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30주일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제 1독서 : 출애 22,20-26



제 2독서 : 1데살 1,5c-10



복  음 : 마태 22,34-40



 오늘 전례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높이 찬양하고 있다. 하느님은 모든 가치체계의 최정상에 군림하셔야 하며 우리는 그분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마태 22,37) 전존재로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삶이 인간으로서의 삶이 됐든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이 됐든 모든 삶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 전례는 동시에 이웃사랑도 강조하고 있다. 이웃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오 증거로서 인간을 통하여 하느님의 위대성을 반영시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느님과 인간은 결코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두 실체이다. 왜냐하면 상호 필연적인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특히 현대 세계의 물질 중심주의적 무놔는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설교하고 또 그분의 윤리적 영신적 요구를 가르침으로써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유치증을 고찰하는 데는 포이에르바하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참고하면 충분할 것이다 : “하느님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가난해져야 한다 : 하느님이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하느님은 자기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질투하는 이기주의의 자기 도취일 뿐이다”(L. 포이에르바하, L\’essenzadel cristianesimo, Feltrinelli, Malano 1975, 3 ed., pp.47-48).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첫째 계명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가르치신다 :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마치 동전 한닢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가난하게 하시지’ 않고 오히려 당신 자신의 ‘모상’대로 만드실 만큼 들어높여주신다.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그러면 복음 내용을 살펴보자.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 전체 가운데서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내용 중 하나를 전해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몇 마디 안되지만 압축적인 표현을 통해 당신 계시의 새로운 면과 독창적인 면을 모두 종합해주고 계시다.

  “그때에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34-40).

  이 대목은 세 공관 복음서가 다같이 전해주고 있으나 그 양상은 같지 않다. 루가복음(10,25-28)에서는 예루살렘 ‘논쟁들’에 관한 대목들 이전에 나오는 예수의 그 유명한,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에 관한 큰 단편(9,15-19,28) 가운데 삽입되어 있으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서론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마르코복음(12,28-34)에서는 문맥의 상황이 마태오복음의 경우와 비슷하다. 하지만 논쟁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다. 실제로 끝부분에 보면, 예수께 질문을 했던 율법학자가 “그렇습니다”(12,32) 하며 예수의 대답에 찬사를 보내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34)라고 말씀하신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이미 언급했듯이 불꽃튀는 예루살렘 논쟁들(22,15-46)의 문맥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없는 서두 형식의 구절들(“그때에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물었다”:34-36절)에서 볼 수 있듯이 논쟁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매우 이상하고 역설적인 사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앙심을 가득 품고 예수께 접근하면서도 자신들의 악의에 찬 의도를 위장하기 위해 사랑에 대한 논쟁에 관심이 있는 척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내적 모순은 별개 문제로 하고, 어째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36절)라는 평범한 질문을 그리스도께 던짐에서 ‘함정’의 가능성을 보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사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유명한 ‘쉐마(shemà)의 기도’(‘들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원문 shemà에서 비롯된 기도 명칭)의 장엄한 첫 대목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명 6,4-5). 이 기도는 줄곧 유다인들의 신앙과 신심 전체의 종합으로 여겨져오고 있다. 사실 루가복음에서는 율법학자 자신이 대답을 하고(10,27) 예수께서 그 대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계시다.

  그러면 이 질문 어느 구석에 음흉한 책략이 들어 있는가? 미루어 생각건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제시하시면서(바로 조금 앞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혼인잔치의 비유를 상기해 보라) 그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첫째 계명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있는 듯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품지 않을 수 없었던 의심에다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네 마음을…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반면에 예수께서는 그러한 의심과 관련된 문제는 불분명하게 내버려두신 채 다른 모든 계명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이 가지는 절대적 수위성을 신명기의 표현 자체를 빌어 재확언하신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마태 22,37). 그리고 그 말을 봉인이라도 하시듯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씀하신다:“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3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거부하거나 바꾸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강조하고 활력을 불어넣어주신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보다도 특히 예수 자신의 생활, 그 중에서도 특히 성부께 대한 ‘순명’(필립 2,8 참조)의 행위로써 받아들이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된다.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의 요구를 철저히 실현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증거의 모습에 대해 오늘 영성체송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시고,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 제물이 되셨도다”(에페 5,2). 제 2 독서에서도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린 것”은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1데살 1,9)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종합적 본질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물론 신약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있어서 더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그 계명이 더 쉬워졌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순례자로 있는 동안 결코 이러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실제로 어느 누가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윤리신학자들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는 삶의 한 순간인 바로 지금부터 복음이 요구하는 대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한 세밀한 분석들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들을 어떻게 평가하든지간에, 매우 객관적 성향을 띠는 순수 윤리학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원칙적으로 또 깊은 사고의 결과에 따라 그 순간에 하고 있는 그 이상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의 준비를 하거나 열망하기를 거부할 때는 더 이상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윤리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흔히는 완덕을 향한 열망이 어떤 일정한 범주에 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부과되어 있는 절대적 의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이미 하고 있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해야 할 의무를 제외한 채 완덕을 열망해야 할 절대적 의무란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절대적 의무라는 그 의무를 아직 갖고 있지 않다고 가정만 하면서 지금 해야 하는 사랑마저 하기를 거부한다면 그게 뭐란 말인가?…진정 우리가 오늘 우리 자신의 내적인 자세를 사랑에 열어놓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치 내일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오직 내일 있게 될 사랑의 모험에 오늘 우리 자신을 투신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거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오늘이 오늘 있어야 하는 모습대로 있지 못한다면, 내일 역시 내일 있어야 할〔내일의〕 사랑이 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늘이 내일의 선재요건으로 인식되고, 또 오늘부터 내일의 요구에 따를 때만이 오늘이 있어야 하듯 내일이 있게 된다. 또한 사랑이 만일 진정 앞으로 나가는 과정중에 있는 것이며 지금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주어지는 미래를 향해 펼쳐져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필립 3,13 참조), 오늘 있는 것 보다 더 크게 퍼져나가는 한에 있어서만 오늘을 위한 참된 사랑도 있게 된다”(K. Rahner, It comandamento dell\’amore, Paideia, Brescia 1964, pp.29-30).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지만 예수의 응답의 본래 의도는 세상 만물에 대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가지는 우선성을 재확인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그 사랑과 이웃사랑을 상호 내적 ‘친밀성’을 통해 한데 묶어놓으려는 데 있다:“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39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확실히 레위 19,18을 상기시켜주고 계시다. 하지만 그 의미를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에서처럼 자기 동족에게만 국한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시키신다.

