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 명을 먹이시다 (마태 14, 13-21)
I. 짜임새와 유형.
1. 상황 묘사:
1) 예수의 장소 이동과 그에 따른 군중들의 이동(14, 13).
2) 도착지에 군중들의 운집과 예수의 치오 활동(14절.
2. 본격적 기적 이야기:
1) 시간 자료(15절a).
2) 제자들과 예수의 대화(15절b-18).
3) 군중을 풀밭에 앉힘(19절).
4) 예수의 식사 동작(19절b-cd):
– 들다;
– 우러르다; 축복하다;
– 쪼개다; 주다;
5) 제자들의 배급 동작(19절e);
6. 기적의 결과:
-먹다; 배부르다;
-모으다; 열두 광주리; 오천 명과 여자들과 어린이들.
이 짜임새가 정확하다고 해도 매우 느슨하고 산만하기까지 하다는 인상은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진전 과정을 거의 그대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 짜임새이기 때문이다. 이 짜임새를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기적 자체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축복한 다음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그것들을 받아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군중들은 그것을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다. 그 사이에 어느 틈엔가 기적이 이뤄진 것이다. 언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독자들은 전혀 알 수 없다. Theissen은 이런 현상을 일러 이른 바 선물 기적 또는 선사(膳賜) 기적의 유형상의 특징이라고 규정했다. 이 유형의 기적은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뜻밖의 물질적인 선물을 엄청나게 많이 주시는 기적을 말한다. 그 특징으로 말하면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선물을 받는 사람이 청하지 않았는데도 하느님께서 자발적으로 선물을 베풀어 주신다; 둘째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적 이야기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기적의 결과를 많이 강조하는 편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유형상 이 선사 기적에 분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II. 분석.
이 단락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르코도 6, 34-44에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마태오는 대체로 마르코를 따르면서도 몇 가지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 차이점들은 대체로 마태오의 편집에서 오는 것이며 그의 고유자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출전설(二出典說)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설이다. 이제 차례로 살펴보고 분석해보자! 13절: 예수께서 들으셨다고 하는데 무엇을 들으셨을까? 무슨 소식이나 소문을 들으셨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슨 소식이나 소문일까? 일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앞 단락 (마태 13, 3-12)에서 전해준 요한 세자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라고 할 수 있다. 13절b: 이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는 “거기서 물러가셨다”고 한다. “거기서”라니 “어디서”일까? 마태오는 예수께서 들으신 소식이 무슨 소식인지 말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예수의 장소 이동의 출발점을 말해주지 않는다. 이 단락까지 가장 최근에 체류하고 있었던 곳으로는 나자렛을 생각할 수 있다 (마태 13, 53-58). 마르코는 나자렛에서 예수님이 배척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한 다음 예수께서 12 제자들을 파견하신 이야기를 전한다 (마르 6, 6b-13). 그러나 마태오는 이미 자기 복음서 10장에서 제자 파견 기사를 전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파견 기사를 생략하고 곧 바로 마르코의 순서를 따라(마르 6, 32 이하)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이적 이야기를 전한다. 예수께서 떠나가신 행선지는 어느 외딴 곳이라고 한다. 사막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예수님은 군중들을 풀 위에 앉히셨다고 한다. 그러니 사막이라기보다는 인가도 없고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려운 쓸쓸한 곳이라고 생가하면 무난할 것이다. 배를 타고 가셨다고 한다. 우리의 통념으로는 사막과 바다 또는 호수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 동쪽 기슭에서 바로 이어지는 골란 고원의 삭막한 지대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 13절c: 예수님은 혼자서 가셨다고 하는데 군중들이 예수님이 배를 타고 어디론가 외딴 곳으로 혼자 가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마태오의 본문만 읽어보면 배를 타고 떠나신 분은 예수 한분뿐이다. 그러나 마르 6, 32를 보면 제자들도 함께 갔다는 인상을 받는다. 14절은 도착 지점의 광경을 떠오르게 한다. 배에서 내려서 보시니 이미 많은 군중이 도착해 있었는데 예수는 그들 중에 아픈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치유를 해주셨다고 한다. 치유 활동의 묘사가 매우 일반적아고 다소 추상적이다. 이어지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만으로는 부족해서 그분의 측은지심이 병자들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보충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하겠다. 15절: 저녁이 되었다는 말과 시간이 벌써 지났다는 말은 불필요한 중복으로 보인다. 그러나 직접화법으로 전개되는 대화에서는 별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된다. 시간이 늦었는데도 군중을 떠내 보내자는 제자들의 제안은 인근 마을들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군중은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고 먹을거리 곧 음식을 사먹을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중을 떠내 보내자는 제안은 제자들이 먼저 했다. 