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 3일 (수) 사이버 신약강좌
주님의 만찬4
2. 공관복음서
2.1 마르코 복음서의 최후만찬기 (마르 14,22-25).
I. 개관.
마르코는 최후만찬을 유다교의 과월절 또는 해방절 만찬으로 서술한다(14,12) 동시에 그것은 예수가 당신의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이별만찬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주님의 최후만찬 그 자체를 전하는 14, 22-25에는 이 만찬이 과월절 만찬이라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파스카의 어린양 이야기도 없고 과일 스튜나 쓴 풀을 먹었다는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과월절 축제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하가다를 외었다는 말도 없다. 최후만찬이 과월절 만찬이었다는 것은 14장의 큰 문맥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최후만찬기를 문학유형상 성만찬례의 원인담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주님의 만찬이라는 의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역사서술의 형식을 빌려 전하는 기사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22절a를 잠시 제쳐놓고 볼 때 식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한 이야기를 전하지 않고 단순히 빵을 나누고 포도주를 마셨다는 이야기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이 이 두 동작에 집결되었다고 보이며 사실상 이 동작으로 나눠먹고 돌려 마시는 빵과 포도주에 대한 설명어가 이 단락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에서 말한 22절a는 최만찬기를 그 앞부분과 연결하기 위해 2차적으로 덧붙였고 26절 역시 이어지는 다음 단락에 징검다리 구실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써넣은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빵을 나눔과 잔을 돌려 마심이라는 두 동작은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할 때는 주님의 만찬 때 나누던 저녁 식사와는 이미 떨어져서 따로 거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우리가 성체성사 제정기사라고 하는 이 단락은 마르코와 그가 물려받은 전승이 속하는 교회 공동체의 성만찬 거행을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따라서 이 기사 자체도 이 전통적인 만찬례문(晩餐禮文)에서 몇 가지 요소를 취재했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의 형식은 역사서술이지만 그 내용의 몇몇 요소들은 이처럼 마르코가 속해있던 교회와 그 이전의 원시 교회의 전례전승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 사실 지적은 이 단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더구나 26절은 잔에 대한 설명 말씀에 이어 곧바로 일행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올리브 산으로 향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과월절 만찬 끝에 노래하던 소위 할렐 시편을 노래했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최후만찬은 해방절 만찬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빵과 포도주의 설명 말씀에 이어 더 이상 다른 이야기 없이 14,26과 함께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 이 두 동작과 그 설명 말씀을 최후만찬 이야기의 핵심으로 요약하려는 의도를 뚜렷이 하고 있으며 이것 역시 전례 거행 때 사용되던 성만찬례문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내 몸입니다.”, “이것은 내 피입니다.” 하는 설명 말씀의 병행성도 성만찬 전례 관습을 반영하는 표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승상의 편차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상 “이것은 내 몸입니다.”는 역사의 예수가 최후만찬 때 당신이 나눠주시는 빵의 의미를 밝혀주는 말씀으로 훌륭히 발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내 피입니다.”라는 말씀은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지난 강좌에서 말했듯이 유대인들로서는 짐승이건 더구나 사람이건 피를 마신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가공할 기피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계 교회 공동체에서는 충분히 통할 수 있었던 피의 해석 말씀이기 때문이다(아래 참조). “그것(=그 잔)에서 마시다.”는 같은 잔에서 동석한 사람들이 과히 많지 않을 때 돌려 마셨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파스카 만찬의 관습이라기보다는 일반 성대한 만찬에서 흔히 있었던 관습이다. 이것도 최후만찬이 본래 파스카 만찬이 아니었다는 소극적 근거로 평가할 수 있다. 바울로와 달리 마르코의 만찬기에는 새로운 계약(예레 31, 31) 대신 출애 24, 6-11의 계약으로 이 잔의 의미가 바뀌어 설명되는 것도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6, 35-44에 전해진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에도 최후만찬 전승이 반영되었고 이 기사를 통해 “여러분이 먹을 것을 주시오.”(6, 37)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후에 주님의 만찬과 이웃돕기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을 띤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만찬을 나누면서 배고픈 형제들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II. 마르코의 최후만찬기의 분석과 주석.
