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악과 두 아들(에사오와 야곱) 1

 

이사악과 두 아들(에사오와 야곱) 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의 믿음과 삶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사악. 그리고 이사악에서 나온 쌍둥이 아들의 삶. 한번 빠져 봅시다.




1. 들어가는 말


야곱에 대해서 성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찬·반론을 보여주고 있다. 예언서(호세 12,4)에서는 에사오를 속이는 사기꾼으로 부정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모세오경(창세 33장)에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시조,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양면을 살펴보게 되면 각자 신앙에 대해서 항상 어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 역사를 시작하는 사람, 역사를 반전시키는 사람뿐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부정적인 면, 비판적인 면을 보게 된다. 이것을 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관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것이 야곱의 교훈이다. 창세 12-25장의 아브라함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시조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통해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야곱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 다면 내 신앙을 더욱 확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2. 각 장 절 이해하기 


   1) 25장 19-28: 에사오와 야곱이 태어나다.


이사악은 나이 마흔에 리브가와 혼인을 하였고, 육십에 리브가에게서 에사오와 야곱을 낳게 된다. 리브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으나, 하느님께서 이사악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리브가는 아기들이 속에서 서도 부딪쳐 대자 “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하면서 하느님께 여쭈어 보러 나아간다. 이것을 좀더 알아듣기 쉽게 한다면 “이렇게 해서야 내가 어찌 살리요!”, 더 나아가 “내가 어쩌자고 임신을 하였는가?”라고 옮길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너의 태에는 두 아이가 들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1)




        ① 선택과 편애


그런데 “한 민족의 운명이 하느님에 의해 이미 영원으로부터 결정되어 버렸다면 인간의 노력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어떤 이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어떤 이는 멸망의 길로 이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을 돌보듯이 에사오도 돌보신다. 야곱처럼 에사오도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고 한 민족의 창시자가 된다. 이사악과 이스마엘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한계가 없고 구원 의지는 보편적이기에 선택 여부에 관계없이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예정론에 따르면 멸망할 자로 선정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받을 수 없고, 구원 받을 자로 선정된 사람은 아무리 못살아도 구원받는 다는 논리이다.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선택은 편애와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은 열둘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선택하신 것이다.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으신 것도 편애해서가 아니라 선택이다. “하느님의 선택은 인간 역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알리기 위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하나의 표본으로 뽑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시면 그 선택된 자는 구원의 도구가 되듯이, 하느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그를 구원의 도구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세우시기 위함이다.




        ② 장남과 차남 


출산일에 에사오가 야곱보다 먼저 세상에 나오려 하자 야곱은 에사오의 발꿈치를 잡은 채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가부장 중심의 사회에서 장남으로 태어나느냐 태어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 운명의 분기점이었다. 가부장 중심 사회에서 집안의 모든 재물과 권한은 철저히 배타적으로 장남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신명기 율법에 의하면 모든 유산이 장남에게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장남은 형제들과 비교해서 두 배의 몫을 받을 뿐이다(신명 21,17). 하지만 이사악이 장남에게 주려 한 유산 상속은 오로지 장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유산 상속이었다. 이것은 이사악이 에사오 한 사람만을 불러 축복을 주겠다고 약속한 사실과 그가 에사오인 줄 알고 야곱에게 준 축복문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을지어다.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을지어다.”(창세27,29)


그리고 야곱에게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기고 목놓아 울던 에사오에게 이사악이 말한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네가  살 곳은 기름진 땅에서 저 위 하늘의 이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면서 네 아우를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뿌리칠 때 네 목에서 그의 멍에를 떨쳐버릴 수 있으리라.”(창세27,39-40)


이 말은 척박한 땅에서 살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야 하며, 아우를 섬겨야 하지만 스스로 힘을 길러 독립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에사오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에돔은 다윗에게 정복되었다가, 기원전 9세기에 와서 유다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2열왕 8,20-22 참조).


        ③에사오와 야곱의 출생과 이름


야곱은 발꿈치를 움켜잡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야곱의 삶 또한 움켜 잡는 삶이었다. 에사오라는 이름은 히브리말의 “털(투성이)”, 그리고 그가 장차 살게 될 세일이라는 산악지방과 관련된다. 에사오는 “붉은”을 뜻하는 “에돔”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에돔인들은 후에 다윗에게 종속된다(2사무 8,14)


야곱은 ‘누구를 속이는 것’, ‘누구 뒷꿈치를 밟는 것’(창세 27,36)으로 속이는 의미가 있고,  ‘뒷꿈치’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를 뜻한다. 그런데 야곱의 본 이름은 ‘Jacob El’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Jacob으로 줄게 된 것이다. ‘Jacob El’은 ‘하느님이 보호하신다, 보호하셨다, 보호하실 지어다’라는 의미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라는 의미로 알아듣는 것이 야곱의 본 이름의 내용일 것이라고 한다.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사악의 아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고유한 부족의 시조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야곱의 중요성은 성서 안에서 12지파의 시조로 나타나는 점과, 출애굽의 시작 시에 야곱을 통해 많은 민족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점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곱은 중요하다. 




