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하늘에 나타났다



제 1 독서 : 묵시 11, 19a ; 12, 1. 3-6a. 10c



제 2 독서 : 1 고린 15, 20-27a



복 음 : 루가 1, 39-56



해 설



  성모님의 다른 어떤 축일보다도 특히 오늘은 마치 우리가 성모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 걸어가신 그 험난한 여정의 정상에 다다라있는 듯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크나큰 ‘기쁨’의 축제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 “동정 마리아를 공경하며 축제를 지내며 다 함께 주를 모시고 즐거워하자. 천사들도 이 날이 기뻐 다 같이 천주성자를 기리도다.” 복음전 노래에서도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으니 천사들의 군대가 기뻐하는도다.”

  감사송까지도 기쁨과 놀람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에게 그 크나큰 기쁨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해주고 있다 : “오늘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천주의 모친 동정 마리아는 완성될 당신 교회의 첫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네 길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주셨나이다. 온갖 생명의 근원이신 당신의 아드님이 동정 마리아 몸에서 기묘히 인성을 취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는 마리아에게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게 섭리하셨나이다.”

  오늘 독서들의 내용 역시 어떤 사건들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절정은 주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 찬미드리는 마리아의 경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루가 1, 49).



마리아의 특권을 영광스럽게 완성시키는 승천



  사실, 성모승천은 마리아의 생애를 통해 일어난 모든 사건들 즉, 동정잉태, 신적인 모성, 구속사업에의 동참, 십자가 밑에 서 계심, 원시교회의 발전을 위한 능동적 참여 그리고 죽음 –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으로 일어났으리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 – 까지도 영광스럽게 완성시켜준다. 말하자면 이런 모든 사건들의 일치된 도달점은 하늘에 ‘영혼과 육신’의 들어올림을 받으심으로 아들 성자의 무한한 영광에 참여하시게 되는 성모님의 승천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모승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닌다. 즉 그리스도의 생애가 부활사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처럼 마리아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승천’이라는 결정적 사건을 제외한 어떤 증표로써도 이해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 예수와의 관계는 불가분적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 의해 십자가 상에서 파괴된 당신 육체를 포함한 온 존재로써 취하신 그 영광중에 마리아를 들어 높이시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는 부활을 통해 입증된다 : 똑같은 승리가 ‘육신과 영혼으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마리아의 승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은 종말에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상징적 예표로서 그때가 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무덤이 결코 부패시키지 못할 육신과 더불어 당신 영광에 기꺼이 받아들이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배경으로 하고 본다면, 오늘 우리가 거행하고 있는 마리아의 영광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 근본적 바탕이 되고 있는 독서들의 내용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독서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제 2독서라고 생각된다. 이 제 2독서에서 바울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의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필연적 결과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위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실 때까지 군림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리치실 원수는 죽음입니다”(1 고린 15, 20-26).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제 2 아담으로서 인간성 자체를 당신 자신안에서 회복시키시고 첫 아담이 빼앗겼던 ‘생명’을 되찾아주신다 :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22절).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총체적 의미에서의 생명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되찾아주신 ‘영신적’ 생명 –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의해 표현되는 – 과 또한 역사적 체험 안에서 죄의 결과인 죽음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육체적’ 생명 모두를 말한다.

  여하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영신적 생명을 주셨고 장차 우리의 육신도 부활할 것을 보증하신다 ; 두 번씩이나 그리스도께 대해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다”(20절, 23절)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첫 사람”이라고 하는 표현은 농경사회의 문화적 배경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원래 의미는 일 년 중 처음으로 얻게 되는 결실을 뜻한다. 그러므로 특히 소중하고 값질 뿐만 아니라 앞으로 얻게 될 결실의 보증으로서 거두어 들일 수확의 활기찬 표지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물리치실 원수는 죽음입니다”



  이 제 2독서 내용 중에는 방금 우리가 말한 내용과 관련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또 다른 사상이 들어 있다. 즉 여기서 사도 바울로가 “마지막 원수”(26절)라고 일컫는 ‘죽음’이 결정적으로 굴복되는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정복하신 그 나라를 성부께 바치시리라는 것이다(24절) :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실 때까지 군림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리치실 원수는 죽음입니다”(25-26절). 그런 뒤 우리에게는 앞서 말한 총체적 의미에서의 ‘생명’의 결정적 나라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바울로 사도는 여기서 마리아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앙의 조화와 일치된 인식의 차원에 입각해볼 때, 마리아의 수태 첫 순간부터 그녀 안에서 이미 죄의 세력이 굴복된 것처럼 죽음의 세력이 그녀 안에서 이미 정복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로가 ‘죄’와 ‘죽음’ 사이에 설정하는 밀접한 관계를 전제한다면 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죽음도 이미 극복되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역시 그리스도조차 예외가 되시지 못했던 ‘죽어야 한다’는 공통법을 지켜야 할 의미는 면제받지 못했다.

  또한,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친밀한 결합이 그들을 똑같은 영광의 운명에다 결합시킨다 ; 마리아는 그녀의 생명의 본질적인 성성(聖性) 때문에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된 새 세상의 ‘첫 결실’이 되신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모범된 행업에 따라 마련된 무덤의 부패에 대한 면제만으로도 새 세상의 ‘첫 결실’이 되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마리아와 예수의 친밀한 관계는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한 오늘 복음의 내용에서도 아주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 엘리사벳은 “마니피캇”(루가 1, 39-56)을 통해 서정적으로 자신의 포기를 드러내는 마리아의 겸손한 태도에 놀란다.

  이야기할 내용이 많지만 다만 지금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전례적 신비에 보다 더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내용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마리아가 자기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에게 하는 엘리사벳의 축하인사의 내용을 보자 :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2-45절).

  마리아의 ‘신비’에 대한 최초이면서도 가장 훌륭한 엘리사벳의 이 신앙고백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중요한 내용은 마리아는 절대적으로 ‘아들’의 후광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된 여자로 선포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태중의 아들이 복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모성도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하느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모성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43절).

  예수가 없는 마리아는 상상할 수 없다 : 그녀의 모든 것은 아들 예수로부터 나온다. 만일 오늘날에도 마리아가 예수께서 살과 피를 취하신 성령의 궁전이었던 그녀의 ‘육신’을 지닌 채 아들 예수와 함께 천상영광중에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녀의 존재는 결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렇지 않다면, 뭔가가 이치에 안 맞고 어긋나는 점이 있게 될 것이다.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둘째로  중요한 내용은 마리아의 믿음에 대한 찬미이다 :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5절). 복음은 우선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행복을 말하고 나서 마리아는 자신의 사명에 필요한 어떤 결정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 그것은 곧 그녀도 다른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디로 인도할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하느님의 주도권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그녀의 철저한 신앙적 자세이다 :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

  그렇다면 마리아가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그 ‘말씀’의 힘으로는 우리가 성모승천의 신비를 통해 일어났다고 믿고 있는 사실들이 실현될 수가 없었단 말인가? 과연 그 ‘말씀’이 보다 더 큰 일을 실현시켰다면 보다 더 작은 일도 실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미 말했다 : 마리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녀를 아들과 불가분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그녀의 ‘신적 모성’이라 했다. 그 모성을 중심으로 그녀의 앞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오직 그녀의 ‘사명’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 모성의 준비이거나 아니면 완성일 따름이다.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그녀의 사명은 이스라엘의 모든 예언적 기다림을 그녀 안에서 종합하여 성취시키며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놀랍게 채워주실 그 모든 것을 준비한다. 그녀가 자신의 찬미와 감사와 흠숭의 “노래”를 통해 선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명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특별한 경우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느님의 역사적(役史的) 행위의 항구성을 발견한다. 즉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에서부터 “비천한 여종”인 그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장차 일어날 모든 세대를 통해 당신의 자비 곧 무상적 사랑을 들어높이셨고 또한 들어높이실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베푸실 것입니다”(46-50절, 54-55절).

  바로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권력과 부(富)의 논리 그리고 역사를 이루고 지배하려는 인간적 욕구의 논리를 받아들이시지 않으신다 :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 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52-53절).

  하느님이 건설하시는 역사는 가장 어리석은 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동정녀의 몸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을 태어나게 한다든가, 십자가와 삽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준다든가, 무덤을 활짝 열어 죽음의 먹이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생명을 되돌려준다든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분”께서 하신 “큰 일들” 중에 당신 아들의 모친의 “전 생애”에 대한 갚으심도 들어있다는 것이 놀랍고 이상한 일일까? 이것 역시 인간적 행위의 범주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분의 자비와 사랑의 초이성적 논리와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닐까?



“용이 막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이렇게 묵상해볼 때 ‘여인’이라는 표징과 그 여인이 막 낳으려고하는 ‘아들’을 삼켜버리려고 하는 ‘용’의 표징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는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오늘 제 1독서의 장면도 보다 더 명확히 이해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피난처로 마련하신”(묵시 12, 6) 광야에로의 그 여인의 ‘도망’은 전례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모친의 영광스러운 승천에 아주 잘 부합한다.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뱃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 용은 자기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버리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뿐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갔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 곳은 하느님께서 그 여자를 먹여 살리시려고 마련해두신 곳이었습니다”(묵시 12, 1-6).

  확실히 모든 표현이 아주 상징적이고 극적이다. 묵시록 전체의 주제에 비추어볼 때 그 내용은 분명 마리아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저자가 살던 시대(Domiziano의 박해 시대?)의 교회뿐만 아니라 항상 고통중에 자녀들을 ‘낳는’ 모든 시대의 교회의 투쟁적 모습에 대한 것이라 하겠다. 구약성서에서는 이런 상징적 개념들로 흔히 예루살렘을 가리킨다(이사 54 ; 60 ; 66, 7 ; 미가 4, 9-10등 참조). 어쨋든, 오늘날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묵시록의 내용을 교회에 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요한이 교회에 대한 체험을 기술함에 있어서, ‘용’으로 표현되고 있는(창세 3, 1 이하) 사탄의 치명적 공격을 출생때부터 받은 ‘구세주’를 우리에게 전해준 마리아에 관한 역사적 현실적 내용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상당히 많다. 이런 해석은 성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상당수의 교부들이 하고 있는 해석이다 ;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창세기 3, 15(“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에서 선포되었던 그 큰 싸움에 관한 내용을 문학적 변형을 통해 여기서 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마리아는 승천을 통해 – 히브리서에서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2, 14)로 나타나는 – 사탄에 대한 결정적 승리를 획득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묵시록의 내용이 환희의 찬가로 끝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나타났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12, 10).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위대한 모친은 예정된 자신의 운명에 따라 영원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스럽게 결합되셨으며, 원죄없이 잉태되셨고, 신적 모성을 지닌 정결한 동정녀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인 구세주의 자비로우신 배필로서 마침내 무덤의 부패를 극복하시고 위대한 영광을 차지하셨다. 그녀는 아들 ‘성자’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이기시고 영혼과 육신으로 하늘의 영광에 높이 들어올려지시어 영원히 불사불멸하는 왕인 ‘아들’의 오른편에서 여왕으로 찬란히 빛나고 계시다”(Pio Ⅶ, Costituzione Apostolica Munificentissimus Deus,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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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1. 김동진 사무엘

    1.1. 성모 승천 대축일


    1. 제1독서 해설

    제1독서 : 묵시 11,19; 12,1-6, 10ㄱㄷ


    전이해

    묵시문학은 역사의 신비를 비추는 것이다. 즉 역사의 의미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적대적 환경에서 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야 하기 때문에 적대자들 또는 박해자들이 알아듣지 모하는 표상과 상징을 사용한다. 요한 묵시록의 중심인 12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박해를 받는가. 그리고 곧 메시아를 믿고 따른 이들이 왜 앞으로 더욱 큰 박해를 받아야 하는가를 밝힌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이다. 황제와 황제 숭배 사상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자들이 사탄의 하수인이다. 그러나 사탄은 패배를 당하게 되어있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메시아께서 거두실 승리를 바라보며 곤경과 박해를 이겨 나아가 한다.


    주  석

    11,19ㄱ절 : 이구절은 앞으로 서술될 장면의 배경이 된다. ‘하느님의 계햑의 궤’는 지금 묘사되는 것이 결정적, 최종적 계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12.1절 : 달을 밟는 것은 달을 발판으로 하고 의자에 앉은 모습을, 열두 별은 열두지파, 열두사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느님 백성의 교회를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관을 쓴 여인은 전 우주를 대상으로 하는 왕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2절 : 아이는 메시아이며 여인은 시온이다. 시온은 하느님 백성을 대표하고 대리한다. 곧 하느님의 백성에게서 메시아와 믿는 이들이 나온다. 이 여인은 메시아를 낳으신 마리아일 수도 있다. 많은 교부들이 이렇게 생각하였고 교회 전례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는다. 일부에서는 저자가 교회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마리아를 생각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3절 : 일곱은 완전수, 열은 일이 끝났음을 뜻하는 수이다. 그리고 뿔은 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용은 막강한 권한과 권능을 지닌 존래라는 것이다.

    5절 : 아기는 태어나 곧장 하늘로 올라간다. 이것은 탄생부터 시작하여 십자가 위의 죽음에서 정점에 이르는 그분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4절에서 말하는 악마의 자세는 예수님을 제거해 버리려는 헤로데의 시도를 비롯하여 그분께 적대적인 모든 세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부활시키시어 당신의 오른편에 좌정하게 하신다. 이러한 부활로 악마가 거둔 것이 승리가 아니라 패배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6절 : 여자는 광야로 몸을 피한다. 광야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아 주시는 안전한 곳이다. 교회는 아무리 곤경을 겪는다 하여도 결국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자각하고 늘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에게만 의지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그분을 향하여 이 시험과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묵  상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려면 그리스도처럼 산고를 겪어야 한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옛 인간과 관련해서 죽었다가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내 삶에서 그 탄생을 재확인하고 계속 구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탄생의 아픔 또한 계속 겪어야 한다.

      믿는 이들은 ‘광야’에서 살아가고 있다. 광야는 거친 곳이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시험과 시련의 장소이다. 하느님만을 생각하고 그분께만 의지하며 시험과 시련을 극복해 갈 때 광야는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곳이 된다.

      마리아는 그 어떤 인간보다 큰 산고를 치르신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품에 안으시면서 인간으로 곧 ‘최초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태어나신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함께 우리의 광야를 걸어갈 수 있게 된다.


    2. 제2독서 해설

    제2독서 : 1코린 15,20-27


    전이해

      사도 바로오는 자신이 코린토를 떠난 후 신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어려가지 좋지 않은 소식을 듣는다. 15장은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부활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스인들 또는 그리스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부활 사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리스 철학에서 인간이 불사불명하는 영혼과 죽어 없어질 육신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겼기 때문에, 육신의 부활을 그들은 인정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주석

    20절 :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바오로는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선포한다.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다.’ 이를 직역하면 ‘잠든 이들의 맏물이 되었다.’이다. 여기서 맏물은 수확이 계속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과 희망을 상징한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 혼자만의 사건이 아니라 죽은 이들과 뗄 수 없는 연대성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이야기 한다.


    21-22절 : 그리스도께서 이미 죽은 사람들, 앞으로 죽을 사람들의 맏물이시라면, 바로 그들의 대표 즉 새 인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산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사건이다. 죽음의 장벽을 치워 버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때, 죽음 너머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터 주신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바로 그분의 부활과 생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24절 : 바오로는 마지막 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밝힌다. 예수 그리스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된다. 이 완성된 나라를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신다. 그리고 시편 110,1과 8,7의 인용으로 뒷받침한다. 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의 출발점이며 종착점이시다.


