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노래
낭만주의 시대에는 다시 성악곡이 번창한다. 작곡가로는 우선 ‘가곡의 왕’이라고 하는 슈베르트를 꼽을 수 있다. 슈베르트를 흔히 독일 가곡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작곡가로 치지만, 그 이전에도 모차르트 등 그런 작곡가가 없지는 않았다.
슈베르트는 ‘리트’라는 분야를 한층 더 빛나는 위치로까지 끌어올려 짧은 노래 한 곡이 대규모 교향곡과 맞먹을 만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불행히도 슈베르트의 가곡은 생존 중에는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대부분이 공개 음악회가 아닌 친구 몇몇이 모이는 살롱 같은 곳에서 발표되었을 뿐이다.
우수한 예술작품이란 항상 일반 대중의 상식보다는 수십 년씩 앞서가기에 작곡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로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슈베르트도 그런 숙명을 걸머진 작곡가로서 평생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다 겨우 31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겨울 나그네>등 그의 연가곡을 위시해 주옥같은 6백 곡이 넘는 가곡에 접하면서, 마치 인류가 큰 빚이나 진 듯한 느낌을 받는 이유도 요절한 한 위대한 작곡가의 불행을 안쓰럽게 생각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로서 그에 대한 부채를 다소나마 갚는 길은 그의 노래를 더욱 사랑하고 존중하는 길 이외에는 없으리라.
슈베르트의 뒤를 따라 독일 가곡을 쓴 작곡가로서 멘델스존이 있다. 그는 음악가로서는 드물게 부유한 가정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곱게 자란 작곡가였다. 그런 탓인지 시기적으로는 낭만파 시대 작곡가였으나 크게 혁신적인 면은 없었고, 모양새 좋고 선율도 평군적이며 화성도 전아한 고전적인 가곡을 많이 썼다.
그 전통을 뒤엎은 사람이 멘델스존보다 불과 1년 연하인 슈만이었다. 슈만은 낭만파 가곡의 기수로 특히 돋보이는 존재였다. 슈베르트가 시를 노래하는 작곡가였다면, 슈만은 시를 낭독하는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슈만의 노래가 대부분 짧은 이유는 시 자체가 짧아서가 아니라 시를 낭독하는 속도를 가지고 음악으로 재현했기 때문이다.
슈만의 노래는 그 자신의 일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30세 되던 1840년에 ‘노래의 해’라고 불렸을 만큼 집중적으로 가곡을 썼다. 당시 그는 클라라와의 연애도 절정에 있었으므로 모든 정열을 가곡에 쏟아넣었다. 그의 대표적인 가곡 <시인의 사랑>도 그 때 쓰여진 가곡이다.
또 슈만은 원래 피아니스트였던 관계로 가곡의 피아노 반주에도 아주 무게를 주었다. 그의 가곡에서는 전주나 후주의 피아노 파트가 상당히 긴 곡도 드물지 않아 그 전까지의 작곡가들 작품에서는 보지 못했던 특색을 나타낸다. 슈만은 프랑스 가곡에도 영향을 주어 포레의 가곡에서 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슈만 다음의 작곡가로는 브람스를 들 수 있겠다. 브람스의 성악곡 걸작은 합창곡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는 가곡의 흐름을 도로 ‘노래하는’ 방향으로 돌려 놓았다. 마음 속에는 낭만적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형식상으로는 베토벤에 연결되는 고전적 정신을 다시 일으키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작곡을 해대는 스타일의 작곡가가 아니었다. 정서적이라기보다 놀리적이었으며 단단한 구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선호했다. 그래서인지 브람스의 가곡은 구성지고 난삽해 일반인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의 노래 중 우리들의 귀에 친숙하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자장가>조차 다른 작곡가들의 자장가에 비하면, 어딘가 차분하고 가라앉은 느낌을 준다는 것을 부인 못하리라.
가곡을 부르는 가수도 슈만의 것은 기분 내키는 대로 부를 수 있지만 브람스의 노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의 가곡은 처음에는 대하기가 어려운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가 깊어지는 것이 브람스의 가곡이다.
1860년, 독일 가곡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두 사람의 작곡가가 태어났다. 후고 볼프와 구스타프 말러였다.
볼프는 슈만이 지향했던 바를 더욱 진척시켜 일정한 틀에서 벗어난 변환자재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는 천재성과 광기를 동시에 지닌 특이한 작곡가였다. 슈만처럼 그는 가곡의 피아노 반주에 상당한 무게를 주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가곡 발표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스스로 맡은 일이 있었다. 가수의 노래가 끝나 후주를 치고 있을 때 청중 속에서 박수가 일어나자 그는 벌떡 일어나 박수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버럭 소리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호수에서 자살 시도, 정신병 발작으로 수차례 정신병원 입원, 마지막에는 폐렴까지 겹쳐 그의 비극적인 삶은 43세를 일기로 막을 내렸다. 빈의 한 쓸쓸한 병실에서—. 볼프는 슈베르트, 슈만으로 이어지는 독일 리트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곡가였다.
말러라고 하면 전세기 말과 금세기 초에 활약한 위대한 교향곡 작곡가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실은 가곡 작곡가로서의 본성이 더욱 강한 음악가였다. 그러한 사실은 미완성의 제10번을 뺀 나머지 아홉 개의 교향곡 중 성악이 들어 있는 작품이 네 개나 되고, 이와는 별도로 <대지의 노래>라는 성악곡 대곡을 쓰기도 했다는 것 등으로도 뒷받침된다. 그의 가곡은 어디까지나 성악적인 소리를 소재로 한 수법이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볼프의 노래보다 가까이 하기가 쉽다.
말러도 지병인 심장병으로 인해 항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비탄의 노래>,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등 곡목만 보아도 염세적인 가곡들이 많으며, <대지의 노래> 역시 염세적인 내용이 가득한 성악곡이다. 이와 같은 점을 미리 이해하고 말러의 성악곡을 접하면 그 깊은 슬픔을 더불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R. 슈트라우스도 원래는 오페라 작곡을 목표로 했던 사람이었으므로 가곡에도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가곡에서는 깨끗한 서정과 유연성이 풍부한 아름다운 선율, 기능화성을 극한까지 밀고간 독일 낭만파의 노장다운 면모를 보인다.
슈트라우스를 끝으로 독일 리트의 산맥은 일단 맥이 끊긴다. 이후로 힌데미트,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등은 비록 그들이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독일 가곡의 정통을 이은 작곡가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