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 3장 1-12 모세의 소명(1)

 

탈출기 강의 3


우리는 지난 시간에 모세의 탄생과 모세 부모님의 사랑, 그리고 모세 누이 미르얌의 지혜, 그것을 통해 모세가 파라오의 딸의 양자가 되는 극적인 장면을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집트인을 죽였다가 결국 동족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고, 이집트인을 죽인 것이 파라오에게 까지 알려져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미디안 땅으로 달아나게 되는 광경을 보았다.


그곳에서 모세는 이트로의 사위가 되고, 양을 치는 목자가 된다. 모세가 그렇게 평범한 목자로서 삶을 마감할 것인가?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부르시는데…,




3. 모세의 소명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렇게 왕자로서의 삶을 버리고 목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미디안족이 유목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명백히 증명되고 있다. 그들은 아카바로부터 사방으로 퍼져 서쪽으로는 시나이 반도로 침투해 들어가고(민수10,29), 북쪽으로는 모압(창세36,35;1역대1,46)과 암몬의 동쪽 수리아 사막 지대에 이르러(판관7,25;8,18-19), 마침내 요르단 계곡 동쪽(민수25,6-7;31,2-3;여호13,21)과 가나안(판관6,1-6;33,1)까지 침투했다.




1) 동포들을 사랑하는 모세


 이트로의 양을 치던 모세의 마음에는 동포들의 불행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장남이 태어났을 때, “내가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구나” 하면서 아기의 이름을 게르솜(이방인)이라고 지었다. 이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모세는 베두인족의 아내를 얻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그 족속에 속하는 자로 자처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에는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동포들을 구출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위하여 엘리에제르(하느님은 구원이시다)라고 이름을 지었다. 아마 둘째 아들이 태어나면서 모세는 “이제 동족을 노예살이에서 구하려는 생각은 접자”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모세는 자신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내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내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지, 주님께서 나를 도와서 내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그렇게 성숙시키신다. 또한 신앙적으로도 성숙이 된다.




        1. 신앙적  성숙


 모세의 장인 이트로1)는 종교적인 신심이 깊었다.  아브라함의 서자 미디안의 후손인 이트로는 모세에게 아브라함에 대한 전승과 단 한분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이집트 사람의 학문을 다 배운 모세가 거친 광야에 살면서 40년 동안 이집트의 우상들을 숭배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알게 되고, 성숙하고 능력 있는 목자로 바뀐 것은 모두 하느님의 섭리였다.




 미디안족과 40년을 사는 동안 모세는 많은 것이 변화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흔히 당신께서 선택하신 위대한 인물을 일반인들로부터 가장 멀리 격리시키고 “지극히 높은 분의 은밀한 처소”에 가장 가까운 장소에서 준비시키신다. 다윗은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킬 때, 엘리야는 길앗 산비탈에서,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목공소에서,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회심 후 1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수만리 떨어진 그의 고향 다르소에서 준비시키셨다.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베두인족의 생활 터전, 즉 “황폐하고 쓸쓸한 광야”에서 목자로 일할 때에 그를 장차 당신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그 백성의 생존 유지를 위해 필요한 지식까지도 완벽하게 터득한 인물로 준비시키신 것이다.




 모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그런데 모세는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2. 시나이 산(호렙 산)2)


40년이 지난어느 날 그가 가축 떼를 이끌고 광야에서 풀밭을 찾아 다니다가 하느님의 산으로 갔다. 이트로가 속한 종족이 이 산을 예로부터 거룩한 곳으로 여겨 왔기 때문에 “하느님의 산”이라고 불리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산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도 당신 자신을 계시하실 곳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산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2) 하느님께서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시다.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다.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라는 것은 결코 설명될 수 없다. 설명 할 수도 없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탈출기3,2-3).


 하느님께서는 불타는 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다.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라는 것은 결코 설명될 수 없다. 설명 할 수도 없다.


 구약성서에서 불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형태중의 하나이다.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에도 주님께서 불 속에 내려오셨다(탈출19,8;신명4,12). 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과 가르멜 산에서 대결할 때에도 주님은 불로 응답하셨다(1열왕18,24).


불꽃이 솟아오르지만 떨기가 타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랑의 불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빛과 열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하느님은 불 속에 계시므로 접근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불은 가까이에 있는 것을 태워 버린다. 따라서 불은 부정한 자가 접근하면 태워 버리는 처벌의 도구도 될 수 있다.




 모세는 무심코 산을 둘러보다가 불타는 떨기나무3)를 보게 된다. 가시나무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본 모세는 그 떨기나무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호기심으로 떨기나무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여서서 모세는 선조들의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계획을 알게 된다.




