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

 

연중 제 29주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제 1독서 : 이사 45,1.4-6



제 2독서 : 1데살 1,1-5b



복  음 : 마태 22,15-21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태 22,21). 이 구절은 보다 널리 알려져 있고 자주 인용되면서 해석하기가 어렵고 또 복음절 입장을 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절은 일정한 ‘정치적’ 행위에 대한 지침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모든 인간적 행위들 즉 단순히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행위들에 대한 하느님의 ‘수위권’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회적 ‘정치적’ 차원을 비롯한 모든 인간적 삶의 차원을 포괄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주석을 통해서 살펴보게 될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그러한 인간적 차원들 가운데 어느 것과도 동일시되지 않는다.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제 1독서는 어떤 세속적 왕권이나 왕좌라 할지라도 멈춰 세울 수 없는 이러한 하느님의 보편적 ‘통치권’의 표지 아래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제 2이사야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재건을 예고한 후(이사 44,24-28), 오늘 제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그런 특별한 사명을 수행할 도구로 페르샤의 왕 고레스(기원전 557-529)를 택하신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나의 종 야곱을 도우라고 내가 뽑아 세운 이스라엘을 도우라고 나는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너에게 이 작위를 내렸다. 내가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 나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너는 비록 나를 몰랐지만 너를 무장시킨 것은 나다. 이는 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해 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까지 알리려는 것이다. 내가 야훼다. 그가 또 있느냐?’”(이사45,1.4-6).

  이 대목에서 나타나고 있는 놀라운 사실은 성서적 전승에 있어서 오직 장차 오실 메시아에게만 해당되는 명칭들이 고레스에게 부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로 정확히 말해 mashìach 즉 ‘메시아’를 뜻하는 “기름부어 세워진 이”(1절)라든가 또는 “목자”(이사 44,28)라는 명칭 같은 것들이다(이태리어판 예루살렘 성서에서는 “너는 내 목자가 되어라”라고 번역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너는 내 양을 쳐라”라고 번역되고 있다:역주자). 이것은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양살이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함으로써(기원전538) 그들을 도와주는 행위가 실제로는 선민 가운데 메시아가 오심으로써 정점을 이루게 될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구원을 계획을 촉진시키는 행위가 되리라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당신을 알지조차도 못하는 이방인의 왕을 쓰신다는 점이다(4-5절). 이같은 사실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영광’을 보다 더 높이 들어올리는 데 기여할 것이다;그분은 당신의 능력과 또한 당신의 사랑이 어째서 지역에 의해서도, 문화나 종족의 특성에 의해서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적어도 어떤 일정한 종파의 순수한 특성을 이해될 수 있는 종교적 행위에 의해서조차도 얽매여 있지 않는 것인지를 이와 같은 식으로 입증해 보여주신다:“이는 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까지 알리려는 것이다”(6절).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활동하신다. 물론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분은 교회 밖에서도 활동하신다. 하지만 그분의 목적은 항상 당신 ‘백성’의 구원적 사명을 증대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즉 이방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일 때라도 그분의 기준점은 항상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을 입증해준다:첫째로,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에 의해 파견되어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 선택된 ‘백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신비로운 역사신학이 존재하며;둘째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일치하여 작용하는 내면적 구조와 의미에 근거하고 있는 사실들, 제도들, 인간 개체들 속에는 참된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레스는 비록 하느님을 모르면서도 자신의 공정하면서도 지혜로운 정치감각으로써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하며 더 나아가 그것을 추진시킨다.

  ‘정치’는 어느 누가 하든지―비록 신자가 아닌 경우라 할지라도― 그 본래의 규범에 따라 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공동선을 실현시켜 나갈 때에 가치있는 정치가 된다.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자, 이제 오늘 복음 내용을 들어가 보자. 오늘 복음은 지금까지 말한 주제를 부분적으로 다루면서도 아주 원척적인 형태로 확대시켜 다루고 있다.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서 비록 약간의 차이점들을 보이긴 하지만―이점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공관 복음 셋이 다  이 전해주고 있다(마르12,13-17;루가20,20-26참조).

  이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주일들에 주석한 세 개의 비유가 중간에 삽입됨으로써 나뉘어지게 된 예수의 권한에 관한 논쟁(21,23-27)이후 예루살렘 시대에 있었던 네 개의 논쟁들(지금 이 논쟁:22,15-22;죽은이들의 부활에 관한 논쟁:22,23-33;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논쟁:22.34-40;다윗의 자손에 관한 논쟁:22,41-46)가운데 하나이다.

  논쟁의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긴장감이 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울 트집을 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를 위험한 함정은 바로 ‘정치적’인 함정이다. 사실 어떤 모양으로든 예수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일은 이 정치적 책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정치적 책략에 의한 구실은 만일 정치적 전복의 혐의가 재판과정에 있어서 사실상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더더욱 증대한 의미를 띤다.

  자, 어떻게 사건이 전개되었는가 보자:“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한 끝에 자기네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 몇 사람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간악한 속셈을 아시고 ‘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하고 물으셨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하고 말씀하셨다”(마태22,15-21).

  무엇보다 먼저, 이제까지 ‘바리사이즘’이라는 전통적 개념에 부여되고 있는 위선의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이중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자신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음흉한 진짜 의도를 숨기기 위해 존경심어린 훌륭한 미사여구 뒤에 자신들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다. :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16절).

  그들의 속셈으로는 이러한 아첨의 말들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와 같은 그런 심각한 문제에 관한 본능적인 신중한 자세로부터 쉽게 이탈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나서 일단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 대화의 방향을 자기들이 세워놓은 목표를 향해 밀고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러한 위선적 태도는 오히려 예수를 더 찬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즉 그분은 기회주의자나 타산주의자가 아니며 인간들의 마음에 드는 것보다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보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하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의 전생애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특히 십자가의 죽음으로 처해질 재판과정에서 나타나는 그분의 태도는 이러한 사실을 더 잘 입증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빌라도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선언하신다 :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요한19,37).

  불행히도 그리스도 신자들과 심지어 교회의 핵심을 이루는 ‘사목자들’조차도 이러한 진리에 대한 증언을 꾸준히 해오고 있지 못한다 ; 교회 내부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바리사이즘의 잔재가 남아 있다. 교회와 관련된 문제들이 항상 평온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이러한 철저한 진실성을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체적인 말씀을 통해서도 드러내 보이시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반대자들의 위선적 가면을 벗기신다:“이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18절).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전혀 예기치 못했던 명쾌한 대답을 해주심으로써 자칫하면 로마의 협력자로 몰리거나 아니면 광신적인 회복주의자로 몰릴 수 있는 정치적 궤변에 말려듦이 없이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다.

