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 13, 1-9)


2002년 7월 17일 (수)




I. 맥락과 분석 이 비유는 공관복음서에 다 전해졌다: 마르 4, 1-9; 마태 13, 1-9; 루가 8, 4-8. 마태오는 이 비유를 자기 복음서의 13장 곧 그 유명한 비유 설교 집성문의 첫 비유로 전했다. 주로 마르코를 대본으로 삼아 이 비유를 작성했다. 마르코와 비교할 때 다소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13,1에서 이 설교의 무대를 설정하면서 예수님이 이제까지 머물러 있었던 집(12,46)에서 호숫가로 장소를 옮겼다는 것을 마르코보다 더 상세히 그리고 좀도 성대하고 묘사했다. 또 마태 13,2에서는 예수님의 청중인 군중들은 호숫가에 서 있었는데 예수님은 호수에 배를 띄우고 거기에 앉아 계셨다는 것은 강조했다고 할 것이다. 가르치는 분의 권위를 돋보여주는 대목이다. 마르 4,2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많이 강조하는데 마태오는 13,2에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점을 돋보여주며 이 표현은 13장 비유 설교에 여러 차례 반복된다(10.13.34). 아마 마태오는 이 13장에서 예수님의 비유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동시에 그분의 일상적인 선포 활동의 한 단면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비유 자체는 마르코나 마태오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씨앗을 단수로 전하는 마르코에 비해 마태오는 좀더 합리적으로 복수로 바꿔서 전한다는 따위의 차이라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몇 가지 차이가 있지만 우리말 번역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II. 주석 마태오가 이해하는 이 비유의 뜻은 그가 직접 그 해설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18-23절)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르코도 마찬가지이다(마르 4,14-20). 여기서는 비유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비유의 은유 부분에 대해서 몇 가지 도움이 되는 사항을 지적하고 이 비유가 마태오의 해설과는 다른 어떤 본래적인 뜻이 있는가를 알아보고 또 그 뜻을 헤아려보는데 더 치중할 것이다.




3-9절. 전반적으로 보아 이 비유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은유에는 우리가 알고 싶은 여러 가지가 빠져있어 다소 아쉽다는 느낌을 부인할 수 없다. 가령, 밭이 기름졌는지 아니면 척박했는지, 물이 많거나 쉽게 댈 수 있었는지 아니면 메말랐는지, 밭이 평탄했는지 비탈졌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또 팔레스티나에서는 대체로 4월에서 10월까지는 건기라서 비가 안 오고 11월부터 그 이듬해 봄까지는 비가 내리는 우기인데 파종은 첫 비가 내리기 전 가을에 있었는가 아니면 첫 비가 내린 다음 초겨울에 있었는가, 강우량은 충분했는가 아니면 부족했는가도 잘 알 수 없다. 사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이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첫 비가 오기 전 밭을 갈아엎지 않고 그대로 씨를 뿌렸다가 비가 내리면 여름 내내 자라난 잡초와 함께 밭을 쟁기로 갈아엎었다. 이것이 이른 파종이다. 늦갈이는 비가 내리는 동안 밭을 미리 갈아엎는다. 그런 다음 그 동안에 자라난 어린 잡초를 말라 죽게 하고 이어서 씨를 뿌린 다음 밭을 다시 갈아엎는다. 어떤 학자들은 우리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파종은 이른 갈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건기 중에는 사람들이 질러 다니기 때문에 밭에 길이 생겨나기도 하고 잡초가 우거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팔레스티나의 지질은 석회석이 주종이어서 비가 내려도 금세 땅속으로 스며들면서 흙을 쓸어간다. 쓸려가지 않았다고 해도 석회석 바위 위에 남아있는 지층의 두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돌이 밭에 널려있기도 하다. 돌이 너무 많아 밭을 가는 쟁기의 폭이 우리나라보다 좁았다고 한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우리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파종은 이른 파종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씨가 길가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농사 환경을 전제할 때 가장 잘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설명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 견해를 지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다른 연구에 따르면 파종을 전후로 두 번 밭을 갈아엎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는 주장도 있다. 한 마디로 이른 갈이인지 늦갈이인지 단언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른 갈이든지 늦갈이든지 비유의 이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다면, 이 비유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행동이 관례적인 것인지 아니면 이례적인 것인지에 따라 이 비유를 일반 비유인지 아니면 특례 비유로 분류할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비유에 등장하는 농부의 행동은 관례적이라거나 상식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금할 길이 없다. 그 누가 농사를 지으면서 일부러 길가나 돌밭이나 잡초가 우거진 풀밭에 씨를 뿌리겠는가?! 일반적으로는 좋은 땅에 씨를 뿌리지만, 그러는 가운데도 더러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 따라서 대부분의 씨는 좋은 땅에 뿌려지지만 일부는 뜻하지 않게 좋지 않은 곳에 떨어지더라도 그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상식이 아니겠는가? 3절. 우리의 비유는 흔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찬찬히 살려보면 씨 뿌리는 사람은 이 비유에서 완전히 관심 밖이다. 씨 뿌리는 사람은 3b절에서 딱 한 번 언급되어 나온다.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 자신도 자기가 뿌린 씨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는 아마 씨를 뿌린 다음에도 밭을 갈아엎지 않은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늘의 새가 와서 그 씨를 쪼아 먹을 수 있었겠는가?! 아니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를 그는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이었을까?




