살인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자니 할 말 못할 말 그저 쉴 사이 없이 말만 하다가 이제 죽게 되면 그 때만은 아무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됩니다. 저 북망산에 묻힌 무덤은 영원한 깊은 침묵뿐입니다. 다만 그 무덤을 지키고 선 망부석만이 그 사람의 한 많은 인생 편력을 저 혼자만 아는 양 언제까지나 묵묵히 지키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하루는 그 산 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주 훌륭한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자 덕에 넘친 수도원장이 나오셔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는 이 수도원에서 일생 동안 완덕으로 나아가는 수도생활을 하고자 왔습니다.” 하고 그 청년은 공손히 대답했습니다. 한참 침묵이 흐른 다음 수도원장은 “그럼 당신을 시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한 가지 꼭 하셔야 될 일이 있는데 하시겠습니까?” 그 청년은 수도생활은 장상에게 순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하겠습니다.”라고 뚜렷이 대답했습니다.
원장은 잠자코 손을 들어 저 건너 산을 가리키면서 “저기 망부석이 보이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그 망부석한테 가서 오늘 하루 종일은 칭찬만 하고 해가 지면 수도원으로 돌아오십시오.”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청년은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고 대답하고 수도원을 등지고 무덤을 향해서 걸어가면서 “온 세상에 별난 일도 다 시키신다.”고 이상히 생각했습니다.
번다함 세상을 끊고 수도원에 살자니 이런 짓도 하게 되는 구나 하고 착잡한 심정으로 가서 망부석을 보고 칭찬을 늘어지게 했습니다. “너는 세상에 살아 있을 때 가장 충신이고 정2품을 받은 가장 훌륭한 사람이고 너의 족보는 지체 높은 분들로 빛나며, 너야말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다.” 그 청년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해가 질 때까지 칭찬만 늘어놓고서 더 이상 입을 벌릴 수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수도원으로 돌아와서 푸근히 하룻밤을 잤습니다. 그 이튿날 수도원장은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어제 그 망부석한테로 가서 하루 종일 욕만 하고 오십시오.” 그 청년은 “네”하고 공손히 대답하고서는 수도원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건 갈수록 태산이로구나. 덕 닦으러 왔지 하고많은 덕 중에 변덕부리러 온 것은 아닌데.”하고 투덜거렸습니다.
그 청년은 하루종일 망부석의 뺨을 치며 침을 뱉어 가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너는 역적이고 배신자이고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은 탐관오리다. 아마도 너 같은 인간은 세상에 또 없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할 말을 다하고 진종일 입에 게거품을 품어가며 욕을 퍼붓고 지쳐서 수도원 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거긴 인자하신 아버지와 같은 원장님께서 반가이 맞아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 순간부터 당신을 우리 수도원의 지원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또한 천사들만 사는 곳도 아닙니다. 이 세상처럼 이 곳에는 당신과 똑같은 형제들이 수 십 명 같이 살고 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늘 같이 대하면서 이제 당신은 그들로부터 수없이 많은 말을 들을 것입니다. 때로는 칭찬을, 또 때로는 욕설을 밥먹듯이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이나 망부석한테 그런 말을 시킨 것은 바로 이 까닭입니다.
당신한테 칭찬만 듣던 어제도 또 욕설만 듣던 오늘도 망부석은 무어라 합디까? 그저 묵묵히 저 할 일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이 수도원에서 앞으로 듣게 될 많은 말을 상관 말고 당신의 수덕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그 망부석의 교훈을 평생 깊이 간직하십시오.” 그 후 그 지원자는 훌륭한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일상생활의 신조가 ‘망부석의 교훈’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수록 이 망부석의 교훈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말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또 남도 주체할 길 없는 십자가를 얼마나 남에게 지우고 있는 것입니까? 전쟁터에서 지휘관 명령 하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가? 법정에서는 증인의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죽이고 살립니다.
말이란 얼마나 중요합니까? “대개 마음속에서 쌓인 것을 입으로 말하나니.”라고 주께서 분명히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남의 말을 할 때 또한 남에게 말을 들을 때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고 또 이 망부석의 교훈을 잊지 않고 애덕을 거스르는 말은 예 입에 담지도 맙시다.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피땀을 흘리시며 갖가지 배신하는 말과 환상으로 고통을 받으신 예수께 “스승이여, 안녕하시나이까?” 하면서 침구 하는 배반자 유다에게 ‘벗아’ 하신 기막힌 사랑의 말씀을 되새겨 우리는 배신한 우리들의 말을 지정한 통회의 눈물로 씻어 버립시다. 아멘.