  사실, 이 경우에 예수의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게임은 아주 쉬워 보였을 것이다:만일 예수께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야한다고 대답하시면, 그들은 그 당시 로마의 억압에 치를 떨며 특히 열성당원들의 지취 아래 혁명과 전복을 꾀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께 대한 불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또 만일 세금을 내지 말라고 대답하신다면, 로마 정부에 대한 적대적 반역자로 당국에 그를 고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연 함정이 완벽하게 짜여졌던 것일까?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문제를 아주 근본적인 관점에서 파악하신다. 즉 ‘예’, ‘아니오’를 답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정치적 사회적 규정들이 인간들이 살고 있는 역사 속에서 어느 정도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일치하며 또 어느 정도로 성실히 그 계획의 실현을 돕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문제로 보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 있었던 상황에서부터 출발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황제에 의해 만들어진 돈을 상거래시에 사용한다는 것은 그들이 사실상 로마에 예속되어 있음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신다. 즉 황제의 통치권이 합법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로 함축적으로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담긴 의미이다 :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하고 물으셨다.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19-2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즉시 말씀하시는 것처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는 말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하지만 예수의 대답이 여기서 멈추고 말았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금씩   조금씩 로마를 거슬러 벌이는 대량학살의 위험을 무릅쓴 투쟁에로 몰고 가고 있었던 열성당원들에게는 분명히 부족했던 판단력과 지혜를 드러내 보이는 것 외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절). 이 구절의 혁신적인 중요성은 뒷부분에 있다. 하지만 이 뒷부분은 앞부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카이사르로부터 출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도착점은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의 ‘카이사르’와 ‘하느님’



  예수께서는 카이사르와 하느님을 강조하시면서도 항상 뒤섞여 혼돈되기 쉬운 그 두 실체를 내지는 그 둘의 활동 영역을 명백히 구분하신다. 고대 동방의 관념 특히 이집트인들의 관념형태에 따르면, 왕은 모든 현실적인 일에 있어서 마치 신과 같이 취급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로마에까지 이르렀고 그렇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황제들을 ‘주님’(kyrioi)이라고 불렀다(1고린8,5참조). 현대 사상에 있어서도, 특히 ‘전체주의적’ 사상에 있어서 모든 진리와 윤리성의 원천을 국가나 당이나 또는 사회적 계급이라고 여기고 있는 점을 잘 생각해 보라. 역사가 인간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그 두 실체를 구별하시며 그것들이 각기 요구하고 있는 서로 다른 행동을 뚜렷이 구별하신다. 마치 열성당원들의 생각처럼 하느님께서 오직 자신의 현존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일종의 지상적 ‘신권정치체제’를 필요로 하신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이방인 고레스가 하느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라고 불릴 수 있었음을 보았다.

  이것은 아무리 넒은 정치 영역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차원을 망라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차원은 정치 영역을 무한히 넘어서 간다. 바로 이런 까닭에, 주님께서 잠시 주셨다가 거두어가신(1978년 8월 26일-9월 29일) 교화 요한 바오로 1세가 감명 깊은 담화(1978년 9월 20일자 담화)를 통해 한 말처럼 ‘인간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

  하지만 두 실체는 구분되면서도 또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국가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의무는, 국가가 내게 모든 인간 생활에 있어서 뛰어난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느님과의 진실된 종교적 관계를 실현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는 한에서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는 전혀 예기치 않은 획기적인 단언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말은 국가를 그 기능과 구조의 다양성을 통해 완성시켜 나가야 할 정치적 ‘봉사’자체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실 지금 이야기는 정치 조직체의 입장에서 믿는 이들의 양심을 위한 어떤 종교적 공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런 것은 말하나마나이며, 그 이상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를―단순한 시민으로서든 국가의 법과 여러 가지 활동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든―포함하게 되는 ‘정치적’ 봉사 자체는 정의와 평등과 형제애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 등 정확히 말해 ‘공동선’의 요구를 실현시킴으로써 그에게 있어서 마치 ‘하느님께 바쳐지는’ 예배처럼 느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런 경우에만 ‘인간의 나라’는 비록 ‘하느님의 나라’ 그 자체가 결코 될 수는 없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그 성장을 돕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비신자라 하더라도 우리가 이미 강조했듯이, 만일 사도 바울로의 가르침대로 “참된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필립 4,8)을 항상 추구하는 근본적으로 성실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어느 정도 실현시켜 나갈 수 있다.

  어째서 이 모든 사실이 오늘날 크리스찬들―그들이 사회에서 어떤 책임을 맡고 있든지간에―의 ‘시민적’ 양심에 심각한 문제들을 던지고 있는지를 분명하다 : 한 예로서 낙태 문제를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는 정치적 봉사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인정하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봉사가 하느님의 요구를 존중하고 실현시킨다는 조건이 선행될 때의 이야기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권리와 그것을 세상에-시민 ‘불복종’을 감행해서라도-선포하고 증거해야 할 크리스찬적 ‘양심’의 신성불가침적 장벽을 모든 세속적 권력-민주주의적 권력이라 하더라도-의 탈선과 부패를 막기 위해 세워놓으셨다.

  바로 여기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21절)라는 대단히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마지막 구절의 ‘혁명적’인 새로운 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분명히 이 같은 사실은 신앙의 빛과 사랑의 정신 그리고 항상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희망으로 성숙된 크리스찬적 양심을 전제로 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가 데살로니카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한 오늘 제 2독서의 내용이 바로 이에 관한 것이다. 그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의 복음적 메시지에 대한 친밀한 일치를 태도를 상기하고 있다 :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여러분의 믿음의 활동과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준한 희망을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1데살1,2-3).

  이렇듯 강한 종교적 노력의 분위기 속에서 살 수 있는 크리스찬이라면 다른 많은 형제들-신앙이 다르더라도-과 접촉을 하며 살게 되는 시민 공동생활에도 어떤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들에게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지만 ‘카이사르’ 위에 계신 분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행위를 포함한 모든 행위의 올바름을 판단해주는 ‘최종적’ 가치요 결정적 기준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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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연중 제 29주일 주일 강론 모음에 1개의 응답

  1. user#0 님의 말:

     

    연중 제29주일

    제 1 독서 : 이사 45, 1. 4-6

    제 2 독서 : 1데살 1, 1-5ㄴ

    복     음 : 마태 22, 15-21


    제 1 독서 : 기원전 6세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도 바빌론에서 유배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제2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제국의 멸망을 감지했다. 바빌론 제국을 누르고 떠오르는 별은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였다. 고레스는 피정복 민족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그들의 관습을 존중하는 임금으로 이미 뭇민족에게 알려져 있었다.

