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21 주일
9. 최익철 신부(나)/ 15 10. 김몽은 신부(나)/ 16
11. 공한영 신부(나)/ 18 12. 김영진 신부(나)/ 19
13. 방윤석 신부(나)/ 21 14. 강길웅 신부(나)/ 23
15. 최용준 신부(나)/ 25 16. 김영남 신부(나)/ 26
17. 교구 주보(나)/ 28 18. 임영숙 논설위원(나)/ 29
9.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말씀을 따라서
최익철 신부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물러감을 보시고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겠느냐?” 고 물으셨을 때 열 두 제자를 대표한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생명을 주는 말씀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 실천하기보다는 눈앞의 세속적인 일들에 급급해 있으면서 말씀이 생명이라 함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항상 내리시는데 하느님의 지체인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한번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 우리 한국 사회를 불신사회라고 합니다. 가짜가 판치고 범람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건을 살 때 독일사람은 “이것이 실용적이냐? 아니냐?”를 물어보고, 영국사람은 “이것이 싸냐? 비싸냐?”를, 불란서사람은 “이것이 최신품이냐?”를, 그리고 미국인들은 “이것이 최고품이냐? 어떠냐?”를 알아보고 산다는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것이 진짜냐? 가짜냐?”를 확인한 다음에 산다고 합니다. 위의 말은 각각 그 국민성을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우리의 이 말은 얼마나 창피스럽고 수치스러운 말입니까?
준다고 하고는 안 주고, 간다거나 온다고 하고는 안 가거나 오지 않고, 한다 하고는 아니하고, 아니한다 하고는 엉뚱하게 합니다. 자기가 한 말에 이토록 무책임한 행동을 하여서 되겠습니까? 말대로, 약속대로, 결정대로 실천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거짓이고 사기고 가짜요 위선입니다.
안창호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짓 많은 국민으로 아니 망한 국민이 어디 있으며 거짓 많으면서 부흥한 국민이 어디 있는가? 우리 민족이 거짓에서 벗어나는 날이 바로 쇠망의 비운에서 벗어나는 날이요, 한국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다고 외국인으로부터 신뢰를 받게 되는 날이 우리 민족인 창성하는 날이다.” 이기심에 가득 차서 진실을 외면한 많은 이들의 생활이 자신을 망가뜨리고 사회를 좀먹습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진실한 마음 없이 입으로만<주여! 주여!>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을 떠난 부름에 진노하실지도 모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인간이 천사처럼 행동하려 하면서 실지로는 짐승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가면과 가식이 가득찬 이 위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 성경을 보면 성부께서 말씀하신 일이 두 번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이고 또 한 번은 다볼산에서였습니다. 나중번에 하신 말씀 끝에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부탁이기보다는 명령하신 성부의 유일한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그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고 그럼으로써 살려 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말대로 주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그릇된 자세를 고침 받고 스스로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신은 불신과 위선이 가득 찬 속에서나마 진실을 말하고 행동하는 산 신앙인이 되어 그리스도가 살리신 생명을 나로 인해 죽이는 일이 없도록 생활하십시오. 변명과 비명과 거짓을 말하는 우리 입 되지 않게 하시고 사랑을 파괴하는 내 입이지 않게 하십시오. 오로지 하느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받아 전하고 실천하는 우리 입이게 하여 평화의 전달자 됩시다. 말은 마음에 지닌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니 항상 우리의 마음 안을 주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거룩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떠나겠느냐?” 물으실 때 단호히 당신 생명의 말씀 안에 머물겠노라고 말씀드립시다.
10.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당신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또 누구를 찾아가리까?
김몽은 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는 제자들의 속을 들여다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당신들이 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고 생명을 주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입니다.
그러나 당신들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또 당신을 배반할 자를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내게 올 수 없다고 내가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는 그만 예수를 떠나 더 이상 예수와 동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 보시고 <자, 당신들은 어떻습니까? 당신들도 떠나고 싶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말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주님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으며 또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들 열둘은 내가 뽑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당신들 중 하나는 악마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나해 연중 제 21주일)의 복음에서는 주님의 설교를 그 제자들까지도 잘못 알아듣고 <너무 어려운 가르침이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고 예수를 떠났다는 사실과, 진정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즉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내게 올 수 없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들려준다.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삽니다>(요한 6,48.55-66). 이 말씀의 뜻이 너무 어려워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완고하고 편협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스승이라 부르고 따르던 제자들마저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신앙이 약한 탓이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일로 대치시키려는 어리석음에서 빚어진 비극이다.