8 연중 제9주일 마르 2,23-3,6 (나) 일하는 주일
김철재 신부
주일은 일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날이 아니라 일을 “해야 한다”는, 형제애를 실천하라고 명하는 적극적인 날이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主日이 어떤 날인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은 주님의 날이고, 이 날은 미사에 참석해야 하고 중노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주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지만 미사에 참여하고 얼마간의 봉헌금을 바치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주일의 의무를 다 수행하였다고 생각하고 포근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의무를 실천하였다 해서 주일을 훌륭하게 지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것, 즉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쉽사리 잊어버리는 것이 있으니 ‘해야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바리사이들을 율법주의자라고 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지켰습니다. 규칙을 지킨다는 점에서 볼 때 바리사이들이 우리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지 말라’는 계명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데만 집착한 나머지 ‘해야 할 일’은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실천하는 사람을 비난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율법을 지키는 것은 지혜의 길이며 생명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을 사람이 조금도 변형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규정된 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는 것에만 집착하다 보니 율법의 본 의미를 망각하고 외부적 형식을 중시하는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의 규정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창조사업을 찬양하고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일종의 축제일입니다. 그러나 형식에 치우치다 보니 안식일은 ‘주님의 날’ ‘기쁨의 날’이 아니라 ‘율법의 날’ ‘힘든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800m 이상 여행할 수 없고 심지나 기름을 아끼기 위하여 등불을 끄지 못하며 손톱이나 수염을 깎거나 머리털을 뽑을 수 없다. 또 신에 박힌 못도 짐이 된다 하여 못 박힌 신을 신을 수 없으며 그날 먹어야 할 음식도 만들 수 없다. 그리고 추수나 타작은 말할 것도 없고 밀 이삭을 줍는 일까지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비벼 먹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예수께 다가오자 제자들의 행위는 위법적인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사실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는 바리사이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 행위요, 손으로 밀 이삭을 비비는 것은 타작이며, 껍질을 불어서 알맹이를 추리는 것은 요리행위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돼는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을 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하지 않는 날’ 즉 여행하지 않고 등불을 끄지 않으며 요리하지 않고 병자를 치유하지 않는 날입니다.
이러한 안식일이 사람에게 안식을 주는 날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에게 안식을 빼앗고 무거운 짐을 지우며 철저하게 인간을 구속하는 날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결코 짐스러운 날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날이니 사람이 안식일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이 창조된 것은 안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에게 계명준수의 의무를 부과하는 날이 아니며, 안식일을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무언가 ‘해야 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의 안식일인 주일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처신하고 있습니까? 주일미사에 빠지지 아니 하고 중노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의 의무가 다 수행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손을 펴 주시고 반신불수자가 뛰어다니게 하시며 맹인들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해야 하는 날’입니다. 자신의 안식과 성화뿐 아니라 이웃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웃과 형제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세상 마치는 날 주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질책 받을 것입니다. “주일에 사람을 위하라고 명했는데 당신은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9 연중 제9주일 마르 2,23-3,6 (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마르 2,23-3,6)은 안식일 논쟁입니다.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의 하루가 안식일인데 글자 그대로 일을 그만두고 쉬는 날입니다. 유다교 율법은 명령 248조와 금령 365조를 합쳐서 모두 613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이 39가지입니다. 39가지 규정 중에(미슈나 샵바트 7장) 두 가지 예만 들면, 추수작업을 해선 안되고 목숨을 잃을 염려가 없는 한 병자를 치료해도 안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선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어먹자 바리사이들이 와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합니다(2,23-28). 또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자 역시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합니다(3,1-6).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항의를 받으시고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유다교의 율법들을 상대화시키고 심지어는 과감하게 폐기시키셨습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마태오 복음 5장 17-48절에 들어 있는 여섯 가지 대립명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안식일법을 상대화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선조들에 의해서 안식일법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휴식을 위해서 생긴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안식일법을 상대화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 이념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법 준수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운 병자뿐만 아니라 일반 병자까지도 고쳐 주는 선행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심으로써, 안식일 법보다 사람을 아끼셨던 것입니다(3,4).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도보다 중요한 것은 은총이고 법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공동체의 질서와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과 제도가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때로는 법과 제도가 기득권자들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법과 제도보다는 사랑과 은총으로써 교우들을 이끌어, 신앙생활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되도록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법과 제도의 논리와 형식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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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연중 제9주일 마르 2,23-3,6 (나)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믿음
유안진 시인
옛날 중국의 한 사찰에서 한 고승이 설법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 설법이 따분했던 때,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마당에 세워 둔 장대의 펄럭이는 소리가 나서 다들 마당을 내다보았답니다. 설법하던 스님은 청중을 환기시키고 싶었던지 “지금 저 마당의 장대의 깃발이 움직이는 것은 바람 때문이냐? 깃발이 움직였기 때문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바람이 불어서 깃발이 움직였지 깃발이 저절로 움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이들은 “깃발이 움직였으니까 바람이 분 것을 알게 됐지, 깃발이 안 움직였으면 바람이 분 것을 어찌 알 수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의견이 갈라져 떠들썩한 중에 청중 속에 앉아 빙긋이 웃고만 있는 한 청년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승은 그 청년한테 물었습니다. 그는 “바람이 움직인 것도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며, 다만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고승은 그 청년의 머리를 깎아주고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 “가르침을 구합니다”라고 했다는데, 그 청년이 바로 유명한 혜능(慧能)조사로서 선불교의 육조 중 한 분이라고 합니다.
