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제 1 독서: 에제 18,25-28
제 2 독서: 필립 2,1-11
복 음: 마태 21,28-32
이 주일의 독서들 상호간에는 직접적인 어떤 연결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제 1 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자신들의 악한 행실의 탓을 조상들의 잘못에다 돌리고 있던 귀양중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닌 실망적 운명론을 무너뜨리기 위해 ‘개인적’책임을 강조하는 에제키엘서의 문맥(“‘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이런 속담이 너희 이스라엘 사람이 사는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된 일이냐?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너희 이스라엘에서 이런 속담을 말지 못하게 하리라. 사람의 목숨은 다 나에게 달렸다…그러므로 죄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 에제 18,2-4)에서 취해지고 있다.
조상들의 잘못에 연루되어 있고 더 나아가 거기에 휘말려 있다는 느낌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윤리적 책임을 손쉽게 회피할 수 있는 구실이 될 수 있었다: 즉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잘못도 불의한 사회의 구조적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감정은 하느님 야훼께 대한 반감까지도 야기시켰다. 즉 그분을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친구로서 그들 모두를 위해 새 세상을 이루어 줄 수 있는 분으로 여기기보다는 ‘보주주의’에 야합하는 자로 생각 하였다.
“너희가 하는 일이 부당하지 내가 하는 일이 부당하냐?”
반면에 하느님 야훼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입을 빌어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뒤엎어놓으신다; 그들은 영신적으로 회개하여 새로워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불평한다:“너희는 이 야훼가 하는 일을 부당하다고 한다마는, 이스라엘 족속아, 들어라. 너희가 하는 일이 부당하지 내가 하는 일이 부당하냐? 옳게 살던 자라도 그 옳은 길을 버리고 악하게 살다가 죽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악하게 산 탓으로 죽는 것이다. 못된 행실을 하다가도 그 못된 행실을 털어버리고 돌아와서 바로 살면 그는 자기 목숨을 건지는 것이다. 두려운 생각으로, 거역하며 저지르던 모든 죄악을 버리고 돌아오기만 하면 죽지 않고 살리라”(에제 18,25-28).
그러므로 귀양살이의 비애와 여전히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국가적 재앙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잘못과 죄를 저지르고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들이다. 만일 그들이 “모든 죄악을 버리고”(28절) 그들의 태도를 바꾸어 주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그들을 영신적으로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다시금 재생시켜주실 것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과거의 상황이나 잘못에 전혀 집착하시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잘못에조차 특별한 조건을 달지 않으신다: 다만 각자가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다. 말하자면 개개인의 운명은 각자가 하느님 앞에서 절대 ‘개인적으로’책임져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러한 운명으로 물고간 것은 퇴폐된 사회관념론이었다 : 하지만 실제로 그 이면에는 오직 마음을 바꾸면 가능 한 ‘회개’의 여정을 힘들여 밟지 않으려는 그들 자신의 비겁한 행위가 도사리고 있었다. 똑같은 사회관념론이 오늘날에도 정작 책임 져야 할 우리 자신들 – 일반사회에서건 교회 안에서건 – 보다는 사회적 구조에다 모든 죄를 덮어씌우려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다”
자신의 책임을 자신의 내적 마음에보다는 사회적 형편에다 둘러 회피하고자 하는 이러한 그릇된 원의 – 어쩌면 인간 심리에 본성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에서 논거를 찾는다면, 예수께서, 자신들의 율법과 종교적 전통 때문이라는 미명하에 당신을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또 아예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거슬러 논쟁을 벌이시는 복음의 내용과도 연결이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대상으로 그들이 짜놓은 각본과 무관하게 행동하셨다. 특히, 성전을 모독한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며 기도하는 장소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권한을 강력히 주장하시는(“나의 집은 뭇백성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7)그분의 성전 정화 활동은 그분께 대한 거센 반발을 야기시켰다(마태 21,12-27 참조). 메시아라면 그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신념을 더 고려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반대로 그분은 모든 것을 혼란에 빠지게 하셨다. 하지만 과연 모든 사람이 행하거나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되거나 옳거나 또는 선한 것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이렇듯 지나치게 적대적이며 폐쇄적인 태도에 대해서 연이은 세 개의 비유(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비유)로써 응답하시며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충실한다는 명목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는 하느님의 계획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방해하고 있는가를 지적하시며 비난하신다.
구약의 모든 종교와 유다이즘이 주축으로 삼았던 것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율법은 바로 그것의 가장 명백하고도 확실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신 지금 단지 그리스도께서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행동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율법을 변경시켜 ‘완성시키셨다’는 이유 때문에 율법에는 ‘예’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는 ‘아니오’라고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만이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성취시킬 수 있었다.
두 아들의 비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고’(요한 16,2 참조) 율법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 여겼을 때 혼란에 빠지게 된 그 극적 상황을 분명히 묘사해주고자 한다.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먼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여라’ 하고 일렀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가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있다’”(마태 21,28-31).
마태오복음에서만 있는 이 비유는 두 가지 질문 즉 처음에 나오는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28절) 하는 질문과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이 둘 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이겠느냐?“(31절) 하는 질문으로써 직접적으로 경각심 내지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비유를 듣는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만일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었는지를 잘 분별하고 있다면, 어째서 자신들은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두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하느님의 초대에 사람들이 응답할 수 있는 두 가지 형태의 태도를 의미한다:‘예’라고 대답하고 실제로는 의무를 회피하는 둘째 아들의 형식적인 존경에 의한 일치 행동과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나중에 행동으로 옮긴 맏아들의 갈등과 깊은 사고에 의한 일치 행동이 그것이다. 이 맏아들의 태도는 비록 무례하긴 했지만 사실상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다.