    묵  상

      코린토 신자들에게 재림은 절박한 문제였다. 하지만 우리는 긴박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함없는 사실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때는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의 죽음이다. 교회는 죽음을 묵상하였다. 때로는 지나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나 반대쪽으로 기울었다는 느낌도 든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부활을 함께 내다보며 그곳을 향하여 가야할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부활과 그 뒤에 있는 생명이 지금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제2독서에서 마리아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교회는 마리아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가 가장 처음 적용되었다고 믿는다. 최초의 산고를 격으신 분이시며, 구원의 신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신 믿음과 구원의 선구자이시다. 우리는 이분의 모범에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3. 복음 해설

    복음 : 루카 1,39-56


    전이해

      마리아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엘리사벳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두 여인에게 ‘큰일’을 하신다. 그리고 이제 두 어머니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어머니들의 만남은 모태에 든 아기들의 상봉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만남의 주도는 마리아와 태중의 예수님에 의해 진행된다. 사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가 된다. 이로써 높은 데에서 낮은 데로 찾아오시는 예수님 탄생의 신비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루가 복음서 저술 이전부터 유행한 시가이다. 이 노래는 감사시에 속한다. 구약성격의 용어, 소재 문체, 약식으로 엮어져 있으며 사무엘의 어머니 안나의 노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전후편으로 구분되며 전편은 마리아 개인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후편은 마리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서 이스라엘에 내린 은혜에 대해서 감사한다. 또한 전후편 모두 주님의 영원하신 자비로 끝맺는다.


    주  석

    41-44절 : 믿음은 근본적으로 기쁨이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찼다는 말은 곧 성령강림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믿음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리가 가장 복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행복합니다.(루카11,27-28)”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마리아에게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보고 “주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호칭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도움으로 마리아의 모태 안에 있는 존재가 어떠한 분이신지 이미 알게 된 것이다.

    46-50절: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 곧 충만한 생명을 노래한다. 이것은 기쁨속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마리아는 자신을 하느님의 종이라 고백한다. 자기의 모든 것을 임자이신 하느님께 맡기고 전적으로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마리아는 하느님만을 믿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가난한 사람’인 것이다.

      아버지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하다는 일차적으로 분리와 다름을 뜻한다. 인간으로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지고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들을 굽어보시고 보살펴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다. 그러나 인간 쪽에서 저제 조건을 체워야 한다. 그것은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실 두려워하다는 표현보다 경외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경회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51-56절 : 하느님은 비천한 이들을 높이시는 분이며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느님의 행동의 기조는 한마디로 ‘자비’(54절)이다. 이는 어떤 추상적이거나 무조건적 덕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실천적 덕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망각하지만 하느님은 ‘기억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이 기억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그분이 계약과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심을 뜻한다. 마리아는 그분의 자비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앞으로도 영원히 그 후손들에게 이어지리라고 노래한다.


    묵  상

    성모님은 복음 자체이신 분을 당신의 모태에 모신다. 신앙인도 역시 말씀을 자기 안에 잉태한 사람들이다. 마리아께서 구세주와 한 몸이 되신 것처럼 믿는 사람들도 주님과 한 마음 한 몸을 이루어가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또한 믿음의 본질은 기쁨이며 찬미의 삶이다. 신앙인은 삶 자체로 하느님을 찬양해야 한다. 마리아는 최초의 신앙인이며, 가난한 이로서 하느님을 경외하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마리아에게 당신 구원의 첫 열매를 맛보게 하신다. 우리도 그분의 모범을 따라 우리의 삶을 이끌어 나아갈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그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


    강 론


      오늘은 우리가 잔혹한 일제 식인 통치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빛을 회복한 날)이며 이 땅에서 고난 가득한 생애를 사셨던 성모님이 하느님께 승천하셨음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성모승천 교리는 성서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있지 않지만, 4세기 중엽부터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전승을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믿을 교리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지상의 생애를 마친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이끌어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가 선포되자 개신교 측의 거센 반발과 논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라면 몰라도 인간이 마리아가 어떻게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가? 그런 내용이 성경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개신교 측의 논리적이고 집요한 공격에 가톨릭 신학자들이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가톨릭 측의 한 신학자가 일어나 점잖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신학자가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예배 때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데 그 첫머리에 “전능하신 천주성부 천지의 창조주”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사도신경의 끝에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는 내용이 있는데 당신들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까? 개신교 신학자들은 믿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가톨릭 신학자가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죄 많은 인간도 하느님의 자비로 승천하여 영광을 누릴 것을 확신하고 있는데 전능하신 하느님께 당신 피조물이며, 구세주의 어머니이시고, 진정한 신앙인이었던 한 여인을 당신 계신 곳에 불러올렸다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기세등등하였던 개신교 신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하느님이 계신 곳 하느님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모승천은 성모님이 저 물리적 창공으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의 몸과 영혼이 함께 하느님이 계신 곳,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올림 받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죽은 후에 승천하셨는지, 살아계신 채로 승천하셨는지, 선포문에는 개방적인 여지를 남겨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먼저 아버지께서 계신 곳에 올라가면 거처를 마련해 놓고 다시 와서 너희를 그곳으로 불러들여 나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 또한 그런 희망이 없다면 우리 신앙은 다 헛된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승천은 예수님만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약속된 것이고 마리아는 그 첫 열매이신 것입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을 4대 축일 중에 하나로 성대하게 지내는 것은 단지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기 위한 것아 아닙니다. 성모성천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도 그처럼 되리라는 희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는 참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 죽었을 때 돌아가셨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속에는 그가 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이나 은연중에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병 신인의 시중에 귀천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쓰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언젠가 하느님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이 삶의 여행이 언젠가 끝날 것입니다. 삶이란 마치 아이들이 동구 밖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노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이때 엄마가 아이 이름 부르면 그제야 아이는 잊고 있었던 엄마와 집이 생각나 엄마 하고 부르며 달려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매일 매일의 평범할 삶은 바로 그날을 준비하는 기간임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또한 그날 누릴 축복을 앞당겨 체험하는 날들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user#0 님의 말:

     

    성모 승천 대축일



           1. 정 대주교 메시지(2000)/2    2. 이계중 신부/ 4

           3. 이계중 신부/ 6                 4. 강영구 신부/ 8

           5. 최기산 신부/ 11                6. 김수창 신부/ 13

           7. 최석우 신부/ 16                8. 최석우 신부/ 19

           9. 민병덕 신부/ 20                10. 함세웅 신부/ 23

           11. 박진량 신부/ 24               12. 김경식 신부/ 27

           13. 유재국 신부/ 29               14. 김영진 신부/ 31

           15. 성민호 신부/ 32               16. 서정현 신부/ 35

           17. 사제의 편지/ 36               18. 최인호 작가/ 37

           19.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38   20. 성모 마리아, 나의 어머니/ 40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민족의 참된 해방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갈라 5,13)

    정진석 대주교 메시지


    1. 특별한 감회 속에 맞이한 8․15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이자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지 쉰 다섯 돌이 되는 뜻깊은 광복절입니다.

    해마다 8월15일이면 맞이하는 성모 승천이요, 광복절이지만 올해는 특별한 감회 속에 대축일과 경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 세기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천년기가 가고 새로운 천년기가 시작되는 2000년 대희년의 한 중턱에서 맞이한 축제날입니다. 또한 동시에, 동․서가 화합하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지역으로 남아 있는 우리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정상이 서로 만나 평화공존과 통일을 향한 새로운 이정표를 그려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맞이한 축제날이기에 이번 8․15는 더욱 색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 성모님과 한국교회․한국민족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성모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성장,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 이 중요한 시기에도 성모님은 변함없이 천상에 계신 예수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대축일 교중미사를 통해 전국의 모든 본당에서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나라와 교회를 봉헌하는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일찍이 조선교구 제2대 감목으로서 이 땅에서 순교까지 하신 앵베르 범세형 주교 성인은 1838년 한국교회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이후 1945년 8월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우리 나라와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984년 5월6일 103위 순교 복자들을 시성하기에 앞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명동 성당에서 다시 한번 우리 겨레와 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한 것을 우리는 매우 뜻깊은 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3. 새로운 마니피캇

    이제 새 천년 첫 8․15에 즈음해서 반세기가 넘도록 대치상태에 놓여있던 남과 북이 함께 ‘화해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나뉘고 흩어져 살아온 남북 이산가족들이 비록 한정된 인원과 기간이기는 해도, 감격과 회한 속에 재회의 기쁨을 나누게 됐습니다. 그리고 끊어져 녹슬기만 했던 철길을 다시 놓아 남북을 이어주는 경의선 공사도 머지 않아 시작할 단계에 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광복절이자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큰 축일인 오늘,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의 계획을 흩으시며,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시며, 정의로 다스리시고, 부(富)를 나누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천상의 어머니를 기리며 ‘마니피캇’(성모찬송)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용서와 화해

    우리는 분단과 전쟁으로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하느님과 인류 앞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서로를 알려고 하기보다 편견과 아집으로 수십 년을 헛되게 보낸 데 대해 이제는 서로가 용서를 청하고 용서하는 겸허함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잘못된 과거를 뼈저린 참회와 회심으로 씻어내면서 민족의 미래를 설계하고 새로운 역사를 기록해 나가야 할 오늘입니다.

    교회도 그 동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야 할 본연의 사명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쪽만의 교회’가 전체인 양 말하고 행동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북녘의 동포들과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민족의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5. 민족의 참다운 해방을 위하여

    진정한 화해는 그리스도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 인류의 일치와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성장케 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55년 전 우리 민족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아직도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사회는 죄와 죄의 구조에 얽매여 여전히 참다운 해방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남의 인권을 훼손하며 억압하기도 하고, 억압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인간 이하로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그릇된 물결이 자라나는 세대에게까지 번지고 있는 현실에서 공동선이 무시되고 지역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들려오고 있습니다.


    6. 새로운 사명

    지나간 20세기가 우리 민족에게 억압과 분단의 시대였다면, 아시아․태평양 시대라고 일컫는 21세기는 우리가 참다운 해방과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여 세계 모범국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시대로 일구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민족을 각별히 사랑하셔서 새 시대에 새로운 사명을 맡겨 주고 계십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과 중국을 포함한 동북 아시아의 복음화를 걱정하시면서 이 일은 한국 교회만이 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해야 할 차례이며 우리가 나서야 할 시점입니다.

    “서쪽 하늘에서 구름이 일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아야 하는”(루가 12,54) 것과 같이 ‘시대의 징표’를 깨달아야 하고, 오늘 우리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양 선교에 목숨까지도 바쳐서 투신해 오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감사하며, 이들을 본받아 우리 모두 선교 결의를 굳게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7. “예”라고 응답하며 다시 시작합시다

    예수님의 탄생 2000년을 되새기는 것은 선교의 기원을 경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희년은 곧 교회 전체가 새로운 선교의 열정으로 일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제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도록”(루가 4,18-19) 파견되신 성자 그리스도의 사명을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이 땅과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나라와 교회의 수호자이신 성모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성모님께 우리 모두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 실행에 “예”라고 대답하도록 도와 주실 것을 청해야 합니다.

    북녘과 남녘의 형제 자매 여러분이 진리와 사랑 안에 참다운 해방을 누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축복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2000년 8월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

    정 진 석 대주교






    2.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이계중 신부


    성모님께 대하여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다 파괴되어 있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대성당이 부흥되어, 지금은 고인이 된 민첸티 추기경이 성모 성탄 축일에, 헝거리의 모든 주교들과 50만 교우들에게 둘러싸여 이 성당을 축성하였습니다. 그 때 군중들 가운데서 촌티나는 옷을 입고, 햇빛에 그을린 얼굴에 이마에 주름살이 많은 한 노파가, 거치른 손에 묵주와 기도책을 들고 추기경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노파가 헝가리의 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존경을 받는 민첸티 추기경의 어머니였습니다.


    이런 어머니에 대하여 민첸티 추기경은, 어느 책에서 “고향에 있을 때나 외국에 있을 때에도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은 귀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성 아오스딩과 같이 “주여, 내가 당신의 종이 된 것은 당신 여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존재의 모든 것은 어머니의 덕과 기도에 의한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민첸티 추기경의 어머니 뿐 아니라, 모든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천신만고의 희생을 치룬 값비싼 사랑으로, 피보다 진하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입니다. 태중에 있을 때부터 나를 걱정하고, 어릴 때 내가 컷을 때도, 또 나이 많이 먹어 어른이 되었을 때도, 잠시도 나를 잊지 않으며 걱정하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과연 어머니의 사랑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그 밑에 서 계시는 요한 사도에게, 어머니인 마리아를 가리키며 ‘이는 너의 어머니이시니 받들어 모시라’고 분부하시어, 인류를 대표한 요한사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세상 어머니가 그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크다면 천상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그 얼마나 크겠습니까? 성 벨라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로 뭉쳐도 성모 마리아께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그 사랑보다는 작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그를 어머니로 섬기는 이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중세기에 많은 성인 성녀들이 배출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성모님을 독실히 모셨던 것입니다. 성 아오스딩, 성 도밍고, 성 모니카, 성 벨라도 등등 그 유명한 성인 성녀들이 모두 성모님께 특별한 존경을 바치셨던 것입니다. 또한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순교 선조들의 유물에는 반드시 묵주가 있는데 이것은 순교한 우리 선조들이 성모님을 얼마나 공경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모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들어내시고 또 우리를 타이르시기 위해 발현하시는 수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에 성모께서는 루르드에 발현하시어 묵주신공을 하고 보속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 후 성모께서는 60여년 전에 ‘매괴의 모후’로 다시 파티마에 발현하시어 우리에게 타이르시는 골자는 크게 보아 ‘기도와 보속’입니다(성모께서는 언제나 묵주를 가지고 발현하셨고 또 묵주신공 바칠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셨습니다.).


    파티마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받은 세 어린이 중에 단 하나의 생존자인 루시아 수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계의 타락은 기도의 정신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결과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성모께서 힘있게 묵주 신공을 바치라고 권고하신 것도 이러한 좋지 못한 것들을 예감하셨기 때문입니다. 묵주신공은 미사 다음으로 신앙을 보존하고 키우는 가장 적당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묵주신공을 공격의 초점으로 삼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오늘날,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예부터 내려오는 성모께 대한 존경을 깎아내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치고 자기 어머니가 존경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자기 어머니의 청보다 다른이의 청을 더 중히 여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성모님을 하느님과 같이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모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에 어머니로 공경하는 것이며, 그 어머니를 공경할 때 그의 아들인 예수께서 싫어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또 기도의 정신을 갖도록 서로 권면하고, 특히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하느님께로 가깝게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의 회합에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은혜를 주시어 여러 가지 유혹을 이기기 위한 빛과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타이르심 중에 기도 외의 또 다른 하나의 보속입니다. 점점 향락주의로 기울어져 가는 현대에는 보속이 점점 식어가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속이 꼭 필요한 것임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보속하는 그 양상도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옛날에는 단식과 고행 등을 큰 보속으로 또 좋은 보속으로 생각하며 많이 해오고 있었으나, 복잡한 현대에는 그와 같은 보속은 하기 힘듬으로 현대에 맞는 보속을 해야 하겠습니다. 보속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현대에 있어서 좋은 보속이란 넉넉한 사람이 공익을 위해 희사하거나 애긍시사하는 것도 훌륭한 보속이 될 수 있겠고 미사 때 헌금하는 것도 한가지 보속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자기의 성질을 꺾고 온순하게 평화를 보존하는데 협력한다면, 이것도 훌륭한 보속이 되겠습니다. 아무튼 질서와 평화와 사랑을 위해 어떤 보탬이나 협력의 행동을 하였다면 이것은 일종의 보속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성모님의 타이르심인 ‘기도와 보속’이 없이는 인류는 큰 비극이고 이와 반대로 ‘기도와 보속’이 있는 한, 성모님이 약속하신 대로 승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 마리아를 진정한 우리의 어미니로 인정하여 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하며 살아야 할 것이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 언제나 항상 손에 들고 매달리는 이를 절대로 뿌리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평화의 모후시여 죄인의 의탁이신 성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3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이계중 신부


    성모 칠고(聖母七苦).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의 생활을 하신 분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수고, 수난하신 고통을 성모 마리아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예수님의 일생과 같이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에서 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였던 일곱 장면을 성모칠고라고 부릅니다.