I. 맥락.
마르코의 만찬기는 14,1에서 시작되는 수난사의 맥락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14,1은 그 시간대를 해방절 이틀 전이라고 전한다. 만찬기(14, 22-26) 역시 이 해방절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의 최후만찬을 전하기 때문에(14, 22ㄱ: “그들이 먹고 있을 때”) 마르코에서는 이 최후만찬이 해방절 만찬이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 전제는 만찬기의 해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빵 나누기와 잔 돌려 마시기 두 몸짓이 해방절 만찬의 어느 절차에 해당하느냐는 질문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에 대한 해석의 말씀, 적어도 잔에 대한 해석 말씀의 의미가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피는 예수님의 피(“나의 피”)인데 해방절 만찬이라면 파스카의 어린양에 빗대어 하신 말씀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 지금의 마르코의 만찬기의 해석 말씀에 따라 (14,26:“계약의 피”) – 계약의 피와 연결시켜 해석해야 되는데 과연 이 계약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의 중개로 야훼 하느님과 그 백성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계약인가 아니면 – 바울로 (1고린 11,25ㄴ)와 루가 22,20ㄴ) 에 따라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로운 계약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를 가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질문이 마지막으로 제기되게 마련이다.
지금의 마르코 14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14,1에서 수난 사건의 전반적인 시간대를 해방절 이틀 전으로 정하고 이 시간대 범위 안에서 이제부터 이야기할 사건을 차례로 서술한다. 우선 14,1ㄴ은 예수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을 전한다. 예수의 죽음이 범상한 죽음이 아님을 미리 내비치는 대목이다. 다만 그 제거시기에 대해서는 예수의 적수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파스카 대축일 기간 중에는 민중의 폭동이 우려되므로 적기가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그 시기를 서둘러 앞당기려했다는 인상을 준다. 최후만찬이 해방절 만찬이었음을 다시 한번 내비치는 대목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최후만찬이 해방절이었음을 정식으로 말해주는 대목은 바로 그 해방절 만찬의 준비를 전하는 14, 12-17의 기사라고 할 것이다. 14,3-9.10-11에 전해지는 시몬의 집에서의 만찬 이야기와 유다스와 예수의 적수들 사이의 밀약 이야기는 현재와 같은 위치에서는 마치 이 두 사건이 최후만찬 직전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전한다. 그러나 같은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의 만찬 이야기가 루가에서는 수난사가 아닌 다른 맥락에 전해졌다(루가 7,36-50. 바리사이의 이름이 시몬이라는 말은 없다. 36절 참조). 마태오는 마르코를 답습하여 26, 6-13에 이 이야기를 전한다. 결국 이 만찬이 수난 주간에 있었다는 마르코와 수난 이전의 어떤 다른 기회에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를 만찬에 초대했다고 전하는 루가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할 것이다. 내 생각은 마르코 또는 그 이전의 전승 단계에서 이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쏟아 부은 몸짓이 예수의 죽음과 장례를 상징한다는 이유에서 이 자리에 옮겨놓았을 것 같다. 사실 현재의 마르 14, 3-11은 이 이야기가 언제 있었는지 정확한 시간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바리사이 사람 시몬의 집에서의 만찬이 해방절 하루 전이었는지 또는 이틀 전이었는지도 단언하기가 어렵다. 이틀 전이었다면 아마 최후만찬 전날 저녁이었을 것이고 하루 전이라면 최후만찬과 겹쳐지므로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루 저녁에 만찬을 두 번 들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도대체 이런 말 자체를 할 수 있는 것도 14,1ㄱ의 “이틀 후면 해방절 무교절”이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14, 12에 예수께서 해방절 만찬을 제자들과 드신 날은 해방절 첫날 파스카(양)을 잡는 날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4,3에는 이런 시간 자료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시몬의 집에서의 만찬과 그 자리에서의 이 도유(塗油) 사건이 수난 주간, 그것도 최후만찬 하루나 이틀 전에 일어났다는 것은 14,1과 14,12의 시간상의 맥락 안에서만 가능한 결론이다. 이것이 정확한 관찰이라면 마르 14, 3-11의 일화는 본래부터 수난사의 이 자리에 전해진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한편 유다스의 배반 전승(14, 10-11)이 수난사의 형성 과정 중 어느 단계에 속하는가는 따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이 유다스의 배반 전승이 전승의 2차 단계에 속한다는 전제 아래서 이야기를 진행하겠다.