또 그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종교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는 순전히 추상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식주의적 종교로서 전혀 지적 의지적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요구를 실현시키는 행동적 종교로서 많은 수고를 치러야 한다; 그러므로 이 후자의 경우에는 먼저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나중에 힘겨운 자기 반성과 생각의 변화에 의해 다시 받아들이게 된다(“뉘우치고 일하러 갔다”:29절).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종교를 당신이 가시는 길에서 만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처럼 가장 엄격한 신앙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모든 전례 규정을 엄밀히 지켰던(마태 23,13-32 참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이 그들의 뜻과 일치하는 한 쉽게 그 뜻에 ‘예’라고 응답하며 그 EMt을 받드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이 뜻하는 길과 일치하지 않으면 온갖 수단을 써서 그분을 반대하고 심지어는 바로 예수께 행한 것처럼 물리적인 폭력을 쓰기까지도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개혁적이면서도 쇄신적인 전교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거나 의심했을 때 그 뜻은 더 이상 그들에게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 주변에는 강도들, 세리들, 창녀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 즉 하느님의 뜻에 ‘아니오’라는 대답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선포가 너무나도 힘겹게 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포는 그들에게 ‘해방’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선포는 그들을 소외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에 떳떳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복음은 그들을 새롭게 변화시켜 오늘 비유에서 일부 내용이 반향되고 있듯이, 또 탕자의 비유에서 나타나듯이 그들의 인간적 품위를 완전히 바꾸어주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자만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위협적인 냉엄한 말씀을 하신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머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31절).
어떤 학자는 희랍어 원본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여겨지는 아라메아어 원문에 따라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극단적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세리들과 창녀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나 너희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J. Jeremias, Le parabole di Gesú, Paideia, Brescia 1973, P.154). 가능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비교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모욕이었을텐데, 게다가 그들보다도 뒤처지리라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니겠는가!
예수께서는 이러한 비교에다 한술 더 보태신다. 즉 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듣지 않은 것은 세례자 요한 때 부터였다고 하심으로써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하신다: “사실 요한이 너희를 찾아와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때에 너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굳어버린 마음을 돌려〔회개하여〕하느님의 주도적 능력에 자신을 맡겨드릴 수 있어야 한다. 잘못으로 넘어진 사람들은 ‘회개할’ 여지가 있었지만,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새로운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도 상황이 뒤바뀌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속적 평가 기준에 따라 자신들을 ‘첫째’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빛에 의해서는 ‘꼴찌’가 될 수 있다는 사실(마태 19,30;20,16)이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제 2 독서는 맏아들의 태도와도 또 둘째 아들의 태도와도 거의 대조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모범적 태도 즉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립 2,8)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일치하는 모범적 예를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로는 이 문맥에서 필립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주도되어야 할 ‘마음’과 ‘정’의 일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진정으로 소중한 교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각자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일어나는 내적 분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의 가장 주요한 이유를 그는 다른 사람들을 모른 체하는 이기심과 교만한 마음으로 보았다(필립 1,15-17; 2,14; 4,2 참조).
여기서 그는 서로간의 깊은 애정으로 자신들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모든 정신적 불안의 상태를 극복하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낮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필립 2,1-4).
사도 바울로는 이러한 점을 더 깊이 새겨주기 위해 그리스도 자신의 모범을 예로 든다:“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6-8절). 그렇지만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 분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시어‘높이 올려주셨고’온 세상의‘주님’으로 세워주셨다(9-11절 참조).
여기서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이 ‘그리스도 찬가’를 해석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것은 또 다른 전례 상황에서도(성지주일과 성십자가 현양축일) 제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만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실은 사도 바울로가 이 내용을 여기에 도입하고 있는 의도 이다. 즉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로 하여금“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하도록”(5절), 다시 말해 하느님 앞에서 비록 그분의 계획이 아주 어리석어 보이는 때라도 완전한 ‘순종’의 태도를 취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아니오’의 부정적 태도도 또 게으르고 무기력한‘예’의 태도도 아닌, 의심이나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는 철저한 ‘예’의 태도를 취하셨다:“실바노의 디모테오와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언제나 진실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2 고린 1,19-20).
‘두 아들의 비유’는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되는 무한히 위대한 현실에 의해 극복되었다.

연중 제26주일
제 1 독서 : 에제 18, 25-28
제 2 독서 : 필립 2, 1-11
복 음 : 마태 21, 28-32
제 1 독서 : 바빌론 유배 직전까지도 유다인들은 개인의 운명과 공동체 운명을 동일시했다. 상급이든 심판이든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다 같은 운명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의 책임과 운명에 대해서 별다른 숙고를 하지 않고 하느님의 심판을 초래한 죄악에 대해서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며 조상들의 세대 탓으로 미루는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특히 예레미야와 에제키엘 시대에 무죄한 사람의 고통이 가장 열띤 쟁점으로 등장하면서부터 개인의 책임과 운명에 대해서 심각하게 숙고하기 시작했다. 예레미야는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식의 고정 관념을 비판했다(예레 31, 29-30). 이가 시큼해질 사람은 신 포도를 먹은 바로 그 당사자이고 죽을 사람은 죄를 지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1독서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악한 행실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와서 올바로 살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각자는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제 2 독서 : 그리스도 신자들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우월감을 포기하도록 사도 바오로는 권고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진정으로 낫게 여길 때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간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6-11절의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 겸손되이 당신 자신을 다 비우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듯이 우리 신자들도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비우고 겸손하게 되어야 한다.