    그 하나는, 갓난아기인 당신 아들이 후일에 사람들한테서 반대를 받겠다는 예언을 시메온으로부터 들으신 때이고, 두 번째는 헤로데 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가신던 때이고, 세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아들 예수를 잃고 삼일간이나 떨어져 계시던 때이고, 네 번쨰는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로 올라가심을 만나셨을 때이고, 다섯 번째는 십자가 위에서 아들 예수가 돌아가실 때이고, 여섯 번째는 예수님의 싸늘한 성시를 십자가에서 내려 당신 품에 안으셨던 때이고, 일곱 번째는 당신 아들을 무덤에 묻고 그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잠겨 있던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모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충만히 받으신 분이시고 동정으로 예수님을 낳으신 천주의 어머니이심으로, 오로지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생각하고 그에게는 고통의 그림자도 없었던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께서는 누구보다도 혹독한 고통을 맛보신 분이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아들의 구속 사업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고, 또한 모든 인류의 어머니로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 때문에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그 아들과 같이 혹은 그 아들 이상으로 마음 아파합니다. 아들이 옥에 갇혔을 때 이것을 본 어머니가 슬퍼하는 나머지 병들어 죽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많은 아들들 중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살인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강간하는 이가 있고, 배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지옥으로 아주 떨어지는 이도 있습니다.


    성모께서는 지옥에 떨어지는 아들에게도 이 세상의 어머니가 그 아들을 사랑하는 몇 배로, 아니 몇 백배로 그를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성 벨라도께서는 성모께서 한 영혼을 사랑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그 자녀들에게 가지는 사랑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모께서 죄에 떨어지는 아들을 보실 때, 더욱이 지옥에 떨어지는 아들을 보실 때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우리는 육신의 어머니를 잠시라도 잊지 못한다면 영혼의 어머니도 더욱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소원은 아들이 잘 되는 것뿐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도 우리가 덕으로 나가는 것을 보실 때 이것으로 만족해하시고, 또한 어머니로써 받으시는 유일한 위안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고통의 생활을 가끔 묵상하면서 나의 위치에서의 생활에 만족을 갖고 불평과 원망보다는 향상을 도모하면서 고통 중에서도 미소짓는 생활을 하도록 힘씁시다.

    4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 39-56     여인 중에 복된 여인 

    강영구 신부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이자, 교회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주일이 아니지만, 주일처럼 지내는 축일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고 또 다른 대축일은 12월 25일에 지내는 예수 성탄 대축일입니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과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이 겹치고 있기에, 우리 한국 교회에는 이 날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날을 경건하고 기쁜 마음으로 지내야 하겠습니다.

    성모 승천(昇天)이란 도대체 어떤 사건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성모 승천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성모 승천이란 성모 마리아가 하늘에 오르신 사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마리아가 승리자가 되어서 개선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늘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되었습니까?

    우리는 “성모 마리아”라고 하면, 으레 루르드에 나타나셔서 굉장한 기적을 일으키신 분, 혹은 파티마에 나타나셔서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신 분, 혹은 유고의 메주고리에 발현하셔서 큰 기적을 베푸신 분, 레지오 마리애 카테나를 바칠 때 기도하듯이 “해와 같이 빛나고 달과 같이 아름답고 군대같이 두려우신” 마리아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마리아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마리아와는 거리가 멉니다.

      

    성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아주 소박하게 꾸밈없이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서는 마리아를 믿음의 여인으로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평범한 처녀였습니다. 마리아의 꿈은 여느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요셉이라는 목수 청년과 약혼하고 있던 사이였기에, 그녀의 꿈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평범한 처녀였던 마리아를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아마 하느님의 이런 계획이 아니었더라면, 마리아는 아주 평범한 여인으로서 오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았을 때, 그녀의 소박한 꿈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임신하게 된 사실을 들려주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그 소박한 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이 한마디 응답은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지만, 온 인류의 운명마저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마리아 자신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지만, 온 인류에게는 새로운 광명이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또 자신의 운명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온갖 고난을 감당할 각오를 해야만 했습니다. 실제로 마태오 복음 1장을 보면 목수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고민하면서 파혼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 자체가 마리아의 삶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그들 운명에 닥쳐온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하게 됩니다. 어쩌면 믿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것은 끝없는 위기의 연속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인지도 모릅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아들 예수를 낳았을 때(루가 2,1-7), 아기 예수를 살해하려는 헤로데의 흉계를 피하여 먼 이집트로 피난살이를 떠나야 했을 때(마태 2,13-23),

    아들 예수가 열두 살이 되어 예루살렘 성전을 참배하러 갔다가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루가 2,41-52), 예수가30살 장년의 나이에 갑자기 출가했을 때(마르 1, 9-11),

    집 떠난 아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 아들을 찾기 위해서 온 갈릴래아를 뒤지고 다닐 때(마르 3,22),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단말마(斷末魔)의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 가는 모습을 십자가 아래서 지켜보고 있었을 때(요한 19,25-27), 마리아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대답한 이후 끊임없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때마다 쓰러지려 하는 자기 자신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곧추세워야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구세주 예수의 어머니가 될 수도 없었겠지만, 평생을 통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혹과 시련의 시간을 극복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한 마리아의 그 믿음이 평범한 한 여인을 무한히 강한 여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성서는 믿음의 여인 마리아를 아주 담담한 필체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뒤집어 보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사연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쓰러지지 않았고, 기막힌 운명을 딛고 아들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서 아들이 당하는 고통 이상의 아픔을 겪으면서, 아들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성서가 우리에게 담담한 모습으로 마리아를 전해 준다고 해서 구원 역사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한 마리아라는, 여인이 있었기에 구원의 역사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구세주로서의 당신 사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마리아의 피눈물이 있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우리 인류 앞에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 놓기 위해서, 아들 예수의 십자가의 승리를 위하여 철저한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셨던 분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모 승천은 마리아의 믿음과 희생이 거둔 승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우리 또한 성모송을 외을 때마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하고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복됨은 믿음 안에서의 복됨이지, 세속적인 차원에서의 복됨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마리아는 참으로 비운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들 예수로 해서 복된 여인이 되었고, 오늘 하늘에 올림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월요일 새벽에 참으로 감격스러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름 아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라는 마라톤 선수가 일본 선수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온 겨레가 처음으로 다 함께 기쁨을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황영조 선수는 우승 소감을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인 지점 100미터를 남겨 두고 우승을 확신했으며 제일 먼저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오늘의 이 영광은 어머니의 정성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오늘도 나를 위해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계실 것입니다.”(조선일보, 8월 11일자, 3면).

      

    삼척 바닷가에서 조개나 미역을 따는 해녀인 황 선수의 어머니 이만자(李萬子 54세) 씨. 황 선수가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하게 된 그 뒤에는 황 선수의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이 있었고, 바로 그 정성과 기도가 황 선수를 우승하게 한 것입니다. 어촌에서 가난하게 그리고 소박하게 살면서 오직 아들이 세계를 제패하기를 온갖 정성을 들여 기도했을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없었더라면, 황 선수의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황 선수의 고향 마을에서 모든 사람들은 황 선수의 어머니를 복되다고 칭송할 것입니다. 황 선수로 해서 이만자 씨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마리아라는 한 여인의 아들입니다. 예수께서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 성업을 완수하시기까지 어머니 마리아의 기도와 정성, 그리고 그 피눈물나는 희생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위안과 희망을 안겨 주는 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아무리 작고 미소한 자라 할지라도, 믿음 위에 굳게 서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큰 능력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도구로 쓰시어 영광을 주신다는 사실이 성모승천 사건을 통하여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대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마리아의 노래처럼 이 세상에서 정말 복된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그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복됨, 그것은 하느님 위에 자신을 세우는 사람의 복됨입니다. 이 세상사람들은 누구나 곧게 서기를 원합니다. 쓰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하느님 위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의 나라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서려고 하는 사람은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과 재주, 그리고 이 세상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하느님을 바탕으로 서는 자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승리자가 되시어 개선하신 마리아의 위대한 믿음을 본받도록 합시다.






    5    성모승천대축일  루가 1,39-56     “성모마리아, 나의 모친”   

    최기산 신부


    사랑의 어머니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인기도 측정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정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그 기준은 아마도 눈물일 것이다. 눈물을 많이 흘리게 했으면 그 프로그램은 성공한 것이다. 한때 ꡐ여로ꡑ라는 작품이 국민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어서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 시간만 되면 길거리가 숨죽인 듯이 조용했다. 눈물을 흘리게 한 프로그램 중에 ꡐ이산가족 찾기ꡑ도 압권이었다. 나는 눈물이 메마른 사람인데 그때는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장병들과 함께 했던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은 한국인의 어머니 사랑에 대한 의미를 깊이 조명한 좋은 프로였다. 어머니와 아들과의 뜻밖의 만남을 보던 장병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함께 울었다. 어머니가 고맙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불러보고 또 불러봐도 따뜻한 이름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저승으로 어머니를 보낸 이들은 ꡐ어머니ꡑ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살아 생전에 못 다한 효도가 못내 아쉽고 이젠 하고 싶어도 계시지 않는 어머니기에 어머니라는 노래만 나와도 그냥 눈물이 배어나는 것이다.


    시골 장터엘 가보면 길옆에 나물을 조금 쌓아놓고 팔거나 총각무를 몇 단 놓고 파는 여인들이 있다. 다 팔아봐야 6000~7000원 정도 하는 값어치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부르튼 손으로 물건을 파는 그 여인들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팔고 있나! 햇볕에 그을린 얼굴, 주름진 그 얼굴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읽는다. 그들은 자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혹은 학용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렇게 뙤약볕 아래에서 팔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기에 흙과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어린 자식이 아파서 헛소리를 하면, 어머니는 밤을 지새우면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고 묵주의 기도를 드린다. 밥 먹을 생각도 않고 잠을 잘 생각도 없이 애타는 마음으로 자식만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비정한 어머니

    사랑의 어머니라는 인상과 달리,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도 많은 비정한 어머니들이 생겨나고 있다. 낙태,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한국인은 예로부터 서양인들과 달리 수태하는 순간부터 인간으로 생각하여 나이를 한 살로 따졌다. 서양인들은 세상에 태어나야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맞는 이치다. 인간은 수태의 순간부터 인간으로 존경받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교회는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부 어머니들과 전 세계의 많은 어머니들은 자식을 살해하는 낙태를 죄의식 없이 자행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혼율의 급증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IMF 이후 많은 가정이 파탄했다고 한다. 가정의 파탄은 자식을 버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어떤 어머니는 자식을 유흥가에 팔아먹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되었다.


    성모마리아 

    성모님은 하느님께 특별히 뽑힌 여자였다. 그녀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실 어머니였기에 하느님께서 그렇게 뽑으셨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어머니 시다. 우리도 교회의 일원이기에 그분은 우리의 모친이 되신다. 또 사도 요한에게 ꡒ이분이 그대의 어머니다ꡓ라고 하신 말씀은 곧 우리의 어머니도 되신다는 말씀이다.


    성모님은 사랑의 어머니 시다. 그분은 원죄가 없으시기에 죽어서 썩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으셨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고 썩는 것은 원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무덤에서 썩을 이유가 없으시기에 승천하셨다.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ꡒ마침내 티없이 깨끗하며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았던 동정녀는 지상 생활을 마친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에로 부르심 받아 주님께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 받았다. 이로써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하느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었다ꡓ(교회헌장 제59항, 교황 비오 12세의 성모승천교리 선포 DS 3903 참조).


    성모마리아는 과거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2000년 전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시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느낌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신다. 교회의 역사 안에는 성모님의 발현을 생생하게 전하는 산 증언들이 많이 있다. 루르드, 파티마, 과달루페 등등의 지역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며 당신은 지금도 우리와 말씀하실 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몸소 드러내셨다.


    오늘도 우리가 힘들고 지쳤을 때 그분은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신다. 고난 속에서, 절망 속에서 성모님께 다가가면 그분은 손을 내밀어 잡아주신다. 그분은 비정한 어머니가 아니시다. 그분은 지극한 사랑의 어머니 시다.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나면 그분은 우리의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우리를 데려 가실 것이다.






    6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신앙의 어머니 마리아  

    김수창 신부


     15년 전 어느 날, 한 군종 신부님이 찾아와 성모상이 꼭 필요하다면서, 도와달라고 하여 모금해 드린 적이 잇다. 사연인즉, 어느 일선 부대 사병이 답답한 심정을 알아주는 이도 없고, 하소연할 데도 없어서, 그만 자살을 했는데, 부대의 성당 마당에 성모상이 있었다면, 그 앞에서 기도하고 넋두리라도 해서 살았을 것이라는 일기장의 글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성모상을 모시고 싶어서 도움을 청한다는 것이다.


    용기와 위로를 주시는 어머니

    성모님은 우리 고달픈 마음에 위로와 용기를 주신다. 길을 가다가 멀리서 성모상이 보이면 반갑고, 그때부터 마음이 편안해진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그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와 제자들을 내려다보셨다. 제자들은 스승의 운명을 지켜보며 중심을 잃고 실의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들에게 내어주셨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이 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8,25-27).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셔왔다. 성모님을 모시는 것은, 남편도 아들도 죽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성모님을 경로(敬老) 정신으로 모시고 효도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스승을 잃은 제자들이 성모님을 모심으로써 안정을 되찾고, 주님의 소명의 길을 갈 수 있었다는 그런 의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성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면서,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 거기 성모님이 계셨다. 그 후 성모님을 찾아뵈올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성모님의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성모님의 초상화는 초세기부터 유명하였다. 그때는 성화(聖畵)가 아주 귀한 때이기 때문에, 다함께 성모화를 모시기 위하여 성당을 짓기도 하였다.

      

    로마의 3백 년 박해가 끝나고 나서,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신학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인가? 마리아께서는 천주의 모친인가? 하는 문제의 시비와 성화상(聖畵像) 논쟁은, 당시의 교회와 정치 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천주성과 마리아 ‘천주의 모친’ 교리가 정통교리로 선언되었다. 성화상 논쟁이 대립과 투쟁과 박해로 얼룩지면서도 “성화상을 공경하는 사람은 그것이 표현하는 인물을 공경하는 것이다”라는 교시로써 대충 해결을 보았다.


