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파시아누스
네로의 죽음으로 한 세기 넘게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통치가 끝났다. 이는 가족과 친척들 가운데 경쟁자가 될 만한 인물들을 모조리 죽인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로마 제국 전체는 후계자 문제로 혼란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로마의 군단들이 황제의 지명을 둘러싸고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68년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는 동부 스페인의 총독으로 8년째 재직하고 있었다. 갈바의 군대는 네로가 죽기도 전에 벌써 그를 원로원의 특별 대표로 선언하였다. 네로가 죽자 다른 군단들도 그를 지지하고 나서며 황제로 추대하였다. 갈바는 여섯 달 동안 다스리다 자기 측근 오토에게 암살되었다. 오토는 로마 친위대와 다른 군단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비텔리우스에게 충성하는 게르만 지역의 군대가 그를 황제로 선포하면서 로마는 극심한 내전에 휩싸였다. 석 달 뒤에 비텔리우스가 오토를 자결하게 만들고 승리를 쟁취하지만 그 승리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한편 제국의 동쪽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가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다. 로마가 한창 내란에 휩싸일 때에 그는 대권 경쟁에 뛰어들기를 꺼리면서 관망만 하고 있었다. 때마침 모에시아(오늘날의 불가리아) 지역의 군대 2천 명이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들의 도움으로 66년에 시작된 유다 항쟁을 거의 다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는 , 마지막 예루살렘의 점렴을 자기 아들 티투스에게 맡기고 로마로 입성하였다. 로마로 오는 길에 들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집트 주둔 로마군이 그를 지지하고 충성을 약속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본디 기사 계급 출신이었으므로 로마 행정 관리가 되거나 황제가 될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그러나 그의 삼촌이 원로원에 연줄을 갖고 있던 덕에 그는 군단의 지휘관이 될 수 있었다. 네로는 유다 항쟁을 진압하도록 그를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보내면서 그가 황제직에 접근하리가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황제직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가 어지럽힌 로마의 질서를 신속하게 회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그의 인품과 업적을 한결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외교 정책과 로마인들을 위한 내정이 훌륭하였다고 주장한다. 특히 베스파시아누스의 겸허한 자세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 역사가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통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정중하고 관대하였다고 증언한다. 디오 카시우스의 평가 역시 긍정적이다. “그는 공동선을 위해서는 황제였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일에서는 백성과 평등하고 평범하게 살았다”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65,11,1).
베스파시아누스의 업적 가운데 특별히 기려야 할 것은 네로의 통치 기간 동안에 황폐해진 로마를 복구한 일이다. ‘평화의 신전’과 더불어 나중에 콜로세움으로 알려진 원형극장의 건립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4층으로 된 이 거대한 원형극장은 관객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건물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하여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가 봉정식을 거행하고 도미티아누스 치세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2세기 초 이 원형극장에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우스가 순교하였다. 그는 순교를, 그리스도의 수난을 본받는 것으로 여겼다. “나는 짐승들에게 먹히게 하여라, 그들을 통하여 나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의 밀이다. 야수들의 이빨로 갈아져 그리스도의 빵이 될 것이다”(이냐시아우스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4,1). 79년 베스파시아누스는 매우 평범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죽어가면서 이런 농담을 남겼다. “아아 슬프도다! 내가 이제 신이 되려나 보다”(수에토니우스의 「베스파시아누스」23,4). 이 농담은 황제가 죽은 다음에 신이 될 수 있다는 당대의 사조를 비웃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