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7 주일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어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었다



제 1 독서: 아서 5,1-7



제 2 독서: 필립 4,6-9



복 음: 마태 21,33-43



  오늘 전례는 전원시의 정취가 물씬 풍기면서도 극적 사건이 펼쳐지고 있는 ‘포도밭’의 전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 성서전승에 있어서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맛스러운 결실을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온갖 세심한 배려로 보살펴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호세 10,1; 예레 2,21; 5,10; 6,9; 12,10; 에제 15,1-8; 17,3-10 등 참조). 그리고 ‘포도주’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농경민족에게 있어서 기쁨과 환희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열정적인 사랑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포도주는 혼인잔치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불가결의 요소였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사화(요한 2장)나 또한 환희에 찬 ‘아가’의 첫머리를 상기해 보라:“그리워라, 뜨거운 임의 입술, 포도주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아가 1,2).



“만군의 주 하느님 돌아오소서, 비오니 포도밭을 찾아오소서”



  자연히 ‘포도밭’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혼인’의 상징적 개념과도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우리는 위에서 포도밭이라는 상징적 개념이 시적인 정취를 물씬 풍길 뿐 아니라 극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포도밭은 황폐해질 수도 있다: 그러면 포도밭 주인은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다. 순전히 물질적인 비교에서 벗어나 그 유추적 해석을 상징적 역사학적 차원으로 전이시켜 본다면 보다 더 깊은 의미를 띠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느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계약’을 어겼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무수한 사건들의 의미가 그것이다.

  비록 매우 막연하긴 하지만 이런 불충실한 역사의 어떤 순간들이 시편 79편에 의한 오늘의 응송에서 아주 시적인 표현으로 되새겨 지고 있다;그것은 버림을 받아 이미 맹수들의 침입이 잦은 황량한 ‘포도밭’으로 변해버린 이스라엘의 재생을 야훼 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하고 있다:“당신은 어찌하여, 그 울타리를 부수시어, 길 가는 사람마다 따먹게 하셨나이까? 숲속의 도야지가 휩쓸게 하시고, 들짐승이 먹어내게 하시나이까? 만군의 주 하느님 돌아오소서. 하늘로서 굽어보사 살펴주소서. 비오니 포도밭을 찾아오소서. 지켜주소서, 당신의 오른손이 심어주신 줄기를, 당신 위해 실히 해주신 그 가지를”(시편 79,13-16).

  어쩌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인들에 의한 북부왕조의 패망시기이거나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침공당했을 시기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사실은 하느님께 불충실한 당신 백성을 적들의 성난 손아귀에 버려두셨다고 하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포도밭의 값진 ‘포도나무’를 이집트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친히 옮겨 심어주신 그 모든 사랑이 헛되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시편 79,9-12 참조).

  

 “만군의 주 야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로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사야 예언자의 ‘포도밭의 노래’―아마도 포도 수확기에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예언직 초기에 지어졌다고 여겨지는―에서는 이와 같은 상처받은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실질적으로 또한 감동적으로 읊어지고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첫 대목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각별한 배려를 묘사하는 말로 시작한다:“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이사 5,1-2).

  여기서 서술되고 있는 내용들은 유능한 경작자가 자기 포도밭에서 최고의 수확을 거두기 위해 배려하고 있는 모든 일상적인 조치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당신 포도밭에 아주 질이 좋은 포도나무들만을 골라 심으셨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마지막 구절에서 “들포도가 웬말인가?”(2절) 하는 실망이 표현되고 있는 점은 능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분노를 ‘심판’의 형태로 나타내시면서 그 증인으로서 나중에 당신의 ‘포도밭’이 될 이스라엘 백성, 바로 그들을 부르신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 잠시 후에 우리가 고찰하게 될 복음의 비유에서도 드러나게 되듯이 하느님의 ‘심판’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이제 내가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너희에게 알리리라. 울타리를 걷어 짐승들에게 뜯기게 하고 담을 허물어 마구짓밟히게 하리라. 망그러진 채 그대로 내버려두리라. 순을 치지도 아니하고 김을 매지도 않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이게 하리라. 구름에게 비를 내리지 말라고 명하리라”(3-6절).

  비유의 의미가 명백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이사야는 한 구절 더 덧붙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 백성에게 기대하셨던 ‘결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던가를 뚜렷이 밝혀주고자 한다:“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말인가?”(7절).

  예언자 이사야가 비난하고 있는 ‘사회적’ 불의는 무엇보다도 특히 탄압과 폭력이다. 이것이 바로 ‘포도밭’이 그의 사랑하는 주인 즉 그의 ‘신랑’인 야훼를 위해 맺어놓은 ‘들포도’다. 그러므로 그분의 지극하고도 사심없는 사랑은 배반을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충실성이 표현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예수 께서는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포도밭의 비유와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포도밭의 노래’의 내용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거듭 강조하신다. 이 비유는 다른 공관 복음서(마르 12,1-11; 루가 20,9-18 참조)에도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특히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기에 자신의 교회론을 중심으로 한 관심 주제를 다양한 편집활동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이 비유는 이미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로 시작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을 거슬러서 하는 논쟁의 계속이긴 하지만 그 강도에 있어서 더욱 신랄하고 우의적인 면이 더 명백히 드러난다. 그 결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은 곧 의미를 깨닫고 예수께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예수를 잡으려 아였으나 군중이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 군중이 예수를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21,45).

  자, 비유의 내용을 보자: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포도철이 되자 그는 그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죽였다.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마태 21,33-39).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이려 한 계획과 또한 그 실질적인 살해행위가 전혀 이유없는 또는 완전히 어리석은 짓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실질적인 상속법에 따르면 상속자가 없는 지주가 죽었을 경우에 그 소유지는 먼저 점유하고 있는 사람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기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포도밭’으로서 표현하는 상징주의적 문학형식을 빌어 특별히 극적인 구원의 역사의 어떤 단계를 서술하고자 한다: 소작인들이 계속해서 죽이는 ‘종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쉽게 들어보지 못한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께서는 얼마 뒤에 성도 예루살렘을 향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 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마태 23,37).

  마르코복음에서나 루가복음에서는 세 번 계속해서 종이 파견되고 있는데 매번 한 명의 종이 파견되고 있으며, 마지막 종이 살해된다. 반면에 마태오복음에서는 여러 명의 종이 두 번에 걸쳐 보내지고 있다. 아마도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로써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에게 통용되고 있는 성서 분류에 따른 ‘제 1 예언자들과’과 ‘제 2 예언자들’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 같다.

  가장 사랑이 충만한 극적인 구원역사의 마지막 여정은 상속의 권한을 갖고 있는 독생 ‘성자’의 파견으로 이루어진다. 성부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마지막까지 선민의 구원을 위해 애tM신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되이 되고 만다! 그들은 “그(‘아들’)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버렸던 것이다”(39절).

  이 비유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이다. 이 사실 즉 예수의 죽음이 도시의 성 밖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특별한 내용은 히브리서의 작가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히브 13,12).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칠 수가 없었다. 포도원의 주인은 그토록 굳어져버린 그의 소작인들의 마음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비유의 끝부분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응답과 더불어 이 극적 사건에 연루되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 극적 사건이 자신들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솔직히 대답한다: “그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41절).

  이사야 예언자의 ‘포도밭의 노래’와 비교해 볼 때 이 비유에는 새로운 사실이 한 가지 있다:앞에서는 야훼께서 자신의 포도밭을 폐허로 만들어버리시겠다고 하셨다:반면에 여기서는 예수께서 다만 그 소작인들을 벌하시고 포도밭은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맡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사실, 구원의 역사가 하느님의 패배로 끝날 수는 없다: 반드시 되갚음이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 즉 하나는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충실한 살인자인 옛 이스라엘을 대신 이을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되갚음은 즉시 이어 나오는 예수의 말씀에서 표현되고 있다:“너희는 성서에서,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고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42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시어 당신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중심역할을 하시게 될 것을 공언하신다:즉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계획을 헛된 것으로 무시해버리시며, 집짓는 데 있어서 쓸모없는 돌과 같다고 해서 ‘버려진’ 그리스도를 당신의 새로운 구원의 건축에 쓰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른 문맥에 관련되어 있는 이 말들을 여기에 가져다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극적 사건 외에도 그의 부활의 승리 또한 예고하고 있다. 인간들이 폭력으로 막으려 했던 그 구원의 역사가 바로 십자가로부터 힘을 얻어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또 그 구원의 역사는 하느님의 되갚음의 또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는 교회라는 새로운 구원의 공동체를 통하여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 다른 공관 복음서들에서는 비유가 여기서 끝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복음에서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긴 다음의 한 구절이 더 첨가되고 있다: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43절).

  41절(“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이다”)에 내포된 의미가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이미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일”(마태 3,8 참조) 능력을 상실한 불충실한 옛 계약의 ‘백성’ 대신에 풍성한 결실을 맺을 하느님의 새 ‘백성’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희랍어 éthnos(=백성)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교회를 묘사할 때의 의미와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éthnos)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 베드 2,9).