복잡한 시장 바닥을 거닐다가 싱글벙글거리며 돌아오는 어떤 사람을 보고 친구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고 한다. “나는 거리가 성인(聖人)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네.”라고 그는 대답했다. 겸손의 경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복 음 : 예수께서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거슬러 하시는 말씀이다.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자기네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가장 기본적인 원칙까지도 깨뜨리고 백성보다 우월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무시하는 백성(예를 들면 세리와 창녀들)이 회개로 나아갔기 때문에 이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음을 명백히 말씀하셨다. 두 아들의 비유는 말보다는 실제 행동으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인용되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회개에 대해 우리는 너무 많이 들어왔기에 회개를 해야 할 때도 회개하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즉 ‘회개 불감증’에 걸려있는 것이 우리들의 실정입니다. 죄인의 호개에 대해 성서는 항상 말하고 있고 피정 때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진정 회개를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손길을 청하며 간절히 울부짖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며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로 향할 때 우리 마음속에 주님의 성령이 폭포수처럼 넘쳐 흐르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주님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모습도 그분의 은총으로 환한 빛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유명한 화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하여 먼저 예수님 얼굴의 모델을 찾기로 하였습니다. 덕행에 빛나는 젊은 청년을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찾은 결과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청년을 발견하고 예수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청했더니 기꺼이 승낙하여 무사히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12제자를 하나씩 그려나가다가 마지막으로 유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화가는 얼굴에 악한 기운이 가득한 모델을 구하러 나섰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윤락가에서 원하던 사람을 발견하여 돈을 주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림을 그리는 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가 언젠가 이곳에 와본 일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화가가 그럴 리가 없다고 잘라 말하자, 그 사람은 자기가 전에 예수님의 얼굴을 위한 모델로 왔었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하느님 안에 머물 때 그 은혜로 잘살 수 있지만, 자신의 힘을 믿거나 교만해져서 하느님을 망각할 때에는 죄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항상 겸손되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감사드리며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순명과 겸손의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는 두 가지 형태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라고 대답하고 실제로는 의무를 회피하는 둘째 아들의 형식적이고도 가식적인 행동과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나중에 잘못을 뉘우치고 행동으로 옮긴 맏아들의 갈등과 깊은 사고에 의한 진솔한 순명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맏아들은 처음에는 비록 무례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으나 회개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써 실상 아버지께 기쁨을 드린 효자가 된 것입니다.
실상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말이나 겉치레, 꾸밈이 아니라 뜻한 바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회개란 결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온전한 방향 전화이요,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행위인 것입니다. 죽음의 구렁텅이 속에 헤매던 자들도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뜯어고치고 주님께 돌아섬으로써 생명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이요, 이는 곧 제2독서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권력자나, 일반 대중 모두가 신분과 지위의 고하를 떠나서 모두가 자신을 낮추어 서로를 받들고 존경하며 섬기는 마음이며 애정을 나누며 동정심을 갖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은 모든 죄인들을 포용하는 마음이요,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바다같이 넓고 하늘보다 높은 마음을 헤아리면서 늘 새롭게 회개하여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기쁨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연중 제 26 주일
1. 김창석 신부(가)/ 2 2. 강길웅 신부(가)/ 4
3. 임승필 신부(가)/ 6 4. 구본식 부제(가)/ 7
5. 교구 주보(가)/ 9 6. 최인호 작가(가)/ 10
1.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창녀(娼女)들이 먼저
김창석 신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오 21, 31).
예수의 충격적인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이 말은 창녀들의 죄를 찬양한 것이 분명 아니다. 예수의 이 말은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의식하고 한 말일 것이다.
그 당시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종교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직업적 또는 형식적 종교인들이어서, 하느님보다는 자기 자신들을 더 위하는 교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기들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고 회개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그 당시 사람들의 천시를 받던 세리나 창녀들은,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령 쇄신 설교가인 동시에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영성신학 교수인 페리시 신부 늘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 불구의 자녀에게 더 큰사랑이 가는 부모의 심정을 알면 이해가 가는 말일 것이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들이고, 또 하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이다.” 또 장 자끄 루소는 “범죄는 부끄러워하되 죄인이라고 자인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했고, 풀톤 쉰은 “죄인이 되는 것은 절망적이지만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희망적이다”라고 말했다.
대성인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런 풍자적인 이야기를 했다.
“사람이 천국에 가면 놀랠 일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자기 같은 죄인이 천국에 오다니 하고 놀래고, 둘째는 교황이나 주교, 신부들, 그리고 평소에 독실하기로 유명했던 신도 회장들이 천국에 보이지 않는데 놀래고, 셋째는 평소에는 소위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천국에 많이 와 있는데 놀란다.”
<복음>을 보면 예수의 눈에는 겸손한 죄인이 교만한 성인보다 낮게 보인 경우가 많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가 19, 10)고 말했다.
요즈음 현실을 보아도 이런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성직자들이나 기타 직업적인 종교인들은 제사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이 많고, 교만하고, 체면만 차리고, 표리부동하게 겉만 꾸미는 경우가 있다. 반면에 평소에는 더러 죄에 떨어지지만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겸손하고, 진지하고, 겉꾸밈이 없다.
이러나 양면적인 형상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앙에 형식적인 신앙과 실질적인 신앙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두 가지 신앙은 같은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실제는 다를 수가 있다.
형식적인 신앙은 머리로만 믿는 것이다. 머리로만 믿으니까 의심이 많다. 체면만 중요시하고, 불평이 많고, 비판적이다. 일요일에 교회에 가면 신앙의 모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일단 집에 돌아가거나 직장에 나가면 기도를 전혀 안 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 생각조차 안 한다.
이런 사람은 이웃이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신자인지도 모르고, 알더라도 신자가 아닌 사람만도 못 하다는 평을 듣는다. 불우 이웃을 돕자는 권유를 받으면 거북한 반응을 보이거나 생색만 내려고 한다. 모든 것이 형식적이고 마음으로부터의 열심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반면에 실질적인 신앙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일요일뿐 아니고 다른 요일에도 교회에 나아가려고 애쓴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직장이나 학교나 기타 장소에서도 틈만 있으면 하느님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한다. 불우 이웃 돕기를 솔선해서 하고 남몰래 도와 주고, 생색을 내거나 자랑을 하지 않는다. 이러나 사람은 이웃이나 직장이나 학교 친구들로부터 신자다운 신자라는 칭찬을 받는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형식적 신앙 없이도 실질적 신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환자들을 돕는 상록회라는 모임이 있는데, 많은 회원들이 매월 1천 원의 회비를 내서 한꺼번에 1천만 원씩을 만들어 나환자들을 돕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회원 중에 직업적 종교인들이나 종교를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보다 아무 종교도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다는 사실이다.
