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악장 (Allegro)
2악장 (Romanza: Andante)
3악장 (Alla Polacca)
베버, 카를 마리아 폰 : (1786 11,18 ~ 1826 6, 5 낭만시대)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는 독일 홀슈타인주(州)의 오이틴 태생입니다. 아버지 프란츠 안톤(Franz Anton, 1734~1812)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Constanze)의 작은 삼촌이라고 합니다. 콘스탄체와는 사촌간이고 모짜르트와 베버는 처남 매부 관계가 되는 셈입니다. 프란츠 안톤이 극단을 이끌고 있어 각지를 순회하는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고 하는데 남작의 칭호를 가진 안톤이(독일에선 이름 중 von이 들어가면 귀족이라고 하는군요) 50세 가까이 되어서 재혼한 아내에게서 베버는 태어났습니다. 유랑생활을 하는 환경 속에서 자녀들의 음악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안톤이었지만 그의 아들들 중 하나를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을 만들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버가 바로 아버지의 꿈을 실현시킬 아들이었지요.
베버가 처음으로 음악 공부하게 된 것은 하이든에게 배운 적이 있는 이복형 프리돌린(Fridolin)에게서였다고 합니다. 베버는 1797년 잘츠부르크에서 미하엘 하이든(Haydn, Michael 1737-1806)에게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게 되게 되는데 그는 바로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Haydn, Franz Joseph 1732-1809)의 동생입니다. 뮌헨(1798~1800)에서는 또 요한 네포무크 칼히어(Johann Nepomuk Kalcher)에게 사사합니다. 베버는 잘츠부르크에 체류할 때 미하엘 하이든(Haydn, Michae)의 지도 아래 1800년에는 낭만적 희가극《숲 속의 처녀》, 1802년에는 《페터 슈몰과 이웃들》을 썼는데 이 작품은 이듬해인 1803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초연됩니다.
요제프 하이든(Haydn, Franz Joseph)에게 배우고 싶어했던 베버는 결국 희망을 이루지 못하고 1803년부터 1804년까지 빈에서, 수도원장이며 뛰어난 작곡가였던 포글러(Vogler, George Joseph) 신부 밑에서 공부합니다. 포글러의 추천으로 베버는 1804년 브레슬라우 시립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806년 뷔르텐베르크의 왕자 오이겐은 그를 자기 궁정의 악장(Kapellmeister)으로 임명합니다. 특히 포글러에게서 베버에게는 아주 새로운 기보법, 악기의 편성법과 극장풍의 효과를 배웠다고 합니다.
베버는 13살 때 《사랑과 포도주의 힘》이라는 최초의 징슈필(Singspiel)을 완성하였다고 하는데요, “징슈필”은 음악 전문가가 아닌 저로서는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던 용어인지라 여기에서 잠시 함께 공부하고 넘어 가도록 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징슈필(Singspiel)”이란 “독일 오페라(German opera)”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더군요. 독일어 대본과 독일적인 음악양식으로 된 “노래 연극”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번에 베버를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 게 된 사실입니다만, 백과사전의 내용을 옮겨 소개드리면서 함께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독일 오페라(German opera) “징슈필(Singspiel)”
오페라는 이탈리아에서 발생하고 이탈리아에서 발달하였기 때문에 18세기 중엽까지의 독일오페라는 이탈리아오페라의 완전한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대개의 경우 독일의 작곡가도 이탈리아오페라의 양식에 따라서 이탈리아어 대본에 의존하여 작곡하였다. J.A.하세, G.F.헨델은 물론, C.W.글루크나 W.A.모차르트의 오페라도 전적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양식에 따른 것이다. 독일어로 된 대본과 다소나마 독일적인 양식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오페라는 18세기 후반의 민속극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독일어로 징슈필(Singspiel)이라고 하여 ‘노래 연극’이라는 뜻인데, 모차르트의《마적 Die Zauberflote》, 베토벤의 《피델리오 Fidelio》 등 명작도 본래는 이 계통에 속한다. 그러나 19세기에 C.M.베버의 낭만파 오페라가 나오고, W.R.바그너의 악극이 나오게 되자 마침내 독일의 오페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멜로디의 아름다움이나 음성의 매력을 표면으로 내세운 데 반하여 독일오페라는 극적인 내용표현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대본이 중요시되고 음악도 또한 단순히 아름다운 것보다는 극적인 표현이 추구되었다. 그리고 독일 오페라음악은 이탈리아오페라보다도 내면적이고 깊은 정감을 간직하여 서정적인 것이 특색이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Le Mariage de Figaro》과 G.A.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Barbiere di Siviglia》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근대 독일오페라에서는 더욱 극적 표현이 강조되고 있다. 독일의 오페라 상연에서 연출이 중요시된다고 하는 것도 바로 오페라를 극 중심의 종합예술로 보는 전통적 정신의 발현일 것이다. 또 독일에서는 일찍이 기악이나 교향곡이 발달한 영향으로 오페라작품에서도 관현악이 교향악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참조 : 엠파스 백과사전]
공부를 하고 보니,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구분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징슈필(Singspiel)은 연극에다 필요한 경우 부분부분 음악을 넣어주는 형식이니 대사로 처리되면서 음악이 없는 부분이나 노래없이 배경음악만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음악극이고 오페라(Opera)는 음악(노래)을 중심으로 줄거리와 융합되어 극이 전개되니 줄곧 노래와 음악이 끊이지 않는 것이 차이가 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1807년, 아버지 때문에 뷔르텐베르크 공의 영지를 떠난 베버는 이후 만하임, 하이델베르크, 다름슈타트 등지를 여행하고, 다름슈타트에서 포글러 신부 밑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는데 1810년, 베버는 처음으로 낭만적 오페라라고 명목을 붙인《질바나 Silvana》를, 1811년에는 징슈필(Singspiel)《아부 하산 Abu Hassan》의 뮌헨 초연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게 됨과 동시에 피아니스트로도 서서히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1811년 다름슈타트를 떠나 연주여행에 나섰으며 밤베르크, 뮌헨 등지를 방문했습니다.
