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이야기 5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당신 구원 역사를 펼치신다. 비록 형들이 요셉을 팔아 넘겼지만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당신 손길을 멈추지 않으신다. 기근이 들자 형들은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가게 되는데…,
6. 요셉과 요셉의 형들(창세42,1-38).
이집트에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왔지만 하느님께서 요셉을 이끄시어 이집트의 재상이 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동생을 팔아넘기는 죄를 통해서도 당신의 구원 손길을 뻗치셨다. 하느님께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더 나아가 팔아넘기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역사를 통해서도 당신의 구원 역사를 펼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1)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가다(창세42,1-5).
가나안에서 목축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던 요셉의 형제들은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대기근으로 인해 양과 염소 등 가축을 팔아 살 수 있는 양식이 가나안 땅에는 더 이상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의 가장인 야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로 곡식을 구하러 아들들을 보내게 된다.
“ 야곱은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어째서 서로 쳐다보고만 있느냐?”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이집트에는 곡식이 있다는구나. 그러니 그곳으로 내려가 곡식을 사 오너라. 그래야 우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다.”(창세42,1-2)
이제 야곱의 아들들은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내려가게 된다. 그런데 야곱은 벤야민은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야곱은 요셉의 아우 벤야민을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 그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창세42,4) 아마도 야곱은 라헬의 마지막 아들인 벤야민을 보면서 요셉과 라헬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야곱에게 있어서 라헬은 그의 모든 것 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야곱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사러 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이집트로 가게 된다.
2) 요셉이 형들을 알아보다(창세42,6-24).
동생을 팔아먹은 형들과 팔려간 동생의 만남. 내가 그런 처지에 있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때 요셉은 그 나라의 통치자였다. 그 나라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파는 이도 그였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은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그에게 절하였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양식을 사러 가나안 땅에서 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창세42,6-8)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형들은 감히 생각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만나기 위해서 노력을 한 것 같다. 노력을 했기 때문에 형들과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미드라쉬에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요셉은 가나안 땅에도 심한 기근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만간에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서 칙령을 발표했다. 이방인들이 식량을 사러 오는 경우는 다음의 세 가지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1. 누구든지 양식을 사러 올 때는 본인이 직접 와야지 종을 보내서는 안 된다.
2. 양식을 사러 올 때 한 사람이 짐승 한 마리만 끌고 와야 한다.
– 한꺼번에 많은 양식을 사 가지고 가서 되파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3. 만일 어떤 사람이 위 규정을 어기게 되면 사형에 처한다.
즉 각자 자기 식구들이 먹을 정도의 양식만 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이러한 규정을 발표하고, 모든 국경 초소에 보초를 세워, 누가 양식을 사러 국경에 들어오면 반드시 그 사람의 이름은 물론이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름까지도 기록해서 즉시 보고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① 형들 앞에선 요셉
요셉은 형들을 보자마자 즉시 알아본다. 무려 2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아버지와 형제들을 고센 땅으로 이주시켜 살도록 조치한 것이 7년 대 가뭄 중에서 아직 5년이 더 남아 있을 때였다. 그리니 요셉의 가족이 이집트 고센 땅에 산 것은 요셉이 이집트로 온 지 22년 만의 일이다. 노예생활 10년과 감옥생활 3년, 그리고 7년 동안의 풍년과 2년 동안의 가뭄 기간을 합쳐보면 22년의 시간이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2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알아 볼 수 있을까?
요셉은 국경 보초들이 올린 보고서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이 양식을 사러 왔다는 것을 알았고, 형들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셉은 어릴 적 꿈을 꾸었었다. 형제들의 볏단이 자신이 세운 볏단에 절하는 꿈을…, 그런데 지금 형제들이 그렇게 요셉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이다. 즉 꿈이 실현된 것이다. 아니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계시가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현실을 형들 위에 군림하기 위함이 아닌, 형들을 구원하기 위한 군림인 것이다.
요셉은 자신 앞에 엎드려 있는 형들을 바라보면서 옛날의 일들이 어제의 일들처럼 그렇게 떠올랐을 것이다. 자신이 꿈 얘기를 하면 시기 질투하던 형들, 자신에게 따듯한 말 한마디 안 건네던 형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찾아갔지만 오히려 옷을 벗기고 웅덩이에 던져 버렸던 일들.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자신이 준비해 간 음식을 태연히 먹던 형들. 그리고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② 용서의 시도 – 형제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기회 부여
하지만 요셉은 억울함과 복수의 감정보다는 형들에 대하여 꾼 꿈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때 요셉은 형들에 대하여 꾼 꿈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염탐꾼들이다. 너희는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자들이다.”(창세42,9)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이었다는 것을 요셉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신들 앞에 우뚝 서 있는 존재가 자신들이 팔아먹은 요셉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이 엎드려 있기에 요셉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보았더라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기억하는 요셉의 얼굴은 열일곱 어릴 때의 모습인데, 지금 요셉은 20년 넘게 이집트 문화에 적응해서 살았고, 더구나 지난 9년 동안은 이집트의 재상으로서 살아왔다.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옷을 입고 통역관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요셉, 턱수염도 기르지 않은 요셉을 형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요셉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 단련되어 성숙한 인간이 되어 형들 앞에 서 있는 것이기에, 예전에 그들이 생각하던 그런 철없던 꿈쟁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 앞에 선 요셉은 꿈쟁이가 아니라 꿈을 실현한 요셉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그들이 자신의 형제들임을 알아보았지만 남을 대하듯이 거칠게 말하면서 첩자가 아니냐며 형제들을 다그친다.