 불꽃이 이는데도 떨기가 타버리지 않는 현상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파라오의 탄압이라는 불길 속에서도 하느님과 함께라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또한 하느님은 설명할 수 없는 분임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이끄신다. 호기심으로.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이나 의무감으로 성당에 다니게 되고,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에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고, 하느님을 더욱 따르게 된다. 나도 내 열성으로 불을 태워 다른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하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1. 모세를 부르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곳에서 모세를 부르신다. 이상한 현상을 보고 그곳을 찾은 모세를, 즉 이상한 현상을 통해서 모세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곳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신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기3,4-5).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두 번 거듭하여 부르시는데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4) 즉 하느님께서 중요한 임무를 맡길 때에만 그 이름을 두 번 연거푸 부르시는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거듭하여 부르시는 것을 듣고 중대한 소명을 주시려는 뜻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세가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하면서 가까이 오자,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예의를 갖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어른들 앞에 가면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모자를 벗는 것이 예의인 것처럼 말이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예전에 우리 성당들도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편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신발을 벗으면서 한번은 생각하게 되고, 내가 지금 성당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기 때문이다.


 또한 광야를 걸어 다니려면 신발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신발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려 준다.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탈출기3,6).


모세를 부르고 있는 분이,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 분이 바로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조상들을 이끄시고, 조상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자손을 약속하신 분이 바로 지금 모세 앞에 계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탈출기3,6).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너무나 두려워 얼굴을 가린다. 나약하고 죄스런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신하가 왕 앞에 나아갔을 때 신하는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 시골 농부가 왕을 만나는 자리라면 어떨까? 그 이상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면 모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3) 모세가 소명을 받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 주신다.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9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10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기3,7-10)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고 지키시려는 것이다. 자손과 땅을 약속하신 하느님, 이집트에서 다시 데려 내오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지금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이집트에서 내 백성이 겪는 고통을 똑똑히 보았다. 그 울부짖음을 들었다. 그래서 이제 내 백성을 그 고통에서 끌어내려고 한다. 내가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네가 가서 해라.”


 모세는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자신도 한때는 파라오를 꿈꿀 수 있었던 신분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히브리인들을 도왔다. 그래서 이집트인까지도 죽였다. 그런데 그 결과 이렇게 망명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동족을 이집트에서 끌어 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모세가 이끌어 냈다면 사람들은 모세를 믿지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모세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세가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야지, 하느님께서 모세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모세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이제 하느님께서 사명으로 주고 계시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는 목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1. 구원자이신 하느님


구원하다의 명사형 “구원자”는 본디 가문의 한 사람이 곤경에 빠지거나 억울하게 죽었을 때 도와주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킨다. 누가 살해되었을 때에 “구원자”는 “피의 보복자”가 되고(민수35,17-27), 가장이 후손 없이 죽으면 그 부인과 혼잉ㄴ하여 그의 대를 이어줘야 했다(룻3,12;4,14). 그리고 경제적으로 곤란에 빠지거나 종살이를 하게 되면 그 빚을 갚거나 속량해 주어야 했다(레위25,23-28;47-49). 하느님께서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해내는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지시는 것이 된다.




구원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체인 인간 전체를 모든 차원에서 참다운 본연의 인격체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모든 악으로부터의 총체적 해방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모든 행위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분노도 자비의 표현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으로 데려 가기로 작정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그들의 상황과 문제를 당신 것으로 삼고(구원자가 되어) 해방의 목표를 세우신 것이다. 이제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5)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11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탈출기3.11)


모세가 하느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최상인 것 같다. 모세가 하려 하다가 못한 것인데,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모세는 “제가 감히…”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즉 모세는 겸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사실 모세가 망명자로서 미디안에서 40년 동안 큰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동족들도 “언제 당신을 우리의 심판관으로 삼았느냐?”고 대들던 상황이었는데, 과연 모세의 말을 따라 줄 것이며, 자신을 죽이려하던 파라오가 자신을 보면 그냥 놔 둘 것인가?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그럴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집트 왕국에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며,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체험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만한 기초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부여하시는 분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대충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 모상대로 지어내셨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다. 그리고 잘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불평등을 평등으로 바꾸는 것도 세상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노예살이를 자유로 바꾸는 것도 세상을 잘 다스리는 일이다. 나 자신의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는 것도 세상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들 하나씩 기억해 내면서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12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을 예배할 것이다.” (탈출기3,12)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는 모세에게 함께 있겠다고 말씀해 주신다. 아무리 두려운 곳이라도 아이는 아버지와 함께라면 겁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불가능해 보여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4)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처음 신앙에 관심을 가질 때, 나는 왜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2. 하느님을 만나고 소명을 부여받은 모세는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모세였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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