그런데 그런 비극은 그 당시만의 것은 아니다. 현재에도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주님의 복음 중에서 적당히 자기에게 이로운 것만을 골라서 믿으려하는 약삭빠른(?)자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이미 그러한 자들의 마음 속까지 알아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립니까?……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고 생명을 주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입니다>.
이 사실은 최후의 만찬 때에 영적인 생명으로서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실 빵과 포도주 안에 당신의 몸과 살을 남겨주시는 성사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영적인 것’이라 함은 무한한 진리를 내포한 주님의 말씀의 오묘함을 뜻하며, ‘생명’이라 함은 이 사실(성세 성사)이 얼마나 우리의 영적 생명을 풍부하게 해주시는가를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주님의 제자들마저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 저항의 태도는 논리적인 의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역시 마찬가지다. 설령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로 어려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치더라도 만일 그들에게 완전히 주님을 믿는 굳은 신앙이 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는 ‘어렵다’고 생각했을지라도 오직 믿음으로써 그것을 극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자’가 누구이며, 당신을 팔아 넘길 ‘악마’가 누구인 줄을 미리 아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주님을 따라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자. 과연 우리의 믿음은 확고한 것인가? 아버지께서 미리 허락하신 신앙안에 살고 있는가? 성서의 가르침에 대해 ‘너무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다’고 수군거리는 마음은 없는지 자신을 살펴보자.
주님의 말씀은 모두 진실하여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는데도 우리는 인간적인 머리로써 그것들을 의심해 보는 습성이 있다. 경계할 일이다.
11.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당신들도 떠나고 싶습니까?
공한영 신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유혹하는 것은 물질만능주의이며 배금사상이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 21주일입니다. 방금 들으신 세계의 독서는 우리의 신앙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을 믿는 것이지만 그에 따르는 고통은 의심과 회의라는 것을 오늘 독서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땅에 들어 같을 때 그들의 신앙에 의심과 회의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이들은 야훼의 신앙을 버리고 이방인의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를 보고 “이방인의 신을 버리고, 야훼만을 섬기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영세한지가 오래되면 자연히 신앙이 식어집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확인해봐야 합니다. 독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을 섬기기로 약속한 것을 회상하면서 그 약속을 지키라”고 우리에게 훈계하였습니다.
사람의 결심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약해지고, 약속은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아셨으므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신앙을 재확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으며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수난의 징조를 보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여러분도 떠나갈 생각입니까?” 하며 제자들의 신앙을 확인하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고, 하느님의 성자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제자들을 대표하여 신앙을 고백함이 오늘 복음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날 예수님의 운명을 의식한 나머지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떠나는 유형의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비극의 최후까지 주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제자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입니다. 첫 번째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은 왜 주님을 버리고 떠났습니까?
거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이유로써 그들은 만사가 잘 되어 가고, 예수님의 생애가 상승하고 있을 때 주님을 따르며 충성을 했으나 주님께 십자가의 그늘이 보이자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둘째 이유는 예수님의 도전과 명령을 회피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게 되고 예수님께 무엇을 드려야 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신앙은 이기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만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오직 그에게 무엇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얻기 위해서만 간다면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기적 신앙으로는 예수님의 본 모습을 볼 수 없고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처럼 물질문명이 발달한 시대는 없었을 것입니다. 물질, 문명의 발달은 인간에게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돈이 최고로, 재물의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금(拜金)사상은 물질만능주의, 황금만능주의를 낳았습니다. 이런 주의는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며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항상 유혹하고 잇습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이들은 이기적 신앙의 소유자들입니다. 참 믿음은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타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참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신자 여러분!
여호수아처럼 “하느님만을 섬기겠다”고 결심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물음에 대답합시다. “당신들도 떠나고 싶습니까?”