    제2 이사야 예언자는 고레스에게서 메시아의 임무를 알아차렸다. 즉 고레스가 비빌론을 쳐부수고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생활을 끝나게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45, 1)는 수사학적 과장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고레스는 어디까지나 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일 뿐이다. 고레스를 일으켜 세우신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레스를 일으켜 세우신 이유는 “나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에까지 알리려는 것이다”(45, 6).

    우리는 여기서 제2 이사야의 유일신 사상을 만나게 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잡신들은 다 헛것이고 오직 주 하느님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제2 이사야의 사상은 특히 이사야 43장 8-13절, 44장 9-20절에 훌륭히 표현되어 있다.


    제 2 독서 :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에서 소란죄 때문에 거의 쫓겨나다시피 도망쳐 나왔다(사도 17, 1-9 참조). 그후 베레아를 거쳐 아테네에 잠깐 머무른 후 고린토에서 전교하여 고린토에 공동체를 세웠다. 이때가 기원후 50년경이다. 고린토에 머물면서도 데살로니카 교회를 염려해서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데살로니카 전서는 신약성서 중에서 제일 먼저 쓰여진 성서이다.

    편지 서두에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신자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사도 일행이 전한 복음이 성령 덕분에 이런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     음 : 예수의 적들은 그분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 그들은 어느 특정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도록 강요했다. 예수께서는 분리주의자들의 편을 들던지 정복자 로마인들의 편을 들던지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함정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셨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게 돌려라.”는 멋진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세속 사정을 뛰어넘는 하느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하셨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연중 제29주일이자 전교 주일입니다. 전교주일은 전교사업에 종사하는 선교사와 선교 지역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돕기 위해 교회가 정한 주일입니다.

    이 같은 취지에 따라 전교주일에는 여느 특별 주일과 마찬가지로 세계 각 교회에서 특별 헌금이 실시되고 기도회와 모금 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됩니다. 전교주일 제정의 모체가 된 프랑스 리용의 전교회가 창설된 것은 1822년입니다. 한국교회의 교구제도가 시작된 해는 1831년이며 조선교구의 사목을 맡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가 이 전교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 전교회는 설립 100주년인 1922년 교황청 사업으로 승격, 현재는 교황청 전교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1962년에 교계제도 설정으로 인해 완전 자립 교회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복음화율이 7, 7%로 신자수는 3,451,266명(1995년 말 기준)에 지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지금도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관할하에 있는 선교 지역입니다.

    전교주일에 우리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점은 순교자들의 피로 쌓아올린 한국교회가 200년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처럼 3백 45만 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성장할 수 있었지만 아직도 무수한 외교인들이 불신앙 속에 버려져 있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근년에 들어서는 해가 갈수록 신자 증가율이 떨어지고 있고, 냉담자가 늘어나는 등 선교에 적신호가 나타나고 있기에 이를 단순히 보아 넘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지난 9월 순교자성월에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 순교자 현양 대회를 각 교구별로 치른 바 있지만, 날로 퇴색되어 가는 순교자들의 그 뜨거운 순교정신과 선교의 열기를 이어받아 선교의 열정을 드높이고 참으로 한국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해 나감으로써 이 사회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뚜렷한 지표가 되고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단순한 종교의식에만 집착하여 종교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리고 하나의 형식 논리에만 집착할 때 교회는 사회와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항거하여 교회가 안전을 외치고 공동선을 주창하였을 때 교회는 많은 이들로부터 희망의 표지가 되었으나 5공화국, 6공화국을 거치면서 문민정부라고 하는 오늘에 이르러 과연 구원과 희망의 등불로서 하나의 청지기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왔는가 하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마태 22, 15-21)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즉 세속의 것은 세속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궁지에 빠뜨려 올가미를 씌우려고 질문을 던졌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던 예수의 명답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세속의 것은 바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을 보다 잘 바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콧 일행이 남극 땅을 밟았을 때 이미 그곳에는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젠이 세워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겨우 5주간의 차이로 선두를 빼앗긴 스콧 일행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낙심한 끝에 오른 귀로는 사투 그대로였습니다. 정면으로 불어는 바람을 안고 뒹굴다 에번스 하사가 죽었고, 동상에 걸린 오츠 대위는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이 잠든 사이에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2. user#0 님의 말:

     

    연중 제29주일

            1. 강길웅 신부(가)/1                     2. 안충석 신부(가)/3

            3. 조규식 신부(가)/6                     4. 김정진 신부(가)/8

            5. 최기산 신부(가)/9                     6. 함세웅 신부(가)/11

            7. 작자미상(가)/14                 8. 작자미상(가):진퇴양난/16

            9. 교구주보(가)/18                 10. 최인호(가)/19


    1         연중 제 29 주일   마태 22,15-21 (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강길웅 신부


    제1독서 이사 45,1.4~6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 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리라) 

    제2독서 Ⅰ데살 1,1~5b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복 음 마태 22,15~21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느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당신 사업의 도구로써 이용하십니다. 그가 악하거나 선하거나 하느님께선 당신 뜻대로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하느님도 되시며 세상 모든 것이 결국 당신의 것이요 당신께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7세기에 유대 나라는 타락할 대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은 썩어 있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벌을 내리시는데 이때 이방인의 왕인 느부갓네살을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빌로니아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모든 것을 때려 부쉈으며 시 전체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백성 모두를 포로로 끌고 가서 혹독한 노예생활을 시켰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도구로서 유대 민족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고생을 하며 많은 반성을 하자 그들을 노예생활에서 건져 준 것도 고레스라는 페르샤 왕이 었습니다. 고레스도 하느님을 믿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그는 비록 우상 숭배자였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데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왜 믿지 않는 이들을 사용하셨느냐? 그들도 결국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 소련의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를 보면서 그는 분명 하느님의 도구로서 이 시대에 큰일을 했음을 보았습니다. 독일이 통일되고 동구가 자유화되어 우리와 국교를 맺는 등, 세상이 이처럼 180도 바뀌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의 뛰어난 역할 때문입니다. 그 역시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고 무엇이 카이사르의 것입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올가미로 묶어 두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속셈들이 다 허사로 돌아가자 이번엔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옭아매려고 했습니다.


