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시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벤야민이 가야만이 야곱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가서 요셉을 만나고 시메온을 구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은 벤야민이 이집트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①이스라엘의 선택(식량은 떨어져가고 …,)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식량이 다 떨어지게 되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이집트로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엔 유다가 나선다.
“아버지께서 아우를 저희와 함께 보내시면, 내려가서 아버지께 양식을 사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를 보내시지 않으면, 저희는 내려가지 못합니다. ‘너희 아우와 함께 오지 않으면, 너희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고 그 사람이 말하였기 때문입니다.”(창세기 43,4-5)
그는 벤야민을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늙은 아버지 야곱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그 아이를 맡겠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 저에게 책임을 물으십시오. 제가 만일 그 아이를 아버지께 도로 데려와 아버지 앞에 세우지 않는다면, 제가 아버지에 대한 그 죄를 평생 동안 짊어지겠습니다. ”(창세기43,9)
르우벤이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로 했던 것과는 달리 유다는 자기 자신을 담보로 해서 청을 드린다. 만일 벤야민을 아버지께 다시 데려오지 못한다면 유다는 가족에게서 쫓겨나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더 이상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는 벌을 스스로 받겠다는 것이다.
또한 유다는 “저희가 이렇게 머뭇거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벌써 두 번은 다녀왔을 것입니다.”(창세기 43,10) 라고 말하자 야곱은 승낙을 하게 된다. 식량이 다 떨어져 가자 야곱은 벤야민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아들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정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라. 이 땅의 가장 좋은 토산물을 너희 포대에 담아 그 사람에게 선물로 가지고 내려가거라. 약간의 유향과 꿀, 향고무와 반일향, 향과와 편도를 가져가거라. 돈도 두 배로 가져가거라. 너희 곡식 자루 부리에 담겨 돌아왔던 돈도 도로 가져가거라. 그것은 아마도 무슨 착오였을 것이다. 너희 아우를 데리고 일어나 그 사람에게 다시 가거라.”(창세기 43,11-13)
즉, 야곱은 이런 보잘것없는 선물로라도 이집트 통치자의 마음을 달래보겠다는 것이다. 야곱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하란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던 야곱은 쌍둥이 형 에사오가 두려워서 미리 580 마리의 가축을 선물로 보냈었다. 형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동생을 환영하러 나오는데, 야곱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선물로 형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에사오의 마음을 움직이셨지 선물이 움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요셉의 마음은 벌써 움직였으니 이 선물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 아주 놀라운 말을 한다. 항시 움켜쥐고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요셉이 포기를 하게 된다.
“너희가 그 사람 앞에 섰을 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그 사람이 너희의 다른 형제와 벤야민을 보내 주기를 바란다.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창세기 43,14)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말은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둘째 되기가 싫어 먼저 세상에 나가려는 에사오의 발을 움켜쥐었고, 끝내는 눈먼 아버지 이사악을 속이면서 장자권의 축복을 받아냈고, 라헬을 아내로 맞기 위해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라반의 머슴으로 살아야 했던 요셉에게 포기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벤야민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다. 야곱은 그가 하느님과는 관계없이 인간적 의지와 집념만을 내세우면서 살아갈 때 사용되는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그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때 사용되는 이름이다. 즉 식솔들이 굶어 죽는 급박한 상황 앞에서 집념의 인간 야곱이 아니라 신앙의 인간 이스라엘의 면모를 보여 준 것이다. 즉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께 깊이 의탁한다는 뜻이다. 야곱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전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처음에는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꼭 움켜잡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나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 하느님 앞에 고개 숙이고 움켜진 손을 펴게 되는 것이다. “죄 없는 사람이 돌려 저 여인을 쳐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도 나이든 사람부터 차례로 움켜진 돌을 내려놓고 떠나갔던 것이다. 움켜 쥔 손을 펴야 한다.