이렇게 마르 14, 3-9.10-11을 일단 제쳐 놓고 보면 14,2과 14,12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예수 제거의 음모는 해방절 이틀 전에 구체화하였고 예수가 제자들과 드신 최후만찬이자 해방절 만찬은 해방절 하루 전이었다. 하루 전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파스카 양을 잡는 날과 해방절 만찬을 드는 날은 같은 날이다. 같은 날 오후와 저녁의 시간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루의 시작을 일몰 시간으로부터 계산하기 때문에 해방절 역시 같은 날 저녁에 시작되지만 유다교 날짜 계산으로는 해방절 첫날이 된다. 거꾸로 파스카양을 잡는 오후도 해방절 만찬 전이지만 해방절 첫날로 간주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최후만찬은 바로 이 해방절 만찬이었고 어느 목요일있으며 그 이튿날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신 날은 해방절 당일 어느 금요일 점심 때라는 것이 마르코 복음서의 전제라고 할 수 있다.
II. 만찬기의 분석.
그런데 과연 이런 전제를 우리의 만찬기는 지지해주는가? 학자들의 견해는 찬반양론으로 확연하게 갈라져 있다. 최후만찬이 해방절 만찬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위 I. 맥락에서 지적한 사항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방증자료를 증거로 제시하려 한다. 여기에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예수는 최후만찬을 예루살렘 성안에서 드셨다. 그전에 마르코는 예수가 성밖으로 나가셨다는 말을 두 차례나 전했다( 11,11-19). 그런데 예수가 일부러 예루살렘에 다시 들어와 최후만찬을 드셨다는 것은 해방절 만찬은 예루살렘 성안에서 들어야 한다는 유다인들의 관습을 따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예외가 있었던 것이다: 파스카 순례 축일에는 순례 객들이 많아 성안에서 묵을 데를 찾지 못하면 성밖으로도 나가서 투숙을 했는데 이때 이들의 편의를 위해서 예루살렘 시 경계를 임시로 넓혀주어 성밖에서라도 합법적으로 해방절 만찬을 함께 들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례가 전해진다.
– 둘째, 예수의 최후만찬은 저녁 늦게 있었다고 한다. 유다인들의 통상적인 식사 시간은 아침과 오후였다. 그러나 해방절 만찬은 저녁 늦게 먹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른 저녁이었는지 아니면 늦은 저녁이었는지 논란의 소지가 남아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몰 다음의 저녁 시간이었을 것이다.
– 셋째, 예수와 그 제자 일행은 최후만찬 때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했다고 전해진다(마르 14, 18; 참조: 루가 22,14). 이 식사 자세는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다: 하나는, 동석한 사람들이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식사가 성대한 만찬으로서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부풀게 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이집트와 다른 외세에서) 해방된 자유인이고 해방절은 이 해방의 가장 큰 축제이다. 그러나 자리 잡다로 번역한 anakeimai라는 그리스말 동사는 그렇게 좁은 뜻으로만 알아들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말 번역대로 ‘착석하다, 자리 잡다’라는 평범한 의미로도 얼마든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후만찬이 이별만찬이었다는, 매우 특수한 분위기는 식사 자세가 비스듬히 누운 자세였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 다섯째, 마르 14,22ㄱ의 “그들이 먹고 있을 때”라는 말을 그들이 식사 도중에 빵을 먹은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데 이것은 통상적인 식사가 아니라 과월절 만찬 예식의 순서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르 14,22ㄱ은 마르코가 이 최후만찬기에 앞서 유다의 배반 예고 단락을 삽입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던 이야기 실마리를 다시 이어주기 위해 덧붙인 구절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본래의 이야기 순서는 이랬을 것이다: 12에서 16절까지 해방적 만찬 준비 이야기를 전하고 만찬 준비가 끝난 다음 17절의 “저녁이 되자 열두 (제자들)과 함께 오셨다.”