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시간에 야곱이 고향을 향해 떠날 결심을 하고, 아내들과 상의를 한 후에 라반이 없는 틈을 타서 떠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라반과 계약을 맺고 길을 떠난 야곱은 이제 형 에사오를 만나야 되는데…, 에사오가 야곱을 받아 줄까요? 내가 에사오라면 야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② 도망가는 야곱 일행과 추격하는 라반일행: 수호신 사건과 화해의 계약
야곱은 라반이 자신의 귀향을 허락해 줄 리 없음을 알고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틈을 이용해 고향으로 떠난다. 그런데 이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이 섬기는 수호신들을 훔쳐냈다. 이것은 집안에 세워두는 조그만 우상들로서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집안 재산의 상속자가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라헬이 우상숭배자이기에 이것을 훔친 것을 결코 아니다. 우상숭배자라면 겁도 없이 자기가 섬기는 신을 엉덩이로 깔아뭉갤 수 있겠는가? 또한 라헬이 우상숭배자 였다면, 그래서 축복을 받기 위해 수호신들을 훔쳤다면 그 사실을 야곱에게 미리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추격해 온 장인에게 가족 중에서 누가 장인의 수호신을 훔쳤으면 죽여도 좋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라헬이 수호신을 훔친 이유는 복수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20년 전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몹쓸 짓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된 날 아버지의 음모로 신랑을 언니에게 빼앗기면서 받았던 굴욕감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도 아닌 언니와 함께 나누면서 갖게 된 상처도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수호신들을 훔친 것이다.
한편, 라반은 야곱 일행이 떠났다는 것과 게다가 수호신까지 훔쳐간 것을 알자 화가 나서 야곱을 잡으면 그를 죽여 버리고 야곱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버리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 개입하시어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야곱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창세31,24)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라반은 자기 집의 수호신들만이라도 찾으려고 한다.
야곱을 만난 라반은 전문 사기꾼답게 현란한 말솜씨를 자랑한다. “왜 나에게 알리지 않았나? 그랬다면 내가 손북과 비파로 노래 부르며 기쁘게 자네를 떠나보내지 않았겠나?”(창세31,27)
가끔은 라반이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기에.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도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반은 이제 야곱을 비난한다.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게 해주지도 않았는가? 자네가 한 짓은 어리석기만 하네.”(창세31,28) 이 비난은 함께 온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사면서 동시에 야곱의 파렴치한 모습을 고발하기 위해서이다. 라반은 야곱을 정말로 야박하고 몰인정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 “딸들”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야곱이 마치 라반의 딸들을 강제로 데려가는 것처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딸까지도 이용하는 라반의 입에서 딸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라반. 참으로 나쁜 사람이다.
라반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호신을 찾는다. 야곱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제 짐 속에 장인어른의 것이 있는지, 우리 친족들이 보는 앞에서 찾아내어 가져가십시오.”(창세31,32)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까지 말한다. 물론 라헬이 그랬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헬은 그 수호신들을 가져다 낙타 안장 속에 넣고는 그 위에 앉았다. 라반이 라헬 앞에 서자 지금 월경중이어서 낙타에서 내리지 못한다고 둘러댄다. 당대 사회는 월경중의 여인을 부정하다 하여 신상에 가까지 가지 못하게 하였다. 라반은 라헬이 설마 월경 중에 신상을 가까이 했을 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로써 라헬은 전문사기꾼에게 멋지게 한방 먹이게 된다. 라헬이 정말 월경 중이었다면 그녀는 아버지의 수호신들을 최대한도로 모독한 것이다. 레위법에 따르면(레위15,19-27) 생리중인 여인은 물론이요, 그 여인이 걸터앉았던 자리도 부정하며, 그 여인을 만났던 사람도 부정했다. 그렇다면 라반의 수호신들은 라헬의 생리로 불결해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리중인 여성의 엉덩이에 깔린 신이라면 도대체 어떤 신일까? 우리는 그런 신을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반이 수호신을 찾지 못하자 이제 야곱이 라반에게 화를 낸다. 같이 온 사람들에게 둘 사이의 시비를 가려 줄 것을 청하면서 항변한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악착스레 쫓아오셨습니까? 제 물건을 샅샅이 뒤지셨는데, 장인어른 집안의 물건 가운데 무엇이라도 찾아내셨습니까? 여기 저의 친족과 장인어른의 친족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내놓으십시오. 그들이 우리 사이의 시비를 가리게 합시다.”(창세31,36-37)
야곱은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이들을 따지자고 말한다. 율법에 따르면(탈출기 22,12; 아모3,12) 야수에게 찢긴 짐승의 남은 조각을 가져온 목자는 그 손실을 보상할 책임이 없었다. 하지만 라반은 그 책임마저도 야곱에게 물렸고, 도둑맞은 것들도 모두 야곱에게 물렸다. 하지만 야곱은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십 사년을 결혼하기 위해서 일했고, 육년은 품삯을 얻으려고 일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라반은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기 했다. 야곱은 “제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두려우신 분께서 제 편이 되어 주지 않으셨다면, 장인 어른께서는 저를 틀림없이 빈손으로 보내셨을 것입니다.”1)(창세31,42)라고 말한다.
