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9 주일
20. 조창수 신부(다)/29
21. 함세웅 신부(다)/31 22. 강영구 신부(다)/33
23. 강길웅 신부(다)/36 24. 재물이 있는 곳에(다)/38
25. 재물이 있는 곳에(다)/39 26. 재물이 있는 곳에(다)/40
27. 재물이 있는 곳에(다)/42 28. 깨어있는 삶을 살자(다)/44
29. 죽음을 항상 생각하면서(다)/46
20.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참된 자기가 되어야만
조창수 신부
1. 산은 산이요, 나무는 나무로다!
산은 산이고, 나누는 나무입니다. 산은 산이 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나무는 나무가 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나무가 나무가 된다는 말은, 하느님 안에 있는 나무의 이데아를 닮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로 그 나무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나무의 이데아는 하느님의 본질과 같으므로 나무는 나무가 됨으로써 하느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는 나무와 같아지면 같아질수록 하느님과 같아집니다. 만약 나무가 하느님께서 뜻하시지 않은 어떤 것이 되려고 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나무는 하느님의 모습과 멀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 안의 참된 나의 모습을 닮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뜻하신 바로 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됨으로써, 하느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참된 나와 같아지면 같아질수록, 하느님과 더욱 같아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느님께서 뜻하시지 않는 그 무엇이 되려고 한다면(루가12,47)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하느님의 모습과 멀어지고, 마침내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나무나 짐승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만드신 대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소멸하고야말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자유의지를 주시어, 마침내는 하느님에게로까지 오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는 무엇이나 ‘좋아하는 대로 되게\’ 내맡겨주셨습니다. 그러나 온갖 쾌락과 욕망의 포로가 되어버린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환상적 인격, ’거짓 나\’로 얼룩져 있습니다. 거짓 나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의 빛이 비치지 않고, 자유와 생명이 깃들이지 않는 곳에 있으려는 나입니다.
모든 죄는 거짓 나, 내 중심적 욕망에만 있을 수 있는 나를, 정말로 있는 것으로 억지를 쓰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무질서한 욕망에만 짓눌려 있다면,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할(12,33)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이 자체로 좋다고 할지라도, 내 자연적 욕망의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실재와 반대편으로 이끌고 있으며, 우리의 자연 행위가 비록 좋다고 할지라도 순전히 자연적이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은 내가 아닌 나, 내가 될 수 없는 나, 내가 만든 거짓 나, 하느님께서 아시는 바 없는 가공적 인물인 나를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나와 남에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권력과 명예를 붕대처럼 두르고, 경험과 지식의 태엽을 감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우리들의 주인이 혼인잔치에서 돌아와서(12,36) 우리의 몸뚱이에 감아 붙인 것을 벗겨 버리시면, 우리는 텅 빈 나, 허무한 나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준비하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은(12,47) 나를 ‘모르노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 텅빈 나만이 남을 것입니다.
3. 참된 자기
하느님의 피조물에는 똑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이는 개성 그 자체가 불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피조물의 완성은 각자의 고유한 개성을 이루는 데 있는 것입니다. 한 나무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은, 자기 고유의 방법으로, 땅 속에 뿌리를 박고 가지를 뻗어 다른 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양을 이루는 데 있는 것입니다. 생물, 무생물, 식물과 동물 등을 막론하고, 모든 자연은 그 모양과 개별적 특성들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는 거룩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하느님의 피조물이 주어진 성격을 벗어나지 않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 그 자체가 훌륭한 성덕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너무나 짐승과 달라서, 본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개별적 인간이 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거룩하다는 것은 인간성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단순한 하나의 인간일 뿐, 그냥 자연적 존재라면, 우리는 아직 성인(聖人)이 될 수 없고, 하느님을 닮을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구원은 나 자신, 곧 참된 자기가 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성덕이나 구원의 문제는 나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참된 나를 찾느냐 못 찾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4. 기도로 자기를 발견하라
우리의 전 존재와 평화와 행복이 달려 있는 문제, 곧 구원의 문제는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나를 발견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을 찾기만 하면, 나를 찾는 것이요, 참된 나를 찾기만 하면 곧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단순한 것 같은 이 사실은, 실상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복되도다,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기다리고 있는 그 종들은(12,37)\” “여러분은 준비하고 있으시오. 사실 여러분이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인자는 옵니다(12,40).\”
나를 가르쳐,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는 분은, 곧 오로지 나의 님, 나의 하느님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우리를 발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이 되는 길은 나 자신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의 구원 문제는 곧 나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 참된 나를 찾느냐 못찾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친히 우리에게 오셔서 허리를 동여매고는 우리를 식탁에 자리잡게 하고 다가와서 시중을 들어주실 것입니다(12,37).
