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의 소명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만찬은 다음에 계속됩니다. 오늘은 지난 6월 9일 연중 10주일의 복음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파일의 문량이 많아 첨부 파일로 보내드립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을 빕니다.  박상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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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Response to 마태오의 소명

  1. user#0 님의 말:

     

    마태오의 소명(마태 9, 9-13)

     

    1. 분석.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9절은 이 이야기의 전반적인 배경을 이룬다. 이 절은 예수와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태오와의 만남(9a), 그의 소명과(9b), 이 소명에 대한 즉각적인 호응을 추종으로 구체화시켜 서술한다(9c). 이렇게 해서 만남, 소명, 추종으로 전반부가 끝난다.


    후반부:

    10절에서는 후반부에 전개될 전반적인 무대로 잔치를 묘사한다. 예수는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서 식사를 드신다(a). 그분이 이 잔치의 주빈이라는 것을 말해주려 한다. 동석한 손님들로서는 마태오의 동료 세관원들과 죄인들 그리고 제자들을 언급한다. 

    11절은 이 광경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의 반응과 그들의 질문 제기를 전한다(ab). 단순한 질문이 아니고 말하자면 일종의 시비조의 질문 제기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예수에게 직접 던지지 않고 일차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제자들에게 전한다.

    이어서 이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응수하는 예수의 답변을 전한다(12. 13).

    짜임새를 3부로 나눠서 생각할 수도 있다. 1)소명과 추종; 2)잔치; 3)예수님의 선언 말씀.

     

    2. 자료.

    이 이야기의 대본으로 사용된 자료는 마르 2,13-17이다. 마르코와는 다르면서도 마태와 루가(5,27-32)가 서로 일치하는 부분은 이 두 복음 사가의 편집 작업의 결과로 빚어진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복음 사가는 서로간에는 독립적으로 작업했다. 예수님이 잔칫집에서 자리를 잡으셨다고 하는데 누구의 집인지를 마르코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그저 “그의 집”이라고 만 말한다. “그의 집”을 예수님의 집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루가는 레위가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면서 그 집이 레위의 집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마태오는 그냥 “그 집에서” 자리를 잡으셨다고 만 전하다. 과연 마태오가 이 집이 누구의 집이라고 생각했을까? 마르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소명을 받은 사람은 이 명을 받들어 그분의 뒤를 따랐다고 했으니 이니시어티브를 취하신 예수님은 당연히 이 사람을 어디론 가 데리고 가셨을 게다. 어디로? 아마 당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고 봄이 정상적이다. 이렇게 마태오와 루가가 이 대목을 놓고 작업하는 방식이 다른 것으로 보아 이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참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이 두 사람이 이용한 마르코 복음서라는 대본이 각각 다른 대본이었다면 몰라도 말이다. 이밖에도 마르코의 “바리사이들의 율사들”을 마태오는 “바리사이들”, 루가는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라고 고쳐 쓴 것을 보아도 이들이 작업할 때 서로 상대방에 의존했을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마르코와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 몇 가지를 든다면, 우선 마르 2,13의 호숫가가 빠지고  “그곳에서” 나오셨다고 만 전한다. 마태오와 루가에는 예수께서 군중들을 가르치셨다는 말도 없다.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역시 예수께서 부르신 이 세관원의 이름이다. 마르코는 알페오의 아들 레위라고 하고 루가는 세관원 또는 세금 징수원 레위라고 하는데 마태오는 이 세관원이 마태오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마태오의 것으로 전해지는 복음서 저자와 이 세관원의 이름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는 9,13에 호세아 예언서 6,6을 인용한 것도 큰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마태오 사가의 고유한 삽입 부분으로서 그의 신학 전반에 비추어서 그 의도를 헤아려야 할 것이다.