    오늘도 이집트의 동남부에 가면, 안토니오와 바울로의 4세기 수도원이 있다. 거기에는 벽화의 여러 곳에 성모자상이 있다. 당시의 일반 신자들은 문맹자였고, 또 교리서도 구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교리 논쟁을 알아듣고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에게 마리아께서 천주의 모친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는, 그림보다 좋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 아기를 안고 계시는 그림은 보는 이에게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그 성화들이 전문가의 작품이 아니라서 그림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성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요사이 우리나라 성물 판매소에서 판매되고 있는 성모상들은 성스러움이 느껴지지 않고, 장사꾼의 상업적인 냄새만 풍긴다.


    무속, 기적, 자기 중심적 성모신심

    우리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성모신심에 관심이 많다. 무속(巫俗) 신앙의 성모 사상에서 받은 영향인지, 또는 불교의 보살 앞에서 절하던 습성에서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흑은, 엄격하고 절대적인 남성위주의 가부장적 사회 풍토에서 정당한 요구도 통하지 않고 대화도 어려웠던 때, 융통성이 있고 부드러운 어머님이 숨통을 터 주던 습성에서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정신적 돌파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한국인의 무속과 불교의 영향, 그리고 사회풍토와 함께 로마와 프랑스 천주교회의 성모신심이 흘러들어 부합되면서, 한국에는 성모신심이 자연스럽게 널리 수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성모신심의 양상들을 보면 너무 자기중심적인 요소가 많다.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다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처신을 하는 교우들도 있다.

    성모님의 기적, 성모님의 메시지 등에 광신적으로 몰입하는 사람, 성모님의 눈물, 피눈물에 정신이 나가는 사람 등, 도대체 기적에는 맥을 못추는 사람이 많다. 정말 기적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기적이 났다면 무조건 덤벼드는 것이 한국인이다.


    성모상도 보면 장사꾼의 상업적인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것도 도대체 볼만한 것이 별로 없다. 교우들 중에는 어딘가 슬프게 보이고, 못생기고 소외된 듯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민족이 한 많은 고난을 겪어와서 그런지, 기쁨보다는 슬픔에 더 잘 공감한다. 그래서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의 슬픔에는 곧잘 동참한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고, 초상집에 가서는 밤새도록 울고 나서 누가 죽었느냐고 물어본다는 말도 있다.

    슬픈 곳에 가서는 무조건 울고 보는 것이 우리민족이다. 그래서 희극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비극을 보면서 실컷 울어야 후련해 한다. 그런 심성을 가진 우리 한국인이 자기의 한 맺힌 슬픔과 불행을 성모상에 투사하여 서로의 팔자가 같다는 마음으로 울면서 기도하고 후련해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것으로 토착화 할 성모신심

    이제는 우리나라 성모신심의 여러 가지 형태를 정리하여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가장 흔하게 있는 것이 루르드나 파티마의 성모상이다. 외국의 지명(地名)을 붙인 성모님보다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면 좋겠다.

    지명을 붙이려면 ‘한국의 성모님’이나 또는 ’서울의 성모님’, ‘남북 통일의 성모님’ 등 성모신심을 우리의 것으로 토착화해야 할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루가 1,28) 하시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려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사에 등장하신다. 그리고 한평생의 모든 고난을 하느님께 바치며, 주 예수님의 생명과 소명을 함께 하셨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참으로 복되신 분이시다. 그것은 요행히 주님의 모친이 되는 특은을 받았다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성서에서는 그분이 복되신 이유를 네 가지로 말씀하신다.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고”(루가 1,28), “주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시고”(루가 1,45),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루가 11,28)이시기에 복되신 분이시다.


    우리도 미신적인 사고방식으로 무턱대고 빌며 억지스럽게 매달리기만하는 답답한 신자가 되지 말고, 성모님의 가신 길,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믿고 실행한 그 생애를 본받으면서 성모님을 공경해야 할 것이다.


    오늘이 성모 승천 대축일, 즉 성모님이 귀천(歸天)하신 날이다. 성모님의 지상생활은 이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생활이었다. 성모님의 별세는 지상생활의 소명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 안에 살아야 성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며,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나이다”(루가 1,68). 






    7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최석우 신부


    성모님과 한국교회

    5월은 성모성월, 즉 특별히 성모님께 바쳐진 달이다. 성모성월이 되면 요새는 “성모의 밤”이란 행사가 유행하고 있지만 옛날에 아직 그런 행사가 없을 때 우리 교우들은 “성모성월”이란 기도서를 가지고 빠지지 않고 날마다 성월기도를 바쳤다. 이런 좋은 관습도 어느 사이엔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요즈음 이 성모성월 책에 대해 두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문학을 전공한 한 수녀의 말에 의하면 “성모성월”은 훌륭한 문학작품에 속한다는 것이다. 19세기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우리말로 번역하고 저술한 교회서적 중에는 프랑스 문학 작품도 포함되어 있는데 “성모성월”이 그 하나라는 수녀의 말이었다. 또 최근에 나는 한 여 교우의 방문을 받았는데, 사연인즉 인쇄비를 다 책임질 것이니 성모성월을 맡아 출판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여 교우의 말인즉, 성모성월의 기도문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10여년간 이 책을 갖고 성모성월을 바쳐왔으며, 이제 이 아름다운 책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그것을 자비로 출판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성모에 대한 신심이 점점 식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왔었다. 그러나 이상 두가지 놀라운 사실에 접하게 되자, 한국교회의 오랜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성모께 대한 각별한 신심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매일 묵주기도5단을 바쳤고, 주일이면 15단을 바쳤다. 1801년에 순교한 홍 낙민이란 사람은 배교했다가 다시 배교를 취소하고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그가 매일 묵주기도를 궐하지 않고 바쳤기 때문에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도움이었을 것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103위 성인 중의 한분인 성 남 영혁 다미아노에게 한 교우가 “당신이 치명을 하면 어떻게 당신을 부를까요”하고 물었더니, 다미아노는 “성의회 회원인 치명자 다미아노로 불러주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다미아노에게 있어서는 생전에 성의회 회원이었던 것이, 순교에 못지않은 영광이었다.


    한국교회에는 해성, 즉 바다의 별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나 단체가 많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선교사들은 거의 모두가 배를 타고 한국에 몰래 들어와야 했다. 그런데 조각배를 타고 넓은 황해를 건넌다는 것은 여간한 위험이 아니었고, 그래서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 특별한 보호를 청했고, 그 결과 선교사들이 모두 무사히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성 김대건 신부가 황해를 횡단하던중 폭풍을 만나 난파되었을 때 성모님의 특별한 도움으로 구조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성모님이 한국교회에 특별히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 한국교회는 결코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국교회가 1841년에 무염시태의 성모를 한국교회의 새 주보로 모시게 된 것도 실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때까지 한국교회의 주보는 성요셉이였는데, 성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주보를 성모로 바꾸어 주도록 한국교회에서 청원한 때문이다. 이어 한국교회가 파리에 본부를 둔 성모성심회(원명은 무염시태성모회)에 가입하고, 공부지방의 한 두메 공소에서 성모신심께 처음으로 봉헌미사를 올린 것도, 사실은 한국교회에 대한 성모님의 특별한 보호에 감사하고 계속 그러한 보호를 보증받기 위해서였다.


    그 후에도 한국교회는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모님께 대한 감사와 봉헌을 새롭게 했다. 1866년에 있었던 병인박해 이후 10년만에 한국에 다시 들어오는데 성공한 리델 주교는 다시 한국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하는 동시에 성모님께 한 서약을 지키기 위해 루르드의 대 성전안에 한글과 한문과 라틴어로 된 대리석 기념비를 세웠다.


    대구 교구 주교관 옆 광장에 높이 세워진 성모동굴에는 매일 순례자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동굴 역시 성모님께 대한 대구교구 주교의 서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구교구의 안주교는 1911년 대구에 부임하면서 만일 주교관과 신학교 등, 교구의 기본시설을 마련해 주시면 성모님께 기념동굴을 마련해 드릴 것을 서약했었다. 성모님은 그 주교의 청을 들어주셨고, 주교 또한 성모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한국교회는 1954년 성모성년에 즈음하여 또 다시 성모님께 봉헌되었고, 마지막으로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시금 봉헌되었다. 봉헌에 앞서 교황께서는 5월6일 아침 명동성당에서 한국교회와 성모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언급하시면서 봉헌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하셨다. “한국 겨레의 운명에 있어서 성모축일과 날을 같이한 일들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1945년 8.15해방이 그런 일입니다.” 조선교구의 주교좌 성당이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주보인 무염시태의 성모를 동시에 성당 주보로 모시게 된 영광을 가진 명동 대성당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성화를 모시고 한국교회의 주보인 성모님께 한국교회를 다시금 봉헌하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 순교성인에 대한 공경과 신심이 점점 식어가고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모님께 대한 신심도 혹시 함께 식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모성월을 맞으면서 한번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모님과 성인을 공경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들의 신앙과 성덕을 본받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의 전구를 통해서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우리 성인이 주어진 것은 특히 우리가 성인을 본받고 또 우리 성인에게 전구를 청하기 위해서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여의도에서 거행된 시성식에서 이제는 여러분이 순교성인들을 본받아 증언을 할 차례라고 하시면서 한국성인들이 우리 한국인의 신앙의 모델로 주어진 것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의 무기력한 신앙을 닦고, 연마하고, 쇄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순교성인을 공경함으로써 우리에게 전해진 한국교회의 순교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한다면 우리의 순교선열들이 이룩해 놓은 성모께 대한 각별한 신심의 전통도 마땅히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모님이나 우리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공경과 신심을 손상하거나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것을 더해 준다는 사실, 또 그것이 바로 지난 공의회의 정신임을 잊지말아야 할 줄로 생각된다.





    8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최석우 신부


    성모성년과 여성

    현대여성 성모 모성 본받아야


    성모 성년은 역사상 1954년과 1987년 두 번 발표됐다. 이번 강론 주제인 ‘성모 성년과 여성’을 이야기한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실시한 것이다.


    이번 두 번째 성모 성년은 다가온 2천년대 교회를 신자들이 잘 준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실시되고 있다. 서기 2000년전은 예수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성모 마리아를 통해 이땅에 내려 오신지 2천년되는 기념비적인 엄청난 해이다. 이날을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이할 수 는  없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하느님의 백성’인 모든 성직 수도자 평신도들이 자신을 반성하고 신앙을 새로이 단장,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성격을 띠는 것이다. 이 ‘준비’한다는 특성 때문에 1차성년의 단순한 ‘기념’과 구별된다.


    그런데 13년전인 1987년에 준비한 이유 중 중요한 것은 성모님의 탄생연도와 관련된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성모 마리아는 13세부터 18세사이에 결혼, 예수님을 낳았다고 하며, 이를 역산하면 기원전 13~18년경이 성모 마리아가 태어난 해라는 것이다. 즉 성모마리아의 탄신해를 기점으로 그리스도 강생(降生) 2천년전을 준비하는데 이번 2차 성년의 의의가 있다.


    성모 성년반포로 일반 신자들은 영성적인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또 믿음을 견고케해야하며 이러한 믿음의 모델을 성모님에게서 구하는 자세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그렇다면 성모님에게서 오늘날 여성들은 어떤 믿음의 모델을 배워야 할까?

    제일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어머니상’ 과 ‘믿음의 여성상’ 두가지다.


    이 어머니상은 반드시 자식에 대한 육친의 지위로서의 어머니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웃의 어머니, 가정의 어머니등 어머니의 역할과 사명의 차원에서 넓게 해석해야 한다.

    또 이것은 예수께서 마지막 십자가상에 매달려 유언으로 ‘어머니 여기 당신 아들들이 있습니다’ ‘이분이 바로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실 때의 바로 그 어머니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참으로 충실히 따르는 ‘믿음의 여성’이었다.


    성모님도 처음에는 아들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했음에 틀림없다. 12살된 예수가 어느날 갑자기 가출 사흘동안이나 아들을 찾으러 온갖 곳을다 뒤질 때의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겨우 사흘만에 성전에서 찾은 예수가 ‘어머니, 왜 자꾸날 찾습니까’ ‘아버지 일 때문에 여기와 있습니다.’라고 상식을 넘어선 대꾸를 할 땐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달릴 때도 ‘어머니, 저는 먼저 갑니다.’ ‘죄송합니다’ 와 같은 인간적인 말은 한마디도 없이 ‘당신의 아들들이 저기 있습니다’며 성모님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예수가 했을 때 그 답답한 심정은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 마리아는 인내와 믿음으로써 이를 극복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헌신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들의 정신적인 발전을 저지하지 않고 그것을 따라가는 ‘정신적인 어머니’ ‘제2의 어머니’를 엿보게 된다.

    오늘날은 흔히 어머니가 없는 시대라고들 한다. 가정을 잘 지키지 않는 어머니도 적지 않고 자식한테는 결코 양보하지 않으려 하며 자식에게 원하는 것도 자식이 잘되기보다는 어머니의 만족을 위한 경향이 점차 늘고 있다. 이는 육체적 어머니역할은 하나 정신적인 어머니 역할이 빈곤한 때문이다. 자녀장래를 위해 자신의 고집을 버릴 때 정신적 어머니로서의 성장이 가능할 것이다.


    성모마리아에게서 발견되는 인정(人情) 봉사 헌신의 미덕이 현대여성에게서는 찾기 힘드는 주된 원인은 바로 ‘에와’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즉 순종이 없다는 말이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여성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는 오늘날 소위 여성해방운동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만약 여성해방운동이 여성자체(육체적, 정신적 어머니의 역할 및 모성애등 전통적이고 여성고유의 가치)를 벗어나는 것이라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에와’가 자신의 지위를 벗어남으로써 세상에 죄악을 가져온 사실을 상기할 때 잘 드러나는 이치이다.


    이 세상에서 받아들일 줄 모르고 축복받지못하는 여성만큼 불행한 여성은 없다.

    제2차 성모성년의 폐막을 얼마 앞둔 이 시점에 오늘날 어머니들은 아들의 고통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성모님의 어머니상과 인류 구원사업에 스스럼없이 내놓은 당신 모성애를 본받아야할 것이다.






    9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민병덕 신부


    성모의 승천은 인간의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2000년의 축제는 동시에 그분의 어머니를 바라보게 한다(구세주의 어머니 회칙3).


    대한독립 만세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본식민지로서의 36년사를 마감했으며, 그 감옥에서 해방된, 독립기념일이다. 아직도 긴가민가 하지만, 얻은 이 해방의 기쁨이 분명하게 점점 큰 기쁨으로 기념되기를 기도한다. 또한 성모님의 축일중에 큰 축일인 오늘의 기쁨과 합하여, 네배, 백배, 만배의 기쁨으로 후손대대에 이어지기를 기도한다.


