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와 다말
형들의 질투로 노예로 팔려가게 된 요셉.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어떻게 이끄실 것인가? 그런데 갑자기 요셉 이야기가 아니라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나온다. 요셉 이야기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 38장은 장차 이스라엘에서 패권을 쥐기 될 유다 지파의 기원에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2. 유다와 다말(창세38,1-30)
1) 유다와 며느리 다말(창세38,1-12)
레아가 야곱에게 낳아준 아들 유다. 레아는 유다를 낳고서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리라”(창세29,35)하고 말하면서 아기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다. 그런 유다가 이제 어른이 되어 독립하여 떨어져 살게 된다.1) 유다는 그곳에서 ‘수아라는 이름을 지닌 가나안인’의 딸을 만나 혼인하였다. 그리고 에르, 오난, 셀라를 낳게 된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데는 대개 어머니가 주도권을 갖지만, 유다는 자신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준다. 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다의 맏아들 에르가 혼인을 했는데 그 아내의 이름은 다말2)이었다. 다말의 남편 에르는 하느님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하느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정상적이지 못한 죽음은 전통적으로 어떤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에게 “시동생의 책임을 다하여 네 형에게 자손을 일으켜 주어라“(창세38,8)라고 말한다. 이것을 순혼제(시형제 혼인)라고 한다.
2) 수혼제(시형제 혼인)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의 하나가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에 그 남은 과부는 일가 아닌 남과 결혼하지 못한다. 시동생이 그를 아내로 맞아 같이 살아서 시동생으로서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난 첫아들은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신명25,5-6)
그런데 모세의 이 법은 두 형제가 같은 집에 살고 있을 때에만 적용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편이 아들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율법에 의하여 과부가 된 형수와 결합할 의무가 있고, 그로 인하여 태어나는 아들을 죽은 형의 아들로 삼아야 한다는 율법이다. 이 율법은 가족의 유산을 보존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신명25,5-10 참조). 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았다.
3) 오난의 죽음과 다말
그런데 오난은 형에게 자손을 만들어주지 않으려고 정액을 바닥에 쏟아버리곤 하였다. 아마도 죽은 형 에르가 하느님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전해주는 것으로 보아 에르와 오난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형을 미워했으니 형에게 자손을 만들어주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결국 자신도 죽게 만든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형이 미운 것은 미운 것이고, 시동생이 형수를 위해서 해 주어야 할 것은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난은 그 미움 때문에 결국 자신을 죽게 만든다. 오난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행동을 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악하였기에 그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오난의 이기주의, 그리고 동시에 혼인에 대한 자연법과 신법을 거스른 오난의 죄를 단죄하신 것이다.
그렇게 두 아들을 잃은 유다는 막내 셀라까지 죽게 될까봐 다말을 친정으로 돌아가 살게 한다. “내 아들 셀라가 클 때까지 너는 친정에 돌아가 과부로 살고 있거라”(창세38,11)
이제 다말은 자신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많은 시간을 살게 된다. 다말과 유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먼저 유다는 아들들을 잘 키우지 못한 것 같다. 우애가 있게 키운 것도 아니고, 아이들을 바르게 키운 것 같지도 않다. 유다는 요셉을 이방인들에게 팔아넘긴 후 아버지 야곱이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그런 형제들과 함께 살기를 거부하였기에 이방인들에게 몸 붙여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가정환경과 교육, 가풍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뼈대 있는 집안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다말은 졸지에 과부가 되었고, 또 시동생마저 잡아먹은 여자가 되었다. 다말! 그녀의 이름의 뜻은 대추야자나무이다. 대추야자나무3)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사막에서는 이 열매가 중요한 식량이고 부(富)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아주 옛날부터 재배해왔으며 귀하게 여겨왔다. 유럽의 지중해 연안에서는 이 나무를 관상수로 심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주님수난 성지주일에(종려주일), 유대인이 장막절(帳幕節)을 기릴 때 이 나무의 잎을 사용했다.
그런데 다말은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고, 두 남편을 먼저 보내고 그리고 시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쌍둥이 아들을 낳았지만 그것 또한 구원 역사 안으로 들어왔다. 다말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죽은 남편의 후사를 마련해 주려고 노력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완성해 나아가신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대추야자나무를 뜻했는데, 유연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나뭇가지를 들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였다. 다말!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개척하였고, 그렇게 구원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내 삶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내 삶 또한 구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주님께서 나를 도구로 써 주실 것이다.