이 얘기를 통해 두 가지의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오심도 그렇게 체험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상(詩想 또는 時像)도 그렇게 떠올라 주어야 한 편의 시가 제대로 쓰여진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분 때문도 깃발이 움직인 때문도 아니며, 다만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고. 이 놀라운 깨달음은 머리로 따져서가 아닌, 마음으로 깨달아지는 인간내면의 몫이 아니였을까요? 이는 마음이 순수할 때만 찾아오는 놀라움이 아닐까요?
미국의 사냥꾼들이 아프리카로 맹수사냥을 갔는데, 아프리카의 몰이꾼들이 맹수가 있는 곳을 앞두고 앉아 쉬고 있었답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들은 너무 급히 달려오느라 마음이 미쳐 못 따라와서 마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은 딴 데 두고 기도문만 외우는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우리 마음에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사를 드리고 나올 때나 잠시 기도 드리고 나올 때 즐거운 기분이 되기도 하는데, 갑자기 모든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느낍니다.
시상이나 영감(靈感)이나 믿음의 체험이든 간에, 먼저 내 마음을 순수하게 해야만 그런 순수함이 나를 찾아와 줄텐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머리로 따지기를 교육받은 탓인지, 어느 새 마음보다는 머리가 늘 앞서고 맙니다. 믿음이나 시 쓰기나 마음의 몫인데 머리에 맡기려 듭니다. 이 시대 우리의 불행인 마음보다 머리로 따지는 버릇부터 고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군요.
예수님도 머리 아닌 마음을 앞세우고는 아이 같아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어릴 적의 순수함을 회복하고 싶습니다.
11 연중 제9주일 마르 2,23-3,6 (나) 기도는 영혼의 휴식
참으로 나를 사랑하려면 나를 미워해야한다. 참으로 나를 높이려면 나를 낮추어야 한다. 참으로 나를 부유하게 하려면 나를 비워야 한다. 참으로 나를 기쁘게 하려면 나를 괴롭혀야 한다. 참으로 나를 살리려면 나를 버리고 죽어야한다.
우리 안에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나」가 서로 대립하여 싸운다. 하나는 자기의 욕망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영적인 나」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욕망을 따르려는「육적인 나」이다.
「영적인 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보고 듣고, 알고 맛보고 행하고자 한다.
「영적인 나」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겠다는 소원만을 지닌다. 그리고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만 인생을 살고자 한다.
반면에「이기적인 나」는 자기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만을 보고 듣고 알고 맛보고 행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욕망은 서로 상반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욕망을 따르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고, 반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자기의 욕망을 버려야한다. 「육체의 욕정을 채우려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정을 거스릅니다」(갈라 5,16-17).
「육적인 나」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의 교만과 탐욕과 육욕만을 만족시키러고 하기 때문에, 사람을 악하게 타락시킨다. 그러므로써「육적인 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떠나서 자기 자신과 피조물에게만 집착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기의 명예를 더 키우고, 자기의 소유를 더 불리고, 자기의 쾌락을 더 늘리는 것이「육적인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된다.
우리의 인생은 「영적인 나」와 「육적인 나」사이의 투쟁이다. 이 투쟁의 결과에 따라 사람은 죄인이 되기도 하고 성인이 되기도 한다.「영적인 나」가「육적인 나」를 이기고 승리하면 사람은 성인이 되고,「영적인 나」가「육적인 나」에게 패배당하면 사람은 죄인이 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완전한 성덕에 이르기 위해서 따라야할 유일하고 완전한 모범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길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사람이 자기를 버릴 때 버림받는 것도「나」이고, 버리는 것도「나」이다.
버림받는 나는 「육적인 나」이고, 버리는 나는「영적인 나」이다.
「영적인 나」가「육적인 나」를 완전히 버림으로써「육적인 나」가 완전히 죽게될 때, 그 때 비로소 사람은 완전한 사랑에 이르므로써, 성덕의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에게 「영적인 나」와「육적인 나」사이의 투쟁은 영원한 운명이 걸린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싸움은 하느님의 도움없이 흔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겹고 지루한 싸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영혼의 휴식이다. 일에 지친 피로한 육체가 휴식으로 다시 힘을 회복해야 하듯이, 「육적인 나」가 죽기 위해서 필요한 유혹과 시련과 역경과의 투쟁으로 피로해진 영흔도 기도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온 힘을 얻어내지 않으면, 기진해서 쓰러지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일상의 업무에서 벗어나고 세상의 소란한 소음을 피해서, 침묵과 고독 속에 홀로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도는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무한한 빛과 사랑의 바다이신 하느님께 잠겨 드는 것이다.