5.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구원하시고 해방하시는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의 맏아들을 멸하시고, 기적으로써 히브리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구해주심으로써, 그들의 선조들과 하신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약속의 실현을 기대하는 미래에 개방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약속 받은 참된 고향, 즉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만드신 도시, 곧 기초를 갖춘 도시(히브 11,10)를 멀리 바라보며 기뻐하는 아브라함과 선조들의 행동은, 간절한 기대와 바람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으며, 믿음으로부터 계속적인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선조들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믿음과 희망과 기다림은 서로 합치되어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랑이 내 존재이유라 함과 같은 것이니,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참된 나\’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참 성격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1요한 4,16).\”
21.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뜻대로 하지 않는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함세웅 신부
오늘을 사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급변하는 사회 현상 속의 교회는 육적(肉的) 인간으로서의 우리 모습이 하느님과의 만남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의 모습은 하느님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원한다기보다는 단절로 치닫는 느낌이 있습니다.
더욱더 우리가 우려해야 할 문제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단절로 인정 하기보다는 합일로 주장함이며,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을 사람에게 편리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사실에서입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변화될 수 없으나, 지혜로운 듯하면서도 우매한 인간들은 자신을 사탄과의 야합에 내팽개쳐 버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떠들어댑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말해온 이들은, 한국인의 사고의 불투명성이 언어로부터 왔다고 말하는가 하면, 복종과 굴종 내지는 무조건 참으면 된다는 인(忍)의 사상 지배에 의해 군주의 지배 형태를 벗어나면 불안해하는 민족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어쩌면 민주니 자유, 정의, 평화란 단어는 우리 민족에겐 생소한 단어임이 사실이라고 볼 때, 에 혹자는 한국의 역사는 쟁취한 역사라기보다는 주어진 역사라고까지 혹평하면서 8․ 15해방의 의미를 간파한바 있습니다. 더구나 언어조차도 너무도 짧은 민정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다스리는 자로서의 말들이 범람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봉사자며 국민의 충실한 공복으로서의 언어의 의미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속에 민족사상의 굴종의식이 싹텃는지는 모르나, 이는 육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점철하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연연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만은, “우리는 자유의 고귀함을 느낄 때까지 당해야 한다\”. 그리고 또 “민주주의는 정치에 그리스도교 정신을 각인(刻印)한 것이며, 정치는 국민을 정신적 타락으로부터 막는 도덕성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나치스에 저항했습니다. 또한 전 세계에 만연된 폭력은 중간 계층, 즉 그 시대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책임을 진 종교인, 문학인, 또는 그밖에 지식인들이 태만했기 때문이며, 폭력이 행사됨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뼈저리게 당해 봐야만 무엇이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로써, 고통을 통한 기쁨의 삶인 예수를 표현합니다. 즉 저항의 단절과 미온적 저항은, 공동체 의식을 저하시키고 공동체 자체를 침묵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교회 자체가 도전받는 시대로 부상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며, 영신적 아버지들의 고통은 교회 자체가 당하는 고난이므로, 초기 교회가 공동으로 모여 기도하고, 하느님 대전에 박해를 감수하며, 공동체 전체가 목숨을 내맡긴 순교자들의 참모습을 본받도록 해야겠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무심한 시간과 발걸음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썩은 죽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의 허무한 발걸음은 많은 억울한 인간들의 고난을 딛고 선 무서운 발걸음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다양성 속에 일치를 말하면서 각자 나름의 길을 주장하지만, 반드시 각자 자신의 포기가 선행되어야 함에도, 쉽게 자기 포기를 안하는 인간 심성은 다양성의 그늘 뒤에 숨,은 자기 합리화란 그늘에 있음을 절실히 느껴야만 할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길에 배치되며 이를 외치는 이들은 위장된 이론으로, 하느님을 자신에게 편리한 하느님으로 꾸며 놓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각자이나 ,성체는 하나이듯이, 하나로 모인 공동체 속의 우리의 다양성은 교회를 이룹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교회 또는 사회에서 지식인일지 모르나, 알아도 모른척하는 관제, 대중집단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분께 용서를 청하고 새 사람이 됩시다.