“너희는 염탐꾼들이다. 너희는 이 땅의 약한 곳을 살피러 온 자들이다.”(창세42,9)
요셉이 형제들을 염탐꾼(첩자)으로 모는 이유는 형제들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요셉은 이미 형제들을 용서했다. 맏아들에게 므나쎄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즉 형들의 잘못을 잊어버리고 형들과 공존할 수 있도록 형들을 용서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의 잘못을 잊어 버렸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다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 복수하거나 벌하시지 않고, 계속 돌보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잊는 것은 생물학적 행위이지만 용서 차원에서 잊는 것은 의지적 행위이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지만 즉시 형제들에게 “제가 요셉입니다. 형님들을 용서합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를 체험할 수 없으며, 설혹 자신의 죄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통회하지 않은 사람은 용서를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고백성사를 보기에 앞서 중요한 것이 바로 성찰과 통회인 것이다. 얼마나 깊이 성찰하고 통회하느냐에 따라 성사를 본 후 자신의 행동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형식적인 성사는 형식적인 삶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깊이 통회하는 사람은 깊은 용서를 체험할 것이요, 적게 통회하는 사람은 그만큼 적게 용서를 체험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형제가 잘못을 일곱 번 했다 하더라도 그때마다 용서를 청한다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즉 회개를 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는 그것이 선이 아니라 그에게 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남을 대하듯이 거칠게 대하였다.
“요셉은 형들을 보자 곧 알아보았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에게 매몰차게 말하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왔느냐?’”(창세기42,7)
요셉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말하는 이유는 바로 요셉이 형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하지만 형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통회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게 해야 한다.1) 그러므로 깨어진 가족 관계의 회복은 피해자인 요셉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요셉은 형들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려고 노력한다.
요셉은 두려움과 위협, 공포, 어려운 선택 등으로 형제들을 시험하고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형제들의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정화시켜 나간다. 요셉은 이집트 재상이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형제들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깨진 가족 관계를 회복하고자 치밀한 시도를 한다. 그러므로 요셉은 권력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해 나간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창조가 아닌 파괴로 치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권력을 창조적으로 사용한다면 공동체와 인류 사회에 막대한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챙기거나 기득권자들과 함께 유지에만 힘쓴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되지 못했을 것이다.2)
또한 요셉은 지난 22년 동안 가족을 떠나 있으면서 아버지와 막내 동생 벤야민에 대해서 궁금해 했을 것이다. 요셉은 벤야민을 데려 오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 했다. 열 명의 형제들이 식량을 사러 왔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식량을 사가겠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왜 벤야민은 데려오지 않은 것일까? 혹시나 동생 또한 미움을 당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가지는 않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을 첩자로 몰고 가는 것이다.
형제들은 자신들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아닙니다, 나리. 나리의 이 종들은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저희는 모두 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저희는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이 종들은 염탐꾼이 아닙니다.”(창세42,10-11)
첩자들은 은밀히 행동하지만 자신들은 무리를 지어서 다니지 않느냐고. 그리고 한 가족의 형제들이 무리를 지어서 첩자 노릇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못 믿게 만드는 말은 자신들 스스로를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직한 사람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요셉은 그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계속 그들을 염탐꾼(첩자)으로 몰고 간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나리의 이 종들은 본디 열두 형제입니다. 저희는 가나안 땅에 사는 어떤 한 사람의 아들들입니다. 막내는 지금 저희 아버지와 함께 있고, 다른 한 아우는 없어졌습니다.”(창세42,13)
이 말에서 요셉은 안도했을 것이다. 동생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 살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그들 스스로가 한 말일까? 아니면 요셉이 다그치니까 답변하면서 한 말일까? 요셉은 형제들을 다그쳤다. 그 내용은 형제들이 벤야민을 데려가기 위해서 아버지 야곱에게 하는 말에서 잘 들어난다.
