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1장 해설

 

1. 요한 묵시록 1장


1.머리말(묵시록 1,1-3)


머리말에서는 계시의 원천과 내용 그리고 그 계시를 듣는 사람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로서, 그 전달과정은 하느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천사 그리고 요한을 통해 “당신 종들”에게 전달됩니다. 계시의 내용은 “곧 일어나야 할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공동체 안에서 열심히 듣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① 계시


계시의 그리스어 원어는 “아포칼뤼프시스”인데, 계시란 환시와 그 자체의 해석을 아울러 표시했습니다. 초기교회에서 이 용어는 종말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발현을 표시하는 전문용어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계시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계되는 최종적인 계시이며, 계시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시대를 열어젖히시는 분입니다.




계시란 용어는 교회와 세상, 나아가 하느님의 신비를 점증적으로 벗겨 내는 목적이 있습니다. 계시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신비가 밝혀질 수 있고, 어둠이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밝혀지게 될 비밀들의 대상은 그분과 그분께서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준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생하시어 아버지로부터 들으신 것만을 말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하시는 분으로 아버지께서 주시는 계시의 수혜자이시기에 필연적으로 그 계시를 전해주시는 중재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계시의 객체 역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묵시록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 곧 일어나야만 할 일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전해 받은 계시의 내용은 바로 곧 일어나야만할 일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곧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묵시록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고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묵시록 속에서 다가 올 사건들에 대한 신비로운 예고의 내용을 찾아내려는 호기심 어린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순종과 동참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합니다.




③ 당신 종들


계시의 수신자들은 하느님의 종들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기기도하고,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종”이라는 말은 특별히 예언자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호칭이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하느님나라의 시민이 되기를 갈망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묵시록에서는 14번이나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종”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루어지는 계시는 모든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신앙인들이 종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들이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살아가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④ 계시의 형태


요한 묵시록에서 소개되고 있는 환시들은 거의 모두가 다 환시들의 내용을 들추어내거나 설명해 주는 직무를 맡은 천사와 같은 인물들과 요한과의 관계 속에서 전개됩니다. 요한은 그가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2. 자기가 본 것과 증언


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교 메시지 전체를, 특별히 이 묵시록에 담겨 있는 계시들을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①자기가 본 것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신앙인들은 듣습니다. 그런데 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언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창조하고, 선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만을 빌려주는 것으로 의미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입을 향하여 육체를 움직이는 것까지 포함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은 결국 순종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순종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듣지 못했다는 것이고, 들을 귀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환희이며, 말씀을 읽고 듣는 자들이 누리게 되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 지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 볼 수 있는 분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고자 하는 열정을 구현하려는 우리들에게 최종적으로 보여 지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 예수 그리스도 ☞ 표징들 ☞ 신앙의 천사 ☞ 요한 ☞ 읽는 사람 ☞ 듣는 사람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듣는 신앙인들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22,20)으로 응답함으로써 그 말씀에 동의를 표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전례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②증언(마르튀리아)


증언(마르튀리아)의 주제는 메시지의 예언적 특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증거자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거나 천상적 존재의 현시나 하느님의 섭리를 느낀 사람입니다. 증거자는 자기가 보고 이해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 지혜로서 신앙의 응답이 나오도록 전해주어야 합니다. 즉 느낀 사람, 높은 차원의 체험을 한 사람은 동시에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서, 그들도 함께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파견 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섭리의 가장 완전하고 탁월한 증인이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 받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 증언을 전할 사명을 지닙니다. “충실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세속권력의 반대와 박해를 이겨내야 합니다.




③순교


그리스어 마르튀리아(증언)는 일반적으로 “증언”을 뜻하지만, 그리스도교 용어로서는 특별히 “순교”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스도교 증언자는 자신의 증언을 자신의 피로써 확인해야 했기에 증언자는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1.3.행복선언


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에서는 일곱 번의 행복 선언이 나옵니다(묵시록1,3; 14,13; 16,15; 19,9; 20,6; 22,7.14).