“주인의 뜻을 모른 종은 매맞을 짓을 했어도 덜 맞을 것이나,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면 많은 매를 면치 못하리라\”
22.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관리인의 주제 파악
강영구 신부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도둑의 비유” “관리인의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 가지 비유 말씀을 통해서 신앙인인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한마디로 예수의 가르치심을 종합하면, 믿음과 희망과 충실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세상의 재화(財貨)는 누구의 것입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의 관리인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이 세상의 참 주인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 세상을 인간을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는 인간이 제일 마지막에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제일 마지막에 창조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인간을 위해서 있고, 모든 사물의 맨 꼭대기에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창조 사업을 모두 마치시고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후려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낱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 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들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 인간들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해서,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주인이 아니라 오직 관리인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인간이 이용할 수는 있지만, 자기의 것으로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용하더라도 하느님의 뜻하시는 바대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이 인간답게 되도록 이용하여야 하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이용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이 이야기하고 있는 인간의 범죄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주인이 아니므로 그 무엇이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게 사용할 때, 죄를 짓게 되고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아시지요. 우리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부모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발가벗은 알몸뚱이로 태어났습니다.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태어났습니다. 하기는 우리의 생명과 몸뚱이마저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거저 주신 것이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생겨 먹은 나를 낳겠다.”고 설계하신 적도 없고 나와 같은 인간을 낳겠다고 계획하신 일도 없습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공짜로 생명을 받아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인들은 섭리(攝理)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공짜로 그리고 빈손으로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 우리가 왔던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왔듯이, 떠날 때도 빈손으로 떠납니다. 우리는 그 무엇도 지니고 떠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뚱이마저도 저 차가운 땅바닥에 버리고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도 우리의 것이라 주장할 수 없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예수께서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 우리의 삶의 자세를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양 혼자 독차지하려 해서도 안 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도 잘못된 것입니다.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나누어 누려야만 합니다.
유다인들의 삶의 지혜가 담긴 책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왕으로부터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름을 받게 된 사람은 대단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왕이 나를 부른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평소에 자신이 가장 절친하게 사귀고 있던 친구들에게 같이 동행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친구는 한마디로 같이 갈 수 없노라고 거절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왕궁의 입구까지만 같이 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한 이 사람은 세 번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왕궁 안까지만 같이 가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왕 앞으로는 같이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가 평소에 가까이하지 않았던 네 번째 친구에게 같이 가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네 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 가야지. 가고말고.”
첫 번째 친구는 그가 평소에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재물이라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평소에 사랑하던 재물이라는 친구는 그가 죽는 순간에 그를 떠나고 만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과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무덤에까지는 같이 가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자기 몸뚱이였습니다. 평소에 그토록 애지중지 아끼고 사랑하던 몸뚱이였건만, 무덤 속까지는 같이 가 주었지만, 정작 왕 앞에까지는 같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친구는 그가 평소에 가장 멀리했던 자선과 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멀리했던 그 친구는 왕 앞에까지 같이 가서 그를 변호해 주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야 할 운명의 우리 인생들이 정말 가장 가깝게 사귀어야 할 친구가 누구인지를 잘 말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자선과 선행이야말로 끝까지 우리와 동행할 가장 확실한 친구이고 우리를 변호해 줄 친구입니다.
이 세상의 관리인으로 보냄 받은 우리가 이 세상의 재물과 재화를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자선과 선행을 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줄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맡겨 주신 이 세상의 재물과 재화를 자기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기적인 방법으로 사용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나누고 베풀어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사용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 나라에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든든한 창고를 만들고 많은 재물을 쌓아 둔다면 그 무엇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관리인으로서 우리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 하늘 창고에는 많은 재물이 쌓여 있고, 그리고 평소 자선과 베풂을 통해서 많은 친구를 사귀어 놓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에 나오는 악한 관리인처럼,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제가 맡은 남녀 종을 때려 가며 먹고 마시고 술에 취하여 세월을 보낸다면,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 관리인을 동강내고, 불충한 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처넣게 될 것입니다.”
주인으로부터 벌을 받게 되는 악한 관리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관리인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인이나 되는 양 행세하는 사람이지요, 한마디로 주제 파악이 되지 않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이기적인 향락과 안일을 추구하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종들을 때려 가면서 먹고 마시고 술 취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주인 앞으로 불려 갈지 모르면서 향락과 나태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금이 어느 때인지도 모르고, 자신에게 맡겨진 것들이 마치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인 양 착각하고 향락과 안일에 빠진 관리인이 당할 운명이란 너무나 뻔하고 분명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께서는 오늘 가르침을 이렇게 결론 지으셨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누린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나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나누고 베풀 때 진정한 축복이 될 것입니다.