  예수께서는 가치체계를 유지하신다:즉 ‘첫째’ 계명이 역시 ‘가장 큰’ 계명이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모든 사물의 우위에 있다고 하시며, ‘둘째’ 계명은 모든 사람―자기의 원수라 할지라도(마태 5,43-48 참조)―에 대한 사랑을 부과하는 계명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상호 내적 ‘보충성’과 ‘일치성’의 관계를 통하여 거의 하나로 묶으려 하신다.

  어째서 두 계명간의 상호 ‘보충성’을 말씀하시는가? 그분의 관점에서 볼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성서 전숭에 의하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6-27참조) 만들어졌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사람의 창조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창세 1,31 참조). 둘째로, 육화의 신비 이후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의 얼굴과 마음에 더욱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삼위의 신비 자체에 잠길 수 있을 만큼 그분과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드리는 그 사랑과 ‘유사한’ 사랑―비록 구조 자체로는 똑같지 않지만―으로 인간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여정은 보통 바로 형제들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요한은 다음과 같이 매우 현명한 권고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장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 4,20-21; 요한 14,25. 21; 15,17도 참조).

  그래서 마태오복음에만 있는 오늘 복음의 결어(“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40절)에서는 두 계명의 일치성과 동질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두 계명 안에서 모든 계시 즉 율법과 예언이 ‘종합’되고 있음도 단언하고 있다. 하지만 그 ‘종합’의 의무는 현재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지워져 있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통해 그 ‘종합’을 생기있고 활력있게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소위 “계약의 법령”(출애 20,22-26; 21-23장)에서 취해지고 있는 오늘 제 1 독서는 이미 구약성서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 특히 보다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외국인, 고아, 과부 등)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력히 요구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곧 이웃사랑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느님 야훼께 대한 ‘충실성’을 드러내는 필수적인 표현방법이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붙여 살지 않았느냐?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아라…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자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 만일 너희가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출애 22,20-26).

  이 모든 규정들의 특징적인 내용은 그 당시의 엄격한 사회적 관습이나 시대적 환경에 비추어 깜짝 놀랄 만한 ‘박애주의적’ 정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아가 그 규정들에 담겨 있는 종교적 시사 내용에 있다: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기 형제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하느님 야훼 자신이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애로우시기”(26절) 때문이다!

  형제들을 선하게 또는 악하게 대하는 것은 하느님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것과 같다(마태 25장 참조). 하느님은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엄히 벌하실 것이다:“너희가 그들을(과부와 고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22-23절). 비록 아직 완전치는 않지만 이미 우리는 복음의 내용에 접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신(神)중심주의적’인 이러한 ‘박애주의’를 회복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이야기를 제쳐놓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복음을 ‘인간화’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현대적 유혹을 탈피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더 이웃형제들―신자이든 비신자이든―에게 베풀 수 있는 봉사도 관대해지고 열성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이간은 아무것도 아니다”(J.P. Sartre)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오히려 만일 우리가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느님을 다시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스스로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 내지는 심지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사물들의 노예가 되어버릴 것이 뻔하다.

  이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셨듯이 그 두 계명의 ‘종합’을 이루어나가야 할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마태 22,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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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30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30주일

    제 1 독서 : 출애 22, 20-26

    제 2 독서 : 1데살 1, 5ㄷ-10

    복     음 : 마태 22, 34-40


    제 1 독서 : 모세오경은 이스라엘 땅 안에 있는 외국인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 즉 잠시 머물다 가는 외국인과 이스라엘 사람들 틈에 끼어 장기적으로 체류하는 외국인을 구별한다. 모세오경은 특별히 후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고 있다. 외국인들을 착취하거나 억압하지 말라는 규정(출애 22, 20; 23, 9)뿐만 아니라 아예 외국인을 사랑하라는 규정(신명 10, 19)까지도 있다. 이런 규정의 근거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경험에 있다. 남의 나라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던 체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 나라에 몸붙여 사는 외국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존하게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오늘 제1독서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과부와 고아의 권익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과부와 고아도 보호자가 없다는 점에서 외국인과 처지가 비슷하다. 보호자가 없는 약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몸소 보호자로 나선다.