    즉,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옳지 않으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엔 굉장한 책략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조국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갖은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큰 모욕적인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로마에 반기를 드는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이렇게 해도 예수님은 걸리게 되어 있었고 저렇게 해도 예수님은 빠져나갈 문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진퇴양난 의 험난한 길을 그냥 뚫고 지나가십니다. 한마디로 넘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가져 오라고 하시며 돈에 새긴 초상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참으로 명쾌한 대답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교묘한 술책을 아무 장애 없이 그냥 넘어 가십니다. 성서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 들도 그 말씀에 경탄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고 했습니다(마태 22,22참조).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무엇이고 하느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고 무엇이 세상의 것입니까?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하느님의 것이요, 선한 이도 악한 이도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악에서 선을 일으키시고 선의 향상을 위해서 악을 이용하기도 하십니다. 악의 존재는 그래서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지 않는다면 마귀가 하느님의 도구로서 모든 것을 다 빼앗을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그만큼 마귀의 지배에서 고통받아야 하며,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면 불의한 심판을 우리 스스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선하게 살고 사랑하며 삽시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삶의 봉헌입니다.


    2            연중 29주일  마태 22,15-21 (가) 카이살 것은 카이살에게

                                                           안충석 신부


    언제 누가 지었는지 모르나 ‘아리랑’ 가사 중에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인간엔 말도 많다”는 감상적 민요는 끊임없이 말썽에 시달려온 민족의 애닮은 한탄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좀 잘 안 되거나 뜻대로 안 되면 말썽을 부린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주로 인간 관계 또는 사회 생활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부조화를 뜻하는 심정에서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말썽 속에 살게 된 우리로서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좀 생각해 봅시다.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은 이 말썽이란 참된 뜻부터 규정해 놓자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십인십색의 각 사람의 견해 차이가 생긴다든지 또는 어떤 같은 문제에 대한 그 해결 방안에 있어서 견해 차이, 즉 대립이 생기는 것이 말썽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인간 사회는 이러한 의지의 말썽은 언제라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피하려고 할 필요조차도 없다고 합니다.


    현대의 심리학이나 사회학이 발견한 사실 가운데 사람의 얼굴이 다 틀리듯이 개인의 차이는 다 다르다는 것은 평범한 진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는 향상되고 발전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악의가 섞이지 않은 말썽은 오히려 사회적으로 이익이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 사회에 있어서 말썽인 문제의 그 요점은 말썽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생길 수밖에 없고 또 어느 정도 생겨야 하는 이 말썽을 어떻게 대하느냐, 또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흔히 이 말썽을 해결하는 방법은 극히 상식적으로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아니구 모두 시끄러워” 하고 어디로 피하는 소극적 태도입니다. 둘째로는 “잔소리말고 가만있어 듣기 싫어” 말썽을 탄압하고 말썽의 뿌리를 숙청해 버리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인간 말썽을 대하고 처리하는 문제의 말썽거리들을 가장 합리적으로 혹은 민주주의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이러한 불평 불만이 나타나게 되면 문제의 그 기관, 또는 조직체에 숨어 있는 어떤 불합리에 대한 경고라고 여기어서 자기를 깊이 반성해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썽을 부리면서 생트집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던져진 질문은 그 대답이 유대 민족의 주체성을 모독하거나, 즉 전통적이며 민족적인 종교에 반대되는 대답이 아니면 로마 대제국을 반대하는 대답일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인 생트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썽은 악으로 가득 찬 음모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종교적인 고집쟁이의 대표자이며 인간화된 종교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자비심의 그림자도 얼씬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선으로 굳어져 버려 불투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위선적이고 간악한 인사말 좀 들어 보십시오! 스승은 진실하시며 또 진리로 천주의 길을 가르치시며, 아무에게도 사정을 두지 않으시니, 하면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공손한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뺨을 치기 위하여서 악수를 청하는 것입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도 좋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대답하신다면 유대민족들에게는 민족 반역자로 몰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난처한 기로에 서신 예수님께서는 보기 좋게 정정당당하게 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 사실 그들이 돈에는 로마 총독 카이사르의 상이 새겨 있었으니 그 사실은 세금 바쳐 왔다는 증명이기에 하등의 말썽도 안 되는 생트집 이였던 약점을 예수님께서는 보기 좋게 찔러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것은 신께로 가는 길가에서 있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해서는 국민으로서 이행해야 할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종교를 구실 삼아 국민의 의무를 도피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적 윤리 생활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이라면 먼저 이 세상 조국의 국민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사도행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저 육신 사리기에 정신이 없어서 하느님께 바치질 못하고 있습니다.”하고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런 분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라고 대답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육신 살기에 정신이 없고 도저히 정신 생활은 할 겨를이 없다면야 어디 그게 온전한 삶이겠습니까? 또한 육신을 살리는 길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바로 어제 위령의 날 추사이망 축일을 지냈습니다만 그렇게도 대단하던 육신이 죽음 앞에선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인간은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죽을 운명에 놓여 있지만 또한 영혼을 지녔기 때문에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 인간일진대 인간의 승리는 영혼과 육신 그 중 어느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데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육신도 제 대접을 받아 마땅하고 영혼도 제 대접을 받아 온전한 인간을 천주께 바쳐 드리는 것이 우리의 참된 생활입니다. 그러나 육신만을 위해 짓눌린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땅에서 썩고 있으란 말입니까?


    물론 영혼에 대한 육신 욕구의 울부짖음은 너무나 강하고 정당하게 들리기도 한 것입니다. 자연 신앙에 눈이 어두운 우리 육신에게는 눈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곧 행복인 양 엄청난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발아래 펼쳐진 땅덩어리건 눈앞에 나타난 여인이건 또는 패물과 권력이건 손에 당장 잡히는 것에 대한 유혹이 우리의 입맛을 돋구는 인생의 수수께끼 앞에 횃불을 켜 들고나서는 인간 욕망의 지상 편력 또한 그 얼마나 장엄한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의 이런 고통도 결코 엇된 것이 아님을 눈 깜짝할 사이 알게 될 것입니다.

    육신도 제나름대로의 발버둥 속에서 자기 성화와 단련을 세상에서 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육으로 잘 살아야 합니다. 신자라고 해서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란 법은 그리스도 법에 어긋납니다. 사실 우리 교우들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우리 육신이 제대로 잘못 산다면 우리 영신은 얼 만큼 잘 살고있나 솔직히 한번 생각해 볼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 우리가 남들처럼 잘사는 것이 우리 영신생활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이 결정적인 원인이겠습니까? 물론 부정을 못해 음성 수입이 없다는 이유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만 음성 수입 없이 잘못 사는 것은 잘 사는 것보다 몇 천 배 더 옳게 사는 것이올시다. 만일 우리가 영신생활도 제대로 못한대서야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또한 영혼도 육신도 잘 못 사는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이 결과적으로 되고 만 셈인 것을 여러분은 명심하시오! 왜 어찌하여 교우들께서는 두 세상에 살려고 이중 생활에 허덕이십니까?