  그러므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한 교회를 통하여 계속 앞으로 전진한다. 악한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차지할 욕심으로 ‘아들’을 죽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셨으며 당신의 포도밭을 되찾으시고 당신의 나라에서 그 악한 이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한 비극적 사건이 하느님의 위대한 승리로 바뀌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새 백성이 풍성한 결실을 내야 한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 점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41절. 43절). 이것이야말로 마태오 복음사가의 중심 주제다(1,18; 13,23 등 참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은 행동하는 데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통교리는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올바른 실천적 행위 속에 현존한다. 그러므로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일원이 되었다는 자만심, 성사에 대한 마술적인 모든 신뢰심, 복음의 메시지를 처음 받아들이면서 가졌던 모든 주술적 원의를 버려야 한다. 주님의 교회의 본체에 대한 믿음은 행동적 증거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된 구원의 은총은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풍성한 믿음의 결실을 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기를 요구한다”(G. Barbaglio, in I Vangeli, Cittadella Ed., Assisi 1975, p. 472).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이 입증될 수 있는 이러한 믿음의 ‘행동적’차원은 오늘의 짤막한 제 2 독서에서도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 항구히 간구하라고 권고한 후(필립 4,6-7) 다음과 같이 말을 계속한다:“형제 여러분, 끝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들은 것과 본 것을 실행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8-9절).

  이 대목에서 가장 의미 깊은 내용은 사도 바울로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본성적으로’ 진실된 것, 올바른 것, 고상한 것들을 실행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점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사상은 우리가 다른 수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과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시켜야 할 의무에서 멀어지게 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그리스도 신자는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8절)등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본질적인 사고능력을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로 자신의(9절) 가르침과 특히 그들의 모범적 행위에서 얻게 된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을 행할 힘을 ‘기도’로부터 얻는다(6-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의 ‘행동적’ 사상은 금욕주의적 사상이나 순전히 인간주의적 사상이나 또는 순수 실천주의적 사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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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27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27주일

    제 1 독서 : 이사 5, 1-7

    제 2 독서 : 필립 4, 6-9

    복     음 : 마태 21, 33-43


    제 1 독서 : 기원전 8세기 남왕국 유다 궁정의 영향력 있는 인물 이사야 예언자는 그 당시 만연했던 부도덕성을 비판했다. 율법과 정의를 무시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으로 이끄는 원천이라고 예언자는 생각했다. 점점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앗시리아 제국의 세력을 감지하면서, 그는 곧 다가올 파괴와 재앙을 선포했다.

    이사야 5장 ‘포도밭의 노래’는 가을에 수확을 노래하는 민요에서 따온 노래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주업이었던 포도 농사를 인용하여 선택된 백성의 배반과 그에 따르는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방에 하느님의 증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평과 정의에서 멀어져 있으니 그 특전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제 2 독서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사도 바오로가 열거한다. 늘 감사하는 마음과 평화, 고상하고 순결한 것에 대한 열정과 추구 등이다. 이런 자세가 되어있을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복     음 :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에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포도원 주인이 주인공이니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해야 더 적합할 것 같다. 루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자비로운 아버지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포도원 주인은 처음부터 실수를 했다. 그렇게 정성을 쏟아 만든 포도원을 남에게 그것도 포악한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고 멀리 떠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주인의 실수와 연약함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포도원)과 가장 소중한 사람(아들)까지도 소작인들에게 내어준 이유는 사랑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포도원뿐만 아니라 당신께 가장 소중한 아들까지도 우리에게 주셨다.

    그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포도원 주인이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21, 4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예수의 아버지께서는 전혀 다르게 반응을 보이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들을 부활시켰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우리로서는 예상 못한 하느님 아버지의 전혀 다른 반응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의 힘이다. 하느님께서는 워낙 힘있는 분이시라 죄악의 세력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막지 못한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0월은 전교의 달이고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돕는 군인주일이기도 합니다. 황금의 연유 기간 중 우리는 한 해의 추수의 은혜를 감사드리고 조상들을 기리는 추석 명절을 지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모두 생각해야 할 점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추수를 해야 할 때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이 추수가 풍작을 맞이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될 것이지만 흉작이나 수재 등으로 추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고통과 짐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서는 ‘포도밭의 노래’로서 기원전 760년경에 맹활약했던 정의의 예언자인 이사야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 시상이 뛰어난 작가였던 그는 유다 민족과 예루살렘을 포도밭에 비유하면서 사랑의 시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유다 민족이 때로는 연인의 관계로 묘사되고, 때로는 포도원지기와 밭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독서에서 이사야는 포도밭을 가꾸고 공들인 포도원지기를 하느님으로, 또 포도밭을 유다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유다인은 하느님을 실망시켰습니다. 이미 하느님은 사랑의 노래를 멈추고 실망을 안겨준 유다인을 아픈 마음으로 꾸짖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배반, 기대에 대한 실망은 참으로 큰 아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이사 5, 4)하면서 섭섭하고 분한 마음을 터뜨리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믿음으로써 나를 통하여 많은 축복을 받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고 나에게 쌀쌀하게 대하고 있는가? 그것도 모자라서 나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하고 더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시면서 우리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 7) 하시는 아시야서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를 겨냥한 말씀입니다.

    1953년 문을 연 미국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은 감옥에 자주 출입하는 여성 재소자들을 위한 집입니다. 이곳에서는 재소자들에게 저녁에 예배를 드리고 낮에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그들이 사랑을 배우고 느껴 새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이끌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심한 도벽을 가진 제니라는 소녀가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제니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는 반항아였습니다.

    제니의 집은 부유하였지만 어릴 때부터 도둑질하던 버릇을 고치지 못하여 결국 그녀의 부모가 이곳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원장 조이스 여사는 제니의 얼굴에 드리워 있는 우울한 그림자를 없애주려고 노력했습니다. 항상 웃음과 사랑으로 그녀를 대했으며 그녀가 도벽을 가진 것을 알면서도 중고 옷가게의 금전 출납직을 맡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제니가 돈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되자 모두 그녀를 믿지 못하고 걱정했으나 조이스 여사만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제니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엔 웃음이 번지고 점점 더 성실한 태도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제니는 한번도 돈을 훔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도벽을 깨끗하게 고칠 수 있었습니다.

    제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을 나오는 날, 조이스 여사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제니는 조이스 여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원장님은 이제까지의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저를 대해 주셨어요. 훔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려 할 때면 저는 원제나 원장님께서 저를 바라보시던 사랑이 담신 눈빛을 생각했습니다. 원장님은 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어요.” 조이스 여사가 보여준 사랑과 믿음이 마침내 한 소녀의 인생을 바르게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이스 여사가 보여주었던 사랑의 마음, 그것은 제니의 삶에 알찬 포도송이를 맺게 하여 그녀로 하여금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과 비참한 경지에 빠진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애정으로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기보다는 잘못을 꼬집고, 비난하고, 남을 끌어내림으로써 무참히 인격을 짓밟는 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신랄하게 꼬집고 계십니다. 포도원에 도조를 받으러 보낸 사람을 때리고,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돌로 쳐죽이는 것은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의 이런 비유를 못 알아들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 손을 대지는 못하고 기회만 엿보았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유다인 개개인뿐 아니라 인간 모두를 꾸짖는 세부적이며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지주, 포도원 소작인, 포도철 도조, 종들의 파견, 그들의 죽음, 아들의 파견, 주인의 분노, 소작인들에 대한 심판 등의 내용은 하느님, 세상, 인간, 종말, 공포, 예언자, 학살, 예수의 파견, 그의 십자가의 죽음, 하느님의 진노와 엄한 벌 등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핵심적인 내용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을 꾸짖고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다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포도송이를 맺지 않고 들포도를 맺은 포도나무, 제때에 도조를 바치지 않고 엉뚱한 착각에 빠져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 그것은 모두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밥먹듯이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의 버림을 받았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훌륭한 집의 기초가 되었던 것처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써 전인류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포도나무가 되고 도조를 제때에 바치는 소작인 되기 위해 오늘 제2독서 필립비서의 말씀처럼 항상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을 찾고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 덕스러운 것,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야 합니다. 인간을 속일 수 있으나 하느님을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회개하기를 미루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실한 자가 큰일에도 충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항상 정직하게, 착하게 사는 충직한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27주일

            1. 함세웅 신부(가)/2                     2. 김정진 신부(가)/3

            3. 범영배 부제(가)/5                     4. 최기산 신부(가)/7

            5. 강길웅 신부(가)/8                     6. 교구주보(가)-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9

            7. 최인호 작가(가)/10                    8. 작가미상(가)/11-착각

            9. 작가미상 (가)/13-군인주일           


            1                        연중 제27주일   마태 21, 33-43(가)  악한 소작인

                                                           함세웅 신부



     한없이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은 마냥 시원하기만 합니다. 가을이 되면 농부들은 추수에 일손이 바빠지게 마련입니다. 추수가 끝나면 소작인들은 땅 주인과 결산을 하고 미리 계약된 얼마의 소작료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해괴한 소작인들의 소행을 읽게 되고 땅 주인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을 읽게 됩니다.