    성모승천대축일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은 많은 성모님의 축일중에서 성인들의 사망일을 기념하는 풍습에서 기인되었다. 이 축일의 시작은 명확하지 않으나, 초대교회부터 믿어온 사실로 6세기경 “성모의 귀향축일”로 8월 15일에 지켜오다가 1950년 교종 비오12세에 의해 공식 교의로 선포되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님의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올림을 받아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임을 확인한 것이다. 비오12세는 이 진리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그리스도인의 부활”이라는 성서적 근거(1고린15,14-57)이므로 성모님도 부활하셨고, “주께서 함께 계심”(루가1,25), “여인 중에 축복받으심”(루가1,42)으로 얻으신 그 은총과 축복의 가득함에서 성모님의 승천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성모님의 대축일에 구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면, 우리나라의 모든 여자들이 성모님과 꼭같은 축복을 받도록 기도한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미래가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적 차원에서 희망적이지 못하기에, 우리의 미래인 어린아이들을 양육하는 모든 어머니들에게도 성모님과 꼭같은 축복이 있어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오늘의 복음

    오늘 복음은 루가 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머리말에 이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사랑을 그린 1,5-2,52의 중간부분(1,19-56)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①1,39-45 : 엘리사벳의 노래 ②1,46-56 : 마리아의 노래로 나눈다. 오늘은 주로 마리아의 노래를 묵상한다.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

    기도하는 이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 노래는 6세기부터 성무일도의 저녁기도 중에 매일 노래되어왔다. 기쁨의 찬미가이다. 또 엘리사벳의 노래는 그 어휘의 원문연구․사용 횟수를 떠나, 그냥 성서를 읽어 봐도 “뛰놀았다”“축복받았다”등의 기쁨을 뜻하는 단어들이 유별나게 많이보인다. 기쁨을 노래한 ‘엘리사벳’의 노래와 함께 그 응답처럼 보이는 마리아의 노래는, 그 기쁨의 이유를 드러내는 ‘기쁨찬미가’이다.


    세상 정상(頂上)들의 만남

    ‘엘리사벳의 노래’는 정상들의 만남을 기뻐함이다. “태어난 사람 중에서 가장 위대한(루가7,28)세례자 요한과 하느님의 아들(루가 3,22), 그리고 그 어머니들의 정상회담의 기쁨을 노래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정상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 백성을 섬기는(루가 22,24-27)정상들의 만남이기에 그 구원의 기쁜소식을 마리아가 노래한다. 세상 신문에 날 기쁜소식이다.

    세상 모두가 신명날 텔레비전뉴스 특종감이다. 이 소식을 아시는 인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께서 손수 지어 자녀들에게 들려주시는 자장가이며, 교육시키는 노래가 ‘마리아의 노래’이다.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성모님과 함께 손을 뻗고 발을 차올리며 몸 흔들어 노래 불러보자! 얼씨구 절씨구~, 닐니리야! 알렐루야! 만세!


    인간해방 만세!

    성모님이 지으셔서 이쁘시게도 부르셨을 그 노래를 우리 모두의 노래로 함께 따라 불러본다. -기뻐날뛰는 곡조로.

    46;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47;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48;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왜냐하면)이제로부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성모님의 마음속 그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 찬양노래가 터져 나온다. 이 찬양은 글자 그대로 예언적 지칭인데, 여기서 하느님은 한 여인의 기쁨에 찬 신앙고백 속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의 세상종말론적 구원자로 당신을 밝히 드러내신다.


    성모님은 여기서, 구약의 예언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약속된 ‘하느님 구원’이 자신에게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데, 이유는 예수님도 ‘행복선언’(마태 5,3)에서 드러내신 그 이유: 비천하고 가난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종으로 자처하며 가난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여인을 하느님은 하느님나라의 왕이신 하느님 자신의 어머니로 택하시어 그 행복을 증명하신다. -스스로 자신을 겸손하게 가난한 여인으로 청하는 모든 어머니에게 하시는 약속의 여인이시며 이루어졌고 이루어진다. 약속을 지키소서! 주여.


    49;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50; 그 인자하심은 세세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바치시리라.

    전능하심, 거룩하심, 자비하심은 전적으로 하느님만의 특징이다. 하느님께 아주 걸맞는 칭호이다. 하느님은 생명이시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신다. 그 하느님은 전능하시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고 그 전능하심으로 세상을 완성하셨으며(이미 그러나 아직), 완성하실 그 큰일을 비천한 여인과 함께 하신다.


    그 거룩하신 하느님의 특징인 자비 때문에, 아담의 원죄(하느님의 제의를 거절한 여인=하와)로 인간이 잃어버린 그 낙원을 겸손한 한 여인의 순종 때문에 새롭게 창조하신다. 그래서 잉태되어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인간 창조의 끝없는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이 하느님의 자비에서 시작된 하느님께서 희망하시는 겸손한 이들의 신앙고백으로 모든 세상은 매일 새롭게 재창조되고 완성되어 간다. 그 첫 인간이 예수이시고, 이 예수를 닮아, 따라 사는 모든 이가 그들이다. 51;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52; 권세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53;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성모님의 이 노래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당신 민족을 연상케 한다. 부르짖는 이의 외침을 들어주시는 주님, 구하는 이에게 선물이신 주님이시다. 세상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의와 그 뜻을 구하는 모든 이 부르짖는 소리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청을 들어주신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모든 이의 희망이 되신다. 그러나 하느님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정의의 심판자이시며, 그들을 벌하신다. 자신을 위해 세상을 사는 모든 이기주의자가 그들이다. 개인적 이기주의와 가족적․집단적․국가적․민족적․인종적 이기주의자들의 부요함의 이기주의를 주여 벌하소서(루가 6,24-26).


    54;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55;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

    성모님께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당신의 민족, 그리고 당신같은 겸손한 여인들, 그 여인들의 후손들 모두에게 확장된다. 성모의 아들이신 예수를 주님으로, 본보기로 따르는 이들에게, 모든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이 확장된다.


    예수가 빵이 되어 성체성사 속에 부서지고 먹힘으로 예수와 일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백성; 교회에게 계속된다. 그 끝까지.

    -평화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10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함세웅 신부


    오늘을 8월15일, 민족의 해방일인 광복절이자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자유와 빛을 되찾은 감격을 우리는 오늘 새롭게 기리고 있다. 일제 치하의 35년. 긴 어둠과 억압의 쇠사슬이 끊겨진 이날, 참으로 우리 민족은 새로운 창조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민족은 미․소 양국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이어 일어난 6․25전쟁으로 큰 골병을 앓게 되었다.


    해방 전 독립군을 감옥에 잡아넣었던 일제의 앞잡이들이 미군정 아래서, 이승만 정권 아래서 또 그 이후에도 버젓이 활개치며 관리 노릇을 계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나라와 민족을 더 크게 병들게 한 원인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백범 김 구의 말과 같이 자유와 해방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땀의 노력과 죽음의 결단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시간에 또한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광복절을 참으로 파스카의 해방과 신앙 안에서 이해하고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파스카는 하나의 탈출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묵은 것을 떨쳐버리는 결단의 행위다. 노예의 삶을 박차고 억압의 체제를 거부하고, 꿈과 이상을 지니며, 새땅을 이룩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창조적 연대 작업이다.


    때문에 파스카에는 회개와 뉘우침이 선행되어야 한다. 올바른 가치를 정립하고, 하느님을 우선으로 선택하는 결단이 참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픔이자 결별이며 묵은 것과의 영원한 단절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자유와 해방, 기쁨과 축복, 일치와 평화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광복절을 그렇지 못했다.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했기에 가치관이 전도되었고, 그래서 계속 허위와 기만과 은폐로 정치 도덕의 기초가 흔들려 병든 사회 현실을 가져왔다. 적어도 한번, 우리에게 과거 역사의 잘못을 청산하고 기워 갚는 아픔의 속죄와 보상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묻어 둔 채 우리는 결코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낼 수 없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흔적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또한 이들을 박해하고 고문했던 갖은 형틀과 형구들이 청산되지 못한 유제(遺制)와 함께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몸서리 쳐지는 것은 일제가 애국 선열들을 고문했던 그 형구, 그 형틀, 그 악법 그리고 그 방법이 그대로 이 현실에서 학생, 노동자, 민주 인사들에게 적용,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광복절의 현재적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짓밟는 그 어떤 어둠의 세력과 집단도 결코 빛과 자유를 이길 수 없다. 진정 광복절은 자유와 해방의 실현에서 그 참뜻이 나타난다.

    아직도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슬픈 현실에서 우리가 과연 빛을 노래하고 찬미할 수 있는지 새삼 부끄러워진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자신들을 불사른 선열들의 뜨거운 숨결을 우리 모두 확인하며 빛과 자유, 평화의 삶을 실현하자.






    11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박진량 신부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특별한 모양으로 관련된 한 인간이 승천한 축일을 기리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이 인간에게 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 라는 칭호를 드렸고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지상 생애가 끝난 다음에는 ‘영혼과 육체가 영광스럽게 하늘에 올림을 받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으신 동정 성모 마리아 이십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분을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의 본보기’라고 특히 강조했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성모님을 묵상하기 위하여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올바른 성모신심’에 관한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마리아 공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과 하느님 말씀의 설교자들은 성모의 고유한 품위를 존중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친 마음의 협소함(minis mentis angustia)과 마찬가지로 또한 온갖 거짓된 과장(omnis falsa superlatio)도 힘써 피하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그들은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성서와 교부들과 교회학자들과 교회의 전례를 연구함으로써, 복되신 동정녀의 역할과 특전이 모든 진리와 성덕과 신심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올바로 밝혀주어야 한다.


    또 그들은 갈라진 형제들이나 다른 어떤 사람들이든지, 교회의 참된 가르침에 대하여 오해를 품게 할 수 있는 말이다. 행동은(sive in dictis sive in factis)무엇이든지 다 힘써 막아야 한다(sedulo arceant). 참된 신심은 효과 없는 일시적 감정(affectus)이나 또 어떤 허황된 신뢰감(oredulitas)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참된 신앙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켜야 한다(meninerint). 그 참된 신앙에서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어머니의 탁월성을 인정하게 되며 성모님께 자녀다운 사랑을 드리고, 그분의 덕성을 본받도록 자극 받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위에서 성모신심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 봅시다.


    – 본당이나 신자가정에 가보면 예수님 상은 없어도 성모상은 있습니다.

    – 많은 신자들은 하느님 성삼의 아들보다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더 즐겨 부르는 것 같습니다.

    – 어떤 사람은 하느님 삼위의 이름보다는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더 많은 기적이 이루어지는 듯이 선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우리는 다른 어느 성월보다도 성모성월을 한층 더 성대하게 외부행사로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전국 스케일의 천주교 행사는 거의가 성모님을 주로 찬미하는 행사 였습니다.


    과연 이러한 성모신심이 공의회의 뜻대로 올바르게 그리스도 신비와 관련되어지고 있습니까? 혹시나 이런 성모신심 행사를 보고 갈라진 형제들이 천주교는 역시 ‘성모교회’라고 비평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신심들로써 우리는 성모님의 신앙과 사랑을 본받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덕택으로 횡재나 요행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성모 마리아가 차지하는 그 비중에 알맞게 우리의 성모신심을 조절하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덕성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제 초대교회가 가졌던 신앙의 객관화인 성서에서 성모님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좀 생각해 봅시다.


      복음에 보면 성모 마리아는 언제나 예수님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① 예수 성탄의 예고를 받을 때 성모님은 놀라서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하셨고 천사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큰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여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 거기서 3개월을 같이 지내셨습니다.


    ② 예수님의 소년시절에는 성모님은 잃어버린 예수님을 사흘만에 성전에서 다시 만나자 깜짝 놀라며, 반가워서 “애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셨지만 성모님은 그 대답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③ 가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그 잔치 도중에 술이 떨어졌기 때문에 성모님은 그 집의 난처한 입장을 도와주고 싶으셨던지 예수님께 술이 떨어졌다고 알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예수님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시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하여라”하고 하인들에게 일렀고, 예수님은 준비된 항아리의 물을 술로 변화시킴으로써 당신의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④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도 성모님은 거기에 와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에 사도 요한을 가리키며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시고 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성모님은 모든 것을 이해하신 듯이 아무 말씀도 없이 예수님의 배려에 따랐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관련하여 나타나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볼 때 성모 마리아는 우리의 보통 어머니들과 똑같이 평범한 분이며 서로 하느님과 예수님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대단히 폭넓은 수용력을 지닌 분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소식과 소년 예수님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대단히 폭넓은 수용력을 지닌 분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잉태소식과 소년 예수님이 성전에서 대답하신 말씀, 또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말씀,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배려를 성모님은 말마디 상으로 뿐 아니라 또한 그 말씀 속에 담겨있는 깊은 현실을 마음의 이해로써 언제나 속속들이 수용하셨습니다. 성모마리아께서 이와 같이 인간과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이해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행동하신 것을 생각해볼 때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원만하고 성숙한 그리스도 신자였으며, 모든 믿는 이들의 본보기였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려분,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 축일을 지내면서 성모 마리아의 이러한 인간과 그리스도께 대한 태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신학공부를 할 때나 혹은 타인과의 대화를 나눌 때 너무나도 종종, 그 말들의 겉에 나타나는 것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말마디 속에 감추어 있는 현실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마땅히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그 말씀의 속에 있는 현실까지 마음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친척들을 방문하고 잔치 집에도 가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현장까지도 따라가셨던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서 우리도 마음으로 깨달은 바를 기도와 행동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성모 마리아께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서는 사실상 오늘날도 우리에게 그대로 베풀어주신다고 하느님께서는 사살상 오늘날도 우리에게 그대로 베풀어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노력함으로써 우리도 이 지상 생애가 끝난 다음에 성모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부활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를 본받고 싶은 충동이 우리의 마음 속에 용솟음치도록 모두 함께 열심히 기도합시다.






    12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김경식 신부


    우리의 어머니

    “만인의 자모요 전구자시니/ 애절한 우리청 전달하소서/ 구세주 당신을 모친삼으사/ 세상을 구하러 오셨나이다. 죄악이 거칠게 우리를 맬제/성모여 우리와 함께 계시고/죄악에 묶이운 마음의 사슬/신속히 다가와 풀어주소서“ (성모축일 찬미가에서)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교회는 사도시대부터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셔왔습니다. 우리 머리이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며 그분을 어머니로 모셨으니, 그 지체인 우리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죽음의 시간에 사도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시다”(요한19,27)하며 모자의 관계를 맺어주셨습니다.

    사실상 마리아의 역할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만 사도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시기 위해서 하늘로 불림 받을 시간이 연기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마리아의 어머니 역할은 사도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교회의 수호자로 나타나십니다. 몇 가지 예를 봅시다.


    1206년부터 도미니꼬 성인을 통하여 알비 이단(육체적인 모든 욕구를 나쁜 것으로 생각하여 성사와 결혼, 교회와 국가의 제도까지 거부하는 이단)을 없애주셨는데 이때부터 묵주의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1571년, 온 교회가 묵주의 기도로 성모님의 보호를 청하여 회교도들의 침공을 기적적으로 물리친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1858년, 과학의 발달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교만을 누르기 위하여 프랑스 루르드에서 열 여덟 번이나 나타나셨고 5천여 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1917년, 6개월 동안 매 13일에 세 아이에게 나타나시고 10월 13일에는 7만명의 군중에게 태양의 기적을 보임으로써 러시아와 세상의 죄악을 경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1933년, 벨기에의 바뇌에서 “나는 가난한 이의 동정녀이다”하시며 여러 차례 나타나시어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극도의 가난 속에서 허덕이던 노동자들이 공산주의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성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로서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어머니로서도 우리를 자애롭게 보살펴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비록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행실이 깨끗하지 못하여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서기에는 너무나 염치없고 예수님에게는 더더욱 송구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되풀이되는 악행을 숨기고 주님의 자비만 구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모욕으로써 갚는 것이라 스스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인일수록 주님의 은총은 더욱 필요하니 어머니의 전구를 바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어머니께 청하여 거절당했다는 말을 우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된 우리가 자애 깊으시고 아름다우신 어머니에게 봉헌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꾸미며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립시다.