같이 야곱을 쫓아온 사람들은 라반이 나쁜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라반이 너무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눈총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전문 사기꾼인 라반은 그것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체면을 살리려고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이 여자들은 내 딸들이고 이 아이들은 내 손자들이요, 이 가축 떼도 내 가축 떼일세. 자네에게 보이는 것 모두가 내 것이네. 그렇지만 오늘에 와서 내가 여기 있는 내 딸들이나 그 애들이 낳은 아이들을 어찌하겠는가?”(창세31,43)
라반의 뻔뻔함은 극에 달한 듯 보인다. 라반은 이제 계약을 맺자고 한다. 즉 야곱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세력을 키워서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한다. “내가 이 돌무더기를 넘어 자네 쪽으로 건너가지 않고, 자네가 나쁜 뜻을 품고 이 돌무더기와 이 기념 기둥을 넘어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이 돌무더기가 증인이고 이 기념 기둥이 증인일세.”(창세 32,52)
하긴 그렇게 긴 세월을 부려먹었으니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반은 고대 계약의 관습에 따라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 세운다. 또한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되는데 공동 식사는 일반적으로 계약 당사자들 사이의 우정 곧 연대성을 굳히는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일종의 운명 공동체를 의미하며, 계약은 이 공동체에 법적이며 강제적인 효력을 부여한다. 그리고 라반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교활함을 드러낸다. “자네가 내 딸들을 구박하거나 내 딸들을 두고 다른 아내들을 맞아들일 경우, 우리 곁에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의 증인이심을 명심하게.”(창세32,50) 지나가던 개도 안 웃을 말을 라반은 거침없이 해 대고 있다.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던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는 라반. 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라반과 야곱 사이의 계약에서 화해의 원리를 배울 수 있다. 첫째로 나 자신을 존중하고 참된 나의 목소리를 내면서 상대방에게 이용당하기를 거부할 때 비로소 화해를 향한 걸음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이런 것이 어려웠고, 당신이 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느냐’라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외짝교우들이 비신자 남편이나 아내에게 그렇게 끌려간다.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그래? 나는 성당 안다녀도 그 정도는 해. 당신 그렇게 하려면 성당 다니지 마.”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만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한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만이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어려운 것이다). 아니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화해와 용서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화해라는 것은 반드시 잘못한 편에서 자기 허물을 인정하여 용서를 청하고 피해를 본 쪽에서 그 청을 받아들일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반은 야곱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며, 야곱 또한 라반을 용서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둘은 함께 살아갈 공존의 길을 찾아 화해하였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먼저 용서를 하고, 용서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더 멀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먼저 화해하는 것이다. 용서를 할 수 없다 하더라도 화해할 수는 있다. 그런 다음에 노력을 통하여 용서와 치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쉽지는 않겠지만).
③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가 야곱이라면 라반을 어떻게 할까요? 그와 화해 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내 아내의 아버지요, 아이들의 할아버지로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2. 라반과 같은 사람이 변화가 될까요? 20여 년간 야곱과 살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을 통해 라반이 부를 쌓았는데 라반은 물질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11)32,1-33,17: 에사오와 만나는 야곱, 화해와 용서
라반으로부터 벗어난 야곱은 이제 고향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편안한 것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고향의 소식을 들은 적도 없었고, 에사오가 어떻게 자신을 대할지도 미지수였다. 또한 어머니는 그동안 아무 소식도 전해주지 않았다. 불안한 야곱은 사람들을 먼저 보내 에사오를 달래려고 한다.
