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에 대해서(6절~11절 개관)

 

6-11절 개관


   6,8,9,10,11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규칙적으로 나온다.  하느님이 일인칭으로, 백성을 심판하는 주인으로 나온다.  그래서 크게 이것을 근거로 해서 ‘아모스 예언자가 말한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환시가 아모스의 환시와 말씀인 것처럼 이 말씀도 아모스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아모스의 것이라고 믿을 때에는 이것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인 형태가 대단히 불규칙하다. 예를 들면 6절과 7-8절을 보면 표현에 있어서 균형이 없는 것과 삭제의 작업이 필요로 한다.  학자에 따라서 삭제의 기준이 다양하다.  6-11절을 정형화 하는데는 문제가 있다.


   6-11절에는 4-5절과는 달리 시적인 구성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산문적인 구성요소도 있다.  그뿐 아니라 6절은 기근, 7절은 한재(비가 오지 않는 것), 9절은 추수가 망하는 것, 11절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멸망시키는 것, 10절에서는 페스트, 칼의 두개의 테마가 나온다.  그런데 7-8절은 제일 길지만 한재에 관한 것 하나만 나온다.  그래서 학자들은 단순히 환시를 근거로 해서 5개의 구성을 이룬것이라기 보다는 여러 개의 테마를 중심으로 해서 거기에 필요한 대로 첨가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의견은 6-11절은 아모스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6절 시작할 때 ‘그래서 나는’이라는 것은 아모스에서 다른 텍스트를 비교해 보면 많은 경우에 무엇을 첨가할 때 쓰는 문학적인 도구로 볼 수 있다.  미가 6,13; 예레 13,26; 에제11,43; 말라 2,5 참조, 그리고 다른 텍스트에서 쓰일 때에는 따라 오는 벌이 보통 나오는데 여기서는 야훼께서 하신 업적을 기억케 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런 여러 가지 징조를 보고 학자들은 6-11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여러 가지 의견을 내세운다.  그런데 쟝르로 따질 때에는 저자가 다른 텍스트에서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을 때에 또 그러한 구조적인 특징을 찾아 낼 수 있을 때 그것을 근거로 해서 쟝르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재앙에 관한 것이다.  이런 재앙을 이런 비슷한 형태로 이어가는 텍스트는 레위 21장; 신명 28장; 열왕 3,37-38에도 나온다.  물론 이런 텍스트들은 똑같은 것을 반영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에게 필요한 대로 신학적으로 덧붙이거나 설명한 것도 있다.  회개도 있고, 찬미도 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특징이 있는 골격을 볼 수가 있다.  그뿐 아니라 단죄의 일부는 출애굽때(열 가지 재앙)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11a는 특별히 어떤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비록 아모스 예언자가 하지않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시대에 아모스의 권위를 빌려서 심판을 하는 말을 만들때에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예레 14,12; 31,11; 에제 7,11을 보면 거기에는 기근, 칼, 페스트가 반복되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나타난다. 그래서 레위기 21장에 나온 재앙의 씨리즈와 아모스 예언서의 기근, 칼, 페스트와 한데 합해서 지금의 재앙의 택스트가 이루어 진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아모스가 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정한 시대에 여러 전승을 아모스의 권위를 빌려 자기의 순서를 강조하기 위해서 구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모스 4장, 레위 26장, 신명 28장, 1열왕 8장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을 얘기하겠다.  테마로 보아서 기근, 한재, 메뚜기, 추수의 실패, 페스트, 칼, 멸망 등이 있는데 아모스 4장에서와 같이 모든 텍스트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이 레위기이고 그 다음이 신명기, 그 다음이 열왕기 상권에는 조금 적다. 이것을 보면 아모스 4장은 적어도 6-11절까지 규칙적으로 구성을 해서 여러 가지 요소를 넣은 것은 일정한 청중에게 야훼께 돌아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서 많은 신학적 요소를 넣었다(부연했다)고 짐작을 할 수 있다.  레위기와는 달리 실제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강조를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설명이 붙은 것이다.


   4-5, 6-11절을 연결하면서 집성자가 시도했던 의미를 전체적으로 생각한다면 여기에서는 결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고집을 피운다든지, 야훼가 벌을 주는데도 마음이 완고해져서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을 얘기하기 보다는 다른 이웃에 대해서 야훼의 뜻대로 하지 않는 그것을 아모스는 생각하고 강조하면서 반복하지 않았는가?  또 한가지 특징은 회개와 재앙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연결했다고 해서 6-11절이 신명기 역사학자의 작품이라고 보는 데에는 이런 문제가 있다.  즉 소돔과 고모라 얘기를 현실적으로 듣는 청중에게 지적하고 이와같이 얘기할 때에는 신명기 역사학자의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재앙을 근거로 해서 표시하는 여러 장르의 하나로 생각을 하고 아모스는 그런 장르를 이용을 해서 당시 처해있는 현실을 생각을 해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알아들을 수 있는 상태를 가정을 하고 얘기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6-11절은 문학적인 형태로 보아서 아모스의 권위를 빌려서 덧붙인 것이다.  당시의 청중에게 비판과 동시에 위협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라는 표현은 다른 예언서에서는 이것이 어떤 위협을 도입하는데 쓰이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이 과거에 하신 일을 상기하는데 쓰인다는데 이상한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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