    우선 오늘 복음(마태오 21, 33-43)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원인 당신의 백성들을 소작인으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권위를 외면한 채 주인이 보낸 많은 심부름꾼들을 냉대하고 때려 주고 나중에는 죽여 버림으로 정면으로 주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주인은 자기 외아들을 보내면 소작인들이 꼼짝 못하려니 했으나 외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진노한 주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모조리 살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소작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의 행동에 있어 그렇게 놀랄 건 없습니다. 당신 팔레스틴에는 심한 불경기로 노동자들은 불만에 가득 차서 반항적이었을 수 있고, 그렇다면 지주의 아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날 법도 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오늘날도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늘 선동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폭력 혁명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사태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공이니 멸공이니 하지만 가장 좋은 반공의 방법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려고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오늘 복음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선 오늘 ‘특권’과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많은 특권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좋을 대로 일하도록 자유롭게 하여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공사장의 감독과 같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어떤 과제를 주실 때 그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잇도록 이간에게 맡겨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누구에게나 결산의 시간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결산의 시간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으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과 시간 안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 가요?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나에게 어떤 책임 추궁의 원인이 될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분명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결산 보고의 자료입니다. 우리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특권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해야 할 특권, 하느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할 특권(사도행정 5,41)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러한 특권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계획적으로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 결과는 명망뿐이고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것뿐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보다 독특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없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우리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에 상당하는 책임을 완수하고 있는가? 공무원으로서 주어진 권리를 부끄럼 없이 사용하는가? 기업체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권리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책임과는 관계가 없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동시에 교육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일까? 학자로서 하느님의 자녀 된 나의 권리와 의무, 학생으로서 하느님의 자녀 된 나의 권리와 의무, 상인으로서 나의 권리와 의무는 순조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두 번째로, 오늘 복음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와 인내, 심판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기시듯 하느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과업을 맡기셨습니다. 이로부터 인간에게는 권리와 책임이 유래됩니다. 인간이 맡은 바 직책을 수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종종 반기를 들고 항거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꾸자꾸 자기의 파견자를 보내시고 파견자가 학대받고 살해를 당해도 당장에 복수하러 달려오지 않는 포도원 주인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회개하고 당신의 뜻을 따라오기를 기다리시며 말해 줍니다. 그 심판은 아주 엄한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맡겨 주신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자들로부터 빼앗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때 그 가치는 상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최후의 심판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로써 예수께서는 명백히 자기 자신을 다른 예언자들의 계열 이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다 앞에 온 자들을 하느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이름으로 파견된 사람들이었으나 그러나 하느님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희생을 오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닥쳐올는지 예수님께서 분명히 알고 계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죽을 수밖에 없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응시하면서 한 발 한 발 그 길을 걸어 나아간 것입니다.






    2                 연중 제27주일   마태 21, 33-43(가)  나쁜 소작인들

                                                            김정진 신부


    중추절도 지난 요즈음 가을 날씨는 마냥 좋기만 하고 천고마비의 계절임을 피부로 한껏 느끼게 합니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풍작을 안겨다 주고 들에는 황금 물결치는 나락들이 고개를 숙여 농부들의 마음을 한결 흥겹게 해 주며 기쁨과 흐뭇함을 만끽해 줍니다. 이런 계절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인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써 더욱 실감 있게 백성들을 교훈 하십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한창 포도송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포도원을 보시고 곧 추수 시기가 올 것을 연상하십니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잘 만들어 놓고는 급한 용무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되어 포도원을 가난한 농부들에게 소작으로 내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포도 재배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첫 수확이 언제 있을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하인들 중의 하나를 소작인들에게 보내어 소작료를 받아 오게 하였습니다. 헌데 이들은 악한 소작인들인 지라 종들을 마구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까지도 하였습니다.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는 등 세 번씩이나 시도해 보았으나 허사였으므로 생각다 못해 마지막으로 하나  밖에 없는 귀염둥이 아들까지 보내 봅니다. 여기에 극히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 악덕 스럽기 짝이 없는 소작인들은 급기야 주인의 외아들까지도 잡아 때려죽이고 그 시체를 포도원 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에 관해서는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주인은 당장 그 소작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다른 이들에게 소작으로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이야기에 대한 청중의 반응에 보면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로 알고 예수를 잡으려 하였다>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이 비유의 대상은 당시의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과 또한 진실하지 못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네들은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외아들에 대해서도 악독한 소작인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와 백성들이 하느님이 보내신 구약의 예언자들을 죽이고 최후로 하느님은 포도원의 상속자인 당신 아들을 보냈으나 그도 역시 예언자와 다름없이 배척 당하여 살해되고 말았다고 간파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 있어 특히 포도원 주인의 태도에 관해서는 믿을 수 없을 만한 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느님은 한없이 인내롭고 관대하지만 언젠가는 정의의 칼을 휘두르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학살 사건으로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준엄한 벌이 내려졌습니다.

    소작인들이 멸망되었듯이,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기원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인들에게 점령되어 숱한 사람이 학살되고 포로가 되고 가옥과 재산은 전화로 모조리 잿더미로 변한 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포도원은 <다른 사람에게> 즉 예수님의 <종>인 사도들에게 내맡겼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셨을 적에 사도들을 마음에 두셨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신자 여러분! 심술궂고 나쁜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지 않은 거처럼 오늘의 세계에서도 하느님께 그 많고 많은 땅을 소작으로 해 먹으면서도 그 소출을 하나도 드리지 않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재능, 건강, 재물 그리고 생명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받고서도 안 받은 양 행동하느냐>(Ⅰ고린 4:7)고 신자들을 책망한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의 떠오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받았으니 만큼 하느님을 위하여 그분의 사업을 위하여 우리가 헌신하고 사랑과 봉사의 생활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지력과 의지를 다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영원토록 찬양이 되도록 우리의 재물과 생명을 아낌없이 바쳐 드릴 각오의 결심이 서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방에서 악의 도전을 받고 있는 우리는 풍부한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소출을 많이 바쳐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너그러 우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가 바칠 것을 바치고 드릴 것을 드린다면 하느님은 몇 갑절로 풍성히 갚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중한 시간을 기꺼이 바쳐야 하겠습니다. 미사참례와 조과 만과 묵주신공 시간은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마음과 정신도 기꺼이 바쳐야 하겠습니다. 자주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위하는 일을 곰곰이 연구합시다. 그리고 물질도 정성껏 바쳐야 하겠습니다. 쓸 것을 다 쓰고 할 것을 다한 다음에 남는 것을 교회에 내 놓을 생각을 버리고 아깝고 정성어린 것을 먼저 바치는 습성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한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멘.






    3                  연중 제27주일   마태 21, 33-43(가)  살신자(殺神者)

                                                    범영배 부제


    자신이 맡은 바 일에 충실하여 세상의 빚과 소금이 되자.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나에게 도움을 받거나, 혹은 남에게 도움을 주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도움을 준 사람의 의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로써, 장학금을 받는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합니다. 만일 열심히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것에 신경을 쓴다면, 장학금을 준 단체나 사람에게 배신한 것이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주인이 소작료를 지불하도록 하고 외국으로 떠난 주인을 배신하는 소작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포도원은 경영하는 주인을 하느님으로 표현한 비유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하느님은 포도원 주인입니다. 소작인은 유대인입니다. 포도원은 온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어 많은 은혜를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이 아닌 신을 섬기며 살았고, 하느님의 심부름을 왔던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유대인들의 배신을 보시면서도 기회를 주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 마저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다음 선발 때 탈락되어 장학금을 받지 못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시지만, 정의의 하느님이시기에 배신을 계속 보고 계시지만은 않으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아 살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서 은혜를 주신 분의 뜻을 어긴 일은 없었는지 반성해 봐야겠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는가를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공경하고, 당신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하느님보다는 황금을 더 숭상하고 있습니다.

    “돈이면 최고이다”라는 풍조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온갖 범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매일 신문의 사회면 기사에는 살인, 강도, 불량식품, 사기, 밀수 등의 범죄 사실들이 차지합니다. 이러한 세대 속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 양반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못 하는 게 바보이다.’라는 풍조 속에 너, 나 할 것 없이 부정과 야합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혼탁해지면 더욱 빛과 소금이 되어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정말 우리들은 빛과 소금이 되어 혼탁해진 이 사회를 정화시켜야 합니다.

    지금의 혼탁해진 사회는 남보다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과 자신의 안일만을 찾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좋습니다. 그러나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 않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러한 사회는 정화시킨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남을 내 몸같이 사랑한다면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남에게 베풀어준다면 봉사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봉사가 불우한 이웃이나 또는 활동하고 있는 직장, 학교, 가정 등의 곳에서 각자가 맡은 직무를 다함으로써 봉사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맡은 바 책임을 충실히 이행할 때 사랑은 점점 이웃에게 전파됩니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안일만을 찾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배신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이기주의적인 사람들만 모인 사회는 가장 비참하고 추한 암흑의 세계일 것입니다.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우리들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가쁨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웃과 사회에 기쁨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이것이 하느님만을 공경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가장 정확한 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조금만 보답을 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사회를 개탄하며 관망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진정한 사랑을 이웃에 베풀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죄악으로 더렵혀진 이 사회를 깨끗하게 하도록 살아갑시다.








    4                           연중 제27주일,   마태 21, 33-43 (가) “착각”

    최기산 신부


     착각의 연속 꿩잡는다고 나간 사냥꾼이 산속을 헤매다가 ꡐ부스럭ꡑ 하는 소리를 듣고 꿩인줄 알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의 비명소리였다. 이렇게 가끔 착각하여 사람잡는 사냥꾼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선거철만 되면 많은 이가 착각에 빠진다. 알랑대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과 박수소리에 현혹되어,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승산 없는 게임에 말려들어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마는 한심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신앙인 중에도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이웃을 원수처럼 미워하면서도 미사참례는 꼬박꼬박 하고, 이마에 십자가를 연신 긋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면서 ꡒ천국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천국엘 못 가면 누가 갈 수 있겠는가!ꡓ라고 허튼 소리를 외쳐댄다. 이들이야말로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때로는 봉사하러 왔다는 것을 잊은 채 봉사받으러 왔다는 착각 속에 살아갈 때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착각하는 것 중 근본적인 것은 ꡒ나는 죽지 않는다ꡓ는 것이다. 관을 잡고 울면서도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외에도 물질은 나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착각과 권력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이들이 있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착각 포도원 주인은 상당히 넓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혼자 직접 관리하지 못하고 나누어서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었다.