에 이어 18절ㄱ의 ”그들이 자리를 잡고 먹고 있을 때…“ 다음에 바로 22절ㄱ의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22절ㄱ은 본래 만찬기에 속해 있던 것이 아니라 최후만찬과 해방절 만찬을 동일시하여 이를 수난사에 반영하는 과정에서 이 자리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먹고 있을 때“라는 표현은 해방절 만찬을 들다가 도중에 빵을 먹는 관습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견해는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 여섯째, 최후만찬 때 예수와 그 일행이 포도주를 마신 것은 이 식사가 평범한 식사가 아니라 과월절 만찬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좀 과장된 해석이다. 예수 시대에 포도주를 반주로 매일 마시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과월절 때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일곱째,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에 대해서 그 의미를 설명해주신 것은 과월절의 하가다 곧 축제 전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해방절 만찬이라는 것을 전제할 수 있을 때에만 말할 수 있는 의견이다. 사실 예수는 제자들과 이별 만찬을 드시면서 빵 쪼개기와 잔 돌려 마시기라는, 관례적인 몸짓의 의미를 -과월절 만찬 자리가 아니었어도- “이것은 내 몸입니다… 이것은 나의, 계약의 피입니다.”라는 말로 굳이 설명해 주어야할 처지에 있었다: 그의 죽음이 목전에 닥쳤기 때문이다. 이 설명의 말씀이 오늘의 마르코의 본문에 충실하게 원형대로 전해졌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이 문제는 곧 다루게 될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빵과 포도주의 설명 말씀을 과월절의 하가다를 대신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여덟째, 최후만찬에 동석한 사람들은 12 제자들뿐이었다. 이 사실은 최후만찬이 해방절 만찬이었음을 말해준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일방적이다. 생전의 예수가 즐겨 자리를 함께 하고 식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반드시 최후만찬에 빠짐없이 다 동석해야 할 이유도 없고 여남은 명의 인원수라고 해서 이들이 동석한 식사가 해방절 만찬이었다는 결론은 확실히 너무 단순하고 일방적이다.
– 아홉째, 마르코는 이 식사가 노래를 부르면서 끝나는 것으로 전한다 (14, 26). 이것은 해방절 만찬 끝에 부르는 할렐 시편(보통 시편114 또는 115-118에 이르는 긴 시편이다)이라고 보고 따라서 시편 찬송에 앞서 있었던 만찬은 해방적 만찬이라는 결론이다. 이 지적은 옳은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최후만찬이 해방절 만찬이었다는 전제 아래서 그렇다. 지금까지 든 논거들은 대부분 그 근거가 희박한데 이 마지막 논거 하나만으로 최후만찬은 해방절 만찬이었다고 결론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이 14,26은 수난사를 해방절을 배경으로 서술하는 과정에서 이 자리에 삽입되었으리라는 가정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마르 14,22ㄱ을 14,17에 바로 이어서 만찬기를 도입하는 구절로 간주할 때 이 구절 덕분에 14,22ㄴ부터 이어지는 만찬기가 그 중간에 유다스의 배반을 예고하는 14,18-21의 단락이 끼어들었는데도 해방절 만찬의 일환으로 다시 연결된다. 14,22ㄴ- 25에 이르는 이 만찬기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빵을 쪼개고 축복하는 동작과 이 빵에 대한 설명 말씀이고(22절 ㄴ.ㄷ.), 둘째는 잔을 들고 축복한 다음 이 잔에서 포도주를 돌려 마시는 동작과 이 잔에 대한 설명 말씀이다(23-24절). 셋째 마지막 부분은 종말에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시겠다는 약속 또는 다짐의 말씀이다(25절).