① 에사오를 만날 준비를 하는 야곱
야곱은 형 에사오에게 먼저 심부름꾼들을 보낸다. 그리고 이렇게 지시한다. “나리의 종인 야곱이 이렇게 아룁니다. ‘저는 라반 곁에서 나그네살이 하며 이제까지 그곳에 머물러있었습니다.”(창세32,5) 야곱은 에사오에게 자신을 종이라고 고백한다. 쌍둥이 동생이 형을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야곱은 형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다. 언제나 형을 이기려고 했고(뱃속에서부터), 장자권까지 빼앗은 그가 아닌가? 하지만 지금 야곱은 에사오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자신을 그렇게 낮추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20년 전 아버지로부터 “네 동기들이 네 앞에 엎드리리라”(창세 27,29)라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에사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 이다. 그리고 에사오가 원한다면 아버지 유산을 에사오에게 모두 다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종은 주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부름꾼들이 돌아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린다. “그분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나리를 만나러 오십니다.”(창세32,7) 20년이 지났어도 에사오의 한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군대를 끌고 오는 것이다.
그런데 에사오 편에서는 야곱이 “장자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술수를 쓰는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했을 수도 있다. 20년 전에 그렇게 도망가 버린 동생 야곱, 그런데 지금 앞에 나타나려 하는데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야곱의 마음을 알게 된다.
야곱은 몹시 놀라서 자기 일행과 무리를 둘로 나누었다. 하느님께서 야곱과 함께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지만 현실로 닥친 어려움 앞에서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을 생각해 낸다.“에사오가 한 무리에게 달려들어 치더라도, 나머지 한 무리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창세32,9)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도망칠 곳도 없다. 왜냐하면 앞에는 에사오가 있고, 뒤에는 라반과 계약을 맺어 돌무덤을 넘어서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제 야곱은 갈 곳이 없다.
야곱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 하느님만이 자신을 살려 주실 수 있기에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② 야곱의 기도(창세 32,10-13)
야곱은 “저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즉 하느님께서 야곱의 집안과 계약 관계에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 어려움에 처한 자신을 돌봐주어야 한다는 우회적인 청원인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기도 내용들은 하느님의 약속과 돌보심을 상시시키고 있다.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당신 종에게 베푸신 그 모든 자애와 신의가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사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 요르단 강을 건넜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 기도에서 지금 자신이 돌아가고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자신을 어떻게 돌보아 주셨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다. 그러니 좀 살려달라는 탄원기도인 것이다. 만일 야곱이 에사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 분이 된다. 은근한 협박(?)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③ 선물로 에사오의 마음을 움직이는 야곱
야곱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또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그것은 바로 선물로 에사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선물을 먼저 보내어 형의 마음을 풀도록 해야지. 그런 다음 그를 보게 되면, 그가 나를 받아들일지도 모르지.”(창세32,21) 야곱은 엄청난 양의 가축들(580마리)2)을 골라내어 여러 번에 걸쳐서 에사오에게 보낸다. 에사오는 눈에 보이는 것과 감각적인 것에 집착하는 인간이라 야곱이 보낸 첫 번째 선물을 받으면 살의를 누그러뜨릴 것이고, 두 번째 선물을 받으면 화를 풀 것이고, 세 번째 선물을 받으면 고마운 마음까지도 들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야곱은 선물을 보내면서 종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에사오를 만나거든 꼭 이렇게 말하거라. “이것들은 나리의 종 야곱의 것인데, 주인이신 에사오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야곱도 저희 뒤에 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종으로 표현하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예의를 차려 선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에사오를 대하고 있다. 여기서 선물(민하)의 단어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종속된 국가가 종주국에 세금처럼 바치는 공물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을 종이라고 칭하는 것은 상전과 가신의 주종관계에로 표현되는 것이다.
야곱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며, 자신을 에사오에게 종속시킴을 통해서 20년전 가로챈 그 축복을 다시 에사오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④ 기도하는 인간 야곱, 야뽁강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야곱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인간적인 방법도 끊임없이 시도한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주님께서 야곱의 방법을 원하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에사오의 마음을 풀어 놓으셨기에 에사오는 야곱을 헤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에집트를 탈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 서게 되자 하느님께서는 바다에 길을 내셔서 백성들을 이끄셨다.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신다면 안 되는 것이 없다. 안 되는 것은 내가 안 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약한 신앙은 하느님과 세상 일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게 만든다. 야곱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믿음이 약하면 겁을 내게 되어 있다.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헤아릴 길 없는 하느님의 충실함을 믿기에 기도한 뒤에는 하느님이 어떤 위험에서도 그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야곱은 살기 위해서 자신을 종으로 낮추고, 선물을 에사오에게 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형 에사오에 대한 속죄의 마음으로 선물을 보냈어야 마땅한 것이다.