         ④ 편애


에사오는 야곱보다 먼저 세상에 나올 만큼 힘이 더 셌을 뿐 아니라 외모도 야곱보다 남자다웠다. 에사오는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 그런데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오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천막은 여성의 세계요 어머니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고, 들판은 남성의 세계, 곧 아버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천막에 머물러 산다는 것은 어머니의 영향력 밑에서 산다는 것이요, 들판에서 보낸다는 것은 아버지의 영향력 밑에서 산다는 것이다.


사내아이가 하루 종일 천막 안에 머물러 산다는 것은 집안일, 가축 돌보는 일, 요리 등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아마 야곱은 마마보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곱은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란 땅 우물가에서 돌로 된 우물 뚜껑을 혼자 굴려낼 만큼 힘이 셌고(창세29,10), 20년 양치기 생활 동안 한낮의 폭염과 한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했으며(창세31,40-41 참조), 야뽁강에서 만난 어떤 남자하고도 밤새 씨름할 만큼 강건하였다(창세32,25).


야곱이 천막에 머물러 살게 된 이유는 아버지가 형 에사오 만을 편애하자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만이라도 받고 싶어서 집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이사악은 왜 에사오만을 편애했을까? 창세기 25,28절에서는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오를 사랑하였고”라고 전해준다. 에사오를 향한 이사악의 편애 이유른 단순히 사냥 고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사실 이사악과 에사오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 이사악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갈등을 피하는 인물인 반면, 에사오는 적극적이고 거칠며 피와 살상을 즐기는 인물이다. 사실 이사악은 주변 부족들과의 갈등을 피하려고 자신의 우물임에도 불구하고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볼 수 있다(창세 26,15-22 참조).


이사악과 비슷한 기질, 삶의 양식을 보이는 이는 야곱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사악은 에사오를 통해서 자기 안에서 개발되지 않은 야성의 세계를 에사오에게 투영하면서 대리만족을 누리고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⑥ 부부관계


이사악과 리브가가 서로 편애하는 자식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는 부부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 리브가는 이사악과 결혼하려고 단신으로 고향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찾아온 여인이었다. 하지만 이사악과 리브가의 결혼생활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항구한 사랑과는 달리 소원한 관계로 변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성격차이가 큰 문제였다. 리브가는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당찬 여인이었다. 신앙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결혼을 결정하고, 단신으로 팔레스타인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녀는 단호한 결단력과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보인 강한 여성이다. 반면, 이사악은 매사 소극적이고 유약한 남성이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유사하게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한 것처럼, 이사악도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다.(창세 26,1-7). 그 이유는 아버지 아브라함과 같이 리브가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곳 사람들이 리브가 때문에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이가 들면서 이사악은 에사오가 사냥해 오는 고기에 맛을 들였다고 전해주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은 부부 사이의 단절을 초래하였다. 또한 이사악이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예상하고 유언을 통한 상속 축복을 주려 했을 때, 아내 리브가와는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들 부부가 이미 오래전부터 관계가 소원해 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⑦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사악과 리브가가 두 아들을 사이에 두고 편애하는 바람에 경쟁관계에 있던 야곱과 에사오가 더 갈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이사악과 리브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가정 안에서 혹시 편애를 통해서 가정이 불화가 생기지는 않았나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형제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반목하는 진짜 이유가 부모의 차별된 사랑과 관심 때문이라면 부모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25장 29-34: 에사오가 맏아들 권리(장자권)를 팔다. 팥죽 사건.2)


어느날 야곱이 천막 안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을 때 형 에사오가 허기진 채 들어와 팥죽을 먹게 해 달라고 한다. 야곱은 “먼저 형의 맏아들 권리를 내게 파시오”(창세 25,32)라고 요구했고, 에사오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맹세까지 하면서 팥죽과 장자권을 바꾸게 된다.


에사오가 팥죽을 “저 붉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팥죽의 이름을 몰랐기 때문이다. 늘 밖으로 돌아다니며 살아가던 에사오에게 있어서 가사 요리와 같은 일들은 앙주 시시하고 사소한 일이었던 것이다.