    한 세상 살기에도 남들은 죽겠다는데 신앙 생활 따로 하고 육신이 사는 생활 따로 하고 영혼과 육신을 갈라놓으시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죽음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도 저 세상에 살기 위함이니 신앙 생활고 세상 생활을 갈라놓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영혼과 육신을 갈라놓는 죽음처럼 영원한 죽음뿐입니다. 우리의 주체할 길 없는 육체를 거룩하게 하고 눈에 보이는 불멸의 세계와 눈에 안 보이는 세계가 하나가 되어서 천국의 노래는 아름답게 화음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다른 하나의 물방울 속에 녹아 더 커다란 물방울을 이루듯이 우리의 영혼이 생명 곧 하느님 안에 하나되는 신비가 바로 우리의 보람있는 삶인 것입니다. 지난번에 현 교황 바오로께서 발표하신 하느님의 백성 신경에서 우리는 이런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교회는 그 품안에 있는 모든 자녀에게 이 세상에는 영원한 도시가 없다고 언제나 권고하면서도 또한 그들을 분발시켜 각자의 생활 환경과 가능한 수단으로 자신의 인간사회를 발전시키고 사람들 사이의 진리와 평화와 형제적 화목을 촉진한다는 내용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을 현명하게 잘 살아가는 사고 방식 즉 비법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그저 세상 사느라고 천주님 공경과 사랑을 제대로 못합니다.” 하시는 교우들께 저는 그리스도 입을 대신해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여러분 가슴에 살아 게신 양심에다 소리 높이 외치며 대답합니다. 아멘.






    3             연중 29주일   마태 22,15-21 (가) 카이살 것은 카이살에게

                                                          조규식 신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시오.


    훌륭한 인물에 대한 주의 사람들의 모략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있어왔던가 봅니다. 이러한 비틀어진 양심은 아마도 불완전한 인간성의 한  발로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도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주의 사람들로부터 모함을 받으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언 듯 보기에게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 속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비틀어진 저의가 내포된 것이었습니다. 이 짤막한 질문의 뜻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인들에게 정복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토지세, 소득세, 인두세 등의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로마의 황제인 카이사르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이 세금을 내는 일을 싫어했으며 특히 종교적인 이유에서 이를 더욱 분개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왕이었으며 어떠한 지상의 왕도 인정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납부한다는 것은 그의 왕의 직책의 타당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유일한 왕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이방의 왕에게 세금을 내는 일을 목숨을 내 놓고 반대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든 간에 난관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지불하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면 그들은 즉시 로마 관헌들에게 예수님을 고발할 것이며 그러면 예수님은 선동자로 체포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세금을 내는 일이 합당하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예수님은 로마 권력에 아부하는 편으로 몰리게 되어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백성들로부터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퇴유곡의 질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결코 길고 어려운 답변을 하시려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들이 세금으로 바칠 화폐에 새겨진 상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카이사르 것이라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도 그 이상 훌륭한 답변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질문을 던진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오히려 할 말이 궁색해졌던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시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좀 더 숙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국가가 해야할 고유한 업무에 교회가 간섭하지 않으며, 교회가 해야할 고유한 업무에 국가가 간섭해서는 않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에 대해서 가져야 할 올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가 요구하는 정당한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어줍니다. 국가는 법을 파괴하는 자들로부터 국민을 보호해 주며 국민들에게 여러 가지 편리한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국민들은 누구나 국가에 대해서 이러한 혜택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국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 해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가 국가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거나, 세금을 바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상충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일에 있어서 비 신앙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한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종교와 국가 사이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인이며 동시에 한 국가의 국민입니다. 인간은 윤리성과 더불어 사회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책에 있어서도 윤리성이 문제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되는 가족 계획의 방법들이 정부 시책으로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반자연적인 국가의 요구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도 국가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 속해있다는 경우에는 하느님의 요구가 앞서야 할 것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시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당시 예수님을 모독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의 말씀이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적 시민 생활의 원칙을 제시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국가의 정당한 의무를 이행하는 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국가의 정당한 의무를 이행하는 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더구나 그릇된 요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훌륭한 사회를 이룩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4            연중 제29주일  마태 22,15-21 (가) 카이살 것은 카이살에게

                                                         김정진 신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시오>(마태 22: 21).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원수들의 간악한 술책을 보기 좋게 물리치실 뿐더러 어느 세대나 적용되는 시민생활의 규범을 명시해 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만일이라도 예수님의 대답이 경솔할 것 같으면 당장 예수님은 로마 총독에게 고소당할 처지였습니다.


    친애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그 당시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쳐야 좋은지 어떤지 갈피를 못 잡고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 황제라는 뜻인데 그 때는 티베리우스가 황제였습니다.


    당시의 유대의 학교에서는 약탈자인 로마제국에 세금을 바쳐야 옳은가 그른가에 관하여 맹렬한 논쟁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왕은 야훼인 하느님 뿐 이었으므로 타국에 공물을 바친다면 야훼를 모욕하는 짓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공물을 바치는 행위는 바로 이스라엘의 독립과 메시아 내림의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백성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느님의 군주권에 대한 불경죄라고 간주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세금을 바쳐도 좋다고 대답하신다면, 그것은 즉 외국인의 통치를 승인하는 것이며 야훼의 지상권(至上權)을 모독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금을 납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면 의심이 많던 로마 정부의 분노를 사게 되리라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원수들은 예수님을 말로 트집 잡아 꼼짝달싹 못하게 하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야말로 명쾌하고도 탁월한 대답으로 응수하였습니다.


    신자 여러분! 예수님은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이 모든 올가미를 무찌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과세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대답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원하지 않든 화폐의 그림과 초상이 카이사르의 것이고 카이사르를 대표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화폐는 카이사르의 소유이며 카이사르를 통해 이 지방에 유통되는 것이므로 카이사르가 이 지방에 과세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컨데 카이사르의 초상과 글자가 있는 화폐는 카이사르의 것이니 의당 카이사르에게 바치는데 아무도 의심할 이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것은 또한 마땅히 하느님께 바쳐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성경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상이 인간들 안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간은 하느님의 소유물이고 하느님의 것이므로 하느님의 것은 당연히 하느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즉 인간은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께 존경과 겸손과 봉헌의 세금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의 생명, 건강, 행복이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면 인간이 잠시 차지하고 있는 금전이나 권세, 명예나, 재물, 부귀와 영화 따위는 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위탁받은 것이니 이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한 하느님의 사업을 위하여 봉헌하며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어찌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채무자입니다. 하느님께 빚을 갚아 들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은 카이사르의 것을 주는 것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것을 하느님께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이야말로 또한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줄 마음의 태세가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의롭고 신앙에 성실한 이라면 어떤 압력과 폭행을 당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드리지 않고 카이사르에게 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부정과 부패가 팽창하고 부조리가 행세하는 사회와 타협하는 일이 없고 인권 유린을 다반사로 하는 현실과는 공존을 불허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씀은 나라에 세금을 바칠 뿐 아니라 성전에 납부하는 헌금에 대해서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둘은 상호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느님의 뜻이요, 섭리라는 것입니다. 즉 지상의 정부에 대한 국민의 의무와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정의(定義)지어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세속의 권위를 구별하시고 이 둘은 상호 모순되고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하느님께 와 그리고 국가에 대하여 일정한 의무를 준수해야 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해서 충성을 다하고 또 우리의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충성스러워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법이 하느님의 뜻에 반대될 때만이 우리는 그 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멘.





