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묻힌 보물과 진주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과 진주의 비유. 마태 13, 44-46.








I. 짜임새와 자료.


이 두 작은 비유는 한 두 가지 차이점을 무시한다면 거의 똑같은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차이점으로서는 가령 시칭이 46절에서는 부정과거인데 44cd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또 44절에서는 하늘나라가 보물에 비교되어 나오는데 45절에서는 같은 하늘나라가 진주 장수에 비유된다. 즉, 주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44절a와 45절은 비유의 주제가 하늘나라임을 밝힌다. 이어서 44절b와 46절은 “발견하다”라는 동사와 함께 이야기가 시작한다. 사용된 어휘들은 마태오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다. 이 두 비유는 47-50절에 이어지는 그물의 비유와 함께 마태오 고유의 비유들이다. 그러나 마태오의 창작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따라서 그가 이용할 수 있었던 자료에서 취재했을 것이다. 아마 구전으로 전해지던 것을 어쩌면 마태오가 처음으로 문서화했다고 봄이 좋을 듯 하다. 앞뒤 문맥과의 연결은 비교적 느슨한 편이나 31-33절의 겨자씨의 비유와 접촉되는 요소들도 없지는 않다: 31.33.44.46의 도입구는 분명히 마태오의 필치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겨자씨와 누룩과 보물과 진주 장수의 네 비유들은 통사론적으로 볼 때 그 구조가 다 같고 몇몇 어휘들도 동일하다.






II. 전승사와 출처.


현재와 같은 비유의 본문 뼈대는 너무 간소해서 이를 다시 해부해서 전승사적으로 원형을 복원하기 어렵고 또 그 소득도 별로 기대할 게 없을 듯하다. 이론적으로는 마태오 이전에 이 이야기를 전해주던 이야기꾼들은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며 또 이야기의 강조점도 지금과는 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을 증명할 길은 없다. 토마스 복음서의 로기온 76은 별로 사용가치가 없다. 전승도 1차적이 아닌,  2차적 전승인데다가 영지주의 색갈로 너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쌍둥이 비유가 처음부터 이렇게 한쌍의 이야기로전해졌는지 아니면 마태오가 처음으로 이 자리에 한쌍으로 묶어서 전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자세한 토론은 정양모 신부님의 <공관복음서의 비유>(성서와 함께 2000년), 쪽 127-128을 참고할 것이다. 밭에 묻힌 보물 이야기는 민담과 동화에 수없이 반복되어 나오는 소재이다. 진주 장수의 비유와 비슷한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고 해서 이 비유를 예수께서 친히 발설하신 게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물론 없다. 예수님은 기존의 비유 이야기를 얼마든지 이용하실 수 있었고 또 전혀 새로운 비유를 창작하실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III. 주석.


이 두 비유는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 사이에 끼어있는데 앞뒤 맥락이 논리적으로나 소재 면에서 연결이 잘 안된다. 그렇다고 마태오가 취재한 원전에서 두 비유를 이 자리에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마태오는 그 배열 순서를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밭”이라는 공동 소재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이 두 비유가 한자리에 배치된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하늘나라라는 공동 주제와 비유라고 하는 공동 유형이 이 두 비유와 이어지는 그물 비유를 이 자리에 배치하는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이 두 비유 자체의 짜임새와 이야기의 전개과정은 아주 비슷해서 특별히 주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비유의 전반부인 상징 또는 은유 부분은 사실 너무 명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은유 또는 상징을 어디에 어떻게 적용하느냐는 미결의 문제로 남아있다. 하늘나라라는 주제가 있으나 이 하늘나라에 이 두 비유를 이렇게 또는 저렇게 적용할 수 있는 그 비교점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44절. 내용인 즉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그 밭에 숨겨둔 보물을 발견했다; 이 의외의 발견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그는 즉시 그 보물을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묻은 다음 가서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샀다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데가 없지 않다: 이 사람은 남의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지주는 아니었을 테고 날품팔이꾼이나 혹시 소작을 부치던 농부였을 것이다. 가진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밭을 살 만큼은 되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가 전제하는 이 사람의 재력이다. 그렇다면 이 농부는 단순히 가난하기 때문에 남의 밭을 간 것은 아닐 것이다. 밭의 크기가 얼마나 되었으며 또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뙈기만을 따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미상불 그런 자질구레한 사정에 대해서 우리 비유 이야기는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다. 어쨌든 이 농부가 횡재를 한 것만은 의심없다. 그러나 이 횡재와 행운이 그 농부의 평소의 근면이나 선행에 주어진 보상이라는 말도 없다. 그가 그 보물을 캐서 어떻게 처분했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말이 없다: 그 보물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다는 말도 없고 또 원래의 밭 주인이 이 사실을 뒤미쳐 알고 이 농부에게 그 보물의 반환을 요구했다거나 법적으로 보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걸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는 말도 없다. 밭 주인이 모르는 숨겨진 보물은 그 보물의 발견자의 차지라는 것이 한때 로마 법의 관행이었다는 보고도 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절반 씩 밭 주인과 발견자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국고로 환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상이 이 비유 이야기의 상황묘사의 전부이다. 여기서 우선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이 비유는 그 숨겨져있던 보물이 엄청나게 값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도 아니고 값진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운과 횡재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비유 이야기의 관심은 이 보물의 발견자가 보물을 발견한 다음 무슨 행동을 취했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여러 가지 있었을 것이다: 그 보물을 남몰래 훔쳐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발견 사실을 공개해서 법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보물을 다시 묻어두었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이것은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밭을 살 때까지 그 보물을 다른 사람이 찾아내면 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보물을 다시 감춘 그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로서는 가능하면 합법적인 수단으로 이 보물을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 이야기는 이런 법적 또는 윤리적 질문에도 관심이 없다. 끝내 그는 이 밭을 산다. 그런데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한다. 가진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살 만한 재력이 있었다면 은행에 예치해 둔 돈을 찾아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의 재산의 일부를 처분해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며 다른 사람한테서 돈을 꾸어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한다. 이 선택은 비유 이야기꾼의 의도에서 나온 선택이지 실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다음 비유에서도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진주를 샀다고 하는 선택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비유 이야기꾼은 바로 이 점에 이야기의 모든 비중을 싣고 있다고 하겠다. 그에게는 이 점이 가장 중요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보물 발견자의 이 전폭적인 투신과 결단이 이 비유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 선택과 포기는 하느님 나라 때문에 결정되었다. 