빈손으로 이 세상에 온 우리는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모든 것을 우리의 손에 맡기신 하느님의 충직한 관리인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비웁시다.
23.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믿음은 기다림의 준비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지혜 18,6~9 (주님께서는 우리 원수들을 징벌하신 그 방법으 로 우리들을 불러 영광)
제2독서 히브 11,1~2.8~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
복 음 루가 12,32~48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1독서에 봉독된 지혜서의 저자는 에집트에서 살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지금은 고국이 그리스의 속국이 되어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내용은 언제고 이루어진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처럼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믿었으며 지금 당장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백 년 후, 아니면 천 년 후에라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성취되리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그런 애절함 때문에 숭고한 것입니다.
2독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그와 같은 믿음입니다. 사람은 진정 무엇을 바라보고 또 희망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가치 가 달라지게 됩니다. 진정한 소망인 그리스도께 우리의 미래를 걸고 있을 때 우리는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용기를 갖게 됩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하신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갖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약속이 성취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언제나 충실하게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오늘 성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준비는, 허리에 띠를 띠고 손에 등불을 들고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며, 그 주인이 가져오실 위대한 선물 때문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즉 보다 높은 재화를 얻기 위해서 보다 낮은 재화를 나누고 베푸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기다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결혼이나 회갑처럼 미리 날짜와 시간을 받아 놓고 기다리는 것이며 둘째는 어떤 돌발적 인 사고나 죽음처럼 시간과 날짜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다림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첫째의 경우는 정도 이상으로 준비하지만 두번째의 기다림에는 또 대단히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여름밤에 시골길을 운전하다 보면 개구리들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경우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것들이 길가에 가만히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지나가는 불빛 때문인지 달리는 차를 향해 펄쩍 뛰어듭니다. 그래서는 깔려 죽습니다. 이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갑자기 달려드는 일이기에 미처 피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도 어쩌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괜한 욕심을 내다가 자기 명을 헛되게 단축시키는 경우도 있으며 자기 판단이 옳다고 자신하다가 그만 화를 자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숱한 교통사고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말 그런 식으로 마지막 시간을 만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선하게 살면서 사랑을 베풀었던 사람은 언제 무슨 일을 당해도 떳떳합니다. 당당하며 자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를 살아도 천 년을 사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또 그 날을 미리 알았다 해도 선하게 살지 못했던 사람은 불행합니다. 자기만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며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언제고 잃게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필요한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억울하게 박해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어려운 본당, 정말 가난한 공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재물이라면 그리스도의 재물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운 자들과 어려운 본당은 다 우리의 소중한 재물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천 원씩만 더 헌금할 수 있다면 매년 수백억 원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시골 본당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내일 돕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입니다. 살아가며 그때그때 돕는 것입니다. 항상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들고 불우 이웃을 찾는다면 그는 정말 멋지게 기다리는 길을 아름답게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성실한 기다림의 자세를 갖도록 합시다.
24.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재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다.
최근에 들어온 하늘나라 소식통에 의하면 악마들의 대화에서 전교생이 이수해야 할 교양과목은 “유혹·‘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유혹 교과서의 첫장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인간을 유혹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말을 사용한다.
첫째, ‘누구나 다 하는 일이잖아.“
둘째, ‘대수롭지 않은 건데 뭘~’
셋째, ‘이번 한번만이야!’
그리고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미움’이었습니다. ‘미움’이란 단원에는 다음과 같은 격언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네 낚시에 미움의 미끼를 끼어라, 그러면 네 광주리는 차고 넘치리라!’
끝으로 소식통은 이 무덥고 찌는 듯한 더위에도 악마들은 인간들 마음 속에서 쉴 사이없이 활동하고 있고, 특히 미움이라는 미끼를 드리운 악마들이 가장 성적이 좋다는 사실을 알려왔습니다.
