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던 혼란의 시대에 완성한 베토벤의 걸작으로 베토벤 자신이 제목을 붙이진 않았지만 악상이 화려하고 장대하며 숭고하다고 해서 ‘황제’라는 별칭이 붙여진 이 곡은 그의 교향곡 3번 ‘영웅’과 함께 대표적인 정치적(?) 작품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베토벤은 한 때 나폴레옹을 ‘혁명’의 실현자로 크게 흠모했었다.
그러나 이후 나폴레옹이 혁명의 정신을 버리고 황제로 등극하자 실망한 나머지 그를 위해 작곡했던 ‘영웅’교향곡 원고를 찢어 버릴 정도였다. 피아노 협주곡 ‘황제’역시 나폴레옹과의 인연이 짙은 작품인데, 이 작품이 탄생할 무렵이던 1808년,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 보나빠르뜨가 베토벤에게 일생동안 연금을 지불하겠다는 조건으로 독일 궁정 악장에 초빙하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비엔나의 귀족들은 베토벤을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연금을 모아 베토벤에게 주기로 했고, 다행히 베토벤은 사랑하던 도시 비엔나에 머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나폴레옹의 군대가 비엔나를 침공하면서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 베토벤이 커다란 충격을 받은 건 당연한 일.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작곡된 것이 ‘고별’로 잘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26번 op. 81a>와 <피아노 협주곡 5번>이다.
추앙하던 나폴레옹의 침략행태와 그에 대한 또 한번의 실망, 그리고 아름답던 비엔나의 황폐해진모습을바라보는 베토벤의 마음은 갈데 없이 ‘착잡’했을 것이다. ‘분노’하기에도 너무 늦을 만큼. ‘황제’는 그런 상황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절대 주저앉을 수 없는 베토벤의 강인한 투지가 다시금 솟구치는 음악으로, 덧붙여서는 기약할 순 없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진정한 혁명’에의 간절한 소망이 얹혀 있는 선율로…….

베토벤의 piano.
★ ★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의 매력
베토벤의 5번째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 ‘황제’가 가지고 있는 폴리시는 아주 명확하다. 복잡함, 애매함과는 거리가 먼 극도의 ‘명쾌함’과 ‘밝음’이 바로 그것이다. ‘황제’라는 제목은 그리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영웅’과는 달리 웅대함, 강인함을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곡이 아니기 때문이다. 1악장과 3악장은 강인한 요소만큼이나 많은 서정성을 가지고 있고 멜로디 라인도 비할 바 없이 밝고 아름답다. 그늘진 부분이라고는 1악장의 제 2주제에서 잠시 비칠 뿐이다.
2악장의 뛰어남도 각별하다. 일반적으로 협주곡의 2악장은 ‘재미없는’ 경우가 많고 어떻게 보면 안 들으면 그만인 곡들도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황제’의 2악장이 가지는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각별하기 때문이다 (베토벤 자신의 3번 협주곡에서 대단히 세련된 아름다움을 이미 들려 준 바 있기는 하다). 특히 2악장의 주제를 피아노가 느긋하게 연주하는 부분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쇼팽이나 모차르트의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 조차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황제’의 1, 3악장이 밝고 호쾌한 분위기로 일관하고 있어 단조로운 느낌을 줄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2악장의 전개를 살펴보면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애절한 기분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불멸의 연인’ (게리 올드만 주연, 버나드 로즈 감독) 마지막 장면에서 창문 너머로 여인이 통곡하는 장면을 소리 없이, 2악장의 선율만으로 처리한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는데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차르트의 2번 협주곡 2악장이 구슬프게 들려왔듯이 목관악기와 피아노로 연주하는 이 협주곡의 2악장 선율 또한 가슴이 찡한 아름다움이 있다.
때때로 ‘과연 황제가 뛰어난 곡인가?’라는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3번 협주곡과 같은 정열도 없고, ‘화려한 피아노’라고는 하지만 막상 이 곡의 피아노파트를 뜯어보면 이렇다 할 어려운 기교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피아노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곡의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큰 어려움 없이 연주해낼 수 있을 정도이며, 관현악파트와 피아노의 정교한 진행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훌륭한 곡이다. 굳이 ‘베토벤’이라는 프리미엄을 얹어주지 않더라도 ‘황제’와 비견할 만한 피아노 협주곡은 그 자신의 3번,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정도가 아닐까. 복잡한 관현악 기법이 없어도, 난해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 곡은 충분한 화려함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선율이 강조되는 부분의 효과는 더욱 커지고 있다. 현대음악들이 지나친 장식으로 인해 난삽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고전주의 협주곡에 쓰인 음표들의 효율성은 놀라울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