어느 요정의 여종업원들이 상록회의 위원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마음씨는 일종의 종교심이라고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죄스런 생활을 하고 있음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속죄의 뜻으로 한 달에 1천 원씩이지만 나환자들을 돕는데 보람을 느끼는 마음―이런 마음이 일종의 종교심일 수 있다는 말이다. 천국은 본점이고 우리 마음은 천국의 지점이란 말이 있는데, 그 마음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토인비가 말하기를 “오늘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문화나 과학이 아니라 종교밖에 없다”고 하였는데, 그가 말한 종교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2.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자신을 아는 것이 천국이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에제 18,25~28 (못된 행실을 털어 버리고 돌아서면 자기 목숨을 건질 것이다)
제2독서 필립 2,1~11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
복 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신앙의 열매를 세속의 눈으로만 본다면 참으로 ‘요지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형편없이 개판으로 살았던 자들이 하느님의 칭찬을 받아 천당에 일찍 들어가는가 하면 열심하고 경건하게 살았던 자들은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받아 천당문 밖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 말씀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마태 21,31). 이게 얼마나 큰 모순이요 충격적인 발언입니까?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도대체 창녀들만 못하며 도둑이나 세리만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 들어야 합니다.
어떤 부부가 서로 다툰 뒤에 저를 찾아와서 상담한 일이 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남자의 얘기를 들으면 여자가 나쁩니다. 남자 자신에겐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얘길 들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가 나빠도 보통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자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에겐 흠이나 잘못이 없는데 왜 늘 서로 싸워야 하는 모순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느냐?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남의 잘못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왜 유대교에서 존경받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창녀나 도둑만도 못하다는 꾸지람을 하시느냐? 아주 뻔한 것입니다. 도둑이나 창녀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께 매달릴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천당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남은 잘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불행도 없습니다. 성서에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자기 죄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천당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요, 자기 죄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천당에서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또는 얼마나 큰 죄를 졌느냐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정하고 고백하면 됩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매달려 자비를 빌었을 때 그는 이미 낙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루가 23,39~43참조). 도둑이었던 세리도 자신이 부정직하고 욕심 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했을 때 그는 이미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신의 공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믿음이 없고 사랑이 부족하며 용서가 없었고 그리고 이웃을 너무도 무시했던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불행했습니다(루가 18,9 ~14참조).
옛날 어떤 임금이 교도소를 순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죄수들이 임금에게 자신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하소연을 하더랍니다. 그때 임금은 그러냐고 하면서 그들을 동정해 주었는데 마지막 한 사람만은 아무 말도 못하고 훌쩍 훌쩍 울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사연을 들어 보니 자기는 죄가 많아서 임금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처지라고 한탄하더랍니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그랬답니다. 이곳은 죄 없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인데 왜 죄인을 이곳에 들여보냈느냐고. 그래서 그 죄인은 그 날로 석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흔한 말로 ‘주제파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주제파악이 안되면 아주 피곤합니다. 구제불능입니다. 하느님은 무슨 잘못이나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제파악이 안되는 죄만은 용서가 안됩니다. 용서를 하시고 싶어도 계속 감추고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창녀만도 못하고 도둑만도 못한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를 보면서 그리고 그들의 끝없는 거짓말과 변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숨기고 감추는 추태가 더 심했습니다. 못난 사람은 감출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코딱지 만한 잘못이 있으면 가슴을 치며 두려워합니다.
신앙은 어찌보면 어리석은 삶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은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거짓이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기에 앞서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 보도록 합시다. 이것이 잘 살고 잘 믿는 길입니다.
3.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임승필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 이야기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서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자기에게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직접 갑니다. 그리고는 부릅니다. 이 부름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아들아!”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 그대로 “얘야!”하고 부릅니다. 그리고 분부를 내립니다. 딱딱한 명령이 아니라 부드럽게 분부합니다. 그런데 명령은 부드러우나, 그 내용은 쉽지 않습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이 뙤약볕에서 고생해야 합니다. 특히나 젊은 사람들에게는 하기 싫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명령을 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들이 자율적으로 대답하라 수 있는 자유를 이미 주었습니다.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또 아버지는 아들들의 대답 이후의 행동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같이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시간적인 여유를 줍니다. 이 시간은, 아들들이 ‘안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가, 마음을 고치고 일하러 가게 해줍니다. 또는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곧 ‘가겠습니다.’ 하고서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적 여유를 줌으로써 결심을 뒤바꾸게도 하고, 결심을 순화 내지 강화하기도 합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맏아들의 대답을 직역하면,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가 됩니다. 퉁명스러울 정도로 딱 잘라 거절합니다. 그는 다른 계획이 있을 수도 있고, 노동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반항의 그 달콤함을 만끽하려고 그러는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를 거역함으로써 자존심과 독립심, 그리고 해방감을 누리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뉘우칩니다. 비유는 이 뉘우침의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비유를 듣는 청중이 저마다 다름대로 상상해서 알아듣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습니다. 둘째의 대답을 직역하면, “예, 주인님!” 정도가 됩니다. 선뜻 대답하면서 동시에 정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랑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에게 예의 바르게, 그러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은 빈 대답이 되고 맙니다. 결국 거짓 약속, 거짓 맹세가 됩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는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각자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두 아들의 대답과 행동,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못합니다. “예, 아버지!” 하고 바로 포도밭으로 가서 열심히 일하였다면 완전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에서건,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른 생활에서건 불완전합니다. 불완전 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불완전 속에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으로 비유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그들은 그 두 아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고 쉽게 대답합니다. 올바른 대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 대한 판단이 곧 자신에 대한 판단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예수님 비유는 듣는 이에게 판단을 요구합니다. 당시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판단을 요구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 판단은 남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 내 자신에 대한 판단입니다.