    추수때가 되면 도조를 받아오라고 일꾼들을 보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작인들이 착각에 빠져 한푼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둑놈의 심보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은 세를 받으러 간 종들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죽였다. 참으로 막가파가 하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한 사람은 때려줬다고 했는데 아마 야수같이 달려들어서 뼈다귀가 성한 데가 하나도 없도록 만들어 놨을 것이다. 그들의 심보로 보아 종이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매를 맞았다는 그 사람도 목숨은 붙어있으되 얼마 있다가 죽을 사람이었다.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종들을 보냈다.


    아마도 엄하게 경고하라고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다. ꡐ내 아들이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ꡑ 하며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마저 능지처참하였다. 당시 유대법으로는 포도원 주인이 아들 없이 죽으면 그 포도원은 소작인들에게 돌아간다고 돼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큰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부르르 떨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소작인들을 능지처참하였다. 착각의 결론은 비참한 죽음으로 돌아왔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 일부를 겨냥했다. 그들은 뽑힌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수없이 죽였고 급기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다. 그들의 말로는 뻔하였다.


    이젠 도조를 잘내는 사람들에게 소작이 돌아갔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다. 그들이 새로운 소작인들로 뽑힌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뽑혀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있다. 우리는 공기도, 물과 태양도 다받았음을 잊혀버리고 있다. 우리는 건강도 집도 재물도 가족도 다 받았다. 그 뿐인가! 우리는 아름다운 산하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더러 마음대로 누리며 살라고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조를 내야한다. 도조를 내는 이유는 이것들이 우리가 주인이 아님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작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조를 내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도조로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시간을 원하신다. 그분께 드리는 시간 말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시간! 또 우리는 재물도 능력껏 드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선물인 재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착각 속에서 헤매다가 돌아선 사람은 바로 바오로다. 그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착각에서 깨어났다.


    신앙인은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선물이다. 은총이다.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그것만 완성하면 안전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착각에 빠져있었다.


    하느님께서 서로 언어소통을 못하게 하자 착각은 드러났다. 착각에 빠진 사람들을 빗대어 공주병, 왕자병이라 한다. 우린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 병든자, 소외된 자들이 넘쳐나는데 우리는 울타리를 굳게 치고 안에서 장구치고 북치며 나홀로 이대로 그냥, 마냥 기쁘게만 하소서! 라고 노래하는 것은 아닌지!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데도 우린 공주․왕자병에서 허덕이는 것은 아닐까!







    5                    연중 제 27 주일   마태21,33-43(가) 이제는 셈을 바칠 때다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5,1~7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다) 

    제2독서 필립 4,6~9 (나에게서 배운 것을 실행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복 음 마태 21,33~43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세상만사 다 때가 있습니다.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계절적으로 수확의 철이면서 교회의 전례력으로 봤을 때는 지난 1년의 삶에 대해서 하느님께 셈을 바치는 때입니다.


    오늘 성서의 주제는 포도밭입니다.

    포도나무는 올리브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더불어 성서에 자주 등장되는 나무 중의 하나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포도밭이 널려 있기 때문에 성서에서는 포도원, 포도밭의 비유가 자주 등장합니다. 즉 포도밭은 이스라엘이요 그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포도밭인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정성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 열매를 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들포도가 열린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타락한 결과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고작 그런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정성이 담겼다면 좋은 열매가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신포도처럼 먹지 못하는 열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작품이요 또한 인간이 하느님께 바치는 셈이 됩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들도 지난 1년 동안 그렇게 살아 왔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늘 풍성했건만 우리 삶의 결실은 늘 부실했습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포도원의 시설을 잘 마련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도지를 주었건만 그들은 때가 되자 하느님께 도조를 바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이 보내신 종들과 그 아들을 죽이고 있다는 내용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늘 베푸시고 인간은 늘 그 사랑을 이용하고 배신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인간의 길의 차이입니다.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던 어떤 냉담자가 자기 본당 신부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존경하는 신부님, 저는 봄에는 일부러 주일에 씨뿌렸고 여름에는 주일에 들에 나가 있었으며 가을에는 또 주일에 곡식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열심히 성당에 나간 사람들보다 농사를 훨씬 잘 지었습니다.”


    신부님이 답장을 썼습니다.

    “형제의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선 계산서를 꼭 가을에만 청산하시지는 않습니다.” 냉담자는 신부님의 답장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습니다. 다만, 냉담을 해도 열심한 신자들보다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에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안 믿고 안 나오면 무엇인가 고장나서 벌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상을 받는 듯이 더 잘되는 경우를 우리는 봅니다. 그래서 갈등도 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느님의 계산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신앙은 역설적으로 진행될 때도 있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도 있듯이 열매는 없는 것이 꽃만 요란한 나무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그가 세속적으로 돈을 많이 벌고 성공을 했다 해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면 그것은 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포도나 들포도 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돈 1원이라도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신 사랑이 담겨 있을 때 바로 거기에 참된 부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재산 공개와 금융 실명제 실시를 통해서 우리는 권력을 쥔 자들과 돈 있는 자들의 속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장된 가면 속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지 모릅니다. 권력이나 부 안에서 자신들은 누구 보다 많은 수확을 거뒀다고 승리의 쾌재를 불렀을 테지만 하느님의 계산은 그렇게 우리 편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셈은 재산 공개 보다 열배, 백배 더 엄격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살았던 이들에게는 그 날이 기쁨과 참된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연중 마지막 시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기에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고 또한 우리의 죽음도 묵상하게 됩니다.


    누가 과연 하느님께 칭찬받는 종이 될 것이냐는 그 날 가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감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세속 사정에 현혹되거나 방황하지 말고 신앙의 올바른 길을 진실되게 걸어갑시다.






    6                 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 (가) 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


    사무처 홍보실


    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寓話)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오늘 마태오 복음은 예수께서 친히 발설하신 특례 비유인데 마태오(21,33-46)와 루가(20,9-19)는 마르코(12,1-12) 본문을 옮겨 쓰면서 우화적 요소를 더욱 강화했다.


    1. 복음의 줄거리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도지(賭地)로 내어주고 멀리 떠났다. 수확 철이 되자 주인은 종들을 보내어 도조(賭租)를 받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자기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 자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그를 죽여버렸다. 그때까지 참던 주인은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없애버리고 제때에 자기에게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내어준다.


    2. 복음의 메시지

    오늘 복음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 포도원은 이스라엘, 농부들은 지도자들, 종들은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선민(選民)으로 삼으시고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으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파견하여 회개의 삶을 촉구하셨지만 지도자들은 예언자들을 박해했다. 마침내 아들인 예수를 파견했더니 아예 죽여버렸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스라엘 선민과 그 지도자들을 없애버리고 이스라엘 백성 대신 그리스도 교회를 택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베푸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많은 결실을 맺도록 계속해서 기다리는 분이시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계속해서 거절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참아주지는 않으실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를 시험하면서 악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3. 우리의 이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제때에 내도록 요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그 뜻을 저버리고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고 마침내는 예수님마저 배척하였다. 오늘 복음은 이런 지도자들에게 내리는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라 하겠다.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도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외면하고 거부한다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처럼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끊임없이 인간 세상 안에 구현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과연 오늘날 교회는 이같은 사명을 잘 구현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7                   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 (가)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최인호 베드로/작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처음에 ‘엄마’와 ‘아빠’란 두 가지 말부터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을 창조주 주님이라고만 불렀지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불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구약성서에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가 몇 번 나옵니다. 다윗은 하느님을 “당신께서는 나의 아버지, 나의 하느님, 내 구원의 바위이십니다”(시편 89,26)라고 노래했고 이사야는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이사 64,7)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노래한 아버지는 하느님을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로 표현한 것이지 개인적으로 ‘아버지’란 직접적인 호칭으로 사용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첫번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뿐만 아니라 아기가 아빠를 부르듯 자연스럽게 ‘아빠’(abba)란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주님께서 게쎄마니에서 하느님에게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주소서”(마르 14,36)라고 기도했을 때 그 중 ‘아버지, 나의 아버지’의 첫번째 호칭이 ‘abba’로 표현된 것을 보면 주님께서 하느님을 ‘아빠,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신 증거라고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도 주님께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

    신 결정적인 증거는 사도 바오로가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갈라 4,6).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로마 8,15)라고 했던 것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만든 다음 소작인에게 주고 멀리 떠나갔다. 포도철이 되자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냈으나 소작인들이 이들을 죽였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는데 소작인들은 ‘저자는 상속자다. 저자를 죽이고 우리가 포도원을 가로채자’ 하면서 그를 끌어내어 죽였다”(마태 21,33-39).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될 것인가를 암시함으로써 하느님과 자신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복음을 통해서 170군데나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문 첫머리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느님이 이제 우리에게 ‘아빠’가 되셨음을 정식으로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는 이제 하 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느님은 나의 아빠이 며, 나는 그분의 친자(親子)이며, 예수는 나의 형님인 것입니다.