    제 2 독서 : 데살로니카 전서만큼 교회 공동체의 시작에 관한 내용을 직접 접할 수 있는 편지가 드물다 사도 바오로 일행이 데살로니카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데살로니카 사람들이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6절의 “말씀”은 특별히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 단어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이다. 말씀은 복음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그냥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하느님께 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기쁨을 가지고 맞아들이는 사람에게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데살로니카 신자들에게서 풍성한 열매를 맺은 사실에 대해 감사드리는 내용이다.


    복     음 :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라고 넌지시 물어오는 율법 교사에게 주님께서는 신명기 6장 5절의 말씀으로 간단 명료한 대답을 주셨다. 그 당시 율법 교사들은 모세 율법의 본정신을 망각하고 세심한 법규준수에 몰두하였으니, 어느 계명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율법과 예언서 전체를 꿰뚫어 보셨던 주님께서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애주애인)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못박으셨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우리 삶이 참으로 하느님께 방향지었을 때, 우리 삶의 중심에 하느님께서 계실 때 나오는 결과이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가끔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헌신을 삶의 본질로 삼으라는 초대이다.

    여기서 이웃은 나와 함께 매일 같이 사는 사람, 일 때문에 매일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을 뜻한다. 내 마음에 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 내 뜻과 맞지 않는 이웃을 사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이웃 사랑이 계명으로 주어진 이유가 있다. 내 마음에 드는 이웃만 선택해서 사랑한다면 이웃 사랑은 계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내 뜻과는 상관없이 이웃은 이미 주어져 있다. 이웃을 내 마음으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이웃 사랑은 우리에게 계명이 되는 것이다.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취제크 신부님은 이렇게 썼다. “병자와 고통받는 자들을 동정하거나 그들을 도울 마음을 먹는다든가. 전쟁 또는 자연 재해로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찌릿한 아픔과 연민을 느끼기는 쉽다. 그러나 날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살면서 내가 인간적인 허물을 낱낱이 목격할 수 있는 이웃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거나 형제적 사랑을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저 사람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내 이웃에 살거나 혹은 직장에서 나와 함께 일하는 저 원숭이 같은 친구를 내가 형제로 대우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지는 저 원숭이 같은 녀석을 내가 왜 사랑해야 하는가?”(발터 췌제크, 「나를 이끄시는 분」 중에서)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성서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이웃 사랑, 특히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출애굽기의 제3부 계약편으로 십계명의 정신을 따른 법 규정집 중 약자 보호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서는 특히 나그네, 과부, 고아,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날 때부터 절대적으로 부귀 영화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기에 서로 돕고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 이집트 노예살이의 압제, 억압, 수탈, 가난 속에서 시달렸던 뼈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러한 과거를 생각해서라도 어려운 이웃을 잘 돌보아주어야 한다는 호소와 바람을 하느님께서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야훼 하느님은 울부짖는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아니 울부짖는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 때문에 이 시대의 신학의 기본 입장을 ‘자유와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종합한 1986년 3월 22일 바티칸 신앙교리성의 훈령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부자들을 결코 배척한다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아준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진 자나 권력자들은 많은 기득권을 누리면서 대접을 받고 있지만 가지지 못한 자나 평범한 사람들, 특히 힘없고 행색이 초라하고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자들은 어디 가서나 큰 대접을 받지 못하고 버려지게 마련입니다. 즉 서러움을 당하고 무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뜰안 가득 쏟아지던 날, 로라는 정원 문에 매달려 오락가락 그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더기 차림의 한 부랑자가 나타나 거친 목소리로 로라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 꼬마야. 엄마 계시니?” 그러더니 그는 로라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더러운 발을 질질 끌면서 현관까지 걸어 들어갔습니다. 마침 엄마가 화단에 물을 주기 위하여 고무 호스를 들고 정원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부인, 먹을 것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엄마는 호스를 내려놓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베란다 앞 좁은 계단으로 안내했습니다. 잠시 후, 엄마는 두꺼운 빵에 두툼한 고기를 넣은 샌드위치와 우유를 들고 와 그에게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 부랑자는 덥썩 음식을 받아들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습니다. 로라는 계속 그네를 타면서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음식을 다 먹은 후, 그는 일어서서 대문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습니다.

    로라는 지저분하고 게으른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며 후한 대접을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 저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왜 엄마는 그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나요?” 로라의 질문에 엄마는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로라야, 저 사람들도 어린아이였을 때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엄마의 사랑을 받았을 거야, 난 저 사람들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음식을 주는 거란다. 네가 만약 굶주리고 있을 때 저 사람들의 어머니들이 너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로라의 작은 어깨에 손을 얹은 엄마의 앞치마에서 방금 구운 빵 냄새가 향긋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습니다.