이제 야곱은 요르단 강 동부 지류 중 하나인 야뽁강을 넘게 된다. 이 강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그의 운명에 대한 인간적 집착과 신앙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이다. 야곱의 모든 것이 이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향했다. 이제 야곱은 그의 삶이 하느님에 의해 계획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야곱은 홀로 고요히 머물고 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고 있을 때 낯선 남자와 씨름을 벌이게 된다.3) 이 씨름은 동이 트기까지 계속된 치열한 싸움이었고 이 씨름을 통해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신원으로 탄생하게 된다.4) 갑작스럽게 나타난 한 남자가 야곱의 허리를 휘감고 싸움을 걸었다. 야곱은 이 싸움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야곱의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기에 도망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을 변화시켜 성숙시키려고 야곱을 붙들고 계신 것이다. 하느님과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통해 야곱은 더 이상 지난날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그의 삶을 지배했던 속음수와 교활함, 모든 거짓말과 불경한 행위들을 버려야 한다는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야곱은 이 싸움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야 한다. 새로 나야 한다. 야곱은 피하지 않고 새벽까지 물고 늘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이 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5) 하느님께서 그만 놓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야곱은 놓지 않고 복을 빌어주기 전에는 놓지 않겠다고 말한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빌어 주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꿔 주신다.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을 야곱이 한 것이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이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만이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찰거머리 작전).
⑤야곱의 싸움
그런데 처음부터 야곱이 낯선 남자를 하느님의 천사로 인식했던 것은 아니다.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일까?
1. 그 남자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장자 상속권을 둘러싸고 야곱과 씨름했으며 내일이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형 에사오이다.
2. 그 남자는 야곱이 젊은 시절 내내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씨름하였던 아버지 이사악이다.
3. 그 남자는 야곱이 도외시하면서 억압했던 내면의 그림자들, 특별히 어머니 옆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랫동안 개발하기를 소홀히 했던 남성적 세계이다.
4. 그 남자는 야곱이 에사오가 내미는 복수의 칼날에 맞아 쓰러질 때 그를 맞이하러 올 죽음의 사신이다.
5. 그 남자는 야곱이 정말로 움켜쥐고 의지해야 될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내일이면 만나게 될 형 에사오에 대한 두려움. 그러면서 자신 안에 쌓여 있던 어두움들. 이런 것들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밤새 내면적 숙고를 거듭하는 가운데 동이 틀 때쯤에야 하느님을 향하게 된다. 씨름의 대상이 모든 존재의 근거요, 사물의 지평이신 하느님으로 바뀌면서 야곱은 비로소 정리된 마음, 통합된 자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야곱은 패배와 승리를 동시에 맛보게 된다. 그의 패배는 환도뼈가 어긋나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었기에 맛보는 것이다. 하지만 야곱은 매달린다. 집요하게 매달린 그는 승리를 얻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 그에게 복을 빌어준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야곱은 그렇게 하느님께 매달린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제 야곱은 이스라엘로 불릴 것이다.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보통 신분의 변화에서 주어진다. 다만 그 변화는 세속적 지위의 상등이 아니라 영적 변용에서 이루어진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불려지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불려지는 것은 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⑥ 에사오와의 화해(33,1-17)
야곱은 에사오가 장정 사백 명과 함께 오고 있는 것을 보자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아이들을 나누어 맡긴 다음, 두 여종과 그들의 아이들을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의 아들들을 그 뒤에, 그리고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세웠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라헬)과 가장 어린 아들이요 원래대로라면 장남인 요셉을 제일 뒤에 세웠다. 또한 라헬은 지금 또 임신 중이었다. 좌우지간 야곱은 라헬과 요셉을 편애하고 있었다. 두 여종의 아이들은 이것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훗날 야곱의 열 자식들이 요셉을 증오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넘기는데, 동생을 농예로 팔아버릴 만큼 미워한 증오심의 뿌리는 어쩌면 이상한 꿈들의 해석 보다는 이 사건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야곱은 에사오가 눈앞에 나타나자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한다. 이것은 완전한 굴복을 뜻하는 몸짓이다.
야곱은 놀라운 은총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심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사오에게 절을 한다. 야곱은 야뽁강 체험 이후로 더 이상 야곱이라 불리지 않아야 하는데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창세32,29) 계속 야곱이라고 부르고 있다. 창세기 33장 이후부터 50장까지 야곱이라는 이름은 45번 나오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단지 23번 나온다. 즉 그의 행동 양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으로(신앙인의 모습으로) 살다가도 어떤 때는 하느님과 아무 관계없는 인간의 의지와 집념만을 갖고 살아가는 야곱의 모습(비신앙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야곱의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한 번의 영적 체험이 단번에 나를 성숙된 인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꿔 놓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덕이라는 것은 일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 삶에 배어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야곱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변화되려 노력해야 한다. 세례를 받고 신앙적으로 성숙했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야곱처럼 그런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부자 청년도 그랬다.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조언을 구했다가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서는 시무룩해서 돌아간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는 나름대로 열심하고, 충실하고, 영생을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오라는 말씀을 듣고서는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망설이다가 다시 돌아서고 만다. 신앙인은 과정 중에 있는 것이지 완성된 존재는 아니다. 세례가 완성은 아니다. 시작일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성이라고 생각하고, 세례 받고 1-2년 후에는 냉담까지 하게 된다.