“주님,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며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12.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
김영진 신부
휴가철이었던 관계로 강원도 산중인 이곳 정선에도 수많은 피서객이 다녀갔다.
계곡마다 가득한 피서객들의 자동차 행렬과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조용하던 정선의 산과 계곡들이 몸살을 앓는 듯 하늘마저 희뿌옇다. 내게도, 올 것이라고 기대조차 안했던 반가운 손님들이 꽤나 여럿이 지나갔다. 손님을 보내놓고 나면, 늘 좀더 잘해줘서 보낼 걸 하는 후회를 남게 하는 애물단지다.
어느 날은 참으로 멀리서 온 손님들을 내 고물 자동차에 태우고, 굽이쳐 흐르는 산골짝 계곡 이곳저곳을 안내하다가, 강기슭에 놓여있는 외딴집 하나를 가리키며 이런 말을 했다.
집 옆에는 1천여평 됨직한 밭떼기 하나와, 새끼 딸린 소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자매님, 나는 분명히 하느님을 선택했지만, 때로는 저런 외딴집에서 아내와 자식들과 더불어 머루와 다래, 그리고 산딸기를 따먹으며 숨바꼭질도 하고, 석양이 질 때면 저녁 풀을 뜯는 송아지 옆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 말에 한참을 조용히 있던 자매가 빙그레 웃으며 답하기를 “신부님, 꿈 깨십시오\”라고 하지 않는가! 인간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면서 산다고 하였던가. 어쨌든지 나는 지금도 가끔씩은 비탈진 산자락 굽이치는 강기슭에, 또 다른 나의 행복과 사랑이 있지 않을까 하여 간간이 꿈꿔오는 나의 꿈속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나그네로 살고 있다,
분명히 하느님을 선택하였고, 그 길에 충실하고자 온갖 것을 다 바쳐보면서도, 때때로 가지지 않은 또 다른 무엇을 선택하고 싶어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신부님, 꿈 깨십시오\”
1독서에서 여호수아 예언자는, 나와 같은 이중적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아모리인의 신을 선택할 것인가 어서 결정하시오\”라고 재촉하고 있으며,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말과 행동이 부담스러워 떠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나를 떠나, 다른 것을 선택하여 가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어쩌면 우리는 이 질문을 한평생 받으며 살아온 게 아닐까.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 학교나 직장, 결혼이나 종교 등.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왔던가!
그 수많은 선택의 삶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가장 소중하고 완전하며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인간의 커다란 숙제 중 하나이리라,
스탈린 시대 콘펠드라는 젊은 유다인 의사가 있었는데, 스탈린을 욕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마침 감옥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교우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집요하게도 콘펠드에게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하지만 전통 유다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컸다. 콘펠드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일 뜻이 없었다. 그러나 그 교우의 집요한 전교 끝에, 젊은 유다인 의사 콘펠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영세하여 그리스도처럼 사람을 사랑하며 ,일체의 부정과는 타협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수용소의 법을 어기게 되었다. 이유인즉 젊은 사람 하나가 암으로 고생을 하는데 사상적으로 나쁘다 하여, 번번이 수술 명단에서 제외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콘펠드가 수술을 해주었다는 죄였다.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
수술 명단에 없는 환자를 마음대로 수술하여 병을 고쳐준 것이 괘씸죄가 되어, 콘펠드는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처형당하기 전날 밤 콘펠드는 자기가 수술해준 사람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 말씀을 열심히 전파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어떤 사람 하나가 물었다. “당신은 이 젊은이의 암 수술을 해주었다는 죄로 죽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선택에 후회함은 없습니까?\” 이때 그는 유명한 대답을 남겼다, 그 대답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였고, 부정과 거짓으로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이 젊은 유다인 콘펠드에게 암 수술을 받아 생명을 다시 얻고, 신앙의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젊은이는, 바로 훗날 노벨상 수상작가가 된 알렉산더 솔제니친이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선택을 촉구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라고 답한다. 냉장고 광고 상품 중에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하는 글귀를 본적이 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후회하지 않는 선택의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이가 있다면, 순간의 선택이 평생이 아니라 영원을 좌우하는 것이니 만큼, 베드로 사도가 선택한 것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두고 우리가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하는 고백을 해야 될 것이다.
