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성서의 통일성, 우주와 하느님에 대한 이해,

 

1. 성서 신학


성서는 인간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고, 신학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학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책들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 뜻을 이해하려 하고 그 언어를 해독하려 할 때,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려고 할 때 이 신학은 엄격한 의미에서 성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 신학은, 성서의 각 부분을 하나하나 이해하려고도 하고 좀더 의식적이고 좀더 정교한 종합 이론을 모색하여 계시의 발전에 이바지한 중대한 사건들이 어떤 것들이었는가를 연구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야훼스트 전승과 신명기계 전승의 역사관, 사제계 전승과 지혜서 전승의 내용, 공관 복음서의 고유한 관점, 바울로의 서간과 히브리서의 교리, 요한 복음서와 요한 묵시록의 묘사 등은, 각각 다른 사상 체계를 지닌 신학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광범위한 관점에서 성서 전반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도 있다. 성서 내의 다양한 신학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고 또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여 성서 전체가 깊은 통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해 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성서 신학이다.




1. 성서의 통일성-성서에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확신케 하고, 성서와 다른 저서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공동체의 믿음이다. 에녹의 격언집과 솔로몬의 시편과 같은 종교적으로 빼어난 가치를 지니고 정경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과 맞먹는 저서들이 성서에서 제외되고, 오히려 일반 대중의 슬기의 산물인 격언들이 정경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기준은 믿음 안에서밖에 찾아 볼 수 없다. 믿음만이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을 하나의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저서로 형성시킨다. 이 공동체의 믿음은 신앙인에게는 물론, 이 믿음에 동참하지 않는 자에게까지도 성서 신학을 전개하는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서의 통일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성서의 중심에 계시는 바로 그분이 이 통일성을 보장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유대인이 정경으로 받아들인 책들은 구약에 지나지 않는다.


구약은, 세상에 오셔서 예언과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고 준비하고 있다. 신약서들의 내용은 역사 안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동시에 종말에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구약은 준비되고 예고된 예수 그리스도이고, 신약은 오셨고 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진리로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에 대해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명확히 말씀하신 바 있다. 교부들도 이 근본적인 원칙에 대한 탐구를 그치지 않았고, 성서 안에서 이에 관한 가장 분명한 표현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다. 그 한 가지 예로서, 술로 변화된 물은 구약을 그리고 물에서 변화된 술은 신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성서 신학 사전의 단어 설명에서도, 복음에 의해 새롭게 나타난 것들은 구약 시대에 예고된 것이 성취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사상의 심오한 흐름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러한 원칙을 고수하게 되면 여러 가지 결과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성서 신학에서는 결혼에 관한 창세기의 가르침을 동정에 관한 예수님과 바울로의 가르침에서 분리시킬 수 없으며, 또 인간의 원형은 옛 아담이 아니고, 옛 아담 때문에 인간들이 서로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성서의 통일성은, 인간의 모든 생활을 한 곳에 집약시키고 또 인간의 역사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 통일성은 성서 전체에 스며 있는 생명력과 항상 활동하고 계시는 영의 현존에 기인한다. 성서 신학은 지구상의 한 민족이 그 역사의 여러 단계에서 받은 하느님의 말씀, 또 그 민족의 사상의 본질이 된 하느님의 말씀을 반영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말씀은 가르침의 내용이 되기 전에, 사건이고 부르심이다. 말씀이란 당신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찾아 오셨던 하느님, 끊임없이 찾아 오시는 하느님,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해 마지막 날에 찾아 오실 하느님이시다. 성서를 집필한 저자들은 하느님과 인간이 친밀히 결속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표현들을 사용하여 묘사한다. 계약, 선택, 하느님의 현존 등…. 어떻든 이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성서 저자들은 모두가 일종의 정신적 유대 관계를 맺게 되고, 같은 사고 방식을 갖게 되며, 같은 믿음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것을 가장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성서 저자들이 주변국가들의 문화와 종교가 제공하는 관습이나 의식과 같은 자료들에 어떻게 대처했느냐 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들이 이 자료들을 정화하여 받아들일 때, 항상 유일한 계시에 유익하도록 한다. 물론 각자가 사용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그 정신만은 항상 같다. 그래서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화라든가,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설화, 가나안 민족이 사용하던 벼락의 신화적 상징, 페르시아인들의 천사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와 불길한 괴물들을 등장시키는 민간 설화 등이 성서에서 인용될 때, 역사 속에서 구원 계획을 펴나가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입각하여 이것들은 다듬어지고 개조된다. 성서의 모든 종교적 전승과 사상은 이러한 일관된 정신으로 지배되고 있으며, 이 자체가 성서 신학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많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하느님의 말씀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2. 우주와 하느님에 대한 이해-성서의 통일성은 하느님처럼 단순하고 그분의 창조물처럼 광범위하다. 하느님만이 이 통일성을 단번에 파악하실 수 있으시다. 이 성서 신학 사전에 “신학”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하느님의 업적의 통일성과 하느님에 대한 종합적 파악을 우리는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합적인 관점을 분석적인 사전 형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성서의 통일성을 이해하려는 독자의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다만 추상적인 체계를 독자에게 부과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독자는, 한 항목에서 다른 항목으로 옮기면서 그 내용을 서로 비교해 보기도 하고, 분류해 보기도 하면서 성서의 믿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바란다.