4-8절. 어쨌든 이제부터는 모든 관심이 그가 뿌린 씨의 운명과 토질에 집중된다. 돌밭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잠시 언급했다. 흙이 많지 않은 곳에 싹을 틴 씨가 가뭄과 뜨거운 햇빛에 오래 갈 리가 없다. 수분이 없기 때문이다. 가시덤불은 아마 지난해 자라다가 말라버린 채로 밭에 남아있는 잡초로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아마 밭은 그야말로 쟁기질을 하기 전인 것 같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쟁기질을 한 다음에도 그 자리에 가시덤불이 나중에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쟁기로 갈아엎은 밭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서도 위에서 잠시 언급했다.




8절. 수확량을 말해주는 수치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마태오는 그 수치를 열거하는데 왜 체감 순서를 따른 것일까? 수확량의 수치는 씨앗 하나가 맺을 수 있었던 수확량인가 아니면 그 밭 전체의 수확량인가? 어쨌든 좋은 땅의 수확량인 것만은 틀림없다. 좋은 땅이라고 해도 다 같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그 수확량에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이렇게 질문해 놓고 보면 여기서 말하는 수확량의 수치는 수확량 전체의 수치가 아니라 씨앗 한 알의 수확량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또 사실 이삭 하나를 꺾어서 거기 매달린 낱알 수를 세어보는 일은 그리 비현실적인 것만도 아니다. 마태오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의 비유는 대조의 비유라고 보기 어렵다: 여러 가지로 장애 요인이 많았지만 수확은 풍작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랬다면 수확량의 수치를 열거할 때 체감 순서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체감 순서는 증가 순서에 비해서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실패지만 나중에 가면 큰 성공을 거두리라는 대조를 말하려 했다면 이런 식으로 수치를 열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하는 것은, 마태오는 이 비유를 전하면서 이 비유가 무엇에 관한 비유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르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하튼 이 비유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라는 것을 명문으로 밝히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셋째로 이 비유는 이 농부가 얼마나 큰 손실을 보았느냐를 강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뿌린 씨의 3/4이 없어져버렸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농부가 조심스럽게 씨를 뿌린다면 이런 손실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도 일찍이 엉겅퀴에 씨를 뿌리지 말고 땅을 새로 갈아엎으라고 권고한 바 있다(예레 4,3).



마지막으로 이 비유는 8절에서 씨앗 하나하나의 수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어느 농부가 이렇듯 자질구레하게 씨앗 하나하나에 대해서 관심을 갖겠는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의 수확량이 아니겠는가? 이 비유를 일러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라고 하기가 주저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마태오도 마르코도 그리고 그 이전의 이 비유의 해설자도 중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밭의 토질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의 자세 여하에 따라 그 말씀이 본래 기대하는 수확을 거둘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한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의도하신 교훈이요 이 비유의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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