그런데 이 세 부분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오랜 전승층에 속하는 것일까? 형식으로만 따진다면 Legasse가 지적하듯이 23절. 24절ㄱ. 25절이 가장 오래된 자료로 분석된다: “또한 잔을 드시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돌려)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계약의 피입니다.” 잔을 들고 축복한 다음 이 잔을 제자들에게 주었다는 23절 ㄱ.ㄴ.ㄷ.은 모두 성만찬례문에서 유래하며 최후만찬에서는 이 세 가지 동작 끝에 예수님이 “이것은 계약의 피입니다.”라는 말씀을 발설하셨을 뿐이었겠다. “이것은 나의 피입니다.”라는 설명 말씀은 유다인으로서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기에 예수님이 직접 이렇게 발설하셨을 역사적 개연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피입니다”라는 말은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덜 충격적이었고 따라서 거부감도 훨씬 덜해서 이런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이것은 나의, 계약의 피”라는 이중 속격의 이상스런 구문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는가를 해명할 수 있는 길도 여기서 트인다고 할 수 있다: 처음의 “이것은 계약의 피”에 “이는 내 몸입니다”라는 말씀에 준해서 “이것은 나의”가 덧붙여지고 아울러 “많은 이들을 위해 쏟는 것”이라는 말씀이 마지막으로 곁들여졌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이미 “대속죄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많은 이들을 위해 쏟는 것”이라는 해석의 말씀이 이 자리에 추가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잔에 대한 해석의 말씀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계약의 피(입니다.) 많은 이들을 위해서 쏟는 것(입니다.)”
빵에 대해서 하신 “이는 내 몸입니다.”라는 말씀은 본래의 해석 말씀에 속한다. 다만 성찬례문의 전승에서 영향을 받아 “빵을 드시고 축복하신 다음 떼시어 그들에게 주시며”라는 동작 묘사가 곁들여지고 아울러 “이는 내 몸입니다.”라는 말씀 앞에 “받으시오(또는: 드시오).”라는 명령의 말씀이 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본래 예수님은 그저 빵을 드시고 축복하신 다음 떼시어 그들에게 주시는 동작을 취하시고는 이 동작에 이어 단순히 ”이것은 내 몸(입니다).“라고만 말씀하셨을 것 같다. 빵에 대한 이 해석 말씀만 본래의 원형에 속하고 나머지는 성만찬 전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부분에 해당하는 25절은 이 최후만찬의 분위기에서 충분히 그 역사적 가능성을 시인할 수 있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다. 목전의 죽음을 예감하고 제자들과 마지막 이별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당신의 희망과 포부를 유언으로 남기셨을 법하기 때문이다. 이 희망과 포부를 하느님 나라에서의 잔치라는 은유를 통해서 표출하신다. 다시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는 단주(斷酒) 선언은 당신의 죽음 예고나 다름없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최후만찬에서의 예수님의 동작과 말씀은 원시교회의 성만찬례의 기원이고 그 근거라는 것이 마르코 자신과 당시 초대 교회 신자들의 확신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최후만찬기는 또한 성만찬례의 원인담(原因譚)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 이 만찬기의 구절 하나하나를 살펴보기로 한다.
III. 주석.
14,22절: 그리고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드시고 축복하신 다음 떼시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으시오. 이는 내 몸입니다.”
예수님은 여느 유다인 가장이나 연회석의 주빈처럼 동작을 취하신다: 빵을 드시고 축복을 하신 다음 그 빵에서 한 조각을 떼어 나눠주신다. 동석한 사람들이 많지 않을 때는 직접 각 사람에게 나눠줄 수도 있고 사람이 많을 때는 손에서 손으로 전달해 줄 수도 있었다. ‘축복하다’는 eulogein라는 그리스말의 번역이다. 이 말은 사실은 식사 때 차려낸 음식에 대해서 드리는 찬양의 기도를 올린다는 뜻이다. eucharistein 곧 “감사를 드린다.”는 말과는 사실상의 동의어이다. 유다인들은 보통 이렇게 식사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미슈나, 브라코트, 6,1): “온 누리의 왕이신 우리 하느님 야훼시여! 당신은 땅에서 빵을 나게 하시니 찬양 받으소서!” 찬양 기도가 끝난 다음 예수님은 먼저 빵 한 조각을 드시고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따라서 같은 동작을 취한다. 이로써 예수님은 만찬의 본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신다. 이어지는 설명의 말씀은 빵 조각을 나누어주실 때 하신 말씀이다: “받으시오 -또는: 드시오-, 이것은 나의 몸입니다.” 여기서 “받으시오” 또는 “드시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발설하였다기보다는 성만찬례문의 의식 설명의 일환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이어지는 “피”라는 말과 한 쌍을 이룬다. 따라서 “몸”은 “피”에 병행하는 표현으로 “살”이라는 뜻을 자연스럽게 떠올려준다. “살”과 “피”라는 용어는 요한복음서의 성만찬 전승과도 일치한다(요한 6장을 보라!). 그런데 “몸”을 “살”의 뜻으로 알아들으면 마치 “피”가 사람 몸의 일부인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 몸의 일부인 “살”을 내주신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끔찍한 말이지만, 뼈나 가죽이나 내장은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할 것이다!) 