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데우스
경건한 척 거룩한 척 신을 찬미하고 싶었지만
가장 잘하지 못하면 어떤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면 어떤가?
그분을 찬미한다면 그분이 주신만큼만 찬미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 이상의 것으로 신을 찬미 하려함은 신을 찬미하려는 게 아니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려는 게 아닌가?
그렇다『곡예사의 찬미가 생각난다
곡예사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곡예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루 종일 성당 제대 앞에서 물구나무를 섰다.
그리고 접시를 돌렸다. 그 걸 보시고 웃으셨다는 성모님…』
우린 주신 그릇만큼 만 찬미의 잔을 채워드리면 된다.
인간은 인간만큼만 하면 된다.
우리는 옹기장이의 손에 들린 한 조각 옹기일 뿐이다.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상이길 원했다.
항상 다른 이의 타고난 재능을 보고
우리의 작은 그릇을 아파하지 않았던가
난 살리에르를 부르며 울었다.
그날, 하느님을 더 멋진 음으로 찬미하고 싶어서 운 게 아니다.
나 자신이 작음을 아파해서 울었다.
그래서 ‘곡예사의 당신께 대한 사랑을 따를 수 없고,’
그래서 난 내 작음을 아파해서
당신께 이런 내 모습이 당신보기에 그렇게 좋으시냐? 고
이런 내 모습을 내가 사랑할 수 없음같이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고개를 돌렸다
우린 모두 모차르트 같은 비범함을 보고 비참을 느낀다.
신을 가장 멋진 음으로 찬미하고 싶어서 비참한 게 아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비참해진다.
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버지 레오폴드가 원했던
궁정음악가가 되어 적당히 타협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거부했던 모차르트
평범한 콘스탄체는 천재의 작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벌어주지 못하는 모차르트가 불만이었으리라
평범한 부인은 그 만큼만 바란다.
살리에르를 놀라게 했던 물 흐르듯 써 내려간 완벽한 악보는
모차르트가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흘린 악보였다.
이러한 ‘인간능력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고대나 현대나
인간이 사는 곳엔 이런 경우 인간은 누구라도 시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쳐서 사건화 되는 경우만 시비를 가릴 뿐이다.
누구나 조금씩 다 가지고 있는 시기심과
인간의 다름으로 인한 갈등을 우리는
살리에르를 보고 나를 다시 인식한다.
우리는 교육한다.
우리아이들에게 ‘경쟁하지 않고 잘 어울릴 수 있는 법을
인성교육」이라고 하며
서로 다른 우리를 바라보며 칭찬하자고…’ 가르친다
이 작품이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구도로
형이상학적 틀을 유지하며
우리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여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여
평범한 인간의 심리 중 용서받아야 할 부분을 크게 그려 보여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이 있어야하고
우리의 용서받을 부분 때문에 신부가 그 자리에 있어야 했고,
신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오셔야 했다.
이 영화를 더욱 아름답게 한 것은
모차르트의 음악이 삶의 상응물로 나타나게 되므로
콘스탄체의 약간의 관능적인 매력도
그냥 여성스런 귀여움으로
십자가의 무거움 곁에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더욱 화사한 영상미로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
여기서 조금은 경박한 분위기의 콘스탄체 조차도
절대미(?)의 모차르트 음악과 간간이 비춰지는 십자가로 인하여
모차르트의 음악과 대비되면서
전체적으로 작품의 미학적 가치와
신학적 깊이를 더해주었던 것 같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 음악의 절대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는 두 사람의 갈등을
시각적 미와 함께 음악과의 조화를 이루어가며
그들의 연기만큼이나 아름다운 음악에 사로잡힌다.
모차르트에게 패배를 인정하며
머리를 숙이는 살리에르의 모습은
수많은 평범한 군중의 절대자를 향한 승복이었으며,
신이 택한 모차르트의 승리를 본다.
인간은 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어떤 진보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으려면
모든 사람의 죄는 용서받아야한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의 평범한 사람들 속의 살리에르의 말에 나타난다.
그리고 살리에르의
“어디에든지 있을 수 있는 (나 같은)평범한 사람들은 나오시오
나는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아멘” 으로 집약될 수 있다.
그래서 평범한 모두의 살리에르적인 행위를 용서받고자 한다.
살리에르적인 모든 사람이 용서받으므로
살리에르도 신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살리에르의 외침 속에 담겨진 평범한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대립과 투쟁이 아니고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해야하는 이유가 되어
신을 향한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신학적 요소로 부각되며
모든 인간의 이러한 부분을 신인 당신이 용서해야합니다. 하고
당신이 잘못(?) 분배한 재능으로 인한 인간의 갈등을
‘신인 당신이 용서해야한다는 당위성’으로 주장을 하며 끝난다.
전문지식은 물론이고 세련된 귀도 갖고 있지 않지만
무슨 음악이든 듣기를 좋아하고 다른 천재성보다도
음악적 천재성에 대해 감탄을 아끼지 않는 내가
인간 모차르트의 비운에 관한 것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차르트가 빚에 쪼들리고 건강이 악화되어 요절했을 때,
(자기 자신을 향한 진혼곡의 독촉으로 죽음에 임했을 때)
누군가가 그를 매장은 했을 테지만
장례가 너무 허술했고
그 뒤로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아
얼마가 지난 후부터는
그가 묻힌 자리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나를 애석하게 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 6월호의 -모차르트의 묘는 거기에 없었다- 손동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