더욱이 이러한 방법은 성서 자체가 본래부터 사용하던 방법이다.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나타난 다윗에 대하여 더 잘 알려면, 사무엘 상권과 하권, 역대기 상권과 하권을 차례로 읽어 그 관점을 비교해야 할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신비도 복음서를 복음서들이 지닌 서로 다른 관점에 유의하면서 읽어야만 그 깊이가 드러나게 된다. 이 성서 신학 사전도, 계약의 신비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백성, 왕국, 교회 등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 각종의 표현과, 아브라함, 모세, 다위, 엘리야, 세례자 요한, 베드로 또는 마리아 등의 대표적 인물과, 계약의 궤, 제단, 성전, 법률 등의 모든 제도와, 예언자, 사제, 사도 등 계약을 보존하려 노력한 사람들과, 세상, 그리스도의 적, 사탄, 괴물 등 계약의 실현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설명함으로써, 계약의 신비를 알아듣도록 도와  주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자는 그의 다양한 자세를 묘사하는 말들 속에 나타나는데, 즉 숭배, 찬미, 침묵, 무릎 꿇음, 감사, 축복 등 찾아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나타내는 반응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의 현존을 모든 장소와 모든 시대에 걸쳐서 식별해 내야 한다(이것이 바로 신학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역사의 주님이신 야훼의 품격은 그분의 모든 업적을 통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에 사용된 인간학적 개념들 중에는 한정된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상대적 가치밖에 지니지 못하며, 따라서 합리적 비판을 받아야 할 개념들이 있기 때문에 이들을 제자리로 환원시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예로 성서의 인간관은 영혼과 육신이라는 부분들로 분리할 수 있는 합성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영과 혼과 몸과 살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온전한 인간을 표현하면서 인격적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들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인간에 관한 소박한 연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2차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성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경탄해 마지 않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그 자체로서 분석하려 하지 않는다. “신학자로서의 성서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잇는 그런 인간에만 관심을 갖고”(“인간”의 해설 참조), 이러한 모상의 회복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고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서가 말하는 사건, 제도, 인물들을 기점으로 하여 역사의 신학이 기술됨을 보는데, 역사의 신학이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업적을 이루시는 길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셈족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인간의 행위로 채워지는 빈 틀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에 의하면 세기는 창조주 하느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세대의 연속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성서 문화권이 제공하는 이런 일반적인 표현을 인정한 연후에, 그 특수성에 유의하여 성서 고유의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접 국가들의 신화에서와는 달리, 시간이란 제신들의 원시적 시간이 인간의 세계에서 반복되는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행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축제일을 지내는 관습으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이 축제일은 창조와 주님의 날이라는 인간 역사의 시초와 종말, 양극 사이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역사 역시 년, 주, 일, 시에 의해 진행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 단위로 구성된 달력은 주님의 현존과,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에 대한 기억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반복이란 무미건조함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역사에는 그 목표가 이미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바빌로니아 두 도시의 투쟁과, 선과 악의 대결, 원수와의 싸움 등은 파국을 초래하는 전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성령께서 생활하시는 교회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보장하는 끝없는 평화의 서곡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업적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시고 인간에게 인간의 참된 모습을 가르쳐 주신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죄를 벌하실 때, 분노하시기도 하고, 미움의 정을 나타내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자신들이 받는 벌 가운데서도 교육하고 생명을 베풀려는 사랑을 인식할 줄 알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발견한 하느님의 덕행을 자신들의 생활안에서도 실현시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예로, 온순함, 겸손, 순명, 인내, 순박함, 자비, 그리고 또한 능력과 긍지 등의 모든 덕은, 하느님의 생명력에 찬 현존과 성령의 권능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의해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되며 효과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모든 존재 조건이 성서 신학에서도 완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기쁨과 고통, 위로와 슬픔, 평화적 승리와 박해, 삶과 죽음,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계획한 구원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상 만물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그리고 그 보람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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