    5             연중 제29주일   마태 22, 15―21(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최기산 신부

     유다인 가운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하던 중 자기 제자들과 유다인들 중에서 로마인들과 친하게 지내던 헤로데 당원 몇 명을 예수님께 보내서 ꡒ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ꡓ라는 난처한 질문을 하게 했다. 만일 옳다고 하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다니 ꡐ매국노ꡑ라고 몰아붙일 판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왕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기에 로마 황제에게는 세금을 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일 예수께서 옳지 않다고 대답하면 함께 있던 헤로데 당원들이, 로마에 반기를 드는 적색분자라고 낙인찍고 로마 총독에게 고해 바칠 것이 뻔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난감한 처지를 한번만 당하신 것이 아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ꡒ예수님께 돌로 쳐야 하느냐, 치지 말아야 하느냐ꡓ고 질문한 적도 있었다.(요한 8, 1―11)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ꡒ동전에 누구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가? 카이사르의 것이 새겨져 있다면 카이사르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쳐라ꡓ하고 현명하게 답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것은 어떤 것일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우리나라 국민은 국세․지방세․부과세․오물세․소득세 등등 많은 종류의 세금을 내야 한다. 이렇게 세금을 내는 이유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즉 국가는 고속도로․댐을 건설하고, 안전을 위해 경찰을 배치하고, 보건소를 설치하여 건강을 보장해 준다.


    그런데 항상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들은 별의별 편법을 동원해 조금 내고 월급내역이 그대로 드러나는 월급 생활자들만 많이 내는 실정이다. 부자들은 세금을 조금 내기 위해 때로는 세무 공무원들의 주머니에 하얀 봉투를 넣어주기까지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완전히 공평한 세무행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우리나라는 세금을 많이 걷기는 하지만 그동안 불평등하게 쓰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은행이 정치권에 수백, 수천억을 부당대출 해 주는 과정에서 구린내 나는 얼마의 돈을 챙기는 진드기 같은 인간들이 있었다. 그 결과 은행이 망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그 은행의 빚을 메우어주느라고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대마 불사라는 기치 아래 대기업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려간 뒤 부도가 난다며 벌렁 누워서는 ‘아이고 나 죽는다ꡑ고 아우성을 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ꡒ아이고 돈좀 주소, 돈좀 주소. 돈이 약이라오. 그 약만 주면 우리 회사가 힘을 얻어서 일어난다오ꡓ라며 울어대는 바람에 국민의 혈세는 또 그리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또 얼마나 했던가? 이렇게 해서 국민의 세금은 파먹는 놈이 임자라고 너도나도 따다가 흥청망청 쓰기 바빴다. 멀쩡한 길바닥을 뜯어고치는 것은 보통이고, 각 국영연구소들도 비싼 기기들을 마구 들여다가 썩이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왜들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정치인중에 천주교 신자가 많다면 정직한 사회를 이룩하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세금을 내는 국민들 중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많기에 우리가 먼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정당한 세금을 내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또 세무 공무원직에 있는 신자들은 정직한 인생이 행복한 인생임을 몸소 보여 줘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오늘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의 모습이 새겨진 돈이 카이사르의 것이었다면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의 모습이 박힌 것들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창세기를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됐다고 했다. 인간의 모습은 곧 하느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 나는 하느님께 바쳐진 존재인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마음, 인격, 학식, 명예, 육신, 영혼 등등,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ꡒ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ꡓ(마르 12, 30 : 신명 6, 4―5)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따라야 한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가? 나 자신을 다른 것에 다 바치고 있으면서 입으로만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 이외에 우리가 섬길 다른 신이 어디 있겠는가!(이사 45, 5―6)


    그러나 우리는 때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질렀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할 때가 있다. 우리는 맘몬 즉 물질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찰해봐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자연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까지 내주셨으며 죽음을 이기고 영생으로 들어갈 자격도 주셨다. 아니 주신 것 없이 다 주셨건만 우린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더란 말인가? 나 자신, 내게 속한 것들을 모두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을, 사색의 계절인 이 가을에 마음 가득 담아볼 수는 없을까!






    6           연중 제29주일   마태 22,15-21 (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함세웅 신부


    지금까지 우리는 공격적인 입장에 서신 예수님을 보아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을 규탄하셨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마태 22,27-32)에서 유다 지도자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될 순종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악한 농부의 비유(마태 21,32-46)에서는 그들이 악한 농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의 잔치의 비유 (마태 22,1-14:7)에서는 그들은 초대를 거부했기 때문에 저주받은 손님들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반격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꾸며진 질문을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이 궁지에 몰리게 하려는 계획입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실로 교활하고 음흉하게 꾸며진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은 로마 황제의 지배 아래 있는 피지배지였습니다. 황제의 지배 아래 있는 유태인들 앞에서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예수님에게는 진퇴양난의 문제였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금을 지불하는 것이 합당치 못하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즉시 로마 관리들에게 예수님을 선동자로 고발할 것이며 그러면 그는 체포될 것이 확실했습니다. 만일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게 될 것이며, 그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세금 내기를 싫어하고 있으며, 특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더욱 분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만이 유일한 왕이었습니다. 어떤 지상의 왕에게 세금을 납부한다는 것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느 쪽으로 대답하든지 간에 난관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질문자들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기대한 것입니다.

      

    이 공격이 얼마나 심각했었느냐 하는 것은, 이 질문을 하는 데 있어서 바리사이 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연합 전선을 펼친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보통으로 이 두 파는 지독한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 파 사람들은 최고의 정통주의자들로서, 이방의 왕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하느님의 신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분개하던 파들이었습니다.