요한복음서 6장은 바로 이런 오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오해는 어디까지나 살과 피를 분석적으로 좁게 알아들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은 당신 전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우리 한국말에서도 몸은 한 사람의 인격 전체를 의미하는 표현이며 피는 생명 곧 그 사람의 전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관용되어 왔다.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또는 “몸을 바치다”, “몸을 던지다.”) 현대 히브리어에서도 “몸“이라는 뜻의 gwph라는 낱말은 문법상의 인칭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고 있는데 ”몸“이라는 말을 사람의 인격 전체를 가리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의 현대 히브리어 번역에서도 ”나의 몸“을 gwphy로 옮겨놓은 예가 있다. 이와 같이 ”몸“은 예수님 자신이다. 빵을 떼어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으니 당신의 몸, 당신 자신을 제자들에게 내주신다는 뜻이 되겠다. 따라서 이렇게 내주신 빵 곧 그분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과 인격적으로 일치를 이루고 통교하며 그분의 운명과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밖에 다른 뜻이 있을 리 없다. 빵과 몸이 겉으로 보기에 닮았대서만 하는 말씀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실상 빵과 몸이 서로 닮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빵은 사람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빵이 아니다. 이 빵은 사람이 먹는 빵이고 먹어야만 하는 빵이다. 음식이 몸에 동화되듯이 이렇게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와 한 몸을 이루며 진정한 의미의 인격적 교류를 나누는 것이다. 상징적인 동작임에는 틀림없지만 단순한 상징만은 아니다. 후대의 신학은 이를 일러 성사적(聖事的) 동작이라고 이름 부르게 된다. 상징하는 것을 하나의 실재로 이뤄주는 동작이라는 것이다. 빵의 실재적인 의미를 천명하는 말씀이다. 빵은 여전히 빵으로 실재하지만 이 빵은 이제 보통 빵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빵이며 동시에 그리스도는 상징으로서의 이 빵에 실재하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빵은 예수와 함께 하려면 먹어야 하고 받아 모셔야 하는 것이다.
마르코에서는 빵을 예수의 몸과 동일시하는 이 설명의 말씀만 전해지고 다른 부가적인 설명의 말씀은 전해지지 않는다. 여기에 비해 루가 22,19에는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이라는 부연이 추가되어 전해지며 1고린 11,24에는 “여러분을 위하는”이라는 보충 설명이 덧붙여졌다. “여러분을 위한다.”는 말이 본래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내 몸입니다”하신 말씀만으로도 제자들에게 당신 몸을 내준다는 뜻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 까닭은 빵을 한 조각씩 떼어서 나누어주셨다는 상징적인 몸짓이 이 뜻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제자들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뜻이 아니겠는가? 몸을 맡긴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를 멋대로 다뤄도 좋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면 그것은 제자들을 위한 헌신밖에 다른 뜻이 아닐 것이다. 이 말씀에는 결국 대리 속죄사(贖罪死)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반드시 속죄라는 말을 굳이 고집할 뜻은 없지만 제자들을 위하는 죽음이요 제자들을 대신하는 죽음인 것만은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죄론적(罪論的) 해석의 말씀이 아니라 구원론적 해석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14,23절: 빵을 떼서 나눠주는 동작에 이어 예수님은 둘째 동작을 취하신다: 예수님은 잔을 드시고는, 빵에 대해서 그러셨던 것처럼, 그 잔을 두고 늘 하시던 대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다. 이것은 유다인들의 통상적인 식사 관습이었다(바빌론 브라코트, 51b 참조). 식사의 전식에 이어 본식이 끝난 다음 가장이 직접 잔을 들거나, 아니면 시중드는 이가 적포도주를 따라서 물을 조금 섞은 잔을 가져오게 한 다음 이 잔을 받아들고 동석한 이들에게 다 같이 기도하자는 권유와 함께 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세 가지 축복 달리 말해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이 세 가지 축복이 들어있는 식사 기도를 비르카트 하 마존이라고 불렀다. 음식 축복이라는 뜻이다. 이 축복 또는 감사 기도가 끝나면 동석한 회중이 여기에 뜻을 같이 한다는 뜻으로 아멘을 세 번 반복했다. 