     

    소재와 형식으로 볼 때 이 단락은 소명 및  추종 이야기와, 그리고 쟁론 이야기를 한데 이어서 전한다. 소명 이야기와 논쟁 이야기가 한데 합쳐진 형식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쟁론 끝에 예수께서 발설하신 선언의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시비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의 모든 비중이 이 선언의 말씀에 실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 – 그러니까 일화(episode, anecdote) 유형에 속하는 이야기를 사례로 들어, 또는 그것을 계기로 삼아 어떤 중대한 선언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이 이야기의 주목적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아포프테그마(apophtegma)라는 이름의 유형에 속하는 이야기라고 부른다.

     

     

    3. 주해.

    9절.

    예수님이 (거리를) 지나가셨다고 한다. 마르코는 2,13에서 호숫가를 거니셨다고 한다. 호숫가나 거리라는 말이 없어도 paragon이라는 그리스말 동사는 나름대로 어디 어디를 따라서 거닐었다는 어감을 아직도 풍겨준다. 아니, 아예 거리에, 공개 장소에 나타났다, 출현했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마르코의 이야기 맥락을 감안할 때 갈릴래아 또는 겐네사렛 호숫가를 거닐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세관원 마태오가 눈에 띄었다.  세관원이 자기 직무를 보기 위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뜻이겠는데 그렇다면 이곳은 필시 가파르나움이었을 공산이 크다. 실상 그곳에는 세관이 있었던 것이다. 요르단 강이나 호수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요새말로는 동안에서 서안으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건너 오가면 로마 제국의 행정구역이 달라지므로 세관을 통과해야만 입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 끝은 요르단강과 호수를 경계로 갈릴래야 지방과 트라코니티스 및 바타네아 지방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영주도 달라서 갈릴래아의 영주는 예수 시대에는 헤로데 안티마스였고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는 필립보였다. 마태오는 이곳 세관에 앉아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출 입국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세관 업무를 보고 있었던가? 호숫가를 거니는 예수의 눈에 띌 수 있는 자리라면 그는 길가에 앉아 있었겠는데 길가에서 세관 업무를 볼 수도 있었던가? 그보다는 혹시 당시의 관례대로 세금을 거두어 들일 업무를 맡아 할 세리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 경우 마태오는 당시의 습관대로 징세권을 임대 받아 세수 대행업을 하고 있었겠는데 자신이 직접 세금을 거두러 다니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납세의무가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세금을 거둬들일 -이를테면- 일용직 사무원이나 용원을 고용하려고 그 자리에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D.H. Hagner). 