베버는 1811년 뮌헨 연주여행에서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던 보헤미아 출신의 뛰어난 클라리넷 연주자 하인리히 베르만(Heinrich Berman)을 만나게 됩니다. 베버는 베르만(Berman)과 특별한 친교를 맺게 되고 그를 위해 2곡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작곡하였으며 뮌헨에서는 그와 함께 콘서트를 열었고 함께 연주 여행도 했다. 콘서트에서 연주된 베버의 작품이 《클라리넷 협주곡 Concertino für Klarinette und Orchester》였는데 이 클라리넷 곡은 베르만(Berman)을 위해 작곡한 것으로 이 음악이 바로 지금 여러분께서 감상하고 계시는 “클라리넷 협주곡 1번 F단조, 작품 73 (Clarinet Concerto No.1 F minor Op.73)”입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재미난 사실이 하나 또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휘자들이 연주무대에서 지휘봉을 사용하는 것을 항상 보아 왔습니다만, 오늘날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 이 지휘봉은 베버가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이름이 높았던 그는 근대 지휘법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지휘의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새긴 이 사건은 그의 프라하 시대인 1814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다시 연주여행을 떠난 베버는 처음에 스위스를, 그리고 베르만(Berman)과 함께 프라하, 라이프찌히, 드레스덴, 고타, 바이마르,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밤베르크, 베를린 등 각 도시를 순회하였습니다. 1812년 2월 도착한 베를린에서 피아노 소나타 제1번(C장조 op. 24)을 작곡했으며, 12월에는 고타에서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한 뒤 1813년 1월 프라하에 도착합니다. 1813년 프라하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 자리를 받아 1816년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림으로써 모차르트의《돈 죠반니 Don Giovanni》초연 이래 오랫동안 침체에 빠졌던 극장의 수준을 높였다고 합니다.
또 이 오페라 극장에서 여가수 카롤리네 브란트(Caroline Brandt)를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1817년에는 프라하에서 그녀와 결혼했으며, 이 시기에 그녀를 위해 많은 뛰어난 가곡을 작곡했다고 전합니다. 이때는 베버가 1816년 말에 드레스덴 궁정 극장 지휘자로 임명된 후이니 자연히 음악인으로서나 가정적으로 모두 안정된 생활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때 다시 이미 만하임에서 착상했다가 중단하고 있었던 《마탄의 사수(魔彈-射手) Der Freischütz》작곡을 재개하여 1821년에 완성합니다. 이 기간 동안《무도회의 권유 Aufforderung Zum Tanz》도 1819년에 작곡하였고, 1821년에는 극음악《프레치오자 Preziosa》도 작곡하게 됩니다.
독일 낭만파 오페라의 최고 걸작이 된《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는 1821년 6월 18일 베를린에서 초연, 대성공을 거두고 각지에서 상연되어 크게 성공했으며 특히 런던에서는 동시에 3개의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할 만큼의 대단한 인기를 얻어 유럽 전역을 휩쓴 최초의 독일 오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운데도 1822년 《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는 드레스덴과 빈에서도 상연되었고 빈에서의 공연이 계기가 되어 후배 슈베르트와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더군요. 1826년 3월 4일, 플루트 주자 카스퍼 퓌르슈테나우(Kasper Fürstenau)와 함께 드레스덴을 출발 파리를 거쳐 베버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젊은 음악가 베를리오즈(Berlioz, Louis-Hector, 1803.12.11 ~ 1869.3.8)가 하루 종일 그를 찾아다녔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마탄의 사수 Der Freischütz》 성공으로 베버는 빈의 케른트나투르 극장으로부터 이같은 양식의 새 오페라의 의뢰를 받게되어 《유리안테 서곡 “Euryanthe” Overture》이 작곡됩니다만 1823년 10월 빈에서의 초연은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 실패로 실의에 빠진데다가 가슴과 후두가 결핵에 침범 당하여 의사로부터 요양의 명을 받은 베버에게 런던과 파리로부터 다시 오페라 작곡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무리인 줄 알면서도, 조건이 좋은 런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위촉에 응하여, 1825년에서 1826년에 걸쳐 마지막 오페라《오베론 Oberon》을 작곡하였습니다. 1825년 12월 베를린에서 《유리안테 서곡 “Euryanthe” Overture》를 지휘하였습니다. 결핵에 걸린 베버는 이때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1826년 4월 12일 베버는 런던에서 《오베론 Oberon》의 초연을 지휘하였는데, 그대로 병이 악화되어 런던에 도착할 때부터 베버를 접대한 조지 스마트 경의 집에서 6월 4일부터 5일 밤 사이,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참으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객지 런던에 묻힌 그의 유해는 1844년에 이르러서야 당시 드레스덴에서 베버의 자리를 계승하고 있던 바그너(Wagner, Wilhelm Richard, 1813 ~ 1883)의 노력으로 드레스덴에 옮겨졌다고 전합니다. 베버는 베토벤과 슈베르트 등 거장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베토벤보다는 16년 뒤, 슈베르트보다는 11년 먼저 태어났지만 세상을 떠난 날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빨라서 베토벤보다 1년 먼저, 슈베르트보다 2년 먼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감사합니다*
<자료출처: 이원영 수채화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