예수님께서도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오7,21.24)”라는 말씀처럼 말씀을 전하는 이와,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 자체는 묵시록 안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곱이란, 충만함과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행복의 완전성이 문제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 묵시록은 환전한 행복의 길을 제시해 주는 계시를 담고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교회에 주어진 것이며, 동시에 신자들이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생명의 말씀을 발견할 수 있도록 공적인 모임에서 읽혀야 할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는 다는 것을 행복의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때는 이미 이 자리에 그리고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역사의 시간 속에서 드러납니다. 요한 묵시록은 고통스런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하면서, 그러한 살이 행복과 위안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인사(묵시록 1,4-8)


묵시록은 편지와는 무관한 형태이지만 이 인사 부분(묵시1,4-8)과 마지막 구절(22,21)은 편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파트모스 섬에 유배되어 있던 요한에게 전달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주님의 날에 모여 기도하던 교회 공동체에게 전해졌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요한은 이 묵시록을 전례 안에서 독서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편지 부분은 메시아 왕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장엄한 착좌식 그리고 다윗에게 한 약속의 성취로서 하느님 백성에 대한 미래의 통치를 나타내기 위해 구약성경을 많이 언급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 부분은 묵시록이 무엇에 대한 것을 기록하는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요한은 묵시록을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로 소개합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구체적 일곱 교회를 지칭하면서 동시에 7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을 가지고 모든 교회에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2.1. 야훼 하느님


지금도 계시고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훼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일러주신 이름입니다. 야훼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고 살아있는,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사실 야훼란 단어는 ‘있다’,‘존재하다.’(hyh)라는 동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인들은 야훼께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이름을 두려워하여 감히 부르지도 못했습니다. 또 야훼란 이 단어는 4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진 글자였기에 발음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원래 고대 히브리어 글자는 자음만 있고, 모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구약성경도 본디 자음만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옛날 히브리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내용의 의미에 따라 모음을 붙여서 읽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느님의 이름 “야훼”가 네 개의 자음으로만 즉 요드,헤,와우,헤(로마자로 쓰면 YHWH,הוהי) 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에는 “네 글자”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한편 유다 사회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을 받았습니다(레위24,16). 그런데 “모독한다.”라는 히브리어에는 “분명하게 발음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빌론 유배시대 이후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를 발음조차 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4세기부터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송구하고 불경스럽고 또한 계명에 어긋나므로 성경을 읽다가 “야훼(הוהי)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도나이(나의 주님), 또는 엘로힘(하느님)이라고 읽는 습관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속죄의 날에, 일 년에 단 한번 그 이름을 감히 발설하였는데, 그 대신에 히브리인들은 아도나이(주님)라는 이름을 사용하거나 “이름, 하늘, 영원하신 분” 같은 대명사를 애용하였다고 합니다.


기원전 3세기에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칠십인역 성경에서는 “야훼”라는 단어를 “주님”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12세기경에 이러한 유다인 성경학자들의 배려를 모르는 유럽 성경학자들 중 일부가 하느님의 이름이 야훼(הוהי)의 자음과 “주님”의 모음을 합친 “여호와”로 잘못 알고, 이것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하느님의 이름이 “여호와”인 줄로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훼(הוהי)가 여호와로 발음되는 줄 알고 지내오던 중 20세기의 학자들이 야훼(הוהי)의 올바른 발음은 여호와가 아닌 ‘야훼’란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2.2. 성령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란 메시아 위에 머무시게 될 일곱 영(충만한 영을 의미)을 말 합니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이사야서 11,1절에서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계약의 보증인이요, 수호자이십니다. 여기서는 계약의 완성에 있어서의 그분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상징적인 일곱이라는 표현으로 성령의 모습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이끌어 갈 책임을 맡고 있으며 그래서 각 교회 공동체 안에 현존하셔야만 하시는 분이십니다. 로마 법정에서 볼 때, 변호사는 재판관과 기소자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을 변호하시기 위해 로마 법정에서 변호사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교회 공동체들에게는 성령은 위로자가 되시는 것이다.