씨족 사회에서 장자권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야곱은 늘 그것에 마음이 있었고, 마침 배고픈 에사오를 이용하여 장자권을 얻게 된다. “먼저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창세25,33)라는 말은 야곱이 얼마나 사전 준비를 잘 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①장자권을 팔아버리는 에사오


아버지의 사랑을 언제나 독차지하던 에사오는 야곱이 장자 상속권을 팔라고 하자“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람.”(창세 25,32)라고 말한다. 장자 상속권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배가 고프니 눈에 보이는 팥죽 한 그릇이 장자권보다 더 중요하다는 태도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을 하면서 살아가고, 현명한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세계에다 시선을 두고 살아간다. 에사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속적 권리를 더 선호했던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② 교활한 야곱으로 보이는데…


형이 배가 고프면 당연히 먹을 것을 주는 것이 동생의 의리이지만 야곱은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하지만 성서는 야곱의 교활함을 이야기는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에사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에사오는 맹세를 하고 자기의 맏아들 권리를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창세25,33)는 것처럼 야곱이 산 것이 아니라 에사오가 팔아 넘긴 것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장자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에사오에게 모든 책임을 넘기고 있다.


야곱이 장자권을 얻기는 했지만 맏아들의 위치가 바뀐 것은 아니다. 이사악의 사랑이 야곱을 향하게 된 것도 아니다.  




        ③팥죽 사건의 교훈


팥죽 사건을 통해서 에사오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준다.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 그래서 부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25장의 내용에서 에사의 행동을 보자. “먹게 해다오” – “맹세” – “먹고 마시다” – “일어나 나갔다” 성급하고 단순한 성격의 에사오를 보게 된다.


욕망이 생겨나면 즉시 그 욕망을 채워야 하는 사람이 있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에사오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3) 26,1-33: 이사악과 아비멜렉


기근이 들자 이사악은 그랄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리브가가 예뻐서 리브가 때문에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날 아비멜렉이 르브가가 아내임을 알고 이사악의 행동을 꾸짖고 안전을 보장받게 된다.


이사악은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많은 수확을 거두어 들였고 부자가 된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사악을 시기하여 우물을 두고 다투지만 이사악은 시비를 피하여 계속 양보를 한다. 사실 우물은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사악은 분쟁을 피하기 위해 양보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아비멜렉은 이사악이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사람임을 알고 서로 평화의 조약을 맺는다.




  4) 26,34-35: 에사오가 헷 여인을 아내로 맞다.


에사오는 또 부모의 뜻을 무시하고 이방 여인을 둘이나 아내로 맞아들인다. 에사오는 부모가 어떤 사람과 결혼하기를 원하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감각의 노예가 되버린 에사오는 듣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것인 이방인 자체를 거부해서가 아니다. 이방인과 결혼함으로써 계약 공동체의 순수성이 흐트러지고, 우상숭배에 빠질까 걱정해서이다.


에사오는 자기 본능대로 행동했다.




  5)27,1-46: 야곱이 에사오의 복을 가로채고 에사오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치다.


        ① 야곱이 에사오의 복을 가로채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된 이사악이, 에사오에게 사냥한 요리를 먹은 후 복을 빌어주겠다는 말을 엿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에사오로 변장을 시켜 아버지의 복을 받아내게 한다.


리브가는 에사오의 옷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을 꺼내 야곱에게 입히고,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야곱에 들려 준다. 눈이 잘 보이지 않던 이사악은 목소리는 야곱이지만 변장한 겉 모습은 에사오였기에 야곱이 들고 온 음식을 먹고 야곱에게 복을 빌어준다.


이사악은 에사오를 자기 아들로 간주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자기 아들로 간주한다. 성서 원문을 보면 에사오는 “그의 아들”(이사악의 아들)로 불려지고(창세27,5), 야곱은 “그녀의 아들”(리브가의 아들)로 불려진다.(창세27,6). 그리고 이사악과 리브가는 자기가 편애하는 자식에게 “나의 아들아!”라고 부른다


(창세 27,1: 이사악이 큰 아들 에사오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창세 27,8: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사악이 에사오에게 빌어주는 축복은 문제가 된다. 축복을 주겠으니 별미를 만들어 오라는 것도 순수하지 못한 것이고, 축복의 대상이 에사오 한 사람 뿐이었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물론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 음식을 먹는 것은 고대 근동의 관습이었다. 고대 근동에서는 축복을 빌어주기 전에 축복을 내려줄 자와 축복을 받을자가 같이 음식을 나누면서 거룩한 일치를 형성하였다. 축복을 내리기 전에 음식을 먹는 이유는 첫째, 음식이 몸에 생기를 주듯이 축복은 축복받는 이에게 생명력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둘째, 축복을 내리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생기를 충만히 지닌 뒤 축복받은 자에게 생명력을 빌어주기 위함이다.