13.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너희도 떠나겠느냐?
방윤석 신부
우리나라 인기 가수그룹 중에 DJ DOC가 있습니다.
이들이 부른 노래 중에 「삐걱삐걱」이란 곡이 있는데, 가사가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아 적어봅니다. 『매일 밤 9시가 되면, 난 뉴스를 봐요. 코미디도 아닌 것이 정말 웃겨요. 정치하는 아저씨들 맨날 싸워요. 한명 두명 싸우다가 결국 개판이 돼요. 내 강아지 이름은 망치예요. 그럴 땐 망치 얼굴 쳐다보기 부끄러워져요. 누가 잘하는 건지 난 모르겠어요. 내 눈에는 모두다 똑같이 보여요. 그렇게 싸우고 또 화해를 해요. 완전히 우리를 가지고 놀아요.
또 지키지도 못할 약속 정말 잘해요. 시간이 지나고 보면 말뿐 이였죠. 이젠 바뀌어야 해.
우리가 바꿔야 해요. 누가 바꿔 줘요 하며 기다리면 안돼요. 힘없는 사람은 맨날 당하고만 살아요. 이렇게 삐걱대며 세상은 돌아가요. 삐걱삐걱 돌아가는 세상은 힘없는 사람들을 돌봐주지 않아.
삐걱삐걱 돌아가는 세상 세상, 있는 놈은 항상 있지. 없는 놈은 항상 없지, 어떻게 바꿔볼 수가 없지. 도저히 우리 힘만으론 안되지. 돈 없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예요. 빽 없이도 살기 힘든 세상이예요. 착하게만 살기도 힘든 세상이예요. 착하게 살긴 아픔이 너무 많아요.
내가 잘못 알았나요.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잘못된게 너무 많아요.
그걸 보고있는 내 가슴은 찢어져요. 우리나라 민주국가 맞나요. 만약 이런 말도 못한다면 아무 말도 못한다면, 그런 나라 민주국가 아녜요.
난 콩 사탕이 싫어요. 몇 십억이 애들 껌값인가요. 그 중에 백만원만 우리 줄 생각 없나요. 돈 없는 우린 이게 뭔가요. 대리만족이라도 하란 건가요. 우리 생각 한번이라도 해봤나요.
해봤다는 게 요모양 요꼴인가요. 아저씨들 등따시고 배부르죠. 아저씨들 우리나라 사람 맞나요‥‥」. 정치가들의 거짓말과 빌「空」자 공약을 비꼬아 한 말입니다.
하도 거짓말을 잘 해서, 국민이 정부의 말을 우습게 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명이 길지 못한 헛소리 대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0 아무개 박사란 분이 음식에 대해 말해 인기를 끌었었습니다. 돼지고기는 먹지 마라, 야채를 많이 먹어라, 그래서 전 국민들이 그 말에 솔깃했었습니다. 돼지고기가 안 팔리고, 칙커리차가 불티나게 팔리고, 고구마 값이 오르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따라 식료품값이 오르고 내릴 정도였었습니다. 부르클리, 퀘일, 순무, 민들레 등 이상한 것들이, 그의 말에 따라 갑자기 나타났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마치 어린이들에게 시금치를 먹이기 위해 뽀빠이 아저씨를 동원한 것과 같습니다.
만화 영화는 재미라기라도 하지. 그러나 그의 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요즈음 ㅎ 아무개란 분이 무슨 건강법이란 걸로 매스컴을 탄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갈까요? 아마도 1년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몇 년전 대전 공설운동장에 할머니들을 모아놓고 어느 약장사가 호랑이뼈를 보여주고, 이 뼈를 갈아서 만든 약이라면서 1백만원씩에 팔았다 합니다. 어느 시어머니는 그걸 사먹고 싶었는데, 며느리가「그거 가짜예요. 호랑이 뼈가 얼마나 귀한 건데 우리에게까지 차례가 오겠어요.」그러니 참으시라고 말렸답니다. 시어머니는 매우 서운해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호랑이 뼈가 아니라 타조뼈 가루였음이 탄로가 났습니다.