이로써 예수와의 짤막한 대화가 도입된다. 대화의 내용인 즉 1)때가 늦었고 2)외딴곳이고 3)군중은 많고 하니 지금 떠내 보내서 저녁을 사먹도록 하자는 것이다. 제자들의 이 제안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제자들의 제안은 이런 상황에서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런데도 예수의 의견은 다르다. 마르코( 14, 19f)와 마태오 (16, 9f)는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도 빵 걱정을 하는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의 말씀을 전하지만 그 계기와 전망이 여기서 오천 명 또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와 다르다: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의 경고를 제자들이 오해했기 때문에 그들의 몰지각을 나무라고 그들의 몰이해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 꾸짖으셨다는 게 마르코의 전망이고 제자들의 적은 신앙을 나무라셨다는 게 마태오의 시각이다. 그러나 여기 이 오천 명을 먹이신 단락에는 그런 비판적인 지적이 일체 없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 마태 14, 15절의 제안도 그렇고 17절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는 보고를 제자들의 불신앙 또는 적은 신앙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6절: 예수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즉 제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은 뻔하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17절: 휴대하던 도시락의 재고 보고랄 수있다. 5와 2의 숫자는 오천 명의 군중과는 좋은 대조를 보여주며 예수를 동행하던 제자들이 먹기에도 분명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18절: “그 (빵과 물고기들)을 여기 나한테 가져오시오!”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군중들에게 나눠주기 전에 식사 기도를 드리려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 이 적은 양의 먹을 걸이를 나눠준다고 해도 군중의 숫자에 비해 그것은 실로 가소로운 동작이었을 것이다. 기껏 예수의 측은지심과 성의는 드러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군중의 허기를 달래는 데는 전혀 실효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휴대 양식의 수량과 예수의 이런 동작은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다는 기적의 경이적인 결과를 돋보여주는 효과를 자아낸다고 할 수 있다. 19절a: 마르코 (6, 39)는 예수께서 군중들을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고 전한다. 게다가 마르코는 10명씩, 50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했다고 한다. 여기에 비해 마태오는 떼 지어 앉았다는 언급을 생략했다. 그 특별한 이유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혹시 마태오는 이 언급을 이야기의 진전에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풀밭에 “자리 잡다”라는 사실만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예수의 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종말에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던 메시아 잔치의 예표 또는 그 예고로 이해하려 했고 또 그 뜻을 독자들에게도 납득시키려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자리 잡다”는 잔치 자리에서 몸을 비스듬히 눕히고 잔치를 즐기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19절b: 이 구절에는 예수와 제자들의 동작이 묘사되어 나온다. 예수의 동작은 다음 5가지로 매듭지어져 있다: 1)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시고; 2)하늘을 우러르고; 3) 축복하시고 또는 찬양하시고; 4)빵을 쪼개시고; 5)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제자들의 동작은 매우 간단하다: 그들은 군중에게 빵을 나눠주었다. 예수님의 동작은 무척 장황하고 상세하다.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기 위한 일종의 예비 동작이었을까? 요술이나 마술을 하기 위한 야바위 짓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 다섯 단계로 진행된 예수의 동작은 실은 유다인들의 식사 습관을 재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독자들이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면 이런 식사 습관의 재연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분명 이방계 그리스도인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여기서 다음의 결론이 연역되어 나온다: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읽어가다가 이 대목에 와서는 틀림없이 그들이 주일마다 거행하는 주님의 만찬례를 떠올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결론은 마태오가 이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무슨 의미로 알아들었느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실상 최후만찬 기사에서 마태오는 예수께서 성찬례 제정 동작을 똑같은 동사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6, 26ff): 빵을 드시고 축복하시고 쪼개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14, 19에는 “하늘을 우러르다”라는 동작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동작은 어떤 의미로 축복하다 동작의 동반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축복이 식사 전 기도이고 이 기도에 동반하는 동작이라는 뜻이고 그 자체로 기도의 일부를 이룬다. 