좌우지간 이사악의 축복은 문제가 된다. 어느 아버지라도 죽기 전에는 아들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마지막 유언과 축복을 준 다음에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사악은 그렇지 못했다. 또한 그 일이 있은 후 20년도 더 넘게 산다.




        ②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천막. 리브가는 이사악의 계획을 듣게 된다. 리브가는 남편이 유다 규범을 무시한 채 자기가 편애하는 장남 한 사람만을 축복해 주려는 사실을 엿듣고는 결단을 내린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야곱이 축복을 받게 만든다.




먼저, 에사오가 사냥감을 잡아와 요리한 것처럼 염소고기를 요리한다.


둘째, 이사악이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냄새에 예민하기에, 야곱에게 에사오의 냄새가 나도록 에사오의 옷을 꺼내 입힌다.


셋째, 야곱의 매끄러운 살결을 가리기 위해 염소 새끼의 가죽을 야곱의 손과 매끈한 목 둘레에 입혔다.


그래서 이사악은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오의 손이로구나!”(창세27,22)하였던 것이다. 




        ③리브가 행위에 대한 평가


큰 아들의 축복을 작은 아들에게 전해주는 리브가. 그런데 리브가의 책략은 단순히 야곱을 향한 편애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임신 기간동안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마음에 품고 지난 20년을 살아왔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그런데 이 사실을 이사악은 모르고 있었다. 만일 알고 있었다면 에사오를 축복하려 한 그의 행위는 하느님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하느님의 뜻을 멸시한 중대 범죄가 될 것이다.


리브가는 하느님 계시가 언제 완성될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에사오를 축복해 주려하자 자기 스스로 하느님의 계시를 완성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스스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신탁이 완성되도록 속임수를 쓴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리브가를 남편을 속인 여자로 보기 보다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결단력 있게 행동한 여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눈먼 남편을 속이고 작은 아들에게 속임수를 쓰도록 한 리브가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기보다 자기 손으로 그 계획을 성취시키려고 한 것도 변명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아들을 위해 저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내 아들아, 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창세 27,13).


리브가는 아브라함이 시련을 통해서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처럼, 시련을 통해 믿음의 어머니가 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시험에  순종하였다면 리브가는 임신했을 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계시에 순종한 것이다.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되기에 리브가는 훗날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된다.


또한 어머니 리브가는 두 아들의 품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지도자가 될 자질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방인 여인과 결혼한 에사오가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존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머니 리브가는 에사오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에사오의 그릇된 행동을 미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리브가를 비난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을 위해 결단을 내린 여인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④에사오가 잃어버린 복


우리는 이사악의 말에서 충격을 받게 된다. 야곱에게 복을 빌어준 이사악은 에사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야, 나는 그를 너의 지배자로 세웠고, 그의 모든 형제들을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술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느냐?”


이사악은 야곱을 “그”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만을 그가 에사오였다면 에사오에게 모든 것을 주었을 것이다. 동생 야곱을 에사오의 종으로, 에사오를 야곱의 지배자로…, 부모가 자식에게 빌어주는 축복인데 너무하지 않은가?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늙은 아버지의 축복은 효력을 지니는 동시에 철회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에사오는 목놓아 울었다. 그런데 바꿔서 생각해 볼 것은 그 복이 다른 사람도 아닌 동생한테 갔다는 것이다. 동생에게로 간 복을 그렇게 억울해 하기 보다는 오히려 축복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세종에게 왕위를 돌아가게 하기 위해 자신의 미친 짓을 하여 세자 자리를 버린 양녕대군도 있지 않은가?




        ⑤야곱이 에사오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다.


에사오는 야곱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야곱을 죽여버리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때 리브가는 에사오의 말을 전해듣고 야곱을 친정 오빠가 있는 하란으로 보낸다. 리브가는 야곱을 자기 옆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리브가는 남편 이사악에게 구박받고, 아들 에사오에게 구박받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들과 함께 살면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사라가 죽었을 때는 아브라함이 애도하고 슬픔에 잠겼으나 이사악은 애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성서에서는 리브가의 죽음을 전해주지 않고 있다. 그렇게 믿음의 여인 리브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⑥ 함께 생각해 봅시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받아 낸 야곱의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남편을 속인 리브가의 행위를 나는 어떻게 볼 것인가?




오늘은 요기까쥐…


이 글은 카테고리: 구약성경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