    위의 이야기처럼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인간 대접을 해주고 삶의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들이 더럽다고 손가락질하고 무식하다고 상대해 주지 않는 사람들의 벗이 되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 주며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자 우리 모두가 실천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권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서 정의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함을 대변함은 물론, 풀어주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아울러 신체적으로 불구이거나 오갈 데 없는 갖가지 불우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나 노인들, 그 밖의 사람들을 위해서 시설을 제공하고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의 빛으로서 정의와 복지, 양면에서 베푸는 사랑이란 무한한신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자 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지엄하신 명령에 순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출애 22, 20-26)는 구체적으로 저당잡힌 자들에게 너그러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만일 이불과 담요를 저당잡았다면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이자도 중요하지만 그 이자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이불을 덮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원래 이자를 받는 것은 성서상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사랑과 도움의 정신으로 그냥 빌려주는 것이 성서의 근본 사상입니다.

    나의 보장받은 위치가 결코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또한 나의 재물이 타인의 생존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제2독서는 데살로니카 전서의 말씀으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교우들이 신망애 삼덕 안에 성실한 삶을 살고 있음에 대하여 기뻐하며 이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소식으로만 받지 않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방 즉 주변 지방으로까지 선포하게 되었고 이것이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증거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선포란 기쁜 소식의 단순한 전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업적을 되새기고 그것을 본받는 행위이며 실천입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하느님 중심의 유일신 사상, 그리스도 중심론 그리고 종말론에 기초한 희망의 삶을 뜻합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 삶의 전부라는 마음의 자세를 지닐 때 그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마태 22, 34-40)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 계명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차원은 비록 다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십계명에 기초한 여러 세부적 법규정들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248조의 명령법과 365조의 금령법으로 모두 613조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많은 법을 사랑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 인간의 사랑으로 묶으신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의 핵심이 사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말만의 사랑이 아닌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보여주신 실천적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아낌없이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주님을 사랑하는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참사랑의 삶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30주일

            1. 함세웅 신부(가)/1                     2. 함세웅 신부(가)/3

            3. 김정진 신부(가)/5                     4. 강길웅 신부(가)/7

            5. 첫째가는 계명(가)/9                   6. 첫째가는 계명(가)/12


    1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악한 소작인

                                                                 함세웅 신부


    한없이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은 마냥 시원하기만 합니다. 가을이 되면 농부들은 추수에 일손이 바빠지게 마련입니다. 추수가 끝나면 소작인들은 땅 주인과 결산을 하고 미리 계약된 얼마의 소작료를 받게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해괴한 소작인들의 소행을 읽게 되고, 땅 주인의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을 읽게 됩니다.

      

    우선 오늘 복음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포도원인 당신의 백성들을 소작인으로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권위를 외면한 채 주인이 보낸 많은 심부름꾼들을 냉대하고, 때려 주고, 나중에는 죽여 버림으로 정면으로 주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주인은 자기 외아들을 보내면 소작인들이 꼼짝 못하려니 했으나, 외아들마저 죽여 버렸습니다. 진노한 주인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모조리 살해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소작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의 행동에 있어 그렇게 놀랄건 없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심한 불경기로 노동자들은 불만에 가득 차서 반항적이었을 수 있고, 그렇다면 지주의 아들을 제거하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날 법도 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은 오늘날도 혹시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늘 선동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폭력 혁명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사태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공이니 멸공이니 하지만 ,가장 좋은 반공의 방법은 빈부의 격차를 줄이려고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오늘 복음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선 오늘 ‘특권과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많은 특권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좋을대로 일하도록 자유롭게 하여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공사장의 감독과 같은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어떤 과제를 주실 때, 그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맡겨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누구에게나 결산의 시간이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결산의 시간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시간으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과 시간 안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요?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나에게 어떤 책임 추궁의 원인이 될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분명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결산 보고의 자료입니다. 우리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특권은 다른 사람에게 봉사해야 할 특권, 하느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할 특권(사도행전 5,41)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러한 특권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은 자기들의 권리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계획적으로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뿐이고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기는 것뿐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보다 독특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없는지 반성해 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된 우리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으면서, 그에 상당하는 책임을 완수하고 있는가? 공무원으로서 주어진 권리를 부끄럼 없이 사용하는가? 기업체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권리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책임과는 관계가 없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동시에 교육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리와 의무는 무엇일까? 학자로서 하느님의 자녀된 나의 권리와 의무, 학생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된 나의 권리와 의무, 상인으로서 나의 권리와 의무는 순조로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두번째로, 오늘 복음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와 인내, 심판에 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기시듯, 하느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과업을 맡기셨습니다. 이로부터 인간에게는 권리와 책임이 유래됩니다. 인간이 맡은 바 직책을 수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 종종 반기를 들고 항거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꾸자꾸 자기의 파견자를 보내시고, 파견자가 학대받고 살해를 당해도, 당장에 복수하러 달려오지 않는 포도원 주인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회개하고 당신의 뜻을 따라오기를 기다리시며 참으십니다. 그러나 결국은 최후의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을 비유

    는 말해 줍니다.


    그 심판은 아주 엄한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맡겨 주신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자들로부터 빼앗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때, 그 가치는 상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최후의 심판은 너무나 비참한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는 예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로써 예수께서는 명백히 자기 자신을 다른 예언자들의 계열 이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다 앞에 온 자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하느님의 이름으로 파견된 사람들이었으나, 그러나 하느님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희생을 오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닥쳐올는지 예수님께서 분명히 알고 계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못해 죽을 수밖에 없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응시하면서, 한 발 한 발 그 길을 걸어 나아간 것입니다.