하느님에게 응답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려는 우리는 늘 불완전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좌표는 무엇이고, 방향은 어디를 향하는 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판단은 또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와 같이, 빈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4.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예, 아니요
구본식 부제
신앙으로 가지게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하자.
우리 말 주에서 하기 힘든 말이 하나 있지요. “뜰에 콩까지 깐 콩까지인가 안 깐 콩깍지인가”하는 말입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면 안될 것도 없지만 그러나 조금만 빨리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이 새어 마옵니다. 이 이야기를 초등학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어려운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 아니요”라는 말입니다. 천천히 해도 또 빨리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뜰에 콩깍지 깐 콩까지인가 안 깐 콩까지인가”하는 것은 자꾸 연습하면 안될 것도 없지만 ‘예, 아니오’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에 대한 말이기에 어렵다고 했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생겨 먼저 약속을 취소할 일이 생겼을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먼저 약속은 “예”이고 두 번째 취소는 “아니오”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예, 아니오”를 아주 흔히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남발한다면 그 사람들을 가리켜 신의 없는 사람, 거짓말 잘하는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이라고들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약속을 하고많은 계약을 맺고 살아갑니다. 부모와의 약속, 부부끼리의 계약, 형제 사이의 사랑, 친구사이의 우정, 또는 동료 사이에도 어떤 약속 소에서 살아갑니다. 부모와의 약속을 저버릴 때 불효자가 되고 모든 관계에서 신의를 잊어버리게 되면 의리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떤 형태의 약속이든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맺어지고 행해지는 약속이 이처럼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나가서 보다 큰 약속, 보다 큰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인간과의 약속은 혈연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인정(人情)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돈이나 이익 관계일 수도 잇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생명과 직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와 하느님과의 약속은 나의 생명을 두고 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배반할 때에 바로 죽음이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가 약속을 했습니까?
우리는 세례 때에 이 약속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죄를 끊어 버리기로 약속을 했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 버리겠다고 했으며,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굳이 따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의 결과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죄를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이 상태를 보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약속을 저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례 때에 “예”하고 대답을 한 사실에 아무 거리낌이 없이 “아니오”하는 행동을 하는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인간과의 약속을 어긴 사람을 우리는 사기꾼, 거짓말쟁이, 신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느님과의 약속을 기키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무어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자,
둘째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하고는 “아니오”라는 대답과 같은 행동으로 포도밭에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가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너희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네가 해야할 바를 충실히 지키며, 죄를 끊고 악의 유혹을 끊으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 힘써 일 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예”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대답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덧붙여서 말씀을 하십니다. “예”란 대답을 하고 실행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아니오, 싫습니다”고 대답을 하고 실행하는 자가 훨씬 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예”하고 대답을 하고 그 대답에 충실한 행동을 하는 자일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을 놓고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킬 때 우리는 영원한 삶과 생명을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질 때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처럼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신앙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하느님을 원하고 선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받쳐서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굳은 결심 하에서 “예”하고 기꺼이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그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어떤 유혹이 일어나더라도 깊이 반성을 하면서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은 이상 열심히 하느님께 매어 달리고 충실히 생활하여 약속의 대가인 영원히 생명을 차지합시다.
5.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
교구 주보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는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마태오는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 구전해온 예수의 전승을 이 자리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구성은 두 아들의 비유(28-31절 전반부)와 비유의 설명(31절 후반부-32절)으로 되어 있다.
1. 두 아들의 비유
처음에는 포도원으로 일하러 가기 싫다고 했다가 나중에 일하러 간 맏이는 윤리상의 죄인들, 직업상의 죄인들로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면서 살았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서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과는 반대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곧이곧대로 실천하며 따른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배척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예수 전승들이 복음서 여러 곳에 자주 나온다.
2. 비유의 설명
이 비유 설명과 비슷한 내용이 루가 7장29-30절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마태오는 그것을 예수의 어록(語錄)에서 베낀 것으로 여겨진다.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의인으로 자처하여 일반 백성, 더욱이 직업상의 죄인들인 세리들과 어울려서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처신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구세경륜(救世經綸)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3. 비유에 담긴 의미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을까? 예수께서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을 상대로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구약의 예언자들, 요한, 예수, 신약의 사도들을 보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들을 번번이 배척하였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선민을 처벌하시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신다. 하느님께서는 옛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유다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택하신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도 믿음(21,32), 열매(21,41-43), 예복(22,11)을 갖추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멸시하던 윤리상의 죄인들, 직업상의 죄인들을 예수께서는 스스럼없이 대하시고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말씀과 행동으로 허무셨다. 예수께서는 당시에 직업상 죄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람들과 가까이하며 친교와 우정을 나누시면서 회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음을 선포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에서 천대받는 소외된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예수님처럼 그들을 우선적으로 끌어안으며 복음적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 자주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6. 연중 제26주일 마태 21, 28-32(가) 창녀와 세리
최인호 베드로/작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9-407)는 뛰어난 설교가로 ‘요한 금구’(金口)라고도 불립니다.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교, 특히 성서의 가르침을 설교하였고, 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도덕적 개혁에 노력하였는데, 반대자들의 박해를 받고 여행하던 중 피로와 열병으로 죽은 성인입니다. 그분은 생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수많은 왕들과 장군들, 또 기념비가 기리는 자들의 궁전들은 모두 묻혀버렸으며, 도시를 점령하고 전승탑을 세우며 많은 민족을 노예로 삼았던 자들은 석상을 세우고 법을 제정하였지만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창녀였으며 어떤 나병환자의 집에서 예수께 기름을 부었던 여인은 전세계를 통해 모든 사람이 기리고 있다.”
크리소스토모가 찬양했던 창녀의 이름은 ‘마리아’, 바로 예수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태 26,13)라고 말씀하신 그 여인입니다.
창녀는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이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두 명의 창녀가 나오는데, 한 사람은 마리아이며 또 한 사람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요한 4,18)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성녀로 변화합니다.