그러한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미움이라는 유혹에 빠져 주인에게 쫓겨난 비참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난 그 사람은 정작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중에 더러는 깨어있지 못해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종처럼 특히 시험 때에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 불충한 종은 ‘주인이 내일 오겠거니’하고 제 때에 해야할 일을 미룬 것에 불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요지는 한마디로 ‘우리에게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우리의 마음은 내일에 가 있습니다. 마음을 잡고 일을 하는 것도 내일부터, 사이가 멀어진 이웃들과 화해하는 것도 내일부터,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도 내일부터 등등. 이렇게 마음이 내일에 가 있는 한 우리는 오늘을 껍데기로 하는데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삶은 바로 오늘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오늘이 우리 삶의 시작이요, 끝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오늘 깨어있는 마음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즉 지금 여기서 서로 사랑하며 성실하게 살기 위해 깨어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할 때 우리는 오늘 예수님 말씀처럼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행복한 종처럼 될 것입니다. 아멘.
25.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재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다.
학생 여러분,
오늘은 마련과 미련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마 이 두 말은 확실히는 모르겠고 틀림없이 아니겠지만 제 생각으로는 같은 어원에서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마련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미련한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뻔히 어떤 일이 닥칠 줄 알면서 우리는 바로 그 미련 때문에 마련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커다란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설마하는 마음으로 있다가, 주인이 마련한 자리에서 쫓겨나는 불상사를 당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알면서 깨어있지 못합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이고 나름대로의 여러가지 핑계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개학이 언젠지 몰라서 방학숙제 못한 사람이 있으면 손 좀 들어 보세요, 없지요? 누구나 개학이 곧 있을 것이라는 것과 그 날과 시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핑계, 내 미련함으로 나중에 밤을 세우고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숙제 좀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 날과 시간을 모르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준비는 어떻겠습니까? 설마 내일은 아니겠지, 글쎄 모래도 아닐꺼야 하는 나 중심의 생각이 요즈음의 세태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생 여러분, 우리는 결코 미련하고 불충한 종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항상 깨어 준비하는 마련된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방학생활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일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그 과목을 조금 소홀히 한다면 요행수를 빼고는 좋은 성적을 바랄 수 없을 것이며,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데이트는 상대방의 자비심 없이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거기에 필요한 준비와 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라 낙인찍혀질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과 마련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일에 그에 맞는 마련을 해서 미련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하겠는데 아직 방학 숙제 안한 학생들은 오늘부터라도 빨리 숙제를 마련하여 미련한 학생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아멘.
26.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재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위기에 직면하면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의탁하는 존재를 신뢰하고 있으면 고뇌를 하면서도 무기력해지지 않고 남들이 보기에 벅차다 싶을 시련도 거튼히 견디어 냅니다. 그러므로 험한 인생 행로과정 중에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유한한 인간을 신뢰해 보았자 영원한 세계를 지향하는 우리에게 속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성현 역시 우리에게 인생의 결론점을 제시해 줄 수 없으므로 우리의 신뢰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이 똑같이 영겁의 세계로 갈 인간을 완전히 신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무모한 도박과 같은 것입니다.
오직 우리 인생을 마련해 주시고 섭리하시는 절대자만이 인생의 근본 문제를 풀어 주실 우리의 참 신뢰 대상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생명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를 드려야만 그분께 우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호소할 수도 있고, 청원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의 지시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귀를 갖게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신뢰는 오로지 하느님의 지혜만을 신뢰하고 우리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던 방식을 완전히 포기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모범을 구약의 아브라함 성조로부터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늘그막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지시에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었던 사람까지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다시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그 어떠한 명령도 따르겠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 역사를 살펴보면, 하느님께 대한 신뢰 여부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좌우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범을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성서는 부유함에 의지하거나 권력 또는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자기의 판단력을 믿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우리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으므로 우리의 신뢰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이외에 모든 것을 신뢰의 대상에서 거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에게 인생 행로를 헤쳐나갈 수 있는 힘과 지혜, 그리고 자부적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잣대만을 가지고 자신이 의로움에 신뢰를 두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하느님께 대한 겸손한 신뢰심입니다.
예수님은 신뢰에 찬 사랑의 행위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어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 끌어들이시는 분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마음에 신뢰를 심어 주셨을 뿐 아니라 확신의 기초를 닦아 놓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사랑의 충실한 증인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뢰를 성실로 증명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여 그분의 성실한 증인이 되면 예수님의 피로 열려진 길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풍부한 나라로 갈 수 있다는 기쁨에 가득 찬 확신이 서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삼으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심판하시는 날에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사랑은 온갖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입니다.