4) 다말의 계략
다말은 그렇게 유다에게 잊혀졌다. 다말을 보낼 때 유다는 그녀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유다의 아내가 죽게 되었는데 애도 기간이 끝나자 유다는 아둘람 사람인 친구 히라와 함께 딤나4)로 자기 양들의 털을 깎는 이들에게 올라갔다. 양을 키우는 사람들은 털 깎는 일을 하는 동안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야곱이 라반이 양털을 깎으며 축제를 벌릴 때 도망쳤던 것을 기억해보라). 그런데 이 정보를 입수한 다말은 입고 있던 과부 옷을 벗고 너울을 써서 몸을 가리고 딤나로 가는 길가에 있는 에나임 어귀에 나가 앉았다. 그녀는 셀라가 이미 다 컸는데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데려가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굴을 너울로 가린 것은 그녀의 얼굴을 시아버지인 유다가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여인들은 혼인 때라든가, 자기를 들어내고 싶지 않을 경우 외에는 얼굴을 가지리 않았다. 그 계획은 성공했고 유다는 다말을 보고 신전창녀라고 생각했다. 이 창녀들은 종교 축제에서 한 가지 일을 맡고 있었는데, 가나안인들은 신들의 생식력을 인간의 것에 따라 상상하였다. 따라서 신전 매음은 땅과 인간과 짐승의 번식력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겼다. 여기에서 다말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죽은 남편의 후사를 마련하겠다는 일념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유다는 그녀가 자신의 며느리인줄도 모르고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주기로 하고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다말은 유다에게 담보물을 원하는데 유다의 인장과 줄, 그리고 지팡이를 원했다. 계약을 체결할 때 찍는 인장은 손가락에 끼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줄로 매어 목에 거는 것을 가리킨다. 지팡이에도 그 주인의 특별한 표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이 셋은 후에 태어날 아기의 아버지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이 된다.
유다는 친구 편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내면서 담보물을 찾아오게 했으나 찾지 못한다. 그곳에 신전 창녀는 없었던 것이다. 유다는 “가질테면 가지라지. 우리야 창피만 당하지 않으면 되니까. 보다시피 내가 이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보냈는데, 자네가 그 여자를 찾지 못한 게 아닌가?”(창세38,23)
그렇게 유다는 신전창녀(다말)와의 관계를 잊어 버렸다. 하지만 다말은 잊지 않고 있었으니…,
5) 반전
유다는 다말을 잊었지만 다말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다말은 계략을 써서 남편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있었다. 그런데 유다가 다말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대의 며느리 다말이 창녀 노릇을 했다네. 더군다나 창녀질을 하다 임신까지 했다네.”(창세38,24) 이 말을 전해들은 유다는 분노하여 화형에 처하라고 말한다. “그를 끌어내어 화형에 처하여라.”(창세38,24) 그런데 화형은 드문 처형방식이기는 하였지만 고대 근동과 성서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레위21,9;예레29,22-23).
그런데 유다의 행동이 너무하지 않은가? 잊었던 며느리 다말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집안으로 받아들일 생각도 없지 않았는가? 그렇게 잊혀진 사람인데 화형을 시키라는 말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체면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모습을 유다의 모습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다말은 끌려나와 시아버지 유다에게 전갈을 보냈다. “저는 이 물건 임자의 아이를 배었습니다….이 인장과 줄과 지팡이가 누구 것인지 살펴 보십시오.”(창세38,25)
유다는 그것이 자기 것인지를 알아보고 이렇게 말한다. “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창세38,26)
이것은 유다 자신보다 다말이 의롭다는 것이다. 다말의 행동이 비록 모든 면에서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조의 후손이 끊기지 않도록 유다보다 더 정성과 힘을 쏟았다는 의미에서 유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말은 베레스와 제라를 낳게 된다.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았으며,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고, 베레스는……,”(마태1,2-3)
오늘은 요기까쥐….
요한신부: 무지 바쁘네유…대림 선물입니다요… [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