    8                        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가)   착각


       착각의 연속


      꿩 잡는다고 나간 사냥꾼이 산 속을 헤매다가 ‘부스럭’ 하는 소리를 듣고 꿩인줄 알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리는 사람의 비명소리였다. 이렇게 가끔 착각하여 사람잡는 사냥꾼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선거철만 되면 많은 이가 착각에 빠진다. 알랑대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과 박수소리에 현혹되어,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승산 없는 게임에 말려들어 결국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마는 한심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신앙인 중에도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이웃을 원수처럼 미워하면서도 미사참례는 꼬박꼬박 하고, 이마에 십자가를 연신 긋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면서 “천국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천국엘 못 가면 누가 갈 수 있겠는가!”라고 허튼 소리를 외쳐댄다. 이들이야말로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때로는 봉사하러 왔다는 것을 잊은 채, 봉사 받으러 왔다는 착각 속에 살아갈 때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착각하는 것 중 근본적인 것은 “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을 잡고 울면서도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 외에도 물질은 나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착각과, 권력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이들이 있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착각


      포도원 주인은 상당히 넓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혼자 직접 관리하지 못하고 나누어서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주었다. 추수 때가 되면 도조를 받아오라고 일꾼들을 보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작인들이 착각에 빠져 한푼도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둑놈의 심보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은 세를 받으러 간 종들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죽였다. 참으로 막가파가 하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한 사람은 때려줬다고 했는데 아마 야수같이 달려들어서 뼈다귀가 성한 데가 하나도 없도륵 만들어 놨을 것이다. 그들의 심보로 보아 종이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매를 맞았다는 그 사람도 목숨은 붙어있으되, 얼마 있다가 죽을 사람이었다.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종들을 보냈다. 아마도 엄하게 경고하라고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다. ‘내 아들이야 차마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 하며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들마저 능지처참하였다.


      당시 유대법으로는 포도원 주인이, 아들 없이 죽으면 그 포도원은 소작인들에게 돌아간다고 돼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큰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부르르 떨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소작인들을 능지처참하였다. 착각의 결론은 비참한 죽음으로 돌아왔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 일부를 겨냥했다. 그들은 뽑힌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수없이 죽였고, 급기야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다. 그들의 말로는 뻔하였다.


      이젠 도조를 잘 내는 사람들에게 소작이 돌아갔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다. 그들이 새로운 소작인들로 뽑힌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뽑혀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있다. 우리는 공기도, 물과 태양도, 다 받았음을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건강도 집도, 재물도 가족도 다 받았다. 그 뿐인가! 우리는 아름다운 산하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더러 마음대로 누리며 살라고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조를 내야한다. 도조를 내는 이유는 이것들이 우리가 주인이 아님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작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조를 내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도조로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시간을 원하신다. 그분께 드리는 시간 말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시간! 또 우리는 재물도 능력껏 드려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선물인 재물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착각 속에서 헤매다가 돌아선 사람은 바로 바오로다. 그는 크리스천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다음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착각에서 깨어났다. 신앙인은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선물이다. 은총이다.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그것만 완성하면 안전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들은 착각에 빠져있었다. 하느님께서 서로 언어소통을 못하게 하자 착각은 드러났다.


      착각에 빠진 사람들을 빗대어 공주병, 왕자병이라 한다. 우린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잘 살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이 넘쳐나는데 우리는 울타리를 굳게 치고, 안에서 장구 치고 북 치며, 나 홀로 이대로 그냥, 마냥 기쁘게만 하소서! 라고 노래하는 것은 아닌지!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데도 우린 공주 병, 왕자 병에서 허덕이는 것은 아닐까!






    9                 연중 제27주일   마태 21,33-43(가)   군인주일을 보내며


     오래 전 피정 중 선배 신부님들과 담소를 하던 중, 들은 이야기이다. 그 신부님들이 보좌신부 시절이던 60년대 초에 휴가 때를 이용해서 군종신부로 나가있던 동창신부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신자에 의해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안내되었다. 그 집은 사제관으로 쓰는 집이었다. 동창신부가 없어 마루에 앉아 기다렸는데, 가재도구도 별로 없어 보여 고생을 하며 지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저녁 무렵 돌아온 동창 군종신부는 반갑게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직접 부엌으로 들어가 쌀을 씻어 밥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반찬이 없어 미안하다” 하고는 겸연쩍게 씩 웃는 것이었다. 동창들은 밤새는지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새벽녁에 잠을 자는데, 이불도 변변치 못해서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다음날 아쉽게 버스 터미널 에서 이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 군종신부가 어딘가 갔다오더니 차 창문을 두드렸다.「가면서 심심할 때 먹어!」 하면서 음료수 몇 개와 삶은 달걀을 건네 주었다. 그 동창신부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때의 동창 군종신부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얼마 후 전방시찰 중 교통사고로 그 신부님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시는 선배 신부님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사정은 나아졌다고 해도 군종신부들의 고생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군인주일의 의미


      오늘은 군인주일이다. 군인주일이란 군대에 있는 군인 신자들과 군 사목을 하는 군종사제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군대는 대한민국의 청년이면 누구나 한 번은 거쳐야 한다. 특히 젊은 시절,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 군대는,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시기이다. 편안한 집을 떠나, 처음으로 경험하는 낯선 생활 속에서 보통은 정신과 육체가 지치고 힘들어진다. 자신의 삶과 가족,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눈을 뜨게되는 시기이다.


      엄격한 규율과 절도 있는 생활 속에서도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종교이다.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은 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군대에 있는 우리의 아들과 형제들을 위해 오늘만큼은 모든

    신자들이 한 공동체로서, 과연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생각해보자. 방황하기 쉬운 젊은 군인 신자들을 사목하는 군종사제들 역시 일반 본당과 비교하면 쉬운 조건이 아니다. 군종사제들은 혼자서 여러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사제이면서, 때로는 수도자, 사무장, 관리인의 역할도 해야될 때가 있다.


      군종사제는 홀로 모든 것을 준비하며, 군인 신자들을 직접 찾아가 미사와 여러 성사도 집전해야 한다. 군종사제에겐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특히 타종교에 비교한다면 더 그렇다. 여러 가지 역경과 어려움을 딛고 묵묵히 일하고 있는 군종사제들을 위해서 오늘만큼은 특별히 힘껏 격려하는 박수를 보내자. 그리고 간접적이나마 군종사제들이 교회의 나눔과 일치의 기쁨을 누리며 일할 수 있도록 기도와 지원을 아끼지 말자!


          인내하시는 하느님

      

      오늘 복음의 포도원의 비유에서 보면, 세상의 죄인들은 주님의 말씀과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까지 박해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인내와 관용이 두드러진다. 인간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로 찾아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자신의 아들까지도 기꺼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바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하느님이 보내신 일꾼들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여러 형태의 예언자를 통해서, 때로는 자연과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고약한 소작인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되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 주위에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로서 주님의 인내를 닮도록 해야한다.


      또한 우리 자신이, 세상과 이웃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박해를 각오한 예언자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 user#0 님의 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자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1. 말씀읽기: 마태21,33-43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마르 12,1-12 ; 루카 20,9-19)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의를 품고 있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예언자들이며, 아들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포도밭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하느님을 경배하지 않고), 도조를 내기 싫어하는(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을 싫어하는) 유다인들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아들의 순명과 수난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의 불충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소작인인지를…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어떤 밭 임자는 바로 하느님이시고, 포도밭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인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라는 크나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제 알아서 하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책임은 내가져야 합니다.

    “확”은 현재 팔레스티나의 밭에서는 볼 수 없으나, 옛날의 것으로써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는 포도송이를 짓이기는 평평한 돌에 구멍을 낸 것이며 그 곳에서 포도즙이 나오고, 그 밑에 그릇을 놓아 흘러나오는 포도즙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망대”는 언덕위에 석조로 만든 집으로 지붕은 밀짚으로 덮었고 기기에 밭지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지주는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고 소작인에게 밭을 맡겼습니다. 소작의 계약은 각 지방의 관습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소작인은 수확의 3분의 1, 혹은 반, 혹은 4분의 1을 지주에게 바쳤습니다. 지불은 거둔 농작물로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포도 철은 바로 결실을 맺는 시기이고, 주인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시기입니다. 주인은 당연히 받을 권한이 있고, 소작인들은 당연히 소작료를 바칠 의무가 있습니다. 종들은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차례차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진 예언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도조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억만금”을 바치라는 말씀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적어도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감사하고, 그것을 혼자만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쳐야 할 도조는 바로 그것입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 말씀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도조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했는데 사람들이 그 도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보내어 도조(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했는데 오히려 종(예언자들)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아들)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소작인들이 종에 대한 태도는 상식 밖의 일입니다. 이 세상에 지주의 종을 이처럼 잔인하게 다룰 소작인은 없습니다(예전에 공산당들이 그랬던가요?). 그런데 종들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이라면 복수의 수단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들이 이스라엘 예언자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주인이 복수를 안 하셨는지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기회를 주셨습니다. 돌아오기만을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작인들(나)이 예언자들을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들(예언자들)도 참 불쌍했던 것 같습니다. 박해를 받을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니 가서 전하는 그들의 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어떻습니까? 신자들한테 가기 귀찮아서 주저앉아 있고, 누가 성당에 나오지 않아도 관심도 없고…, 그래도 돌로 쳐 죽이지는 않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 종(예언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힘내서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돌 맞을 짓을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본당 신자들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금방 드러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지, 신자들을 위해서 하는지, 열심히 하는지, 대충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이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아들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종들의 운명을 알고 있는 주인은 아들까지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에게는 자기 아들의 목숨보다도 밭의 도조가 더 중요했을까요? 아들보다도 밭에다 더 애정을 쏟았던 것일까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바라본다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주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도 알 수 있습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라고 저희끼리 모의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붙잡아 죽여 버렸습니다.