    13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유재국 신부


    평화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강한 자여, 그대 이름은 어머니로다” 유명한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말이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 존경을 드리고 우리의 신심을 드높이기 위하여 이 거룩한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자는 육체적으로나 생리적으로 약하다고들 하지만, 어머니만큼 이 세상에서 강한 자도 없다. 어머니는 의지적으로 강하고, 정신적으로 강하며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강철보다 강하고 하늘보다 높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사랑을 배웠다. 만일 우리에게 어머니가 없었다면 우리의 마음은 메마르고, 인생의 행로에서 방황하며, 사랑을 베풀지도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배웠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배웠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은 너무나도 강하고, 너무나도 고귀하며,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머니께 모든 존경을 드리면서 효도하고 우리의 사랑을 드리는 것이다.


    지상의 어머니가 이렇게 강하고 훌륭하지만, 우리 신자들에게는 또 한분의 어머니가 계신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이다. 성모마리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어머니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어머니이시며, 가장 사랑스런 어머니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인류 구세주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그리고 우리의 어머니로 동정 마리아를 간택하셨다. 마리아는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 가운데서 가장 풍부한 은총을 받으셨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성모님은 의지적으로 강했고, 정신적으로 강하셨으며, 특히 신앙적으로는 그 누구도 성모마리아를 따를 사람이 없다. 또한 성모님만큼 사랑을 베푸신 분은 없다.

    하느님이 파견한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를 받고, 동정 마리아는 장차 이루어질 구속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신앙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베들레헴으로부터 이집트로 피난을 가기까지, 나자렛의 생활에서부터 골고타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성모마라아의 일생은 고통과 십자가의 일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마리아는 강한 어머니로서 확고한 신앙심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했으며, 묵묵히 당신 아들의 구속사업에 협조하셨던 것이다. 특히 당신 아드님께 대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모든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참아 받으셨다.

    그러기에 성모마리아의 일생에 대한 보상은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은 승천의 영광을 받으셨고, 당신 아드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같이 훌륭한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그렇다고 우리는 성모님을 바라다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며, 그분에게 무엇을 드려야 하겠는가?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모마리아에게서 그의 굳은 신앙생활을 배워야 하고 본받아야겠다. 확고부동한 신앙과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심을 가지고 어떠한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생활을 본받아야 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주시는 고통과 십자가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불평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고통과 십자가를 신앙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당신이 맡은바 사명에 언제나 충실하셨다. 그러기에 동정마리아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모델이시다. 우리는 감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성모님의 외적 모습을 닮으려고 하지말고 그분의 깊은 신앙과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이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랑을 드린다면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과 사랑을 드려야겠다.

    어머니는 이 시간에도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특히 평화의 모후이신 어머님께 우리나라에 평화를 주시고 이 세계에 평화를 주시도록 기도 드려야겠다.

    하루속히 우리나라가 통일되어 서로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어머님께 기도해야겠다.


     “평화의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투명한 가을 하늘 마리아를 부르면 해뜨는 마음.

    가난해서 뜨거운 우리네 소망의 촛대위에 불을 켜는 어머니

    쉬임없이 타오르는 주홍빛 불길 두 손에 가득받아 언 마음을 녹인다.


    깊은 산골짜기 산나리 향기먹고 담담히 흘러가는 물같은 여인의 사랑

    맑은 물 가슴에 차서 쓰디쓴 목마름을 씻어 없앤다.

    가을빛 피어나는 가만한 숨소리로 마리아

    너의 이름 부르면 길이 열린다.

    거미줄로 얽힌 죄많음을 후련히 쏟아버린 따스한 눈물

    가난한 우리네가 펄럭이는 촛불 되어 돌아오는 길

    해를 안은 마리아와 영원을 산다”                        (이해인 수녀의 시)


    14   성모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저희도 불러주소서  

    김영진 신부


    어린 시절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나는 8월15일 성모승천 대축일이 되면 30리가 넘는 본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갔다. 개울을 여러 개 건너고, 논둑 길과 산길 그리고 신작로 길을 따라, 공소의 열심한 교우들과 더불어 같이 갔다. 나는 친척집이 있어 그냥 갔지만, 친척집이 없어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어야 되는 이들은, 작은 보자기에 쌀이나 보리쌀을 한되쫌 싸가지고 가기도 했다. 마치 소풍이라도 가듯 발걸음도 가볍게 미사참례에 가는 공소교우들의 행렬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퍽 아름다웠다.

      

    나는 공소에서 회장일을 보시는 아버지와 함께 가며 묵주의 기도를 바치기도 했고, 때로는 집안 이야기며 신앙 이야기를 주로 듣기만 하면서 갔다. 한번은 아버지께 물었다.

    “아버지, 성모님이 어떻게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어요?”라고 했더니, 아버지께서는 “성모님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하느님을 열심히 믿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승천하셨어”라고 대답해 주였다. 아버지의 말씀 속에는, 나도 부모와 스승의 말씀 잘 듣고, 하느님 열심히 믿고 살아야 된다는 의미가 풍기었다. 그리고 나도 하느님 열심히 믿어서 성모님처럼 꼭 승천해야지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가 나이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철석같이 믿어왔던 성모님 승천에 대한 교리와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고 하는 것도 믿을까 말까 하는데, 성모님까지 승천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믿으라고 교회는 요구하는가 하는 불만과 더불어, 성모승천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가 있으면 슬그머니 피해갔다. 나 자신 안에 지식은 커가고 있었으되, 성모님 승천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었다.            


    승천은 믿음의 열매이며 선물

    돌팔이 신부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르나, 신부가 되고 나서도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성모님 승천에 대한 믿음을 가장 크게 막고 있는 것은, 나의 알량한 지식이 교만이 되어 성모승천에 대한 나의 믿음을 망가뜨리고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동시에 어린 시절 성모승천 대축일이면  30리 길을 걸으면서 들려주시곤 하였던 아버지의 성모승천에 대한 말씀이 떠오르며, 성모님의 승천은 바로 믿음의 열매요 완성이요,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모님의 승천은 엘리사벳의 노래에서 나오듯,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성모님의 믿음의 열매요, 완성이며 선물이다. 믿음이란 인간의 지식으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것을 선물로 받게 한다.

    교황 비오 12세는1750년 11윌1일 하느님의 어머니요 평생동정이신 마리아께서는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 영혼과 육신을 간직한 채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다고 선포하심으로써, 성모님의 승천을 모든 교우들이 믿고 축하하기를 바라셨다.

      

    성모님의 노래를 보면, 성모님은 시인이며, 동시에 지극히 겸손한 여인이요, 강인한 믿음의 소유자였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시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하느님을 뜨겁게 찬미하는 노래를 할 수 있었겠으며, 지극히 겸손한 여인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신을 비천하고 보잘 것 없다고 고백하실 수 있었겠는가. 또한 강인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어찌 어린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명할 수 있었겠는가.          


    몸과 마음을 하늘 향해 활짝 열자

    승천은 단지 예수님과 성모님의 전유물이 아니다. 승천은 시인이며 겸손한 사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들도 마지막 날에는 모두 부활하여 승천하게 될 것이다. 다만 성모님을 일찍이 승천케 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한 인간의 완성인 승천의 은혜를 성모님께 일찍이 베푸신 것일 뿐이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뜨겁게 찬미하는 시인으로 살자. 그리고 성모님처럼 지극히 겸손한 사람으로서 살며, 또한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주도권에 온전히 자신을 내 맡기는 도구로서 살자. 날이 새면 하늘로 비상하는 새들처럼. 뿌리를 땅에 감춘 채 온몸을 하늘로 향해 서 있는 나무들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언젠가 승천하게 될 하늘을 향하여 활짝 열어보자.

               





    15   성모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성민호 신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바치는 성모송이지만 오늘따라 더욱 감명 깊고 기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신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께로부터 그 육신과 함께 하늘에 불러올림을 받으신 오늘은 성모님 자신에게는 더 없는 영광의 날이고, 우리에게는 구원을 보증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로 성모님께 대한 여러 축일 가운데 그 절정을 이루는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4대 축일 중의 하나인 오늘은 주님의 모친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가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것을 경축하는 기쁜 날인 동시에, 우리나라로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뜻깊은 8․15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으로 선택된 성모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실 때부터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셨고, 하느님의 인류 구원사업에 깊숙이 동참하셨습니다. 물론 성모 마리아가 인간 구원사건의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이루신 인류 구원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셨으며, 크나큰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 구세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아 길러주셨고, 그분과 함께 일생을 같이하면서 전도여행을 도우셨으며, 마침내 십자가 밑에서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여 십자가상 제사의 한 몫을 성부께 바치셨지만, 언제나 하느님께 순종하는 여종의 정신을 간직하고 기쁜 마음으로 맡겨진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성가정의 주부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집안 일을 알뜰히 보살폈으며, 장부 요셉에게 존경과 사랑과 순명으로 내조하셨고, 아들 예수님을 정성껏 보살펴드렸습니다. 또한 성모님은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받으신 후 초대교회를 도우셨으며, 지금은 천국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모친일 뿐 아니라, 그 지체인 우리의 어머니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자의 모친으로 선택되기에 충분한 덕을 쌓으셨고, 탁월한 인품을 가지셨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위대한 분으로서 당연히 우리의 찬양과 존경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분이 천주성자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만 생각해도, 그분께 아무리 크나큰 공경을 드린다 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가브리엘 천사도 하느님의 명을 받고 성모 마리아에게 “은총을 가득히 반은 이여”라고 인사하였고, 엘리사벳도 성령을 받아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라고 외쳤습니다. 교회에서도 옛부터 그분께 더욱 어울리는 찬미가, 기도문, 축일, 예술품을 만들어 그분을 공경하도록 권장하였습니다.

    성모님도 장차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찬양할 것을 예견하시고,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라는 저 유명한 마니피캇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당신을 복되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천한 여종의 신세를 돌보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덕분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성서에는, 성령 강림 이후의 성모님께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낼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는 거룩한 전승, 즉 성전이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성모님은 십자가상 유언대로 요한 사도와 함께 소아시아에서 여생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이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사방에 흩어져 전교하던 사도들이 모여들었고, 그후 돌아가신 성모님을 정성껏 동굴에 안장하였습니다. 멀리 인도 가까이에서 전교하던 토마 사도만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에, 성모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뵙기 위하여 동굴 문을 열었습니다. 이때 성모님의 시신은 온데간데없고 향기가 진동하였으며, 서광이 비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사도들은 “주께서 당신 모친을 부활시켜 그 정결한 육신과 함께 천국으로 데리고 가셨다.”고 하면서, 기쁨의 찬미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사람이 죽는 것은 죄에 대한 벌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아무런 죄에도 물들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신 주님을 본받아 잠시 영혼이 육신을 떠난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당신 아들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난 성모님은 은총을 가득히 받은 분으로서, 인간의 궁극적 소망인 부활과 승천의 은총도 받으셨음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당신을 잉태하고 낳아주신 어머니의 육신이 사후에도 죄의 결과인 부패를 면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일찍부터 성모님의 승천을 믿고 기념해 오던 중, 1950년 교황 비오 12세가 신앙교리로 공포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을 성모 승천 대축일로 제정하여 마음껏 경축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제 성모님은 하늘나라에 올림을 받아 모든 피조물 위에 영광을 받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지상에 있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십니다.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불안에 떠는 우리를 항상 걱정해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처럼 좋은 어머니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우리에게도 부활과 승천의 은혜를 얻어주십사고 믿음직한 성모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너무나 불안하고 삭막합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소위 동서 양대진영에서 전쟁을 억제한다는 미명 아래 무서운 핵무기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던 냉전상태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는 하지만, 현재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만 가지고도 이 지구를 네 번 이상 멸망시킬 수 있다니 정말 놀랄 일입니다. 또한 이 세상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험악해지고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이웃사랑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성모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평화의 모후께서 강력하게 전구해 주시지 않으면 이 세상은 구제불능이며, 그분의 만류가 아니고서는 하느님의 의노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도 위험한 현대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천상 어머니께 의탁하는 길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교회를 성모성심께 봉헌하면서, 당신과 뜻을 같이할 것을 우리에게 명하였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성모 승천 대축일에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며,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해방을 얻어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물론 우리 교회가 여러 가지로 성모님의 축복을 받아 성장하고 발전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을 한국교회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하늘나라에 오르신 성모님을 마음껏 경축하고 찬미하면서, 그분의 귀여운 자녀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하신 성모님의 정신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귀감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소원인 참된 민주화와 조국통일과 세계 평화를 얻어주십사고 간청합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모후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16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사는 게 사는 게 아녀  

    서정현 신부


    어느 시골 공소 미사 중에 한 할머니께서 요즘 어떤 어려움이 있으시냐는 질문을 받고 이르시는 말씀, ꡒ사는 게 사는 게 아녀ꡓ. 이 말은 지금의 그 분의 삶이 사는 것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천하게 산다는 뜻일 것입니다.


    할머니는 일찍이 가난한 지금의 시골 공소에 시집와서 어렵게 자녀들을 교육시켜 분가시키고 지금은 홀로 살면서 온종일 밭에 나가 뙤약볕 아래서 일하고 밤이면 삭신이 쑤시는 몸을 가누며 저녁기도를 바치는 분이십니다.

    비록 외롭고 고통스런 나날이지만 일생을 주님만 믿고 그 분께 온 희망을 두면서 매일 ꡒ주께서 여종의 미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ꡓ라는 마리아의 노래를 읊으십니다.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요즘의 농촌의 모습은 비닐 하우스의 비닐이 온통 찢겨져 앙상한 갈비뼈 처럼 철골이 드러나 있고, 바람에 떨어진 고추 수확에 농부들은 여념이 없습니다.

    태풍이 거세게 불어 비닐이 전부 찢기던 날 한 형제는 그저 허허 웃으며 한 잔 술로 쓰린 마음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농작물의 과잉 생산으로 값이 폭락하여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애써 지은 농사이기에 그래도 최선을 다해 수확을 합니다.


    농촌의 삶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두고 있는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성모님께 해 주신 것처럼 우리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아 주시며 그 분 몸소 우리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며 우리 삶에 동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죽음까지도 굴복시키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처한 비참한 상황을 극복시키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참다운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것 같이 살 수 있도록 마련하셨습니다.






    17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엘리사벳을 방문하심과 성모찬가

                                신문기사(보통 사람들이 체험한 성모님의 이야기)

                                구사일생(九死一生)한 사제의 편지


    친애하는 친구에게

    나는 중앙 아프리카의 한 수도원의 부제로 일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비행해 왔다네. 내가 온 [부카부]의 수도원은 1966년 하데비히 수녀에 의해 세워져 1982년 2월 16일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인 받은 예수 부활을 증거하고 전교하는 수도원으로서, 하데이비 수녀는 동년 8월22일 만장일치로 초대 수녀원장으로 뽑힌 분이라네.


    이 역사 짧은 수도원은 불과 16년사이에 1백여명의 수녀지망생들과 50명의 수녀수련생들을 수용하고, 2채의 수도원 건물을 갖출만큼 성장했다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아프리카 오지의 수도원에서 일할 좋은 기회를 주신 셈이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먼저 치명적인 불운을 격게 하셨다네. 그것은 우리가 탄 조그만 두 개의 프로펠라가 달린 포교전용비행기가 마지막 1천4백km의 여정을 남겨둔 때 일어난 일이었다네.