시어머니는 「안 사길 잘 했다, 속아서 돈만 날릴뻔 했다」면서 며느리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합니다. 이렇듯 사람의 말은 거짓이 많고,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계통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하루에 5만권 이상의 책이 발간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책들보다 성경이 가장 많이 읽히우고 있으며, 200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속에 오래 머물러 있는 말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그 안에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에 대한 믿음과 선택을 요구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눈썹 하나 까딱 않으시고「갈테면 가라. 너희들 따위가 떠난다고 내가 한 말을 번복할 줄 아느냐? 어림도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특히 「내 살과 내 피」에 관한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므로, 많은 제자들이 떠나가도 번복이나 정정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열두 사도에게「자, 너희들도 떠나가겠느냐?」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주님,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하고 주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자신있게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14.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선택의 결단은 어디에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여호 24,1~2a.15~17.18b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제2독서 에페 5,21~32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복 음 요한 6,60~69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사람은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할 때 선택을 잘못하면 평생 후회하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TV의 어떤 광고에서도 \”한 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대단히 일리있는 말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데에도 종자와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하며 사업을 하는 데에도 역시 업종과 분위기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친구를 사귀고 배우자를 고르는 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한 번의 선택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1독서에서 여호수아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선택과 결단의 길을 제시해 줍니다.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도 이미 죽었고 그리고 자기까지 죽었을 때 과연 이 백성이 하느님을 끝까지 섬길 것인가에 대해서 지도자로서 큰 걱정을 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도 하느님의 속을 수없이 썩여 드렸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정착한 가나안에는 본래 이방인 신을 섬겼던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살면서 유혹을 받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내다볼 때 걱정이 앞섰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래서 백성 모두를 \’세겜\’ 이라는 곳에 모아 놓고 선택의 길을 제시해 줍니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자기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으며 그리고 결판을 내고 싶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이외에 이 세상에서 누굴 찾아가겠습니까. 그래도 말을 돌려서 여호수아가 속을 떠보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와 백성들이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우리가 야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우리는 야훼를 섬기겠습니다.\” 백성들의 약속을 믿고 여호수아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말씀과 같은 내용이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당신을 가리켜 \’빵\’이라고 하면서 그 몸을 먹어야 한다고 하자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면서 질겁을 합니다.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먹어야 하는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넌지시 물으셨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
베드로는 역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에게 인간적인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예수가 누구라는 것은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거기에 베드로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인간이 신앙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먼저 믿어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부모의 사랑이나 부모의 가르침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커 봐야 압니다. 부모님이니까 안심하게 믿고 존경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것입니다. 성체는 진정 그리스도의 몸이요 생명의 빵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이는 그 위대한 신비를 만나지 못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성체를 들고 “이게 살아 계신 예수님입니다.\”하고 외인들에게 말하면 그들이 믿겠습니까. 그리고 그걸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면 세상이 또 알아듣겠습니까. 못 알아듣습니다. 아마 웃으며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신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육적인 것은 실로 아무 쓸모가 없으며 영적인 것만이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천 번 만 번 옳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예수님 앞에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자주 속입니다. 속지말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올바른 판단과 신앙의 고백을 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15.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첫째가는 신경(信經)
최용준 신부
요즘 신자들을 보면 지킬 계명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한 것 같은데, 정작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가 되는 신경에 대해서는 둔감한 것 같다. 살아가는데 문제가 없으면서도 믿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삶의 근본적인 불안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당연 신앙은 살아가는 방식에 답을 주는 지침서로 이해되거니와 삶의 바탕을 받쳐주는 근본이유는 되지 못한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모든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도 또한 어느 부자청년이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해 왔을때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이 어디 숨어있었던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라는 권고도 파격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지켰으되 그래도 끝없는 갈증과 부족함이 남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사람의 빈곳과 부족함은 그런 모든 것을 행함으로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고 가야될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감정조절이 안되고 충동적이며 더군다나 영적인 눈뜸에 둔감했던 베드로의 처지에서 보았을 때 그런 식의 신앙접근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는 투박한 질문을 생각해 볼 때 베드로는 앞의 사람 수준에는 휠씬 못 미친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누구냐는 질문에 용케도 ꡒ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ꡓ 이시라고 대답하는 행운을 얻는 바람에 그의 삶의 밑받침이 든든히 세워졌던 것이다. 하여 신앙고백은 계명의 준수를 앞지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구약에 신앙고백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엄연히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도 신앙고백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느님이 누구시냐는 신경의 내용에 마음을 쓰지 않고, 내가 누구냐는 계명의 실천에 마음을 쓴다. 어쩌면 구원은 자기를 완성시키는 그 극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자기 모습을 하느님의 형상안에 녹여 붓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앞가림에 연연하는, 계율적 신앙은 항상 유다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하느님이시라는 절대적 선함과 투명성에 마음을 열고 눈을 뜨게 될 때, 분명 그에게는 새로운 구원의 빛이 들어오리라.