    빛을 싫어하는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만 들어가려 하고, 빛을 꺼 버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유다인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제 내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예”하고 응답하고 축복의 길을 걷던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막가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 말씀은 “그러니 하느님께서 오시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지 않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인 나 까지도 죽이려하고, 마침내 죽이는 너희를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말씀으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백성의 지도자들이 알아 차려야 하는데, 그들은 눈과 귀를 모두 막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껴야 하는데, 그리고 지금 눈앞에 계신 분이 바로 아드님이심을 알아 차려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포도밭 주인이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실”힘을 가지신 하느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이 악한 소작인들이 이스라엘의 포도밭을 짓밟은 로마인이라고 오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것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를 심판한 것입니다. 이 백성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을까요? “바로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데…”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버려진 돌이란 머릿돌이 될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이 돌은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새로운 건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습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심판하실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돌이기도 합니다. 집짓는 자들(백성의 지도자들과 불신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버린 돌),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버린 돌)이 하느님 나라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볼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버렸는데 알고 보니 보석중의 보석이여서 정말 귀하게 쓰인다면 얼마나 배가 아프겠습니까? 필요 없는 땅이라고 버렸는데 갑자가 노른자 땅이 되었다면 얼마나 속이 아프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그런 일이 닥칠 것입니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살인자 소작인들은 벌을 받게 되고, 포도원은 다른 충실한 소작인의 손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살인자 소작인들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그 지도자인 바리사이파 사람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있는 수확이란 선택하신 백성에게 기대하고 있던 영광입니다. 보낸 종들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내신 아들은 바로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외아들을 죽음의 땅으로 보내신 그 주인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 이십니다. 슬픈 사명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그 슬픈 사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고 말씀을 전하셨지만 결국 소작인들은(백성의 지도자들)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아버지는 배은망덕한 소작인들을 벌하시고 포도원을 빼앗으셨습니다. 기원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함락되고 맙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 돌(예수님) 밑에 깔리는 사람(죄인으로 단정 받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지옥에 떨어져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3.나눔 및 묵상

    ① 내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소작료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는 하느님께 소작료를 잘 내고 있습니까?


    ② 소작료(찬미와 감사와 영광)를 충실히 내고 있는 형제 자매를 칭찬해 보며, 그의 신앙적인 삶을 칭찬해 봅시다.


  4. user#0 님의 말:

     

    군인주일 강론 모음

    죽음을 부르는 욕심

    김영춘 신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는 끔찍한 폭력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포도밭 임자가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작인들로부터 소출을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소출을 내기는커녕 종들을 붙잡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에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합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해, 상속자인 아들마저 죽입니다.


    비유에서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소작인들의 욕심은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죽이게 합니다. 욕심이 죽음을 불러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소작인들의 욕심이 있었습니다. 뱀의 유혹에 빠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게 된 것도 그들의 욕심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들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그들의 욕심이 인류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하고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합니다.


    창세기에 이어 나오는 카인의 이야기도 욕심이 불러온 비극입니다. 자신의 제물은 외면당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자, 카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카인의 시기와 욕심이 죽음을 불렀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카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지닌 욕심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피가 우리에게도 흐릅니다.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면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배반하게 되고, 카인처럼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혈육마저도 죽이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비유에 나오는 포도밭을 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묵상해 봅니다. 많은 사람이 나의 포도밭에, 곧 나의 삶 안에 들어옵니다. 피로 맺어진 가족, 가까운 이웃, 성당의 형제자매, 직장 동료, 그리고 내가 발길을 옮기는 삶의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주인이 포도밭에 보낸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터전에 보낸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포도밭 소작인들처럼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들을 폭력과 죽음으로 맞아들이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삶의 포도밭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환대하기보다는 그들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들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하고, 칭찬하기보다 헐뜯고, 인정하기보다 시기하고, 자랑으로 삼기보다 무시하기도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내치는 많은 경우는 나 자신만의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힐 때입니다. 그리하여 포도밭에 침범하는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무장된 욕망의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고,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죽음과 같은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비유에서처럼 하느님께서는 나의 삶의 포도밭에 당신의 종들과 아들을 보내십니다.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포도밭을 찾아온 이들을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의 삶을 나 자신의 사리사욕으로 채우려 하면, 나의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이들을 해치게 됩니다. 내 인생의 터전에 찾아오는 이들을 나의 욕심에 사로잡혀 배척하면 나의 삶이 처참해지지만,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으로 환대하여 맞아들이면 나의 삶이 구원으로 이끌어집니다.

    삶의 포도밭 

     김현신 신부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각자가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삶의 포도밭을 도지로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포도밭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포도밭에서 풍성한 결실을 거두려면 문제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삶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자세이다.


    신앙인이란 주인, 곧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밭’을 받아 풍성한 결실을 거두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소작인’에 불과하다.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곧 자기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생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제때에 도조를 바쳐야 할, 다시 말해 언젠가 죽어야 할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소중하고, 땀을 흘려 가꾸어야 할 하느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세는 삶을 하느님의 선물, 즉 ‘은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하느님의 은혜를 저버릴 때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듯,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사 5,4)라는 책망과 심판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신앙인으로서, 도조를 바쳐야 할 소작인으로서의 분수를 잊고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 안에서는 하느님과 형제들을 보고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 21,35)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삶’은 그 자체를 소유함으로써가 아니라, 이웃 형제와 ‘나눔’으로써 비로소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 형제들과 진실한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받은 삶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중한 삶의 포도원에서 풍성한 기쁨과 결실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삶의 결실을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형제 여러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중략)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필리 4,6-9).


    비록 현재의 삶이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울지라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로써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그 소중한 삶을 이웃과 나누도록 하자.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듯이, 하느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그분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시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우리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드러내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밭을 맡기시고 사랑이라는 소출을 끊임없이 원하고 계십니다. 

      홍성훈 신부 

    오늘 연중 제27주일 특별히 군인주일을 맞아 서두에 군대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합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자기가 군생활했던 곳이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군대말로 ‘빡세다’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저역시 마찬가지로 그리 편안하지 않은 곳인 강원도 양구 21사단에서 일명 ‘땅개’라고 불리는 보병생활을 하다보니 여러 추억거리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군생활의 대부분을 대암산이라는 산꼭대기에서 지내다 보니 종교활동을 나가기란 무척이나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대후 약6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배차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당에 가볼수가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를 참여하던 생활에서 본의아니게 6개월이라는 냉담생활을 하며 미사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매일 저녁 야간 근무에 나서면서 묵주도 챙겨갈 수 없어 손가락으로 새며 기도하던 그 시간에 한쪽귀는 고참의 찬란했던 사회생활을 듣기위해 열어두면서도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던 한가지 기도는 “예수님, 당신의 살과 피를 한번만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6개월간의 냉담기간, 그 시간은 저에게 있어 포도밭을 놓아두고 소출을 기다리며 잠시 떠나간 주인을 그리워 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잠시뿐, 격오지였던 산에서 내려와 주둔지로 부대이동을 하여 사단 성당에 수월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도 흘러 오대장성이라는 병장이 되어 내몸조차 내힘이 아닌 후임병들의 힘을 빌어가며 그 어떤 때보다 편하게 지내다 보니 포도밭주인에 대한 그리움은 온데간데 없이 종교활동 시간에 시작되는 주말 아침드라마의 유혹에 정신을 팔고, 달콤한 한숨의 낮잠에 육체를 팔고, PX 전자렌지에 돌아가고 있는 냉동만두에 시선을 빼앗기며 그렇게 포도밭주인이 보내온 종들을 죽이고 마침내 그 아들까지 내 마음속에서 죽이는 진정한 냉담을 하며 한주 한주를 보냈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 한달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박해시대 목숨을 담보로 하고 수십리길을 헤쳐가며 신앙생활을 하였던 순교자들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편하고 풍요롭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가’라는 묵상을 하면서 지난 군생활동안의 제 모습에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밭을 맡기시고 사랑이라는 소출을 끊임없이 원하고 계시고 이에 당신의 수많은 종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마침내 당신의 소중한 아들마저 보내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속을 온갖 유혹과 욕심들로 가득채워 보내온 종들뿐만 아니라 그 아들마저 죽이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포도밭을 맡기듯 당신의 말씀을 맡겨주신 주님을 잊고, 수확의 기쁨을 희망하며 포도밭주인을 그리워하던 세례때의 열정을 잊고 욕심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종들을 죽이고 가난하고 아픈 병자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까지 외면하고 죽이며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다시한번 되돌아보는 이번 한주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아멘. 