    한편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의 힘을 빌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갈릴레아의 왕 헤로데의 일파로서 로마에 적극 협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상반되는 두 파가 예수님에 대한 공통적인 증오와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공통적인 야망 때문에, 잠시 동안 적개심을 잃어버리고 어색한 동료가 되어, 예수님께 공격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현명하시게도 그들의 올가미를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화폐를 보여 달라고 하시고, 그 화폐에 새겨진 상이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카이사르의 상이라고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이었으며, 어떤 왕이 왕위에 오르면 즉시 자기의 화폐를 발행하였습니다. 그 화폐는 분명 카이사르의

    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카이사르의 것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현명한 이 대답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칙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이중적인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지상국가의 한 시민입니다. 시민으로서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으며 국가에 대해서 의무를 부담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국가에 대하여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선한 시민으로서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크리스천으로서 실패입니다. 크리스천이 국가 행정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여, 이기적이고 편파적인 사람들에게 정치를 맡겨 버린다면, 국가에 충실한 크리스천은 아닐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또한 하느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이 두 가지 시민권은 서로 상충할 경우도 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반드시 대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일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할 때에, 반드시 그것을 실천해야 할 것이며, 어떤 일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항거해야 하고, 결코 참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약성서의 사상은 크리스천 개인과 국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국가는 하느님에 의하여 제정되었습니다. 국가의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국가의 법률이 없다면 인간의 생활은 혼란 상태를 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기 위한 법률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공동 생활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국가가 없다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유용한 시설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으로서 상수도, 하수도, 교통기관, 사회복지 시설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생활하게 하는 모든 일의 원천입니다.


    둘째, 국민은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는 한 국가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국가의 혜택은 즐겨 받으면서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입니다.

    세째,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는 자들이 내민 화폐에는 카이사르의 모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카이사르의 것이 됩니다.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모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 1,26-27) 그러므로 사람은 하느님에게 속합니다.

      

    물론 국가가 정당한 요구를 국민에게 할 경우 모든 국민은 거기에 대하여 충성과 봉사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국가도, 인간도 모두 하느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국가의 요구가, 국가의 제반 행위가 하느님의 뜻과 상반될 때에는, 단연코 하느님께 대한 충

    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선행되기 위해서 최악의 경우에는 국가의 권력과 충돌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몰지각한 사람은 국가의 권한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만 강조할 줄 알았지, 그 귄한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해야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몰지각한 사람은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한 루이 14세의 말이 절대 진리인 양, 오해하고 있어서, 자신이 국가인 양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몇몇 경우를 제외한 일반적인 환경 아래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신자들이 비신자들보다 더 선량한, 더 충성스런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와 백성들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진리입니다. 






    7                   연중 제29주일   마태 22,15-21 (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 사랑이 완전할수록 순종도 완전하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이시다. 하느님의 생명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영원히 완전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주는 것이다. 사랑이 완전할수록 주는 것도 완전하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는 완전한 사랑으론 자기의 모든 것을 상대 위격에게 줌으로써 완전히 하나로 일치해 계시는 분이시다.

      완전하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상호간에 자신을 완전히 주고받는 이 무한한 사랑이 오고 간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상호간에 오고 가는 무한한 사랑이 하느님의 지극히 완전한 기쁨을 이룬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하는 데서만 기쁨을 얻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완전한 사랑으로 영원히 사랑하시는 기쁨 속에 사신다. 하느님의 사랑이 완전하듯이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서 누리시는 기쁨도 완전하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을 홀로 누리길 원치 않으셨다. 하느님의 넘쳐흐르는 사랑은 하느님의 영원한 기쁨을 나누어 줄 또 다른 대상을 원하셨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인 자유의지를 하느님께 선물로 받았다. 자유의지는 사람이 하느님께 받은 가장 고귀한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선물이 그렇듯이 자유의지도 선물이며 동시에 시험이다. 더없이 고귀한 선물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자신을 돌이리 수 없는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선물인 것이다. 어떤 선물이든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면 유익하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 사용하면 해롭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기간은 자유의지를 시험받는 기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당신의 뜻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하느님의 뜻만이 완전하고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따를수록 온전해지고, 선해지고, 의로워지고, 거룩해진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완전할 수록 순종도 완전하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따르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계명은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이 세상의 생애를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삶으로써 사랑하는 존재가 될 줄 아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기쁨을 주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젓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0-11)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모두가 침략자인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어쩔 수 없이 바치고 있었다. 복음서에 소개되는 가장 완고한 죄인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 예수님께서는「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고 답변하신다.


      이 말씀으로써 시간의 한계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영원을 향해 끌어올리신다. 로마황제에게 바쳐야 할 세금보다 하느님께 바쳐야 할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세금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신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세금은 자유의지라는 하느님의 최상의 선물을 가지고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것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래야만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존재를 만들어서, 하느님의 영원한 기쁨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는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을 탈세하는 행위가 된다. 죄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듬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상실하게 한다. 사람이 하느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고, 하느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로마황제에겐 세금을 바치면서도 죄를 뉘우치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황제의 법을 어기는 데 따라오는 일시적인 벌은 두려워 하면서도,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데 따라오는 영원한 벌은 두려워 할 줄 몰랐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은 하느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한다. 하느님의 눈보다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고, 하느님의 심판보다 사람들의 평판에 더 관심을 갖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더 노력한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 하지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리워하여라.」





    8         연중 제29주일   마태 22, 15-21 (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진퇴 양난


      유다인 가운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올가미를 씌울까 하고, 궁리하던 중 자기 제자들과 유다인들 중에서 로마인들과 친하게 지내던 헤로데 당원 몇 명을 예수님께 보내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는 난처한 질문을 하게 했다. 만일 옳다고 하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다니 ‘매국노’라고 몰아붙일 판이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왕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기에, 로마 황제에게는 세금을 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일 예수께서 옳지 않다고 대답하면 함께 있던 헤로데 당원들이, 로마에 반기를 드는 적색분자라고 낙인찍고, 로마 총독에게 고해 바칠 것이 뻔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난감한 처지를 한번만 당하신 것이 아니다. 바리사이과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돌로 쳐야 하느냐, 치지 말아야 하느냐”고 질문한 적도 있었다. (요한 8,1-11) 이리봐도 저리봐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전에 누구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가? 카이사르의 것이 새겨져 있다면 카이사르에게 바치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쳐라”하고 현명하게 답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것은 어떤 것일까?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세금문제