    “보았다”라는 행위를 단순히 “눈에 띄다”라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까 아니면, 좀더 적극적으로,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당신의 제자로 삼아 당신의 뒤를 따르게 할 의도로, 의식적으로 눈 여겨 보셨다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하는가? 두 가지 의미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고 보면 포괄적으로 알아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일종의 타협적인 해석이라고 할 것이다. 마태오 -Maththaios- 라는 이름은 히브리 또는 아람어의 인명 마타’이, 마티아, 마티야ㅎ가 줄어든 것을 그리스 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그 원형은 Matthith-yah(u)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이름은 히브리어 동사 나탄(주다)과 하느님의 이름 야훼가 줄어든 Yah(u)가 합성된 것이다. 그 뜻은 “야훼의 선물”, “하느님의 선물”이다. 구약성서에는 마따니야 (2열왕 24,17)  또는 마띠디야(느헤 8,4)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사도행전 1,23의 마티아라는 이름도 같은 뜻이다. 이 세관원이 이름이 왜 레위 또는 마태오로 엇갈려 전해졌느냐는 질문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할 것이다. 요즘 학계의 견해로는 본시 레위와 마태오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레위라는 이름을 마태오로 바꿔서 전했다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저자가 알고 있는 마태오도 세관원이었고 역시 예수님께 직접 선택 받은 제자요 12 제자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 저자와 이 저자가 속해있던 교회 공동체에게 이 마태오라는 이름의 왕년의 세관원이자 나중에 예수의 직제자가 된 이 사람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잘 알 수 없다.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진 마태오와 여기서 말하는 세관원 마태오가 동일 인물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은 오늘날 별로 공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나를 따르시오.” 두 세 발짝 뒤에서 앞서가는 예수를 뒤미쳐 따른다는, 매우 구체적인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나의 제자가 되라!”는 소명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봄이 옳다. 사실 랍비들은 사제간의 관계가 엄격해서 스승을 받들고 존경하는 뜻에서 제자 되는 사람은 스승을 서너 발짝의 거리를 두고 뒤에서 따라 모셨다고 한다. 스승의 그림자라도 발로 밟지 않겠다는 경의의 표시요 스승을 본받겠다는 제자로서의 자세를 이런 상징적인 행동으로 표현했다. 당시 유다교의 사제 관계가 이러했기 때문에 학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학풍 또는 전통이 고스란히 사제간의 세대를 이어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토라의 연구와 해석은 권위주의적이고 따라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따르다”라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 단락을 참고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일어나서” 그분을 따랐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은 “앉아있다”라는 표현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앉아있다는 것은 기존의 생업과 가치관과 인간관계에 안주하고 있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수입이 좋은 관세 징수 대행업을 정리하고 “일어나서” 예수의 뒤를 따라 나선다는 것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이제까지의 과거를 청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뒤에 보겠지만 마태오가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한 자리에서 동료들과 잔치를 벌인 것도 실은 아마 과거의 동료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려는 송별 잔치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런데 이 송별연에 세리들이 동석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자리에 “죄인들”이 함께 왔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어떤 의미로 세리들과 죄인들은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죄인들”은 세리들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리들이 죄인들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하나의 기정 사실이었다. 왜 그런가? 당시 사회는 표면상의 세속성에도 불구하고 이념상으로나 사회 통념상으로 하나의 신성 사회였다. 달리 말해 종교가 사회적 가치관을 독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종교적 계율을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사람 값을 매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리들은 우선 로마인들에게 고용되어 이방인들과 끊임없이 접촉해야 했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세리들은 부정부패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다. 점령군인 로마인들은 식민지에서 세금을 거둬들일 때 본토인들에게 세금 징수의 특권을 임대하여 일정 액수의 세금을 이 대행업자들이 대납하도록 했고 그 대가로 이 업자들은 세리들을 고용하여 납세의무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런데 이 때 공식적으로 책정된 세액  이상의 돈을 착복하고 세액 감면의 경우 리베이트를 횡령했다. 물론 모든 세리들이 다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부정한 수단으로 치부를 하는 세리들은 또한 민족 반역자들이기도 했다. 동족의 피를 착취하여 점령국의 이익에 협조하고 협력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도 이들은 당연히 죄인으로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 말고도 죄인들은 물론 더 있었다. 직업적으로 모세의 율법과 시행 세칙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동적으로 공식 유다교로부터 율법 위반자로서 공개적인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직업상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로서 부정타게 하는 인물이나 사물을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인데 예를 들면 이방인인인 로마인들과 자주 접촉해야 하는 세리들, 부정타게 하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진료해야 하는 의사들,  그 밖에 목동, 푸줏간주인, 무두장이, 대장장이, 염색이나 표백 또는 세탁 업자, 이발사, 비둘기 경주 붙이는 사람, 세금 거둬들이는 사람, 실로 다양하다. 그밖에도 그 사회에서 쫓겨난 소외 계층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창녀는 복음서에서 그 대표적인 예로 등장한다. 그러니 이들 세리에 대해서도 일반 여론이 고울 리가 없다. 유다교의 정통 실천으로 스스로 죄인 아닌 의인으로 자임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이렇게 율법을 의식적으로 거스르는 사람들과 불가피하게 위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두 “죄인들”로 비쳤고 따라서 그들과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접촉을 기피했다. 접촉은 종교적인 오염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소위 정결례 규정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부정을 피하도록 하는 조치로서 여러 가지 금기 사항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이런 죄인들과의 교제를 금하는 사항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 죄인들은 율법 위반자들이었던 것이다. 정양모 신부는 이런 사람들을 우리말로 “상 것들”이라고 표현했다.

     

    10절.