    2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함세웅 신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과연 이웃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명백한 대답과 그에 따른 행동 지침을 제시해 줍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무엇이냐’하는 이론적 설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실천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구약의 유대 사상에도 보편적 사랑의 개념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인 배타적 관점에서 이해되었기에 이웃이란 개념도 주로 한정된 의미로만 설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계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웃의 의미를 성화 시켰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르코 12,31) 이 말씀은 이웃이 나 자신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족과 형제적 틀에만 얽매여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놀라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이웃은 하느님과 직결되면서 이웃 사랑은 곧 하느님 사랑이라는 새로운 정식이 생겨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40)라는 성서 말씀은 이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웃이란 독자적 개념이 아닙니다. 나와 하느님과 맺어지는 관계에서 그 참뜻이 나타나며 구체적으로 사랑의 의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기에,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의 척도가 되며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고 나 자신의 구원을 결정짓는 핵심적 요인입니다. 그리스도는 이웃 사랑의 보편성을 강조하시면서 원수와 반대자들도 사랑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사람을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 하고 이웃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나 이웃을 정의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 사람을 제시하며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9)고 명하십니다. ‘과연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란 문제로 바뀌는 것입니다.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마태오 22,36; 마르코 12,28)를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로 바꾸어 물은 루가는 영원한 생명에 초점을 맞추어 실천적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 구원의 계기를 얻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했고 활용하지도 못했습니다. 반면,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경멸 당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억울한 형제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었습니다.

    유대 전통사회에 있어서 동족인 사제, 레위인이 보다 가까운 이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척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 이웃이 되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실천하고 본받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정녕 우리에게 새로운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간 사제와 레위인의 행동은 오늘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참으로 우리 사제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반성케 합니다. 강도 당한 사람이 오늘도 도처에  있지만 우리 사제들은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소외된 이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지입니다.


    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억눌린 형제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차적 사명은 복음선포이다. 교회의 근본 소명은 신자들의 사목이다. 교회의 존재이유는 신자들의 성화이다.’ 등 여러 가지 주장을 통하여 감옥에 갇히고, 짓눌리고, 억압받는 많은 형제들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진정으로 어느 부류의 사람에게 이웃이 되고 있습니까? 권력자의 들러리가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픈 그 현장에서 부모, 형제, 친척을 잃고 울부짖고 있는 그 가족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작년 5월 광주 사태의 현장에 있었던 어느 성직자는 그 비참한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장으로 달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때 문득 기억에 떠오른 것이 바로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였답니다. 사제는 말만 하는 사람이지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반성했다 합니다. 그 성직자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바로 신앙인의 고뇌가 있습니다.


    지난 1월, 이란에 오랫동안 인질로 억류되었던 미국인들이 풀려났습니다. 이때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들이 혹시 ‘스톡홀름 징후’에 걸리지 않았나 염려했습니다. 스톡홀름 징후란 피억류자가 억류자와 함께 오래 동거함으로써 억류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또는 동정하게 되는 정신분열 심리 상태로 인해 올바른 가치관을 상실한 병입니다.

    달리 말하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허위인지를 분별하는 능력이 마비되거나 상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심리학자들이 염려한 스톡홀름 징후란 사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병인 것 같습니다.


    요사이 우리는 가치가 전도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허위가 판을 치고 온갖 구호와 그럴 듯한 단어가 난무하고 있지만 그 참뜻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도된 가치관을 전혀 의식하지 못할뿐더러 병에 걸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사회적 스톡홀름 병에서 우리 모두가 치유되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라는 명령 외에 다른 뜻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강도 만난 억울할 사람,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에게 버림받고 사제와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에게 외면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이방인에게 전달되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걸어간 길은 동화의 길입니다. 인성을 취하시고 강생하셨으며, 소외된 자들을 벗으로 맞이해 그들과 함께 하셨으며,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 죽기까지 하신 예수는 바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과 같이, 가장 작은 형제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사순절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사의 사건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하라는 마태오 복음 6장의 말씀은 사순절의 특징을 일깨워 줍니다. 자선, 기도, 단식, 이것은 모두 이웃 안에서 그 참뜻이 밝혀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에 대해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어 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이사야 58,6-8)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죽음, 그것을 우리는 전 인류의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자신과 이웃을 하나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이웃과 일치,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관련된 모든 사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사건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사건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다른 이웃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특히 외면당한 사람들에게 이웃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이며 완덕이요, 우리의 구원입니다.






    3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김정진 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에 바탕이 되고 기반이 되는 핵심적인 문제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구약의 온갖 율법과 예언의 정신이나 신약의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모두 이 두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의 한 율법 전문가가 예수님을 떠보려고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것입니까?”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자그마치 613조라는 계명이 있었는데 큰 계명과 작은 계명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작고 가벼운 계명은 속죄만 하면 용서함을 받을 수 있었으나 크고 중한 계명 위반자는 사형에도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율법 전문가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하여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그 당시 어떤 율법학자는 “그대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다른 계명은 이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하며 최고의 계명을 이같이 설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마태 23,27)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며 구약의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셨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둘째 계명도 첫째 계명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고 대담하게 말씀하신 점에 크게 유의해야 되겠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요, 기본적이고 첫째가는 계명이라는 데는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꼭같이 중대한 계명이란 것은 지금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다른 어떤 덕행보다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더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여하에 따라서 크리스천 생활은 성공하거나 실패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첫째 원수까지 사랑하라(마태 5,43)고 하셨고 이어서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루가 15,4)와 탕자의 비유(루가 15,11) 그리고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요한 8,3)등 수없이 그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네가 천사의 말까지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고… 내가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역설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셨습니다. 즉 이 두 가지 사랑은 그 중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께 대한 참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어떤 아들이나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듯이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성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제 눈으로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한편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형제에게 대한 참사랑도 없습니다.