     소출을 바라시는 하느님 

      문화미디어국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나서, 죽을 때 생전에 누리고 가졌던 것 중에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더 나아가서 모든 생명체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 중에서 사람만이 이 진리를 깨달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유일하게 그 진리를 망각하고 또 애써 외면하면서까지 진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무는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다음, 계절이 바뀌면 열매와 잎을 떨구며 가진 것들을 버립니다. 동물들은 자신들이 먹어야 할 만큼만, 살아남기 위한 만큼만 먹고 보관합니다.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먹고, 모으고,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어놓기도 힘들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관리를 그들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관리를 맡은 소작농의 신분임을 망각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고 했던 것이고, 맡겨진 것에 대한 주인의 소출 요구를 무시하고 소출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 지위, 권한, 신분 등을 자신을 배불리는 데에만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맡겨두셨던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고,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하느님 나라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방법,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밭의 주인인 하느님께 “소출”을 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나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에서부터 재물과 재능까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밭”입니다. 그것을 나만 즐겁게 하고, 나를 배불리는 데에만 사용한다면 우리 역시도 하느님 나라를 빼앗길 것입니다.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빌린다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필요 없어져서 주인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의 주인도, 하느님 나라의 주인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까지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이라는 밭에서 포도나무로,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주인이고 우리는 소작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소출을 거두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빌려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군인주일 담화문 

      이기헌 주교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사도 바오로 탄생 2000주년의 은혜로운 해를 보내면서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전후방 각지에서 조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수고하고 있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 장병들을 기억하며 이들을 돌보고 있는 군종 사제들의 사목활동을 위해 아낌없는 기도와 후원을 보내는 군인 주일입니다. 해마다 10월 첫째 주일을 군인 주일로 지내는 것이 벌써 마흔한 번째를 맞이합니다.

    그동안 군사목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군인들과 또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군종 사제들과 함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금년은 우리 군이 창설된 지 60년이 되는 회갑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창설된 우리 군은 우리 정부의 성장과 함께 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생존의 위험 속에서 늘 버팀목이 되어왔습니다.


    정부수립 당시 세계 속에서 그 존재가 미미하였던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 10위를 자랑하는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지난 8월 베이징에서 있었던 올림픽에서는 세계 강대국들을 제치고 금메달 13개를 획득하여 세계 7위라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민족이 얼마나 강하고 우수한 민족인가를 입증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루는 데 함께 하며 튼튼한 보루가 되어왔던 군이 이제 회갑이라는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60년 회갑을 맞이하기까지 군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최근 여러 해에 걸쳐 지속되었던 이념의 대립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여, 군의 위치가 많이 흔들려졌고 약해지기도 하였으며 그 결과 군의 기강이 많이 해이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60주년인 회갑은 육십갑자(六十甲子)의 한 순간이 끝나고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점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군은 더욱 새로워져야 하고 새로운 변혁을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최근 모 방송국에서 정부수립 60주년을 맞아 국민들에게 가장 신뢰받는 집단을 묻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 군대가 1위(57.7%)를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조사를 실시한 방송국에서는 “5.16쿠데타로 18년, 12.12쿠데타로 13년, 국민들에게 독재와 억압의 상징이었던 군대가 이제는 국민에게 가장 신뢰도 높은 집단이 되었다”라고 논평하였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전 세계 첫 이데올로기 전쟁인 ‘6.25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우리 군은 국난 극복의 최일선에서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는 데 온몸을 던지고 불살랐습니다. 또한 나라가 연이어 위기의 국면에 이를 때마다, 그것이 제2의 연평해전이건 대규모 수해나 산불, 그리고 유통대란 등 각종 재난이건 여러 국가적 환란 속에서도 우리 군은 국민 곁에서 ‘국민의 군대’로서 헌신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다시금 국민의 가장 깊은 신뢰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우리 군은 또 다른 60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새 정부는 “정예화된 선진 강군 육성”을 국방 비전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국민과 함께 하는 국민의 군대를 지향하겠다고 강조하였으며, 군 안에서도 강한 군대가 되려는 변화의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전보다 더 강도 높은 훈련과 교육을 받고 있는 군인들에는 마음의 휴식과 위안이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서 군종 사제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군종 사제들이야 말로 쉼이 필요한 군인들에게 참된 휴식을 주고 따뜻한 위로와 함께 힘을 불어 넣어주는 사람들이며 이들에게 참된 마음의 휴식처는 군 성당입니다.

    변화와 혁신이 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때, 우리 군인 신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모범을 보이고 스스로 변화에 앞장을 서야하겠으며 군을 지켜보는 전국의 모든 형제․자매들은 군인들을 위하여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시다시피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바오로 탄생 2000년을 맞이하여 바오로의 해를 선포하셨는데, 바오로해의 취지도 신자들 신앙생활의 변화와 혁신을 바오로 사도 안에서 찾아보자는 데 있습니다.


    바오로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를 믿는 이들을 열성적으로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갈라 1,13-14). 그러나 바오로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주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는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던 불굴의 투사였습니다. 유다 지방의 작은 믿음의 공동체로 시작했던 그리스도교는 바오로 사도의 노력으로 로마제국 전체로 전파되었으니, 그의 회심과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변화와 혁신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확신에 찬 바오로는 “형제 여러분, 다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필리 3.17)라고 말합니다. 열정과 헌신이 늘 몸에 배어 살아가는 군인 신자들이야말로 바오로 사도를 열정적으로 본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군은 ‘강한 전사’. ‘강한 군대’가 되고자 쉼 없이 파이트 투나잇(Fight Tonight)을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밤 당장 전투가 시작되더라도 승리할 수 있는 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와 혁신’이 이렇게 강함을 위해서라면 이 강함의 추구는 군의 정체성의 추구가 아니겠습니까, 이를 위해 끊임없이 훈련하고 무장하는 군이지만 국민의 무한한 지지와 신뢰가 없다면 결코 글로벌(Global) 강군 육성은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말씀 위에 굳건해 지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욱 담대하게 선포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마음 돌리려는 끊임없는 회심과 주어진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이들의 정체성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라고 강조합니다.


    군인 주일은 보편교회 안에서 군인들과 일반 신자, 군인신자들과 교회, 군종 사제와 모든 교회가 서로서로 일치를 이루고 기도와 격려의 통교를 이루는 주일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군인들에게 격려를 보내며 기도하고, 군인신자들은 신자로서의 삶을 다짐하고, 교회 공동체는 군복음화를 위해 애쓰는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와 물질적인 도움으로 격려를 보내는 날입니다.


    그동안 여러분 모두의 따뜻한 격려와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금년 한해 전국 곳곳에서 연무대 육군 훈련소 성전 건립을 위해 기도해주시고 도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기도와 격려를 부탁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언제나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기 기원합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이럴 수가 있는가? 

      정지용 신부 

    참 희한한 일이다. 밭의 주인이 포도밭을 만들어 놓고, 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밭을 맡기고 먼 곳으로 떠났다. 시간이 지나 포도를 수확할 때가 가까이 되자 주인은 종을 보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이럴 수가 있는 가? 소작인들은 주인의 몫을 보내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리하지 않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종들을 다시 보내도 마찬가지, 심지어 주인이 아들을 보내자 ‘저자가 상속자다.’하며 그 아들을 죽이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겠다고 한다.

    이런 배은망덕한 일이 어디 있나. 밭을 만들고 일자리를 주었더니, 감사해 하며 소출의 일부를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밭을 차지하겠다고 나서다니….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이럴 수가 있는가?


    대학교 합격자 발표가 나오던 시기였다. 수험생 자녀를 둔 어머니와 몇몇 자매님들이 모인 자리에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자리에 있던 수험생 어머니가 바로 그날 자신의 자녀가 대학에 합격했다며 기뻐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자매님이 농담조로, “그러면 어서 성당에 가서 감사헌금 내야겠네.”하고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들은 수험생 어머니는 웃으며 며칠 전에 이미 봉헌했다고 대답했다.

    수험생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순간 생각에 잠겼다. ‘아, 이런 분도 계시는구나? 이런 방법도 있구나? 다 끝나고, 모두 얻은 후에 감사드리는 것인 줄만 알았는데, 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리고, 결과를 보지 않고도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이구나!’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자신들에게 밭을 마련해 주고 일할 수 있게 해 준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는 못할망정, 주인의 몫을 내어주어야 함이 당연한 일임에도 더 큰 욕심을 부리고 있다. 오히려 욕심이 지나쳐 주인의 종들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의 결말은 불 보듯 뻔하다. 그동안 감사할 줄 모른 채 누려온 것들을 빼앗기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법이 참으로 다름을 느낀다. 누구는 더 가지려고 하는 인색한 삶을 살고, 누구는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기쁘게 지낸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실천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감사하며 살면 더 감사할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에게 감사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행복한 삶이 다가옴을 기억하자.

    신고합니다! 

      김기현 신부 

    “백-마! 신고합니다!”


    “대위 김기현은 2005년 7월 1일부로 삼사관 학교에서 제 9 보병 사단으로 전입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백-마!”


    지금부터 정확히 3년 3개월 전의 이야기입니다. 삼사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9사단으로 발령을 받으며 사단장에게 신고를 했습니다. 계급은 대위였습니다. 군대에 처음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시금 모든 것이 낯선 그때의 기분이란?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마음은 그야말로 어리버리한 이등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별 두개인 사단장은 스테파노라는 신자였습니다. 참 기분이 묘했습니다. 그래도 군대에서 해야 할 것(신고)은 해야 했습니다. 갓 전입온 신입 장교니 기합이 든 척이라도… 지금은 말년 차.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지나간 군생활을 돌아봅니다.


    처음이란 낯설고 어렵습니다.