27.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재물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독수리 알을 발견하여 자기 집 뒤뜰 닭장 안에 갖다 놓았더니 독수리 새끼가 다른 한배 병아리와 함께 알을 까고 함께 자랐습니다. 이 독수리는 자신을 닭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땅바닥을 긁어 벌레를 잡아먹고, 꼬꼬댁 소리를 내며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세월이 가고 독수리는 매우 늙었습니다. 어느날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니, 멀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큼직한 새가 떠돌고 있었습니다. 늙은 독수리는 저 날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닭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옆에 있던 닭이 “저 분은 새들의 왕이신 독수리님이야” 라고 말하면서 자신과 다르니 딴 생각일랑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늙은 독수리는 아예 딴 생각일랑 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는 닭이라고만 여기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선 낙태, 인간복제, 사형제도, 노동자 인권문제에 관련된 인간생명의 존엄성 혹은 인간 가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느님의 모상을 띠었기에 그래서 더욱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채 깨닫기 전에 희생되거나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사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오늘은, 멀리서 온 우리 이웃, 단지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나라 보다 못산다는 선입견 때문에 불이익을 받으며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종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것만을 챙기던 불의한 종과는 달리,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차별하여 다루지 않으시고 모든 이들을 포용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그것은 단지 일회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꽃이 지면서 작은 열매가 맺히고 그것이 자라나 탐스러운 과일이 되듯이 궁극적으로 당신 정의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럴 때일수록 더욱 깨어있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하느님께서는 소외된 이들의 애환과 고통 그리고 억울함에 대한 부르짖음에서, 세상의 만물이 모두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그 어느 것도 함부로 유린당할 수 없기에 모든 것을 바로 자리매김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하나 이름 부르시며 창조하셨고, 예수님 역시 당신의 전생애 동안 세상의 버려진 이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존재임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저는 작년 교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명동 외국인 노동상담소에서 봉사 활동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한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방문했던 노동부 의정부지청, 의정부 역에서부터 지청까지 택시가 아니면 걸어갈 수밖에 없는 비포장도로는 그 낯선 손님들을 원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출두 요청서를 들고 지청에 들어섰을 때, 거대한 사무실에 여러 명의 근로감독관의 책상들이 쭉 늘어섰고, 이곳저곳에서 큰 언성이 오고가고, 우리가 찿고자 하는 근로감독관에게 향하고 있을 때, 우리를 흘겨보는 여러 사람들의 눈길에서 낯선 이방인들에 대한 냉대한 표정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연수생이며 불법 체류자이기에 합법적 착취가 묵인되는 것도 모자라 권리조차 제대로 호소할 수 없는 그들의 모습에서 왠지 떱뜰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순히 남보다 더욱 열심히 일해서 고국에 돌아가 잘 살아보겠다고 머나먼 타국을 택한 그들에겐 옛적에 미국이나 기타 독일에서 겪었던 그런 아픔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고통이 가해졌다고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래도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국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돈만 받을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속에서 슬픈 감정이 복받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비록 자그마한 힘이지만 종교와 문화가 다른 그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교회가 그들에게 위안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우리 이웃이 나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보여지는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써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들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작은 실천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기억합니다. 제가 당신을 알기 원하듯 당신은 저의 모든 것을 알길 원하심을 깨닫기에 보잘것없는 저의 모든 것을 조심스레 내어놓습니다. 저의 마음에 참 사랑의 지혜를 부어 주시어 당신께로 향하는 기쁨에 넘친 희망의 서광을 주위에 뿌릴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아멘
28.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깨어있는 삶을 살자
묵상 : 신앙이 없는 사람은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자신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안다. 그분의 뜻대로 살기 위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참된 깨어있음은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것이다,
졸면 죽는다
군대 생활을 해본 사람은 보초를 설 때 ‘졸면 죽는다\’는 이 표어를 한번 쫌은 들었을 것이다. 후방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실감나질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전방에서 철책선 근무를 하는 사람이나, 전후방의 구별이 없는 월남전이나 게릴라전에서는 너무나 실감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적(敵)을 먼저 발견하고 숨거나 선제공격을 해야 살 수 있다. 누가 먼저 적을 발견하느냐가 생사를 결정짓는 유일한 조건일 때가 많다. 매복할 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째 조건은 항상 깨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이 있는지 없는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깨어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깨어있음이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유비무환이 아니겠는가?