② 형들과 두 번째 만나는 요셉
요셉은 형들이 반드시 다시 이집트로 내려올 것을 알고 있었다. 7년의 기근 중에서 2년이 지났기에 앞으로 5년간 기근이 더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굶어 죽지 않으려면 다시 이집트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셉의 형제들은 야곱이 지시한 대로 선물을 마련하고 돈도 갑절로 준비하여, 벤야민을 데리고 길을 떠나 이집트로 내려가 요셉 앞에 섰다. 요셉은 형들이 벤야민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오자 마음속으로 기뻤을 것이다. 22년 만에 하나 뿐인 동생을 만난 요셉! 그는 자기 집 관리인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가거라. 짐승을 잡고 상을 차려라. 이 사람들은 나와 함께 점심을 먹을 것이다.”(창세기43,16)
관리인은 요셉이 말한 대로 요셉의 형제들을 집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지난번 우리 곡식 자루에 담겨 돌아왔던 그 돈 때문에 우리를 데려가는 거야. 우리에게 달려들어 우리를 덮치고, 나귀와 함께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는 거야.”(창세기 43,18)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친교와 지위의 상승을 말한다. 종이 주인과 함께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그 종이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며,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면서, 더 나아가 이제는 종이 아니라 믿고서 함께 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모반이나 처형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상대편을 제거하기 위해 식사에 초대하고, 상대방을 안심시키고 기습으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경우도 있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모반을 도모하기도 한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준비해온 음식을 먹으면서 구덩이에 던져버린 요셉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이야기 했다. 그러므로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끼리의 식사가 아니기에 요셉의 형제들은 후자를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한 “나귀와 함께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는 거야.”라고 말을 하는데 사람과 물건을 실어 나르는 이 나귀는 당시 값진 동물로서, 기원전 1500년경 말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그래서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집 관리인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그들이 결코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님을, 자신들은 정직함을 설명한다.
“나리, 저희는 지난번에도 양식을 사러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하룻밤 묵을 곳에 이르러 곡식 자루를 열어 보니, 각자의 곡식 자루 부리에 저희 돈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렇게 도로 가져왔습니다. 저희는 또 양식을 살 돈도 따로 가져왔습니다. 누가 곡식 자루 속에 그 돈을 넣었는지 저희는 모릅니다.” (창세기 43,20-22)
관리인은 요셉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이들이 자신의 주인 요셉의 형제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말 할 수는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형제들을 안심시키는 일과 형제들을 대접하는 일 뿐이다. 그것을 주인으로부터 명령 받았기 때문이다.
“안심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하느님, 여러분 아버지의 하느님께서 그 곡식 자루에 보물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돈을 이미 받았습니다.”(창세기 43,23)
관리인은 “은전” 대신에 “보물”이라는 단어를 쓴다. 또 그것을 주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말한다. 이 말 안에서 요셉이 형제들과 화해를 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여러분의 하느님, 여러분 아버지의 하느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용서와 화해가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요셉의 형제들은 이 관리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관리인은 시메온을 그들에게 데려왔다. 아마도 그들은 시메온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놀랐을 것이다. 아버지 야곱이 벤야민을 데려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형제들은 이집트로 내려오지 못했었다. 그러기에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시메온이 살아 있음과, 건강한 모습으로 있음에 그들은 놀랐을 것이다.
또한 발 씻을 물을 주었다는 것은 그들은 인질이나, 심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그들을 맞이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그들의 나귀들에게도 먹이를 주었다는 것에서도 요셉의 형제들이 얼마나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서고 있다.
③ 형들과 동생 벤야민과 함께 식사하는 요셉
형제들은 정오에 요셉과 함께 식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준비해 온 선물을 정돈해 놓았다. 아버지 야곱이 준비시킨 선물로서 그 선물을 통해 요셉의 마음을 잡아 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야곱이 에사오에게 보낸 선물 때문에 에사오가 야곱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에사오에게 말씀하셔서 요셉을 받아들인 것처럼, 이 선물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저 인간적인 바람인 것뿐이다.
열 일곱 먹은 철부지 요셉이 자신의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 했던 것처럼 그 꿈이 현실화 되었다. 요셉이 집에 들어오자 요셉의 형들은 선물을 요셉 앞에 내놓고 땅에 엎드려 절하였다. 요셉은 아직도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지 않고 그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다.