45-46절.  이어지는 진주의 비유도 앞의 비유와 구조가 마찬가지다. 진주 장수는 수출입업을 하는 큰 상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옛날에 진주는 주로 홍해와 걸프만 그리고 인도양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진주는 크게 유행했다고 하며 소중하고 값진 것의 대명사로 통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서는 예로부터 진주를 여러 가지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 은유로 사용하였다. 가령, 모세의 율법, 이스라엘 선민, 좋은 생각을 진주에 비교하기도 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상급도 진주에 비유하기도 했다. 앞의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와는 달리 이 진주의 비유는 예수님의 창작으로 생각된다.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주 한 개를 위해서 모든 것을 판다는 것은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하늘나라는 하나뿐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할 것이다. 이 진주의 비유에서도 진주를 사고 파는 정황이 상세히 그려져 나오지 않는다. 진주 장수가 나중에 이 진주를 팔아 큰 돈을 벌었다는 말도 없다. 비유에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그 장사꾼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그 진주를 사들였다는 것이다.






IV. 마태오복음서의 문맥에서 본 두 비유.


이 두 비유 또는 쌍둥이 비유(정양모 신부의 표현)는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났을 때 모든 것을 내던져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라고 독촉하고 격려한다고 할 것이다. 마태오는 “가진 것을 모두 판다”는 행동을 그의 복음서의 맥락에 따라 매우 구체적으로 생각했을 것 같다: 즉, 소유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이리저리 다니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려면 한곳에 붙박이로 살 수도 없을 것이고 소위 전업(專業) 복음 선포자로 활동하려면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가족도 돌볼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걸어야 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 것이다. 마르 10,21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대는 나를 따르시오. 마태오도 이미 6,19-34에서 이미 하늘에 쌓는 보물, 두 주인 곧 하느님과 마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 의식주의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라는 말씀을 산상수훈의 한가운데 전한 바 있다. 10장의 여장 지침에서도 복음 선포자들이 얼마나 질박하고 가난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박해를 각오해야 하고 가족과의 결별도 불사해야 하며 예수님을 고백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 헌신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약속하신다. “가진 것을 모두 판다”는 것이 반드시 소유의 포기만을 안중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런 문맥을 통해서 잘 나타난다.






V. 결론.


과연 하늘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는 무엇이기에 그토록 값진 것일까? 인간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자신마저 헌신할 만한 그 가치는 무엇일까? 하늘나라 또는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한번도 하늘나라가 무엇이라고 정의해주시지 않았다. 하늘나라가 무엇과 같다고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이 고작이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이 왕노릇하는 어떤 영토가 아니다. 하늘나라하면 우리는 흔히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 정도로 생각하는 고정관념을 의식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통치로 이뤄지는 나라다. 하느님의 통치로 이뤄지는 사회질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강압적으로 지배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보살피시고 이끄시고 정의가 사랑으로 실현되도록 인간들에게 명령하시고 호소하시고 위협하시고 처벌하시고 보상하신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들과는 다르신 분이다. 이 “다르신 하느님”을 몸소 체험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하느님이 얼마나 다르신가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우리 잘못의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우리를 용서해주시려고 우리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시다. 마치 탕자가 돌아오기를 날마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그 아버지처럼 말이다. 하느님은 이런 분이다. 이런 분의 뜻대로 세상을 일구어나갈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 자신마저 버리고 투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수님은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물론 그 구체적인 실현방식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구나 다 소유와 집과 가족과 직업과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버리고 나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투신이 요구될 때가 어느 때인지 알아차리고 결단을 내리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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