성서에는 또 다른 직업의 죄인이 등장하는데, 바로 세리입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적국인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걷어들이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신 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키 작은 세관장 자캐오가 나무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가 19,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였던 이 두 사람의 집을 방문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은 죄인과 어울리는구나” 하고 비난하자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1).
예수님은 ‘가겠다는 말만하고 가지 않는 둘째아들’보다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 일하러 간 맏아들’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거역했던 창녀와 세리 같은 죄인도 뉘우치면 누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실제로 증명해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녀 마리아야말로 성 크리소스토모의 말처럼 ‘전 세계를 통해 모든 사람이 기리는 성인’인 것입니다. 주님의 눈에는 지금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고 어떻게 뉘우치고 변화하는가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계신 것입니다.
두 아들의 비유
가해 연중 제 26주일 강론 모음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대상으로 하신 비유 말씀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에는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는 대답을 하고, 실제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이 비유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세리와 창녀들은 유대교 사회에서 공인된 죄인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대상으로 하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 시대 유대아의 종교와 정치를 장악한 실세들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로서 그 사회가 인정하는 권위를 가졌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그 말씀을 가장 잘 따른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포도밭에 가서 일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만 해놓고 실제로는 가지 않은 아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모두가 믿고 있는 죄인들이지만,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에서 그들을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한 아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로는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의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알려진 세리와 창녀들이,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유대교로부터 유산으로 받아 신앙의 핵심으로 간직한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여기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삶으로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그것이 현세든 혹은 내세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깨달음에 상응하는 실천을 하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 실천은 구약성서의 표현을 빌리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탈출 33,19)이고, 예수님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루가 6,36) 그 자비를 우리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리와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죄인으로 판단된 사람들이 권위와 존경으로 치장한 지도자들보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 혹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 더 충실하다는 말씀입니다.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이라는 그 시대 지도자들은 누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권위와 존경을 계속 누리기 위해 처신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누리는 것에 집착해버린 나머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잃으면서, 율법과 성전의 제물 봉헌을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게 하기 위해 법조항을 많이 만들고 엄격한 준수를 요구하였습니다. 제물봉헌에 충실하도록 엄격한 의례 준수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제물봉헌을 빌미로 백성들 안에 행세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라지고 지켜야 할 율법과 제물봉헌 의례만 남았고, 그들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면서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자비를 배설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배경으로 자기 자신을 치장하거나 영광스럽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우리의 실천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자비’를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성찬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몸이다.’, ‘쏟는 피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어떤 헌신과 희생을 각오하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위해, 또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며 십자가를 집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말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
신앙인의 실천은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보상을 얻는 길도 아니고, 입신출세하여 사람들 앞에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도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어리석음이지만…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1고린 1,1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행동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위한 득과 실을 먼저 계산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허무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끝까지 긍정하면 그 말로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전도서는 “하늘 아래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니 모든 일은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1,14)고 고백합니다. 이런 헛됨을 우리도 때때로 체험합니다. 사람이 죽어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호화찬란하였어도, 어느 날 그것은 허무로 돌아갑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에 대한 비밀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행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조금 더 보는 사람입니다.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하느님을 위한 한 주간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미사는 앞으로 한 주일 동안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마음다짐입니다. 성찬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킵니다. 우리 자신만 보는 우리의 협소한 시야를 치유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더 넓어진 시야를 가지고 새로운 한 주일을 위해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말씀 따라 포도밭에 일하러 가는 오늘 복음의 아들과 같이,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갑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던 예수님의 몸을 우리 안에 모시고 갑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 실천할 것을 바라면서 함께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바람을 잡듯 헛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
정 일 신부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원 농장 일을 시켰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일하러 가기 싫다고 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만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였지만 회개하고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습니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도 말만하고는 행하지 않았습니다.
창녀 같은 윤리적인 죄인들이나 세관원들과 목동 같은 직업상 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면서 살았지만,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자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습니다. 이들과는 달리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대제관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노상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했지만, 막상 예수께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회개를 촉구하자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의 여러 사도들을 보내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은 이들을 번번이 배척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옛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맞갖은 믿음과 실천을 통해서 열매를 맺고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각에 그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만을 앞세우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공허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를 이루는 통합적이고도 전인격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참되고 성실한 실천이고 순종이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가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안으로는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고 교회 밖으로는 세상의 가치를 복음으로 변화시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 가야한다고 합니다. 교회는 새 천년기의 구체적 실천모델로 평가되고 제시되고 있는 소공동체 운동을 제안했습니다. 이 운동은 기존의 성사를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는 방식과는 달리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성직자 위주의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삶이 어느 특정 계층에 의해서만 주도되지 않고 모든 계층이 주체성을 가지고 참여할 때 창조적 능력이 살아 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교회를 작은 공동체로 나눈다는 물리적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의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지성적 사고 체계 안에서만 발생하지 않고 삶 안에서 발생하고 해석되고 실천되기를 바라는 생활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새삼스럽게 소공동체 운동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생각과 말에만 그쳐서는 안 되고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혼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성사도 배령해야 하지만,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고,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하며, 말씀에 근거해서 활동해야 합니다.
스스로 복음화 되면서 복음화 하는 실천이 강조되는 새로운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우리가 둘이나 셋이 모여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실천을 모색할 때 그곳에 은총이 발생합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삶의 현장이 교회가 됩니다. 성사를 배령해야만 은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가 똑 같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실천도 중요합니다. 참된 회개는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입에 있지 않고, 행동에 있다(마태 21,28-32).
표창연 신부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2).
오늘 예수님 말씀의 청중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바로 이들을 빗대어 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싫다’고 대답하였지만 생각을 바꾼 맏아들, 반대로 아버지의 말씀에 ‘예’라고 대답은 하였지만 행동하지 않은 둘째 아들. 재미난 것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가 ‘맏아들’이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말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지만, 행동은 하느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사는 이들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더불어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이들인 ‘세리와 창녀’들도 회개와 돌아섬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입에 오른 신앙이 몸으로 도달하기 어려울까? 말로 한 신앙이 행동으로 옮기가 왜 이토록 어려울까? 그것은 예수님 말씀의 청중인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이익을 채우는 것에 혈안이 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에만 목적을 둔 이들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맞추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을 남용하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경고의 말씀처럼 들린다.