    신자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깨달은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참사랑은 말로나 혀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실천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진실히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마태 7,21) 하느님의 계명을 성실히 준수하는데(요한 15,10. 14)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에 관해서는 성 야고보 사도가 적절히 표현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에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보 2,16)


    끝으로 결론 짓는다면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사람 하나 하나의 얼굴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뚜렷이 보며 하느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타인을 존중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저편에서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가까이 가서 그들의 고통이나 슬픔에 공감하여 그들에 대한 사랑이나 봉사를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4          연중 제 30 주일   마태 22,34-40 (가)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출애 22,20~26 (너희가 과부와 고아를 해치면 내 분노하리라) 

    제2독서 Ⅰ데살 1,5c~10 (성자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복 음 마태 22,34~40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오늘 성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사랑처럼 인생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것도 없으며 사랑처럼 인생을 환하게 밝혀 주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사랑은 인생을 아주 풍요롭게 채워 주며 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도 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는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특히 약한 자들은 하느님 사랑의 초점이 됩니다. 즉 병든 자, 헐벗은 자, 그리고 과부나 고아들은 누가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주 외롭고 고달픈 자들입니다. 그들에겐 붙잡을 것이 하느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 사랑의 특별한 대상자가 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자녀보다는 병들거나 불구된 자녀에게 부모의 관심이 더 크게 됩니다. 누가 돌봐 주지 않으면 안되는 자녀에게 부모의 애정이 쏠리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누가 혹 불구된 그 자녀를 무시하고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부모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베푼 것이 바로 당신에게 베푼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첫째는 하느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고도 하셨습니다. 사랑은 다시 말해 하느님의 본질이며 율법의 본질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613조목이나 되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지켜야 할 계명이 너무 많아서 모두를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도 몰랐습니다. 율법의 조목만 풍성했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법의 본질과 그 정신을 몰랐습니다. 바로 거기에 신앙의 모순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법이 좋아도 백성이 지키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오히려 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거추장스러울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래서 위대한 사랑의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는 채 죄만 크게 짓게 되는 모순 속에서 고생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실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로 이해되고 해석되는 하느님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무시하고 있다면 그 하느님 사랑은 위선이며, 또한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다면 그 역시 잘못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된 길을 참 사랑인 양 걸어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사목회 임원으로서 열심히 봉사할 뿐만 아니라 교리 상식에도 밝았습니다. 그분 얘기를 들으면 믿는 은혜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은 당신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레지오 문제로 누군가와 언쟁이 있었는데 몇 달이고 그 사람하고는 상종을 않는 것을 보고는 우리가 참사랑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맘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쁜 사람을 사랑하고 돈 있고 세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심지어는 강아지나 돼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이웃 사랑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자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을 말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 사랑이며 동시에 이웃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죽지 않으면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다 얻는 것이 됩니다. 잘먹고 잘살아도 사랑이 없다면 지옥입니다.


    그러나 헐벗고 못살아도 사랑을 하고 있다면 그는 천당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합시다. 그것이 참 하느님 사랑입니다.






    5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이웃사랑, 특히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출애굽기의 제3부인 계약편으로 십계명의 정신을 따른 법규정집 중 약자보호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서는 특히 나그네, 과부, 고아,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법 이전의 상식에 속하는 인간성에 기초한 하느님의 요구이며 명령입니다. 몸 붙여 사는 자들은 비록 노예는 아니지만 전쟁과 천재지변 등으로 뜻밖에 집과 재산을 잃고 하는 수없이 다른 이에게 종속된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며, 과부와 고아는 가장을 잃었기에 사회적으로 보호장치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궁핍한 가운데 돈 많은 사람들에게 예속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부류의 약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명하십니다. 그 누구도 날 때부터 절대적인 부귀영화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기에 서로 돕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히브리인들은 오랫동안에집트의 노예살이의 압제, 억압, 수탈, 가난 속에서 시달렸던 뼈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러한 과거를 생각해서라도 어려운 이웃을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호소와 바램을 하느님께서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법의 기본정신입니다.