16.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김영남 신부
어느덧 무더위와 함께 찾아왔던 여름 휴가철도 끝나고, 이제 직장인들은 직장에, 학생들은 학교에 돌아오고 있다.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수선했던 우리의 마음도 제자리를 찾아 와야 할 때다.
오늘 복음 말씀은 주일복음으로 지난 4간 동안 연속으로 봉독 되었던 요한 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앞에 길게 나왔던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담화에 대한 부정적 및 긍정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대목의 목표는 긍정적 반응인 다음의 베드로의 고백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데 있다: 「주님, 주님께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먼저 부정적인 반응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길게 나와 있다. 초창기에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여러 기적과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에 열광하며 구름같이 밀려오던 군중들이, 한 때는 그를 데려다가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까지 하던 그 군중(요한 6,15)이, 시간이 가면서 그분의 말씀과 행동에 실망하고,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에 예수를 적대시하던 사람들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따르던 (넓은 의미의) 그의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못마땅해하며 떠나갔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묻는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 다행히 시몬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고백의 대답」을 한다. 「주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1」라는 질문을 보면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열두 제자를 당신 곁에 붙들어 두려고 하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떻게 보면 섭섭하게도; 예수님은 당신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붙잡아두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분에게 있어서 당신 활동의 성패는 많은 군중으로부터 환호를 받는데 달려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에게 최우선적인 것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질문은 사람들이
일시적인 군중심리에 끌려 당신을 따르거나, 아무런 생각도 없는 인형이나 기계처럼, 당신의 뜻을 따르기를 원치는 않으셨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또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르 8.29)라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분은 각자 당신을 올바로 알아보고 「고백하며」 살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가? 우리도 혹시 예수님 당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빵」「썩어 없어질 빵」 때문에 예수님을 찾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썩어 없어질 빵」만을 찾는 식의 신앙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 「보이는 빵」은 곧 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빵」은「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표징」일 뿐이다.「보이는 빵」을 계기로「생명의 빵」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신」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아무리 교회의 친교생활이 즐겁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열성껏 활동하고 있다고 하더라도,「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교회생활은 모래성이나 다름없다. 작은 파도에도 힘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작은 위기에도 견뎌내지 못한다.
요즈음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거 어느 때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종류의「가치 제공자들」로부터 유혹을 받고있다. 여기 저기서「나를 믿으라」고 화려한 몸짓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나를 따르면 부귀영화를 얻게되고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손짓하고 있다․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손짓에 따라가며 교회를 등지고 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도 흔들리게 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이런 여러 유혹의 손짓을 받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런데 우리를 강력히 유혹하는 것들이 이토록 많더라도, 그리고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처럼, 주위의 사람들이 신앙을 저버리고 하나 둘 떠나가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는, 오늘 화답송 시편의 후렴에서처럼, 평소에「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는」연습을 해야한다. 연습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오랜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연습이 잘되면, 믿음은 매번 의지적으로 노력해야만 유지되는 믿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믿음」이 된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에 대한 체험이 몸에 배여 있기 때문에, 그 삶에서 자연스럽게 주님께 대
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우러나온다. 그리고 이런 연습을 하는데 있어서는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신앙공동체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앙공동체는 바로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는」 공간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각자 진실 된 신앙과 사랑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들이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하겠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오늘 복음의 사도 베드로처럼 「주님, 주님께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라고 힘차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동안의 미온적인 신앙태도를 반성해야겠다.