이 기도를 드리셨다는 뜻으로 마르 14, 23에서는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셨다”고 전한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동석한 사람들이 각자 기지고 있던 잔을 들고 포도주를 마시던 유다인들의 과월절 만찬 관습과는 달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들고 계시던, 같은 잔에서 돌려 마시게 하셨다914, 23ㄴ: “모두 그것(=잔)에서 (포도주를 돌려) 마셨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고 이것은 뒤에 그리스도인들이 거행하던 성만찬례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오늘날에도 특히 사제들이 여럿이서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할 때면 가능하면 같은 잔에서 성혈을 배령하는 관습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래는 “그들은 모두 그것에서 마셨다”는 보도에 이어 즉시 25절의 약속과 다짐의 말씀이 뒤따랐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 연결해 놓고 보아도 문장은 별무리 없이 잘 이어진다: “그들은 모두 그것에서 마셨다. 그러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마실 그 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더 이상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본문이 잔에 대한 해석 말씀을 전하는 24절로 다소 부자연스럽게 중단되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잔을 돌려 마시기 전에 하셨어야 더 나을 뻔한 이 해석의 말씀을 다 돌려 마신 다음에 하신 말씀으로 전하는 바람에 역시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이와 같은 부자연스러움은 역시 원시교회의 성만찬례의 관습에서 일부 해명된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례에 참석하면 그 자리에 모인 회중 전체가 빵과 포도주를 나눴는데 포도주는 같은 잔에서 돌려 마셨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그것에서 마셨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14, 24절: 그렇다면 잔에 대한 설명 말씀 역시 초대교회의 성만찬례에서 사용하던 말씀이 아니었을까를 진지하게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이미 말한 대로, “이것은 나의 피”라는 말씀은 예수님도 유대인으로서 차마 입에 담지는 못하셨을 것 같다. 초대교회의 성만찬례문에서는 “이는 내 몸입니다” 하신 빵에 대한 설명 말씀에 맞추어 “이는 나의 피입니다.”라는 잔의 설명 말씀을 조성했을 것 같다. 빵에 대한 설명 말씀과 다른 점은, 이 잔에 대한 설명 말씀에는 피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곁들여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나의, 계약의 피, 많은 이들을 위해 쏟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말씀을 다시 분석해보면 예수님의 본래의 말씀으로서는 “이것은 계약의 피”가 가장 개연성이 높고 이 말씀에 “나의…” 그리고 “많은 이들을 위해 쏟는 것”라는 신학적 해석의 말씀이 성만찬례문에 따라 보충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포도주로 상징되는 당신의 피를 출애 24, 8의 “계약의 피”로 설명해주시면서 당신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에 새로운 계약이 체결된다는 뜻을 밝히신 것 같다. 물론 “새로운”이라는 말은 없지만 바울로(1고린 11,25)와 그 전승을 함께 하는 루가(22,20)는 이런 의미를 “새로운 계약”이라는 표현으로 적절하게 재해석해 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본래의 의도를 이 계약이라는 시각에서 달리 이해한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모아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게 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후대의 용어를 빌린다면 일종의 교회론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하느님 백성의 범위가 예수님 당대처럼 이스라엘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민족들까지도 포함하는 보편 개념으로 확장된다는 점이 역사의 예수와 후대의 교회론적 이해 사이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결코 유다민족만을 하느님 백성으로 생각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셨다는 점만은 지적해 두어야 한다. 보편주의적 해석이 예수님의 의도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최후만찬에서 새로운 계약의 중개자로 당신의 신원과 그 죽음의 뜻을 밝혀주셨다. 그러기에 “이는 계약의 피”라는 말씀은 “이는 나의 피입니다.”라는 말씀으로 당당하게 재해석될 수 있었다. 이 계약의 피는 다른 누구의 피도 아닌, 다른 누구의 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예수님만의 피라는, 배타적인 재해석이요 그리스도론적인 재해석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교회론적 해석”과 교회의 “그리스도론적 해석”이 잘 어울리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피가 “많은 이들을 위해 쏟는 것”이라면 이것은 이미 예수님의 계약 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보편주의 사상을 명문으로 밝혀주는, 추가적인 속죄론적 재해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피를 쏟는다는 것은 살인한다는 뜻도 있지만 제사에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을 잡는다는 뜻으로도 자주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그러기에 예수의 죽음이 시나이 계약의 희생제사에 대비되는 제사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친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서는 나중에 갈바리아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예수의 희생제사로 개념화했다. 