    우리 비행기는 6시간 30분 이상을 원시림이 빽빽한 아프리카 밀림지역 상공을 날아가야 했는데 [키부]에 갈 때까지는 모든 상태가 좋았다네. 우리가 내릴 [부카부]의 키부호수도 안개와 구름사이를 통해 멀리 보였다네. 그때 우리 비행기가 갑자기 어딘지 모를 고장을 일으킨걸세. 공항관제탑에서는 아무런 지시도 들리지 않았는데 아마도 연료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기내의 전력이 약해진 탓이었던 모양이야. 약3분간 우리는 목표인 호수를 찾기 위해, 구름사이를 뚫고 급강하면서 산과 분화구 사이를 날았지. 그러나 열 번 아니 스무번이상 시도했지만 우리는 계속 헛돌기만 했어. 우리는 몇 번이나 이리저리 비행 했지만 언제나 가파른 경가지와 빽빽한 원시림밖에 발견할 수가 없었다네.


    그때 나는 묵주기도를 올리기 시작했었지. 그때 우리는 구름사이로 조그만 땅이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네. 우리는 산비탈에서 불과 20m떨어져 아슬아슬하게 날아 통나무집 곁을 지나 낮게 하강 할 수 있었지. 통나무집에는 흑인 가족들이 놀라 뛰어나와 대피하는 모습도 보였어.

    그러나 우리 비행기는 바나나 나무 꼭대기를 미끄러지듯 부딪치며 이리저리 공중에서 지그자그로 날았어. 아무런 비행상황도 모른 채 장님처럼 산과 산 사이를 장님비행처럼 얼마동안 했을까? 근 한시간 반 동안이나 장님비행을 한 뒤에 우리는 이제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


    기름은 얼마나 남아있을까? 나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히데비히 수녀원장과 유럽에 남아있는 동료친구들을 생각했지.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비록 죽음을 걱정하지만 어떤 환난속에 빠지더라도 나의 피난처는 성모님이라는 생각을 했다네. 하나의 서약과도 같이…

    그때 문득 구름사이로 조그만 틈이 보이면서 햇볕속에 우리가 그렇게도 목마르게 찾아 해매던 [부카부]에 있는 호수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 드디어 우리는 급강하 호수를 찾아내고 뭇가를 따라 간신히 공항으로 날아갈 수 가 있었던 것일세.


    우리가 공항에 착륙했을 때, 우리는 겨우 10분간 더 날을 수 있는 연료만 남기고 있었다는군. 나는 과연 마리아에게서 무엇을 서약해야 할 것인가!

    나는 성모님에게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일을 할동안 최선의 봉사를 다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 우리를 격려해주시며 날마다 묵주기도를 올리며 해달라는 기도의 말씀을 드렸다네.






    18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무지개

    최인호 베드로/ 작가


    워즈워스(Wordsworth, 1770 -1850)는 영국의 잉글랜드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8세 때 어머니를,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의 보호 아래 성장했습니다. 그는 프랑스혁명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다섯 살 연상의 여인을 만나 딸을 낳기도 하며 방황하는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28세 무렵 시인 콜리지와 「서정민요집」을 출간한 그는 ‘낭만주의의 문학선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명한 서문에서 ‘시골사람들의 감정만이 진실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만이 가장 알맞은 시어’라고 발표함으로써 18세기식 기교적인 언어를 배척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아져 마침내 계관시인이 되었으며 특히 자연에 대한 미적 관심은 유럽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19세기가 낳은 대표적 낭만파 시인으로 손꼽힙니다. 주옥 같은 워즈워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는 ‘무지개’입니다.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내 가슴은 설렌다/ 내 어렸을 때도 그러하였고 나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니/ 나 늙어진 다음에도 제발 그러하여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죽어버리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비옵나니 내 목숨의 하루하루여/ 천성(天性)의 자비로 맺어지거라”

    무지개를 바라볼 때 가슴이 설레던 어린 시절의 감동이 나이 들어 사라져서 감동할 줄 모르는 인생을 살게 된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좋으며, 하루하루를 순수한 동심으로 살 수 있음이야말로 ‘천성의 자비’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한 마리아의 노래는 흔히 ‘마니피캇’이라고 합니다. 맨 앞부분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로 시작되는데 ‘찬양하다’는 라틴어로 ‘마니피캇’(Magnificat)이므로 그렇게 불리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마리아가 처음 읊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유행하던 노래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오랜 기도 끝에 ‘사무엘’을 얻은 한나의 노래 “내 마음은 야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1사무 2,1)를 본뜬 이 노래를 누가 언제 지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쁨과 자신을 선택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고마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보살핌을 찬양한 마리아의 이 노래야말로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워즈워스가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볼 때마다 내 가슴은 설렌다”고 노래하였듯이 마리아는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렌다”고 노래했습니다. 워즈워스가 노래한 ‘하늘에 걸린 무지개’야말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며,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나 늙어진 다음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바라옵나니 내 목숨의 하루하루여, 천상의 자비로 우리를 채워주소서.’

    그렇습니다. 어린이야말로 모든 어른의 아버지,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마태 19.14 참조).     






    19   성모 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인간 구원의 희망


    성모 승천 대축일은, 성모 마리아가 지상에서 생활을 마친 후 죽음의 부패를 겪지 않고, 하늘로 오르셨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이,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를 거룩한 교회의 전승으로 받아들였다. 성모 승천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믿을교리로 반포했다. 「원죄가없으시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현세생활을 마친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는 것을 믿을 교리로 밝히고 이를 선언했다」(비오 12세의 사도헌장)


    성모승천은 비록 성서에 기록된 내용은 아니지만 초대교회때부터 교회 전승을 통해 내려오는 내용이다. 전례상으로도 성모 승천을 기념하는 날은 마리아 축일 중 가장 코고 성대하게 지내고 있다


    교회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가톨릭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다. 성모님이 교회의 가장 으뜸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분의 신앙 때문이다.

    성모님의 신심은 모든 신앙인들이 본받아야할 모범이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던」(루가 1,42-45) 마리아의 믿음이 그녀를 교회의 어머니로 존경받게 하는 것이다.

      

    신앙이란,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 잘 받아들일 수 없지만,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를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강조하고 있다. 즉 마리아를 통해 이미 이스라엘에 구원의 손길을 보내셨고, 결국 완성하실 것이라는 것을 시사하고있다.

    특히 구원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 교만한 자, 권세있는 자, 부유한 자, 즉 잘난 사람을 내치시고 비천하고 배고픈 자 등, 못난 사람들이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는다고 가르치고있다.

      

    이것은 단순히 세속적인 의미로 해석할 것은 못된다. 오히려 신앙적인 측면에서 하느님을 믿고 충실히 따른 사람들의 삶을 하느님은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충실한 신앙의 표본이며 신앙인의 모범이 된다.

          

    성모 승천은 우리의 희망

    성모 승천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 신앙인에게 큰 희망을 주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신 성모님이 하느님께로부터 천상으로 불림을 받아 승천하셨다는 것은 인간구원의 표징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성모님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라는 희망을 안겨주셨다. 우리들에게 성모님은 신앙의 길을 가르쳐 주셨고, 친히 그 길을 충실히 가셨다. 또한 그 믿음의 열매를 우리에게 희망의 보증으로 남겨주신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온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 응답은 보이지 않는 것, 즉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크나큰 도전의 삶이었다. 그러한 도전과 응답은 바로 성모님 자신을 남김없이 하느님께 봉헌하였기에 참된 승리로 이루어졌다.

    우리도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성모 마리아가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신 것처럼 살도록 노력해야하겠다.

    성모 마리아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자신의 삶, 특히 고통과 수난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삶 속으로 자신을 봉헌하고 투신했다.


    처녀로서의 임신과 출산에서부터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한 어머니로서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런 삶을 사셨던 성모님은 자신의 믿음을 통해 모든 것을 극복하셨다.

      

    어쩌면 하느님께 오로지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성모님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아들은 어머니를 닳고 모방하는 것처럼 우리도 교회의 아들로서 교회의 어머니를 닮고 따르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20     성모승천 대축일  루가 1,39-56      성모 마리아, 나의 어머니!


    사랑의 어머니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인기도 측정에는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정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그 기준은 아마도 눈물일 것이다. 눈물을 많이 흘리게 했으면 그 프로그램은 성공한 것이다. 한때 ‘여로’라는 작품이 국민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어서,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 시간만 되면 길거리가 숨죽인 듯이 조용했다. 눈물을 흘리게 한 프로그램 중에 ‘이산가족찾기’도 압권이었다. 나는 눈물이 메마른 사람인데 그때는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장병들과 함께 했던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은 한국인의 어머니 사랑에 대한 의미를 깊이 조명한 좋은 프로였다. 어머니와 아들과의 뜻밖의 만남을 보던 장병들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이들이 함께 울었다. 어머니가 고맙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불러보고 또 불러봐도 따뜻한 이름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저승으로 어머니를 보낸 이들은 ‘어머니’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살아 생전에 못다한 효도가 못내 아쉽고, 이젠 하고 싶어도 계시지 않는 어머니기에 어머니라는 노래만 나와도 그냥 눈물이 배어나는 것이다.

      

    시골 장터엘 가보면, 길 외에 나물을 조금 쌓아놓고 팔거나, 총각무를 몇 단 놓고 파는 여인들이 있다. 다 팔아봐야 6000~7000원 정도하는 값어치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부르튼 손으로 물건을 파는 그 여인들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팔고 있나! 햇볕에 그을린 얼굴, 주름진 그 얼굴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읽는다. 그들은 자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혹은 학용품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렇게 뙤약볕 아래에서 팔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기에 흙과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어린 자식이 아파서 헛소리를 하면, 어머니는 밤을 지새우면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고 묵주의 기도를 드린다. 밥 먹을 생각도 않고, 잠을 잘 생각도 없이 애타는 마음으로 자식만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비정한 어머니

    사랑의 어머니라는 인상과 달리,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도 많은 비정한 어머니들이 생겨나고 있다. 낙태,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한국인은 예부터 서양인들과 달리 수태하는 순간부터 인간으로 생각하여, 나이를 한살로 따졌다. 서양인들은 세상에 태어나야 나이를 먹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맞는 이치다. 인간은 수태의 순간부터 인간으로 존경받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교회는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부 어머니들과 전세계의 많은 어머니들은 자식을 살해하는 낙태를 죄의식 없이 자행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혼율의 급증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IMF 이후 많은 가정이 파탄했다고 한다. 가정의 파탄은 자식을 버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어떤 어머니는 자식을 유흥가에 팔아먹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되었다.


    聖母 마리아

    성모님은 하느님께 특별히 뽑힌 여자였다. 그녀는 원죄없이 잉태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아들을 낳으실 어머니였기에 하느님께서 그렇게 뽑으셨다.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어머니시다, 우리도 교회의 일원이기에 그분은 우리의 모친이 되신다. 또 사도 요한에게 “이분이 그대의 어머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곧 우리의 어머니도 되신다는 말씀이다.

    성모님은 사랑의 어머니시다. 그분은 원죄가 없으시기에 죽어서 썩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으셨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고 썩는 것은 원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모님은 무덤에서 썩을 이유가 없으시기에 승천하셨다. 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티없이 깨끗하며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았던 동정녀는, 지상 생활을 마친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에로 부르심받아 주님께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받았다. 이로써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하느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었다”(교회헌장 제59항, 교황 비오 12세의 성모승천교리 선포Ds 3903참조). 

    성모마리아는 과거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2000년 전에만 계셨던 것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날수 있는 분이시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느낌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신다. 교회의 역사 안에는 성모님의 발현을 생생하게 전하는 산 증언들이 많이 있다.

    루르드 파티마, 과달루페 등등의 지역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며 당신은 지금도 우리와 말씀하실수 있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몸소 드러내셨다.

      

    오늘도 우리가 힘들고 지쳤을 때, 그분은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신다. 고난 속에서, 절망 속에서 성모님께 다가가면 그분은 손을 내밀어 잡아주신다. 그분은 비정한 어머니가 아니시다. 그분은 지극한 사랑의 어머니시다. 우리가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나면, 그분은 우리의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우리를 데려 가실 것이다.

  3. user#0 님의 말:

     

    8월 15일 : 성모 승천 대축일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제 1독서 : 묵시 11, 19a ; 12,1.3-6a.10ac


    제 2독서 : 1고린 15,20-27a


    복 음 : 루가 1,39-56


    해  설


    팔월의 질식할 듯한 무더위 속에서 거행되고 있는,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에 들어올리심을 받으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은 무한한 기쁨 외에도 마치 신선한 청량제와도 같은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우리는 마치 우리도 하늘에 불러올림을 받아 보다 더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매일매일의 타성에 젖어 나태해진 일상적 체험들보다 훨씬 더 깊고 드높은 차원의 것들을 묵상하도록 초대받고 있는 듯 느낀다.

    그래서 오늘 전례의 문을 열어주고 있는 본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모아 바치고 있다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여, 티 없이 깨끗한 동정녀시며 당신 성자의 모친이신 마리아의 육식을 그 영혼과 함께 천상 영광에 불러들이셨으니, 우리도 항상 천상을 그리워하며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이 지상에서 “항상 천상을 그리워하며” 사는 것 그것은 마리아가 자기의 지상 생활을 통해 분명히 실현시켰으며 또한 그녀가 오늘 성자와 함께 누리고 있는 그 영광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에게 제시하고 있는 삶의 이정표다.


    마리아에게서 완전한 ‘구원’이 실현되고 있다.


    마리아에게서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이미 결정적으로 완성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그녀의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완전한 구원과 해방의 활동에 관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즉 그녀의 전존재는 잉태의 첫 순간부터 가브리엘 천사가 그리스도의 잉태를 알리는 순간에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던(루가 1,28참조) 그 ‘은총의 충만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 그 ‘은총의 충만성’, 즉 하느님께로부터 베풀어지는 사랑과 은혜의 충만성은 죄로 말미암아 초래된 우리의 육신을 파괴시키는 ‘죽음’이라는 법의 잔인성 조차도 막을 수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이 그녀에게도 죽음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조차도 죽음을 피하지 않고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녀도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무덤의 부패를 면하였으며 지금 이 순간 매력적이고도 청순한 동정녀의 몸 그대로 영광중에 살고 있다 : 사실 죄에 물들지 않은 그녀의 육신은 죄의 치명적인 결과 중에 하나인 육신의 부패 자체를 입을 필요가 없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구원’은 그녀의 지극히 거룩한 모든 생활 즉 윤리적, 영신적 그리고 또한 육체적 생활까지도 죄에서 해방시켜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영광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때에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될 일의 첫 표징으로서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교회는 지극히 아름다운 오늘 감사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 “오늘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천주의 모친 동정 마리아는 완성될 당신 교회의 첫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네 길에 있는 당신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주셨나이다. 온갖 생명의 근원이신 당신의 아드님이 동정 마리아 몸에서 기묘히 인성을 취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셨기에, 주는 마리아에게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게 섭리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성모승천 축제는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줄 아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볼 때 생명과 ‘은총’의 능력을 기리는 제전이다. 이에 관해 마리아는 잠시 후 자신의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아주 빠른 속도로 살펴보게 될 독서들은 우리 신앙의 신비의 핵심이 되고 있는 주님의 부활과 많은 유사점을 지니고 있어 오늘 축일에 담긴 깊은 의미에 더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실제로 제 2독서는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는 대목을 전해주고 있다. 그 논증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고 있다 : ⑴그리스도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의 재건의 과정에 있어서 ‘첫 결실’과도 같으셨다. 하지만 그 ‘첫 결실’은 다른 모든 결실들도 때가 이르면 모두 익게 되리라는 사실의 보증이 된다. ⑵그리스도는 모든 구원된 자들을 자신 안에 모아들이는 ‘새’ 아담이시다. 그러므로 만약 모든 사람이 그분 안에서 그분과 더불어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면 결코 그분은 죽음의 ‘승리자’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권위와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물리치시고 그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실 때까지 군림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리치실 원수는 죽음입니다“

    (1고린 15,20-26).

