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뻔했던 체험을 그린 바그너의 <방랑하는 화란인>

죽을 뻔했던 체험을 그린 바그너의 <방랑하는 화란인>
음악가 중에는 모든 사회적 규점을 착실히 지키고 가정적으로도 평온하며 대인관계도 원만한, 이른바 모범적인 소시민 스타일의 인물은 오히려 드물다. 좌충우돌 싸움질 잘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 사회적 규범 따위는 있으나마나한 말썽꾸러기가 한두 사람이 아닌데, 그런 면에서는 아마 바그너가 챔피언중의 챔피언이 아닐까 싶다.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오만불손은 음악사에도 길이 남아 있다. 그의 호언을 한 가지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오만불손 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다른 인간들과는 됨됨이가 다르다! 세계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나에게 공급할 의무가 있다. 나는 제군들의 스승인 바하처럼 보잘것 없는 오르간주자의 박봉으로는 살 수 없는 인간이다!”
그는 괜찮은 수입의 몇 배나 되는 지출을 하는 낭비벽이 있는가 하면 제자의 부인을 빼앗아 자기 후처로 만드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뿐인가 정치적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해 프랑스 왕정의 붕괴에 자극받아 일어난 드레스덴 봉기 때는 혁명파에 가담해 자본주의를 때려 부셔야 한다고 수만의 노동자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가, 1849년에 봉기가 진압되자 현상금이 붙은 지명수배가 되어 스위스로 도망치기도 했고, 워낙 쓰임새가 헤프다보니 가는 곳마다 산더미 같은 빚을 걸머지고 야반에 도망치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채권자들한테 쫓겨 멀리 북쪽으로 도망쳐 올라간 곳이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였다.
그 곳에서도 역시 빚을 잔뜩 걸머졌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독일과 스위스의 채궈자들까지도 그의 거처를 알아내고 쫓아 올라왔다. 견딜 재간이 없어 그는 한밤중에 최초의 아내였던 미나와 애견 롯바만 데리고 리가를 탈출했다. 국경을 간신히 넘어 프라시아 령인 케니스베르크 항으로 나와 범선 테티스 호를 타고 북해를 건너 런던으로 향했다.
북해는 그렇게 만만한 바다가 아니었다. 기후가 돌변해 산더미 같은 파도를 일으키기를 다반사로 하는 거친 해양은, 못된 바그너를 혼내 주려고 작정을 했는지 잠시도 쉬지 않고 폭풍우를 퍼부었다. 문자 그대로 일엽편주의 테티스 호는 황파 위에서 표류하기를 무려 3주 반, 구사일생으로 런던 항에 입항했으니 바그너도 이번만은 어지간히 혼났던 모양이었다.
바그너의 가극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방랑하는 화란인>은 유명한 독일민요 <로렐라이>의 작사가이기도 한 하이네의 소설을 토대로 그 자신의 생각을 가미해 만든 작품이다. 내용은 저주 받아 죽지 못한 채 온 세계의 바다를 정처없이 영원히 헤매야만 하는 유령선 선장이 순진한 아가씨의 사랑을 받고서야 겨우 죽을 수 있었다는 음산한 스토리이다.
바그러노서는 야심작으로 큰 기대를 걸었지만 독일 여러 가극장에서는 지나치게 음산하다고 상연을 거절해 애를 먹다가 겨우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다. 바그너의 기대와는 달리 평판은 신통치 않아 단지 4회의 공연만으로 레퍼토리에서 제외되었다. 1865년 드레스덴에서 다시 상연되면서 차츰 호평을 얻은 이 가극은, 오늘날에는 바그너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훗날 바그너는 친구에게 술회하기를, <방랑하는 화란인>은 자기가 테티스 호에 실려 북해에서 당한 무시무시한 체험을 텍스트 삼아 썼노라고 했다. 그 때 채권자들에게 몰려 영국으로 도피중이었다는 바그너의 처지를 익히 알고 있었던 그 친구는 이렇게 비꼬았다.
“그렇다면, 그 가극의 곡명은 <방랑하는 화란인>이 아니라 <도망가는 독일인>이 제격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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