    예수께서 그 집에서 음식을 드시게 되었다. 그 집이라니 누구의 집인가?  마태오의 집으로 생각하기 쉽다. 마르코는 불분명하지만 루가는 분명하게 레위의 집이라고 전했다. 그렇다고 마태오 복음도 같은 식으로 세관원의 집으로 알아들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위에 말한대로, 소명과 추종 명령을 내린 장본인인 예수가 마태오를 이끌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파티를 열어준 것으로 생각해도 조금도 무리가 없다. 그것은 이제 방금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고 미련 없이 스승을 뒤따른 마태오를 위해 이제까지의 그의 동료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도록 송별연을 베풀어 주었다고 보면 어떨까? 예수님의 집에 대해서는 마태 4,13과 9,1을 참고할 것이다. 이 마지막 두 구절로 보아 그분의 집은 가파르나움에 있었을 것이다. 자택이었을까? 아니면 셋집이었을까? 아니면 베드로의 처가에 방을 얻어 살고 계셨을까? 잔치를 베풀려면 전셋집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이런 공상은 끝이 없다. 머리 누일 곳조차 없다고 하신 그 분께서 집을 소유하고 계셨다니 당치않은 소리 같기도 하다. 이런 가치 판단을 내리기 전에 당시의 관례를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일반 서민들의 집은 부자들의 저택과 달리 매우 소박했다고 한다. 소유와 집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일단 접어두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철저한 포기와 가난을 이상으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초대교회의 이른바 “유랑 전도사”들의 금욕주의가 역사의 예수의 집도 절도 없는 모습에 투영되었을 가능성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음식을 드시게 되었다”는 “비스듬히 누워 계시게 되었다”의 의역이다. 우리가 가끔 영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식탁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손이 닿는 음식은 직접 집어서 먹기도 하고 손이 닿지 않으면 노예들이 시중을 든다. 그래서 이런 식사 자세는 자유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도 함께 “비스듬히” 눕게 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이 초대한 손님들과 함께 다소 성대한 식사를 하시게 되었다는 정도로 그 뜻을 알아들으면 무난할 것이다.

     

    11절.

    이런 예수님을 바리사이들이 시의의 눈으로 지켜본다. 예수 같은 명망 있는 분이 악명 높은 세관원들과 사회의 쓰레기요 찌꺼기 같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식사를 하다니, 도저히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던지는 시비조의 질문이다. “선생님”은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 외부 사람들이 예수를 부를 때 쓰던 경칭이다. “그대들의 스승”은 자기들의 스승은 아니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단순한 선의의 질문이 아니라 예수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고 거기에 항의하는, 시비조의 질문이다.

     

    12절.

    제자들에게 던진 바리사이들의 악의적인 질문 -마치 종교 경찰로서 심문하는 조의 질문이라고 할 것이다-에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이 몸소 답변하신다. 제자들에 책임은 그분이 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당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답변이다. 그리고 이 답변은 이 자리에서 시비에 오른 쟁점을 가리고 해결하는 결정적인 말씀이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들은 성한 사람들이 아니라 앓는 사람들이다. 형식으로는 일종의 속담으로서 그리스 고전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속담이다. 이 말씀으로 예수는 자신을 의사로, 그리고 당신이 필요한 사람들을 환자에 비유하고 있다. 예수는 많은 기적을 통해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다. 그의 치유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사회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예수님에게는 병 든 사람들이다. 이들을 고쳐 구원해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소외계층을 확대 재생산하는 사회도 역시 병든 사회이다. 예수의 이 치유행위는 그러기에 그런 병 든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분은 소외된 계층과 개인을 치유하시는 의사이며 이로써 이렇게 병 든 사회를 치유하시는 분으로 비쳤을 것이다. 예수님도 그러셨겠지만 특히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그 무슨 편견이나 혐오감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하겠다. 의사에 대해서는 집회 38, 1-15의 예찬론을 참조하면 재미있다. 마태오는 의사에 관한 속담과 마지막 선언의 말씀 사이에 호세아 예언서 6,6을 인용했다.