좋은 말 많이 들리는 세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막힌 말들로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드는 세상이다. 세상의 기술은 이들의 말을 더욱 현실감 있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이미 충분히 발달되었다. 하지만 진정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이들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던 인도의 위대한 지도자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사랑을 몸소 보여주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를 삶의 지향이요, 목표로 삼고자 세례성사로 새롭게 태어난 그리스도인!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은 입에서만 오르내리는 주제로 머물고 몸으로는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간디의 예리한 비판이겠다.
회개와 사랑은 입으로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하는 것임을 오늘 예수님 말씀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봐야 하겠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제2독서)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조원행 신부
교구장 주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서품역순으로 주일마다 향기를 내뿜던 이 말씀란에, 오늘 복음의 맏이가 나중에야 일하러 간 것처럼 이제야 맨 끝으로 간신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언뜻 루카 15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연상케 하는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아버지께로 돌아왔듯이 처음에는 본성에 따라 싫다고 했지만 회개하여 일하러 간 맏이, 반대로 말로는 너무나 자신 있게 “가겠습니다, 아버지”했지만 마음으로도 실제로도 전혀 가지 않은 다른 아들, 이들의 비유는 이어지는 비유 적용 말씀에서 처음에는 공적인 죄인이었지만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 반대로 비록 겉으로는 가장 지극한 종교인이었지만 생각을 바꾸어 믿지 못한 사제들과 원로들에 대한 폭로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선포는 당시 종교적·사회적 상식을 송두리째 뒤엎는 폭탄선언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직업상의 죄인인 세리, 윤리적인 죄인인 창녀, 그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공적인 죄인이었습니다. 반면 종교적인 삶을 위해 거친 서민과 거리를 두고 살 정도의 바리사이파, 하느님의 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 그리고 백성의 원로들은 그 누구도 범치 못할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회구조 안에서 예수님은 죄인과 의인의 순서가 거꾸로 바뀔 것이라 선언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삶의 역전은 우리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성적으로 자기 욕심에 따라 살고 싶은 욕구, 우선 말로만이라도 현실을 모면해보고자 하는 짧은 술수, 그러다가도 가끔씩은 삶의 진실을 탐구해보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삶들입니다. 그러함에도 주님께서 항상 중요시하는 것은 현재입니다. 과거에 얼마나 잘살았고, 못살았고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극악하고 공적인 죄인이라 하더라도 회개하여 지금 깨끗하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바로 여기에 삶의 희망이 있고, 의욕이 있습니다.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맏이는 우리의 표본이 되고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물론 생각을 바꿔 회개한 나중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중은 언제든 되풀이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는 면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인내와 넓으신 자비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회개하며 하느님의 일터로 나아갑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랑
박윤배 신부
혹시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으신가요? 짝사랑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서로 사랑하는 그런 사랑, 가슴 아픈 이별을 느껴보기도 한 그런 사랑이면 아래의 글에 공감이 더 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는 세상은 이전과는 다릅니다. 이른 봄에 피어나는 꽃들이 이렇게 키가 작았었나, 여름날의 밤하늘에 이토록 별이 많았었나. 떨어져 뒹구는 나뭇잎들이 이처럼 고운 빛깔이었나, 한겨울 가로등 불이 이렇게 따스한 주황빛이었나. 익숙했던 모든 풍경들에 새삼 감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지는지요?
어쩌면 사랑이란 잃었던 시력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별이 가혹한 이유도 세상이 다시 밋밋했던 옛날로 돌아가기 때문일 겁니다.” -영화 ‘연애소설’ 중에서-
사람을 정의하라고 하면 저는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특별하게 해주고 삶의 의미를 더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랑이 큰 가치가 있다면, 우리와 하느님과의 사랑은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정말정말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을 보내 주셨지요. 신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참 많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대해주는 것, 내가 지켜야 할 책임을 제대로 지키는 것, 모든 일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 등등. 각자의 상황에따라 정말 다양하게 그 방법은 주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똑같은 명령을 내리지요.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먼저 맏아들은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뉘우치고서 일을 하러 갑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기꺼이 간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 가지 않았지요. 이 두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보다 행동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지금 당장 행동의 실천을 하라고 주님께서는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 응답하고 있나요? 혹시 둘째 아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매주 성당에 나오면서, 그리고 자주 기도하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들 자신의 변화는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사랑에 대한 지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정작 실천은 나중에 시간 날 때 하는 것이라고 미루면서, 오히려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도 더 복음적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이라는 포도원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어 줍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의 실천이 상대방을 보다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변화시켜 준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이제 일하러 가실 준비…되셨나요?
참된 순종
백남국 신부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공격적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이 말씀을 듣고 곤혹스런 얼굴을 하고 있을 사제들과 원로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지… 그들에게는 세리나 창녀와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굴욕적입니다. 그런데 세리나 창녀가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니 그만한 모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반박도 하기가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용의주도하게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미리 그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며 다그치시고, 늦게라도 일하러 나간 맏아들이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둘째보다는 낫다는 동의를 그들에게서 미리 받아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제대로 걸려 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그들의 당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석사제와 원로들처럼 폼만 잡으면서 회개할 줄은 모르는 사람, 둘째 아들처럼 대답은 잘하면서 행동은 굼뜬 신앙인이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제 이야기였습니다. 결국은 그들과 공범의식을 느끼게 되면서 차츰 제 마음이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을 옹호하는 쪽으로 변해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그래도 세리나 창녀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말씀 너무 심하신 것은 아닌지요… 그들도 처음부터 아버지 말씀을 어기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살다보니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약속을 못 지킨 것뿐이겠지요. 처음부터 싫다고 거절하면서 복장 터지게 하는 것 보다야 그래도 대답이라도 잘하는 것이 백번 낫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되지도 않은 말로 옹호하고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아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동안 습관적으로 주님께 드렸던 뻔뻔스러운 대답들이 너무나 많이 떠오르는 것이 더 이상 우기기가 힘들어집니다.