이 때 사람의 정신은 하느님의 빛으로 밝혀지고,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뜨거워진다. 그리고 사람은 하느님의 빛 속에서 하느님의 완전하심과 자기자신의 비천함 그리고 피조물의 무가치함을 더 밝게 보게 된다.
그러므로써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더 열렬해지고, 반면에 피조물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는 더 멀리 이탈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이 기도라는 빛과 사랑의 바다에 잠기게 되면, 자기를 더 완전히 버리고 비우고 낮추게 된다.
이렇게 해서「육적인 나」는 더 완전히 죽게되고 그럴수록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더 강해지고 완전해진다. 그래서 하느님의 빛으로 밝혀진 영혼은 다른 사람의 허물과 결점을 더 잘보게 되지만, 그 때문에 멸시와 반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너그럽게 이해하고 동정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교만에 빠지지 않고, 단지 그런 허물과 결점에서 지켜주신 하느님께 감사할 뿐이다.
기도는 사람의 영혼이 하느님의 무한한 빛과 사랑의 심연속에 잠겨드는 것이고, 거기서 하느님의 빛과 사랑을 길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가 자신을 더 완전히 버림으로써, 더 완전한 사랑을 지니게 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죽은 기도이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굶주린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먹고,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치유시켜 주신다고, 예수님을 공격하는 대목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비록 안식일을 지키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는 기도였기에, 이 사람들의 기도는 죽은 기도였다.
굻주린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동정할 줄 모르는 냉혹한 마음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행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다.
12 연중 제9주일 마르 2,23-3,6 (나) 안식일의 주인
많은 사람들은 미래가 두렵다고 한다. 어떻게 변화할지 어떤 방향으로 튈지 불안하다고 말한다. 세상은 갈수록 편리해지고 부유해지건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늘어간다. 실제로 미래에 대한 학자들의 예견은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미래는 예측일 뿐이다. 현실을 근거로 예측하는 짐작일 뿐이다. 따라서 현실이 바뀌면 미래도 바뀔 수 있다. 현실을 보는 시각이 긍정적이면 미래 역시 긍정적이 된다. 인구증가에 따른 자원고갈과 환경파괴가 불안한 미래의 주역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니 바꾸어야 할 현실은 인간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붙들며 살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우리를 노예상태로 몰고 가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념과 가치관, 제도와 체제, 돈과 물질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알맹이를 못보고 껍질만 보면 미래는 분명 불안할 수밖에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ꡐ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ꡑ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미 밝혀 놓으셨던 것이다. 얼마만큼 이 말씀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가.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일이다.
원래 안식일은 쉬는 날이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도 쉬는 것을 뜻했다. 일을 해서는 안되고 남에게 시켜서도 안되었다.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되었다. 그럼 맹탕 놀기만 하면 되는가. 그건 아니다. 휴식을 취하되 그 안에 거룩함을 지녀야 했다. 쉰다는 것에 거룩함을 담아야 올바른 안식이 되었던 것이다. 율법의 원래 가르침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하게 휴식하는 것인가. 하느님과 연관된 일을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거룩한 것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율법공부에 매달렸고 성서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안식일 법이 강화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안식일(주일)을 의무적인 미사참례 날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주일날 미사참례를 안하면 고해성사를 봐야 하고 그게 귀찮아서 미사에 간다는 사람도 있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주일날 미사참여 하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한 기초단계다. 실제로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모시면 누구나 거룩함을 체험한다. 안식일의 은총인 것이다.
은총은 인간을 풍요로움으로 인도한다. 안식일의 은총은 우리의 시간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연관된 일을 하게 한다. 매 주일날 우리가 이런 생활을 반복한다면 어찌 우리 인생이 밝아지지 않겠는가. 어찌 우리 운명이 하늘로 향해 솟아오르지 않겠는가. 주일이 사람을 위해 있은 것이지 사람이 주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주일날 미사 참례가 의무적인 것으로 느껴진다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신앙은 믿고 의지하는 행위다. 주님께서는 과거에도 잘해주셨기에 미래에도 잘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행위다. 그러니 주일날 우리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주일을 지킨다는 것을 법적인 의무로만 해석해왔다. 그래서 기쁜 주일이 오히려 짐이 되었다. 마지못해 한다면 어찌 은총이 생명력을 발휘하겠는가. 참말 안식일은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가 주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