    이 구절을 예수님이, 또는 더 정확히 말해서 마태오 복음 사가가 어떤 뜻으로 알아들었을까? 옛날부터 이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두 가지로 견해가 엇갈렸다: 첫째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사와 자비를 대립시킴으로써 제사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는 물론 구약의 제사를 말하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던 제사 제도 자체를 거부하고 폐기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요즘에는 마태오가 제사거행을 규정하는 율법이 폐기된 것으로 간주했다는 식으로 이 견해를 수정해서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더 정확한 해석은 둘째 견해일 것 같다: 나는 제사도 제사지만 그보다는 자비를 더 원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알아듣는 게 옳다. 그리고 이 해석은 모세 율법에 대한 마태오의 이해와 더 잘 조화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는 제사의식에 관한 율법 규정을 폐기하지 않은 채 그보다는 사랑의 계명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이다(5,18 이하; 5,23이하; 23, 23-28). 그러니까 마태오는 호세아서의 이 인용문을 제사와 사랑을 대립해서 양자택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도 받아들이고 사랑도 못지않게, 아니, 제사보다 더 중요시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 바리사이들이 여기서 호세아가 말하는 “제사”라는 말을 자기네 전통에서 전수(傳授)하는 율법의 세정례(洗淨禮)법 규정으로 알아들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이런 규정을 무시하고 죄인들과 거리낌 없이 사귀는 행동은 그들에게 하나의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마태오는 세리들과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구약성서에 비추어 옹호하려 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는 그러기에 율법을 완성하러 온 것이지 폐기하려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이 호세아 인용문은 마태 5,17에 대한 마태오의 해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론적으로는 율법의 준수와 성취 여부는 예수의 이런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 바리사이들의 해석이 율법의 바른 해석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인용문은 마태 5,20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예수의 의로움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낫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그들보다 나은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런 행동은 그렇다고 단순히 제자들에게 어떤 표본이나 모범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준 것만은 아니다. 예수이 이런 행동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병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또한 그분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사 하고 간청한 것이 아니겠는가?(마태 9,27;15,22; 20,30 이하). 예수는 이들을 받아들이신다. 이것은 그분의 자비의 행동이다. 예수가 그들과 한 패거리가 되어 부도덕과 불경건의 공범이 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분의 자비는 죄인들의 회개 이전에 이미 용서라는 행동을 통해 구체화한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마침내 예수의 친구가 되고 그를 따르며 그를 본받게 된다. 한마디로 예수의 자비는 그들의 회개와 갱생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그들의 구원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자비를 원하신다. 이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들이 자비를 간청하기 이전에 벌써 자비를 원하신다. 이들이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비가 이들에게 자비를 얻어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비로소 마련해준다고 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의인을 불으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불으러 오셨다. 예수의 자비와 용서, 달리 말해 그가 대변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필요치 않은 의인도 없지만,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죄인도 없다. 만일 끝까지 의인임을 고집하고 예수와 그 자비를 거부한다면 그들에게만은 예수의 사명 목적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다. 예수는 의인을 불으려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이 자기들이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기 때문에 예수의 자비와 용서에 감동되고 마음을 열어 그분과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새사람이 될 수 있다.  

     

    4. 오늘을 위한 의미.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지만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를 가장 친구로 생각하고 또 친구로서 대하는가? 과연 예수의 친구들을 우리 자신의 친구, 우리 교회의 친구로 받아들이고 감싸주며 보살펴주는가? 그들의 마음의 고통과 모욕감과 소외감과 냉소를 과연 얼마나 공감하고 어떻게 달래주고 있는가?

    이 친구들이 만일 현대 우리 사회의 소외 계층들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우리는 이들을 과연 예수의 친구로 받아들이겠는가? 이들이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  주일날 성당에 오고싶어도 직업상 올 수 없는 사람들, 일용직 노동자들, 우리 시대의 파렴치범, 전과자들, 윤락여성, 미혼모, 이혼한 남녀들, 에이즈에 걸린 환자들, 외국 노동자들, 심지어 동성애자들, 가출 청소년들, 결손 가정의 자녀들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들도 예수의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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