     우리나라 국민은 국세․지방세․부과세․오물세․소득세 등등 많은 종류의 세금을 내야 한다. 이렇게 세금을 내는 이유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즉 국가는 고속도로․댐을 건설하고 안전을 위해 경찰을 배치하고, 보건소를 설치하여 건강을 보장해 준다. 그런데 항상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들은 별의별 편법을 동원해 조금 내고, 월급내역이 그대로 드러나는 월급 생활자들만 많이 내는 실정이다. 부자들은 세금을 조금 내기 위해, 때로는 세무 공무원들의 주머니에 하얀 봉투를 넣어주기까지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완전히 공평한 세무행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또 우리나라는 세금을 많이 걷기는 하지만, 그동안 불평등하게 쓰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은행이 정치권에 수백, 수천 억을 부당대출 해주는 과정에서 구린내 나는 얼마의 돈을 챙기는 진드기 같은 인간들이 있었다. 그 결과 은행이 망하고 국민의 세금으로 그 은행의 빚을 메우어주느라고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대마 불사라는 기치 아래 대기업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빌려간 뒤 부도가 난다며 벌렁 누워서는 ‘아이고 나 죽는다’고 아우성을 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이고 돈 좀 주쇼, 돈 좀 주소, 돈이 약이라오! 그 약만 주면 우리 회사가 힘을 얻어서 일어난다오”하며 울어대는 바람에 국민의 혈세는 또 그리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또 얼마나 했던가? 이렇게 해서 국민의 세금은, 파먹는 놈이 임자라고 너도나도 따다가 흥청망청 쓰기 바빴다. 멀쩡한 길바닥을 뜯어고치는 것은 보통이고, 각 국영연구소들도 비싼 기기들을 마구 들여다가 썩이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왜들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복음의 메시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정치인중에 천주교 신자가 많다면 정리한 사회를 이룩하는데 암장서야 할 것이다. 세금을 내는 국민들 중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많기에 우리가 먼저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정당한 세금을 내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또 세무공무원 직에 있는 신자들은 정직한 인생이, 행복한 인생임을 몸소 보여 줘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오늘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의 모습이 새겨진 돈이 카이사르의 것이었다면,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의 모습이 박힌 것들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창세기를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했다. 인간의 모습은 곧 하느님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 나는 하느님께 바쳐진 존재인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마음, 인격, 학식, 명예, 육신, 영혼 등등,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마르 12,37;신명 6,4-5)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따라야 한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가? 나 자신을 다른 것에 다 바치고 있으면서, 입으로만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 이외에 우리가 섬길 다른 신이 어디 있겠는가?(이사 45,5-6)


      그러나 우리는 때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저질헌턴 잘못을 그대로 답습할 때가 있다. 우리는 맘몬, 즉 물질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찰해 봐야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자연뿐만 아니라 당신의 아들까지 내주셨으며, 죽음을 이기고 영생으로 들어갈 자격도 주셨다. 아니 주신 것 없이 다 주셨건만 우린 주님께 드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더란 말인가? 나 자신, 내게 속한 것들을 모두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을, 사색의 계절인 이 가을에 마음 가득 담아볼 수는 없을까! 




    9      연중 제29주일   마태 22,15-21 (가) 황제에게 바치는 주민세에 관한 대담

    교구주보 


    1. 머리말


    예수께서는 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많은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셨다. 그때 예수님의 적수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적수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바리사이들이다.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 식민정권에 빌붙어 권세와 부귀를 누리던 헤로데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이 두 적수들은 평상시에는 상종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반대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워 제거하려는 음모의 일환으로 그 시대에 가장 어려운 문제인 납세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2. 대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예수께 와서 주민세 납부 문제를 두고 매우 난처한 질문을 던진다. “황제에게 주민세를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다. 만일 예수께서 세금을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신다면 민족 배반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바쳐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신다면 국사범으로 고발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세금을 바쳐라, 또는 바치지 말라고 답하지 않으시고 적수들이 가져온 데나리온 한 닢을 받으시고 “이 초상과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신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

    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 우리의 이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매일매일 황제의 흉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사용함으로써 황제의 주권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니 황제가 주민세로 데나리온을 요구하면 납부해 마땅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라”는 말씀의 논리(論理)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라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황제보다 훨씬 더 높으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말씀이다. 그럼 “하느님의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 자신(창세 1,27)이라 하겠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은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 마음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 금력의 상대성과 하느님의 절대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신 말씀이다.


    오늘 우리는 보이는 권력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위해서는 마지못해서 최소한의 것을 바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있는가, 아니면 황제에게 바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들의 가치관이나 신앙에 있어서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황제에게 바쳐야 할 것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10               연중 제29주일   마태오 22,15-21 (가) 無所有

    최인호(베드로) /작가


    고려말의 학자이자 명신(名臣)인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은 호가 매운당(梅雲堂)인데 유명한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를 지은 시인이기도 합니다. 소년 시절 그는 형과 한강가를 걸어가다가 금덩어리를 주웠습니다. 하나씩 나누어 가진 형제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있었는데 동생 조년이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묻자 조년이 대답하였습니다.


    “형님, 금덩어리를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 졌어요. 형님이 없었더라면 내가 몽땅 가질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형님 것을 뺏고 싶다는 충동까지 생기지 뭡니까. 그래서 황금이 요물임을 깨닫고 버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도 금덩이를 한강에 던지며 “나도 너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우리 사이에 금이 갈 뻔했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형제가 금을 던진 양천나루를 ‘금덩어리를 던진 여울’이라는 뜻으로 투금탄(投金灘)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려조의 마지막 보루였던 최영(崔瑩) 장군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가훈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황금을 모든 재앙의 근본으로 본 청빈사상은 우리의 선조들이 지닌 최고의 덕목이었습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수도생활의 특성을 이루는 3대 요소로 ‘청빈, 정결, 순명’을 꼽습니다. 특히 청빈의 성인으로 유명한 프란치스코는 최영처럼 “돌덩어리보다 돈이나 황금을 더 쓸모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라고 경계했습니다.


    유다인 학자들은 예수를 올가미 씌우기 위해서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는 질문을 던지고 옳다는 대답이 나오면 예수를 로마의 앞잡이로 비난하고, 옳지 않다는 대답이 나오면 로마에게 저항한다며 고발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들의 간악한 속셈을 아시고 “어찌하여 나의 속을 떠보느냐.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2,15-19).


    이것으로 주님께서는 한푼의 돈도 소유하고 계시지 않았던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져온 데나리온 한 닢은 당시 로마인들이 만든 은전으로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화폐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할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마태 10,9)고 분명히 못박으십니다. 주님은 이처럼 완전한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하셨습니다. 돌아가셨을 때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께서 만들어준 것이 분명한 ‘혼솔 없이 통으로 짠 속옷’(요한 19,23)을 입고 계셨는데 이것도 로마 병정들이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황금만능의 물질주의 시대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은밀하게 부정한 방법으로 돈주머니를 채우는 유다(요한 12,6 참조)와 돈의 일부를 빼돌리는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사도 5,1)의 행위에서 벗어나 황금을 강물 속에 던져버리는 이조년 형제의 선비사상을 본받고, 주님의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할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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