“그 사람이 저희와 우리 가족에 대해 낱낱이 캐물으면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느냐?’, ‘너희에게 다른 형제가 또 있느냐?’ 하기에, 저희는 묻는 대로 대답했을 뿐입니다. 저희에게 아우를 데려오라고 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창세기43,7)
그런데 형제들은 요셉에게 자신들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 자체가 거짓이었다. 그들이 정직했다면 “동생 하나는 저희가 팔아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부정직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거짓말을 할까?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없앴지 않는가? 어쩌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난 후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③ 형제들을 시험하는 요셉
요셉은 무조건 용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화해가 있기 위해서는 참된 회심이 필요하고, 뉘우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요셉은 형들을 시험한다.
“너희를 이렇게 시험해 봐야겠다. 너희 막내아우가 이리로 오지 않으면, 내가 파라오의 생명을 걸고 말하건대, 너희는 결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어 아우를 데려오너라. 그동안 너희는 옥에 갇혀 있어라. 너희 말이 참말인지 시험해 봐야겠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내가 파라오의 생명을 걸고 말하건대, 너희는 정녕 염탐꾼들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창세기 42,15-17)
지금 요셉은 통역관을 두고 형제들과 말을 하고 있다. 요셉은 철저하게 이집트 사람 행세를 하고 있다. 그래서 파라오의 생명을 걸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벤야민을 데려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을 감옥에 가둔다. 3일의 시간은 형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닥치거나 불행이 닥치면 하느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아! 내가 그때 이런 잘못을 해서 지금 이런 고통을 겪게 되는구나.”하고 반성하고 뉘우친다. 요셉의 형제들에게 감옥에서의 3일은 그런 시간이 됐을 것이다. 요셉은 한명만 가서 동생을 데려오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으라고 말했다. 형제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누가 갈 것이며, 과연 아버지가 벤야민을 이집트로 가도록 허락할 것인지…, 열 명 중 하나만 돌아간다면 야곱은 큰 충격을 받아 쓰러질 것이다. 게다가 벤야민을 데려 간다면…,
또한 혼자 집안의 많은 식솔들이 먹을 정도의 식량을 운반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요셉이 있는 이집트 멤피스에서 야곱이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헤브론까지는 5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혼자 곡식을 운반하면 당연히 도둑들이 약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형제들은 삼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민만 계속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삼일 째 되는 날 요셉은 형들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정직한 사람들이라면, 너희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만 감옥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굶고 있는 너희 집 식구들을 위하여 곡식을 가져가거라.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창세기42,19-20)
아홉은 남고 한명만 다녀오라는 처음의 명령이 한명만 남고 아홉이 다녀오라는 말로 바뀐 상황에서 형제들은 또 고민을 하게 된다. 누가 남을 것인가? 자발적으로 낯선 나라의 감옥에 갇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죄를 인정했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 거야.”(창세기 42,21)
회개의 첫 번째 단계는 잘못의 인정에 있다. “동생 하나는 없어졌다”고 했던 그들이 이제 스스로 그 행위가 죄악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요셉의 시험은 결국 형제들의 양심을 일깨워 놓은 것이다.3)
그들은 요셉이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고 자기들끼리 자신들의 잘못을 이야기했다.
형제들의 이런 뉘우침에 “요셉은 그들 앞에서 물러 나와 울었다.”(창세기42,24) 이 눈물은 형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기뻐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혀들과 화해가 가능하게 된 것에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요셉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들을 껴안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화해의 첫걸음을 떼어 놓았기에 그는 혼자서 울었던 것이다.
④ 시메온을 묶어둔 요셉
요셉은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시메온을 묶었다. 왜 맏형인 르우벤을 묶어야지 둘째 시메온을 묶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1. 요셉은 르우벤이 감옥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기에 내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하고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너희는 말을 듣지 않더니,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창세기42,22) 요셉은 르우벤이 맏형으로서 자기를 살리려고 애썼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 형인 시메온을 인질로 택했다.
2. 시메온은 여동생 디나가 세켐 군주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하자 복수한다면서 세켐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인물이다.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이기에 20여 년 전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만일 유다와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 넘기자고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어쩌면 시메온의 손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3. 요셉은 벤야민을 보고 싶어서 형제들 중 하나를 붙든 것인데 벤야민이 라헬의 둘째 아들이기에 레아의 둘째 아들인 시메온을 잡아놓았다.
4. 형제들과 화해를 하기위해서는 시메온이 형제들 사이에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메온은 성격이 난폭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사람이다. 또한 형제들을 르우벤 보다도 더 몰고 다니기에 자칫 하다가는 형제들 마음에 시작된 화해의 물결이 사그러들 수 있다. 어쩌면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기 37,20)는 말도 시메온이 주도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 무리에서 떼어 놓기 위해 시메온을 감옥에 가둔 것이다. 보통 공동체 내에서 한 두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처럼, 형제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요셉에게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는 시메온이 형제들과 함께 있어서는 안 된다고 요셉은 생각했던 것이다.