바로 우리가 지금 다루는 공관복음서의 최후만찬기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마르 14, 24; 마태 26,28; 루가 22,20). 그렇다고 예수님이 소나 양처럼 제사의 희생 제물처럼 문자 그대로 도살되었다는 듯으로 알아들으면 곤란하다. “위해서”라는 말은 그리스말로 hyper이라는 전치사를 번역한 것이다. “대신”이라는 뜻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조심할 것은, 마치 예수님이 하느님의 분노를 산 그 백성을 대신해서 벌을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많은 이들을 위해서”라는 표현은 구약성서 이사야 예언서의 저 유명한 53장 12절을 떠올려준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제 자신을 내던지고 죄인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죄인들을 위하여 중재하였기 때문이다.”(새번역 성서). 한마디로, 이사야가 말하는 야훼의 종처럼, 예수님도 많은 이들 곧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던져 대속사(代贖死)의 죽음을 죽으신다는 해석이다. 물론 이 대속의 효과 범위는 보편적이다.
12,25절: 예수님이 본래 잔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때까지 다시는 이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겠다는 단주 선언과 종말론적 기대와 확신을 표현하는, 일종의 예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이뤄져 있다. 단주 선언은 이제 이승의 삶을 마감하시겠다는 뜻이다.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라는 표현은 잔에 대한 유다교의 전통적인 축복 기도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온 누리의 왕, 우리 하느님 야훼시여, 찬양받으소서. 당신은 포도 열매를 창조하시나이다.”(미슈나 브라코트, 6,1 참조). “포도 열매를 창조하시나이다”라는 표현에 주목할 것이다. 히브리어의 boreh peri ha-gaphen에 해당한다. 이것을 하느님 나라와 관련지어 다시 표현해본다면, 예수님은 당신이 생전에 가까이 왔다고 선언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이 지상에서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포기 선언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의 임박을 마지막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이 최후만찬 시점에 와서 비로소 포기하고(J. Schlosser) 이 하느님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새로운 전망을 이 말씀으로 밝혀주신다고 하겠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오고 또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하고 활동하시는 현재 안에 하나의 현실로 엄연히 작용하고 있지만 그 나라의 완성은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미래에서 기대하신다는 뜻이겠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미래의 운명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하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하느님 나라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잔치에 동석하시리라는 것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궁극적인 희망과 확신을 드러내는 예언의 말씀이다. 다른 면에서 볼 때, 이 구원과 희망이 죽은 다음에 있을 부활과 현양의 방식으로 구체화하리라는 전망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이런 전망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다만, 예수님은 이 기대와 희망이 성취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 같다. 사실 그분은 “계약의 피”를 말씀하시면서도 당신의 피로 체결될 계약으로 태어날 하느님의 새 백성을 하나의 공동체로 조직할 아무런 복안이나 계획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런 계획이나 복안을 발설하실 계제도 아니었다. 동시에 당신의 죽음이 많은 이들을 위한 죽음이고 보면 이 죽음을 넘어 개선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이 혼자서만 그 잔치를 즐길 리는 만무하다. 하느님 나라에서 벌이는 잔치는 구약성서와 초기 유다교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발전시켜온 고전적인 주제이다(이사 25,6; 에제 39,17-20;꿈란의 사해 문헌 1QSa 2,11-21, 바빌론 탈무드, 샵바트, 153a 등 여러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복음서에도 같은 전망이 반영되어 나온다(마태 8,11; 루가 13,29). 요한 묵시록 19,9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다만,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앞서 예수님의 재림이 먼저 있으리라는, 말하자면, 한 단게 발전된 종말론적 전망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과 동일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그분은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당신의 선택된 자들을 모아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끝없는 복락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마르 1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