    우리는 이미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타난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뜻을 묵상한 바 있습니다. 야훼란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들어주시는 분, 아니, 울부짖는 백성들과 꼭 함께 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은 그 존재상 약자들 편에 서 계신 분입니다. 그 때문에 이 시대의 신학의 기본입장을 「자유와 해방」이란 관점에서 종합한 1986년 3월 22일 바티칸 교리성성의 훈령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사랑”(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올바른 뜻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에 대해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과 부자들의 하느님이 따로 있는가?”하면서 억지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성서는 배제적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라,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다는 하나의 결단을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권력자나 부유한 이들은 사회신분상 많은 것을 보장받고 있는 기득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보다는 억눌려 있고 가난 때문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는 것은 바로 인정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스나 전철을 타면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합니다. 지체 부자유자를 만나면 그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권리를 빼앗긴 가난한 이들에게 마땅히 펼쳐 보이라는 거이 성서의 기본정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인륜이기도 합니다. 인륜의 원칙에 대해 누가 왈가왈부할 수 있습니까? 특히 성서는 저당 잡힌 자들에게 너그러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만일 이불과 담요를 저당 잡혔다면 돈을 못 받았어도 해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이자도 중요하지만 그 이자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이불을 덮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교훈입니다. 원래 이자를 받는 것은 성서상 합당치 않습니다. 사랑과 도움의 정신으로 그냥 꾸어주는 것이 성서의 근본사상입니다.


    다만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이러한 제도가 용인될 뿐,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걸맞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중요한 윤리원칙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나의 보장받은 위치가 결코 타인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며, 또한 나의 재물이 타인의 생존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웃권리에 대한 존중과 애덕과 사랑은 권고 이상의 의무성을 띤 하느님의 강력한 요구임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나는 분노를 터뜨려 너희를 칼에 맞아 죽게 하리라.”


    제2독서는 데살로니카 전서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교우들이 신․망․애 삼덕 안에 성실한 삶을 살고 있음에 대하여 기뻐하며 이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주님과 사도들의 모범적 추종자들임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데살로니카의 교우들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자기들만 간직하지 않고 주변의 도시에 널리 전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선포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복음선포란 기쁜 소식의 단순한 전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업적을 되새기고 그것을 본받는 행위이며 실천입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하느님 중심의 유일신사상, 그리스도 중심론, 그리고 종말론에 기초한 희망의 삶을 뜻합니다. 그 첫째는 필연적으로 하느님을 제1의 가치와 목적으로 하여 사는 삶, 곧 철저한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 생애의 모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온갖 우상숭배와 거짓예배는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입니다.


    나자렛의 예수, 그분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며 철저하게 이웃을 위해 살다가 죽어간 분입니다. 그분의 언행, 그분의 가치를 어떠한 경우에도 앞세울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우리는 다시 다짐해야 합니다. 끝으로 종말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꼭 다시 오시리라는 확신입니다. 하느님께서 꼭 우리 모두의 선업을 갚아주시리라는 희망 안에 우리는 매순간, 매일, 최선의 삶을 또한 다짐하고 있습니다. 엄포적 의미도 있습니다만 하느님의 엄한 심판과 진노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변호자를 요구하게 됩니다. 약한 우리 모두의 변호자는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감히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은 십계명을 요약한 사랑의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기초한 여러 세부적 법규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248조항의 명령법과 365조항의 금령법으로, 합하여 613조목이나 되었습니다. 법조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졌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께서는 복잡한 이 사회를 단순화시키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단순하신 분이시고, 사랑의 본질 또한 단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13조항의 법, 십계명, 그것은 사랑 하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만 한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1독서에 언급된 약자보호 규정도 이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면서 이웃에게 먹이가 되는 희생제사입니다. 사랑은 그래서 이웃과 동화되는, 하나가 되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예수님을 바로 사랑 자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이신 예수님, 당신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우리 또한 사랑이 되어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6               연중 제30주일   마태 22,34-40 (가) 첫째가는 계명



    Ⅰ. 율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

    율법학자가 예수께 “선생님, 율법 중에서 가장 중대한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하였을 때 그가 무슨 대답을 기대하고 이런 질문을 하였는지 의아스럽습니다. 하여간 주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루에 두 번씩 외우는 십계명 중의 첫째 계명을 인용하시어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지력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별로 심각하게 듣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격과 인격사이의 관계라는 그리스도 주장을 지적하는 말씀이니 만큼 우리에게 중대한 것입니다. 종교는 사랑하는 인격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인격과 그 이웃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 사랑은 상호적(相互的)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되 사랑 받지는 못한다면, 이 사랑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짝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역사는 하느님의 백성과 그들 각자에 대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인격적 사랑의 기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볼 수 있는 인격자로서 나타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작용하셨고 그들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노예로부터 행방 시켜 주셨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벌하시는 데 있어서도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그들은 벌을 받는 중에도 하느님께서 그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천주가 주님이신 백성은 복되도다. 당신 유산으로 뽑으신 그 겨레로다.”(화답송)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이 되시어 그들 앞에 서 계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아들입니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자이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Ⅱ.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유대인에게 있어서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쉽습니까? 이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명확한 문제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랑을 생각할 때, 자연히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 – 가령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나 애인이나 자녀나 친구 같은 살아 있는 인격 -을 생각합니다. 사랑은 인격자와 인격자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참으로 살아 있는 인격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상호적(相互的)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귀한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들어 높이고 우리를 완성에로 이끕니다. “인격은 사랑 안에서 생명에로 이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자인가를, 자기의 내면의 영혼이 어떠한 자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골든브른너).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인생은 비참하고 불행한 삶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사랑하도록 조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인간에게 대해서 마음을 꼭 닫고 있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까닭에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상상한다.”고 페기는 말했습니다. 사제는 그의 백성을 사랑해야 합니다. 수도자들도 성교회를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Ⅲ.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문제