    군에서 군종신부들은 병사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많이 합니다. 인성교육, 자살예방교육, 분노조절교육 등등 결론은 주어진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잘 해서 건강하게 전역하란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자주 병사들에게 군생활은 원래 어려운 것이니 당황하지 말라고 일깨워 줍니다. “너희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은 분명 어려운 삶이다. 왜냐하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이 처음 경험되어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다.” 학력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처음 군에 들어온 신병들은 그야말로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모든 것들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아마 죽을 맛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가족이 보고 싶고, 친구가 보고 싶고, 애인이 절실히 그리워집니다. 그 그리움 속에서 그들은 소중함에 대해 알고, 남자가 되어갑니다.


    신부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군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삶에서 조금 더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만한 곳으로 성당을 찾습니다. 그래서 유독 성당에는 이등병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중에 용기 있는 친구나, 밖에서 신앙생활 나름(?) 열심히 했다는 친구들은 저에게 와서 말을 겁니다. “신부님 저 누구누구입니다.” “아! 그래. 어디서 왔냐?” 이것저것 물어보고, 혹 제가 아는 곳이면 아는 체를 한껏 합니다. “신부님! 열심히 나오겠습니다!” “그래, 기도 열심히 하고 성당에도 열심히 나와라!” 낯선 곳에서 ‘신부’라는 호칭을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들에게는 위안이 될 것입니다. 육군 대위는 밖에서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신부는 그래도 뭔가 편하고, 뭐하나 줄 것 같고, 익숙한 모양입니다. 신부를 편안하게 생각해줘서 다행입니다.


    독에 물을 붓습니다.


    군생활이 익숙해지고 계급이 올라가면 성당에도 뜸해집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나오겠다는 이등병의 말을 믿어 줍니다. 쵸코파이가 몽쉘통통으로 바뀌어도, 크림빵이 피자빵으로 바뀌어도, 국수가 자장면으로 바뀐다 해도, 그들에게 달라지는 것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더 비싼 것, 좋은 것을 먹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먼 훗날 그들은 잠시나마 그때 성당에서 먹었던 간식은 정말 맛있었다고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좋을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기다림을 기억하며 오늘도 물을 붓습니다.


    무사히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앞둔 친구들이 인사를 합니다. 짧지 않은 군생활에 힘든 일도 많았지만, 성당에서의 일들이 힘이 되었다며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볼 때면 마음 한 켠이 짠해집니다. 대견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앞으로 겪게 될 세상에서의 어려움들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 이겨 낼 것이고, 또한 이곳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과 신앙의 경험이 미약하나마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힘을 주시듯이, 그들에게 그분의 사랑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마태 21,33-43. 이사 5,1-7. 필립 4,6-9.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유대교 지도자들을 포도밭 소작인에 비유하였습니다. 포도밭이라는 말은 오늘의 제1독서인 이사야서가 이스라엘을 지칭하여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은 좋은 열매를 생산하지 못하는 포도밭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이 ‘포도밭을 일구어,..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는 말은 이사야서(5,2)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소작인들이 그 아들을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는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밖에서 처형당하셨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초기 신앙인들의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에서 소작인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 밭의 임자이신 하느님의 아들, 곧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끝에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라는 시편(118,22-23)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소출을 잘 내는 백성이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끝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분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중심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한 그리스도 신앙입니다(1고린 3,11 참조). 오늘 복음은 포도밭 주인에게 악하게 행동한 소작인들과 같이, 하느님에게 충실하지 못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잃고,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는 자각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즉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유대교와 결별한 것은 점차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고 믿는 신앙인들을 유대교 지도자들은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을 회상하면서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새롭게 해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성전 제사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유대교 지도자들과 견해를 달리하였습니다. 기원 후 66년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거부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4년 동안 항쟁하다가 70년에 패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마르 13,2) 파괴된 성전과 더불어 폐허로 변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참상을 보면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결과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새 이스라엘이라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서 말씀하고 일하십니다. 예수님도 역사 안에 태어나서 역사 안에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역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입니다. 삶의 시대적 현상을 외면하고 과거에 발생한 원칙이나 제도를 절대시하면, 역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한 사명을 자각한 것은 동족이 이집트에서 학대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 사실을 시대적 징표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선하신”(출애 33,19) 분이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에게 귀 기울인 결과, 모세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대역사를 성취하였습니다.


    유대교 사회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외면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한다고 축복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말씀 혹은 그분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도 시대의 징표를 읽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옛날 것만 옳다고 고집하면, 역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시대를 위해 구원으로 들리는 하느님에 대한 말이라야 합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말이 유럽 중세에 발생하였습니다. 그 사회는 그리스도교 문화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교회 밖에 있다는 사실은 문화적 혜택을 받지도 못하고 사람노릇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같은 말만 반복하면, 타문화 혹은 타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다고 매도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다(多)문화, 다종교 사회입니다. 교회 밖에도 문화적, 영성적 깊이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말을 반복하면, 하느님을 왜곡하는 독선적인 말이 되고,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배타심과 미움을 배설하는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짐진 여러 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것만 고집하던 율사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 어깨에 지우고 자신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 대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고 비난하셨습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을 외면하고, 율법과 제사에 대한 과거의 해석에 집착하고 그것만을 고집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신분 따라 인간의 실효성이 정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유로이 다양한 정보를 받아 소신껏 실천하며 자기의 존엄성을 실현합니다. 오늘 경직된 사회 제도와 조직은 사람들의 실효성을 떨어트립니다. 기업들은 계장, 과장, 국장이라는 경직된 직위 중심보다는 해결해야 하는 사안 별로 팀을 만들어 팀장을 중심으로 효율성 높은 경영을 합니다. 인간의 창의력이 인간의 존엄성으로 보이는 오늘입니다. 오늘은 명령하는 높은 사람 있고, 복종하는 아랫것들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과거 신앙의 유산을 현대인을 위해 새롭게 해석하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남녀의 성차별이 없는 오늘입니다. 과거 남성만 허용되던 분야에도 여성들이 활발히 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성은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교회의 교계제도입니다. 이혼이 급증하는 오늘의 사회입니다. 이혼의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교회라야 합니다.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함께 토의하고 결정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자비로우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실효성 있게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세상을 위해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소출을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

    한 사람을 위한 미사 

      김종섭 신부 

    얼마 전 주일 교중 미사에 성체분배를 하는데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주세요.’ 하는 표정으로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얼굴에 잔뜩 미소를 지으며 ‘그래~ 안녕~ 넌 본명이 뭐니?’ 라고 물으니 ‘일병! 박 oo’ 라고 대답합니다. ‘멋진 이름이구나. 그런데 천주교 신자는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성체라고 하는 것인데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아야만 받아먹을 수 있는거야. 미안하지만 그냥 들어가야 하겠구나.’ 그리고 그 미사 후에 그 병사는 예비신자 등록을 하였습니다. 8월 말에 한 명, 9월에 한 명의 병사가 예비신자 교리를 받겠다고 등록했습니다. 수 백 명, 수 천 명은 아니었지만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예비신자 신청서 한 장을 보고 이렇게도 기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저는 공군 1 전투비행단에서 사목 중인 공군 군종사제입니다. 육군과는 다르게 공군은 참으로 병사 한 명이 귀합니다. 병 생활이 편하고 외박이 잦기도 하겠거니와 요즘 젊은이들에게 ‘신앙’ 이 그다지 호감으로 와 닿지 않는 세태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공군은 전투기를 중심으로 모든 인원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이건 간부들이건 자기가 맡은 그 부분에만 전문적이고 세부적인 일을 합니다. 마치 공장에서 어떤 기계를 만들고 그 기계를 각자 분업하여 자기가 맡은 부분만을 담당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소 개인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의 수에 비해 거의 동등한 수로 군인가족들이 있다 보니, 공군에서 군종신부로서 사목한다는 것은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하는 일이며 군인 가족들 한 가정 한 가정을 돌보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직은 임관한지 3개월이어서 그 깊이를 알 수는 없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히려 몸이 하나라는 어려움을 새삼 절실히 느낍니다. 한 명 한 명, 한 가정 한 가정을 일일이 다 신경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사람을 만나고 상대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한 명 한 명과의 관계를 잘 해내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여러 명이나 단체를 상대하고 어울리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한 명을 만나는 일에는 참으로 어색해 합니다. 그런데 공군 군종 사제로 일을 하자니 저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하~ 왜 이렇게 부족한 나를 하느님께서 군종으로 보내셨고, 게다가 공군 군종 신부로 보내셨는가? 그 이유를 알겠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군종 사제로 시작하는 마당에 ‘사제의 길’ , 그 깊이를 조금은 더 느끼고 있습니다. 아니, 완전히 ‘사제’ 를 새롭게 써나간다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었던 ‘미사’ 가 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영창에서 수감 중인 한 형제와의 미사입니다. 수년간 냉담을 한 그 형제를 찾아 나서서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마음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나누고 예수님의 몸을 나누었습니다. 창살 안에서 어두컴컴한 형광등 아래서 한 사람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께서 우리 한 명 한 명을 얼마나 크게 사랑하시는지를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이를 찾아 나서는 일이 군종 신부의 일임을 배운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흔히들 군을 ‘선교의 황금 어장’ 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황금어장 이면에는 분명 집을 떠나서 새로운 곳에서 적응해 나가며 힘겹게 살아가는 한 명 한 명이 있습니다. 그 한 명을 낚아서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 한 명 한 명이 고독과 외로움,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이 곳 군에서 살아갑니다. 군인 한 명 한 명을 위해 기억해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 한 명을 위한 저희 군종 사제들을 위해 기억해주시고 기도해 주십시오. 한 마리 길 잃은 양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군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축복을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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