17.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우리가 누구에게로 떠나겠습니까?
교구 주보
1. 복음이야기
예수께서는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성체성사에 관한 설교를 하셨습니다(6,22-59). 그런데 많은 제자들이 이 설교를 듣고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이 말씀이 모질구나. 누가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예수께서 이를 알아채시고 “이제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돌아서서 떠나가자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그대들도 떠나가고 싶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떠나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익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2. 우리의 이해
예수께서는 서기 27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약 3년 동안 공적으로 활약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활약하시는 동안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추방하시자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특히 예수께서 남자만 5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자 많은 군중들이 몰려왔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의 인기가 절정에 다다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성체성사에 관한 설교를 하시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과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열두 제자와 갈릴래아 출신 부인 몇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도 기가 막혀서 열두 제자에게 “그대들도 떠나가고 싶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오늘날도 무슨 기적이나 행하고 조금 능력이 있다는 사람들 주위에는 예외없이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복음을 익히는 일에는 매우 소홀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떠나가겠습니까? 주님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있고 또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는 성당에 나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가슴에 새겨야 할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보고, 빵을 보고, 제 삼자의 말을 듣고 성당에 나와서는 안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그리워서 예수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기적도 빵도 제 삼자의 말도 결국은 사라지지만 생명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말씀만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부지런히 익히고 지키는 신앙인들이 많아질 때 우리 교회는 건강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18.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나) 수호천사
임영숙 요안나/대한매일 논설위원실장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청합니다. 때로는 성인들과 수호천사들에게도 우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종종 살아있는 수호천사를 보내 우리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고 도와 주십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느님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제 신앙을 다져 줄 수호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우선 생각나는 수호천사는 신문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유철희 바오로 선배입니다. 제가 냉담상태라는 것을 안 그 선배는 어느날 “너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 말씀해서 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연령회 활동을 열심히 하여 비신자들도 감동시킨 그 선배는 해마다 연말이면 100명이 넘는 대자 부부들과 함께 불우이웃을 돕는 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저를 이끈 또 한 수호천사는 입사동기였던 조남진 모니카 입니다.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살면서 주일 아침이면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와 저를 성당으로 데려 갔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교회행사와 모임에 저를 끌어들여 다시 냉담상태로 돌아가지 못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남보다 한 발 뒤에 서서 조용히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그에게 저는 항상 빚지고 사는 마음이 듭니다.
그를 통해 들어간 ‘벽산모임’은 분에 넘치는 성직자를 수호천사로 만나게 해 주어 많은 가르침을 받게 했습니다. 또 마르타처럼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한국교회사의 산 증인 역할을 하는 이윤자 루치아 국장, 수도회를 즐겨 찾으며 자신이 지닌 예술적 재능을 교회에 헌납하고 있는 인간문화재 김희진 율리아나 선생님도 모두 살아있는 수호천사입니다.
80년 언론인 강제해직 조치로 신문사를 떠난 후 개신교 신자가 된 친구 안혜성 역시 제 수호천사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체로 말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지만 이 친구는 스스로 ‘기도의 은사’를 받았다고 얘기할 만큼 기도를 잘 합니다. 성경 구절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그의 열정적인 기도를 듣노라면 절로 마음이 경건해 집니다. 그는 또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사람이어서 소극적인 성향인 제게 ‘그리스도교인의 자세’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후배지만 제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수호천사도 있습니다. 비비안나인 후배는 자신이 살던 시민아파트가 헐리게 돼 작은 거처마저 잃게 됐을 때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말했습니다. 제 주변에서 물질적으로는 가장 적게 가진 사람이지만 하느님 안에서는 가장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저는 매일 밤 가족기도 시간에 고작해야 가족과 친지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 비해 그는 남북 통일 등을 위해 백일 기도를 바칩니다. 그를 떠올리고 때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제 마음은 맑아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얼핏 못 알아 볼 뿐이지요. 그러나 조금만 마음을 비우면 살아 있는 수호천사를 알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