“전에 너희가 말한 늙은 아버지는 잘 계시느냐? 아직도 살아 계시느냐?”(창세기 43,27)
그런데 이것은 아들로서 형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당연한 것이지만, 요셉의 형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아주 높으신 분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안부를 물어 준다는 것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요셉이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것을 보아 얼마나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가가 드러난다. 하지만 요셉의 마음은 괴로웠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형들과의 화해와 용서가 우선이기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너희가 말한 늙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요셉의 일생은 아버지 야곱에 대한 효성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형들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존중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스켐으로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러 간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니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은 그저 따를 뿐이다. 요셉은 헤브론에서 스켐까지 약 80킬로미터를 갔고, 그리고 스켐에서 도단까지 약 30킬로미터를 더 갔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아버지 말씀에 대한 순명이다. 그 순명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또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동생 벤야민에게 눈을 돌리게 만든다. 사실 요셉에게 있어서 벤야민의 얼굴은 낯설은 얼굴이다. 요셉이 팔려갔을 때는 벤야민이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22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요셉이 벤야민의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기에 자신과 얼굴이 닮았을 것이기에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형제들 가운데 지난번에 보지 못한 새로운 얼굴을 보면서 그가 벤야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셉은 자기 친어머니의 아들, 친동생 벤야민을 보며, “전에 너희가 나에게 말한 막내아우가 이 아이냐?” 하면서, “얘야, 하느님께서 너를 어여삐 여겨 주시기를 빈다.” 하고 말하였다. (창세기 43,29)
요셉이 벤야민을 향하여 “얘야!”라고 말하는 이유는 요셉과 벤야민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가 그런 것이 아니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동생을 동생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말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돌아가신 어머니 라헬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22년만에 만나는 사랑스런 동생 벤야민. 요셉은 동생 벤야민에 대한 애정이 솟구쳐 올라 울음이 나오려고 하니,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 “연민(애정)이 솟구쳐 오르다”로 번연된 히브리 동사 “카마르”는 하느님이 길을 잃고 헤매는 이스라엘에 대해 가졌던 안타까운 심정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아11,8)
가슴은 따뜻하고, 머리는 차가운 요셉. 하지만 요셉은 분열된 가족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한다. 요셉은 얼굴을 씻고 다시 나와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음식을 차려라.” 하고 명령하였다.
종들은 요셉에게 상을 따로 차려 올리고, 형제들과 이집트인들에게 각각 따로 상을 차려 주었다. 이집트인들은 히브리인들과 함께 식사할 수 없었고, 그것은 이집트인들에게는 역겨운 일이었다고 전해준다. 이집트인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기를 꺼려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들 나름대로의 민족적, 사회적 자긍심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바리사이들이 이방인과의 접촉을 꺼리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아마도 이들은 종교상의 의미를 가진 행동일 수도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식사의 차별은 분명히 고대 히브리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셉이 형들과 동생을 나이 순서로 앉힌 것이다. 사실 모르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 11명의 형제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힐 수 있는 확률은 약4천만분의 1이라고 한다. 이것을 어떤 사람은 벼락 맞은 사람이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다가 다시 벼락 맞을 확률과 같다고 한다. 즉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들을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 사실을 모르는 형제들은 당황하여 서로 얼굴만을 쳐다 볼 뿐이다. 아마 형제들은 속으로 “저 사람은 점쟁이 팬티를 입었나?” “귀신이다! 귀신이야!” 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④ 이어지는 요셉의 시험
요셉은 자기 식탁에서 각 사람의 몫을 나르게 하는데, 벤야민의 몫이 다른 모든 이들의 몫보다 다섯 배를 더 많이 주었다.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없지만 요셉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제 벤야민의 자루에 은전과 은잔이 들어갈 것이고, 그 때 형제들의 반응을 요셉은 볼 것이다. 22년 전 아버지에게 편애를 받던 요셉을 질투해 죽이려 하다가 결국 노예로 팔아 버린 형들이 그때와 다름없는 인격과 품성을 갖고 있다면 지금 특별대우를 받는 벤야민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사랑하는 동생을 만나 기쁘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형들의 태도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