오늘 주님의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마음을 바꾸어 아버지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너무나 쉽게 ‘예’라고 말하고는 아무런 갈등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제대로 ‘예’라고 응답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넓게 열려져 있을 것입니다. 수석사제나 원로들처럼 오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전혀 변화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세리와 창녀들처럼 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강한 질책을 떠올리며, 또 다시 공수표가 될지라도 한 번 더 큰 소리로 대답을 해 봅니다. ‘예, 주님. 이번에는 굳은 마음을 지니고 제대로 한번 순종해 보겠습니다.’
끝까지 가봐야
김광근 신부
오늘은 제가 퀴즈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우리말에“길고 짧은 것은 끝까지 대어 봐야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끝까지’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순간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사실 인생은 전체를 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부분 부분들에 집착 하다보면 오히려 전체적인 방향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제 말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십니까?”그렇다면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생은 끝까지가봐야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말씀을 빌어서 표현하자면“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에제 18,26-27참조). 이 말씀은 결국 의인이라도 불의를 저지르면 죽을 수밖에 없고,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면 언제나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끝에서 어떤 결말이 나느냐에 따라 인생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의인이라도 끝까지 의인으로 남아 있어야 가치가 있고, 지금은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서면 언제나 용서받을 수 있고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입니다.
복음에 나오는‘두 아들의 비유’도 결국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맏아들은처음에는 일하러 가기 싫다고 했으나“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습니다”(마태 21,29 ). 그러나 작은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만 하고, 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이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 그들이 대답합니다. “맏아들입니다.”우리 인생에서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과정이 좋았다 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과정이 반감되고,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다 좋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우리는 언제든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특히 회개라는 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하는 바로 그 순간 새 사람이 되고 새 삶을 살 수 있으며, 결국에는 구원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은“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잘 돌보아 주십시오”(필립 2,3-4). 결국 그는“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며”(필립 2,5)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생각을 바꾸어 새 삶을 살아갑시다.
포도원 주인의 두 아들
1. 말씀읽기:마태21,28-32 두 아들의 비유
2.말씀연구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각각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는 당연하게 요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존중해 줍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처음에는 가기 싫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대답만 하고서 가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회개한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둘째 아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회개하지 않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을 가진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들과 죄인이었지만 회개하고 의롭게 돌아서 의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그런데 큰 아들은 그 일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그렇게 잘 해주셨는데, 나는 이게 뭔가?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당연히 해야 될 일 조금 하라는 것을 왜 나는 거부하고 있는가? 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그래! 오늘부터는 아버지 일손을 도와 드려야겠다.”
그렇게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는 맏아들은 유다인들이 죄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세리와 창녀들이었습니다. 회심하는 세리 자캐오, 향료의 단지를 깨뜨리고 그 향료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던 죄 많은 여인. 그들은 모두 큰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마음을 몰라주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내가 내 일에 집중하다보면,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다보면 부모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나 더 나아가 작은 심부름조차도 거절하게 됩니다. 부모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시지만 나를 사랑하시기에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언젠가는 부모마음 알아주겠지!”하고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부모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고 기다리십니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대답만 하는 사람. 마음에도 없지만 그저 그 순간을 넘기기 위해서 좋은 말을 하는 사람.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아들에게도 아버지는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둘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지 않았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바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다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사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얼마나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행동을 보면 굴러들어온 복을 발로 차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런 오만한 마음을 가진 이들은 결코 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답은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웃으면서 뭐든지 좋다고 합니다.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대답하고 행동으로 즉시 옮기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 하겠다고 말만하고 결국은 안 해 놓고 이 다음에 이런 저런 핑계만 댑니다. 그것도 웃으면서. 그리고 말합니다. “다음에는 꼭 할께요.”라고.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를 물으셨을 때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자신들에게 관련된 곤란한 질문에 대답을 회피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큰 아들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자기들을 향한 질문인지를 모르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 그들 스스로 죄를 인정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로움과 경건의 가면을 썼기에 스스로도 의롭고 경건하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죄인들은 그들의 죄짓는 생활을 청산하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앞서서 하늘나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돌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도 않았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었던 그들이 세리와 창녀들의 목자였지만 돌보지를 않았습니다. 즉 대답만 “예”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는 사람들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했지만 자기 하고 싶은 것들을 행했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이들의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죄인들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습니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은 정의의 길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을 다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물론 세리들까지도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으며 하느님의 뜻을 받아 들였으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들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내 옆에서 신앙을 권고하는 사람들의 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권고하는 사람이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끌리는 전혀 없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나를 위해서 해 주는 말에 귀를 기울입시다. 누가 평일미사나 레지오나 성경강좌, 기타 교리에 함께 가자고 할 때, 기꺼이 따라가야 합니다. 직장 일이 바쁘니까 못해요. 뭐가 있어서 못해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사람도 그것이 핑계라는 것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기꺼이 응답합시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세례자 요한의 삶과 메시지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면 그래서 행동이 바뀌었다면, 그래서 믿게 되었다면 그들은 구원의 문으로 성큼성큼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세례자 요한은 너무도 극단적이었고, 고행적이었고, 그들의 권위를 넘어섰기에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결국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았기에 예수님까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바뀝니다. 행동이 바뀌면 내 삶이 바뀌고, 내 삶이 바뀌면 영생이 바뀝니다. 우리 모두 불신에서 믿음으로 생각을 바꿉시다. 그렇게 바뀌면 보이는 것들이 더욱 새롭게 보이고, 모든 것들이 나를 믿음에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내 옆에서 신앙에로 초대하는 사람들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예”하고 응답할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나는 큰아들의 모습입니까? 작은 아들의 모습입니까?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②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해 보고, 그 죄의 모습이 혹시 내 안에는 없는지 생각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