내 인생은 참으로 나의 것인가
누구나 어릴 때에는 부모형제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의식주를 책임져주고, 갖가지 배려를 하며 지켜주기도 하지만, 성장할수록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배우자를 찾고, 일자리를 구하는 등 자기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각자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넓은 안목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 남자로 혹은 여자로 어떤 소질과 어떤 외모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한 바가 업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내가 언제 죽게 될지,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철저한 불확실성에 싸여있는 것이 인생이다. 한마디로 우리 인생은 태어남과 죽음, 그리고 나 자신의 모든 조건에 대해서 전혀 나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나의 삶은 참으로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의 자세다. 그러나 신앙인은 내 인생은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을 사는 근본 차이가 있다,
진정한 깨어있음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이다.
오늘 복음은 세 가지 비유를 전하고 있다.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 하인을 맡아 다스리며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관리인의 비유가 그것이다. 모두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자세를 일깨우는 비유들이다. 그리고 여기엔 나의 삶이 내 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께 언젠가는 셈을 바칠 수 있도록, 그분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관리인에게 중요한 것은 일을 맡기신 분께 대한 충성과 성실이다.
누구나 유비무환의 자세로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게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는데 별로 이견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깨어있는 삶인가? 많은 이들은 눈을 부릅뜨고 정신 없이 동분서주하는 삶이 알차고 깨어있는 삶 인양 생각한다. 물론 게으르고 소극적인 삶보다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사는 삶이 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목적지를 잘못 알고 엉뚱한 곳으로 달리거나, 함께 뛰는 사람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서 달린다면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기살기로 하다보면 뭐가 되어도 되겠지!\’하는 자세는 진정한 깨어있음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참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가끔 멈추어 서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장 완전한 거울이신 주님 앞에 우리를 비춰 보아야 하고, 진리이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보지 않는 ‘깨어있음\’은 진절한 유비무한은 아닐 것이다.
29. 연중 제19주일 루가 12,32-48 (다) 죽음을 항상 생각하면서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계획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람은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실현시킬 수 있다는 희망 속에 삶을 살게 된다. 생각한 계획이 실현될 때에 사람은 성취감을 맛보게 되지만, 설계한 계획이 실현되지 않을 때에 인간은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마음에 품고 있는 계획의 성사가 불투명할 때에 인간은 불안감을 느끼고, 이 불안감은 미래가 불확실하게 나타날 때에도 인간을 괴롭히는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어른들이나 노인들과 대화를 할 때에 참으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즉 나이를 먹을수록 더 먼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지구가 환경문제 때문에 문제성을 안고 있다느니, 또는 앞으로 50년 후에는 지구상의 인구가 많아져 자원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라느니 하면서, 어찌 보면 자신의 삶과는 전혀 관계성이 없는 듯한 현상에 대하여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거부하는 삶
물론 이러한 걱정을 하는 것이 꼭 자기 때문에 한다고 할 수는 없고, 후손들을 위한 좋은 마음에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엄연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역시 존재하는 세상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걱정을 하는 심리적인 상태를 분석해 보면, 인간은 죽음에 대하여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죽음을 거부하는 심성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죽음을 거부하는 심리적 경향은, 바로 자기와는 관계없는 먼 훗날을 걱정하는 것으로, 모습이 바뀌어 나타나는 것이라고 우리는 볼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사람들이 진정으로 준비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해주시고 계신다. 불충한 종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조건과 환경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육신의 법칙에 따른 삶을 고집하고, 그러한 삶을 계속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있다.
이에 비해 충성스러운 종은, 주인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 긴장감을 풀지 않고, 주인이 돌아올 것에 대비하면서 살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대비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삶의 끝인 죽음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해석이 될 수 있겠다. 두 종들이
살아가는 삶의 형태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인간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으로는 알지만, 삶 자체에서는 느끼지 못하고 사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 최종시험인 죽음
우리가 삶 속에서 실제로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죽을 때에 가서 준비를 하면 된다는 얄팍한 계획을 세울 수도 있고, 이러한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삶을 살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해야 될 것은, 시험을 꾸준히 준비한 학생과 시험을 준비하지 않고 요행수만 바라면서 시간을 보낸 학생 중에서 시험을 잘 치를 수 있는 학생은, 확률적으로 시험을 꾸준히 준비한 학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최종 시험인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며, 오히려 시험 준비를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평가하면서 살고 있다. 죽을 때에 자신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관성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번 시작한 것은 계속 유지하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늘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만이, 완성된 끝을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를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