    분명히 이 대목에는 마리아에게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 즉 그녀도 모든 사람은 다 그리스도께로부터 각자의 ‘부활’을 얻게 된다고 예견하고 있는 일반적인 규범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녀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그 차이점이다 : 즉 그녀는 결코 원초적 죽음인 ‘죄’의 희생물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죽음이 비록 우연히 그녀를 엄습했다 할지라도 그녀를 자기의 권하를 둘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다 더 강한 자가 포로가 되지 않고 어떤 사슬에도 묶일 수 없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모순일 수가 있겠는가! 죽음은 마리아를 전혀 지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죄가 그녀를 스쳐가기조차도 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마지막 원수’는 이미 원죄에 물들지 않은 잉태의 순간부터 파멸되고 말았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제 1독서도 아우구스티노에 이르기까지 다소 널리 퍼져 있었던 전승과는 반대로 마리아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은 메시아가 태어나야 할 메시아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그 메시아는 용, 즉 사탄-여기서는 지배권을 뜻하는 여러 가지 상징물들로써 묘사되고 있는-에 의해 죽음의 올가미를 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적의 승리를 허락지 않으시고 메시아를 보호하여 영관의 왕좌에 앉히실 것이며(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암시) 또한 메시아 공동체에 신비스러운 ‘광야’-성서에서 박해받는 자들을 위한 보호와 구원의 장소로 전통적으로 이해되고 있는(출애 2,15;1 열왕 19,3-4;1 마카2,29-30참조)-의 피난처를 제공하시어 보호해주실 것이다.

    “하늘에는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별이 열두 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큰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버릴려고 그 여자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릴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갔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묵시 12,1-6)

    그런데 구체적으로 볼 때, 요한이 뜻하고 있는 메시아 공동체-처음부터 고통 중에 메시아를 탄생시켜야 하는-는 더 이상 ‘옛 이스라엘’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의해 이미 야기되고 있는 박해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면한 ‘교회’를 의미한다 : 이러한 내용은 그 당시 우유부단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제시해주고자 했던 묵시록 전체의 본질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여기서 요한이 메시아의 모친 즉 나자렛의 마리아를 직접적으로 연상케 하는 여러 가지 상징적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 이것은 요한이 마리아에게서 교회의 ‘이상적 표상’과 그것의 보다 충만한 실현뿐만 아니라, 악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도록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항구히 보호되고 ‘다시 태어나야’ 할 필요가 있는 메시아 공동체 전체의 ‘모성적’ 기능도 인식함으로써 교회와 마리아를 친밀히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요소들을 첨가시킴으로써 묵시록의 놀라운 ‘계시’는 마리아의 우주적인 모성 즉 파트모스의 예언자 요한이 탈혼 상태에서 보았던 ‘성자 앞에서’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 마리아로부터 특히 지금 이 순간 베풀어지고 있는 ‘모성’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말한다 : “은총의 계획 속의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그 순간부터-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그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주신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에서의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행복된 고향으로 인도해주신다”(교회 62).

    그러므로 용이 지상에 거꾸로 떨어진 후 하늘에 퍼져나가는 그 승리의 노래는 마리아를 향한 노래이기도 하다 :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가 나타났고 하느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묵시 12,10). 하늘에 올림을 받은 마리아야말로 그녀의 아들 성자 그리스도의 그 우주적 싸움과 승리의 ‘권세’의 가장 고귀한 ‘전리품’이라 하겠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지녔던 깊은 내적 감정에까지도 들어갈 수 있고 또한 그녀의 불안에 찬 영혼의 설레임이 우주 전역사의 여정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했는가를 알아들을 수 있는 틈새를 열어주고 있다 : 그녀는 비록 무한히 겸손했지만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이 세상의 역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 전반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실과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믿음과 신적 모성에 대해 찬양하는 내용으로 기술하고 있다 :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2-45).

    엘리사벳의 이 모든 찬양의 말들은 우리에게 마리아 ‘신비’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 마리아는 다른 모든 여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한 여인이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주님의 어머니’가 되도록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가 부여받고 있는 그 ‘위대성’을 침묵 속에 묻어두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쓴다. 지금은 엘리사벳과 요한을 섬기지만 나중에는 인류 역사 전체의 여정과 더불어 모든 사람을 섬긴다. 즉 마리아의 모성은 그녀가 알고 사랑하고 믿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그녀에게 맡기시는 이 세상 모든 자녀들의 원의에 상응하게 확장된다.

    오직 생명과 사랑을 나누어줄 때만이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마리아는 바로 자신 안에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하고 있는 마지막 천사의 의미가 바로 이거시다 :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45절). 사실, 마리아는 천사가 그녀에게 신적 모성에 대한 소식을 알리는 순간에 발한 그 동의의 말들로써 이미 하느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어 하느님의 가장 충실한 도구가 되었다 :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사람이 되신 말씀”(요한 1,14참조)을 우리에게 선물로 준 그녀는 언제나 오로지 ‘말씀’의 ‘종’이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획이 그녀의 영광스러운 승천에 이르기까지 그녀를 통해 충만히 실현되었다.


    “이제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다음에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는 엘리사벳의 찬사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이다. 모든 내용이 하느님께로 다시 바쳐지고 있다 : 오직 그분만이 찬미를 받으셔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당신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기 때문이다”(48절).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곧 마리아가 이 세상의 역사 한 가운데 있음을 진정으로 깨닫고 있었다는 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48절).

    마리아의 “비천한 신세”와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대성’ 사이에 이처럼 명백한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무슨 일을 맡기셨는가를 깨달아야했다. :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하느님께 아무 쓸모없는 도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부분적으로나마 하느님의 계획의 윤곽을 짐작했기 때문에 항상 인간들의 계획을 뒤집어엎으시고 그들이 반복해서 빠져드는 가치 체계들을 내치시는 하느님의 일을 기쁨과 감격에 차서 찬미할 수 있었다 :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51-53절).

    마리아는 그녀의 경험과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길을 따르는 분이 아니심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녀가 하늘의 영광중에 불러올림을 받은 것[승천]은 마치 그녀의 위대성이 우리의 거짓된 위대성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생의 의미를 현세에서만 찾으려는 우리의 모든 아둔한 노력에 대한 도전이라 하겠다!























  4. user#0 님의 말:

     

    성모승천 대축일

    제 1 독서 : 묵시 11, 19ㄱ; 12,1-6ㄱ.10ㄱㄷ

    제 2 독서 : 1고린 15, 20-27ㄱ

    복     음 : 루가 1, 39-56


    제 1 독서 : 11장으로 일곱 개의 나팔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12장부터는 새로운 환시가 시작된다. 12장 1절에서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열두 개의 별이 달린 왕관을 쓰고 있다는 표현은 고대 세계에서 여신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이 여자의 신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나 크게 세 개의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여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낼 수 있고, 하느님이 새로운 백성인 교회를 상징할 수도 있고, 또 구세주의 어머니인 마리아로 볼 수도 있다.

    붉은 용은 신화적인 동물로서, 카오스의 상징이다. 바빌론 신화에도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 같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런 짐승은 하느님의 적대자로서 묘사되어 있다(예를 들면 이사 27, 1; 51, 9의 레비아탄, 라합, 용). 결국 묵시록 12장 9절에서 이 용은 악마와 사탄으로 나타나고 12장 10-12절의 찬미가에서는 천상 법정의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 신자들을 무고하는 자들로 묘사된다. 여기서 형제들(그리스도 신자들)은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다(묵시 12, 17 참조). 신자들이 로마 제국의 법정에서 당하는 단죄가 역설적으로 천상 법정에서 용의 단죄로 표현되었다.


    제 2 독서 : 고린토 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오로는 부활이 확실성을 논증하고 부활과 육신의 상태를 언급한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그리스도 한 사람 덕분에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이라는 것이다.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이런 유머는 속함(우리는 본성상 아담에 속하고, 신앙의 결단으로 그리스도께 속한다)과 인과성(아담 때문에 세상이 죄와 죽음에 감염되었고 그리스도 덕분에 생명을 얻게 되었다)이라는 공식에 근거한다. 이런 논증은 후일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더욱 발전될 것이다.

    교회는 첫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써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가르친다. 교회가 이처럼 첫 사람의 범죄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죄악의 보편성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구원은총의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담 때문에 잃어버린 것을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되찾게 되었다.


    복     음 :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다는 내용의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애덕을 칭찬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지 않는다. 만일 루가 복음사가가 마리아를 애덕의 모델로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56절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사벳이 막 해산하려고 하는 때에 마리아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루가의 의도는 좀더 신학적인 데에 있다. 두 여인이 어머니가 되는 사건을 통해서 자기네들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또 엘리사벳의 아기가 마리아의 아기에 앞서 활동하는 선구자가 된다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직전의 장면에서 마리아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각 탄생 이야기가 고유한 세 사람에게만 관련되도록 구성했다. 즉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세례자 요한,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라는 도식이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곧바로 길을 떠났다(39절). 영적인 의미로 본다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마리아는 교회 신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우리 신앙이 이웃과 함께하는 것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복되신 이로 찬양한다(45절). 마리아가 복되신 이로 찬양받는 것은 그녀가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써 복되심을 인정받았고 하느님의 충실성에 대한 신뢰로써 칭찬을 받았다.

    엘리사벳의 아기가 태중에서 뛰놀았다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온다(41. 44절). 그로써 요한이 주님이신 예수를 인정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엘리사벳 또한 성령을 받아 아기가 뛰노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는 많은 신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를르 드 푸꼬이다. “성모의 엘리사벳 방문기에서의 동정 성모의 생활을 몇몇 동료와 더불어 한다. 즉 조용히 전도 지방의 믿지 않는 주민들 가운데에 성체성사와 복음덕의 실천으로 예수를 모셔감으로써 그들을 성화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우리 민족이 일체 치하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이요 정부수립 기념일이면서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민족적으로는 우리 나라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교회적으로는 성모님껫 지상생활을 마친 다음 죽음을 거치지 않으시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음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즉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원죄의 물듦이 없이 잉태하신 성모님께서 죄의 결과인 죽음을 거치지 않으시고 하늘나라로 들어가셨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성모 승천 교리는 초대 교회로부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믿을 교리로 선포되었습니다. “원죄없으시고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현세 생활을 마친 다음에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에 올라가 영광을 누리신다는 것을 믿을 교리로 밝히고 선포한다.”고 공식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4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라져 나간 동방 교회에서도 믿고 있습니다.

    성모님이 이처럼 큰 영광과 은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예수의 어머니로서 엄청난 역할을 수행하셨기에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모님이야말로 여린 중에 복되시며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고통과 괴로움을 받아들이셨고 온 생애를 심장이 칼로 찔리는 듯한 희생과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신 데에 있는 것입니다.

    강원도 고성 삼포 1리 군포 마을 어명헌 이장은 일을 하다 다리를 못에 찔리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일손이 빤해 제대로 쉬지도 못한 이장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농사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면사무소 직원으로부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군부대에서 작은 산불이 났으니 혹시 일어날 사태에 대비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10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고는 했는데 그날만큼은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뒤척였습니다. 자정을 넘긴 다음날 1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한 이장은 바람이라도 쏘일 양으로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 순간 이장의 눈에 마을 뒷산에 솟구쳐 오르는 불기둥이 들어왔습니다. 화들짝 놀라 바깥으로 나온 이장은 못에 찔린 다리는 생각도 못하고 절룩거리며 오토바이에 올라탔습니다.

    “불이야! 불이야!” 이장은 목이 터져라 외치며 달렸습니다. 300여 미터에 흩어져 있는 집들을 일일이 찾아가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불이 났어요. 어서 피하세요.” 다음 집으로 이동하는 이장의 머리 위로 불똥이 휙휙 날아다녔습니다. 이장은 마을 샛길을 누비며 마을 주민들을 깨웠습니다. “가재 도구는 모두 놔  두세요. 이러다 모두 죽고 말테니 어서 피하세요!” 이장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마을 사람들은 부산하게 움직였습니다. 우선 경운기에 노인들을 태워 대피시키고 부녀자들은 잠이 덜 깬 어린아이들을 들쳐업고 무작정 뛰었습니다. 마을 주민 80여 명이 간신히 앞마을 산등성이에 도착했을 때 시뻘건 불길을 마을을 막 덮치고 있었습니다. 안심하지 못한 이장은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500여 미터 떨어진 삼포 해수욕장으로 뛰었습니다. 바닷가에 도착해서야 이장은 다리 한쪽이 욱신욱신 쑤셔와 이를 꽉 물었습니다. 사흘만에 가까스로 불길이 잡히고 나서야 사람들은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잿더미였습니다. 논바닥 여기저기에는 소가 죽어있었고 집들은 모두 새까맣게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희생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이장의 모습, 이것은 바로 모든 생애를 아들 예수를 위해 바치고 희생하신 성모님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을 그대로 간직한 채 하늘로 올라가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아드님 예수이 영광에 직접 참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으신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1독서인 묵시록에서 우리는 성모 마리아는 진정한 ‘계약의 궤’로 ‘태양을 입은 여인’이며 교회의 모상임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온전한 인간으로서 하늘에 계시는 새 계약의 ‘표지요 도구’ 이십니다. 이 여인은 별이 12개 달린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나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지닌 큰 붉은 용인 사탄과 싸워 승리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마리아와 사탄과의 싸움에서 마리아의 승리, 독 죄와 죽음에 대한 마리아의 승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탄은 여인이 해산하는 아기를 삼키려고 했지만 탄생된 아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어올려졌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의 승리요, 우리의 모상입니다. 이 승리는 가브리엘 천사의 갑작스러운 방문과 예수 아기의 탄생 예고를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인 믿음의 승리요, 하느님의 뜻에 따른 순종의 승리입니다.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라고 인사드립니다. 이 인사에 응답하여 마리아는 마니피캇(마리아의 찬가)을 노래하십니다. 이 노래는 바로 하느님의 뜻을 따른 가장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마리아의 승리와 가난한 자들의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기쁨을 마리아와 더불어 노래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 안에 내려주신 하느님의 크신 섭리와 은총에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미 지난 51년 전에 우리 민족은 마리아의 승리와 더불어 민족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였고 48년 전인 1948년에는 자주적 정부 수립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으로 인하여 그 기쁨은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같은 핏줄을 나누는 한 겨레가 서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는 아픔 속에 살아오고 있습니다. 물론 남북한의 교류가 시도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마음대로 오고갈 수도 없으며 모든 면에서 큰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마리아의 승리를 노래하는 이 기쁜 날에 아직도 갈라져 있는 우리 겨레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상호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민족의 승리와 기쁨을 노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두 손 모아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성모님의 전구에 힘입어 우리는 성모님처럼 하느님이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신뢰와 순종의 자세로써 하느님의 자녀다운 착한 생활에 매진하고 우리 민족의 염원이요 과제인 남북한의 통일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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