야곱 안에서 신앙인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⑦ 형제의 만남
에사오는 야곱에게 달려와 그를 껴안는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운다. 에사오는 “내 아우야!”라고 야곱을 부른다. 이것을 통해서 에사오는 이미 야곱을 용서한 것을 알 수 있고(에사오의 울음), 야곱은 형에게 미안함과 안도감과 감동을 느끼고 있는 것을(야곱의 울음) 알 수 있다. 또한 야곱의 눈물에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포함되어 있다. 에사오의 용서도 하느님의 은혜요, 라반에게서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의 은혜였기 때문이다.
에사오는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을 바라보며 누구냐고 묻는다. 야곱은 “하느님께서 이 당신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아이들입니다.”(창세33,5) 라고 대답한다. 야곱이 얼마나 신경 쓰면서 대답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축복이라는 말 대신에 은혜를 쓴다. 그 이유는 축복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에사오와 야곱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도적으로 두 아내와 두 첩들을 소개하지 않는다. 에사오는 분명 여자들에 대해서 물었다. 야곱은 부인들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20년 전 하란 땅으로 떠날 때 명목은 일가친지 여자에게 장가들기 위해서였다. 에사오는 그렇지 못했기에 잘못하면 에사오의 과거 상처를 건드릴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소개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선물들에 대해서 묻자 야곱은 “주인께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셨으면 해서 준비한 것입니다”라고 솔찍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에사오는 “내 아우야, 나에게도 많다”하면서 거절하지만 야곱은 간곡히 받아달라고 권하자 에사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여기서 선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베라카”는 사실 “축복”을 가리키는 단어다. 야곱은 에사오에게 축복을 제발 받아 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야곱이 에사오에게 베라카를 드리려 한 것은 마치 손해 배상을 하고, 화해를 시도하는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은 야곱은 이제 속임수로 가로챈 장자권의 축복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하는 것이다.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를 청하려면 그에게 손해를 끼친 것 까지도 갚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⑧ 헤어지는 형제
형 에사오는 야곱에게 에돔 땅 세일로 함께 가서 살자고 말한다. 야곱을 진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곱은 딸린 식구들 때문에 에사오의 무장된 무리들과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말하면서 천천히 뒤따라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야곱은 세일로 가지 않고 수꼿으로 향한다.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돌아가라고 명을 한 곳은 에돔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막 화해한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 천천히 뒤따라가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야곱과 에사오가 더 이상의 갈등은 없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성격과 삶의 목표 때문에 또 갈등이 일어날 것이다. 또 야곱이 에사오를 따라 에돔으로 간다면 야곱은 에사오의 통제하에 놓일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나중에 따라가겠다고 말만 해놓고 자기 길을 간 것이다.
여기서 화해의 또 다른 속성을 배우게 된다. 즉 형제 사이의 화해가 반드시 서로 몸을 맞대고 함께 살아야 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영영에서 자기 길을 걸어갈 때 화해는 진정으로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화해는 갈등의 원인을 드러내 놓고 논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야곱과 에사오는 20년 전의 사건을 명시적으로 끄집어 내지 않으면서 서로를 안아주었다. 즉 갈등의 원인을 끄집어 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서로 다 알고 있으니 더 이상 파헤쳐서 아프게 하는 것 보다는 그냥 안아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상처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이해해 줌으로써 치유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특히 부부관계에서는 더더욱 필요한 것 같다.
3. 야곱 이야기를 마치면서
에사오와 야곱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간교하도고 반윤리적인 성품을 지닌 야곱이(그리고 이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어찌하여 도덕적으로 흠 없던 맏아들 에사오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고 선택된 민족이 되어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편애가 아니라 선택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랑밖에 모르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선택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과정에서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아무런 시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에사오를 피해 도망자가 되어야 했고,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오랫동안 착취를 당해야 했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하느님의 심판의 일격을 받아 절름발이가 되었고, 형 앞에서는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하는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 했다. 그렇게 선택받은 야곱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고, 참회를 통해 회개하여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이시면서 당신의 뜻을 펼쳐 나가신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당신의 구원역사를 펼치시고 싶어 하신다. 이제 나 또한 “예”하고 응답한다면 하느님의 약속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