따라서 어떤 독립적인 의미는 없다고 본다. 이렇게 이 두 구절(14, 19; 26, 26)이 밀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마태오와 그 독자들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이 기적 이야기를 최후만찬과 주님의 성찬례와 연결해서 이해했을 것 같다. 과연 이들이 어떤 의미로 이 기적 이야기를 이해했을까? 여기서는 질문만 던져놓고 주석 부분에 가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가능한 대로 찾아보기로 하자!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주었다는 말은 제자들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하겠다. 실용적인 의미도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라면 예수 혼자서 오천 명이나 되는 장정들과 부녀자들 및 아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실 수 없으셨을 테니 말이다! 20절: 이 대목은 특별히 엘리사의 빵을 많게 한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2열왕 4,43-44):
“어떤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떡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그것을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먹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어떻게 이것을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야훼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과연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얼마나 남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오천 명과 백 명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에필로그와 12 광주리에 가득차는 남은 조각은 예수와 엘리사를 잘 대비시켜주고 상대적으로 엘리사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을 잘 돋보여준다. 물론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는 빵을 많게 하신 예수의 기적 이야기 전체에 일종의 표본 구실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먹은 사람들의 숫자가 여성들과 아이들 외에도 남자만도 오천 명이었다고 하는 이 통계 보고는 여성들과 어린들을 경시하는 당시의 관행을 무의식 중에 반영하는 것으로 보면 오늘의 독자로서의 과민반응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여자들과 어린이들 외에”라는 전치사구는 그 용법이 배제하는데 있지 않고 포괄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III. 편집.
이 이야기의 자료는 마르 6,30-44이다. 마르코와의 차이점을 대충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자들의 휴식에 관한 언급은 완전히 탈락되었다. 제자들의 귀환과 귀환 보고도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군중들이 예수를 뒤따랐다는 기사도 매우 간략하게 처리했다. 길 잃은 양과 같다는 소재도 빠졌다. 마태오는 이미 9, 36에서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이 소재를 사용한 바 있다. 마르코는 예수님이 군중들이 가엾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고 하는데 (6,34) 마태오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고 한다. 마태오는 “저녁이 되었다”고 시간을 확실하게 못박는데 마르코는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다소 막연하게 말한다. 마태오는 마르 6,37b의 영문 모르는 제자들의 질문을 생략했다. 마찬가지로 6, 38a의 예수님의 질문도 삭제했다. 마태오는 제자들이 휴대 식량의 재고를 자발적으로 보고하게 한다(17절). 마태오는 또한 50명씩, 100명씩 떼지어 앉혔다는 마르코의 기사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출애급기 주제보다 아마 메시아 잔치 주제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위 참조!) 마태오가 26,26의 최후만찬 기사와 의식적으로 일치시키면서 이 기적 이야기, 그중에도 특히 예수의 식사 동작 부분을 작성했느냐는 현재 논란 중이다. 내 생각으로는 의식적으로 그랬을 확률이 더 많다.
이상의 분석과 차이점 지적에서 우리가 마태오의 편집 사상에 대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마태오는 마르코에 비해서 제자들에 관한 기사를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들에 대한 경의 때문이었다. 어리석고 눈치 없고 영문모르는 제자들이라는 인상을 가급적 완화하려 했다. 제자들이 빵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사실을 마르코는 부문장인 하나의 목적문으로 처리하였는데 마태오는 제자들이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이야기를 하나의 주문장으로 전한다.
그의 작업방법도 눈여겨 볼 수 있는데 핵심을 전하는데 집중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은 과감하게 삭제하고 축소하고 변경한다. 특히 제자들에 대한 그의 집중이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15, 32-39에 전하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의 어떤 병행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경을 쓴 것 같다. 특히 14,19-21과 16,36-38을 비교해 볼 일이다.
한 가지 남은 질문은 마태오가 이 이야기를 작성할 때 마르코 외에도 가령 2열왕 4,42-44를 별도로 참고하거나 이용했느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단언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루가도 9, 10-17에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마르코와는 다르면서도 마태오와는 공통하는 점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고 할 수 있으나 이런 점들은 이미 Allison이 자세히 논증했듯이 마태오의 편집 작업으로 얼마든지 설명이 가능하다.
