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완성자로서의 예수님
마태오는 복음을 족보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것은 마태오가 예수그리스도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인류가 기다리던 구세주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또한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으로서 복음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다. 또한 율법과 예언서를 들여다 보면 모두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이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신 것을 완성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바오로의 교회는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기에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반면 마태오의 교회는 개종한 유다인으로 구성된 교회이고 이들은 율법을 정확히 지켰다. 그런데 유다인이 아닌 그리스 사람들 즉 율법 모르고 십자가로 구원된다고 아는 사람들과 함께 예절을 지킴에 따라 이들 사이에서 율법의 중요성이 점점 잃어가고 있음에 마태오는 18절의 말씀을 통해 율법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법 6가지의 예를 보여주고 있는데 마태오는 인간이 하느님의 본뜻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알게 되었고 이를 실천할 때에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바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완성되었고 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다.
A.5,21-26:성내지 말라 – 구약에는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게 성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웃에 대한 외부적인 범죄, 곧 살인, 약탈, 상해, 구타 등을 금지했을 뿐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등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각자의 양심의 판결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심은 점차로 마비되어 가고 실정법이 금지하지 않으면 범해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이 율법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찾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것이다.
분노의 단계 | 벌 |
➀단순한 내적인 분노(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 | 지방 재판 |
➁멸시(자기 형제를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 | 최고의회에 회부 |
➂매도(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 | 지옥 불 |
바보는 단순히 raka라는 말의 희랍어 번역일 수 있다. 그러면 우선 raka(시리아 말)라는 말은 화를 냄을 뜻하는 말로 발전하였지만 어떤 후대 사람이 바보란 말을 보충함으로써 지옥의 벌을 나타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재판은 분명히 언젠가 있을 하느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의미한다.
화내면 – 지방법원
바보라고 하면 – 최고의회 – 사람과 관계된 것(일반버스를 따고 서울서 부산 갔다오니 10만원 들더라. 이 바보야 직행버스타고 갔다 오면 하루에 갔다 오고 돈도 2만원 밖에 안 들었을 것 아니냐?)
어리석은 놈 이라고 하면 – 지옥 – 하느님과 관련된 것(난 교무금 100만원 냈다. 이 어리석은 놈아 만원만 내고 그 돈으로 술이나 한잔하지…,)
랍비들도 자기 이웃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에게 피를 본 것과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고 했다. 즉 미워한다는 것은 피를 본 것과 같다는 것이다.
➢제단에 예물을 바칠때
“그러므로 당신이 제단에 예물을 갖다 바치려 할 때에 형제가 당신에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거기서 생각나거든 당신의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두고 먼저 물러가서 당신 형제와 화해하시오. 그 다음에 와서 당신의 예물을 바치시오. 당신이 (송사) 적수와 함께 길을 가는 동안에 얼른 그와 화해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적수가 당신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하인에게 넘겨 당신은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진실히 당신에게 이르거니와, 마지막 과드란스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성전에 가는 도중이나 제사 도중에는 다른 어떤 일이거나 무시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사보다는 화해가 더 급선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행동이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든 것보다도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심화시켜서 말씀하십니다.
이웃, 친구 등과 소소한 문제 하나 해결 못하고 드리는 제사는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공경이라는 것이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람과 화해, 사랑 베푸는 바탕위에 하느님 공경이 성립 되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공경하는 것이 절대로 자기 친구,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 베푸는 것 때문에 감소되지는 않습니다.
B.5,27-30: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10계명에는 간통하지 말라.)
간통뿐만 아니라 남의 아내를 탐내는 것조차도 간통하는 것이다.
율법에서는 간음을 금하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나쁜 생각, 음란한 생각까지도 엄하게 금하신다. 구약의 십계명은 남자우대(간음죄를 여자에게만 적용시킴)사상이 짙었다. 예수님의 의도는 신체 절단 보다는 악한 마음의 뿌리를 없애라는데 있다. 결혼한 여인이 독신자나 비유다인과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간음하는 것이지만, 결혼한 남자가 같은 일을 하면 간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도 여자는 귀중한 재산목록에 속해 있었다. 십계명에도 이런 영향이 미쳐 재산,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간음을 금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은 단순한 간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보충하신다.
그리고 6계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차라리 피를 흘리는 희생과 고통이 있더라도 죄의 기회를 피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재산, 건강, 친구, 친척까지도 만일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할 원인이 된다면 그들과의 그런 관계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구원은 모든 재산, 온갖 사랑보다 윗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C.5,31-32:아내를 소박하지 말라.
신약입문의 8번을 볼 것.
D.5,33-37:맹세하지 말라.
하느님을 거짓 맹세의 증인으로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존경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 죄를 피하기 위하여 일부의 이스라엘 사람,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 어느 피조물, 예를들어 하늘, 땅, 자기의 머리, 제단, 율법, 자기네 아들 등을 가리켜서 맹세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 맹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포함시킨 것이 아니므로,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이기적이고 악의가 있는 교활한 이 생각을 꾸짖으신다.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하느님의 소유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을 내세운 맹세도 금하셨다.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요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며, “예루살렘은 그 크신 하느님의 도성”인 것이다.
피조물을 가리켜 맹세하여도, 진실한 것을 말하지 않거나, 그 맹세를 지키지 않거나 하면, 그것은 피조물에게 저주를 하는 것이 된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해야 한다. 그 이상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맹세를 나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악에서 나오는 것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세의 필요가 있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불성실과 불신이 있기 때문이다.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한다면 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E.5.38-42:보복하지 말라.
➢동태복수법
구약에서는 동태복수법이 적용되었다. 피해자에게 입힌 상해, 손해를 가해자에게 정확히 그대로 보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체 상해의 경우 가장 흔히 적용되었다. 즉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가해자도 피해자가 당한 눈의 상처만큼 형벌을 받았다(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구약에서 동태복수법의 원칙은 출애21,23-25;레위24,17-21;신명19,21등에 나타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똑같이 복수를 한다 하더라도 감정이 안 들어갈 수가 없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은 공정을 기할 수 없으니 보복은 결국 보복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동태복수법은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치되었고,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악행과 학대를 당할 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이것은 징용의 경우이다. 고대에는 징용제도가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던 듯 싶다. 보통으로는 운송기구나 말을 징발했으나 때로는 필요에 따라서 가축이나 사람까지도 징용했다. 시골에서 돌아 오는 길에 있었던 키레네 사람 시몬은 구세주의 십자가를 운반하기 위하여 로마 군대에게 징용당하였다. 군인의 수가 부족하지 않았을텐데 지나가는 행인을 일부러 잡아다가 쓰는 것을 보면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징용을 당하면 대게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싫어하며 끌려 가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감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주도적인 사람이 되라). “오리를 가자고 했지? 내가 십리를 가주마…”
F.5,43-48:원수도 사랑하라.
구약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있었으나 이웃이란 유다인에게 있어서 오직 유다인들만을 가리켰다. 한 사람의 유다인이 고통을 받고 있는 이방인을 보고 그를 도와 줄 의무가 있냐고 물었을 때, 율법학자는 없다고 대답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였다. 진정한 하느님에 대한 흠숭을 우상숭배로 타락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한 이 명령이 이방인을 미워하는 구실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한 이스라엘인은 이방인에 대해서라면 정의를 행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했다. 곧 그들을 속여도, 그들로부터 물건을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기도해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원수를 미워한다는 본능적인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람에게서나 자연히 솟아나는 이 무서운 욕망의 흐름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수련을 해야만 할까? 하느님께서 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해를 주시고 비를 내려주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