5 또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2.3. 예수 그리스도


여기서 예수님은 삼중적인 내용(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① 성실한 증인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18,37). 예수님께서 성실한 증인이 되시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셨을 때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를 당당하게 증언하심으로서 십자가의 수난을 겪으셔야만 했으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시고 그분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신앙인들, 그러나 박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처해 있던 그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희망과 용기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삶을 살게 해 주었던 원동력이었고, 그것은 준임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죽은 이들의 맏이: 골로새서 1,18절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앙인들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즉, 부활에 대한 암시는 믿음과 희망을 강화시켜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수많은 형제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③세상 임금들의 지배자: 이것은 하느님 오른편에 들어 올려지심으로서 얻게 된 주님의 위치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충실한 순교자로서의 증인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것은 그분의 수난과 죽으심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2.4. 평화


요한은 평화와 은총을 기원함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탄생한 교회들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희랍적 사고 속에서 볼 때 은총이란 개념은 무상성, 관대함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모인 공동체에 인사를 전하시고,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자신을 무상의 선물로 베풀어 주십니다. 히브리적 사고 속에서 볼 때, 평화라는 개념은 더 이상 투쟁이 없는 상태, 더 이상 무기가 사용되지 않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상태를 지칭한다면, 다윗이 우리야에게 “전쟁터의 평화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2사무11,7)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서적 평화는 안락함, 편안함, 조화를 이룸과 같은 것들과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묵시록은 독자들에게 휴식과 평온함의 순간을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은총과  평화라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성체성사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총과 평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고백하고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께로부터 만 나옵니다.




2.5.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그리스도께서 지금 베풀고 계시는 사랑은 지난날 그분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이심으로써 구체적으로 표명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티아2,20)”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소2,20)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위를 묘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을 가져다주시고 지속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 피로써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6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2.6. 한 나라를 이루어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


순교자와 같이 진실한 증인으로서의 당신의 모습을 표명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왕국을 이루게 하고, 다른 하나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왕국을 이루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통치 방식(봉사와 사랑)에 우리가 맞춰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한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사제가 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위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느님의 사제들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7. 아멘.


  종교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때, 백성 공동체는 아멘이라고 응답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멘”이라는 표현은 찬미가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광과 권세를 통해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공동체의 고백에 대해서 전 공동체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아멘”이라는 말로 응답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은 오래된 전례에서 유래하며, 어린양을 아버지와 연결시키면서 그리스도론적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국가나 황제숭배에 대한 저항으로 사용된 영광송이었습니다.




7 보십시오, 그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모든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그분을 찌른 자들도 볼 것이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2.8.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구름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였습니다(탈출19,16; 이사6,4; 마르9,7; 사도1,9 참조). 즉 구름은 인간의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광을 뒤덮고 있는 신적인 표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종말 재림은 구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은 심판의 완성이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십니다.


첫째는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이 심판은 공동체들을 치유하고 위로해 주기 위한 심판입니다.


두 번째로 첫 번째를 보완해 주기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께는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보상해 주시기 위해서 오십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매 순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8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2.9. 알파요 오메가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자와 끝 자. 하느님은 처음이요 마지막, 즉 모든 것의 시작이요 마침으로서 그분에 의해 만물의 창조가 시작되었고 바로 그분이 만물의 최종목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의 시초에서부터 끝까지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파요 오메가로 말하고 있습니다.




2.10 전능하신 주 하느님


인간들의 삶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라는 두 지점 사이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그런 시간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주 하느님으로, 만물의 주재자로 군림하십니다. 그 당시 도미시아누스 황제가 제국의 공식 문서 속에 자신을 “만물의 주재자”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요, 하느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묵시록에서는 하느님만이 전능하신 분(만물의 주재자)라고 9번씩이나 되풀이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1,8; 4,8; 11,17; 15,13; 16,7.14; 19,6.1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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