IV. 주석.
13f. 예수님은 요한 세자가 잔인하게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행방을 감춘다. 혼자서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셨다고 한다. 정치적인 망명 또는 도피 또는 은신이었을까? 도피나 은신이었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예수님은 하루 빨리 죽으러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좋은 기회를 잡아서 당신의 사명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겁이 나시기도 했을 것이다. 당신도 요한처럼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외딴곳은 어딘지 구체적으로는 알 길이 없다. 예수는 배를 타고 가시고 군중들은 육로로 걸어갔다고 한다. 왜 이렇게 배편과 도보 이동을 대조시키는 것일까? 아마도 14절에서 예수께서 군중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다는 동기를 마련하기 위해서일까? 그도 그럴 것이 걸어서 예수께서 가신 도착지에 닿을 무렵이면 거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군중들은 많이 지쳐있을 것이고 시간도 많이 걸렸을 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병자들도 있었다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너무 합리주의적인 해석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군중을 측은히 여기셨다고 한다. 구약성서에서 측은지심은 하느님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 측은지심은 애가 달아서 속이 뒤틀리는, 매우 격렬한 감정, 어머니가 그 자녀들에게 갖는 본능적인 애정에 비유되는 하느님의 속성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어머니 같은 아버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 측은지심을 병자들에게 보여주신다. 마태오는 이 사실을 자주 언급한다(불쌍히 여기다: 9,27; 15,22; 17,15; 20.30f; 측은히 여기다: 9,36; 15,32; 20,34). 마태오에게는 메시아의 자비가 매우 중요했다(8,17).
15-18. 저녁이 되자 군중을 먹일 생각이 나서 제자들은 이들을 마을로 떠내 보내 음식을 사먹게 하지고 제언한다. 저녁 식사는 도시 사람들의 정찬이었다. 마태오는 도시 출신이어서 저녁 시간을 정확히 지적했을지도 모른다는 Luz의 지적은 재미있다. 제자들에게 군중들을 떠내 보내지 말라는 예수의 명령은 단호하고 권위가 있다. 주님으로서의 권위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정말 얼마 안 되는 양이다. 제자들의 적은 신앙을 빗대는 양일까? 감당하기 어려운 곤경과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무능은 가히 무기력감이나 좌절감 또는 절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믿음이 아주 없어져 절망할 수도 있고 적어도 믿음이 왜소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도 그렇고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믿음은 기적 이전의 문제이다. 기적이 일어나는 그 다음이고 믿음의 전제나 근거는 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믿음은 그러기에 이런 상황에서 희망과 기도와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성찰은 빵 12 개와 물고기 5 마리라는 숫자에 어떤 상징적인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Luz에 반대). 이 이야기 안에서 이 숫자의 본래적인 의미는 오천 명 +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대비하는데 있다.
19절. 본격적인 기적 이야기는 정작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예수의 명령과 함께 시작된다: 군중들을 풀밭에 앉히라는 것이다. 출애굽 때처럼 50명씩 또는 100명씩 떼지어 앉았다는 말을 생략한 것을 보면 마태오에게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백성을 재건한다는 주제에 별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위 참조!). 예수의 식사 동작에 대해서는 위를 참조하라!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주었다는 언급은 교부시대부터 사도들과 그 뒤를 이어 성만찬예의 제단에서 봉사하는 성직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많이 해석되어 왔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기적 이야기의 수준에서 볼 때 오천 명의 손님들에게 집주인인 예수 혼자서 식사를 나누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의 협조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볼 때 불가피했다고 할 것이다.
20절. 이야기는 기적의 확인과 함께 대단원을 맺는다. 12 광주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광주리는 일종의 도량형기로도 쓰였는데 약 10리터들이의 광주리였다고 한다. 12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도 왈가왈부 이론이 많다. 이스라엘의 12 부족, 12 제자 등.
21절. 오천 명이라는 숫자도 마찬가지이다. 매우 많았다는 뜻일 게다. 누가 어느 틈에 그 많은 숫자를 일일히 세보았다는 말인가?! “여자들과 어린들 외”에 대해서는 위를 참조하라! 이런 계산법은혹시 출애 12, 37과 관련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