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요셉은 형들 앞에서 시메온을 묶자 형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형제들은 요셉을 잔인한 사람, 냉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들 사이의 올바른 화해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끌어 가실 때, 거칠고 모진 방법을 쓰실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이지만 그 순간은 두려움의 하느님을 체험할 수밖에 없다.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⑤ 식량자루 속의 은화 사건
요셉은 형들의 식량자루 속에 그들이 식량 값으로 지불한 은화를 그대로 집어넣는다. 은화 20냥을 받고서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에게 동생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넣은 것인지, 아니면 형들의 정직함을 시험해 보기 위함인지 모르겠지만 요셉은 형들의 식량자루 속에 은화를 넣어 두었다. 요셉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나중에 형들이 식량 값을 다시 지불하려 했을 때 관리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관리인은 말하였다. “안심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느님, 여러분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그 곡식 자루에 보물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돈을 이미 받았습니다.”(창세기 43,23)
그렇다면 우리는 요셉이 형들의 식량 자루 속에 돈을 넣어 준 이유가 “애정”을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셉은 형들을 자신의 귀한 핏줄로 생각하여 순전한 호의로 돈을 돌려 준 것이다.
족이 굶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의 손길을 뻗치신 것을 알게 된 요셉이 당연하게 식량을 형제들에게 베풀었고, 이미 형제들을 향한 화해의 손길은 시작 됐다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형제들은 당황한다. 얼이 빠졌다. 요셉의 형제들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언급한다.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셨는가?”(창세기 42,28)
그들은 지금 공포에 떨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면서 하는 이 탄식은, 지금 이 돈이 관리인의 실수나, 누군가가 골탕을 먹이기 위해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악행을 벌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수가 좋아서 감옥에서 3일 고생한 보상을 했구나”하고 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느님 앞에서의 내 모습을 생각해야 만이 누군가와 화해가 가능하고,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 만일 요셉의 형제들이 하느님과 관계없이 뉘우쳤다면 그 화해는 인간적 차원에만 머무는 화해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인 요셉과 가해자인 형제들이 모두 하느님께 시선을 둘 때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⑥ 야곱의 아들들의 귀환과 보고, 그리고 야곱의 반응
요셉의 형제들은 가나안 집에 돌아오는 즉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아버지 야곱에게 말씀드린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모든 것을 보고하지는 않았다. 감옥에 3일 동안 갇혀 있던 이야기, 돌아오는 도중에 자루 하나에서 은전이 나온 이야기, 시메온이 이집트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질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한 벤야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그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요셉의 위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 막내아우를 나에게 데려오너라. 그러면 너희 말이 참되다는 것이 밝혀지고, 너희는 죽음을 면할 것이다.”(창세기 42,20)
오히려 그들이 이집트 땅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도록 약속한 것처럼 아버지에게 보고한다. 이렇게 야곱의 아들들이 좋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기 위함이고, 벤야민을 이집트로 데리고 가기 위함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야곱이 벤야민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해 줄 리가 없다.
그런데 거짓말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다. 어떤 상황을 숨기기 위해서는 다른 거짓말들을 해야 하는데,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야곱의 아들들이 그런 경우다. 처음에 야곱은 아들들이 말한 대로 믿었지만 아들들의 식량자루에서 식량 값으로 지불되어야 할 돈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아들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게서 자식들을 빼앗아 가는구나! 요셉이 없어졌고 시메온도 없어졌는데, 이제 벤야민마저 데려가려 하는구나.”(창세기 42,36)
야곱은 돈을 보고, 아들들이 시메온을 노예로 판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 같다. 그리고 벤야민은 안된다고 펄쩍 뛴다. 그런데 르우벤이 아버지를 설득하면서 다음과 같은 황당한 제안을 한다.
“제가 만일 벤야민을 아버지께 데려오지 않으면, 제 두 아들을 죽이셔도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 손에 맡겨 주십시오. 제가 아버지께 그 아이를 다시 데려오겠습니다.” (창세기42,37)
르우벤은 자신감 있게 말한 것일 수 있지만 아내나 아들들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그리고 르우벤의 아들들은 야곱의 손자들이 아닌가? 어떻게 아들이 안돌아온다고 손자들을 죽이겠는가? 책임지지 못할 말,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사람을 어느 누가 믿겠는가? 나 또한 그런 말을 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하겠다.
야곱은 어느 누구도 라헬이 낳아준 막내아들 벤야민을 대신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갈 수 없다. 그의 형은 죽고 그 아이만 홀로 남았는데, 그 아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슬퍼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창세기 42,38)
그런데 벤야민을 “내 아들”로 표현하고, “그의 형은 죽고 그 아이만 홀로 남았는데”라고 말하는 야곱을 바라보면서 형제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난 이집 아들 아닌게벼…” “또 시작이네…”
오늘은 요기까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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