    그런데 문제 거리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사랑하기가 유대인에게 있어서보다 우리에게 있어서 더 어렵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시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며,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베푸신 하느님의 역사를 깨닫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말씀에서 또한 하느님이 우리 앞에 실제로 계심을 알려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성사의 위로, 전례의 힘 그리고 심지어는 고통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잠깐 동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회상해 봅시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랑에서부터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로 올라갈 수 있는지 배우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가 서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면, 하느님을 사랑할 준비가 가장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부부는, 하느님께서 이처럼 해 주신 데 대하여 마땅히 하느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위험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인간적인 사랑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는 편 – 하느님이시거나 사람이거나 사랑 받는 편 -에서 모든 것을 보지 않는 한, 사랑은 자랄 수 없습니다.


    Ⅳ. 주님의 사랑의 가장 좋은 증거인 성체성사

    인간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둘 다 약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떨어질 위험 중에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보충과 발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을 무심히 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인격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서로 인격자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의 가장 좋은 증거는 나의 사랑 받는 이가 남한테서도 사랑 받도록 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교 활동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근본적인 것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약하고 우리도 연약하니 만큼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큰 은혜 – 곧 주님의 사랑의 결정적 증거인 성체성사 -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러 오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지력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순종할 원의와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3. user#0 님의 말: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1. 말씀읽기:마태22,34-40 가장 큰 계명 (마르 12,28-34 ; 루카 10,25-28)

    2. 말씀연구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질문을 합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똑똑한 나도 풀지 못하는 문제를, 율법에만 전념하는 율법학자들도 못 푸는 문제는 어찌 당신이 풀겠는가? 어디 횡설수설하는 얘기나 들어볼까?”하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질문을 통해서 평생을 바쳐도 풀지 못할 숙제를 하게 됩니다. 그 많은 율법 조항들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큰 것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가끔은 교만한 생각들을 통해서 커다란 것을 배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을 남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물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놀리기 위해서 물어보지 말고, 내가 배우기 위해서 물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사두가이파의 패배(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7형제와 한 여자와의 천국에서의 혼인 이야기를 꺼냈다가 완패당함)를 보고 기뻐한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있다고 믿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하나인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시비를 걸러 왔습니다. 예수님을 어려운 궁지 속으로 몰아넣어 보려는 속셈입니다. 그런데 본전이나 찾을지 모르겠네요(마르코 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는 독실한 사람이 질문을 하고 칭찬을 받습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유다교의 계명에는 613개가 있었습니다. 248개는 명령(…을 하라)이고 365개는 금령(..을 하지 마라)입니다. 613가지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가벼운 것은 보상을 하면 용서되지만, 무거운 것은 그것을 위반하게 되면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것을 큰 계명, 작은 계명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어떤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면 무슨 말을 할까요? 아니 이 질문을 “당신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느 계명을 가장 큰 계명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4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어른이 된 남자 유다인이 매일 아침 외우던 중대한 기도의 시작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히브리 사람들의 심리학에서 지혜가 담긴 자리였습니다. 목숨을 다하고는 정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물리적인 모든 열정을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다한다는 것, 목숨을 다한다는 것, 정신을 다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에, 목숨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에, 그리고 정신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에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다가도 냉담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서고, 나 좋은 대로만 생각하고, 나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 그 이유가 바로 신앙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목숨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정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첫 번째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그분을 첫 자리에 모시면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둘째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이웃은 친구들, 동료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안과 이방인 그리고 유다인, 세리와 죄인 그리고 생활이 문란한 여인과 의인이라고 보여지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친구, 적 모두가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이웃 개념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보편적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런 구별 없이, 종교, 지위, 남녀노소 등을 떠나 모든 이가 이웃이고, 우리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고, 필요한 경우 용서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사실 나는 나 자신에게 참 관대합니다. 이해하려고 하고, 언제나 너그럽습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형제자매들에게 돌린다면 참 좋은 관계를 형성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남을 나처럼 만들려고 하다가 포기를 합니다. 남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와 다른 부분은 틀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판단하게 되고, 결국에는 단죄하고 멀어지게 됩니다.

    나의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틀을 버려야 합니다. 내 틀을 버려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 틀을 버리지 않으면 온전히 그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 자존감이 낮아지면 결국 비교하게 되고, 남이 잘되면 배 아프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시기 질투를 하게 됩니다.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 또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교의 율법 규정을 십계명으로 환원하셨고, 십계명은 다시 이렇게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환원하셨습니다. 율법의 핵심은 결국 사랑의 이중계명,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명쾌한 대답입니다. 유다의 랍비들은 율법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계명을 명백한 말로 간추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힐렐르(기원전 20년)는 “네가 좋아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다른 계명은 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명쾌하십니다.


     이제 인간은 랍비들이 말하는 248가지의 계명과 365조목의 금령들을 주의해서 준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두 가지 계명만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참된 뜻을 이루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든 이들을 편히 쉬게 해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셔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고, 당신의 몸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이 말씀에 비추어서 내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이웃과 형제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들으면서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실천하기 어려웠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눠 봅시다.


    ②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쉬울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나, 직장 동료들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경험에 비추어서 함께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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